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이론을 전체적인 삶의 방식에 존재하는 요소들의 관계에 관한 연구라고 정의하고 싶다. 문화의 분석은 이러한 관계들의 복합체인 사회 조직의 본질을 발견하려는 시도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특정한 작품이나 제도에 대한 분석은 그 조직의 본질적인 종류, 즉 작품이나 제도들이 전체 조직의 일부로서 구현하고 있는 관계들을 분석하는 것이다. 이러한 분석에서 키워드는 패턴이다. 모든 유용한 문화분석은 특징적인 종류의 패턴을 발견하는 데서 시작된다. 일반적인 문화 분석이 염두에 두는 것은 바로 지금까지 별개로 고찰되던 활동들 사이에 예기치 않았던 동질성이나 상응관계를 드러내주거나, 때로는 예기치 않았던 단절을 드러내주는 것이다." 

이러한 윌리엄스의 논의는, 다소 에세이 같다. 어떠한 키워드, 예를 들면 '권력'이나, '계급투쟁'같은 개념들이 없고, '패턴'이라니.. 그렇다면 이제 의문은 그 '패턴'의 작위성이다. 연구자의 '선택'에의 의문이 들 수 밖에 없다. 

윌리엄스는 또, '또다른 공통 요소, 그러니까 성격도 패턴도 아닌, 말하자면 이러한 것들이 체험된 실제적 경험에 대한 감각까지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이 실제적 경험은 매우 중요한 것으로, 사시 ㄹ우리는 어떤 시대의 예술에서 그러한 접촉을 가장 많이 의식하고 있다. 그 예술을 그 시대의 외면적인 성격과 대비해보고 개별적인 변종들을 감안하고 나서도, 여전히 우리가 쉽게 자리를 정할 수 없는 중요한 공통의 요소가 있다. (...) 그것을 묘사할 때 내가 제시하는 용어는 감정의 구조이다. 그것은 '구조'라는 말이 암시하는 바대로 견고하고 분명하지만, 우리 활동 가운데서 가장 섬세하고 파악하기 힘든 부분에서 작동하고 있다. 어떤 의미에서 감정의 구조는 한 시대의 문화이다. 그것은 전반적인 사회 조직 내의 모든 요소들이 특수하게 살아 있는 결과이다. 그리고 한 시대의 예술이 (...) 중요한 것은 바로 이러한 측면에서이다. 왜냐하면 다름아닌 바로 여기서 이러한 특성은 표현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종종 의식하진 못하지만, 실제적인 생활 감각, 즉 의사소통을 가능케 하는 심층적인 공동체는 그것의 보유자보다 오래 살아남은 기록된 커뮤니케이션 가운데 독보적인 사례들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사실에 의해 그러하다. 그 감정의 구조를 (...) 공동체의 개인 대다수가 가지고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러나 모든 실제의 공동체에서 그것은 매우 심층적이고도 광범위하게 소유되고 있는데, 그것은 의사소통이 의존하는 기반이 바로 감정의 구조이기 때문이다." 

설득되기 어렵다. 이는 분명 변증법적으로 쓰였을 터인데, 왜 글은 이리도 '전제'-'확인'식으로 쓰여지는 것일까. 사실 영문학이나, 1840년대 영국에 대해서 아는 것은 '풍문' 뿐이라서 더욱 이런 느낌을 받을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사실, 모든 독자는 모든 논자에 비해 정보가 제한되어 있다. 그럼 조금더, 친절하게 혹은 조금더 선포가 아닌 '설득'적으로 쓰여져야 하지 않을까. 각주가 하나도 없는 에세이다. 하지만 점점 기대는 되는데, 진짜 분석은 어떠할까, 어떤 시야를 보여줄까 하는 것이다. 그래도, 레이몬드 윌리엄스잖아, 라고. 

