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3장 개인과 사회'를 요약하면 

'개인'과 '사회'의 관계를 논할 때, 이를 '살아 있는 과정의 복합체'로 여겨야하며, '인간 조직의 연속적인 과정 자체는 인간적인 것이 아닌 모든 것들과의 연속적인 행위와 적응이며, 이러한 행위와 적응에서 핵심적인 것은 계속되는 변이와 그 변이를 전달하려는 노력을 통해 성장하는 학습과 의사소통의 과정'이라는 것이다. 

선험적으로 파악되는 내용을 길게 써 놓았지만, 이러한 결론 즉 생성하는 주체, 또는 들뢰즈적 의미로 '욕망기계'와 같은 개념을 선취하고 있다고도 파악할 수 있다. 하지만, 이 논의가 너무 풀어해쳐있어서, 왜 이런 식으로 쓰게 되었는지 궁금하다. 1961년이라는 시간은, 이미 라캉이 활동한지 오래인 때이고, 르페브르가 '일상생활 비판'을 출간하기도 하였다. 이들과 비교해보면, 이 논의의 나이브함이랄까, 지적 협소함을 느낄 수 있는데, 뭐 물론 중요한 것은 아직 본론도 읽기 전이라는 것 -_-; 아니면 프랑스 사람들이 항상 주장하는 '영국 사상계의 독자성' 나쁘게 말하면 '폐쇄성/느림'을 보여주는 사례일까. 

 

그러니까, 윌리엄스를 읽는다는 것은, 비슷한 시기 대륙에서 진행되는 논의들과 영국이라는 특수한 공간에서 지체(?)내지는 따로 독특한 논의가 진행되고 있는 상황을 목도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수도 있다. 

3.1 

논의를 순서대로 조금 따라가보면, 우선 '정신 속에서 학습되고 창조된 패턴과, 관계, 관습, 제도들 속에서 소통되고 작용하게 된 패턴 사이의 본질적인 관계, 진정한 상호 작용의 원칙'으로서 '문화'를 규정한다. 이를 통해 '개인과 사회의 관계'를 다시 논의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 '개인'이란 어떤 의미였는지, 어떻게 '묘사'되었는지를 중세사상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살펴본다. 

중세에는 '한 인간이 그 사회적 질서 내에서 차지하는 위치에 의해 규정되는 방식에 중점'을 둔다면, 이제 개신교로 넘어가면서, '전체적 질서에서 관계들의 복잡한 구조'를 통해 이해되던 운명이 '개인과 그의 신의 관계'를 통해서 이해된다. 

즉 '인간-교회-신에서 인간-신으로의 변화는 '개인'이란 무엇인가에 관한 새로운 의미에 의해 기록되는 것이다. 또 자본주의 성장에 따라 이동성이 증가하고, 최소한 일부의사람들이 자기 지위를 변화시킬 수 있게 되면서, 개인의 사회적 역할과 분리할 수 있는 의미의 개인이 된다는 생각도 힘을 얻는다. 이제 고정된 질서 안에서 어떤 기능을 하느냐가 아니라 어떤 활동을 시작하고 특정한 방향을 택하는가가 문제이다. 이 때문에 '나는 무엇인가'는 '나는 무엇이 되고 싶은가', '내 노력으로 무엇이 되었는가'하는 정도까지 확장해서 다시 정의된다. "즉 본질적으로 개인의 개념은 그가 이제까지 통상적으로 규정된 관계들의 복합체에서 추상해낸 개념이다."(133) 

사회도 마찬가지로, 홉스에서 공리주의자들에 이르는 체계에서는 발가벗은 존재로서의 인간을 출발로 사회는 거기에서 파생되어 나온 것으로 파악했다. 대안적인 정통(루소, 헤겔)은 사회를 이상화하였다. 이러한 '개인'과 '사회'의 매개적인 용어로서 '공동체'나 '연관'등의 용어를 덧붙여, '개인'과 '사회'라는 거대한 추상적 개념들이 세부적으로 작용하는 개인 대 개인의 국지적인 관계들을 묘사한다. 이 중 특수한 용어로 '계급'이 있다.  

