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 인간의 시계로부터 벗어난 무한한 시공간으로의 여행
카를로 로벨리 지음, 김보희 옮김, 이중원 감수 / 쌤앤파커스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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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로 로벨리의 책은 세 번째다. 이런 책을 읽을 때 신난다. 구체적으로는 과학책. 읽고 있는 문장이, 따라 읽는 문단이 무슨 뜻인지 몰라도 그냥 읽어도 되니까 신난다. 읽는 책을 모두 이해하면서 읽는 사람이 이 세상에 있을까마는(생각해보니 알라딘 우주에는 많이들 계시다), 나는 그런 사람은 못 되니까, 그냥 읽는다.

 

카를로 로벨리는 이탈리아 태생의 세계적인 이론 물리학자로, 양자 이론과 중력 이론을 결합한 루프 양자 중력이라는 개념으로 블랙홀을 새롭게 규정한 우주론의 대가라고 한다. 양자 중력이라는 새로운 분야를 개척해 나가면서 전 세계 과학자들과 일궈낸 협업과 우정이 진솔하게 그려져 있고, ‘시간 없는우주에 대한 시각을 제시한다. 무엇보다 과학을 대하는 그의 태도가 감동적이다.

 


과학적 사고란 우리의 무지를 의식하는 것이다. 나는 한발 더 나아가 과학적 사고란 우리의 무지가 얼마나 방대하고 우리의 지식이 얼마나 역동적인지를 의식하는 것이라고 본다. 우리를 전진할 수 있게 하는 것은 확신이 아닌 의심이다. 그리고 바로 이 의심은 데카르트가 남긴 뿌리 깊은 유산이기도 하다. 과학을 신뢰해야 하는 이유는 과학이 확신을 주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불확실하기 때문이다. (100)

 


서구를 중심으로 발달해왔던 과학은 이제 명실상부 가장 강력한 사고 체계다. 누구도 과학자의 논증과 판단과 실험 결과에 쉽게 반대할 수 없다. 이전 시대 종교가 가지고 있던 절대적인 지위를 과학이 승계했다고 볼 수 있을 정도다. 하지만, 여기. 가장 난해하고 첨예한 과학적 발견과 논의의 선봉장에 선 사람이 말한다. 과학적 사고란 우리의 무지를 의식하는 것이다. 과학은 마치 철을 정제하듯 정답을 찾아가는 일련의 과정이다. (101) 그의 전공이 가설과 논증을 중시하는 이론물리학이기에 이렇게 생각할 수 있는 걸까. 일반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이라는 난제들을 머릿속으로상상하고 가설을 만들고 이를 수학적으로 증명하는 과정에서 각 분야 최고의 지성들 간의 협업은 필수적이다. 자신의 가설을 제안하고 토론을 통해 다른 배경, 다른 전공의 지식인들이 가설 속의 빈틈을 찾아내고 이를 보완해가며 논문을 완성해가는 과정은 나만 옳다는 편협된 생각으로는 도저히 이뤄낼 수 없다. 무지에 대한 인식, 상대에 대한 인정이 절대적으로필요하다.

 


양자 중력과 루프 이론에 대한 설명 역시 가벼운 마음으로 읽을 수 있다. 무슨 말인지 모를 뿐만 아니라 무슨 말인지 몰라도 되니 즐겁다. 이 내용을 가지고서 시험 보지 않을 테니 즐겁고, 그런데도 이 책을 계속 읽을 수 있어서 즐겁다.

 


공간은 중력장 그 자체이므로, 이 루프들이 공간 속에 있다고는 말할 수 없다. 결국 루프 그 자체가 공간인 것이다! 루프들이 공간을 구성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방정식을 통해 깨달은 사실은 바로 이것이었다. (58)

 


각각의 해가 공간 속에 존재하는 닫힌 형태의 곡선인 루프는 양자 중력장에서 패러데이의 역선의 역할을 할 수도 있는데, 저자에 따르면 루프 그 자체가 공간이라고 한다.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저자가 루프에 흠뻑 빠진 거는 확실히 알겠다.

 





제일 중요해 보이는 6장의 제목은 <시공간은 존재하지 않는다>이다. 대다수의 사람은 공간과 시간을 분리된 개체로써 이해하고(저만 그런 거 아니지요), 시간을 연속적인 의미로 파악한다. 보통은 사건을 시간순으로 정렬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선후의 개념으로 이해한다. 시간과 공간이 분리된 각각의 개체라기보다는 한 개체의 두 측면에 가깝다는 특수상대성이론을 발표하고 10년 후, 아인슈타인이 일반상대성이론을 통해 시간 개념을 더욱 가변적인 개념으로 만들었지만(140), 그것이 확립된이론인 것과는 별개로, 그 사실을 개념이 아닌 실제로 받아들이는 건 전혀 다른 문제다. 보통의 사람들에게, 시간은 흘러간다.

