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어 책읽기 모임을 하고 있다고 말하기도 부끄럽지만, 아무튼 독서 모임은 진행되고 있고, 안내해주시는 분이 <안티고네> 미리 읽어 두라 하셨는데. 반납일이 되어야만 책 찾아보는 나쁜 습관은 고쳐지지 않았고. 반 정도 읽었던 <안티고네>를 아침에 마저 읽었다.

 


크레온       … 너는 그러지 말라는 포고령이 내려졌음을 알고 있었느냐?

안티고네   알고 있었어요. 공지 사항인데 어찌 모를 리 있겠어요?

크레온      그런데도 너는 감히 포고령을 어겼단 말이더냐?

안티고네   내게 그런 포고령을 내린 것은 제우스가 아니었으며, 하계의 신들과 함께 사는 정의의 여신께서도 사람들 사이                 에 그런 법을 세우시지 않았으니까요나 또한 한낱 인간에 불과한 그대의 신들의 변함없는 불문율들을 무시할                 수 있을 만큼 강력하다고는 생각지 않았어요

               그 불문율들은 어제 오늘에 생긴 게 아니라 영원히 살아 있고, 어디서 왔는지 아무도 모르니까요. (259)

 


<안티고네>에 대해 이야기할 때, 제일 먼저 떠오르는 장면은 여기. 안티고네와 크레온의 대결. 크레온이 이긴 듯하지만, 결국 패배는 크레온의 몫이 되고 말았다. 이미 2,400년 전의 결론.

 


하이몬    저는 범법자들을 존중하라고 권하지는 않아요.

크레온    그녀가 범법자가 아니란 말이냐?

하이몬    테바이 백성들이 하나같이 그렇지 않다고 말하고 있어요.

크레온    내가 어떻게 통치해야 하는지 백성들이 지시해야 하나?

하이몬    거 보세요. 이제는 아버지께서 애송이처럼 말씀하시네요.

크레온    이 나라를 내가 아닌 남의 뜻에 따라 다스려야 한다고?

하이몬    한 사람만의 국가는 국가가 아니지요.

크레온    국가를 통치하는 자가 곧 국가의 임자가 아니란 말이냐?

하이몬    사막에서라면 멋있게 독재하실 수 있겠지요. (271)

 


잊힐만하면 간간이 찾아오는 여성 혐오 발언과 다이내믹 대한민국의 오늘을 보여주는 듯한 문장(271)도 보인다. 그래도 역시 제일 눈길을 끄는 곳은 여기.

 


크레온    우리는 곧 예언자보다 더 확실히 알게 될 것이오

             내 아들아, 너는 설마 네 약혼녀에 대한 결정을 듣고 이 아비에게 화가 나서 오는 것은 아니겠지

             내가 어떻게 행동하든, 너는 내게 늘 호의적이겠지?

하이몬   아버지, 저는 아버지 자식이에요. 아버지께서 저를 위해 지혜롭게 규칙을 정해주시니 저는 거기에 따를 거예요.                저는 어떤 결혼도 아버지의 훌륭한 지도보다 제게 더 큰 이익이 되리라 생각지 않을 테니까요.

크레온   그래야지, 내 아들아. 너는 마음속에 명심해 두어라매사를 아버지 뜻에 따라야 한다고 말이다. (267)


애들은 다 컸는데 아직도 모든 책을 육아서로 읽는 나는, <안티고네>도 육아서로 읽는다. 이 세상 그 누구도 나보다 소중하지 않다. 친구, 동료, 지인, 그 누구도 ‘(그들이 내게) 어떻게 행동하든 (항상) 호의적으로 대할 수 없다.’ 물론이다. 배우자는 물론이거니와 자식도. 그리고 부모도 여기에 포함된다. 부모들은 자기들은 예외일거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자식은 당신의 소유물이 아닙니다, 라고 말하면 당연하죠! 라고 답하지만, 자녀의 모든 순간에 개입하려 들고, 간섭하려 들고, 그래서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자식을 이끌어 가려고 한다. 폭력적이지만,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면 괜찮은 거라고. 겉으로는 말하지 못하지만, 속으로는 그렇게 생각한다.

