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들레 90호가 왔다. 한 해에 6호씩 발행이 되는 이 책이 벌써 90호란다. 곧 100호가 되겠다. 90호 동안에 우리 교육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들을 했는데... 이 가운데 실현이 된 것도 있을테고, 여전히 진행 중인 것도 있을테다.

 

이번호는 특집이 "초록은 동색?"이다.

 

초록은 동색이라? 왠지 '우리가 남이가?'란 말이 연상되는 제목이다.

 

많은 차이를 무화시키고, 하나로 귀결시키는 언어, 집단성, 통일성, 단일성의 언어라고 해야 하나?

 

그런데, 이런 제목을 단 이유는, 그래선 안 된다는 말을 하고 싶어서이지 않을까 싶다. 같은 집단 내에서도 이질적인 존재들이 다수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는 알고 있지 않은가?

 

하다못해 새누리당에서도 그들의 이념적 편차가 심할 것이고, 이들이 추구하는 목표도 다를 것이라는 생각. 또 정책마다 자신의 생각이 다르다는 생각. 그러면서도 당의 지도에 따라 일사분란하게 움직이기도 하는 현실.

 

역시 초록은 동색인가?

 

힘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가끔은 서로 다름을 묻고, 하나인 것처럼 행동할 때가 있다. 그런데... 더 큰 힘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다름을 인정하고, 그 다름을 통해 목표를 추구해나가는 것이다. 그 때는 거역할 수 없는 힘이 생긴다.

 

이번 호에서는 대안학교에서의 다름들을 이야기하고 있기도 하다. 대안학교 교사들이라고 하여 모두가 똑같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들은 초창기에 많은 갈등을 겪고, 그것을 극복해가는 과정에서 대안교육 15년을 이끌어왔다.

 

그럼에도 최근에 들어온 새내기 대안학교 교사들과 초창기 대안학교 교사들은 다름을 느끼기 시작했으며, 그 다름이 불거지고 있다고도 한다.

 

이게 문제인가?

 

다름이 불거지는 것은 문제가 아니라, 바람직한 현상 아닐까?

 

이 책의 어떤 글에서도 있다시피 진화의 방향은 다양성 아니던가? 생물들이 살아남기 위해서 한 가장 최선의 일이 종의 다양성 아니던가? 그렇다면 다양한 주장이 펼쳐지는 현상은 바람직하고, 권장해야 할 사항이다.

 

대안학교들에서 다름이 불거지고 있는 것은 대안학교가 그만큼 더 진보의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말이 될 것이고, 교육적 실천의 다양성은 교육이 좋은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말이 되기고 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사회에서 다양한 목소리가 들린다는 것은 그 사회가 민주 사회라는 얘기이고, 이 사회는 그러한 다양성을 바탕으로 더 좋은 사회가 될 가능성이 있다는 이야기가 되기도 한다.

 

다양성을 막으려는 시도는, 오히려 진화의 방향에 역행하는 일이기에... 교육 현장을 단일화하려는 그러한 시도들은 교육 발전의 방향과 정반대로 나아가는 것이고, 사회의 다양한 목소리를 종북이라는 이름으로 막으려 하는 것은 사회 발전의 방향을 가로막은 일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일은 다름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다름을 통해 자신을 바라보는 일이지 않을까 싶다.

 

갈등이 문제가 아니라 갈등을 해결하는 과정이 문제다. 갈등의 원인을 파악하고, 그 해결방법에 대해서 다양한 논의들을 거쳐 가장 바람직한 방향으로 해결해 나가려는 모습을 보이지 않고, 오로지 '초록은 동색'이라고, 한쪽으로만 규정하고 대화를 하지 않으려는 자세가 문제가 된다.

 

민들레 90호. 이번 호는 바로 '초록은 동색'이라는 말을 통해 우리 사회의 소통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다름을 인정해야 하나가 될 수 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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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이런 속담이 생각이 나지?

 

혀 속에 칼이 있다는.

 

말이 그만큼 위험하다는 얘기일텐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말이 위험한 것은 확실한데... 도대체 어떤 말이 위험할까?

 

말은 오히려 치유의 효과가 있지 않은가?

 

그래서 세헤라자데처럼 말로써 목숨을 건지는 경우도 있지 않은가?

 

물론 말로써 자신의 소중한 무엇을 잃은 사마천 같은 경우도 있고.

 

그런데 말이 다 똑같이 위험할까? 어떤 말은 가벼운 상처만을 남기고, 어떤 말은 치명적인 상처를 남기지 않을까?

 

어떤 말은 상처를 주는 듯하나 오히려 도움이 되기도 할텐데...

