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나긴 혁명 - 독중감 1 생물학적 의미의 인식과 예술 창조과정의 인식의 차이
1961년에 영국에서 출간된 작품이, 한국에서 2007년에 번역 출간되었다. 45여년의 길이.
우선 첫번째 장인 '창조적 정신'을 읽는데, 윌리엄스는 예술의 '창조'와 '모방'에 관한 대립적인 견해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의 대립으로까지 거슬러올라간다)를 소개하다가 '우리 각자의 두뇌는 문자 그대로 그 나름의 세계를 창조해낸다'라는 영(J. Z. Young)이라는 생물학자의 견해를 소개한다.
물론 우리는 그 이후 마투라나 같은 급진적 구성주의적 생물학을 알기 때문에, 이러한 주장의 급진적이고 보다 '실험'에 의해 뒷받침된 논의들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여기에서 의문을 가져야 할 것은, 생물학적 인지와 예술/인간의 '창조'라는 것을 일차원적으로 비교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윌리엄스는 인간의 인지 행위 자체가 '창조적'이라고 규정한다.
"인간 두뇌의 진화와 특정한 문화에 의해 이루어지는 특정한 해석들은 우리에게 일정한 '규칙' 혹은 '모델'을 제공하는데, 그것이 없으면 어떤 인간도 일상적인 의미에서 '볼 수'가 없다. 개개인이 계승과 문화에 의해 이러한 규칙들을 배우는 것은 일종의 창조 행위이다. (...) 특정한 문화는 현실에 대한 특정한 견해들을 지니는데, 사로 다른 규칙을 지닌(비록 진화한 인간의 두뇌를 기반으로 하는 점에서는 같더라도) 문화는 그 담지자들이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그들만의 세계를 각기 창조한다는 점에서 현실에 대한 견해들은 그들이 창조해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좀더 나아가 보면 문화들 사이에 차이가 있을 뿐만 아니라, 특정한 문화적 규칙을 지닌 개인들도 그 규칙들을 수정하고 화장하여 새롭게 수정된 규칙을 도입함으로써 확대되거나 남다른 현실을 경험할 수 있다. 그러므로 현실의 새로운 영역은 '드러나'거나 '창조될'수 있으며, 그것은 한 개인에게만 한정된 일이 아니라 어떤 흥미로운 방식으로 전달되어 특정한 문화가 지닌 규칙의 집합에 추가된다." (49~50면)
이러한 논의를 생물학적 논의의 원용으로 전개한 것이 흥미롭다. 플라톤의 이데아론과 같은 형이상학을 토대로 시인추방론을 펼친 것과, 이에 비해 20세기 중반에 '생물학적' 논의를 원용하여 인간 인식 일반의 '창조성'을 논하는 것을 대비해보면 흥미롭다.
이러한 윌리엄스의 논의는 결국 예술이라는 것을 커뮤니케이션 일반의 한 특수로 규정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예술을 창조적 발견과 커뮤니케이션이라는 일반적인 인간적 과정 중의 특수한 한 과정으로 보는 것은 동시에 예술의 지위를 재정립하고 그것을 우리의 일상적 사회생활과 연관지을 수단을 찾는 것이다.(...) 예술은 결국 우리 모든 삶의 창조성이라는 사실에 의해 비준되어야 한다. 우리가 보고 하는 모든 일, 우리의 관계와 제도의 전체 구조는 결국 학습과 묘사와 커뮤니케이션의 노력에 달려 있다. 예술의 창작과정을 생각하듯 우리는 그런 식으로 인간세계를 창조한다. (...) 커뮤니케이션은 독특한 경험을 공동의 경험으로 만드는 과정이며, 무엇보다도 삶의 권리이다. (...) 우리는 경험을 묘사함으로써 관게들의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예술을 포하한 모든 커뮤니케이션 체계는 말 그대로 우리 사회 조직의 일부분이 된다. 우리의 묘사와 연관된 선택과 해석은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분명히 밝혀서 그 정당성을 인정받으려고 하는 태도와 필요, 이해관계 등을 구현한다. 동시에 우리가 받아들이는 다른 사람들의 묘사는 그들의 태도와 필요, 이해관계등을 구현하며, 비교와 상호작용의 기나긴 과정은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공동의 삶이다. 우리가 사물을 보는 방식이 말 그대로 삶의 방식이므로, 커뮤니케이션의 과정은 사실상 공동체의 과정-공동의 의미를 공유하고, 그리하여 공동의 활동과 목적을 지니며, 새로운 수단의 제시와 수용과 비교를 통해 성장과 변화의 긴장과 성취를 이루는 일-이다."
이러한 논의는 감동적이나, 이를 부르디외의 논의와 연관시켜 보아야 한다.