3.2

이러한 논의 후에 프로이트와 에릭 프롬을 논의하면서, 프로이트는 '발가벗은 인간 존재'에 대한 탐구로서 '개인'과 '사회'를 이론적으로 분리하여 한계를 보였다고 하고 프롬은 '내밀한 개인적 관계들과 사회적 관계의 네트워크 전체'를 연결시킬 가능성을 탐구했다고 보고 있다. 이러한 논의를 통해 결국 개인의 '잠재력'과 역사가 상호작용하면서 자의식이 성장한다고 결론짓는다. 즉 

"자율적인' 자아는 그에 근본적인 영향을 미치는 사회적 과정에서 성장하지만, 획득된 자율성의 정도에 따라 이미 언급한 바 있는 다음 단계, 즉 개인이 자신에게 영향을 주었고 현재도 주고 있는 사회적 과정을 변화시키거나 수정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는 단계가 가능해진다." (143) 

이를 통해 '개인'이나 '사회'에 대한 분석이, '개인'은 추상적 설명을 실질적인 성장과정으로 되돌려놓는다면, '사회'에 대한 분석은 하나의 추상을 현실적인 관계들의 실제 복합체로 돌려놓는다. (143) 

사실, 맨 처음부터 지적했던, '문화', '개인', '사회'라는 개념들의 추상성을 인지하고 있지만, 그 전장에서 윌리엄스는 고군분투한다. 윌리엄스도 언급한 바 '계급'이나 (당시에 이미 루카치의 "역사와 계급의식"도 출간된지 오래인데, 왜 루카치와 직접적으로 대결하려 하지 않는가. 계급의식과 현실의 상호관계, 그 관계의 변증법적 발전으로서의 의식의 발전과 현실의 지양 등등의 논의와 대결하지 않기 때문에, 또는 윌리엄스는 선행 논의와는 무엇과도 대결하려고 하지 않는듯이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어디에서 윌리엄스가 튀어나온 것인지 알기 어렵다. 윌리엄스가 말하는 '개인'과 '사회'의 관계만큼, 헤겔이나 루카치가 골몰한 주제도 없을 터인데... ) 여타 선재한 개념들과 싸우지 않는 것이 아쉽다. 흥미로운 것은 각주가 하나도 없는 것이다. 가끔 폴드만 같은 논의를 읽어보면, 도대체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왜 비판만 하다 끝나는 건지, 자기 이야기가 있기는 한건지 골똘히 들여다보고 생각해봐야 알겠지만, 이 윌리엄스는 모두 다 자기 이야기다. 플라톤도 아니고, 이건 뭐;; (플라톤도 읽다보면 간혹은 당대 논의들을 끌어온 다음에 매우 심하게 난도질하고 깐다.) 


 

 

  



 

그러니 다음과 같은 당연한 논의를 하고 있으면서도, 자신의 개념은 없다. 

"한 사회 내에서 '집단들'을 의식한다는 것은 중요한 진전이다. 물론 단지 추상의 근거를 이동하여 이번에는 집단을 단일한 절대자로 만들어버릴 가능성도 있다. 가장 단순한 집단에서도 마치 '사회'에서처럼 협동관계뿐만 아니라 긴장과 갈등의 관계가 존재한다. (...) 어떤 집단은 척도의 편리한 표식이 될수도 있으나 그것은 표식일 뿐이며, 전체 척도의 연속성이라는 사실 자체가 근본을 이룬다." (144) 

그렇다면 논의의 단위(계급과도 같은)를 설정하거나, 아니면 접속의 필수 또는 관계맺음 즉 운동하는 과정을 내포하는 개념도구(들뢰즈의 '기계'와도 같은)가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논의 후에 그 개념으로 돌아오는 것은 참 가혹하다. 그렇다면 독자는 윌리엄스를 읽으면서, '개인', '사회', '문화'라는 말이 나올 때, 이것이 단어로서 존재하지만, 추상일 뿐이며, 그 안의 다층적인 관계망을 갖고 있는 '생성하는 관계'를 지칭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3.3
이러한 논의 후, 윌리엄스는 '개인과 사회'에 대해 생각할 때 단순히 동조-비동조가 아니라 여러가지 어휘를 늘려보자고 하면서 구성원(member), 신민, 하인과 같은 것을 동조의 양식으로, 반역자, 망명자, 부랑자를 비동조의 양식으로 명명하고 각각을 논의한다. 하지만 이는 어휘만 늘리고 '개인과 사회'를 묘사하는 몇가지 방식만을 추가했을 뿐이지, '동조-비동조'라는 단순성을 질적으로는 극복한게 아니지 않을까. 여하튼 분류방식을 보면 이렇다. 

구성원 -자신을 한 사람의 구성원으로, 그가 속한 사회의 한 개인으로서 의식하고 있고, 개인의 입장에서 사회를 자신과 반대되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고 자신의 목적을 실현할 자연스러운 수단으로 본다는 것이 구성원 자격의 본질 

신민과 하인 -개인적으로는 수용하지 않는 권위에 복종하고, 개인적 의미가 전혀 없는 사회적 기능들을 수행하며, 그의 실질적인 욕망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방식으로 느끼고 생각함으로써 자신의 존재에 해를 입을 수도 있다.  

