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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살. 누구에게나 20살은 있었겠지요. 라고 말을 한다면, 이미 20살을 지난 사람일 겁니다. 사진 속의, 그 때 미소. 어쩐지, 조금은 슬프게 만들기도 하는, 20살 때.

저는 서재 공개를 위해서는 역시, 20살 때의 낙서들, 또는 스스로 시라고 믿고 썼던 흔적들을 공개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또한 당연한 일이지요. 연예인들이 자신의 쌩얼을 공개하거나, 고등학교 졸업식 때 사진을 공개하듯이, 백수 인문학도로서 자신의 '서재'를 공개한다는 것은, 20살때 썼던 시들을 공개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누군가 아주 유명하고, 저의 조상은 아닐 것으로 믿어지는, 서구 어떤 작가는 자기가 죽으면 자신이 썼던 모든 글을 불태워달라고 했답니다. (이 말도 일종의 계획된 쑈였을까요?) 그리고 또 어떤 유명한 작가는 그 사람이 3류 작가인지 아닌지를 판가름하는 기준은, 그 사람이 20살때의 글을 공개하는지 안하는지로 판가름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아, 어쨌든 20살. 보아나 모짜르트가 데뷔한 것은 그 보다 훨씬 이른 나이였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아니 현대의 사람들에게, 역시 20살은 막막하던 때이겠지요.



그래서 또 다시, 갑자기 늦은 밤. 20살 때의 시들이, 20살 때의 추억들이 몰려옵니다.

 

밤 


어둠은 천개의 눈으로 조소하고

누군가 창을 때리곤 비명을 지르며 사라져간다.

 

조그마한 아이는 겁에 질려

안방으로 베개를 부여잡고 달려가지만

붉은 눈의 어머니는 아기 울음소리를 흉내 낸다.


 

 

나를 구원해 주세요.

 

나를 구원해 주세요. 치료해 주세요. 나는 죽어가요.

나는 죽어가요.

무서워요.

 

무서워요. 정말.

 

나는 죽어가요. 죽어가요. 손을 내밀어 주세요. 여기.

나는 죽어가요. 죽어가요. 손을 내밀어 주세요. 여기.

 

눈물이 나요. 무서워요. 나는 죽어가요. 힘이 없어요. 죽어가요.

무서워요. 그대. 나는 무서워요. 그대. 나를 무섭게 하지 마세요. 그대.

내 옆에 있어주세요. 그대. 꼭 안아 주세요. 그대. 무서워요.

 

죽어가요. 나는. 혼자서 죽어가요. 나는.

그대. 죽어가요. 그대. 혼자서 죽어가요. 그대.

안아주세요. 옆에서 있어요. 달래 주세요. 너무 무서워요.

 

그대 항상 보이는 곳에 있어줘요. 너무 무서워서 숨을 크게 쉴수 없어요.

나는 죽어가요. 한숨 한숨 내쉴때 마다, 조금씩 늙어가요.

그리곤 죽어가요. 그러면서 죽어가요. 무서워요.

 

어디있나요. 어디. 그대. 무서워요. 너무 무서워요.

모든 것들이 죽어가는 소리가 들려요. 무서워요. 모두들 죽어가고 있어요. 무서워요.

 

그대. 구원해 주세요. 그대. 치료해 주세요. 그대. 나는 죽어가요. 그대.

그대. 나는 죽어가요. 그대.

그대. 무서워요. 그대.

 

나는 죽어가요. 무서워요. 울어요. 지금.

어서 와서 안아주세요. 울고 있어요. 그대.

 

 


추억하는 행위 속의 우울


중늙은이 시체에 키스했다.

나는 두 손가락 만으로 죽은 자를 웃게 할 수 있다.

잇몸이 하얏다.

 

눈을 감고 너를 본다.

낡은 감정이다.

눈물이 많지만, 그렇다고 슬픔에 익숙한 것은 아니다.

 

익명으로 나는 수없이 고백했었다.

슬픔과 아픔은

서툼에서 오는 것이

겠지.

 

혼자 걷는 거리

이미 없어진 기억.

사라진 이들.

 

나는 헤어지자 말할수조차 없었다.

 

나도 조금뒤면 두 손가락 만으로 웃을 수 있을

 

 

눈물


적한 오후에. 네 생각에.

투명한. 그리움. 한 방울.

손등에. 차가운. 반짝.

 

내가. 널. 사랑하는 것처럼.

누군가. 날. 사랑한다면.

 

아주 작은. 순수에.

한때. 너였던. 것.

부끄럽게. 아름다운. 또륵.

 

사랑해.

 

눈물이 흐르듯,

입술이 흘렀다.

 

꽃들은 여기저기 둘러앉아 냅킨 두르고 소란스럽게 식사를 하고 새들은 신문을 들고 어제 있었던 일들에 흥분해서 구름에게 지저귄다. 구름은 그 와중에 날씬한 번개를 생각하고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것도 흰 구름이 말이다. 그런. 이상한 날이었다.

 

그래서. 그랬던 거다. 입술이. 흘렀다. 눈물이. 흐르듯.