과연 '사회'라는 것은 존재하는가. 문학이라는 '장'이, 나름의 규칙을 지니고, 또 점점 더 폐쇄적이며 그 내부에서도 소통을 할 수 없다고 규탄을 하고 있는 현재에, '예술'을 전체 '공동체의 과정'으로 규정짓는 것은 당위론적으로 느껴지며, 실재적 분석없이는 공허하다. 윌리엄스 책의 본론을 이제 읽어볼 차례이다.
이 책은 과연 '긴 혁명'이라는 '긴 호흡'으로 영국의 예술과 '공동체의 과정'을 보여줄 것인가. 서론의 당위론적인 이야기는 '긴 호흡'을 통해서는 입증되는가. 혹은 '긴 호흡'이라는 수많은 자료를 통해서만이 입증(즉, '합리화')될 수 있는것인가. 이러한 '합리화'는 당연히, '선택'을 의미하고, 선택당하지 않은 자료들은 무의미한 자료들로 취급되는 것이 아닐까.
이런 논의 "예술은 묘사하고 소통하는 다른 방식들과 마찬가지로 학습된 인간적 기능이며, 한 공동체 안에서 알려지고 실천되어야만 비로소 경험을 전달하는 엄청난 힘을 사용하고 개발할 수 있다. 인간 공동체는 공동의 의미와 커뮤니케이션의 공동 수단을 발견함으로써 성장한다. 활동의 영역 전반에 걸쳐 두뇌가 창조해낸 패턴과 공동체가 실현한 패턴은 지속적으로 상호작용한다. 개인의 창조적 묘사는 관례와 제도를 만들어내는 전반적인 과정의 일부이며, 이를 통해서 공동체가 가치 있다고 여기는 수단들을 공유하고 활성화할 수 있다."
그렇다면 '배반당한 걸작' 같은 것은 어떻게 가치평가할 수 있을 것인가. 그것이 나중에 배반당한 '걸작'이라는 점에서 다시 승인받았기 때문에? '전체'에 대한 강조는 결국 '긴 호흡'을 전제한다. 이 '전체'는 매우 다양한 방식으로 서로 접합되어 있고, 각각의 장은 각각의 논리와 운동과 권력 속에서 작동하기 때문이다. 이 전체를 바라보려는 시야는 유의미하지만, 이 안에 개입하여 발언하려는 문학 연구자의 입장에서는 장 안에서 시작해서, 이를 벗어나고자 해야 하지 않을까.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윌리엄스같은 시야가 결국 필요하겠다.
"정치와 예술은 과학, 종교, 가정생활 혹은 우리가 절대적이라고 말하는 기타 범주들과 함께 작용하고, 상호작용하는 관계들의 전체적인 세계에 속해 있으며 바로 이것이 우리 공동체의 연합된 삶이다."
더 나아가 윌리엄스는 '예술'이라고 우리가 상정하는 것을 전복한다.
"실제로 예술은 결코 특수한 영역에만 한정되지 않았고, 사실은 매일 하는 가장 일상적인 활동에서 예외적인 위기와 강렬한 사건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걸쳐 있으며, 길거리의 언어와 흔한 통속소설의 언어부터 공동의 자산이라고 하기에는 아직 무리가 있는 기이한 체계와 이미지들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수단을 사용해왔다. 창조적 활동을 이렇게 해설하는 목적은 예술의 진정한 역사이면서도 해석의 역사적 단계들을 거치면서 여러 가지 정의와 공식으로 인해 보지 못했지만, 이제는 그것을 넘어서서 나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나아가서 창조적 행위의 이러한 의미가 갖는 결과는 창조적 행위가 커뮤니케이션과 공동체에 대해 보여주는 바에 의해 우리의 공동체적 삶 전체의 본질을 다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 창조적 해석과 묘사에 의해 도달한 의미들과, 관습과 제도에 의해 구현된 의미들 사이의 근본적인 관계를 파악했을 때, 우리는 '창조적 행위'와 '삶의 전체적인 방식'이라는 문화의 두 가지 의미를 화해시킬 수 있는 위치에 선다. 그리고 이러한 화해야말로 우리가 자신과 사회를 이해하는 힘을 진정으로 확대하는 일이다.
셰익스피어의 공연은 누가 보았는가. 다빈치의 작품은 누가 감상했는가. 모짜르트는 누가 들었는가. 이러한 '예술'이 과연 '공동체의 과정'이라 할 수 있는가. 아니면, 이런 것은 '예술'이 아닌가. 예술이란, 박상륭의 소설보다는, 귀여니의 소설인 것일까. '긴 호흡'이란 어느정도인 것인가. 그렇다면 문학 연구자란 무엇을 해야 하는가. 아니면 위에서 암시된 것처럼, '창조적 활동'으로서의 '예술'이란, '잘 빚은 항아리'나 '낯설게 하기' 따위의 개념으로는 파악될 수 없는, '사회'에서 유통되는 창작물을 의미하는 것일까... 여러 의문이 들면서, 기대되는 것을 보니, 잘 쓴 서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