 


크레온이 말한다. 내가 어떻게 행동하든, 너는 내게 늘 호의적이겠지? 하이몬을 대신해 내가 말한다. 그렇게 못 해요. 적어도 얼만큼은, 아버지가 어떻게 행동하시는지에 달려있어요. (그런데 지금 아버지는 제가 사랑하는 여자를 죽이려고 하고 있어요. 그건 제가 받아들이기 힘든 일이에요.) 크레온이 또 말한다. 마음 속에 명심해 두어라. 매사를 아버지 뜻에 따라야 한다고 말이다. 하이몬을 대신해 내가 말한다. 아버지, 아버지의 뜻에 따르겠지만, 따르려고 노력하겠지만. 매사를 아버지 뜻에 따를 수는 없어요. 그렇게는 못할 거 같아요.

 


, 아버지가 매사에 제 뜻에 따라주신다면 모르겠지만요.






<오이디푸스와 안티고네> 요한 페터 크라프트, 1809년 



댓글(17) 먼댓글(0) 좋아요(3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단발머리 2022-05-19 15:5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위에 지문 저렇게 나오는 거 어찌된 일인지 나는 모릅니다. 컴퓨터 화면상으로는 제대로 나오는데 핸드폰에는 글자들이 제각각이고. 북플에서도 그렇구요. 어떤 연유인지 알 수가 없네요. 허허.

청아 2022-05-19 17:25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컴퓨터에서는 컬러도 예쁘고 깔끔하게 배열되어 있어요^^*
저는 다른 책으로 가지고 있는데
궁금하네요.

단발머리님 프랑스어 책읽기도 놀라운데 이 책으로 하시나봐요? 너무 멋집니다!! 화이팅!🙌

단발머리 2022-05-19 18:29   좋아요 3 | URL
오호, 다행이네요. 감사해요, 미미님^^

프랑스어 책읽기는 정말 부끄럽기는 한데 ㅠㅠㅠ 읽기가 부끄러운게 아니라 제가 부끄러워서요. 프랑스어 잘하는 친구가 웅숭 깊은 목소리로 읽어주는데 제가 뻑! 가버려서 시작하게 되었는데, 단어 문법 하나도 안 해서 아직도 왕기초입니다.
그래도 화이팅은 감사합니다!!!

다락방 2022-05-19 17:35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모든 책을 육아서로 읽는 것도 좋은 독서 방법인 것 같아요!
프랑스어 책읽기라니, 단발머리 님 진짜 너무 멋진거 아닙니까.
저는 아직 이 책 안샀고 사려고 장바구니에 넣어두기만 한 상태에요. 아 빨리 사고 싶네요 ㅋㅋㅋ

단발머리 2022-05-19 18:30   좋아요 3 | URL
저는 일단 소포클레스판 읽고 장 아누이 앞쪽 쪼금 읽었는데, 재미있는 거 있죠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얼른 사세요, 서둘러요!!

mini74 2022-05-19 17:42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지금도 크레온 같은 아빠들 좀 있지 않나요. 친구같은 아빠라고 하지만 ㅠㅠ 저는 자꾸 아이 또래 애들에게 말을 그렇게 걸어요. 한 번은 아이랑 가다가 아이 친구 만났는데 제가 막 더 반가워하면서 밥은 먹고 다니니? 하면서 주접을 ㅠㅠ 아이가 엄마 살인의 추억 찍냐고 ㅎㅎㅎ 단발머리님 프랑스어 읽기 우와!!! 저도 파이팅입니다 *^^*

단발머리 2022-05-19 18:31   좋아요 4 | URL
밥은 먹고 다니니? 에서 ㅋㅋㅋㅋㅋㅋㅋ 제가 넘나 크게 웃었습니다. 저는 지나가는 아이, 엘리베이터에서 만난 아이들에게 말 걸 때 저희집 애들이 싫어해요 ㅋㅋㅋㅋㅋㅋㅋ 엄마, 애들은 그런 거 싫어해~ 그러면서요. 미니님 파이팅도 잘 접수되었습니다. 아이고, 맨날 접수만 받고. 오늘은 프랑스어 단어 하나라도 외워야겠어요.