"한 사회에 속한 어떤 개인도 그 사회에 대한 사실들 중 선택된 부분밖에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내가 말했듯이 그 시대에 사는 사람들이라면 모두 다음 세대의 어떤 사람도 결코 복원할 수 없는 무엇인가를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그것은 바로 그 소설들이 씌어진, 그리고 우리가 선택을 통해서 그에 접근해보고 있는 삶에 대한 감각이다." (96) 

"예술은 사회를 반영하며 사회 성격을 경험 속에서 현실감 있게 전개시킨다. 그러나 예술은 새로운 지각과 반응들을 통해서 사회가 그 자체로서는 깨달을 수 없는 요소들을 창조해내기도 한다. 예술과 예술을 낳은 사회를 비교해보면 예술과 나머지 생활 전반 사이의 심오하고도 중심적인 관계를 보여주는 현실적인 관계들을 발견할 수 있다. (...) 또한 예술에는 특징적인 형식과 장치들을 통해 그 사회의 막다른 골목과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의 증거 -종종 이런 식으로는 처음으로 의식 속에 인정되는-가 있다." (122) 

흠.. 같은 해 세상에 던져진 푸코의 박사논문과 비교해봐도 흥미로울 듯 하다. 

 

푸코가 바라본 역사, 푸코는 말하고 싶은 주제 "어떻게 광기는 이성에 의해 괄호쳐지고 규정되고 또 감금되었는가?"를 통해 '역사'라는 것을 바라보는데, 또 이를 통해 '심리학'이라는 것을 탈신비화하는데, 윌리엄스의 질문은 아직까지 잘 보이지 않는다. '문화사 연구를 위한 시론' 정도의 문제의식 정도인데, 각 영역들을 아우르는 '전체'를 어떻게 볼 것인가를 논의한다. 사실 이는 푸코와는 정반대의 방향성으로, '문화연구'의 확립을 위해, '문화'라는 것의 신비화로 나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기나긴 혁명 - 독중감 1 생물학적 의미의 인식과 예술 창조과정의 인식의 차이 

 1961년에 영국에서 출간된 작품이, 한국에서 2007년에 번역 출간되었다. 45여년의 길이.   

 우선 첫번째 장인 '창조적 정신'을 읽는데, 윌리엄스는 예술의 '창조'와 '모방'에 관한 대립적인 견해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의 대립으로까지 거슬러올라간다)를 소개하다가 '우리 각자의 두뇌는 문자 그대로 그 나름의 세계를 창조해낸다'라는 영(J. Z. Young)이라는 생물학자의 견해를 소개한다.   

 

 

 

물론 우리는 그 이후 마투라나 같은 급진적 구성주의적 생물학을 알기 때문에, 이러한 주장의 급진적이고 보다 '실험'에 의해 뒷받침된 논의들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여기에서 의문을 가져야 할 것은, 생물학적 인지와 예술/인간의 '창조'라는 것을 일차원적으로 비교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윌리엄스는 인간의 인지 행위 자체가 '창조적'이라고 규정한다.  

"인간 두뇌의 진화와 특정한 문화에 의해 이루어지는 특정한 해석들은 우리에게 일정한 '규칙' 혹은 '모델'을 제공하는데, 그것이 없으면 어떤 인간도 일상적인 의미에서 '볼 수'가 없다. 개개인이 계승과 문화에 의해 이러한 규칙들을 배우는 것은 일종의 창조 행위이다. (...) 특정한 문화는 현실에 대한 특정한 견해들을 지니는데, 사로 다른 규칙을 지닌(비록 진화한 인간의 두뇌를 기반으로 하는 점에서는 같더라도) 문화는 그 담지자들이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그들만의 세계를 각기 창조한다는 점에서 현실에 대한 견해들은 그들이 창조해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좀더 나아가 보면 문화들 사이에 차이가 있을 뿐만 아니라, 특정한 문화적 규칙을 지닌 개인들도 그 규칙들을 수정하고 화장하여 새롭게 수정된 규칙을 도입함으로써 확대되거나 남다른 현실을 경험할 수 있다. 그러므로 현실의 새로운 영역은 '드러나'거나 '창조될'수 있으며, 그것은 한 개인에게만 한정된 일이 아니라 어떤 흥미로운 방식으로 전달되어 특정한 문화가 지닌 규칙의 집합에 추가된다." (49~50면) 

이러한 논의를 생물학적 논의의 원용으로 전개한 것이 흥미롭다. 플라톤의 이데아론과 같은 형이상학을 토대로 시인추방론을 펼친 것과, 이에 비해 20세기 중반에 '생물학적' 논의를 원용하여 인간 인식 일반의 '창조성'을 논하는 것을 대비해보면 흥미롭다. 

