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궁금해하지 않지만 나 혼자 고백하는 추석 일성.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는 삶이라 오지 말래서 이번 주에는 출근을 하지 않았다.

월요일에는 나 홀로 교보문고를 떠돌았는데 서울에 볼일 보러 온 대학 후배가 얼굴만 보자고 해서 만나서 폭풍 수다를 떨었고. 화요일에는 도서관에서 책 읽고 글 쓰면서 놀다가 저녁에는 박찬욱 감독의 <어쩔수가없다>를 보러 갔다. 원래 영화관 자주 안 가는데, KT 멤버십 혜택으로 영화 무료 관람권이 있어서 갔다. 이병헌, 손예진을 보러 올라가는 길에 베일리가 있었다. 조나단 베일리. 내가 참 좋아하는 조나단 베일리랑 귀한 한 컷을 남겼다.

수요일에는 대상포진 2차 접종을 하고 커피숍에서 한잔하면서 맥파든 읽다가 전통시장 가서 추석 거리를 사지는 않고 구경만 했다. 목요일에는 종일 잤다. 한쪽 팔이 뻐근한 정도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38.7도까지 열이 나는 사람도 있는데, 나는 열나는 사람이라서 먹지도 씻지도 놀지도 않고 잠만 잤다. 금요일에는 빨래하고 청소하고 남편이랑 시장 나가서 추석 선물이랑 먹거리 이것저것 사서 돌아왔다. 하루하루가 나만 두고 신나게 질주하는 느낌이다. 그 사이사이 책을 읽었다.










『The Teacher』는 맥파든 12번째 책이다. 여러 권의 맥파든 중에서도 특별한 느낌이다. 소재 자체가 자극적이기도 하고 논쟁적이기도 한데, 허구한 날 놀라고 마지막에 '뜨악'하며 놀라는 스릴러 초보 독자인 나는 이 책의 결말 부분에서 어김없이 한 번, 아니 두 번 놀라기는 했다.

나쁜 새끼의 나쁜 짓은 전해 들어도 여전히 빡치는 이야기인지라 생략하기로 하자. 나는 나쁜 새끼의 나쁜 말에는 관심이 없다. 그러니깐, 나는 『롤리타』 속 험버트의 말에는 관심이 없다, 그 말씀이다. 그 행동이 아니라 그 마음에 일면 이해 가는 구석이 있기도 하다. 몸을 가지고, 몸속에서, 몸에 갇혀 살아가는 인간이라는 존재에게, 젊음이 주는 기쁨과 즐거움이란 말로 다 할 수 없는 그 무엇, 미치도록 부러운 그 무엇이다. 말 잘하는 인간들을 그것을 미화하고, 신화화하고, 이상화한다. 인류 전체를 통틀어 그걸 '사랑'이라 '칭할 수 있는' 권리는 남자에게만 주어졌기에, 가해와 피해의 그림은 극도로 명확하기에 자세히 듣지 알아도 안다. 젊음과 아름다움에 대한 찬탄은 당연한 거다. 자본주의 세계에서 그 명암이 더 짙어졌다고 볼 수 있겠지만, 늙음에 대한 경시와 젊음에 대한 숭배는 한결같았다고, 나는 생각한다.

<언젠가는>에서 이상은은 노래했다. "젊은 날엔 젊음을 모르고/사랑할 때 사랑이 보이지 않았네" 젊었을 때는(나 아직 젊어요. 초고령 사회로 초고속으로 진입하고 있는 대한민국의 중위 연령이 2023년에 46세였대요. 중위 연령에 가까워요, 솔찬히 가까워요.) 젊음을 모른다. 젊음이 얼마나 소중한 건지, 얼마나 눈부신 건지 모른다. 불안과, 걱정, 진동을 모르지 않지만, 그 역시 그러한 떨림 역시 젊음에게 주어진 부담스러운 선물이다.

다시 『The Teacher』로 돌아오자면, 나는 그 나쁜 놈의 범죄를 옹호하려는 게 아니다. 그 말을 자세히 듣고 싶지가 않다. 내가 계속 궁금한 지점은 그 나쁜 놈의 꼬임에 넘어가는 그 순진한 마음의 향방이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진심을 어디까지 믿을 수 있는가.

그의 말을, 그의 고백을, 그의 진심을 어디까지 신뢰할 수 있는가. 그의 말이 모두 진심이었다고 치자. 그가 정말 나를 사랑한다고, 나를 원한다고 하자. 지금까지 그의 행동으로 미루어 나는 그걸 확신할 수 있다고 치자. 나를 알아본 그와 나는 소울메이트라고, 그가 내게 새로운 세상을 열어준 것처럼, 나도 그에게 새로운 세계가 되어주었다고 치자. 그렇다고 치자. 사실이라고 하자.

그 확신은 어디에서 오는가. 그 믿음은 어디에서 오는가. 어디에서 오고, 어디로 가는가. 왔는데 왜 가는가. 어렵게 와서는, 힘들게 와서는. 왜 가는가. 왜 그렇게 쉽게, 왜 그렇게 허망하게.

가 버리나. 후다닥. 정신 사납게. 서둘러.

김영하의 최근 산문집을 한 권 읽었고, 사사키 아타루의 작은 책을 한 권 읽었다. 한국에는 책이 없어서 주문하면 2주 걸린다길래 중고로 사 두고서는 여태 읽지 않고 책장 깊숙이 감춰져 두었던 걸 억지로 끄집어냈다. 책은, 자고로 들고 다녀야 하니깐. 글씨가 작아서 킨들로도 샀다. 한글책은 알라딘에서 잭 리처 행사할 때, 네 권을 세트로 판매했던걸 구매해 두었다고 한다. 든든한 마음, 행복한 한가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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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5-10-04 23: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바람돌이가 단발머리님 추석 일상을 궁금해합니다. ^^
혼자 서점도 가고 영화도 보고 책도 읽고 이상적인 일상입니다.
누군가가 나의 삶을 구원해주리라는 환상은 결국 내 삶이 너무 힘들기때문이겠지요. 그런데 그런 마음 너무 자주 많이 드는게 우리 삶이라 그 유혹을 물리치는건 여전히 쉽지 않네요.
프리다 맥파든 책은 한동안은 번역이 꽤 될거같아 즐거운 미음으로 기다리고 있어요. 연휴가 긴데 전 연휴 끝이 복직이라 하루히루가 아깝네요. ㅎㅎ
명절 연휴 일은 하지 마시고 휴식과 책이 함께하는 일상을 기원해봅니다. ㅎㅎ

단발머리 2025-10-05 07:06   좋아요 1 | URL
단발머리 추석 일성 궁금해하시는 귀한 분, 바람돌이님 일단 한 분 모셨습니다.
서점도 가고 영화도 보고 책도 보고, 아주 조용하고 단촐한 추석 시즌 1이었습니다.

누군가가 나의 삶을 구원해주리라는 환상은 인간이라면 끝내 떨치기 어려울 거 같아요. 눈에 보이는 대상처럼 확실한게 어디 있을까 싶고요. 그게 아니고, 그게 전부가 아니라 아무리 말해도 말이지요. 이 책의 주인공처럼 또래 집단 적응이 어려웠던 경우는 더 그랬을 거 같고요.

연휴 끝이 복직이라 하시니 이 연휴가 더 소중하고 귀중하실 거 같아요. 남은 기간 잘 마무리하시고요~
바람돌이님도 맛난 간식과 휴식, 그리고 책이랑 함께하는 추석 보내시길 바래요.
올해는 부추전 안 부치시는 걸로~~~~~~~

다락방 2025-10-05 11: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페어....왜이렇게 두꺼워요?ㅠㅠ

단발머리 2025-10-08 20:48   좋아요 0 | URL
저건 매스마켓용이라 그런지 책이 작아요. 그래서 두꺼운 걸까요? ㅠㅠㅠㅠㅠㅠ

다락방 2025-10-05 12: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 글에서 대학 후배를 만나 폭풍 수다 떨었다는 부분을 참 좋아합니다. 얼마나 즐거웟을까요. 폭풍 수다는 즐겁지요.
그리고.. 베일리랑 찍은 귀한 사진은 왜 올리지 않으신거죠? 저는 그것이 무척 궁금합니다.