이 중 신민은 -자신을 아무리 어기더라도 속한 사회의 삶의 방식과 그 안에서 자신에게 지정된 위치를 수용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가 자신을 유지할 다른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즉 생존하기 위해서 사회에 동조해야 한다. 

하인- 압력이 신민보다는 덜 가혹하지만, 압력에는 저항할 수 없다. 신민은 선택의 여지가 없으나 하인에게는 선택의 환상이 주어지며, 자신을 규정한 그 위치의 삶의 방식과 자신의 삶을 동일시하도록 유도된다. 그것은 선택의 여지가 있다는 환각일 뿐인데, 그것은 신민과 마찬가지로 거절할 경우 삶을 유지할 다른 방도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환상으로 인해 선택권이 실질적인 것이라는 듯, 자신과 사회를 동일시 할 수 있다. 

반역자 -어떤 사회적 목적에 대해 아주 강렬하게 개인적 헌신을 하고, 그의 개인적인 존재와 특정한 사회적 노력의 패턴을 적극적으로 동일시한다는 점에서 구성원과 비슷하다. 그러나 그가 속한 사회의 방식이 아니라, 사회적 형식에 반발함으로써 또다른 사회적 형식을 확립하려고 한다. 

망명자 -그가 속한 사회의 생활 방식을 거부한다는 면에서 반역자와 마찬가지이지만, 싸우는 대신 떠난다. 

부랑자 - 자신의 사회의 목적들이 무의미하며 가치관도 부적절하다고 여기지만, 망명자의 자존심, 원칙을 고수하는 면이 결여되어 있다. 딱히 무슨 일이 벌어지기를 원하지 않으며, 자신을 가만히 내버려두기를 원한다. 

이러한 분류 후에 윌리엄스는 "우리가 단지 동조냐 비동조냐 하는 난국에서 벗어나려면 구성원, 신민, 하인, 혹은 반역자, 망명자, 부랑자 같은 것을 설명해야 한다. 그러나 다른 설명들과 같이 이들도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이 설명들은 단지 특정한 관계의 형식들을 분석할 뿐이다. 이러한 것들이 다양한 적응의 형식이 되는 단일한 '사회'는 없다. 실로 '사회' 자체도 그에 구현된 특정한 관계에 따라 마찬가지의 다양성을 띈다. (...) 구성원과 공동체, 하인과 기존 제도, 신민과 강요된 체제, 반역자와 독재, 망명자와 잃어버린 사회, 부랑자와 무의미한 사회 등은 모두 활동적인 조직과 작용과 상호작용의 형식들이다. 더욱이 실제 사회에서는 여기 설명된 관계들이 거의 항상 다른 집단과 척도들의 존재 때문에 복잡해진다." (156) 

"개인과 사회의 관계는 조직의 한 형식이지 단일한 실체가 아니기 떄문에 이 조직의 형식들 내에서 앞서 설명한 형식들이 더 결정적일 수는 있어도 개인과 사회의 관계는 좀더 넓은 영역의 현실적 관계들의 복잡한 구현체가 될 것이다." (157)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왜 윌리엄스가 맑스나 루카치 등의 개념과 싸우지 않는가이다. 그는 정말 '개인'과 '사회'의 관계에 대해, 그리고 그 관계를 매개하는 '문화'에 대해 알고 싶은 것이다. 그리고 이를 부분에서부터가 아니라 전체에서부터 봐야지 볼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이러한 시야를 확보할 수 있다고 생각하여, 소크라테스 처럼 혼자 비상하여 내려다보려는 자세는 무얼까. 그러면서도 이 개념들이 추상적이고 "실제로는 좀더 넓은 영역의 현실적 관계들의 복잡한 구현체가 될 것이다"로 계속 돌아오고 있다. 멀리 위로 올라가서 전체를 보면, 전체를 볼 수 있지만, 거무죽죽하게 불빛들만 보이는 것은 아닌가. 전체를 보려고 하면서 세부도 그리려고 하면 이는 불가능하지 않는가. 전체를 보려고 하면, 그리는 것은 전체의 모양새일 뿐이다. 본론에서, 윌리엄스는 뭘 하려고 이런 1부를 쓰고 있는 것일까...  (같은 영국지성으로 뉴튼이 떠오른다. "내가 조금 더 멀리 볼 수 있었던 것은, 거인의 어깨위에 올라선 난장이였기 때문"인가 뭐란가... ) 

