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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의 위안부 - 식민지지배와 기억의 투쟁
박유하 지음 / 뿌리와이파리 / 2013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을 통해서 여러가지 지점을 배웠고, 동의하는 부분도 많다. 위안부가, 일본군에 의해 일방적으로 강압적인 물리적 폭력을 이용하여 납치당한 사람만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 그리고 일본군도 문제지만(구조적인 강압성), 조선인인 경우가 많은 주인(포주)가 직접적인 강제력이라는 것. 또 이 '위안부'는 상당부분 조선에서도 하위층 여성으로서 조선인 부모-사회에서도 버림받은 존재라는 점이다.
이것은 동의하는 것이고, 만약 기존 논의나 담론들이 이를 고의적으로 은폐함으로써, 위안부 문제를 조선 vs 일본의 구도로만 이해하도록 했다면 분명 문제가 있다. 위안부 문제에서 민족단위로 선을 긋는 것은 핵심적인 문제들을 은폐한다. 위안부 문제의 핵심은 섹슈얼리티, 계급들이 심층적으로 얽혀있는 것이고, 그 위에 부차적으로 민족의 문제가 감싸져있는 것이다.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일본인 위안부도 있었다. 이 문제에서 조선인 남자 자본가보다는 일본인 하위 여성이 조선인 위안부에 가깝다.
조선 vs 일본의 구도 속에서 위안부가 '가녀린 조선의 소녀'로써, '우리'가 '지켜주지 못했다'라는 기존 민족주의적-가부장적 담론을 공격하는 것은 중요하고, 위안부들의 일상 속에서 일본 군인들과의 '동지적'(박유하 선생의 표현. 그런데 이 개념은 문제가 많다. 분명 구조적 강압성은 일본군에 의해서 제기된 것이고, 성구매자도 일본인이다. 이는 현대 성매매 현장에서 성매수자 남성과 성매매 여성 중 일부가 서로 사랑하게 된다고 해서 '동지적' 관계라고 지칭하기 어려운 지점과 유사하다. 즉 일부 사례의 표면적 관계를 일반화해서 개념화할 수는 없다. 둘 사이의 근본적인 관계는 결국 성판매를 강요당한 것과 성구매자라는 것은 변하지 않는다.) 관계가 있었다는 것도 인정할 수 있다. 특히 일제'강점기'를 기억하는 방식 자체가 '상처받은 자신만을 기억하는 일은 협력하고 순종한 기억을 배제하고 배척한다. (..) 하지만 그런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워지지 않는 한 우리는 언제까지고 등신대의 자신을 마주하지 못한다. 그건 자신의 신체에서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을 가능한 한 보지 않으려고 하는 심리와 한없이 닮아 있다' (134)는 대목은 곱씹어볼 대목이다.
해방 이후 '우리'가 식민지를 기억하는 방식 자체는, 민족주의적 정통성을 지닌 국민-주체로써, 협력-친일을 단죄하며 나머지 조선인들은 순진무구한 피해자로 그리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식민지 시대의 일상은 '회색'지대로 남겨져 있는 부분들이 분명 많고,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일본인들 중에도 착한 사람들이 있고 나쁜 놈들도 있다. 조선인들이 그러한 것처럼.
이러한 재구성은 상상적으로 민족을 구분선으로 해서 피해자-조선/가해자-일본을 나눈다. 하지만 여기서도 본질은 민족이 아니다. 이완용과 같은 친일파-지주계급은 얼마나 잘먹고 잘 살았는가? 여기서도 본질은 피지배층과 지배층의 문제이고, 조선이 피지배이고 일본이 지배로 환원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조선인 엘리트층이면서 일제와 협력한 이들 또한 지배층으로서 조선 민중을 착취하고 탄압했고, 이는 해방 후 '지금-여기'에까지 이어지는 계보이다. 따라서 비판하는 지점은 '일본'뿐만 아니라, '일제', 즉 일본 정부와 지배층과 이에 협력해서 공동으로 통치작업을 한 조선인 지배층이다. (그리고 이들의 계보는 지금 오늘날의 한국에까지 이어진다.)
그런데 논의가 동의할 수 없게 되는 것은 다음과 같은 대목이다.
'문제는 그런 동지적 상황을 그저 예외적인 것으로서 배제해버린 일이 '동지적' 측면에만 혹은 '매춘부'적인 측면에만 주목하려 했던 이들의 반발을 불렀고, 대립을 심화시켰다는 점이다. 말하자면 위안부의 증언을 총체적으로 보지 않은 것이, 다시 말해 위안부의 '피해'에만 주목하고 나머지는 외면했던 것이 일본 국민의 폭넓은 지지를 얻지 못했고, 결과적으로 문제의 해결을 가로막은 셈이다.' (139)
앞서 말했듯이, 그런 동지적 상황은 '예외적'이 아니라, 비본질적인 것이다. 즉 층위가 다르다. 위안부와 일본군의 관계의 본질, 즉 어떤 특정 위안부와 어떤 특정 일본군의 관계가 아니라, 위안부와 일본군의 관계라는 규정 자체의 본질적인 측면이 있고, 그 본질과는 구분되는 다른 층위의 일반화할 수 없는 측면이 있다. 이것이 마치 여러가지 '본질'들이 있는데, 한 측면만 부각했기 때문에 다른 측면을 부각한 이들의 반발과 대립을 심화시켰다는 식으로 이해할 수는 없다. 오히려, 위안부와 일본제국 사이의 본질적인 관계인 구조적 폭력성이라는 그 본질을 부각하고, 이를 고발해야 한다.