저는 대상포진 예방접종 했었는데 그 때 팔 완전 부어올랐더랬어요. 와 진짜 힘들었어요. 저는 두 번 맞지 않고 한 번 맞았던 것 같은데.. 이게 약마다 다른걸까요?

영어공부 열심히 해서 the teacher 은 꼭 영어책으로 읽어보고 싶어요.
아직 연휴가 많이 남은거지요, 단발머리 님? 즐기세요. 충분히 즐기세요. 책 많이 읽고 많이 쓰세요!!

단발머리 2025-10-08 20:50   좋아요 0 | URL
폭풍 수다 즐거웠습니다. 폭풍 수다 후에는 그 다음을 기약하죠. 왜냐면 할 이야기를 다 하지 못해서요 ㅎㅎㅎ

다락방님도 대상포진하고 아프셨군요. 저의 식구들도 한 번 맞았거든요. 저는 그냥 집 앞 병원 갔는데, 두 번 맞는거더라구요. 돈도 많이 들고... 약이 달라서 그런거라고, 예방율은 더 높다고 그러더라구요.

책은 많이 못 읽었지만 즐거운 연휴입니다. 이제 3일밖에 안 남았어요. 맘이 급합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책읽는나무 2025-10-06 14: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대상포진 주사도 열이 나기도 하고 아프군요.ㅜ.ㅜ 아직 안 맞아봐서…나이가 있어 이젠 맞아야 할 때인데 매번 까먹어요.
저는 어제 딸이랑 어쩔 수가 없다. 영화 보고 왔어요. 손예진이 본인의 역할 비중이 그닥 크지 않아 출연할지 말지 조금 망설였다고 하더니 막상 영화를 보니까 어휴..비중이 절대 약하지 않던 걸요? 딸이랑 걸어나오면서 내가 손예진이었음 이병헌 신고 했을 것 같다고 말 했더니 딸이 그래도 부부지 않냐고 되물어서 나는 저런 남편하고 살다가 나도 죽임을 당할 것 같아 무서워서 못 살 것 같다고 했죠.ㅋㅋㅋㅋ

스릴러 초보 독자 단발 님의 스릴러물 독서 모습 좀 귀여우신 것 아닌가요?ㅋㅋㅋㅋ
결말에 놀라시지만 심층분석 들어가면 또 초보가 아니신…ㅋㅋㅋ
사람이 사람의 말을 통해 그 사람의 진심을 꿰뚫어 보아 믿어버리기는 참 쉽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하기 쉽지만 정말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만 바라봐도 타인을 너무 잘 믿어 인생 폭망하는 경우를 많이 접하게 되는 것 같단 생각을 하게 되네요.
그것도 추석에 말이죠?ㅋㅋㅋ
긴 연휴…추석 일정 더 듣고 싶네요.
그러고보니 저도 어제 딸이랑 영화도 보고 차도 마시고 서점에 가서 책 세 권 사들고 집에 오긴 했어요. 추석 전날 일정이 조금 비슷했네요. 연휴 내내의 일정도 좀 비슷할 것 같기도 하구요.ㅋㅋㅋㅋ
암튼 긴 연휴 황금 연휴 잘 보내시길 바랍니다.^^

단발머리 2025-10-08 21:00   좋아요 1 | URL
제 주위에는 젊은 사람들(10대 여자청소년, 30대 남성, 40대 남성, 50대 여성)을 포함, 유독 대상포진으로 고생한 분들이 많았어요. 저도 면역력이 걱정되는 사람이라 ㅋㅋㅋㅋㅋㅋㅋㅋ 그래서 그냥 맞자 싶어서 이번에 맞게 되었습니다.
저는, 내가 만약 손예진이었다면... (손예진 말고 손예진 역이겠죠^^) 그런 생각은 안 해보았는데... 지금 생각해 봤거든요. 저는 손예진처럼 했을거 같아요. 지금 생각으로서는 그래요 ㅎㅎ

프리다 맥파든이 올해 제 독서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어서 제가 참...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스릴러가 무서운 저이지만, 그래도 순한맛 스릴러라서 많이 무서워하지 않고 읽어가는 것 같아요. 그러나, 항상 범인을 못 맞춘다는게 문제인데요. 그래도 즐거운 독서시간이 되고 있어서, 괜찮다고 생각합니다ㅋㅋㅋ
저는 오늘 많이 걸었는데 볕이 너무 따가웠어요. 실내에 들어갔더니 목 아래쪽이랑 팔이 간지럽더라구요. 내일은 어디 나가지 말고 꼼짝말고 집에만 ㅋㅋㅋㅋㅋㅋ 있을 건 아니지만, 덜 걸어야겠어요.
책나무님도 책과 영화와 딸과의 데이트, 즐겁고 행복한 시간 보내시길 바래요~~ 일상도 공유해 주시구요^^

독서괭 2025-10-10 13: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대상포진 예방접종 하면 아플 수 있군요!! 아직 맞아본 적이 없는데 대비를 하고 맞아야겠네요. 이제는 다 나으신 거죠?
알찬 한가위 보내셨군요. 어페어가 주문하면 2주 걸리는 건가요??ㅠㅠ 한글책은 도서관에 있는 거 봤는데 두껍더라구요. 영어로 고ㅏ연... 읽을 수 있을 것인가? 샐리 루니 읽고 나서 프리다 맥파든 펴니 그 시원한 글자크기와 줄간격에 기쁨이 차오르던데 ㅋㅋㅋ 어페어 줄간격은 어떤가요?
˝내가 계속 궁금한 지점은 그 나쁜 놈의 꼬임에 넘어가는 그 순진한 마음의 향방이다.˝
오호, 이거 저도 궁금해집니다. 하우스메이드 다 읽으면 티쳐도 읽어봐야겠어요.

단발머리 2025-10-10 18:56   좋아요 1 | URL
이제는 괜찮아요. 왼팔이 아프고 열이 났습니다만 이제 ㅋㅋㅋㅋㅋㅋ 자유의 몸!!
영어로 같이 잭 리처 읽기로 한 거 잊지 마시구요. 그러나, 사실 저도 아직 시작 안 했다는 건 안 비밀 ㅋㅋㅋㅋㅋㅋㅋㅋㅋ어페어 줄간격은 매스마켓은 엄청나게 좁고요. 저는 킨들로 읽고 있어서 조정 가능합니다.

<The Teacher> 추천합니다. 나쁜 놈 욕할 포인트가 좀 많기는 합니다만 ㅋㅋㅋㅋㅋㅋㅋㅋ
 











12번째 프리다 맥파든, 『The Teacher』를 읽고 있다. 조심스럽고, 걱정스럽고, 내게는 좀 버거운 주제이기는 한데, 그래도 생각나는 데까지 써보자, 하는 마음으로 써본다.











내가 제일 먼저 읽은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의 책은 『에이미와 이저벨』이다. 나는 그때 스트라우트의 이름을 알았고, 올리브 키터리지의 명성을 익히 들었지만, 그의 작품에 대한 어떤 정보도 없는 상태였다. 지금은 잘 모르겠고, 그때는 그 감상을 풀어내는 일이 적잖이 난감했던 듯싶다. 페이퍼를 쓰기는 했는데, 뭐든 다 '말할 수 없다'라고 써두었더란다. 말할 수 없는 비밀이여, 뭐여. 그 이후로 한참을 나는 스트라우트를 읽지 않았다. 그러니깐, 내게 스트라우트는 한 번 버렸다가(?) 다시 잡은 카드, 옷장 비우기 한다고 꺼냈다가 다시 입게 된 가디건 같은 존재다. 루시 없는 삶이란 얼마나 건조한가. 윌리엄 없는 삶이란 얼마나 잔잔한가. 프리다 맥파든의 페이퍼에서 『에이미와 이저벨』 이야기를 하는 이유를, 이 책을 읽은 사람은 알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 바로 그 이유 때문이다. (말할 수 없는 비밀, 2탄)










『The Love Hypothesis』에서 올리브는 대학원생이고, 애덤은 교수이다. 올리브는 앞날이 불투명한 가난한 유학생이고, 애덤은 하버드 대학에서도 모셔가고 싶어 하는 실력자일 뿐만 아니라, 근사한 저택 (같은) 곳에서 살고 있을 정도로 경제적으로도 여유롭다. 하지만, 내가 애덤에게 질투를 느꼈던 부분은 그의 공적인 지위나 경제적 우위라기보다는(나도 모르게 올리브를 '나'라고 생각하고 있는, 이런 '나'를 보라) 그의 지식이었다. 박사과정을 마치고 교수로 임용되기까지 그의 시간, 숱한 밤들을 실험실에서 보내면서 그가 얻게 된 실제적 경험, 논문을 준비하고 발표하는 과정에서 더욱 정교해졌을 그의 과학적 사고, 여러 상황에 대한 정확한 판단력. 나는 그게 부러웠다. 올리브에게 없는 그것. 애덤은 그걸 가지고 있었다.