 

夢過現來 


夢-地上樂園

 

순결한 창녀들이 길거리에 만발해 웃음을 흘리고

약을 파는 그리스도들이 뒷주머니에 천국을 향한 열쇠를 넣어준다.

 

건물 안에는 나를 사랑하는 척 하는 내 지인들이

썩은물을 잔에 들고 퀭한 눈으로 나를 맞는다.

 

테이블에 올라선 발가벗은 소녀는

강제로 자위를 하며 일그러진 미소와 함께 울먹인다.

 

나는 이 모든 福된 것들의

중심에서 다스리지 않는 왕으로 射精한다.

 

過-酒酊

 

화장을 한 돼지들 사이에서

맥주를 마셨다.

아니 누구의 정액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필요한 것은

나를 속여 줄 시나 소설 한 편.

그것 뿐이었다.


 

現-惡

 

죽음이 발기하여 날 강간해 줄 때까지

만 20년을 조심스레 기다려 왔다.

첫사랑을 시집보내는 오라버니마냥

매일 밤 질척한 꿈을 꾼다.


 

母子


이미 너무 늙어 버린 소녀는

아무도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까마득함에

전족을 했다.


나는 옆에 누워

네 발은 고양이 발 같아

라고 말을 하면

그녀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그렇게 우리는 있다.


그러다 이따금 전화벨이 울린다.


그럼 또 우리는 서로를 바라본다. 그러다 보면 이내 멎는다.


우리는 나름대로. 우울한 축제를 하고 있는 셈이다.


 

 

역시. 20살을 되돌아보니. 우울해지는 군요. 그래도 어찌저찌 하다보니 6년이 지났네요. 6년이라...

순수하고 티없이 맑은 문청이었던 시절... 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연애도 한 번도 못해보고, 대학 강의들에 설레고, 한국 근현대사를 읽으며 놀래던 그 시절.

 

ㅋ 다시 돌아가라고 그런다면, 역시 노 땡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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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6-08-21 01: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인님, 스무살의 쌩얼(스무살에 쓴 글)을 공개하는 건 용기있는 모습이네요. 그때의 어줍잖고 막막하고 기이한 얼굴을요.. 저의 경우랍니다.^^ 대학시절 끄적거려놓았던 일기장이 아직 있는데 어쩌다 들추어보면 낯익기도 하고 낯설기도 하고 그럽니다. 돌아가라고 하면 노 땡큐인 건 저랑 좀 다른 듯... 전 돌아가보고 싶어요.. 아무튼 기인님 지금의 그 나이가 가장 멋집니다.^^

비자림 2006-08-21 09: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의 스무살을 살짝 엿보게 되어 반갑네요.
푸르디 푸른 젊음, 창백할 정도록 푸른 젊은 날의 고독과 번뇌...

기인 2006-08-21 19: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배혜경님/ 앗 그래도 그 때로 돌아가고 싶으세요? 저는 지금이 더 나아요. ^^;
비자림님/ 20살은 젊은도 아닌 것 같아요. 뭐랄까, 충돌이랄까, 충격, 아니면 충동? 어쨌든 충충충~~ ^^;
 

서재를 공개한다는 것은 나에게 있어 이상한 일이다. 우선 첫째, 나는 디카가 없다. 디카가 없는데 무슨 놈의 서재 공개냐 라고 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더욱 요상한 일은 나는 단칸방에 산다는 것이다. 단칸방에 사는 독신남이 난데없이 서재를 공개하겠다고 드는 것은, 강아지가 자신의 애완견을 공개하는 것도 아니고, 뭔가 이상한 일임에는 틀림 없다.

어쨌든, 단칸방에 살고 있는 독신남에 디카도 없는 소심한 A형인 나로서, 야밤에 느닷없이 '서재공개'를 하겠다고 마음 먹은 것은. 자기도 싫고, 요즘 읽고 있는 박주영의 "백수생활백서"라는 소설 때문이다. 여기서 주인공이자 화자인 백수는 매일 책만 보는데, 이 소설은 그 백수가 읽은 책이 계속 인용되며 스토리가 전개된다. 사실 스토리라는 것도 필요없을지 모른다. 읽으면서 나도 그런거 한번 써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뭔가 보르헤스 적이기도 하고.

어쨌든, 그러면 어떻게 서재 공개를 할 것이냐가 문제이다. 단칸방에 살면서 디카도 없는 소심한 A형군은 문학도이다. '문학'하면 제일 먼저 어떤 작품이 떠오르는지에 따라서 그 사람을 정체를 알 수 있을지 모르나, 어쨌든 지금 하고자 하는 이야기와 어울리는 작품은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이다.