이러한 윌리엄스의 논의는 결국 예술이라는 것을 커뮤니케이션 일반의 한 특수로 규정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예술을 창조적 발견과 커뮤니케이션이라는 일반적인 인간적 과정 중의 특수한 한 과정으로 보는 것은 동시에 예술의 지위를 재정립하고 그것을 우리의 일상적 사회생활과 연관지을 수단을 찾는 것이다.(...) 예술은 결국 우리 모든 삶의 창조성이라는 사실에 의해 비준되어야 한다. 우리가 보고 하는 모든 일, 우리의 관계와 제도의 전체 구조는 결국 학습과 묘사와 커뮤니케이션의 노력에 달려 있다. 예술의 창작과정을 생각하듯 우리는 그런 식으로 인간세계를 창조한다. (...) 커뮤니케이션은 독특한 경험을 공동의 경험으로 만드는 과정이며, 무엇보다도 삶의 권리이다. (...) 우리는 경험을 묘사함으로써 관게들의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예술을 포하한 모든 커뮤니케이션 체계는 말 그대로 우리 사회 조직의 일부분이 된다. 우리의 묘사와 연관된 선택과 해석은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분명히 밝혀서 그 정당성을 인정받으려고 하는 태도와 필요, 이해관계 등을 구현한다. 동시에 우리가 받아들이는 다른 사람들의 묘사는 그들의 태도와 필요, 이해관계등을 구현하며, 비교와 상호작용의 기나긴 과정은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공동의 삶이다. 우리가 사물을 보는 방식이 말 그대로 삶의 방식이므로, 커뮤니케이션의 과정은 사실상 공동체의 과정-공동의 의미를 공유하고, 그리하여 공동의 활동과 목적을 지니며, 새로운 수단의 제시와 수용과 비교를 통해 성장과 변화의 긴장과 성취를 이루는 일-이다." 

이러한 논의는 감동적이나, 이를 부르디외의 논의와 연관시켜 보아야 한다. 

과연 '사회'라는 것은 존재하는가. 문학이라는 '장'이, 나름의 규칙을 지니고, 또 점점 더 폐쇄적이며 그 내부에서도 소통을 할 수 없다고 규탄을 하고 있는 현재에, '예술'을 전체 '공동체의 과정'으로 규정짓는 것은 당위론적으로 느껴지며, 실재적 분석없이는 공허하다. 윌리엄스 책의 본론을 이제 읽어볼 차례이다. 

이 책은 과연 '긴 혁명'이라는 '긴 호흡'으로 영국의 예술과 '공동체의 과정'을 보여줄 것인가. 서론의 당위론적인 이야기는 '긴 호흡'을 통해서는 입증되는가. 혹은 '긴 호흡'이라는 수많은 자료를 통해서만이 입증(즉, '합리화')될 수 있는것인가. 이러한 '합리화'는 당연히, '선택'을 의미하고, 선택당하지 않은 자료들은 무의미한 자료들로 취급되는 것이 아닐까.  

 이런 논의 "예술은 묘사하고 소통하는 다른 방식들과 마찬가지로 학습된 인간적 기능이며, 한 공동체 안에서 알려지고 실천되어야만 비로소 경험을 전달하는 엄청난 힘을 사용하고 개발할 수 있다. 인간 공동체는 공동의 의미와 커뮤니케이션의 공동 수단을 발견함으로써 성장한다. 활동의 영역 전반에 걸쳐 두뇌가 창조해낸 패턴과 공동체가 실현한 패턴은 지속적으로 상호작용한다. 개인의 창조적 묘사는 관례와 제도를 만들어내는 전반적인 과정의 일부이며, 이를 통해서 공동체가 가치 있다고 여기는 수단들을 공유하고 활성화할 수 있다."

그렇다면 '배반당한 걸작' 같은 것은 어떻게 가치평가할 수 있을 것인가. 그것이 나중에 배반당한 '걸작'이라는 점에서 다시 승인받았기 때문에?  '전체'에 대한 강조는 결국 '긴 호흡'을 전제한다. 이 '전체'는 매우 다양한 방식으로 서로 접합되어 있고, 각각의 장은 각각의 논리와 운동과 권력 속에서 작동하기 때문이다. 이 전체를 바라보려는 시야는 유의미하지만, 이 안에 개입하여 발언하려는 문학 연구자의 입장에서는 장 안에서 시작해서, 이를 벗어나고자 해야 하지 않을까.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윌리엄스같은 시야가 결국 필요하겠다. 