며칠 밤을 실험해봐도 예상되는 결과와 달라 고민하는 올리브. 올리브가 내민 사진을 보고 애덤이 뭐가 문제일지를 말해준다. 아마도 그게 문제 같다고 단박에 말해준다. 잠깐 봐줘도 답 알려주는 사람. 내 답이 맞는지 틀렸는지 확인해 주는 사람. 그런 사람을 어떻게 좋아하지 않을 수 있을까. 특히나, 그 사람이 내가 일하고 싶은 분야에서 이미 일정 정도의 성과를 거둔 사람이라면. 그가 내 결과물을, 내 성취를, 내 노력을 알아봐 준다면. 어떻게 그를 좋아하지 않을 수 있을까.











『섹스할 권리』의 가장 흥미로운 챕터는 단연 <학생과 잠자리하지 않기>이다. 이 책에 대해서는 <섹스는 샌드위치가 아니다>라는 글을 써두었다. (https://blog.aladin.co.kr/798187174/14262299)

레지나 바레카Regina Barreca는 묻는다. "어떤 시점에서 (…) 우리 각자에게 교수와 잠자리를 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교수가 되고 싶은지를 깨닫는 순간이 왔는가?" 바레카는 대다수 여성의 머릿속에는 (남성) 교수를 보며 피어오른 욕망을 교수에 대한 욕망으로 이해하라는 설정값이 이미 정해져 있다고 주장한다. 교수가 되고 싶은 여성이라면 반드시 극복해야 하는 생각이다. 한편 남학생들은 사회화된 대로 자신과 남교수를 연관 짓는다. 바로 그들처럼 되기를 바라는 것이다(그리고 정점에 이르면 이들을 파괴하고 대체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초자연적 내용을 그리는 드라마의 소스다). 여성과 남성이 교수를 매력적인 대상이 아니라 경쟁 상대로 볼 가능성의 차이는 어떤 자연스럽고 원시적인 기질의 차이에서 생긴 결과가 아니다. 성별에 따른 사회화의 결과다. (『섹스할 권리』, 232쪽)

레지나 바레카가 묻는 그 지점, 즉 '교수와 잠자리를 하고 싶은가' 아니면 '교수가 되고 싶은가'는 대부분의 남학생들이라면 묻지 않아도 될, 혹은 묻지 않는 질문이다. 하지만, 여학생에게는 다르다. 여학생들은 교수에 대한 존경과 경외심에 더해 친밀감이 겹쳐질 때, 교수에 대한 욕망이 어떤 것인지 판단하기가 쉽지 않다. 교수에 대한 욕망이 아니라, 교수라는 직업, 지위에 대한 열망일 수 있는데, 그 열망이 내 앞에 있는 이 교수에 대한 욕망과 혼재되어 있다면.

그녀는 그를, 그 교수를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내가 그를 사랑하고 있다고, 그를 내가 사랑하고 있다고 믿게 될 것이다.

대학생도 그러할진대, 미성년자라면. 그렇다면 어떨까. 원치 않게, 원하지 않는 판결을 가져와야 하나. 아, 내 페이퍼... 내 페이퍼에 올리고 싶지 않은 이야기. 아흐....


14세 여중생과 연인 관계라는 40대 남성의 말을... 들어주는 사회. 그 말에 현혹된 법정. 그 말을 믿어주는 판사(조희대).

프리다 맥파든의 세계에서도 이런 일이 일어난다. 서른여덟의 국어(English) 교사 네이트는 열여섯의 에디에게 말한다. 네게는 재능이 있다고. 너의 시를 너무 좋아한다고. 암울한 내 삶이 너를 통해 생기를 되찾았다고. 너와 나는 소울메이트라고. 경제적인 압박에 더해 근간의 일로 정서적으로 크게 위축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또래 친구 하나 없던 에디는 자신의 재능과 가능성을 알아주는 친절하고 잘생긴 교사의 말에 큰 위로를 받는다. 자신도 모르게 로맨틱한 감정이 배가되어 감을 느낀다. 점점 그 루트를 따라가게 된다.










전 세계 사람들에 따르면 로맨틱한 감정에는 보통 이런 게 들어간다. 심취와 이상화, 신체적·정서적으로 가까워지기를 바라는 마음, 독점하고 싶은 마음, 내 감정에 답이 오기를 바라는 마음, 상대의 행동을 과하게 생각하는 것, 관심을 보이고 상대에게 공감하는 것, 상대를 위해 자기 삶의 일부를 바꾸는 것, 상대가 반대로 자기를 좋아하지 않으면 갈수록 집착하는 것. (『에이스』, 194쪽)

사랑하게 될 때, 우리는 그 사람 앞에서 무력감을 느낀다. 사랑에 대해 말할 때마다, 나는 항상 그 부분에 매료된다. 그가, 내가 사랑하는 그가, 내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영역 바깥에 있다는 것. 내 손이 닿지 않는 곳에 그가 있다는 것. 나는, 그를 사랑하는 나는, 오랜 시간, 아니 영원히 그에게 닿을 수 없을 거라는 것. 그런 절망이 예상을 벗어나는 순간이 가끔, 아주 가끔 있기는 하다. 하지만, 마음과 마음의 이어짐은 찰나일 수 밖에 없고, 그래서 이루어진 사랑이란 건 언제나 기적일 수 밖에 없다.

감정에 대해서라면 판단할 수 없다. 내가 사랑하는 것에 왜 사랑하느냐 묻을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 사람이 성인이고, 다른 한 사람이 성인이 아닐 때, 성인이... 시간과 경험을 (충분히) 가지고 있는 성인이 자신이 가진 시간과 경험을 무기로 미성년자를 유혹하려 할 때, 이것이 네가 말하는 바로 그것이야, 라고 말할 때, 경험이 부족한 미성년자가 그것을 이겨내기는 쉽지 않을 터이다.

그런 나쁜 성인이, 나쁜 성인 새끼가 이 책에 나온다. 더 읽어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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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는나무 2025-09-30 15: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에이미와 이제벨 읽으려고 몆 달 전부터 곁에 뒀었는데 그동안 그 위에 다른 책들을 계속 쌓다보니 그 책을 찾을 수가 없게 되었거든요. 근데 맥파든의 책에서 이 책 이야기가 나온다구요? 와… 빨리 책 찾아봐야겠군요. 궁금궁금.
프리다 맥파든의 이 책의 내용은 조금 무겁군요. 다 읽고 결론 또 적어 주세요.
파이팅!

