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번째 프리다 맥파든, 『The Teacher』를 읽고 있다. 조심스럽고, 걱정스럽고, 내게는 좀 버거운 주제이기는 한데, 그래도 생각나는 데까지 써보자, 하는 마음으로 써본다.
내가 제일 먼저 읽은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의 책은 『에이미와 이저벨』이다. 나는 그때 스트라우트의 이름을 알았고, 올리브 키터리지의 명성을 익히 들었지만, 그의 작품에 대한 어떤 정보도 없는 상태였다. 지금은 잘 모르겠고, 그때는 그 감상을 풀어내는 일이 적잖이 난감했던 듯싶다. 페이퍼를 쓰기는 했는데, 뭐든 다 '말할 수 없다'라고 써두었더란다. 말할 수 없는 비밀이여, 뭐여. 그 이후로 한참을 나는 스트라우트를 읽지 않았다. 그러니깐, 내게 스트라우트는 한 번 버렸다가(?) 다시 잡은 카드, 옷장 비우기 한다고 꺼냈다가 다시 입게 된 가디건 같은 존재다. 루시 없는 삶이란 얼마나 건조한가. 윌리엄 없는 삶이란 얼마나 잔잔한가. 프리다 맥파든의 페이퍼에서 『에이미와 이저벨』 이야기를 하는 이유를, 이 책을 읽은 사람은 알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 바로 그 이유 때문이다. (말할 수 없는 비밀, 2탄)
『The Love Hypothesis』에서 올리브는 대학원생이고, 애덤은 교수이다. 올리브는 앞날이 불투명한 가난한 유학생이고, 애덤은 하버드 대학에서도 모셔가고 싶어 하는 실력자일 뿐만 아니라, 근사한 저택 (같은) 곳에서 살고 있을 정도로 경제적으로도 여유롭다. 하지만, 내가 애덤에게 질투를 느꼈던 부분은 그의 공적인 지위나 경제적 우위라기보다는(나도 모르게 올리브를 '나'라고 생각하고 있는, 이런 '나'를 보라) 그의 지식이었다. 박사과정을 마치고 교수로 임용되기까지 그의 시간, 숱한 밤들을 실험실에서 보내면서 그가 얻게 된 실제적 경험, 논문을 준비하고 발표하는 과정에서 더욱 정교해졌을 그의 과학적 사고, 여러 상황에 대한 정확한 판단력. 나는 그게 부러웠다. 올리브에게 없는 그것. 애덤은 그걸 가지고 있었다.


며칠 밤을 실험해봐도 예상되는 결과와 달라 고민하는 올리브. 올리브가 내민 사진을 보고 애덤이 뭐가 문제일지를 말해준다. 아마도 그게 문제 같다고 단박에 말해준다. 잠깐 봐줘도 답 알려주는 사람. 내 답이 맞는지 틀렸는지 확인해 주는 사람. 그런 사람을 어떻게 좋아하지 않을 수 있을까. 특히나, 그 사람이 내가 일하고 싶은 분야에서 이미 일정 정도의 성과를 거둔 사람이라면. 그가 내 결과물을, 내 성취를, 내 노력을 알아봐 준다면. 어떻게 그를 좋아하지 않을 수 있을까.
『섹스할 권리』의 가장 흥미로운 챕터는 단연 <학생과 잠자리하지 않기>이다. 이 책에 대해서는 <섹스는 샌드위치가 아니다>라는 글을 써두었다. (https://blog.aladin.co.kr/798187174/14262299)
레지나 바레카Regina Barreca는 묻는다. "어떤 시점에서 (…) 우리 각자에게 교수와 잠자리를 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교수가 되고 싶은지를 깨닫는 순간이 왔는가?" 바레카는 대다수 여성의 머릿속에는 (남성) 교수를 보며 피어오른 욕망을 교수에 대한 욕망으로 이해하라는 설정값이 이미 정해져 있다고 주장한다. 교수가 되고 싶은 여성이라면 반드시 극복해야 하는 생각이다. 한편 남학생들은 사회화된 대로 자신과 남교수를 연관 짓는다. 바로 그들처럼 되기를 바라는 것이다(그리고 정점에 이르면 이들을 파괴하고 대체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초자연적 내용을 그리는 드라마의 소스다). 여성과 남성이 교수를 매력적인 대상이 아니라 경쟁 상대로 볼 가능성의 차이는 어떤 자연스럽고 원시적인 기질의 차이에서 생긴 결과가 아니다. 성별에 따른 사회화의 결과다. (『섹스할 권리』, 232쪽)
레지나 바레카가 묻는 그 지점, 즉 '교수와 잠자리를 하고 싶은가' 아니면 '교수가 되고 싶은가'는 대부분의 남학생들이라면 묻지 않아도 될, 혹은 묻지 않는 질문이다. 하지만, 여학생에게는 다르다. 여학생들은 교수에 대한 존경과 경외심에 더해 친밀감이 겹쳐질 때, 교수에 대한 욕망이 어떤 것인지 판단하기가 쉽지 않다. 교수에 대한 욕망이 아니라, 교수라는 직업, 지위에 대한 열망일 수 있는데, 그 열망이 내 앞에 있는 이 교수에 대한 욕망과 혼재되어 있다면.
