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다. 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여름도 어느덧 지나가고, 아침 저녁으로는 서늘한 기운이 있다. 이 서늘한 기운은 열정들이 결실을 맺는 모습으로 나타난다고 볼 수 있다.

 

푸른 녹음을 자랑하던 잎들도 이제는 자신의 색을 바꾸기 시작하여 계절의 흐름에 따르기 시작한다. 이런 가을, 결실의 계절이라는 가을은 열정이 식는 계절이기도 하고, 차갑게 얼어붙는 겨울을 예비하는 계절이기도 하다.

 

이 가을, 누구에겐 결실의 계절이 아니라 떨어짐의 계절로 다가올 수도 있을텐데... 그러나 이것이 끝이 아님을, 언젠가는 다시 혹독한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옴을 우리는 알 수 있으니...

 

어느날 차를 몰고 출근하는 길에 라디오에서 들려오는 노래 하나.

 

윤도현의 '가을 우체국 앞에서'

 

계절에 맞게 마음에 싸하니 들어와 박히는 노래. 이 노래를 들으며 이 노래를 김현성이 만들었음을, 그리고 김현성이 시에 곡을 붙여 노래로 부르고 있음을 떠올렸으며, 더불어 김광석이 부른 그 유명한 노래 '이등병의 편지'도 김현성이 만들었음을 떠올리고, 오래 전에 사놓고 읽어보았던 그의 시집을 다시 읽어봐야지 했었다. 그의 시집 제목이 "가을 우체국 앞에서"였다.

 

주말을 맞아 다시 펼쳐본 그의 시집에는 이 두 노래의 가사가 들어있고, 역시 시에 곡을 붙이는 사람답게, 자기 시에 곡을 붙였는데, 이렇게 좋을 수가 있다니... 이 두 노래의 가사는 이 시집에 시로 실려 있다. 무엇이 먼저인지는 모르겠지만, 다른 시들도 마음 속으로 들어와 콕콕 박힌다. 감수성이 예민한 사람이구나, 참 마음이 순수한 사람이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는 낙엽을 보고서도 이렇게 시로 썼다.

 

(앞부분 생략)

 

돌아갈 곳을 모르는 사람은 슬픈 일만 있는 법.

흙 속으로 스며들어 흙이 된다는 것은

삶을 아릅답게 사는 것.

 

봄이 오면 나무는 말하리라.

죽음으로 끝난다는 말은 사람들만의 얘기일 뿐

다시 나는 푸른 잎사귀들은

지난 가을 노을에 붉게 물들었던

아름다운

죽음이었다.

(김현성, 가을 우체국 앞에서, 아선미디어. 2001년 초판. '흙으로 가는 길' 부분. 106-107쪽)

 

지금은 가을. 떨어지는 낙엽에게는 죽음이겠지만, 그 죽음은 죽음으로 끝나지 않고 다시 새로운 삶으로 탄생하는 순환의 과정임을 시에서 노래하고 있다.

 

어둠의 시절도 어둠이 지속되지 않음을 우리는 이 시를 통해서, 또 계절의 순환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역사를 공부하는 이유도 지금을 역사의 흐름에서 파악하기 위해서이기도 하니까...

 

권불십년(權不十年)이라고 했다. 모든 권력은 돌고 돈다. 한 때의 권력에 일희일비할 필요가 없다. 길게 역사의 흐름으로 보면 된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우리가 지닌 순수성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따라서 가끔은 시를 읽을 일이다. 현재가 탁하다고 나까지 탁할 필요는 없으니까.

 

하여 나는 이 가을에 겨울을 건너뛰고 따뜻한 바람이 불어오는, 이 가을이 예비한 봄을 생각하련다. 봄을 생각하며 내 맘을 추스리련다.

 

이 시집에는 마음에 와닿은 시가 많은데, 그 중에 하나만 인용하면 지금 이 시대에 필요한 사람, 아니 우리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이런 사람이지 않을까 싶은 시 한 편.

 

오래된 주전자

 

오래된 주전자에서

새 물이 끓는다.

겉모습은 찌그러지고 여기저기 긁혔지만

언제나 뜨겁게 몸을 달굴 줄 안다.