단발머리 2025-09-30 15:48   좋아요 1 | URL
맥파든 책의 어느 부분이 스트라우트 책의 어느 부분과 아주 비슷합니다. 그니깐 비슷한 내용이 나오는데요. 거기엔 반드시 나쁜 사람이 나오구요. 책나무님이 궁금해하셨다면 저는 성공했네요ㅎㅎ

잠자냥 2025-09-30 15: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에이미와 이저벨>은 안 읽어봤는데, 단발 님의 말할 수 없는 비밀을 알기 위해 읽어봐야겠어요!
아 그리고 단발 님 이 글 읽다 보니 자연스레 떠오릅니다... 큿시의 <추락>이 ㅎㅎ

단발머리 2025-09-30 15:49   좋아요 1 | URL
말할 수 없는 비밀이.... 저와 연관이 깊다기 보다는, 그걸 보고 말을 못 잇는 나 자신에 대한 그 어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렇다면 저는 쿳시의 <추락>을 받는 걸로 해야겠군요. 이런.... 남는 장사가 아니었다 ㅋㅋㅋㅋㅋㅋㅋ

다락방 2025-09-30 16:58   좋아요 1 | URL
(어깨를 으쓱이며) 쿳시의 추락도 그리고 에이미와 이저벨 도 심지어 사랑의 가설 까지 모두 읽은 사람이 여기 있습니다. 바로 접니다!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단발머리 2025-09-30 17:01   좋아요 0 | URL
오늘 왜케 장사 안 되나요? ㅋㅋㅋㅋ 엥? 추석이 코앞이라 대목인데 말이에요.
이걸 다 읽은 사람이라니ㅋㅋㅋㅋ 이건 반댈세!!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다락방 2025-09-30 17: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굳이 순서를 매기자면 스트라우트 책의 [에이미와 이저벨]을 제일 마지막으로 놓곤 합니다. 그 책을 읽으면서는 정말 ‘스트라우트는 이 책을 왜 썼을까?‘ 라는 생각을 많이 햇어요. 왜 제가 간혹 얘기하잖아요. 작가에게는 천착하는 주제가 있는 것 같다고. 얼마전 샐리 루니에겐 그것이 (청춘과) 성장이었던 것 같다고 얘기했고, 이승우는 아버지를 결코 놓을 수 없을거라고 생각했는데, 저는 스트라우트에게 미성년 여자아이와 성인 남자아이와의 사이에 성적인 긴장감을 머릿속에서 놓을 수 없었던 것 같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게 계속 스트라우트를 건드리는 것 같아요. 그걸 길게 풀어낸 게 [에이미와 이저벨]이라면, 지금 제목은 잘 생각 안나는데, 단편 중에도 그런게 있었거든요. 청소년 여자아이가 자기가 일하러 가는 집 성인 남자와 성적인 긴장감 느끼는 거요. 이런 일이 없지는 않을 것이고, 또 어떤 경우 여자 아이들은 ‘내가 원했다‘고 생각하기도 하지만, 그 지점에 대해서 스트라우트가 신경 쓴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걸 어떻게 풀어낼지 앞으로 어떤 식으로 이야기할지는 모르겠지만, 그런데 스트라우트에겐 그 점이 몹시 신경 쓰인다, 라는 생각을, 저는 그간 스트라우트의 책을 읽으면서 했더랬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맥파든도 그 얘기를 하는군요.

왜 미투 처음 시작됐을 때, 그렇게나 시인, 작가들을 고발하는게 많았잖아요. 물론 만화가도 화가도 그랬지만. 그런데 미성년 여자아이들이 그 가스라이팅과 그루밍에 빠져들어가게된 과정에는 필연적으로 ‘너의 작품엔 무언가 있다‘ 면서 일단 피해자의 예술적 재능을 높이 사주죠. 거기에 때로는 ‘너가 더 진실한 작품을 쓰기 위해서는 섹스를 알아야 한다‘가 덧붙고요. 그리고 거기에 ‘그러나 우리의 관계는 누구에게도 말해선 안돼‘ 가 있죠.

전 진짜 미성년자 건드리는게 제일 못난놈들이라고 생각해요. 그건 악뿐만이 아니라 모지람까지 더해진거죠. 물론 악은 무지에서 온다고 강하게 생각하지만, 미성년자 건드리는건 모자라요 정말. 동급의 성인에 대해서는 꼬리내리고 미성년자를, 자기보다 약한 처지의 사람을 건드리는 그 의도라니. 너무 못났어요. 진짜 싫어요.

맥파든의 책에서 나오는 그 나쁜 성인 새끼가 어떻게 될지 너무 알고 싶어요. 우리의 맥파든이 그냥 두지 않을 것 같은데요!!

단발머리 2025-10-03 08:43   좋아요 0 | URL
저는 첫번째 스트라우트의 책이 [에이미와 이저벨]이어서요. 그 불편한 지점이 있잖아요. 그래서 한동안 읽지 않았는데, 제가 알기론 이 작품이 스트라우트의 초기작이잖아요. 작가들의 초기작이 자기 자신, 진짜 내밀한 자신의 이야기를 다루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저는 그 부분이 스트라우트가 꼭 이야기하고 싶은 어떤 지점일 수 있겠구나, 그런 생각은 했어요. 말씀하신 단편 저도 읽은 기억이 나는데, 제목이 뭐더라ㅋㅋㅋㅋ 찾았어요. [다시, 올리브]의 <청소>. (다락방님 서재 가서 찾음요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저는 나이차는 문제가 안 된다고 생각해요. 25살에 50대 후반의 바로 그 사람을 만날 수 있죠. 그 사람과 꼭 연애하거나 결혼할 필요가 있는 건 아니고, 아무튼 딱 ‘그 사람‘할 때의 ‘그‘ 사람이요. 연장자가 여성이든 남성이든 그것도 상관 없는 거잖아요. 요는... 미성년자의 문제인데... 그런 경우, 무조건 잘못은 성인에게 있는거죠. 나이가 있다고 해서 어른스러워지는건 아니기 때문에, 그 성인이 미성년자의 감정을 악의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거구요. 제가 궁금한 부분은 그거예요. 그 미성년자가... 지금 자신의 감정이 진실하다, 진지하다, 즉 진짜다... 라고 믿는 경우요.

아니야. 너 지금 속고 있는 거야. 그 사람 뻔한 수작으로 널 속이는 거야.... 라고 말해도 말이죠. 사랑에 빠졌다고 믿고 있는 그 미성년자는 외부의 조언이 아니라, 그 감정, 그 흔들림이 더 좋은 거잖아요. 더 믿고 싶은 거구요. 그 부분이 저의 의문이에요. 뭐라고 말하며.... 그를, 그 미성년자를 설득해야 하는가. 혹은 설득할 수 있는가. 이 부분은 이 책 마저 읽으면서 좀 더 생각해 봐야겠어요.

나쁜 놈이 지금 계속 나쁜 짓을 하고 있습니다. 분노의 발차기!!

독서괭 2025-10-04 14: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오 티쳐가 그런 내용인가요! 맥파든이니까 그 나쁜놈은 응당한 벌을 받게 되겠죠?🫣
저 시가에 왔는데 하우스메이드3권 가져왔습니다 ㅋㅋ 읽던 카라마조프는 가져오기에 너무 헤비하고 어페어는 아직 주문 전이라..
미성년자 건드리는 놈들 정말 역겨워요. 교수가 되고 싶은 욕망을 교수에 대한 성적 욕망으로 혼동한다는 얘기 흥미롭네요! 여성교수가 더 많은 세상이었다면 반대가 되었을지도 모르겠어요.

단발머리 2025-10-05 07:12   좋아요 1 | URL
나쁜 놈 야무지게 벌 받았습니다. (참깨맛)
시가에서 하우스메이드 3권 읽는 시간, 너무 좋은대요. 카라마조프는 안 되죠. 읽는 사람이 문제가 아니라 보는 사람이 문제에요. 지금... 그거... 지금 읽는 겁니까? 도선생 책. 지금, 읽는 거냐고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교수직에 대한 욕망을 교수에 대한 애정(성적 욕망)이랑 혼돈하는 경우에.... 교수의 애정(혹은 애정을 가장한 접근)을 내 학문에 대한 승인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고요. 사랑과 일을 동시에 얻을 수 있다는, 이 학문의 세계에서 ‘지적인‘(지적인,은 개뿔) 동반자를 얻었다는 환상을 갖기 쉽죠. 그런 경우가 없다는 말이 아니고요. 그걸 악용하는 사람이 너무 많다는.... 그런 의견입니다.

맛난거 많이 드시고요, 독서괭님! 일은 쪼금만~~~ 애들은 풀어놓으시고요. 자유 시간은 많이~~ 해피 추석!
 













1. The Crash

프리다 맥파든의 10번째 책이다.

사람을 외모로만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평범한 교훈을 야무지게 얻게 된다. 완벽한 가정에는 반드시 아이가 필요하다는 전제, 사람들의 그런 고정 관념이 얼마나 집요한지 보여준다. 모성에 대해서도 다루고 있는데, 어떤 여성이 어머니가 '될 만한가'에 대한 이야기가 반복된다. 특히, 임신한 여성에 대한 규제와 규율, 온갖 잔소리가 정당성을 획득하는 과정이 세세히 펼쳐진다.