그러면, 나는 불문학을 전공하거나, 불문학을 좋아하거나, 아니라면 심지어 프랑스 여자랑 사귀어봤거나 프랑스를 가봤거나, 파리를 몇마리 잡아봤거나 한 사람인가 하면, 내가 아는 한은 모두 아니다. 그냥저냥 문학도이다 보니 이래저래 들춰본 책들이 많고, 어린시절 친구가 별로 없어서 세계문학전집을 열심히 읽었을 뿐. 프랑스는 커녕 유럽도 가본적이 없어서, 사람들이 '유럽' (이거 스펠링이 UFO인가?)을 갔다왔다는 소문만 들었을 뿐이다. 하지만, 나는 의심이 많은 사람이라 아직 '유럽'을 믿지 못한다. 아, 물론 프랑스 혁명에 대해서는 조금 공부한 바가 있고, 68혁명이나, 알튀세르나 라깡이나 소문이 무성한 프랑스 아저씨들에 대해서 일면식은 없지만 그들의 책들이 나를 꽤나 괴롭힌 전적이 있다. 서론이 길었는데, 어쨌든 "레미제라블'과 서재 공개는 아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문학이란 무엇이냐 한다면, 문학은 묘사다. 라고 말한 사람이 있을 법하다. 아니면 내가 말하겠고. 어쨌거나 위고라는 아저씨의 "레미제라블"의 그 유명한 하수도 묘사가 있다. 장장 몇페이지인지는 책의 도판마다 다를 것이지만, 어쨌든 길다고 소문나고 전체 스토리와 전혀 상관없는, 그래서 "담화의 놀이들"이라는 이론서의 저자가 이 또한 '여담'으로 분류해마지 않는, 그런 묘사가 줄창 이어진다.

그렇다. 서재 공개는 그런 식으로 진행되어야 마땅하다. 왜냐하면, 서재이니까 말이다. 만약 화장실 공개라면, 유한락스에 대한 경애심과 함께 공개되어야 하듯이, 마굿간이라면 예수에 대한 경배와 함께. 서재 공개는 서재를 빛나게 하는(?) 위고의 레미제라블에 대한 존경과 오마주와 함께 공개되어야 마땅하다는 결론에 이르는 것이다. 어쩌면 보르헤스가 더 걸맞는지도 모른다. 그의 책과 도서관들이 허공에서 떠돈다. 사실 나는 위고보다는 보르헤스에게 더 감탄을 하는 독자인데, 이 소설의 진행 방식은 스턴식으로 될 것이다. 왜냐. 내 책들의 아우성을 찬찬히 들어가면서 진행될 것임에.

 

 

 

 

여기까지 읽은 여러분은, 저 놈은 서구 문학 전공자 중 하나일 것, 이라고 판단할지도 모르겠으나, 나는 그야말로 그 이름도 찬란해서 뭍 거리의 대중들은 잘 보지도 못하는 '국문학'이라는 시대착오적인 이름을 가지고 있는 전공에 고생하고 있다. 그럼에도 이렇게 '나도 서구문학 쫌 알어'라고 빌빌대는 것은, 우리 그 위대한 국문학 선배들의 전통을 답습해서일까, 아니면 서구문학 전공 한국인들이 역사적 사명을 품에 안고 한국에 들어와 '니네가 서구문학 들어는 봤냐?'라고 했을때 슬픈 표정 짓던 선배들의 울분에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기 때문일까.

그도저도 아니면, 요즘 국문학 전공자들 역시 외국 소설과 이론서만 읽는다는 현실을 반증하는 것일까. 그도저도 아니라면, 도대체 나의 서재 공개는 언제쯤 시작되는 것일까. 이에 대한 대답은 다음 시간에...

to be continued. (이거 스펠링 맞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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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클 2006-08-19 09: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단칸방'이라고 하면 좀 처량하게 들리고 '원룸'이라하면 좀 있어 보이는 이 미묘한 어감의 차이.ㅋㅋㅋ 번역하면 같은 뜻인데 말이죠. ^^

프레이야 2006-08-19 10: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구의 것이면 왠지 좋아보이는 착각이나 편견 아닐까요.. 우리말 놔두고 영어나 외국어표기로 쓰는 것도 그렇구요.. 아무튼 기인님의 서재공개.. 기대됩니다^^

기인 2006-08-19 12: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아 다시 읽어보니, 쫌 더 씨니컬하거나 쫌 더 웃겼어야 하는데, 뭔가 어정쩡 하네요~~ ^^; ㅋㅋ

비자림 2006-08-19 14: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밌게 잘 읽었어요.^^
반가워요. 물꼬가 터진 느낌.

기인 2006-08-19 20: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ㅎㅎ 스머프~~ :)

새들처럼 2006-08-19 22: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덕분에 <담화와 놀이>라는 책을 알게 되었습니다. 한번 읽어봐야겠네요. 또 기대하겠습니다.^^

기인 2006-08-19 22: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 안녕하세요? 린다 사브리의 <담화의 놀이들>이라는 책은, 여러 서구 문학 작품에 나타난 '여담'에 대해서 분석하고 있는 책입니다. 꽤 흥미로워요 ^^

seeker16 2006-11-05 21: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담=digression? 나 여담 넘 좋아해. 그래서 중세문학을 사랑하구. 겨울 방학엔 Tristram Shandy 완독 목표! 케헤헤. 이번학기 우리과 석사논문 발표에서 이 책 갖고 논문을 쓰는 사람이 있었지. 에세이와 소설의 연관성을 주로 논의했는데, 부디 잘 써서 꼭 읽고싶어졌음 좋겠어. (약간 곁다리 댓글이로군; 역시 산만한 여담씨)