세상을 제대로 산 사람이라면

온몸이 긁히고 찌그러져 있다.

밥을 저의 땀으로 얻은 사람은

눈물이 몸을 얼마나 뜨겁게 할 수 있는지를 안다.

눈물이 웃음으로 될 수 있는 사람은

제 몸이 찌그러지고 긁혀도

언제나 세상을 뜨겁게 달굴 줄 안다.

 

김현성, 가을 우체국 앞에서. 아선미디어. '오래된 주전자' 전문. 9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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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신문에서 최인호 작가의 부음 소식을 봤다.

 

고등학생 때 등단을 했고, 우리나라에서 가장 대중적인 작가라는 소리를 들었던 작가.

 

그의 작품 중에 영화로 만들어진 것도 많았는데...

 

한 때는 너무 대중적인 작가라 그의 작품을 조금 멀리하기도 했는데... 그럼에도 예의상 읽었던 몇몇 작품들.

 

참 읽기에 편했다. 그가 유명한 작가가 된 이유가 있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든 문체의 힘.

 

이 중에서도 내가 가장 재미있게 읽었던 작품은 경허 스님을 다룬 "길 없는 길"이었다. 재미도 있고 생각할 거리도 많은 작품.

 

그를 유명하게 만들어준 "겨울나그네"도 좋았고, "구멍"이라는 소설도 좋았지만 내게는 "길 없는 길"이 가장 좋았다. 그 다음에 최인호라는 작가를 좋아하게 되었는데.. 그의 수필도 좋았고. 그가 암으로 고생을 하고 있다는 얘기는 들었었는데... 

 

이제 그는 '길 없는 길'을 떠났다. 그는 이제 우리 문학사에 자신의 이름을 남기고 떠났다. 그런 그가 이제는 편하게 쉬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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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관상을 보다.

 

처음 시작 부분에서 이거 코미디겠네 하다가, 이런 코미디가 아니라 피 비린내 나는 역사의 한 가운데를 다루고 있는 영화구나 하고...

 

이런 역사의 한복판에 우연치 않게 끼어든 관상쟁이의 이야기라고 하기엔 너무도 슬프고, 그렇다고 도대체 왜 관상쟁이를 끌어들였나 하기엔 너무도 생각할 것이 많고.

 

조선 초.

 

정말로 많은 피를 불렀던 때다. 엄청난 피들이 역사를 물들였던 때. 하다못해 우리나라 최고의 성군이라고 불리는 세종조차도 이 피 냄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말았으니. 역설적이게도 세종을 전후해서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시대가 펼쳐진다. 참 나.

 

정치가로서 세종이 성공했다면 가장으로서 세종은 처절한 실패를 했다고 할 수 있다. 그의 자식들이 겪은 운명을 보라. 형제들 간에 살육을 저지르는 그런 일을.

 

그것이 역사의 흐름이었고, 그런 흐름을 영화에서는 바람이라고 표현을 했는데... 피를 부르는 행위를 한 사람들은 바람이 일으키는 파도에 불과했다는 주인공의 말이 가슴에 와 닿는데...

 

운명을 거스를 수 있는가? 사람의 얼굴에서 운명을 읽어낼 수 있는가? 남의 운명을 읽어내는 사람은 자신의 운명도 읽어낼 수 있는가? 이런 질문을 하게도 하지만, 운명을 읽어내도 운명을 바꿀 수 없다면 어떻게 하지?

 

자신의 운명을 안다? 이것이 행복일까? 아니면 불행일까? 그런 점에서 관상쟁이는 과연 행복할까? 이 영화에서 초반에 재미있게 표현이 되고 진행이 되는 것은 정치와 떨어진 자리의 관상은 우리에게 재미와 행복을 줄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지만, 관상이 정치와 결부되는 순간, 이미 재미는 저 멀리 사라져 버리게 된다. 이 때부터는 치열한 욕망들의 목숨을 건 투쟁만이 존재하게 된다.

