최근에 번역에 관심이 많다. 여러 번역관련 책들이나 학회의 풍문도 듣고 있고, 나름 -_-; 번역한 소설책도 5권이고 에드워드 사이드;;의 시론도 하나 번역했으니, 남들이 들으면 진짜 '번역가'인 줄 알겠다. 휴우...
게다가 6월에는 캐나다의 한국문학 작품 번역워크숍에도 참가해야 되서 이래저래, '번역'에 대한 나름의 입장이나 심미안(?)을 갖고 싶다.
이런 이야기를 폴드만의 '이론에 대한 저항'의 독중감에 쓰는 이유는, 역시 '좋은 번역'이란, 읽는사람의 목적에 따라 다르다는 것을 말하고 싶어서이다.
원래 폴드만은 알아먹을 수 없기로 유명한데 (글의 구조와 문장 자체 때문인 것 같다), 그의 글을 번역한다는 것은 번역하는 글의 대상독자를 명확히 설정하고 시작되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의 번역은 나에게는 꽤나 도움이 된다는 의미에서 '좋은 번역'이었다. 장경렬 선생의 의역과 대비되는 황성필 선생의 직역투와 많은 역주들은 영어 원문과 한국어 번역본을 대비하면서 읽는 독자에게는 도움이 되는 번역이다. 이 책만을 가지고 폴드만의 '이론에 대한 저항'을 읽어내려고 시도하는 독자라면, 두 팔을 걷고 말리고 싶은 심정이다. 그리고 설마 그런 사람이 있을까... 물론 원문만을 읽는다고 하더라도, 해독이 참 힘들다. 80년대 당대의 이론적 문맥을 어느정도 짚어내지 않고서는 따라가기도 힘들다.
이 책을 읽어내기 위해 필요한 2차문헌들로는 직접적으로는
가 있겠고, 번역하는 와중에 황성필 선생이 참고한 책으로는
가 있다.
내가 관련 문맥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됬던 글은
에서 Patricia Waugh의 "Introduction: criticism, theory, and anti-theory"이다. 특히 이 글에서 약술하고 있는 (문학) 이론에 대한 서구 지성계의 담론사를 토대로 해서만이 폴드만의 불친절한 글들의 맥락이 이해된다. 이 글에서 폴드만의 위 글이 직접적으로 언급되기도 한다. (A homeopatich art: 'theory' as the resistance to theory) 그 부분 번역을 게재해본다.
그럼에도 로티의 논의는‘이론’과‘문학 비평’의 관계사를 이해하기 시작하고 이를 정의하는 것의 근본적인 문제점들을 지적하고 있기 때문에 유용하다. 현재 간단히‘이론’이라고 표현하고 있는‘문학 이론’은 미학, 철학, 지성사, 인류학, 언어학 및 정신분석학이 신기하게 혼종되고 불안정하게 섞여서 발전되었으며,‘큰 그림’을 그리고자 하는 문학 비평가들의 욕망을 반영하는 것처럼 보였다. 분석적이고 과학적인 담론에 그 연원을 두기는 하지만,‘이론’은 형이상학적인 견해나 과학적인 적절함에 대한 추구와 이러한 장엄함을 자칭하는 것에 대한 회의적인 저항도 동시에 표출하였다. 로티의 논의보다 10여 년 앞서서 1982년 폴드만은‘이론에 대한 저항Resistance to Theory’라는 제목의 중요한 에세이를 발표한다. 여기서 그는 이 긴장을 인식하고 이론의 주요 목적은 이론을 정의하는 것의 불가능성에 대해 논의하고 이를 밝히는데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 에세이가 본래 현대 인문학에 관한 책에서 이론에 대한 정의의 장으로 현대 언어 학회에서 위촉받은 것이었다는 말로 글을 시작한다. 이론을 정의할 수 없다는 내용의 글을 투고하자 편집진은 이 에세이를 거부하였으며, 드만의 개념으로는‘문학 학자’대표자로서의 그들의 욕망은 이론 그 자체보다도 더‘이론적’임을 증명했다. 