기인 2006-11-05 22: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 저도 샌디 처음에는 영어로 읽을 작정하다가 곧 한국어로 선회. 다 읽기는 했는데... 초반에는 재미있는데 계속 그러니까 쫌 짜증나고 지루해요. ㅋㅋ
이 글도 쓰려고 하다가, 재미없어서 pass -_-;
쿄 샌디로 석사논문 쓴다니, 잼있을 것 같네요. ㅎㅎ

기인 2006-11-05 22: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저 이제 울프 'to the lighthouse' 읽기 시작해요. ㅋ 번역본 읽다가 짜증나서;; 진짜 요즘은 번역된 거 잘 못 읽겠어서. 찬찬히 읽어보려고요 ㅎㅎ
 

 

나: 그림자군. 자네는 도대체 왜 이러는 것인가.


그: 무엇을 말인가?


나: 그것 말이네. 그것.


그: 무엇. 무엇. 도대체 무엇!


나: 말이 통하지를 않는군. 답답하네. 답답해.


그: 자네도 어쩔 수 없군


나: ...


그: 이런 가을밤. 가장 슬픈 것이 무엇인줄 아나?


나: 슬픈 것? 가장 슬픈 것? 그런 것을 도대체 왜 알아야 하나. 가장 슬픈 것을 알면. 이제 나머지 슬픔들에 대처할 수 있기 때문에? 왜. 왜. '가장'이라는 빌어먹을 형용사를 여기저기 끌어다 쓰는 것이지? 강조하고 싶어서인가? 모든 것을 강조해 버리면, 모든 진한색으로 그림을 그려버리면.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 아무것도. 아무것도 말이야!


그: 가을밤에 옷을 주어입는 여인의 뒷모습. 그 옷이 살갗에 스치는 소리. 그 등의 곡선. 그림자가 등뼈 주위로 흐르지. 고개를 숙이고. 머리카락이 얼굴을 감싸고. 나는 항상 슬퍼. 옷을 입는 뒷모습.


나: 뭐. 여인! 뒷모습? 무엇이란 말인가. 자네. 옷 따위는 찢어버리라지. 그림자따위가 옷에도 신경을 쓰는가. 하기는. 벗은 여인의 그림자는 보기 힘든 것이기는 하네. 그러나. 이는. 이따위는 중요한게 아니야. 사람은.. 사람은 말이야... 사람은..


그: 그림자는 한가지 색이 아니야. 석양과 같은 붉은 그림자도 있지. 붉으면서도 또 붉은게 아니야. 스러지는 거지. 사라져가는 것은 모두 아릅답지 않나..


나: 그러니까 내 말은.. 사람이란.. 사람이란 말이야... 젠장. 나는 처음부터 자네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고. 뭐야. 그 표정은? 난 그런 것이 너무 싫어. 아니 자네 표현대로. '가장' 싫어. 진짜로. 무엇이야. 자네는 존재하지도 않아. 아니. 정말로. 나는 그래. 자네는 존재하지도 않는다고. 그러니 제발 말이야. 사람이란.. 그래. 사람이란 말이야..


그: 사람? 사람? 인간에게 흥미로운 것은 그 투명한 비늘들이지. 자네의 눈에서 무엇인가 흘러. 물고기처럼 헐떡이면서. 그것의 이름이 무얼까. 어머니와 같은 맛이 나지. 첫사랑과 같은 향이고. 점점 흐르다가 흐르다가, 인간 안에서 무언가가 모두 빠져나가면 다시 인간은 살 수 있는 거지. 스스로를 죽이는 자는 분명 충분히 이런 행위를 하지 않아서일꺼야. 자살방지를 위해서는 코메디 대신, 진짜 비극을 보여줘야 한다고.


나; 자네. 정말 원하는게 무언가. 무엇이. 무엇을. 그렇게 원하기에 내 뒤를 그렇게 졸졸 따라다니는 거지. 제발 이제 그만 해줘. 나는... 나는 말이야. 정말 지친다고. 정말이야. 이제. 그만해줘.. 부탁이야.


그; 나는 태어날때 부터. 아니. 바꿔 말하자면. 의식할 때 부터. 저 둥그런 태양으르 가지고 싶었어. 저것을 손에 쥐고. 으스러져라 쥐는 거지. 그래. 그냥 그거야. 태양을 그 물컹하고도 미끌미끌한 것을. 터지도록. 쥐고 싶었던 말이야. 그게. 그래. 그거야. 그것만이야.


나: 그런데. 도대체 왜 나야? 도대체 왜 나냐고? 태양을 원하면. 저 위로 가라고. 태양을 잡아 찢던 이를 터뜨려서 즙을 마시던. 나는 정말 상관하지 않아. 그리고 상관도 없고 말이야. 왜 언제나 내 발 밑에서. 그리고 눈을 감을때도 언제나 내 주위에 그렇게 있는거지? 제발..


그; 그때였어. 그래. 그때였을꺼야. 네가 눈을 찡그렸을 때.