그녀는 그를, 그 교수를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내가 그를 사랑하고 있다고, 그를 내가 사랑하고 있다고 믿게 될 것이다.
대학생도 그러할진대, 미성년자라면. 그렇다면 어떨까. 원치 않게, 원하지 않는 판결을 가져와야 하나. 아, 내 페이퍼... 내 페이퍼에 올리고 싶지 않은 이야기. 아흐....

14세 여중생과 연인 관계라는 40대 남성의 말을... 들어주는 사회. 그 말에 현혹된 법정. 그 말을 믿어주는 판사(조희대).
프리다 맥파든의 세계에서도 이런 일이 일어난다. 서른여덟의 국어(English) 교사 네이트는 열여섯의 에디에게 말한다. 네게는 재능이 있다고. 너의 시를 너무 좋아한다고. 암울한 내 삶이 너를 통해 생기를 되찾았다고. 너와 나는 소울메이트라고. 경제적인 압박에 더해 근간의 일로 정서적으로 크게 위축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또래 친구 하나 없던 에디는 자신의 재능과 가능성을 알아주는 친절하고 잘생긴 교사의 말에 큰 위로를 받는다. 자신도 모르게 로맨틱한 감정이 배가되어 감을 느낀다. 점점 그 루트를 따라가게 된다.
전 세계 사람들에 따르면 로맨틱한 감정에는 보통 이런 게 들어간다. 심취와 이상화, 신체적·정서적으로 가까워지기를 바라는 마음, 독점하고 싶은 마음, 내 감정에 답이 오기를 바라는 마음, 상대의 행동을 과하게 생각하는 것, 관심을 보이고 상대에게 공감하는 것, 상대를 위해 자기 삶의 일부를 바꾸는 것, 상대가 반대로 자기를 좋아하지 않으면 갈수록 집착하는 것. (『에이스』, 194쪽)
사랑하게 될 때, 우리는 그 사람 앞에서 무력감을 느낀다. 사랑에 대해 말할 때마다, 나는 항상 그 부분에 매료된다. 그가, 내가 사랑하는 그가, 내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영역 바깥에 있다는 것. 내 손이 닿지 않는 곳에 그가 있다는 것. 나는, 그를 사랑하는 나는, 오랜 시간, 아니 영원히 그에게 닿을 수 없을 거라는 것. 그런 절망이 예상을 벗어나는 순간이 가끔, 아주 가끔 있기는 하다. 하지만, 마음과 마음의 이어짐은 찰나일 수 밖에 없고, 그래서 이루어진 사랑이란 건 언제나 기적일 수 밖에 없다.
감정에 대해서라면 판단할 수 없다. 내가 사랑하는 것에 왜 사랑하느냐 묻을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 사람이 성인이고, 다른 한 사람이 성인이 아닐 때, 성인이... 시간과 경험을 (충분히) 가지고 있는 성인이 자신이 가진 시간과 경험을 무기로 미성년자를 유혹하려 할 때, 이것이 네가 말하는 바로 그것이야, 라고 말할 때, 경험이 부족한 미성년자가 그것을 이겨내기는 쉽지 않을 터이다.
그런 나쁜 성인이, 나쁜 성인 새끼가 이 책에 나온다. 더 읽어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