 

요즘 우리 사회는 말들의 천국이다.

 

주인 잃은 말들이 여기저기 떠돌아 다니고, 이 말들은 정착도 하지 못한다.

 

그냥 부유한다.

 

여기에 서로가 서로에게 칼을 들이댔다고 한다.

 

같은 칼이 아닌데...

 

강자가 한 번 뱉은 말은 치명적인 위협으로 다가오고, 약자가 뱉은 말은 몸부림에 불과할진대...

 

이런 말의 경중을 따지지도 않는다.

 

그냥 치명적인 상처를 주는 위협이라고만 말한다.

 

그런 말들이 너무도 많이 떠돌아다닌다.

 

갑자기 이런 말이 생각난다.

 

양약고어구, 충언역어이(良藥苦於口, 忠言逆於耳)

 

좋은 약은 입에 쓰고, 충성스러운 말은 귀에 거슬린다.

 

이게 옛 선현들이 명심하고 있던 말이다.

 

자신의 귀에 거슬린다고 그건 해서는 안될 말이라고 하기보다는, 자신을 되돌아보는 계기로 삼아야 하지 않을까?

 

혀 속에 칼이 있다는 말, 그 칼이 나를 해치는 칼이 아니라 나를 깨우치는 칼이 되게 할 수도 있지 않을까?

 

이런 말들을 다모클레스의 칼처럼 늘 자신의 머리 위에 두고 있어야 하지 않나.

 

그러면 지금보다 한결 나은 그런 사회가 되지 않을까 하는데...

 

경어인(鏡於人), 사람에 나를 비추어 보라고 했다.

 

나를 말하는 사람, 그 사람이 바로 내 거울이다.

 

그렇다면 그 사람의 말에 일희일비할 까닭이 없다.

 

오히려 나를 돌아보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

 

그런 태도, 그런 지혜가 필요하다.

 

그래서 말은 하게 내버려두어야 한다.

 

말을 처벌하면 그 때는 자기 검열의 시대가 된다.

 

이런 검열의 시대는 곧 혀 속에 칼이 있게 된다.

 

그리고 그 칼은 서로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주게 된다.

 

그런 칼이 아니라, 서로를 경계하게 하고 발전하게 하는 칼이 되게...

 

우리의 혀 속에 있는 칼들이.. 그런 말들이.

 

이런 생각이 들었다. 요즘 세상이 하도...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서.

 

 

 

헌책방에서 구입한 박희진의 "미래의 시인에게"를 읽다.

 

참 많은 시집을 낸 시인이란다. 이 시집에서만 보아도 31권의 시집을 내었다고 하니. 이 중에 4개의 시집에서 골라 펴낸 시선집이다.

 

박희진 시인은 시낭송을 하기로 유명한 시인이니... 시는 곧 우리의 말과 함께 있음을 몸소 보여주는 시인인데...

 

그의 시 중에, 이 시집 마지막에 실린 시인데...'한국어를 기리는 노래'라는 시이다.

 

그 중의 한 부분

 

'한국의 시인은 / 한국어라는 소리를 내는 악기'(1-2행)라는 구절이 있다. 어디 시인만이겠는가.

 

우리는 모두 한국어라는 소리를 내는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들 아닌가. 그렇다면 우리의 말들이 칼이 아니라 음악이 되게 해야 하지 않을까. 그 말소리만 듣고도 기분이 좋아지는, 그런 말들.

 

적어도 힘있는 사람들의 말이 칼로 느껴지지 않는 사회, 그런 사회에서는 말들이 음악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참 많은 시가 있지만....제목이 된 시.

 

      미래의 시인에게

 

어디서인지 자라고 있을 / 너의 고운 수정의 눈동자를 난 믿는다

또 아직은 별빛조차 어리기를 꺼리는 / 청수한 이마의 맑은 슬기를

 

너를 실제로 본 일은 없지만 / 어쩌면 꿈속에서 보았을지도 몰라

얼음 밑을 흐르는 은은한 물처럼 / 꿈꾸는 혈액이 절로 돌아갈 때

 

오 피어다오 미래의 시인이여 / 이 눈면 어둠을 뚫고 때가 이르거든

남 몰래 길렀던 장미의 체온을

 

 

활활 타오르는 불길로 보여다오 / 진정 새로운 빛과 소리와 향기를 지닌

영혼은 길이 꺼지지 않을 불길이 되리니

 

박희진 시선집, 미래의 시인에게, 우리글. 2008년. 29쪽. 