박유하 선생이 앞서 '총체적'으로 위안부의 증언을 보아야 한다고 했기 때문에 부언하자면, 총체성이란 본질과 관계 되는 것이지, 통계적으로 모든 특성들을 모아 놓은 것이 아니다.
때문에 위안부와 일본군의 관계를 '동지적'이라거나, 그들은 (자발적) '매춘부'라고 하는 이들은, 본질을 무시하고 특수한 관계만을 지적함으로써, 구조적 폭력에서는 눈을 돌리고 있는 것이다.
이 책에서 배울 점은 분명 있다. 위안부 문제는 '민족' 문제이기 이전에, 섹슈얼리티와 계급의 문제이다. 그러나, 이 섹슈얼리티와 계급의 문제, 그 구조적 폭력성을 직시하기 위해서는 위안부와 일본군의 관계의 한 '부분'이 동지적인 관계였고 매춘부적인 특성이 있음을 지적하는게 아니라, 오히려 그 위안부와 일본군 관계의 '본질'을 파고들어야 한다. 만약 나라면 이를 현대의 성매매 노동자(이 개념도 문제적이지만, 일단은 사용하도록 한다.)들과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비교하는 것을 통해 더 사유할 지점등을 생성할 수 있다고 본다. (특히 현재 이루어지고 있는 해외 원정 성매매는 '해외 원정'이라는 측면 때문에 위안부와의 공통점/차이점을 더 잘 사유해서 그 본질에 대해 고찰할 수 있게 한다. 물론 여기에 제국주의 문제도 중요한 차원이 있다. 일본 내지 여성과 조선인 여성 사이는 분명 법적인, 실제적인 차별이 있었다.)
성매매 노동은 과연 자유로운 선택일 수 있는가? 역사적 사례로서, 그 구조적 폭력성의 단계가 극심했던 위안부와 어떻게 같고 다른가? 위안부 문제는 여러 차원에서 아직 해결되지 않은 문제이다. 당사자가 아직도 생존해 계시고, 고통받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또 다른 차원에서 위안부 문제는, 많은 성매매 여성들이 유사한 '구조적 폭력' 속에서 성매매를 하고 있다는 점에서 지속되고 있는 문제인 것이다.
그럼에도, 박유하 교수의 '제국의 위안부' 판금에는 반대한다. 이를 한국의 나아가 일본의 공론장에서 논의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가열차게 논의해야 한다. 박유하 교수는 분명, 처음에는 일본어로 일본의 '중도'내지 '우익'을 향해 이 글을 썼고, 그 와중에 그들의 논리와 감성을 이용하려고 하는 모습을 보였다.
일단 박유하 선생의 대상독자는 위안부에 대해서 심정적 동정을 지니고 있으면서, 일본군에게 책임을 묻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한국인 뿐아니라, 오히려 더 중요하게 말을 걸고 있는 대상은 일본의 우파 지식인 내지, 자신이 합리적인 사유를 하고 있다고 믿으며 위안부의 존재에 대해 사과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일본인이다. 한국 독자들은 당연히 '한국어'로 쓰였기 때문에, 이것을 한국 대상독자로 인식하고 왜 '우리' '한국인' 교수가 이렇게 '친일'적으로 썼는지 분노하는 것이지만, 사실 이 책의 원고는 일본어로 2011년에 연재되었던 것이고, 선생은 거의 고치지 않았다고 적고 있다.
물론 일본어로 썼다고, 일본인만 보는 것은 아니고, 한국어로 썼다고 또 한국인만 보는 것은 아니다. (전자가 더 독자가 넓기는 하다.) 그럼에도 박유하 선생이 글을 쓸 당시의 대상독자가 일본인임을 인식하고 읽었을 때, 말을 걸고 있는 위치 때문에 선생의 몇몇 무리한 논점들이 일종의 논리적, 감성적 설득의 일환으로 도입된 것일 수도 있다는 짐작을 하게 한다.
즉 '우리'의 입장에서 이 책의 몇몇 대목들은 위안부=참전 병사의 고통을 동급으로 놓는듯 하여, 어안이 벙벙하게 만든다. 그러나, 이의 의도는 참전 병사에 더 심정적으로 가까운 일본 우익들에게, 그들과 거리가 먼 타자인 '위안부'를 다가가게 하기 위한 장치로도 읽힐 수 있다.
이렇게 의도를 '이해'한다고 해서, 박유하 선생의 논의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그러나 다른 관점에서 보면, 박유하 교수의 이 책과 논쟁하면서 일본의 중도와 우익의 논리를 논파할 수도 있다. 한일 위안부 학회, 한일 위안부 토론회 등을 만들고, 관련 논점들이 더 철저하게 파헤쳐져야 한다.
이 책이 판금되면 누구에게 이득이 될 것인가? 아무것도 변하는 것은 없이 한국의 우익 내지는 이 책을 '친일'이라고 낙인 찍는 것에 만족하는 자들은 '정의는 이루어졌다'라고 생각하며 변화하지 않을 것이고, 일본 우익과 극우는 저러니 한국과는 대화가 되지 않는다고 하고 변화하지 않을 것이다. 아니 오히려 더 자신들의 방향이 고착될 것이다.
민주사회에 시민이라면, 이러한 이슈에 대해서 사유하고 따져봐야만 한다. 당연히 힘든 일이다. 어쩔 수 없다. 그리고 이는 한국같은 엄청난 '피로 사회'에는 더 그러하다. 그럼에도, '닥치고 친일' 그러니 '판금' 같은 논리가 확장되면, 이 사회는 더 파쇼화되고 말 것이다. 생각하지 않는 자의 무서움이 아우슈비츠를 일어나게 한 중요한 요소였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