"정치와 예술은 과학, 종교, 가정생활 혹은 우리가 절대적이라고 말하는 기타 범주들과 함께 작용하고, 상호작용하는 관계들의 전체적인 세계에 속해 있으며 바로 이것이 우리 공동체의 연합된 삶이다." 

더 나아가 윌리엄스는 '예술'이라고 우리가 상정하는 것을 전복한다. 

"실제로 예술은 결코 특수한 영역에만 한정되지 않았고, 사실은 매일 하는 가장 일상적인 활동에서 예외적인 위기와 강렬한 사건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걸쳐 있으며, 길거리의 언어와 흔한 통속소설의 언어부터 공동의 자산이라고 하기에는 아직 무리가 있는 기이한 체계와 이미지들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수단을 사용해왔다. 창조적 활동을 이렇게 해설하는 목적은 예술의 진정한 역사이면서도 해석의 역사적 단계들을 거치면서 여러 가지 정의와 공식으로 인해 보지 못했지만, 이제는 그것을 넘어서서 나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나아가서 창조적 행위의 이러한 의미가 갖는 결과는 창조적 행위가 커뮤니케이션과 공동체에 대해 보여주는 바에 의해 우리의 공동체적 삶 전체의 본질을 다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 창조적 해석과 묘사에 의해 도달한 의미들과, 관습과 제도에 의해 구현된 의미들 사이의 근본적인 관계를 파악했을 때, 우리는 '창조적 행위'와 '삶의 전체적인 방식'이라는 문화의 두 가지 의미를 화해시킬 수 있는 위치에 선다. 그리고 이러한 화해야말로 우리가 자신과 사회를 이해하는 힘을 진정으로 확대하는 일이다.

셰익스피어의 공연은 누가 보았는가. 다빈치의 작품은 누가 감상했는가. 모짜르트는 누가 들었는가. 이러한 '예술'이 과연 '공동체의 과정'이라 할 수 있는가. 아니면, 이런 것은 '예술'이 아닌가. 예술이란, 박상륭의 소설보다는, 귀여니의 소설인 것일까. '긴 호흡'이란 어느정도인 것인가. 그렇다면 문학 연구자란 무엇을 해야 하는가. 아니면 위에서 암시된 것처럼, '창조적 활동'으로서의 '예술'이란, '잘 빚은 항아리'나 '낯설게 하기' 따위의 개념으로는 파악될 수 없는, '사회'에서 유통되는 창작물을 의미하는 것일까... 여러 의문이 들면서, 기대되는 것을 보니, 잘 쓴 서문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읽으면서, 새롭게 알게된 점도 있지만, 아쉽기도 하다.

우선 이 책의 동기인 정당정치적 이유에서 시작된 68혁명운동 관련 논쟁이라는 것이 내 흥미나 관심의 깊이를 지나친다. 내 관심은 68혁명운동의 '이해' 후 '평가'인데, 책은 전유럽적인 68혁명운동을 다루고 있고, 여러 저자들의 소논문을 모아둔 것이라는 점에서 아쉽다.

드는 의문은, 이 전유럽적 68혁명운동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동력이 있는가, 또는 왜 이는 모두 68년도에 일어났는가 하는 점이다.

사실 68이라고 했을때는, 담배냄새 자욱한 프랑스 대학들에서 쓰레기통을 뒤집어쓴 리쾨르와 담배를 꼬나문 알튀세를 그룹의 '맑스 읽기'가 떠오른다. 그 전경이나 후경 어디쯤에 미국의 히피들의 문화(존 레논)와 반베트남 전쟁, 그리고 지금까지는 연결시켜보려고도 못 했던 체코의 벨벳 혁명이 존재한다. 이는 왜 68년도 였는가. 운동들간의 연관성은 있는가?