 

꼭 미래의 시인이 아니래도 좋다. 미래의 우리, 아니 현재의 우리들이 이런 '새로운 빛과 소리와 향기를 지닌 영혼'을 지니고, 그런 '불길'로 이 세상을 꽃피웠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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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진짜 유고시집이다. 행방불명 되었을 때의 시집이 아닌.

 

그의 사후 모아놓은 시들에다가 그를 추모하는 글을 모아 책으로 냈다.

 

엄밀히 말하면 시보다는 그에 대한 글이 더 많으니 천상병 유고시집이라기보다는 천상병에 대한 이야기라고 해야 하리라.

 

역시 헌책방에서 구입한 책.

 

천상병은 시인이라기보다는 기인으로 더 많이 알려졌는데... 그의 말년 그가 텔레비전에도 나오고 하여, 인사동에 있는 귀천이 덩달아 유명해지기도 했다.

 

술과 돈을 달라는 일화로 유명한 시인. 그러나 그는 정작 시인이다. 우리는 그의 시 "귀천"을 기억하기 때문이다.

 

시인이 평생동안 수많은 시를 쓰지만 시대를 넘어 자신의 시가 한 편이라도 대중에게 계속 읽힌다면 그 시인은 행복한 시인일텐데... 천상병은 "귀천"이라는 시로 이미 행복해졌다고 할 수 있다.

 

그의 초기시들과 후기시들의 내용이 많이 다르기는 하지만, 그는 천상 시인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의 삶 자체가 시 아니었던가.

 

다른 사람이 이렇게 행동을 했으면 비난을 많이 받았을텐데... 이 책에 나와 있는 글들에서 볼 수 있듯이 천상병의 그 순진무구한 행동은 비난을 받을 수 없게 만든 그런 행동이었다니... 참.

 

그가 남에게 돈을 달라고 했지만, 딱 자신에게 필요한 만큼만 달라고 하였고, 남의 집에서 기숙한 것도 어떤 악의가 있어서 한 것이 아닌, 자연스런 행동이었다고 하니. 이런 시인, 이런 행동을 한 사람... 우리 사회의 다양성을 보여주는 그런 사례이기도 하리라.

 

천상병에 대한 일화를 알고 싶으면 읽으면 된다. 예전 기인(?)들의 삶을 읽으면서 내 삶을 돌아볼 수도 있으니 말이다.

 

그는 시 '귀천'에서 이 세상의 삶을 소풍이라고 했는데, 그는 소풍을 마치고 다른 세상으로 갔지만, 우리는 아직도 소풍 중인데...

 

소풍이라고 느낄만큼 아름다운 세상인지... 그런 세상을 단지 바라기만 해서는 안되고, 우리가 그런 세상을 만들어야 하지 않겠는지... 이건 기행하고는 상관없는, 우리의 행복을 위해서 필요한 일이 아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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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두를 신고 잠이 들었다' 제목이 참... 역시 헌책방에서 산 시집인데... 시인이 누구인지도 모르는데 그래도 시집을 산 이유는 출판사에 대한 믿음 때문인데...

 

이렇듯 어느 한 분야에서 믿음을 주기란 쉽지 않은데... 아직도 자기들이 잘났다고 하는데도 남들은 믿어주지 않는 집단이 있으니. 그들은 그것을 알까?

 

알면서도 그렇게 행동한다면 너무도 뻔뻔한 사람들이고, 모르면서 그렇게 행동한다면 너무도 무식한 사람들일텐데...

 

자신들을 선량(選良)이라고 한다. 뽑힌 인재라는 뜻일텐데... 도대체 그들을 뽑아준 사람들도 문제지만, 매번 최선이 없으니 차악(次惡)을 선택한다고 뽑았으니... 이걸 알고 자신들의 행동을 결정한다면 좀더 좋은 사람들이 될텐데.

 

출판사를 믿고 시집을 고르듯이 정당을 믿고 사람을 뽑는 경우도 꽤 있을텐데... 그 정당이 과연 믿음에 부합할까? 그렇게 믿고 뽑았는데, 영 아닌 사람들도 꽤 있지 않을까? 그러면 정당에 대한 믿음 역시 시나브로 사라져갈텐데...

 

창비란 출판사 마찬가지다. 적어도 문학 분야에서는 믿음이 가는 출판사 아니던가. 예전부터 우리나라 문학을 선도해오던 출판사이니 말이다.

 

시집의 경우도 다양한 시집을 내었고, 그래서 어느 시집을 골라도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데... 이 시집도 마찬가지다. 여러모로 궁리를 하면서 읽는데...

 

도대체 뭔 뜻인지 알 수가 없다. 뭔 뜻인지 알 수가 없다는 얘기는 마음에 쏙 들어오지 않는다는 얘기다. 요즘 시집들이 마음으로 읽기보다는 이성으로 읽어야 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 시집도 마찬가지다.