 


<시간의 부재> 챕터는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을 다룬다. 144쪽에서부터 153쪽까지. 근본적으로 시간은 존재하지 않으며, 시간이란 각각의 물체가 다른 물체에 비해 변화하는 방식임을 기술하면서, 보편적 변수인 시간의 존재가 관찰을 통해 얻은 결과가 아닌 하나의 가정일 뿐임을 논증한다. 관심 있는 모든 분의 1독을 권한다. 제일 중요한 질문이 남았다. 163, 만약 시간이 근본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면, 지금 흐르고 있는 이 시간, 즉 우리가 느끼는 시간은 무엇일까? 저자가 답한다.

 


시간이란 미세한 규모의 차원에서 일련의 과정을 거쳐 만들어지지만 보다 큰 규모, 즉 거시적인 차원에서만 드러나는 창발 현상이라는 것이다. 다르게 표현하자면 시간은 이 세상의 세부 요소를 인식하지 못하는 데서 오는 무지의 효과라고 볼 수 있다. (165)

 


시간도 마찬가지다. ‘라는 개념은 근본적으로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한다. 단 하나의 양성자에는 이전도 이후도 존재하지 않으며, 관련 방정식에도 시간변수는 등장하지 않는다. … 결국 시간은 그저 엔트로피화의 방향에 지나지 않는다. 엔트로피의 증가가 관찰되는 방향을 시간이라고 부를 뿐이다. 물체가 낙하하기 때문에 아래라는 개념이 생겨나듯, 엔트로피가 증가하기 때문에 시간이라는 개념이 생겨난 것이다. (170)

 



나는 어렸을 때부터 키가 컸고 노안이었다. 6학년 때 친구들과 함께 단체 사진을 찍을 때 맨 뒷줄 정중앙 자리에 앉았는데, 친구 어머니께서 가운데 이분이 선생님이시니?’라고 물으셨다는 이야기가 전설처럼 전해진다.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중학생 아니냐는 말을 들었고, 중학교 1학년 때는 3학년이냐고 물었다.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3학년 취급을 당했고, 고등학교 3학년 때는 교복을 입고 있는 걸 보니 (어쩔 수 없이) 고등학생이군, 하는 말을 들었다. 항상 실제의 나이보다 외모가 앞서 나가는 바람에 내 나이를 찾지 못하다가 스물여섯. 그때부터 사람들이 내 나이를 내 나이에 맞춰 보기 시작했고, 일찍이 노안이었기에 오히려 30대에는 내 나이보다 어려 보인다는 말을 듣기도 했다. 작년, 그리고 올해를 거치면서 급속도로 늙어가고 있다는 걸, 거울 앞에 설 때마다 느낀다. 눈 아래쪽, 주름의 진폭이 예사롭지 않다. 평소에 사지 않는 조금 비싼 로션을 하나 샀고 (아이크림 안 쓰는 사람), 게으른 성격임에도 어쩔 수 없이 나름 꾸준히 발라보았지만, 나아지기는커녕 오히려 가속도가 붙은 모양새다.

 


시간은 그저 엔트로피화의 방향에 지나지 않는다는 건 동의할 수 있지만, 왜 이 방향이냐에 대해서는 의문이 생긴다. 내가 싸워야 하는 대상은 시간이나 시간의 흐름으로 인한 노화가 아니라, 열역학 제2법칙이라는 걸 발견했다는 게, 이 책의 수확이라면 수확이라 할 수 있겠다이제, 네 차례다. 싸우자! 열역학 제2법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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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1-06-12 19:36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저도 그냥 읽습니다.
습관적으로.

단발머리 2021-06-12 19:45   좋아요 4 | URL
레삭매냐님의 이 댓글은 뭐랄까요.
위로가 되는군요 ㅎㅎㅎ 감사합니다^^

공쟝쟝 2021-06-12 19:49   좋아요 6 | 댓글달기 | URL
크흐흐 ㅋㅋㅋㅋ 맞아 ㅋㅋㅋ 문돌이는 이런 책 읽으면 이해못하고 시험 안봐도 되니 편해져요.. 동감.. 그나저나 카를로 슨상이 루프에 빠진 사진은 해리포터 닮으셨고, 제 최고의 적인 시간의 존재를 지워주셨으니 그저 좋아서 지금의 저는 영원합니다!! 만세!