당연히, 아이러니하게도 결국 출간된 에세이가 자신의 게재 거부로 시작하여, 수사적인 격자구조(mise-en-abyme) 효과를 부여했다. 이는 이론의 정의불가능성에 대한 정의라는 에세이의 주제의 전조로서 기능한다. 크게 보아 이론은 개념적인 보편성의 체계에서 문학을 주해하고 평가하는 것에 대한 질문의 기초를 쌓기 위한 시도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논의가 시작되기 이전에 언제나 문학에 대한 선험적인 정의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염두에 둔다면, 이론을 정의하려는 시도 자체가 언제나 (논리적으로) 순환에 빠질 수밖에 없고, 괴델 투로 말하자면 항상 일반화된 체계의 바깥에 존재하는 가정에 기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심지어 신비평가들도 분명히 그들은 스스로 그렇지 않다고 생각했지만, 이론가라고 평가한다. 드만은 기본적으로 이론 없이는 어떠한 비평도 불가능하다고 주장하나, 이론은 철학과 융합되는 것에 저항하며 이는 이론의 핵심에는 필수적인 실용적인 순간에 대한 aporetic한 자각이 있기 때문이다. 이론은 따라서 궁극적으로는 실천의 양식이다. 문학 이론은 철학보다 더, 메타언어 즉 문학에 대한 체계적인 설명으로서의 불가능성을 자각했다. 왜냐하면 문법이나 논리보다 수사를 전경에 그려서, 결국 철학적 텍스트와 문학을 구분하는 말의 아이스테시스(aesthesis)적 조건을 공유하기 때문이다.
드만의 에세이는 로티의 우려가 기우에 불과하다는 것을 시사한다. 문학 이론은 시작부터 자신에 대한 저항을, 철학적으로 변해서 큰 그림과 서사시를 그리려는 것에 대해 스스로의 방어를 길러왔다. 드만이 이론에 대한 방어를 소쉬르 언어학적 설명을 토대로 여과하고 있지만, 또 그래서 탈구조주의자의 언어학적 전도의 억양을 주고 있지만, 이미 1962년에 앨리스데어 매킨타이어(Alisdair Macintyre)는 자연과학에 있어서의 이론과 인문학에 있어서의 이론의 중요한 차이를 지적하였다. 그 차이는 인간에 대해서 우리가 사고하는 방법 자체가, 우리가 사고하려고 노력하는 것의 일부라는 점이다. 우리가 누구인지에 대해 파악하려고 우리가 사용하는 개념들이 우리가 누구인지에 대한 부분이 된다. 인간은 개념을 사용해서 우리가 무엇인지를 밝히는데, 왜냐하면 개념을 사용하기 때문이다. 따라서‘이론’은 존재하고‘기술’할 행동 자체를 바꿀 수 있다. 여기에는 탈출할 수 없는 순환성과 미결정성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또한 문학 이론을 포함하는 인문학에서의 이론화의 끝없는 자기-검증의 가능성이 있다. 비록 우리가 자연에 대한 과학적 주장이‘덩어리’가 아니라‘텍스트’로 이루어졌다는 리차드 로티와 같은 신실용주의 철학자의 주장을 받아들인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과학적 이론과 문학 및 문화 이론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다.
인간 본성이나 인공물에 관한 이론은 자기반영적으로 인간 본성과 그 인공물을 형상을 만든다. 예를들어 후기 프로이드적인 세계에서‘무의식’의 존재를 가정하지 않고서 우리의 정신적 삶을 이해하는 것을 상상하기는 어렵다. 비록 우리가 그러한 전제를 명료히 하지 않는다고 해도, 이는 우리가 누구인지에 대해 사고하는 상태의 가정이다. 어떤 의미에서 자아에 대한 이론은 미래의 이론화의 형태를 제약하는 자아에 대한 실천으로 된다. 이는 문학을 쓰는 행위를 포함하는 모든 인간 실천에 적용된다.