 

서정홍 시인이 쓰는 시와는 정반대에 서 있다고 보면 된다. 도대체, 이렇게 몽환적일 수가 있는가? 마치 초현실주의 그림을 보는 듯한 그런 느낌을 주는 시들이다.

 

대표 제목이 된 시인 "구두를 신고 잠이 들었다"를 읽어도 무슨 소리인지 제대로 이해할 수가 없다. 그럼에도 대표시이니 자꾸 읽게 되는데... 읽으면서 '구두를 신고'라는 말은 언제든지 나갈 수 있는 준비를 했다는 뜻으로 생각을 하는데, '잠이 들었다'란 표현은 준비는 했으되, 나가지는 않는다는, 그래서 결국 자신은 자신의 내부로밖에 침잠할 수 없다는, 그런 히키코모리적인 내용으로밖에는 읽히지 않는다.

 

사회에 나가 사람들과 어울리고 싶으나, 그렇게 하지 못하고 오로지 자신 속으로만 들어가고 마는, 그것이 '내 몸의 가지들은 몸 속으로만 뻗어갔다'는 표현으로 나타나고, 사람들과의 단절은 '도시의 지붕들이 날아가는 사이가 길들도 사라졌다'고 표현되고 있다. 결국 자신은 '구두 속에서 나오지도 않았다'고 세상으로 나아가려는 노력을 포기하고 있다.

 

세상이 각박해지고, 상식으로는 해석이 되지 않을 때, 그 때 많은 사람들은 자신 속으로만 들어간다. 그의 이야기는 세상을 향해 나아가지 못하고 자신을 향해서만 행해진다. 이런 세계 속에서 논리를 발견하기란 힘들다. 세상은 그 자체로 혼돈인 것이다.

 

이런 혼돈을 이 시집에서 담고 싶었을까? 도무지 연결이 되지 않는 시어들이, 상황들이 시 속에 나타나고 시집에 혼재되어 있다. 이게 바로 우리가 사는 지금 세상이야 하는 듯이. 그렇담 시인이 그려낸 이런 혼란한 세상에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나? 그냥 주저앉을 수는 없지 않은가?

 

출판사가 믿음을 주고 있듯이, 정당들이 믿음을 주어야 하듯이, 시인은 세상은 그래도 살만하다는 믿음을 주어야 하지 않는가? 그런 믿음을, 우리는 목숨이 왔다갔다 하는 순간에도 "이야기"로 살아남는 "세헤라자데"에게서 찾아야 하지 않을까?

 

시인은 그래서 "카산드라"가 아니라 "세헤라자데"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그의 이야기는 끊어질듯 끊어질듯 계속해서 이어지고, 그런 이어짐이 우리를 계속 살아있게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하여 시인은 자신을 "세헤라자데"라고 지칭하고 있다. 이 험난한 세상,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사람. 시집의 제일 앞에 이 제목의 시가 나온 이유가 바로 그것이지 않을까. 비록 '구두를 신고 잠이 들'지만, 그래도 이야기를 포기하지 않는, 지금은 자신에게로 이야기를 하지만, 그 이야기가 횡설수설하고 있지만, 도무지 논리를 찾을 수가 없지만, 나중에는 밖으로 향할 수 있다는, 혼돈의 세상을 질서의 세상으로 만들 수 있다는, 그런 자세. 왜냐, 시인은 언제든 뚜벅뚜벅 걸어나오면 되니까. 구두는 이미 신고 있으니까.

 

세헤라자데

 

  옛날이야기 들려줄까 악몽처럼 가볍고 공기처럼 무겁고 움켜잡으면 모래처럼 빠져나가버리는 이야기 조용한 비명같은 이야기 천년 동안 짠 레이스처럼 거미줄처럼 툭 끊어져 바람에 날아가버릴 것 같은 이야기 지난밤에 본 영화 같고 어제 꿈에서 본 장면 같고 어제 낮에 걸었던 바람 부는 길 같은 흔해빠진 낯선 이야기 당신 피부처럼 맑고 당신 눈동자처럼 검고 당신 입술처럼 붉고 당신처럼 한번도 본 적 없는 이야기 포르말린처럼 매혹적이고 젖처럼 비릿하고 연탄가스처럼 죽여주는 이야기 마지막 키스처럼 짜릿하고 올이 풀린 스웨터처럼 줄줄 새는 이야기 집 나간 개처럼 비를 맞고 쫓겨난 개처럼 빗자루로 맞고 그래도 결국에는 집으로 돌아오는 개 같은 이야기 당신이 마지막으로 했던 이야기 매일 당신이 하는 이야기 내가 죽을 때까지 죽은 당신이 매일 하는 그 이야기 끝이 없는 이야기 흔들리는 구름처럼 불안하고 물고기의 피처럼 뜨겁고 애인의 수염처럼 아름답고 귀를 막아도 들리는 이야기 실험은 없고 실험정신도 없고 실험이란 실험은 모두 거부하는 실험적인 이야기 어느날 문득 무언가 떠올린 당신이 노트에 적어내려가는 이야기 어젯밤에 내가 들려준 이야기인 줄도 모르고 내일 밤 내가 당신 귀에 속삭일 이야기인 줄도 모르고

