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문단은 강렬하다. 옮겨 적고 싶은 마음과 영어로도 읽고 싶은 마음을 동시에 불러일으키는, 그러니까 말 그대로 명문이다.
페미니즘은 여성 자신이 성 계급 sex class의 일원임을, 다시 말해 ‘성’ 혹은 ‘섹스’라는 것 – 인간 문명세계의 토대가 되는 자연적이고 전(前)정치적이며 객관적인 물질적 기반 –을 근거로 했을 때 사회적 지위가 열등한 사람들로 구성된 계급의 일원임을 인식하는 데서 출발한다. (8쪽)
여성의 위치에 대한 이러한 인식은 『성의 변증법』과 가장 가까워 보인다.
급진적 페미니스트의 관점에서 볼 때, 새로운 페미니즘은 사회적 평등을 위한 진지한 정치운동의 단순한 부활이 아니다. 그것은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혁명의 두 번째 물결이다. 그 목적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되고 가장 견고한 계급-카스트 제도를 뒤집어 엎는 것이다. 그것은 전형적인 남성과 여성의 역할을 부여함으로써 성에 기초한 계급제도를 부당하게 정당화하고 외면적으로도 영구화하면서 수천 년 동안 굳어져 내려온 제도이다. (『성의 변증법』, 31쪽)
여성이라는 조건이 역사상 가장 오래되고 견고한 구별의 요소, 계급을 나누는 기준이 되었다는 주장이다. 페미니즘 논의의 확장 혹은 변형에 가장 크게 기여했다고 평가받는 주디스 버틀러의 주장은 이러한 논의에 반하는 것으로 보인다.
여성은 주체도 타자도 아니며, 이분법적 대립 경제에서 나오는 차이이고, 남성적인 것을 자기 독백의 산물로 만들려는 책략 그 자체이다. (『젠더 트러블』, 118쪽)
조현준은 『쉽게 읽는 젠더 이야기』에서 버틀러의 핵심 주장을 이렇게 요약했다(63쪽).
1) 여성/남성을 분명하게 구분할 수 없으며 2) 여성성/남성성의 내적 본질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3) 동성애/이성애의 확고한 이분법은 가능하지 않다.
여기에서 한 발자국 더 나가면 도나 해러웨이를 만나게 된다. 심오한 역사적 폭과 깊이를 지녔어도, 젠더는 보편적인 정체성이 아닐 수 있다는 『해러웨이 선언문』(84쪽)을 말이다. 기존의 인간 중심적 위계가 혁파된다면, 새로운 시선으로 이 세계를 파악한다면 인간과 인간, 유기체와 기계, 인간과 동물간의 차이가 우리의 ‘생각만큼’ 크지 않음을 인정할 수 밖에 없다는 주장이다. 구별과 구분의 통념, 고정관념, 강박에서 벗어나기만 한다면.
페미니즘의 논의가 여기까지, 그러니까 해러웨이까지(혹은 그 너머로) 도달한 현재 시점에서, 아미아 스리니바산의 주장은 명료하고 산뜻하다. 페미니즘과 섹스가 함께 논의될 때의 난해함과 복잡함을 명쾌하고 시원하게 풀어나간다. 인도계 1984년생, 예일대학교 철학과를 수석졸업했으며, 옥스퍼드대학교 최연소, 최초의 여성, 유색인 치첼리 석좌교수다.
책은 여섯 개의 에세이로 묶여져 있다.
이 책의 제목과도 같은 세 번째 꼭지 <섹스할 권리>에서 저자는 엘리엇 로저의 사례를 든다. 로저는 한집에 살던 친구 2명과 이들의 친구 1명을 살해하고, 인근의 여학생 사교 클럽 ‘알파 파이Alpha Phi’ 회관으로 차를 몰고 가서 밖에 있는 여성 세 명에게 총을 쏘았다. 다시 아일라비스타 지역을 차를 타고 달리며 닥치는 대로 총질해 2명이 사망하고 14명이 부상을 입었다. 로저는 자신의 머리에 총을 쏘아 자살했으며, 경찰이 발견했을 때 그는 이미 사망한 뒤였다.
