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이야기를 몇 번 쓴 것 같기는 한데, 그래도 한 번 더 쓴다.
내게 하루키는 친구네 집 책장의 그 하루키다. 친구네 집에 놀러 가서 <노르웨이의 숲>을 보았다. 그때 제목은 <상실의 시대>였고, 책 표지는 하늘색 + 파란색이었는데, 고등학교 2학년이었던 나는, 공부하느라 바빠 당시 베스트셀러인 하루키의 소설이 엄청 궁금해도, 하루키를 읽을 시간이 없었다. 혹은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다. 충격적이었던 것은 전교 1등, 정확히는 이과 전교 1등인 친구는 하루키를 읽을 시간이 있었다는 것이고. 내 친구가 전교 1등이라거나 혹은 하루키를 읽어서가 아니라, 하루키를 읽는 전교 1등이어서, 나는 친구가 참 좋았고, 그리고 부러웠다.
그러고 나서, 하루키를 많이 읽었느냐, 그건 또 아니다. 내게 하루키는 내가 좋아했던 작품의 작가라기보다는 특별한(?) 정확히는 소탈한 생활 습관을 가진 사람으로서의 매력이 더 컸던 것 같다. 물론, 나는 그를 개인적으로 알지 못하니 그를 ‘알고’ 있다고 말하기에 충분하지 않지만, 이미 특별한(?) 경지에 오른 사람, 월요일 아침에 대형 서점 앞에 사람들을 줄 세우는 소설을 쓰는 사람치고는 너무나 소박하고 평범한 그리고 ‘은둔자’ 같은 그의 생활이 궁금하고 또 한편 신기했다.
『노르웨이의 숲』 같은 작품을 가진 소설가에게는, 누구도 '재기발랄한 젊은 작가'라는 표현을 더는 쓰지 못한다. 책이 엄청난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온갖 폄하를 당하고 의심을 받았지만, 거기에는 절대로 깎아내릴 수 없는 무언가가 있었다. 아마 앞으로도 깎아내릴 수 없으리라. (145쪽)
장강명은 37세에서 40세 사이에 하루키에게서 일어난 물리적 변화를 ‘퀀텀 점프’라고 부른다. 완전히 다른 수준으로의 도약. <노르웨이의 숲>과 <댄스 댄스 댄스>를 집필하면서 그런 일이 하루키에게 일어났다고 쓴다. 재기발랄한 수준을 뛰어넘는 어떤 수준 혹은 어떤 경지.
그리고, 그런 일, 작가로서 한 번 승부를 거는 일, 완전히 다른 수준으로 도약을 가늠하는 ‘쓰기’에 자신도 도전하고 있다고 쓴다. 초고가 200자 원고지 3,085.6매인 <재수사>를 쓰는 일이라고 적고 있다. 이 책은 <그래24>에 연재된 글을 엮은 것이어서, 그 책 <재수사>를 쓰는 도중에 쓰였다. 아, 미안해요. 강명씨! 내가 그 중요한 책을 못 알아보고. 1권 사두기만 하고 여태 안 읽었….. 좀만 기다려요. 1권 읽고 돌아오리라. 알라딘이, 내가 우리 구 책 구매 843등이라고 말해주더라구요. 기다려요, 강명씨! 얼른 읽고, 내 돌아오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