 
 

 

 

 

 

 

 


"1968이 하나의 명확한 영상을 제시하는 것은 아니다. 일본과 미국 및 유럽의 거의 모든 대학에서 일어난 시위들, 마틴 루터 킹의 암살, 멕시코에서 자행된 학생 2000명 학살, 파리의 총파업, 시카고의 '분노의 날들', '프라하의 봄'과 그 진압, 베트남의 구정공세 드으이 몽타주 같은 것을 상상하는 것이 오히려 더 좋다" (30면)

이 첫번째 글 "미국적 관점의 후퇴: 1968년과 이후 30년" - 슈티븐 에릭 브로너

번역 수준도 그렇고, 글의 소략함도 어이상실 수준이다. 첫번째 장 "급진 민주주의와 자유지상적 사회주의"의 서론격인듯 한데, 왜 서론에 집어넣었는지는 아마 위와 같은 내용을 언급하기 때문.

그러나 번역의 질이 다음 글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 1968년 '프라하의 봄' 혹은 '모든 것이 달라졌다'" -헬레나 캐냐-베커

 

 

 

 

 

 

 

로 오면 괜찮다. 어쨌든 체코를 둘러볼 때, 혹은 유럽 역사서들을 읽다보면, 그리고 쿤데라 소설들의 단골 혹은 유일한 레파토리로 항상 언급되는 '벨벳 혁명'의 과정을 소략하게나마 언급된 것이 흥미롭고, 다음과 같은 벨벳혁명의 평가는 재미있다.

"프라하의 봄은 ... 공산주의 체제를 혁명적으로 전복하려는 시도가 아니었다. 그것은 현실사회주의체제를 평화적으로 전환하려는 최초의 시도이자 유일한 시도였다. 프라하의 구조개혁은 소련 페레스트로이카(1995)의 모델이었다. 소련 체제를 개혁하려는 고르바초프의 시도는 실패했지만, 프라하의 봄은 그와 반대로 폭력을 잠들게 했다. ... 프라하의 봄은 훌륭한 일이었다고 생각한다. 러시아의 점령은 소비에트 체제의 종말을 20~30년 앞당겼다. 1968년의 봄이 없었다면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는 가능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밖에 서구 공산주의자들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구성우너들에게도 프라하의 봄은 유익한 충격이었다. 사회주의는 개혁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그들은 알게 되었다. 1989년의 변동 이후에는 1968년의 혁신 시도가 지향했던 제3의 길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이제는 누구도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에 관심을 갖지 않는다. 사람들은 개혁 실험에 신물이 났다. 1968년의 실망은 너무나 컸다. 20년 후 모든 것은 달라졌다." (66~67면)

2.8, 3.1, 4.19, 광주, 한국 80년대에 관심을 갖고 있는데, 보다 보니 이해영 엮음 "1980년대 혁명의 시대"라는 책이 눈에 띈다. '한국 80년대 세대의 초상화: 독일 68세대와의 비교'라는 글이 있는데, 이것을 함께 읽으면 좋을 듯하다. 
 


하지만 할 일이 많다...

 
 

 


또 드는 생각, 아날학파의 '장기 지속의 역사'와 대비되게, '광대 넓이의 역사'라는 개념 같은 것은 없나? 뭐 68을 보니 그냥 그런 생각이 드는데. 세계사라는 게 뭐, '장기 지속의 역사' + '광대 넓이의 역사'라는 것은 당연하겠지만서두. 피곤하고 심심하다.
 

 

 

 

 

 

 

어쨌든 68을 정리는 한번 해야 할터인데, 복학과 결혼준비가 동시라서 참 지친다. 영어와 일어 번역과 중국어 공부를 하는데, 아침에 일어나서 중국어 공부하고, 나서는 영어 책 번역하고 있다가 저녁에는 일어책 번역을 하는 식. 피곤하다 참. 중간중간에 시를 읽고 세미나 준비를 하다가 사람들 만나서 술도 마시고, 결혼준비도 하고, 일요일에는 돈도 벌고 하는 것이다.  주변국 한국에서 국문학을 한다는 것은 이런건가.


댓글(7)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Mephistopheles 2009-01-19 13: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알고 있는 그 기인님이 맞는지요..^^

기인 2009-01-19 15: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ㅜㅠ 오랜만이에요~메피님 ㅎㅎ 그동안 공익 다녀오느냐고 뜸했습니다 ㅎㅎ
자주 찾아뵐께요 :)

Mephistopheles 2009-01-19 16: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세월이 이리 빠르게..벌써 결혼준비라니..^^ 조만간 유부남되시겠군요..^^

가넷 2009-01-20 02: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결혼준비도 힘드시겠어요. 2004년에 큰 누나가 결혼을 한다고 야단법석이였던 것 같은데..