다락방 2021-06-13 08:31   좋아요 2 | URL
저도 사진 보면서 그랬어요.

“..해리니?”

단발머리 2021-06-14 12:56   좋아요 1 | URL
루프에 빠진 해리 보지 마시고요. 루프를 보세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저게 루프랍니다. 열쇠고리처럼 생겼지요. 막 서로 얽여가지고 그거를 푼다, 못 푼다 대결하는 것 같단 말이지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루프는 공간 그 자체라고 해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우아 신난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청아 2021-06-12 20:40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이해못해도 뇌에 좋은 영향을 준다더군요ㅋㅋㅋㅋㅋㅋ그게 어딥니까 으핫~♡ 멋짐요!

단발머리 2021-06-14 12:58   좋아요 2 | URL
저도 그렇게 믿고 있어요. 근데 뭐랄까요. 제가 알지 못하는 내용이지만 작고 예쁘고 새책이라서 그런지 완독할 수 있었거든요. 책은 모름지기 그래야하지 않을까 싶어요. 어려운 책일수록 얇고 예쁘게^^

그레이스 2021-06-12 20:46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이전 두권 읽었는데 문과도 이해할 수 있을듯요^^

단발머리 2021-06-14 12:58   좋아요 3 | URL
네, 저는 솔직히 이해했다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작가가 쉽게 쓰려고 상당히 노력하는 거는 느껴져요.
그레이스님 문과시군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반갑습니다^^

그레이스 2021-06-14 13:02   좋아요 3 | URL
저는 이과 출신이데 지금 보니 문과쪽 성향이 더 맞는듯요^^

단발머리 2021-06-14 14:12   좋아요 1 | URL
우앗!! 제가 항상 흠모하는 이과시군요. 반가워요, 그레이스님^^

붕붕툐툐 2021-06-13 00:0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우와~ 전 이분 초면인데~ 벌써 세번째 책이시군요! 리뷰 읽고 완전 읽고 싶어졌어요!!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를 보면-전 영화만 봤어요-같은 방향으로 노화되는게 축복인 듯!ㅎㅎ
저도 단발머리님처럼 노안에서 제 나이 보이다가 다시 노화 급행열차 탑승 중입니다~ㅎㅎㅎㅎ

단발머리 2021-06-14 13:00   좋아요 3 | URL
툐툐님께도 즐거운 독서가 될거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카를로 로벨리의 다른 책은 <모든 순간의 물리학>과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입니다. 많은 애용 부탁드리고, 얼른 노화 급행열차에서 내리세요. 저도 다음 정거장에서 내릴거에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바람돌이 2021-06-13 03:59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이 책 궁금했는데 이 리뷰를 보니 역시 제가 범접하기 어려운 책이라는 느낌이 더 강해져 버렸어요. ㅠ.ㅠ

단발머리 2021-06-14 13:01   좋아요 3 | URL
아..... 어려운 책이기는 한데 그래도 초보자를 대상으로 쉽게 쓴거라고 하더라구요. 저도 이해하고 리뷰를 썼다기보다는 그냥 읽었다는데 의의를 뒀고요. 카를로 로벨리의 다른 책들도 전 추천하고 싶네요.

다락방 2021-06-13 08:30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우와 단발머리님 짱 멋져요. 저는 읽어본 적 없는 작가인데 세번째라니! @.@
저도 노안이었어요. 저는 한 서른부터 사람들이 제 나이로 봤던 것 같아요. (깊은 슬픔..)

단발머리 2021-06-14 13:03   좋아요 4 | URL
만약 한 권만 읽으신다면 전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를 추천하고 싶어요. 시간이 흐르지 않는다는 걸 설명하는 부분도 좋았지만, 우리 인간이 이 넓고 거대한 우주에서 무엇인가에 대해서 과학자의 시선으로 해석하는 부분이 좋았어요. 우리는 기억이다, 이런 부분이요. 우리 이제, 제 나이 찾아갔으니까요. 더 이상 물러서지 말아요... 히잉 ㅠㅠ

초딩 2021-07-07 23: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당선작 축하드립니다~

단발머리 2021-07-18 19:29   좋아요 0 | URL
초딩님! 감사합니다!

서니데이 2021-07-08 00: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립니다^^

단발머리 2021-07-18 19:30   좋아요 1 | URL
서니데이님 인사가 늦었어요 ㅠㅠ 축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