성공한 영국인 영화제작자의 아들이었으며 잉글랜드와 로스앤젤레스에서 특권을 가진 채 성장했던 로저는 키가 작고 운동신경이 없으며 수줍음이 많고 필사적으로 멋져 보이려 애쓰던 소년이었다. 백인과 중국계 말레이시아인 혈통이 반씩 섞여 있던 로저는 자신이 불행한 청소년기를 보냈다고 생각했는데, 이는 자신을 거절한 잔혹한 여성들과 동급생들 때문이라고 여겼다. 예쁜 여자 아이가 자신을 거절하며 밀었을 때, 열등하고 못생긴 흑인 남자애가 백인 여자애와 사귄다는 것을 알았을 때, 로저는 분노했다. 본인이 세상을 다스리고 섹스가 불법인 정치 질서에 대한 환상을 꿈꾸며 “모든 여성을 전염병처럼 격리해야 한다”고 쓰기도(135쪽) 했다. 그를 사물함 쪽으로 밀어붙이며 멍청이라 부르고 동정이라고 놀리며 괴롭힌 존재들은 주로 남자 아이들이었다. 하지만, 그에게서 섹스를 박탈한 것은 여자 아이들이었고, 그는 자신에게서 그 권리를 ‘앗아간’ 여자 아이들을 궤멸시키고자 했다(137쪽).
저자는 리베카 솔닛의 <남자들은 자꾸 내게 『롤리타』를 가르치려 든다>의 예시를 가져오며 쓴다. “섹스는 샌드위치가 아니다.” 155쪽에서 156쪽에 이르는 ‘섹스 vs 샌드위치’ 논의는 오래오래 기억하고 새겨둘만하다. 여러분들의 읽는 즐거움을 위해 더 자세한 설명은 그만하기로 하자.
<학생과 잠자리하지 않기> 역시 꼼꼼히 읽어볼만하다. ‘메리터 저축은행 대 빈슨 Merritor Savings Bank vs. Vinson’ (상사 시드니 테일러가 미셀 빈슨이 입사하고 얼마 되지 않아 성관계를 요구하고, 처음에 이를 거부했지만 일자리를 잃을까 두려워 성관계를 승낙한 빈슨의 ‘동의’가 ‘두려움’ 때문이었음을 법원이 인정한 사례) 이후 미국 대학에서는 성적 괴롭힘 정책을 교수와 학부생 사이의 합의된 관계에도 적용하기 시작했다(215쪽). 지식의 비대칭성(222쪽)이라는 부분에 있어서 교수-학생의 관계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학생 내면의 ‘교수처럼 되고 싶은가?’와 ‘교수를 갖고 싶은가?’의 질문에 대한 통찰 역시 반짝반짝 빛난다.
레지나 바레카Regina Barreca는 묻는다. "어떤 시점에서 (…) 우리 각자에게 교수와 잠자리를 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교수가 되고 싶은지를 깨닫는 순간이 왔는가?" 바레카는 대다수 여성의 머릿속에는 (남성) 교수를 보며 피어오른 욕망을 교수에 대한 욕망으로 이해하라는 설정값이 이미 정해져 있다고 주장한다. 교수가 되고 싶은 여성이라면 반드시 극복해야 하는 생각이다. 한편 남학생들은 사회화된 대로 자신과 남교수를 연관짓는다. 바로 그들처럼 되기를 바라는 것이다(그리고 정점에 이르면 이들을 파괴하고 대체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초자연적 내용을 그리는 드라마의 소스다). 여성과 남성이 교수를 매력적인 대상이 아니라 경쟁 상대로 볼 가능성의 차이는 어떤 자연스럽고 원시적인 기질의 차이에서 생긴 결과가 아니다. 성별에 따른 사회화의 결과다. (232쪽)
대부분이 남자인 교수를 바라보는 남학생과 여학생의 생각은 이렇게 구분된다. 남학생이 자신과 남교수를 연관지어 그들처럼 되기를 바라는데 비해, 여학생은 교수가 되고자 하는 자신의 욕망과 그의 애정을 획득해 그를 갖는 것, 그와 성관계를 갖는 것 사이에서 ‘혼돈’의 시간을 보낸다. 성별에 따른 사회화의 결과다.
성적 동의, 성노동자 노조 운동과 성매매 불법화, 탈옥주의에 대한 논의 역시 흥미진진하다. 누군가를 돕는다면서 오히려 그들을 더 힘든 상황으로 몰고 가는 것이 아닌지 진지하게 살펴야할 책임이, 마음이 뜨거운 사람들에게는 오히려 더 필요한게 아닌가 싶다.
친구들의 섭외와 권유에 의거, <연애 빠진 로맨스>를 보았다. 할 말은 많은데 아, 오늘치의 에너지는 모두 소진되었습니다.
충전의 시간이 필요해 보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