3.4

"경험을 적절하게 설명하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용어들은 본질적으로 활동적인 것이어야 하지만, 우리가 만들어내는 모든 새로운 설명은 다소 신속하게 하나의 대상으로 바뀌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게 되면 경험을 분명하게 하기도, 경험에 충실하기도 매우 어려워진다. 중요한 사실은 모든 설명, 제공된 모든 해석들이 성장하는 용어라는 점이다." (157) 

3.5 

이제 맨처음 요약했듯이,'개인'과 '사회'의 관계를 논할 때, 이를 '살아 있는 과정의 복합체'로 여겨야하며, '인간 조직의 연속적인 과정 자체는 인간적인 것이 아닌 모든 것들과의 연속적인 행위와 적응이며, 이러한 행위와 적응에서 핵심적인 것은 계속되는 변이와 그 변이를 전달하려는 노력을 통해 성장하는 학습과 의사소통의 과정'이라는 논의가 나온다. 

'개인'을 연구하든, '사회'를 연구하든, 결국은 '이들 사이의 관계를 연구하는 것'이다. 개인을 '육체, 정신, 영혼으로 분리하고 감정, 의지, 사고, 의식과 무의식, 자아와 초자아 이드로 분리하고 사회를 집단, 계급, 협회 등등으로 분리하지만, 이들 중 어떤 것을 연구한다는 것은 역시 그들 간의 관계를 연구한다는 것이다. 실체를 따로 떼어서 서술할 수 있다고 가정하고 이를 규정하고 나면 그들 사이의 관계를 연구할 수 있을 것처럼 생각하지만, 사실 실체는 그 조직이 내내 서로 얽혀 있기 때문에 최종적으로 분리해낼 수 없는 관계의 형식이라는 것이다. (164)   

이거, 어디서 많이 들어본 소리인데.. 근대적 기계주의적 세계관에 반해서, 유기체적 세계관의 내용이다. 그래도 끝내, 윌리엄스는 아직도 자신의 구체적인 방법론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는다. 전체에 대한 욕망은 선적 직관말고, 어떻게 논의할 것인가. 가령 이것이 한 조직과 한 조직의 '관계'라고 할지라도, 그 '조직'이라는 것 또한 분류되고 그 '조직 내'의 관계가 또 있는데,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 것인가. 그것이 알고 싶은데, 계속 윌리엄스는 '지금'에 와서는 너무나 당연시된 이야기를 계속 서술한다. 

"인간 조직의 연속적인 과정 자체는 인간적인 것이 아닌 모든 것들과의 연속적인 행위와 적응이며, 이러한 행위와 적응에서 핵심적인 것은 계속되는 변이와 그 변이를 전달하려는 노력을 통해 성장하는 학습과 의사소통의 과정이다. 우리는 특이한 개인에게 작용하는 사회나 집단에 대해서만 생각한 것이 아니라, 수많은 특이한 개인들이 의사소통의 과정을 통해서 그들 자신을 형성해나갈 조직을 창조하고 필요한 경우 확대한다는 것도 생각해야 한다. 우리는 사회적 과정을 통해서 개인이 되지만, 개인은 특수한 역사로 표현되는 특수한 유전을 통해서 이루어진 독특한 존재라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 옳다." (165) 

이러한 논의가 민주주의에 대한 옹호로 나아가는 것은 흥미롭다. '인간이 본질적으로 학습하고 창조하며 소통하는 존재라면, 인간의 본성에 가장 적합한 유일한 사회 조직은 참여 민주주의다. 참여 민주주의를 통해 우리 모두는 독특한 개인으로서 학습하고 소통하며 통제한다."
  
"우리가 삶의 과정 전체를 구성하는 다양한 조직들 사이의 연속성을 인식해야 한다. 어떤 고정된 상태들을 추상해내고 거기에서 논의를 하는 것이 이러한 문제에 접근하는 통상적인 방법이지만, 사실은 전적으로 부적절하다. 새로운 개념들은 늘 어려운 것이지만, 새로운 개념을 만들어내려고 노력하고 거기에서부터 적절할 수 있는 새로운 접근법을 세우는 것이 반드시 필요한 듯 하다. (..) 그러한 접근법은 전체적인 과정의 패턴과 관계의 연구라 할 수 있으며, 이는 우리가 문화의 분석이라고 규정했던 것이기도 하다. 바로 창조와 소통과 제도를 만드는 실제의 작업 속에 개인적-사회적 성장의 공통된 과정이 있는 것이다." (167)
 

마지막으로 이렇게 끝낸다. 그러니까 새로운 개념을 만들라니까...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전체적인 과정의 패턴과 관계의 연구'라는 의미에서 '문화의 분석'이라고 하면, 결국 1장에서 규정한 것과 별반 다를바 없이 되돌아오게 되었다.... 맨 마지막 줄만 음미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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