 

관상. 이것이 바로 정치와 결부되었을 때 우리가 겪을 수 있는 일이다. 그것은 자신의 운명을 마주보는 사람들의 일이 되는 것이다. 결국 관상이라는 영화에서 관상쟁이와 그 주변인물들을 빼면 역사의 흐름에서 그 흐름을 타는 인간과 흐름을 거스르는 인간으로 나뉘게 되고, 각자는 자신의 운명을 마주보고 그 운명에 맞서서 최선을 다하는 비극을 연출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관상은 희극으로 시작했지만 비극으로 끝나는 영화가 된다. 비극일 수밖에 없다. 맑스의 말과는 반대로. 역사는 처음에는 비극이지만 다시 반복될 때는 희극이라고 그는 말했지만, 우리나라 역사에서는 비극으로 시작해서 비극으로 끝나는 그런 반복이 계속되었다고 할 수 있다.

 

할아버지 이방원. 제 형제들의 피를 묻히고 왕이 된 사람. 손자 수양대군. 제 형제들의 피를 묻히고 왕이 된 사람. 몇 년 안 된 시기에 이런 비극이 반복되다니...

 

왕조 초기. 왕권과 신권을 둘러싼 싸움에서 벌어질 수 있는 그런 일들이라고 하기엔 참...그렇다면 여기서 관상쟁이의 역할은? 서로의 역할에 대해서 알려줄 뿐이다. 그렇게 살 수밖에 없음을. 그리고 자신도 그러한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그러나 관상이 운명을 좌우하는가? 아니다. 자세히 들여다 보면 관상조차 변할 수 있음을...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 알려주고 있다.

 

주어진 운명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살아가느냐도 역시 중요하다는 사실. 그것을 이 영화에서 찾아내야 하지 않을까... 그렇지 않으면 도대체 이 영화를 보고 나서 무엇을 얻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더불어 우리나라 문학 작품. 한 사람은 라이벌이란 생각조차 하지 않았지만, 또 한 사람은 기어코 라이벌이라고 생각했던 사람.

 

이광수와 김동인. 그들은 이 시대를 서로 다른 관점에서 쓰고 있다.

 

"단종애사"와  "대수양"

 

우리나라 문학의 선구자라는 이광수는 단종의 입장에서 그 당시를 살려내고 있다면, 그를 평생동안 넘어서고자 했던 김동인은 그의 대척점에 서서 수양의 입장에서 그 당시를 살려내고 있다.

 

어떤 출판사에서 나온 책도 괜찮을 듯하다. 어짜피 한국 근대문학임에도 지금 사람들에겐 너무도 먼 고전 문학 대우를 받고 있는 작품들일테니 말이다.

 

 

어떻게든 소설로 표현된 그 시대이니 함께 읽으면 좋을 듯도 하다.

영화 관상은 김종서의 입장에서 이야기를 펼쳐가고 있다고 해야 할 듯. 관상학적으로 김종서는 호랑이 상이고, 수양은 이리 상이라고 했으니. 우리나라 사람들은 호랑이는 영물로 치지만, 이리는 악의 상징으로 많이들 이야기 하니까. 하여튼, 영화를 보든, 책을 읽든... 무언가를 할 일이다. 그러면 얻어질 것들이 있을테니 말이다.

 

지금은 어떤 시대?

 

설마 할아버지, 아버지가 이룬 나라를 내 손으로 더욱 굳건히 지켜야겠다는  그런 시대는 아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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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이 없는 시대에 희망을 노래하는 것은 사치다.

 

이런 말을 해야 하나?

 

아니면 희망이 없는 시대에 희망을 노래해야만 한다고 해야 하나?

 

참 캄캄하다. 먹먹하다고 표현하는 편이 더 좋을 듯하다.

 

도대체 앞이 보이지 않으니...

 

무엇을 잘하고 무엇을 못하고 따지기 전에, 이미 무엇을 잘못했는지를 가려버리고 있으니...

 

하여 희망은 없다. 희망이 없기에 나는 희망을 찾는다. 있으면 굳이 찾을 필요없으므로.

 

삶창 94호 책 겉면의 그림이 나를 또 먹먹하게 한다. 6인 병실.

 

여섯 명의 환자가 같은 공간에 있지만 이들은 모두 다른 공간에 있다. 이들은 각자 자기만의 것을 바라보고 있을 뿐 서로를 바라보지 않는다.