프리다 맥파든의 솜씨가 놀라운 지점은, 소설의 배경이 외부로부터 고립된 지역이고, 등장인물이 몇 명 되지도 않는 설정에서 지루할 틈 없이 이야기를 이끌어간다는 점이다. 가끔 과거가 회상되기는 하지만, 중요한 사건은 오직 하나, The Crash 뿐이다. 그 사건이 주인공을 포함한 모든 등장인물들을 은인과 범인으로 만들어버림과 동시에 선인이며 악인이었음을 드러낸다. 그래서, 제목이 The Crash.









2. The Tenant

프리다 11번째 책이다. 프리다의 다른 작품과 달리 작품의 전반부는 남성 화자의 목소리로 진행된다. <감사의 말>에서 프리다도 이 부분을 언급했는데, 처음 몇 챕터를 남편에게 보여줬더니, 남편이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작은 오해로 인한 크고 작은 갈등은 끝내 증오로까지 이어지는데, 마지막에 밝혀진 건 진실이 아니라 여전히 숨겨진 비밀이다. 하나의 비밀을 발견하고, 이로 인한 실망과 아픔이 다 치유되지도 않았는데, 또 다른 진실이 그들을 덮쳐온다. 그래서, 그들의 마지막이 그랬던 걸까. 서로에게 생명의 은인이 되었던 두 사람은 끝내 함께하지 못한다. 마지막 비밀을 고백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비밀을 감춘 채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3. 아메리고

아메리카에 아메리고의 이름이 붙은 까닭을 밝혀낸다. 우연과 오해, 그리고 여러 실수가 연속적으로 만들어지면서 원래부터 그 자리에 있었으되, 새롭게 태어난 이 신대륙은 '아메리카'라는 이름을 갖게 된다. 아메리고가 나쁜 의도를 가지고 콜럼버스에게서 그 영광을 찬탈한 것이 아니라, 여러 우연의 기묘한 조화를 통해 그 일이 그렇게 '되어 버렸음'을 츠바이크의 치밀하고 촘촘한 자료 조사와 유려한 문장이 차분히 밝혀낸다.


신세계에 대한 유럽인의 열망은 환상에 가까웠다. 그러한 환상이 조직적인 수탈에 이어 국가적인 차원으로까지 확장될 수 있었던 이유를 『사피엔스』의 저자 유발 하라리는 '유럽인들의 탐험과 정복의 야망이 어느 누구와 비견될 수 없을 정도로 탐욕스러웠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츠바이크는 베스푸치가 그 땅을 '문두스 노부스'라 부름으로써 유럽인들에게 신대륙이라는 인식을 불러왔다(179쪽)고 설명했다.

그곳은 돈이나 소유물, 권력을 위한 싸움이 인간들의 마음을 뒤흔들지 않는 땅이었다. 그곳에는 제후도, 왕도, 고리대금업자도, 강제 부역을 시키는 이도 없으며 생계를 유지하려고 손이 상처투성이가 되는 일도 없었다. 그곳의 대지는 마치 어머니처럼 인간을 먹여 살렸고, 인간은 서로에게 영원한 적이 되지 않았다. 베스푸티우스라는 이 무명의 사나이가 사람들의 마음속에 불러일으킨 것은 아주 오래된 종교적 소망이자 메시아적 염원이었다.(58쪽)

이국적인 환경의 완벽한 외부. 제후도, 왕도, 고리대금업자도 없는 땅. 현실의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곳. 풍요로운 자연의 보살핌 속에서 번영을 누릴 수 있는 곳. 베스푸치가 사람들 마음속에 그려낸 '문두스 노부스(Mundus Novus)'는 상상 속에서나 존재 가능한 곳이다. 불가능의 공간, 그곳에 붙여진 이름이 '아메리카'이다.









4. 메리

두 주 동안 읽었던 책 중에 제일 재미있었던 책이다. 4번? 아니, 5번을 읽었다. 여러 번 읽어도 즐거운 책은, 또 읽고 싶은 책은, 좋은 책이다. 읽을 때는 반드시 소리 내어 읽어야 한다.

어제도 그카더니

오늘도 그칸다!

자꾸 그카믄

확 묶아 놓는다!



책을 많이 못 읽어서 온 세상에 죄송하기는 한데, 그래도 책을 샀다. 먼 곳에 있는 친구가 보내준 예쁜 책들은 살포시 세워 두었다. 도서관 책으로 읽은 샐리 루니 한글책을 사면서 다른 샐리 루니도 샀다. 프리다 맥파든은 킨들 사기 전에 사두었던 모양이고, 장강명도 한 권 샀다. 그래도 주인공은 손열음. 손열음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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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괭 2025-09-27 22:0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와 11번째 프리다 맥파든! 저 이번에 하우스메이드 3권 주문해서 오늘 받았어요. 근데 기다림이 길어서 그 사이 카라마조프를 시작해버렸지 뭡니까.. 하우스메이드 과연 얼마나 기다려야 손에 잡을 것인가🙄
메리는 아직 못 본 안녕달 작가 책이군요! 좋아하신다니 주문하러 갑니다 쑝쑝

단발머리 2025-09-27 22:32   좋아요 1 | URL
저는 킨들로 읽고 있는데, 잘 몰라도 휙휙 넘기다 보니 벌써 11권째네요. 12권째 프리다 책의 제목은 <The Teacher>입니다. 신기하고 놀라운 이야기가 ㅋㅋㅋㅋㅋㅋㅋ 막 펼쳐지네요.
카라마조프를 시작하셨다니 너무 근사한 거 아닌가요. 저는 러시아 소설은 무조건 ㅋㅋㅋㅋㅋㅋ 겨울에 읽어야한다는 어떤 강박이 ㅋㅋㅋㅋㅋㅋㅋㅋ 독서괭님의 카라마조프 읽기 응원합니다!
메리는.... 후회하지 않으실 거에요. 호호호!

망고 2025-09-27 23: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프리다 맥파든은 책도 많이도 썼군요. 쓰는 족족 다 인기있고... 부자되셨겠당ㅋㅋㅋㅋㅋㅋ
다락방님이 좋아하는 책도 저기 있군요ㅋㅋㅋㅋ
그림책에 그림이 너무 사랑스러워요. 강아지 똥까지ㅋㅋㅋㅋ은근히 리얼하네요

단발머리 2025-09-28 07:08   좋아요 1 | URL
네ㅋㅋㅋㅋㅋ 어디에서는 18권이라 하고 또 어디선가는 24권이라 하더라구요. 부자되셨을거라 생각합니다. 바다 건너에서도 읽는 사람들이 있고요 ㅋㅋㅋㅋㅋ
다락방님이 좋아하는 책은 바로 그 책입니다. 망고님이랑 저랑 생각하는 그 책ㅋㅋㅋㅋ
‘안녕달‘이라는 이 작가의 책이 대체로 그림이 이런 느낌입니다. 이 책은 특히 사투리가 아주 정겹구요ㅋㅋㅋㅋㅋㅋㅋ

다락방 2025-09-28 14: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메리] 가 안녕달 작가의 책이라고요? 저도 조카를 위해 사야겠어요. 그리고 샐리 루니의 신간..은 단발머리 님 페이퍼 보고 검색해보니 아직 번역본은 안나왔네요. 저는 번역본 나오면 사야겠어요. 노멀 피플 원서는 그렇게까지 어렵진 않았는데 이번 원서는 어려웠거든요. 다 읽긴 했는데 진짜 대충 읽었어요. 새로운 책도 번역본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프리다 맥파든, 책 어마어마하게 냈네요. 음 그리고 현실에서도 남편이 있네요? 껄껄.

제가 이 페이퍼 읽으면서 새로 알게된 점은 단발머리 님 말씀대로 프리다 맥파든의 소설에서는 등장인물이 결코 많이 등장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런데도 흥미진진하게 책장이 넘어간다는거죠. 오 그게 어떻게 가능하지? 진짜 그랬네? 하고 단발머리 님 덕에 뒤늦게 깨닫습니다. 이래서 사람은 다른 사람들 말을 듣고 살아야 돼요... 미처 알아채지 못했어요.

제가 유튜브로 돈 많이 벌면 단발머리 님 계속 읽고 쓸 수 있도록 끊임없이 책 공급해드릴게요. 아직 갈 길이 멀지만요.. 흠흠.