나: 제발 가. 나는 도마뱀처럼 너를 잘라버릴꺼야. 네가 언제나 붙어있는 내 발뒤꿈치를 자르면 되나. 칼을 찾아야지. 칼을 찾아야 겠어. 너를 잘라내버릴꺼야. 너는 시들겠지. 너는 말라붙을꺼야. 너를 잘라내고 너를 찢어버릴꺼라고.


그: 시드는것은 누구일까. 네 발뒤꿈치에 왜 내가 항상 맴도는 줄 아나? 아킬레스도. 저 위대한 아킬레스도 말이야. 발뒤꿈치에 화살을 맞아서 죽고 말았다고. 그런데 네가. 너. 그래. 살 수 있을 것 같아? 그렇냐고.


 

:

이것도 학부 2학년때 쓴 것. 대사라는 것을 실험해보고 싶어했다. 소설들에서의 대사는 미묘하다. 현실을 반영하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대화라는 것은 어쩌면, 둘이 마주보며 끊임없이 비껴나가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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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그림자와 이야기를 했다. 사실 이는 꽤 부끄러운 고백이다. 자신의 그림자와 이야기하는 사람은 정말 어처구니 없게 할 일이 없는 사람이고, 친구도 없고, 그런 사람은 누구도 좋아하지 않아! 라고들 사람들은 생각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혹은 아닐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쨌든, 부끄럽게도 나는 내 그림자와 이야기를 했고 이를 밝힐만큼 뻔뻔하니까 이렇게 글을 남긴다.

사실, '내' 그림자라고 말하는 것은 옳지 못할수도 있다. 나는 이제껏 누구에게 '내' 그림자의 소유를 주장한 적도 없고 이를 누구에게서 선물받거나 구입한 기억이 없다. 사실 이를 누가 가져간다고 해도 별 상관을 안 쓸 수도 있을 터이다. 내 그림자를 누가 밟아도, 내 신발을 밟은 것처럼 기분이 나쁘지는 않을 것이다. 내 그림자가 못 생겼다고 해도, 누가 내 귀가 보기 흉하게 길쭉하다고 했을 때와는 전혀 다르게 받아들일 터이다. 어쨌든, 그러나 나를 가끔 밝을 때나 빛이 있을 때면 졸졸 딸아다니고는 해서 편의상 '내' 그림자라고 붙인다. 어쨌든 이에 대해서도 나중에 그림자와 내가 열띤 토론을 벌인 내용을 기술할 작정이다.

각설하고 이제 대화와 그 당시 상황을 적어 본다. 그 당시 나는 녹음기를 들고 이를 녹음하지 않았음으로 지금 순전히 내 기억에 의해서 재구성된 것이고 하니 조금 착오가 있을 수도 있겠다. 혹시 내 그림자가 반론을 제기할 수도 있을 터인데, 그러나 이는 내가 기억하고 있는 것에서 일부러 바꾼 것은 없다는 것을 밝혀둔다.

사실 나는 조금 비참한 상태였다. 일요일 오후, 누구도 집에 없었다. 전화를 걸 만한 사람도 없었다. 배는 고프지도 않았고 부르지도 않았다. 그저 그랬다. 심심했다. 그런데 내 앞에 검은 그림자가 실실 웃고 있었다. (사실 나는 그림자의 표정을 잘 감별하지 못하지만, 이는 나중에 그림자가 내 모습이 우스워서 웃고 있었다고 말했음으로 알았다.) 나는 심심한 마음에 저 놈에게 말이나 걸어보자 라고 생각했다.

"이봐. 거기 안색이 어두운 양반. 자네도 심심한가?"

"어이. 안색이 어둡다고? 내 안색은 내 이빨만큼 하얗다고. 지금 어디서 시비를 거는 것이야?"

거의 즉각적으로 그가 대답했기 때문에, 나는 조금 어이가 없었다.

"이봐. 당신 이빨도 검고 당신 안색도 검다, 이 말이야 나는."

그림자는 잠시 무슨 생각을 하는 지, 말이 없었다. 나는 라면이나 끓여먹을까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봐, 혹시 당신 그 여자 좋아하나?"

"누구 말이야?"

"시치미 때지 말라고. 어제 편지 쓸까 말까 고민하던 그 여자 말이야. 날씬하고 잘 웃는 여자."

"아니. 그림자면 그림자 답게, 그 여자 그림자나 신경쓸 것이지. 무슨 상관이야. 그리고 실로 나는 관심이 없어. 그 여자 뻔하지 뭐. 키크고 잘생기고 돈 많은 남자를 바라면서 살고 있을 구시대적 인간형임에 분명해. 이쁜 여자들은 다 그렇거든."

"아니. 왜 그렇게 발끈하고 그래. 당신은 그 여자 그림자에 관심 가진 적 없어? 없다고? 참 무심한 양반이네 그려. 나는 좀 내 세계가 넓을 뿐이라고. 관심을 갖는 것도 죄인가? 당신이 그 여자 남편이야 뭐야. 난 그냥 그림자들이 알고 있는 비법을 알려주려고 했는데 말이야."