하지만 이는 또한 분명히‘이론’이 그렇게 많은 적대적 반응을 유발한 이유가 되고 있다. 이론은 진정한‘존재’, 향자존성(being-for-oneself)에 관한 인간 욕망을 좌절시킨다. 우리는 우리가 누구인지에 대해서 절대로 파악할 수 없는데, 이는 우리가 항상 이미 우리가 누구이고 무엇인지 파악하기 위해 노력하는데 사용하는 이론의 산물의 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문학도 자신의 개념으로서 이해될 수 없고, 정신분석학, 철학, 언어학 등의 외부의 담론들의 개념으로 이미 구성되고 조직된다. 이론은 텍스트와 독자 사이에 외부적인 것을 간섭시켜 미학을 독특하게 구체화된 지식의 대안적 양식으로 개념적으로 재현불가능한 것을‘드러내는 것(showing forth)'으로 파악하는 낭만적 휴머니즘의 유산을 위협한다. 하지만 드만이 보여주듯이 간섭되는 외부적인 것 또한 미학적 개념들에 거스르고 동화된다. 문학 이론은 자신을 지나치고 과학 이론의 명확한 상태를 열망할 때 텍스트의 세부적인 구체성과의 모든 접촉을 잃고, 리처드 로티가 비난한 진정성이 없는 이론이 된다. 이론은 단순한 견해나 가설에 지나는 것이 아니고, 종종 분석적이지만 과학 이론에서는 필수적이라고 가정되는 것과 같은 층위의 정당화, 증명, 반박의 대상이 될 수 없으며 법칙의 정식화나 추론이나 시험의 대상도 될 수 없다. 로티의 나쁘거나 진정성이 없는 이론의 개념은 자립적 도그마로 퇴화하거나 칼 포퍼가‘유사과학적 주장’이라고 기술했던 것을 만드려고 할 것이다. 다시 말하여, 근거 없고 세계화된 선언으로 시험되고 반박될 수 없고 단지 종합하는 도구로 취급되는 것. 문학 이론 내부에서 마주치는 문제 중의 하나는 탈구조주의나 포스트모더니즘이나 페미니즘 이론에 대한 교과서적 버전의 교육학적 지름길이 체계적이거나 명확한 진실의 개념과 혼동되는 경향이었다. 이론은 도그마가 되고 공들이고 격렬한 논쟁이 아니라 단지 권위에 대한 복종이 되고 만다. 경직되고 선험적이며 설명적인 골격이 본래의 텍스트에 강요된다. 독서는 안정되고 예측 가능한 과학적 과정이 된다. 이론에 대한 저항 없이는, 그리고 텍스트에 대한 이론화에 대항하는 꼼꼼하고 조심스러운 독서가 없이는, 텍스트에 대해서 무슨 말을 할 것인지에 대해서 사전에 알게되는 지루한 느낌이 생긴다. 그리고 이 결과 독서 대신에 이미 쓰인 주장과 해석에 들어맞는 예증을 찾는 것으로 참여가 이루어진다. 이론의 방어자들은 이러한 실천이 이론을 대중화하는 과정이라고 혹평했고, 데리다, 푸코, 라깡 등등의‘대가’의 말들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 대가들이 기원이나 권위로 돌아가는 것의 개념을 이미 추방했다는 것을 생각해본다면, 또 다른 모순이 드러난다. 이론의 방어자들은 그들의 제자들에게 개별 이론과 문학 텍스트의 엄밀한 독서로 돌아가야 한다는 충고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된 것이다.
어쨌든, 관련 이야기는 이 정도 하기로 하고, 이 폴드만이 하고 싶은 말은, 문학이론에 대한 저항은 문학의 수사적 읽기에 대한 저항이라는 것이며, 문학텍스트를 포함 텍스트의 '텍스트적 읽기'는 반드시 문법적 읽기에 국한될 수 없는 잉여내지는 애매함이 있다는 것으로 정리되는 것 같다. 그리고 이론 자체 내에 이론에 대한 균열이 있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읽어내기 힘든 글이다. 폴드만 영 좋아질 것 같지는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