단발머리 2025-09-30 08:53   좋아요 0 | URL
고백합니다. 사실 저… 이 아름다운 책의 원서를 완독하지 못한 채 맥파든 읽고 있어요. 저도 어쩔 수가 없었어요 ㅠㅠ 제가 다른 두 권은 왜 열심히 읽었나 했더니 한글책을 도서관책으로 잠깐 읽어서요. 다시 읽고 싶으면 원서를 찾아 읽었더라구요. 이 책은 한글책을… 좋아하는 대목을 여러번 읽었습니다. 전, 이 책이 제일 좋았구요^^

제가 다락방님 이 댓글 읽으면서 다시 한 번 느낀건데요. 다락방님의 이렇게 따뜻한 ‘으쌰으쌰’가 있었기에 제가 오랫동안 신나서 글을 쓸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작은 것인데도, 다락방님이 ‘단발님 덕분에 이걸 알게 됐어요’ 그럴 때, 제가 아주 막 신이 나구요, 그랬단 말이죠.
오래오래 읽고 쓰기 위해서, 다락방님의 건강과 안녕을 제가 잘 건사해야할텐데… 어깨가 무겁습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저는 시간이 많거든요. 돈 꼭 많이 버시고, 그리고 나서 끊임없이 책 공급해 주세요. 그리 멀지 않았습니다요. 아멘!
 












예전에 읽었던 소설(장르:로맨스)이 있다.

데이트앱을 통해 만난 두 사람. 여주는 가벼운 만남을 원하는데, 남주는 여주에게 단번에 반해버렸다. 직장(이공계)과 공통의 취미 등으로 자주 만나게 되는 두 사람. 안 그러려고, 진짜 안 그러려고 하는데(뭐를?), 자꾸 그러게 되는 상황이 벌어지고(엥?). 여주는 자꾸 자신의 비밀을, 과거에 잘못된 행동을 남주에게 털어놓는다. 판단하지 않고 들어주는 남주. 여주에게 진지한 만남을 요청한다. 하지만, 여주는 단칼에 그 제안을 거절하고. 그럼에도 계속 만나게 되는 두 사람. 곤경에 처한 여주를 도와주려 했던 남주. 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여주는 남주의 도움을 거절해 그의 신뢰를 반사해 버리고. 남주는 크게 상심한 채 여주에 대한 마음을 포기하기로 한다. 그렇게 몇 주가 흐르고.

남주를 찾아온 여주. 예상치 못한 곳에서 여주와 마주친 남주는 서둘러 자리를 피하려 하고, 여주는 남주를 붙잡아 세운다. 이래저래 도와준 거 고마웠다고. 자기가 이래저래 했던 거 미안하다고. 또다시 자리를 뜨려는 남주.

좋아한다 말했는데

고맙다니요.

사랑한다 말했는데

미안하다니요.

다른 할 말이 있다고 머뭇거리는 여주. 가슴속에 실낱같은 희망을 품고 남주가 말한다. 2분 줄게요. 하고 싶은 말을 해요. (이 책은 번역본이 아직 없습니다)

여주가 말한다. 나한테도 이런 사랑이 가능할 줄 몰랐다고. 당신을 만나면 안전하다고 느꼈다고. 지금 내 모습만으로도 충분하다는 느낌이 들었다고. 내가 당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걸 이제야 알았다고. 당신의 마음이 어떤지 모르겠지만, 상관없다고.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고. 혹시 내게 기회를 줄 수 있겠느냐고. 그러겠다고 대답하는 남주의 머릿 속 생각은 이탤릭체로 쓰여있다.

"It means that ..." That you're mine, the uncivilized part of him screamed. That I'm going to take you and hoard you.

드디어 도착했다. 바로 이 부분이다. 타인을 자신의 소유의 대상으로 삼겠다는 생각. 그런 발상. 그런 시도. 10번도 더 인용했을 법한 <가부장제의 창조>의 그 문장을 다시 한번 가져와보자.











다른 인간존재를 잔인하게 대하고 그/그녀에게 자신의 의지에 반하여 노동을 하도록 강제하는 것보다 한수 높은 중요한 발명은, 지배당하는 집단을 지배하는 집단과 완전히 다른 집단으로 지정할 수 있는 가능성이다. 물론 그런 차이는 노예가 될 사람들이 타지방 부족 구성원, 말 그대로 타인들일 때 가장 명백하다. 그러나 그 개념을 확장하고 노예화된 사람들(the enslaved)을 어떤 면에서 인간이 아닌 다른 것, 노예로 만들기 위해서, 남성들은 그런 지정이 실제로 효과를 발휘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정신적 구성물은 대체로 어떤 현실 속의 모형들에서 나오며, 과거 경험을 새롭게 정렬하는 것으로 구성된다. 그 경험은 노예제가 발명되기 이전에 남성들에게 주어졌던 것인데, 그것은 바로 자기 집단의 여성들을 종속시켰던 경험이다. 여성 억압은 노예제보다 먼저 일어나 노예제를 가능하게 만든다. (『가부장제의 창조』, 138쪽)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즘에서는 사유재산의 기원이 여성 억압의 제도화와 가부장제의 강화 속에 있다고 보는데, 거다 러너는 그중에서 가장 먼저 사유화된 것이, 사유화된 집단이 '여성들'이라고 본다. 재생산이 가능한 대상, 재산가치가 충분한 대상으로 여겨졌다는 것인데, 이는 클로드 레비스트로스의 '여성 교환' 개념과도 겹치는 부분이 있다고 생각한다. 남성 간의 여성 교환을 통해 남성들은 인간 사회를 '남성 위주로' 조정해 내었고, 이를 문화라는 이름으로 규범화했다. 인류 문명을 통틀어 한결같이 여성은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그리고 무엇보다 신체적으로 남성과 남성이 지배하는 사회 속에서 가장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억압의 대상물이었다.

세상은 변했고, 이제 온 세상은 ‘쿨함’에 대한 추구를 지상명령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여전히 요원하기는 해도 여성의 삶은 이전보다 나아졌으며, 또한 나아지고 있다. 이제 여성도 자신의 삶의 주체로서 살아가는 것이 가능해지고 있다. 샐리 루니의 소설 속 인물들은 그러한 문화 현상의 실체를 보여준다. 내가 너를 사랑하되, 너를 구속하지 않을 것이며. 너는 온전히 내 것일 수 없으니, 때때로 혹은 영원히 너는 자유하라. 문명인의 생각이며, 차가운 도시 남녀의 사랑법이다.

바람돌이님의 주옥같은 댓글을 다시 한번 살펴보자.



바람돌이님이 ‘독점욕’이라고 표현하신 것을, 나는 ‘사랑의 배타적 속성’이라고 표현했다. 같은 뜻, 다른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이것이 다른 인간관계에서는 나타나지 않는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자식이 여럿일 때, 자식들은 평생 엄마의 애정을 갈구한다. 엄마의 사랑을 갈구하지 않는 자식이 있다? 그는 이미 엄마의 사랑을 충분히 얻어낸 자식이거나 자신에게 당도할 애정이 없음을 간파한 자식이다. 연인 관계가 그러한 독점욕, 사랑의 배타적 속성이 폭발하는 관계라고 생각한다는 부분에서도 바람돌이님과 내 의견은 '쿨하게도' 일치한다.

아일린이 원했던 그것은 인류 문명 초기에 발현되었던 소유에 대한 원초적 감정과 닿아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렇다고 해서. 딴 여자랑 결혼하고, 섹스한 다음에, 나를 생각해… 이런 말도 아니고 방구도 아닌 쓸데없는 말을 할 필요는 없었으며. 사이먼 역시 제정신 못 차리고 헛발질하다가 날새기 전에 정신 챙겨서 다행이다.










오늘 도서관에서 상호대차로 빌린 책은 이 책이다. 퇴근 후에 집에 안 들어가고 샌드위치 먹으면서 책 읽고, 부지런히 챙겨온 무선 키보드 꺼내 이 글을 마저 썼다. 둥지 비기 전에 떠나기 잘했다. 오늘은 셋 다 늦는다고 한다.