나는 솔깃했지만, 이런 것에 쉽게 넘어가면 안된다는 것은 내가 13살때 내 첫사랑에 대해 가장 친한 친구에게 말했던 때의 아픈 기억으로 부터 알고 있었다. 그는 절대 비밀을 지키겠다고 하면서, 그녀와 사귀어 버렸다. 물론 비밀은 절대 지켰지만 말이다. 설마 내 그림자가 내가 짝사랑하는 그녀를 빼앗을 지는, 그럴 수 있을 지는, 모르는 일이지만 말이다. 아마 안 될 것 같기는 하다. 자신의 가장 친한 친구에게는 배신당한 이야기는 고전이지만 자신의 그림자에게 배신당했다는 이야기는 아직 못 들어본 듯 하다. 그런 생각을 하자, 실상 내가 믿을 것은 묵묵히 어두운 얼굴로 서 있는 내 그림자 밖에 없지 않나 하는 생각이 불쑥 들었다. 그래도 그에게 그 '비법'을 바로 물어본다는 것은 조금 쑥쓰러웠고 나는 말을 돌려서 그에게 관심이 있는 척 했다. 아니 실상 관심이 생기기도 했다. 그림자라는 것은 나에게 조금 생소한 대화 상대이니까 말이다.

"저. 그런데 말이야. 자네는 나인가?"

"아니. 그런 바보같은 질문이 어디있나? 내가 당신이라고? 그럼 당신은 나인가? 그럼 지금 우리는 미친 쇼를 하고 있는 것인가? 아니 만약 자네가 혹은 내가 미쳤다고 해 보세. 그래도 결국은 두 명이 있지 않는가. 그 사람 머리속이라 해도. 만약 내가 자네이고 자네는 자네이면 자네를 지칭하는 것은 두 개가 있게 되는 것이고. 그렇다면 무언가 이상하지 않은가. A는 B다. C도 B다. 그러나 A는 C가 아니다. 이런거 아닌가? 아닌가? 무엇 이상한가? 내가 말을 너무 빨리하는건가? 오해하지 말게. 내 친한 친구도 그의 그림자에게 그런 말을 들었다고 해서 내가 너무 화를 냈었네. 뭐라고? 잘못 말한거 아니냐고? 이런 사람아! 자네 역지사지를 해보게. 내 입장에서 자네를 '그림자' 라고 부르지 않으면 도대체 무엇이라고 부르겠나? 자네는 눈과 잎술과 이빨이 다른 색이라서 '그림자'가 절대로 될 수 없다고 말하고 있는 건가? 그렇다면 도대체 기준은 왜 당신네 '그림자들'이 정하는 것이지? 우리는 그렇기 때문에 당신들이 '그림자' 라고 부르는 것이라고. 아니 실상은 말일세. 자네들은 태양이 어디있던 간에 상관없이 똑같은 형태로 살아가기 때문에 '그림자' 라고 말하는 것이야. 도대체 태양이나 광원에게 따르지 않은 존재는 '그림자'에 불과하지 않는 것은 당연하지. 우리는 언제나 태양이나 광원을 생각하면서 우리 존재를 어떻게 변형시켜야 할지 생각하네. 숭고한 임무지. 사람이라면 반드시 이를 지켜야만 하고 말고. 자네 '그림자'들은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 통 모르겠지만 말일세."

내 그림자는 흥분한 듯 보였다. 실상 모든 이에게 콤플렉스는 있는 법이지, 하고 나는 진지한 표정으로 그의 말을 들어주었다. 흥분한 이들에게는 진중함으로 대하는 것이 최고의 무기인 법이다. 이 법은 언제나 들어맡기에, 그는 사과를 했다. 우리는 잠시 교통사고를 내서 고래고래 서로 욕을 하면서 나왔는데 알고 보니 자기의 사돈인 이들처럼, 묵묵히 침을 삼키고 딴청을 피웠다.

(보편자, 실존자 논쟁. 그림자의 하소연. 등등으로 이끌어 나감.)



학부 2학년때 씀. 돌이켜보면, 가장 무엇이가를 쓰고 싶어했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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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저번에 그 여자에 대한 글을 꼬옥 써서 국문과 학우들과 그 밖의 이 게시판에 오셔서 글을 읽으시는 분들에게 이야기를 하고 싶었습니다만. 여의치 않았습니다. 아무래도 제 체력이 문제이거나, 혹은 제 글쓰기 방식이 기본적으로 뻗어나가기 이기 때문입니다. 나름대로 하이퍼 텍스트틱한 특성을 지니고 있지 않습니까. -_-a


뭐. 어쨌든. 그 여자는 수수하고 조금은 귀엽게 생기고 회사원 틱한 옷을 입은 여자였습니다. 회사에 가는 중이었다면 출근을 조금 늦게 하는 것이겠지요. 제가 교대에서 2호선을 갈아타는데 그녀는 그 자리에 앉아있었고, 제가 서울대입구역에서 내릴 때까지 그녀는 그 자리에 계속 앉아있었습니다. 아무래도 여러 사항으로 미루어 짐작해 볼 때. 분명 학생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제 짐작으로는 (그리고 제가 이렇게 추론하는 여러 근거들이 밝혀지겠지만) 종합운동장역에서 지하철을 탄 것 같습니다. 버스를 타고 오다가 말이지요. 그리고 목적지는 신도림이 아닐까 싶습니다. 확률이 제일 높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추리의 근거들은 글이 전개되면서 나타날 것 같습니다.