수이 2022-05-19 18:57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저도 그렇게는 못할 거 같아요. 소리내어서 따라 읽기! 프랑스어 단어 외우시고 저한테도 알려주세요 저도 따라 외울래요!!!

단발머리 2022-05-19 21:09   좋아요 3 | URL
오늘의 표현 : Ça va?
이거 쓰는데 세 번 고쳤어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어쩔?

라파엘 2022-05-19 20:5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자신의 주제의식을 가진 독서로서, 모든 책을 육아서로 읽는 것도 정말 흥미로운 방법인 것 같아요!! 게다가 프랑스어 공부도 하신다니... 프랑스의 대표적인 육아서라면 뭐니뭐니해도 루소의 에밀 아닌가요? 😂

단발머리 2022-05-19 21:11   좋아요 3 | URL
전 그렇게 읽으려고 했다기 보다는 ‘나도 모르게‘ 그렇게 읽었는데 이제 아가들은 다 컸고 말입니다. 그런데도 그렇게 읽히네요 ㅎㅎㅎ 프랑스어 공부를 한다는 말을 하기조차 부끄럽지만 아무튼 프랑스어를 공부하고 있습니다. 루소의 에밀을 프랑스어로 만날 때까지 정진하는 걸로 할까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레이스 2022-05-20 01:3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모든 책을 육아서로 읽으신다는 말씀 어떤 뜻인지 알듯 합니다^^

단발머리 2022-05-23 08:15   좋아요 1 | URL
그레이스님은 제 말뜻을 바로 이해해 주시리라 생각했습니다^^ 이제 아이들이 좀 커서 그러지 않아도 되는데요 ㅋㅋㅋㅋ 전 아직도 그렇게 읽고 있네요.

책읽는나무 2022-05-20 11:5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도 육아서로 읽으신다는 말씀!!! 그 말씀에 깊이 공감합니다. 저도 그런 것 같거든요ㅋㅋㅋ
프랑스어를 웅숭깊은 소리로 읊조리시는 모습에 반하여 프랑스어 공부를 시작하였다는 그 말씀도 프랑스적이군요^^
멋져요~~무언가에 반하여 앞뒤 계산없이 내 열정을 던질 수 있다는 것은 멋져요. 전 계산이 너무 앞서서 시도할 엄두를 못내고 그저 바라만 보다 시간을 허비한 경우가 많거든요.
프랑스어 공부 시작하신지 좀 되신 듯한데 그 끈기심도 높이 평가합니다.
파이팅입니다.^^

단발머리 2022-05-23 08:20   좋아요 2 | URL
책나무님도 그러신다니 한결 안심이 됩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프랑스어를 웅숭깊은 소리로 읽어주던 친구는 읽어주기, 발음 가르쳐주기, 책 소개하기, 진도 확인해주기 등의 노력을 다하고 있는데 전 진도 따라가는 것도 벅차서 헉헉대고 있어요. 뭔가를 하고 있다고 하기도 부끄럽지만 아무튼 이번에 새로 들어간 <장 아누이의 안티고네>가 여덟번째 책이더라구요. 같이 공부하는 이웃님들 덕분입니다^^

독서괭 2022-05-26 18:5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육아서로 읽으신다는 말씀에 저도 매우 공감합니다 ㅎㅎ 애 낳고 나니 너무 자연스럽게 모든 책에서 그런 내용만 눈에 확 들어오더라구요🙄 토지 들으면서도 부모 다 죽고 거복이한복이는 어쩌나, 귀녀가 낳은 아기는 잘 클까 걱정이.. ㅎㅎ
단발님의 육아도 아직 끝나지 않았나 봅니다~^^

단발머리 2022-05-29 21:59   좋아요 1 | URL
전 사실 육아서는 많이 읽지도 않았거든요. 근데 다른 책을 육아서로 읽고 있어서 ㅋㅋㅋㅋ 그게 참 그렇네요.
그나저나 독서괭님 덕분에 저도 요즘 자꾸 토지가 눈에 밟힙니다. 10여년 전에 읽었던 터라 한 번 더 읽어야 하는데, 워낙 대작이라 마음 먹기가 쉽지 않네요.
제 육아는 아직 끝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제법 키워놓았습니다. 둘 다 저보다 큽니다. 하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