 

그래, 이게 지금 우리의 현실이다. 서로가 서로를 보고 있는듯하지만 절대로 서로를 보고 있지 못하는.

 

자본가와 노동자가 그렇고,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그렇고, 각 정당들이 그렇고, 그렇고, 그렇고.

 

삶창 94호 특집이 "나는~중이다"이다. 여기에 건방지게 나는 희망을 찾는 중이라고 제목을 붙였다. 이렇게라도 희망을 찾는 흉내라도 내지 않으면 미쳐버릴 것 같아서.

 

그래도 삶창을 읽으면서 조금의 따스함을 느낀다. 이러한 따스함이 희망과 연결이 됐으면 좋으련만.

 

희망이 없는 시대, 다시 희망을 찾자. 희망을 찾는 몸부림이 우리를 살아있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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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라는 말이 득세를 하는 세상이다. 전문가의 말이 마치 최종적인 판단처럼 여겨지는 것은, 우리나라가 지금 각 분야별로  파편화되었다는 얘기다. 전체를 볼 수 없게 된 사회라는 뜻이기도 하다.

 

지금 여러 가지 문제가 있는데,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각자 다른 소리들만 한다. 이들은 전체를 보지 않는다. 오직 자기 것만을 본다.

 

그런데 자기 것이 완벽하다고 해서 전체가 훌륭해지나? 그렇지는 않다. 전체는 부분들의 단순한 합이 아니기 때문이다.

 

각 분야의 좋은 점을 다 모아놓았다고 해서 전체가 좋아지지는 않는다. 따라서 우리에게 필요한 일은 전체를 보는 일이다. 전체를 보고, 그 전체 속에서 부분을 생각한다면 세상은 각자 잘 굴러가겠지만, 전체의 흐름을 거스르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요즘 일어나는 일들은 무서우리만큼 개별적이고 분산적이다.

 

원자력(이 말을 이제는 핵이라고 써야 할텐데...) 문제만 해도 그렇고, 4대강도 그렇고, 비정규직 문제도 그렇고, 요즘 한창 불붙고 있는 이념논쟁도 그렇고, 한국사 교과서 문제도 그렇고...

 

정말로 많은 일들이 일어나는데, 이 일들이 하나로 통합이 되지 않는다. 전체를 무시하고 각 분야에서만 말들이 난무한다. 특히, 전문가라는 사람들이 더.

 

그러나 이들은 다 연결되어 있다. 세상의 어떤 일들도 홀로 존재하지 못한다고 한다면, 각자의 일들은 이렇게든 저렇게든 연결이 된다.

 

가끔 나만의 세계에 빠져있는 나를 발견하곤 한다. 나 역시 내 문제에서만 맴돌고 있을 뿐이다. 그럴 때 두 달에 한 번 받아보는 녹색평론은 여러가지를 생각하게 한다.

 

이번엔 원자력국가와 민중의 삶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는데, 원자력 문제는 녹색평론이 꾸준히 다루어오고 있는 문제다. 이는 단지 발전소만의 문제가 아니라, 요즘 밀양에서 벌어지고 있는 송전탑 건설 문제와 같이 발전소와 멀리 떨어져 있는 곳에서도 심각한 삶의 침탈이 일어나게 하는 것이니...

 

이것은 또한 지금의 삶의 방식에 문제가 있다는 이야기이기도 할텐데... 하여 녹색평론은 우리네 삶의 질을 높이는 방향으로 "기본소득"을 이야기하고 있다. "기본소득"은 공상적인 이야기로만 여길 것이 아니라, 충분히 가능하고, 또 빨리 시행해야 하는 일인데, 아직 우리나라에서는 공론화가 되어 있지 않다.

 

이는 진보정당에서도 아직 자신들의 정책으로 다루고 있지 않은데, 이에 대한 철저한 검토가 필요한 시점이라는 생각이 든다.

 

여기에 스페인에서 거의 실험도시, 자유도시라 할 수 있는 마리날레다 이야기도 있으니, 이런 사례들이 참조가 될 듯도 하다.

 

자기만의 세계에 갇혀 있으면서 전문가라고 자처하기보다는, 전체를 볼 수 있는 안목을 키울 수 있는 노력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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