그것보고 이것도 참 어렵네.... 난 결혼 같은거 안해! 라고 했던 기억이 나네요.




기인 2009-01-20 10: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이제 유부남 이네요 ㅎㅎ 결혼은 좋은데, 아이 길러야되는 것은 참 힘들 것 같아요 ㅜㅠ 심적, 경제적 여유가 별로 없어서;; 그래도 메피님 보면, 그런 이쁜 아이 저도 갖고(?) 싶은데 ㅎㅎ
Garnet님 안녕하세요 ^^ 처음 뵙는듯 하네요 ㅎㅎ 네 ㅎㅎ 피곤하기는 한데, 여러가지가 겹쳐서 더 그런것 같습니다 ㅎㅎ

마늘빵 2009-01-26 13: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헛, 기인님 아니 결혼을! ^^ 중국어, 일본어, 영어, 한국어까지. -_- 하나만 하기도 힘든데 그걸 하루에 동시에 다 작업하시다니. 번역을 많이 하시나봅니다. ^^

기인 2009-01-27 15: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프님 오랜만 반가워요 :)

네 먹고 사는게 점점 더 힘들어지네요. 언제 국문학 공부 할지.. 쩝;;;
결혼도 해야하니 헐;; ㅎㅎ
 

 

 

 

 

 

 

 

쿤데라는 꽤 좋아하는데, 이번에 향수를 읽다가는, 문득 최영미가 떠올라졌다. 식민지시기 30년대말의 자기고발문학과 비교해봐도 흥미로운데, 흔히 말하는 '후일담 문학'이라는 것의 윤리학이랄까. 이것이 밀란 쿤데라에서 어떻게 특이한 지점으로 들어나는가가 흥미로울 것 같다.

물론 시와 소설이라는 차원, 체코와 한국이라는 차이 등이 있지만, '되돌아옴'이라는 것. 그리고 왜 차이들이 발생하는 가를, 장르 선택의 층위부터 시작해서 파고들어갈 수 있을 법하다.

쿤데라의 소설쓰기는, 한 편으로는 매우 이기적으로 보인다. '남겨진 자들'인 체코인들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는 말이다. 하지만 분명 이것이 연대하고 있는 아픔들이 있고, 고발하고 있는 폭력들이 있다. 최영미도 그렇게 말해졌었다. 여성-운동권 등등.

이제 15여년이 지난 지금에서는, 이에 대해, 이의 윤리성에 대해 말을 할 수 있는 시기이지 않을까. 우선 본격적으로 쓰고 싶은 글의 목록에 하나 올려놓는다.

이기적 연대, 또는 후일담 -밀란 쿤데라와 최영미


댓글(2)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바라 2008-11-07 01: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이시네요..ㅎ닉네임이 바뀌어서 한동안 어리둥절했습니다. 복무는 아직 안 끝나신건가요? 추운데 건강하시길..

기인 2008-12-20 00: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제 막, 복무 끝났어요 ^^ 다시 닉네임 바꾸고 활동하려고요 ㅎㅎ 오랜만에 반갑습니다 :)
 

할아버지, 대전 현충원에 모시고, 오늘 돌아왔습니다.

참, 할아버지가 많이 그립네요. 어렸을 때부터, 할아버지를 가장 닮은 손자라는 이야기를 많이 들어왔었습니다. 항상 골방에서 책만 읽어서 그런거죠..

이렇게 갑자기 가시게 될 줄 몰랐는데, 너무 할아버지가 그립습니다. 80이 넘으시고, 할머니를 먼저 보내시고, 부쩍 늙으셨다는 많이 야위셨다는 느낌은 들었지만, 언제나 누구보다 정정하시고, 누구보다 빨리 성큼성큼 걸으시던 할아버지였는데...

마지막 할아버지가 의식이 있을때 뵈었던 것은, 서울에 올라오셨을 때 잠깐 하셨던 말씀이 기억에 남니다. "노인이 된다는 것은, 생각하던 것이랑 정말 많이 달러. 노인의 몸이란 전혀 상상하던 것이란 다르다.." 라고 하시던 말씀이 마지막이었네요..

