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이데올로기>를 읽고 있다. 3번째 읽는 것 같다. 기분이 그다지 좋지 않다. 무언가 가슴이 꽉 막힌 느낌이다. 여하튼, 예전 읽었던 내용은 기억나지 않고, 읽었던 상황만 기억이 난다. 서재에 예전 글이라도 있나 찾아봐야겠다. 이전보다는 물러서서 읽는 것 같다.
개념을 운동하는 것으로 쓰고 있는 것이 흥미로운데,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대목이다.
"한 국민 내부에서의 분업은 우선 산업 노동 및 상업 노동의 농업 노동으로부터의 분리를 가져오고, 그와 함께 도시와 농촌의 부리 및 양자의 이해 대립을 가져온다." (198)
영어본을 찾아보면 "The division of labour inside a nation leads at first to the separation of industrial and commercial from agricultural labour, and hence to the separation of town and country and to the conflict of their interests." (43) C.J. Arthur Ed., Karl Marx and Frederick Engles, The German Ideology Part One, New York: International Publishers, 1947.(revised edition 1970)
어찌보면, "한 국민 내부에서의 분업은 산업 노동 및 상업 노동의 농업 노동으로부터의 분리이다"라는 규정식으로 쓰일 수 있는데, 이를 'leads at'이라고 쓴다. 이러한 '움직임'으로 사유를 전개해 나가는 것은, 독일 이데올로기의 '사적 유물론' 자체의 패턴이다. '지금-여기'를 이해하기 위해 '과거', '기원'으로 돌아가려는 사고방식. 이의 전제는 A -> B로 변화했을 때, B를 이해하기 위해서 A를 해부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A와 B가 질적으로 다를때, A를 보는 시각 속에 이미 연구자의 시선이 개입되어 있어, 여기서 A를 해부한 것의 '도구'가 다시 B를 선규정할 수 있다.
즉, 맑스, 엥겔스가 원시사회부터 추론해 낸 핵심적인 사적 유물론의 전제인 "도덕, 종교, 형이상학 및 그 밖의 이데올로기와 그에 상응하는 의식 형태들은 더 이상 자립성의 가상을 지니지 않는다. 그것들은 아무런 역사도 가지고 있지 않으며, 어떠한 [자립적] 발전도 하지 않는다. 자신들의 물질적 생산과 자신들의 물질적 교류를 발전시키는 인간들이 이러한 자신들의 현실과 함께 또한 그들의 사유 및 그 사유의 산물들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의식이 생활을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생활이 의식을 규정한다. (...) 현실적인, 살아 있는 개인들 자신으로부터 출발하며, 의식을 단지 그러한 개인들의 의식으로서만 간주한다." (202)를 논의했을때, 이는 원시사회에서, 또 어쩌면 고대사회까지 타당할지 모르지만, 분업과 '지식노동'에 종사하는 이들이 발생하고 그들 사이의 네트워킹과 담론의 '장'이 만들어지기 시작하면서, 담론들은 담론 내부의 질서에도 상당한 영향을 받으며 운동하기 시작한다. 처음의 관계가, 이제는 질적으로 다른 관계들과 배치들로 이루어지게 되었기 때문에, A -> B로 변화하였다고 해서, A가 B의 모든 가능성을 포함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런 점에서, 레이몬드 윌리엄스의 논의와 비교해 보면 흥미롭다. 윌리엄스는 '생활이 의식을 '규정'한다'는 식의 논법이 아니라 '전체'에 대한 욕망을 들어내고, '이미지'에서부터 시작한다. 윌리엄스를 더 읽어나가면서 비교해볼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