우선 저와 제 옆의 그 신사가 그녀를 그렇게 멍하게 주목하던 것은, 무엇보다도...... 라고 하기에는 무엇하지만 그다지 부차적이지도 않은 이유로, 그녀의 가방과 그녀가 그 가방을 이용하는 방식의 의외성 때문이었습니다.


그녀는 루이 뷔통 커다란 옆에 끼는 가방을 오른쪽 옆구리 쪽에 세워두고 앉아있었습니다. 지하철 의자의 맨 오른쪽 가에 앉았기 때문에, 일종의 철봉 비슷한 칸막이와 그녀 사이에 그녀의 가방을 끼워서 세워두고 있었습니다.


잠깐, 여기서 제가 예전에 가방에 대해 고찰을 했던 적이 있습니다. 이를 상기해 보았습니다. 가방이라는 것은 인간을 설명해 줄 수 있고, 나아가 모든 존재하는 것들에 대해 말해 준다고 생각합니다.


가방의 의식 혹은 표면적 욕구는 무엇인가를 '담고자 하는' 욕구입니다. 이는 분명합니다. 제 가장 친한 가방이 그렇게 말했습니다. 여기서 '말했다' 라는 것은 의식적으로 인식하고 있고, 당당히 주장할 수 있었다라고 바꾸어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는 조금 오래되서 본래의 색 보다 칙칙해진 life guard 배낭용 가방이었는데.


"이봐. 당연히 우리들은 무언가를 항상 '담고' 싶어해. 이는 자연스러운 거라고.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그랬어. 예전부터. 나는 항상 무언가를 '담고' 싶어했지. 왜 그랬는지는 몰라. 여러 가지로 설명할 수는 있겠는데. 이러한 설명은 사건 후의 합리화일 뿐이지. 그저 그래. 담고 싶어."


이러한 가방의 '담고자 하는 욕구' 에 대해 어떤 이는 이것이 존재의 허무감을 만족시키려는 본질적 의지라고 설명하기도 하였고, 누구는 자본주의 사회에 있어 무언가 '담는다' 라는 것은 곧 무언가를 '소비한다'와 연관 시켜서 설명할 수 있기 때문에, 이는 사회에 의해 세뇌된 의식일 뿐이다. 그저 가방 자체로 존재해야만 한다. 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이런저러한 논의들에 대해서 가방에게 묻자, 가방은 어의없다는 듯이 위의 발언을 했지요.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볼수록, 가방의 표면적 의식을 살며시 드러내서 그 무의식적 욕구를 살펴보면 뜻밖의 수확을 얻게 됩니다. 가방이 무언가를 '담고자' 하는 욕구는 무언가를 '꺼내기' 위해서 입니다. 가방의 보다 본질적인- 그러나 가방군은 이를 회피하는 듯이 보였던- 욕구는 바로 무언가를 '꺼내려는' 욕구입니다.


즉 무언가 '담고자' 하는 욕구는 무언가 '꺼내고자' 하는 욕구에서 비롯된 것임에 만큼, 2차적인 욕구입니다. 그럼에도 가방군은 '담고자' 하는 욕구가 자신의 가장 본질적인 욕구임을 주장했고, 무언가를 '꺼낸다' 라는 말은 마치 신성 부정의 말을 들은 것 같은 표정을 지었습니다.


여기서 모순이 생기는데, 무언가 '담고자' 하는 욕구는 무언가 '꺼내고자' 하는 욕구와 일견 보기에 정반대의 욕구로 보입니다. 이러한 의식과 무의식의 충돌과 갈등이 가방이라는 존재의 가치를 신성하게 하고 이것이 바로 존재의 이유다. 라고 주장하시는 분들이 있기도 한데. 이분들의 IQ를 모두 곱할수록 0에 수렴한다고 합니다.


어쨌든 이를 사람의 '먹는 욕구'와 '싸는 욕구'에 비유하기도 하는데, 이러한 비유를 통해 가방의 본질적 욕구를 그 의식적 차원과 무의식적 차원의 모순이 없게 할 수 있습니다. 모두들 알아차렸겠지만 말입니다. 즉 '의식적-담고자하는 욕구'와 '무의식적-꺼내고자 하는 욕구'의 종합은 무언가를 필요할 때 까지 A에서 B로 운반하기 위한 욕구입니다. 즉 A에서 담은 다음에 B에서 꺼내기 위한 것입니다.


즉 일종의 운반체라는 것이 가방 존재이고 또한 본질입니다. 샤르트르 등의 실존주의자들이 무슨 말을 하듯이, 이는 모둔 존재에 똑같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존재라는 것은 일종의 운반체 입니다. 무엇을 운반하느냐가 중요하겠지요. 그 운반에 대해서 고찰을 해야 합니다.