이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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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5-09-16 22: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독점욕과 배타적 속성.... 같은 의미이긴 한것 같은데 언어의 퀄리티가 너무 차이나잖아요. 아 나 진짜 너무 단어가 저렴한거 같아요. 잉잉..... 공부 좀 하지.... ㅠ.ㅠ
저도 가부장제의 창조 읽으면서 가장 신선했던 부분이 바로 저 여성 억압이 가장 먼저였고 그것이 노예제의 모델이 되었다는 의견이었어요. 충분히 수긍이 가서 막 감탄하면서 읽었었습니다. 그런데 계급제의 시작에서 나왔던 저 여성 억압이 오늘날까지 무수한 로맨스로 변주하면서 너는 내꺼야라는 소유욕이 마치 사랑인듯 포장되는 시대를 우리가 살아왔잖아요. 그런데 요즘은 그거 막 무너지는 중인거 같아 그건 참 좋은거 같더라구요. 그래도 사랑은 단발머리님 말대로 남들과 다르게 대우받고싶은 배타적 속성을(아 나도 써먹었다. 고급진 말) 가지는게 맞는데 그게 소유욕과는 다른 거니까...

저 오늘 읽은 <동방의 항구들>이란 책에 보면 사랑받는 아들과 사랑받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아들 이야기가 나오거든요. 단발머리님이 예로 든 아이들 이야기에서 오늘 읽은 책의 등장인물들의 삶이 완전히 달라지는 것도 생각나구요. 제가 올해 읽은 가장 핫한 로맨스는 오늘 읽은 동방의 항구들이 돼버렸습니다. 로맨스 거의 없다가 마지막 장면에서 그냥 로맨스가 되어버리는데 너무 좋았어요. ㅎㅎ

둥지 비기 전에 탈출 좋아요. 둥지 비면 더 좋아질 거 같은데 우리집 둥지도 안 비었지만 저도 뭐 제가 알아서 탈출했습니다. 다들 알아서.... ㅎㅎ

단발머리 2025-09-18 09:49   좋아요 0 | URL
가부장제의 창조... 바람돌이님이 지적해주신 부분 저도 인상깊었던 대목이에요. 같은 그룹의 여성을 노예화한 경험이 다른 민족의 여성을 그리고 다른 민족의 남성을 노예화할 수 있는 시작점이 되었다는 것이요. 저는 남성도 여성을, 여성도 남성을 자신의 사랑과 이상에 대한 대상물로 삼는 것이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점점 우리 사회도 그런 사회로 가고 있다고 생각해요. 요는 우리가 함께 샐리 루니를 읽으면서 그런 쿨한 사랑의 복잡성과 답답함을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함께 느꼈다는 거 아닐까 싶어요. 저는 여전히, 연인 사이에는 각별함이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구요. 이게 연인 뿐 아니라 다른 인간 관계에서도 어느 만큼은 존재하지만.... 특별해지고 싶은 누군가가 있는 건 사실이니까요.

올해, 화제의 추천작! 가장 핫한 로맨스 <동방의 항구들> 적어두었습니다. 찾아봐야겠어요.

둥지는 비었다고 합니다. 저도 둥지에 없습니다. 푸하하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다락방 2025-09-16 23: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단발머리 님의 페이퍼를 읽고나서 그리고 위의 바람돌이 님의 댓글까지 다 읽고나서 제가 한 생각은, 역시나 이성애는 세뇌된 거였다, 라는 것입니다. [여자는 인질이다] 생각이 파바박 나버리고요. 이 세뇌된 이성애가 내가 너의 여자가 되는 것을 낭만적으로 만들어버렸잖아요. 그 유명한 드라마의 한장면이 생각납니다. 거기선 남자가 여자에게 그러죠. ‘이 남자가 내 남자다 왜 말을 못해!‘ ㅎㅎ

독점욕, 배타적 속성 그리고 자유 연애, 다자 연에.. 사실 저는 이 세상 모든 것에 있어서, 그것이 사소한 물건이든 사람이든 ‘궁극적인 것‘ 이 있으면 그 외의 것에 욕심이 나지 않는다, 라고 생각하는 사람이거든요. 이를테면, 몽블랑 만년필을 써보고나면 볼펜이나 펜을 마구 사들이는 걸 멈추게 된다, 는 것입니다. 아 여기서 몽블랑은 상징적으로 쓴거고요 그게 누군가에게는 모나미 볼펜이 될 수도 있습니다.
아주 오래된 얘기인데요, 헐리우드에서 유명한 바람둘이로 소문난 남자 배우 ‘워렌 비티‘가 ‘아네트 베닝‘을 만나더니 결혼하고 다시는 바람을 피우지 않았다, 고 합니다. 이게 되게 그 당시에 화제가 됐었는데요, 저는 아네트 베닝이 워렌 비티에게 궁극의 연인이었다고 생각해요. 자유연애 라는 것은, 그러니까 나도 만나고 다른 사람도 만나고 에브리바디 오케이 에브리씽 오케이, 라는 것은, 결국 아직 궁극적인 누군가가 없다는 게 아닐까, 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건 충성심과는 좀 다른 문제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충성해야지, 라는 의지에서 발현된게 아니라, 정말 이 사람이 있으니 굳이 다른 사람한테 눈이 안가는 겁니다. 굳이 다른데서 다른 걸 또 찾을 필요가 없는거지요. 문제는, 그런 궁극의 누군가가 누구에게나, 언제나, 그리고 반드시 찾아오는 건 아니라는 거죠.

오늘 단발머리 님이 쓰신 글 읽다가 제가 웃었던 지점은, 이 책을 읽었으니까 웃을 수 있는데, ‘너에게 아내가 있다고 상상해봐, 네 아내는 에쁘고 너에 대해 잘 알고 너네는 오늘 섹스를 하는데, 그런데 너는 잠깐 파리에서 우리가 섹스했던 걸 떠올리지‘ 하던 아일린이 생각나버렸거든요. 폰섹스 마친 사이먼이 ‘파리에서의 너를 생각한게 이 상상에서 가장 현실적인 부분이었어‘는 그둘이 훌륭한 짝임을 증명합니다. 놀고들있네 진짜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러나 뭐, 그들이 그러고 논다는데 어쩌겠습니까. 흠흠. 말도아니고 방구도 아닌것을..

단발머리 2025-09-19 08:49   좋아요 0 | URL
네, 맞아요. 다락방님~~ 저 역시 이성애가 세뇌된 거라는데 동의합니다. 에이드리언 리치가 말했던 강제적 이성애요. 이에 대한 낭만화가 여전히 이루어지고 있고, 무엇보다 강력한 건 역시 문화... 음악, 영화, 드라마, 이제 예능까지... 말이지요. 짝짓기 예능을 사람들이 그렇게나 좋아하는 이유가 있겠죠.

‘궁극적인 것‘, ‘궁극적인 누군가‘에 대한 이야기가 흥미롭네요. 몽블랑으로 설명해 주시니 아주 딱이구요. 저는 아네트 베닝은 아는데(얼굴만ㅋㅋㅋㅋㅋ) 워렌 비티는 누군지 몰라서 찾아봤어요. 아일린에게는 궁극의 누군가가 사이먼이겠죠. 다른 남자를 사귀어도 동거를 하고 있어도 계속 그리는 누군가는 사이먼일 테고, 또 사이먼 그리고 사이먼.... 사이먼 전 여친이 헤어지면서 그러잖아요. 당신과 함께 사는 건 마치 우울증을 안고 사는 것 같다. 너 때문에 우울해진다 ㅋㅋㅋㅋㅋㅋ 사이먼이 노력해도 안 되는 그런 뭔가가 있었던 거고요. 두 사람의 궁극이 서로여서 참 다행이라고는 생각했어요. 한 쪽만 그렇게 생각하면.... 이런 비극은 다시 없습니다. 나는 너를 친구로 두고 싶다는데, 그 한 쪽은 그렇게 되지 않을 때 말이지요.