할아버지의 웃음, 할아버지의 이야기들, 커피를 가져다 드리거나 하면, '고마워'라고 하던 목소리... 할아버지 어린 시절 농고에서 고생하던 이야기, 해군사관학교 입학해서 동기생 절반이 '빨갱이'로 총살당하던 장면을 생생히 기억하시며 그 광경의 아이러니한 희화성을 말씀해주시던 이야기, 6.25때 부상당하던 이야기, 기관총 파편을 맞으실 때의 느낌, 전쟁 상황 중의 멍한 기분, 베트남 전쟁 때 어뢰로 모두 폭사당할 뻔 이야기, 베트남 전쟁이 질 수 밖에 없는 전쟁인지 느끼셨던 이야기 등등..

언제나, 언제나 창원에 가면, 할아버지가 평생 다시 짓고 계시는 집에서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어렸을 떄, 할아버지가 마작과 노트럼프라는 카드게임을 가르쳐 주시던 것, 트럼펫 카드를 멀리 던지는 법을 가르쳐 주시던 것, 영어 단어들을 외우게 시켜서 1등에게는 초콜릿을 많이 주시던 것, 나무를 깍아 자동차를 만들어주시던 것 등이 생각이 나네요.

그러다가 한달 전에 뇌출혈로 쓰러지셔서 계속 혼수상태셨습니다. 중환자실에서 면회때 뵈고 다리를 주물러드리고 하면, 몸을 움직이시고, 잠투정 부리는 어린아이처럼 뒤척이셔서, 금방이라도 일어날 것 같았어요.. 그래서 더 마음이 아팠습니다..

장례를 치루면서, 큰아버지에게서부터, 제가 몰랐던 할아버지에 관련 이야기들을 들으니, 청년, 장년 할아버지의 모습이 조금씩 제가 떠오르게 되었습니다. 미국 유학시절 '여호와의 증인'을 굳게 믿게 되셔서, 한국 돌아온 이후에 그 때문에 군 내부에서 문제가 많았던 이야기.. 상관에게 반항해서 대위에서 소령으로 올라가는 시점에서, 소령에서 중위로 2계급 강등되셨다는 이야기.. 그 때문에 자기보다 해군사관학교 1기 후배의 차 얻어타고 다녀야 해서, 항상 후배 집 앞에서 꼳꼳히 서서 기다리셨다는, 융통없이 꽉 막혀서 사셨다는 이야기.. 감찰관 때는 쌀한가마니 뇌물로 들어온 것을 그대로 돌려보내시고는, 불같이 화를 내셨다는 이야기 등등..

모두 제 기억 속에 있는, 항상 웃으시고 온화하고, 언제나 미국소설이나 시사지, 또는 일본 문예공론등을 스탠드 불빛 아래 누워서 읽고 계시거나, 아니면 팔을 겉어붙이고 담장을 쌓거나 천장보수를 하고, 초여름에도 두터운 내복과 털모자를 항상 끼고 계시던 70~80대 노인과는 달랐습니다. 하지만, 그래서, 더 할아버지가 그리워지게 되네요.

이제 더 이상 할아버지를 못 뵈게 된다는 것이 참 슬프네요. 할머니 돌아가셨을 때는, 참 내가 해드린 게 너무 없고, 할머니에 대해서 아는게 너무 없다는 것이 슬펐는데.. 할아버지는 더 이상 볼 수 없다는게 너무 슬픕니다. 많이 그리워요..

여자친구한테도 할아버지 보여드리고, 할아버지에게도 여자친구 보여드리고 싶었는데..

여자친구한테, 나한테는 이렇게 재미있고 똑똑한 할아버지 있다고 자랑하고 싶었는데..

이제 벌써 늦었네요..

할아버지 사랑해요. 편히 쉬시기를...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가시장미 2008-10-22 00: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할아버지께.. 이런 마음이 전달될 수 있기를 바랄께요-
마음은 말이 없어도 전달되는 것인데, 시간과 공간을 초월할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더불어 할아버님께서 좋은 곳에서 편안하시길...

kklpower 2008-11-02 20: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을 읽다보니 나도 마음이 아프구나. 나 또한 할아버님께 기인의 마음이 닿으리라 믿는다. 낼부터 내게 찾아오는 할아버지 할머니들에게 더욱 잘해드려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