다시 가방군의 상징으로 돌아옵니다. 가방이라는 것은 정말 오래된 유래를 가진 것이고, 여러 상징들과 신화에 되풀이 되며 쓰여집니다. 그 중 대표적이면서 신비주의 집단에서 오랫동안 집착해 온 '바보의 상징'에 대해서 고찰해 보면, 존재가 무엇을 담지해야 되는가는 일견 명백해 보입니다.


바보라는 것은 신비주의 상징에 있어 '입문자'의 상징입니다. 여기서 입문이란 신비에로의 입문이고 그럼으로 즉 진리에로의 입문이며, 빛, 선, 천국, 그리고 나아가 신으로의 입문입니다. 신으로의 입문. 이것이 모든 존재의 움직이는 방향이고 모든 존재의 운동성은 이리로 향합니다. 이를 구체적 상징을 통해 살펴보아야 합니다.


바보의 상징은 한 바보가 괴나리 봇짐을 지고 광대복을 입고 개에게 물어뜯기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모두 고도의 상징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서, 우선적으로 광대라고 하는 존재의 의미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광대는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고 있는 존재입니다. 왕을 웃겨야 살고, 왕을 화내게 하면 죽습니다. 왕을 웃기는 것은 왕 그 자신의 희화화로써 합니다. 유머와 웃음의 매커니즘은 긴장의 해소라는 것이 정설입니다. 이러한 긴장은 자기 비하와 그의 극복에서 제일 크게 나타나기 때문에, 왕의 광대는 왕을 끊임없이 희화화합니다. 이것이 도가 지나치면 광대는 죽는 것이요, 미진하다면 왕은 웃지 않게 되어 또한 광대는 죽는 것입니다. 즉 중용이 중요합니다.


중용 자체의 의미도 물론 -여러 동양의 스승들이 강조하셨지만- 중요합니다. 진리로 신으로 향하는 자들은 당연히 중용을 취해야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더욱 중요한 상징은 왕과 광대 자신과의 관계 입니다. 왕이라는 것은 세속을 상징하고, 뭍 대중들의 욕망을 집결시킨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러할 때 입문자는 세속에서 너무 멀어지거나 욕망을 회피하는 것도 안 되고 그렇다고 거기에 빠져서도 안 됩니다. 진리는 세상 밖에 있지 않고 세상 안에 있지만, 세상 안의 인물로는 세상을 바라볼 수 없습니다. 따라서 세상 안에 있으면서 세상 밖에 있는 그 절묘한 경계를 유지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광대의 상징은 이러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개에게 물어뜯기는 것도 이와 연관시켜서 이해해야 합니다. 개라는 것은 짐승이요, 무엇보다도 인간의 짐승입니다. 인간의 육체적 욕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에게 물어뜯기면서 광대는 길을 재촉하고 있음은 아까의 광대의 상징과 유사한 의미를 담지하고 있습니다. 개를 억제하는 것이 아니라, 개가 물어뜯게 놓아두고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이제 제일 중요한 상징인 괴나리 봇짐 상징이 남았습니다. 물론 이는 '길'을 떠난다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길이라는 것은 인류적 차원의 상징으로 단순히 물리적 차원의 길이라기보다는 인생 과정 특히 진리로 향한 빛으로 향한 신으로 향한 길을 의미합니다.


괴나리 봇짐은 기다란 나무 막대 한쪽에 보따리를 동여맨 것입니다. 이는 명백히. 막대기는 -> 1 보따리는 -> 0 을 의미합니다. 유한과 무한. 진리와 거짓. 세속적인 것과 신성한 것. 이를 보여줍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다시 되풀이 되지만. 1이라는 막대기에 0이라는 보따리가 매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즉 진리나 빛이나 신으로 향하는 길은 모두 이 세상으로부터 비롯됨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바보에게 필요한 것은 막대기가 아니라 보따리이고, 막대기는 보따리를 보다 잘 동여매기 위해서. 즉 보따리에 더 잘 접근하고 이를 간직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도 필요한 것입니다.


위 세 차원의 상징들은 모두 같은 것을 가르키고 있습니다. 진리와 신으로 향하는 길은 세상과 거짓이 아무리 추악하고 입문자를 괴롭히더라도 (개의 상징이 물어뜯고 있지요) 그곳으로 부터 나아가야 한다는 점입니다.


존재라는 것은 우선적으로 세상에 물자체로 있습니다. 이를 거부하거나 이것에 떠나서 진리나 신으로 나아가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영을 육에 유배된 것으로 파악하더라도 육이라는 것은 감옥이오 속죄의 장소라고 하더라도 필수적인 것입니다.


으음....... 그래요. 그 여자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 여자의 루이 뷔통 이야기를 했지요. 그런데, 제가 그 여자가 그 가방에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는 이야기 했습니까? 안 했다고요?


오오... 이제 부터가 본론인데.. 역시 힘들군요.. 저번에 쓴다고 했던 리쾨르 서평도 쓰지 않았고 말입니다.... 힘듭니다. 그럼 또 다음에 이어 쓰면 되지요. 그 여자. 참.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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