 

강성은, 구두를 신고 잠이 들었다. 창비. 2010년 초판 3쇄. 8-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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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헌책방에서 구입한 책.

 

이 이름만으로도 시집을 구입하게 만든다. 김광섭. 얼마나 많이 들었던 이름인가. 그것도 학교 다닐 때 국어 시간에 또는 문학 시간에 배웠던 이름. 친숙하다.

 

그가 우리나라 초창기 시인으로서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차치하고서라도, 그의 시 중에서 '성북동 비둘기'만큼 알려진 시도 없는데, 이 시집은 75년에 나왔지만, 그간 발표된 그의 시집들에서 시를 발췌한 것이다.

 

시를 읽은 이유가 뭘까? 마음이 우울할 때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서. 지금보다 나은 삶을 위해서. 그런데.. 어떤 시가? 그런 시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시를 읽는다. 읽어가다 보면 어느 새 내 마음 속으로 들어오는 시가 있다. 그 시가 나를 치유해 준다.

 

그런데 이번 시집을 읽다 보니, 시인에게도 시가 치유가 되나 보다. 하긴 글읽기나 글쓰기나 다 치유의 과정일테니.

 

시인의 아내가 세상을 뜨게 되었을 때의 과정이 '깨끗이와 아내의 죽음'이란 시로 표현되어 있는데, 시뿐만이 아니라 그 시의 끝에 시인은 '노우트'라고 하여 자신의 글을 적어놓고 있다. 참으로 슬픈 의료사고의 현실. 그런 현실에서 시인은 시를 통해서 자신을 치유해 나가고 있다. 아직도 이런 일이 많은데... 이것이 이 시가 우리에게 아직도 유효한 이유일지도 모른다. 아니, 시는 보편적으로 언제나 우리에게 다가오는 이유이기도 하다.

 

'성북동 비둘기'와 노래로도 불린 '저녁에'로 우리에게 많이 알려져 있지만, 그의 시는 때로는 강하게 때로는 부드럽게 세상을, 자신을 노래하고 있다.

 

계절은 겨울이 되고 있는데, 계절만이 아니라 다시 사회도 겨울로 접어들고 있는지, 이 추운 시대에 김광섭의 "겨울날"을 읽으며 겨울을 버티고 싶단 생각을 했는지도 모른다. 내가 이 시집을 선뜻 집어든 이유가.

 

어떤 이는 누구의 발언을 문제 삼아 당신의 나라는 어디인가라고 하기도 하는데... 나는 어떤 나라를 원하는지... 어떤 나라라도 지금 내가 살아가고 있는 이 나라. 그 나라... 참...

 

김광섭의 '나의 사랑하는 나라'라는 시... 그래, 이게 그래도 내 나라다. 나는 나라를 이렇게 생각해야겠지.

 

나의 사랑하는 나라

 - 김광섭 

 

지상에 내가 사는 한 마을이 있으니 / 이는 내가 사랑하는 한 나라이리라

 

세계에 무수한 나라가 큰 별처럼 빛날지라도 / 내가 살고 내가 사랑하는 나라는 오직 하나뿐

 

반만년의 역사가 혹은 바다가 되고 혹은 시내가 되어 / 모진 바위에 부딪쳐 지하로 숨어들지라도

 

이는 나의 가슴에서 피가 되고 맥이 되는 생명일지니 / 나는 어데로 가나 이 끊임없는 생명에서 영광을 찾아

 

남북으로 양단되고 사상으로 분열된 나라일망정 / 나는 종처럼 이 무거운 나라를 끌고 신성한 곳으로 가리니

 

오래 닫혀진 침묵의 문이 열리는 날 / 고민을 상징하는 한떨기 꽃은 찬연히 피리라 / 이는 또한 내가 사랑하는 나라 내가 사랑하는 나라의 꿈이어니

 

김광섭, 겨울날, 창작과비평사, 1990년 7판. 12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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