저는 아일린이 ‘너에게 아내가 있다고 상상해봐... (쩜쩜쩜)... 너는 나를 생각해.‘ 여기서... 아, 아일린, 제발 그만.... 그만~~ 을 크게도 외쳤답니다. 이렇게까지 매달리지는 말라고.... 이러면서 말이에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다락방 2025-09-19 09:28   좋아요 0 | URL
아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단발머리 님, 제가 그랬거든요? 폰섹스 얘기 하다가 갑자기 거기에 자기를 넣어버려서, 아일린, 그러지마, 그건 좀 아니야, 하지마... 했는데 ... 사이먼이 또 그걸 좋아했어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말을 말자 진짜로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단발머리 2025-09-19 09:31   좋아요 0 | URL
둘이 비슷한 거죠 ㅋㅋㅋ한 세트이고 짝궁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어흐흐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독서괭 2025-09-27 10: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말도 아니고 방구도 아닌 🤣🤣🤣🤣
저도 웹소 로맨스에서 집착남이 그렇게 인기있는 이유가 궁금하더라고요. 현실에서는 싫지만 소설이니 좋은 거겠지 싶긴 한데, 나를 그렇게까지(!) 좋아하는 누군가가 있다는 만족감을 원하는 걸까요? 흠:.
저도 폰섹스 장면에서 얘네 대체 뭐하는 거니 싶었어요 ㅋㅋㅋ

독서괭 2025-09-27 10:42   좋아요 1 | URL
아 근데, 무선 키보드 자주 쓰시나 봅니다. 폰이랑 연결해서 쓰시는 거죠? 그거 편한가요? 🤔

단발머리 2025-09-27 10:52   좋아요 1 | URL
전 뭐랄까… 그런 스타일 좋아해요. 폭풍의 언덕, 히스클리프 스타일 ㅋㅋㅋㅋㅋㅋㅋㅋㅋ나를 그렇게까짘ㅋㅋㅋ저도 폰섹스에서 쪼금🙃😟😳

단발머리 2025-09-27 10:57   좋아요 1 | URL
저는 짐이 많을 때, 무선키보드 씁니다. 로지텍 k380 분홍색(다락방님 보라색)이구요. 핸폰이랑 연결해서 써요. 그러나 가끔 댓글이 똑같은게 3개가 달리고 ㅋㅋㅋㅋㅋ

독서괭 2025-09-27 12:08   좋아요 1 | URL
히스클리프 스타일 ㅋㅋㅋㅋ
로지텍은 접히는 건 아니군요? 이것저것 보다가 접이식 초경량으로 하나 찾았는데 과연 내가 이걸 얼마나 쓸 것인가 고민 좀 해봐야겠습니다 ㅋㅋ

단발머리 2025-09-27 12:33   좋아요 0 | URL
전 애플 접는 거 있는데 안 쓰게 되더라구요. 그래서 구입한 로지텍 ㅋㅋㅋㅋ 이건 그래도 가끔 이용하는데 쓸 때마다 만족합니다😝☺️😎
 









근래에 제일 많이 생각하는 남자는 사이먼이다. 『친구들과의 대화』에서 닉을 좋아하면서 시도때도 없이 터졌던 복창은 그래도 사이먼을 만나 안정을 찾았고. (코넬은, 말 말자.) 조금, 아주 쪼금은 상처 받은 심성이 치료된 것 같다.


내 문장의 '가끔'을 제외하면 로맨스 판타지로 읽힌다고 친구는 썼다. 첫번째로 연애한 사람과 결혼했으며, 핵가족 4인 가족의 기혼 여성인 나는 여전히 산업화된 로맨스 판타지의 충직한 추종자로서, 친구의 진단이 맞다고 생각한다.(내가 이렇게나 쿨한 사람이다.) 친구의 단어 '변화'가 내가 선택한 '구원'보다 더 적합한 단어였겠구나 그런 생각도 들었다. 구원이라는 단어를 선택할 때 나름의 고민이 있기는 했다. 더 정밀하게 하자면, 내가 의도한 바는 '답'이었던 것 같다. 남성이 이상화되고, 그가 그 역할을 성실히 수행해 갈 때, 두 사람은 서로에게 답이 될 수 있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해답이 아닌 답. soulution 아닌 answer. 이 사람이 운명의 그 사람이 아니라, 내게 온 이 사람이 나의 그 사람일 수 있다는 것. 혹은 -이라는 것.

나는 『아름다운 세상이여, 그대는 어디에』의 사이먼이 『오, 윌리엄!』, 『바닷가의 루시』의 윌리엄과 얼마나 닮아 있는지에 대해 썼다. 이른바 '아빠 모드'에 관하여. 두 사람은 정말 비슷한가.

그들이 샹젤리제를 따라 함께 걸으면, 여자들이 그를 보려고 고개를 돌렸다. 그는 키가 무척 크고 아름다웠으며 위엄이 있었고, 결코 그녀들을 돌아보지 않았다.(290쪽)

키가 무척 크고 아름다우며 위엄이 있는 남자. 여기까지는 윌리엄과 똑같다. 다른 점은 그 다음이다. 사이먼은 자신을 보려고 고개를 돌리는 여자들을 결코 돌아보지 않았지만, (젊었을 적) 윌리엄이라면 뒤를 돌아보고 아마도 그 여자에게 연락처를 전했을 것이다.

하지만, 아름다운 윌리엄, 위엄을 갖춘 윌리엄의 실제는 허상이다. 담담히, 루시가 그의 실재를 밝히는 대목이 있다. 루시에 대한 책 3권(『내 이름은 루시 바턴』 제외. 아직 안 읽었음)을 통털어 내가 제일 좋아하는 장면이다. 좀 길지만 옮겨 보자.









나는 늘 그-혹은 그녀-가 뮤지엄의 불 켜진 타워에서 혼자 일하며 느꼈을 외로움에 마음이 움직였다. 그때 내가 느낀 위로란-! 밤마다 나는 뮤지엄 타워의 불 켜진 창문을 바라보았고 밤새 거기서 일하는 외로운 사람을 생각하면서 큰 위로를 받았다.

그리고 몇 년이 지나서야 나는 금요일이든 토요일이든 일요일이든, 밤에 그 불빛을 보지 못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불은 늘 켜져 있었고, 여러 해가 지난 뒤에야 내가 지켜본 그 시간 동안 자정을 지나 새벽 세시가 될 때까지, 햇빛이 충분히 밝아져서 전등이 여전히 켜져 있는지 알아볼 수 없게 될때까지, 거기서 일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여러 해가 지나서야 내가 어떤 신화에 의해 지탱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시간에 그 타워에는 아무도 없었다.(『오, 윌리엄!』, 293쪽)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내가 기다린 사람은, 나를 사랑해 줄 그 '어떤 사람'은 어디에도 없다. 그러니깐, 실재하는 건, 그 사람을 사랑하고 있는, 그 사람을 기다리고 있는, 여전히 그의 안녕을 비는 '나', 이 '나' 뿐이다. 허상일 수 밖에 없는 그가, 내 사랑이 되는 경우는. 내가 그를 사랑할 때. 내가 그를, 내 사랑으로, 내 사람으로 인정했을 때. 오직 그 때 뿐이다.

두 사람은 서로에게 구원이 될 수 있다.

두 사람은 서로에게 답이 될 수 있다.

정답이 아니라 그냥 답.

solution이 아니라 answ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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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5-09-16 18: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리 루시 시리즈의 문장은 왜 단발머리님을 통해서 만나면 더 멋져보이는겁니까? 저도 분명 읽었는데 저런 감흥이 없었단 말이죠. 막 다시 읽어야 하는거야라면서 자괴감에 시달립니다. ㅠㅠ

솔루션이 아니라 앤서(영어 찍기 귀찮습니다)라는 단발머리님 말이 맘에 콕 와서 박힙니다. 그 답만 되어도 아름다운 관계죠. 우리 사람 관계에 욕심 많이 없잖아요. 각자의 영역을 인정하고 자가 의무를 충실히 이행하고 근데 이것도 진짜 어려운지라 살기가 다들 쉽지만은 않은것 같습니다.

단발머리 2025-09-18 11:05   좋아요 1 | URL
아~~ 우리 바람돌이님의 칭찬은 얼마나 진지한지요ㅋㅋㅋㅋㅋ소심한 단발머리의 마음 속으로 100% 흡수됩니다.

네, 맞아요. 해결책이 될 수 없죠. 누가 누구의 삶에 대한 유일한 정답이 될 수 있겠습니까. 그래도, 좋은 시절 하나의 기억, 행복한 웃음으로 기억되기를 바랄뿐이구요. 그런데, 그런 좋은 관계는 또 자주 돌아보고 살펴야되잖아요. 찐우정이라 하더라도 말이지요.
2-30대 연애사라면 물론 알쏭달쏭 헷갈리기도 하겠지요. 사이먼은 직진하라! 아일린은 행복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