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인과 시집이라. 참 뜬금없는 제목이다. 그런데 이 시집을 읽다가 정치인이 떠올랐으니, 그리 뜬금없는 제목도 아니다.

 

시집과 정치인은 공통점이 많다.

 

우선 시집과 정치인은 처음에 잘 모른다. 이들과 친숙한 몇몇을 제외하고는 도대체 무엇인지 알 수가 없다. 그래서 시집을 사기 위해서는 제목을 먼저 본다. 제목이 마음에 들면 시집을 산다. 마찬가지로 정치인을 선택하기 위해서는 공약을 먼저 본다. 그 공약이 마음에 들면 정치인은 뽑는다.

 

정치인의 공약과 시집의 제목은 이렇듯 비슷한데...

 

가끔 공약이 잘 드러나지 않는 정치인이 있다. 제목이 시의 제목으로 나와 있지 않아 시집을 모두 읽게 만드는 시집처럼, 공약이 선명하지 않은 정치인은 그 공약을 제대로 실천하는지를 살피기 위해서는 정치 인생 전반을 살펴야 한다. 참 힘든 일이다. 그리고 이런 정치인은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어 놓고 있다고 봐야 한다.

 

이 시집의 제목이 된 "나는 조국으로 가야겠다" 역시 시의 제목이 아니다. 시의 한 구절이 제목이 되었다. 이 구절은 이 시집의  '마장동 참새'(96-97쪽)라는 시의 한 구절이다. 이 시는 처음이 '나는 조국으로 가기 위하여'로 시작하여 끝이 '나는 조국으로 가야겠다'이다.

 

그래서 제목을 찾기 위해서는 시집을 모두 읽어야 한다. 찾아야 한다.

 

두 번째는 그 사람을 잘 모를 때는 추천하는 사람을 본다. 추천하는 사람이 평소에 괜찮다고 여겨졌던 사람이면 그 사람이 추천한 정치인도 선택을 하게 된다. 이게 사람의 심리다. 그것이 바로 믿음이다.

 

시집도 마찬가지다. 뒤에 해설을 한 사람을 본다. 시 해설을 한 사람이 평소에도 믿을 만하다고 생각한 사람이면 그 시집을 망설이지 않고 산다. 왜냐 이미 검증되었다고 믿으니까. 적어도 이 시집에 해설을 쓴 정과리라면 문학에 상당한 조예가 있다고 믿을 만한 사람이니, 이 시집은 시로써 어느 정도 성취를 이루었다고 믿을 만하다.

 

이도저도 아니면 정치인은 당을 본다. 내가 지지하는 정당의 정치인이라면 최소한 이 정도는 하겠지 하는 믿음이 있으니까. 시집도 그렇다. 출판사를 본다. 평소에 좋아하던 출판사에서 낸 시집이면 어느 정도는 믿음이 간다. 최소한 실패는 하지 않겠지 하는 생각으로 시집을 골라들게 된다.

 

'문학과지성사'. 한 때 '창작과비평사'와 더불어 우리나라 문학계를 양분했던 문학에서는 자타가 공인하는 출판사 아니던가. 출판사의 명예를 걸고 시집을 편찬할테니... 믿을 조건은 갖춘 셈이다. '창비시선'이나 '문지시선'은 그 자체만으로도 힘을 갖고 있다. 믿음을 주고 있으니.

 

그 다음에 이러한 믿음들이 별로였을 때 다음을 기약하게 된다. 정치인의 다음 공약을 기대하고 그가 새롭게 실천하기를 기대한다. 시집은 신작시집을 기대한다. 그런데... 신작시집이 기대에 미치지 못했을 때, 정치인이 기대에 또 어긋났을 때 이 때는 영영 이별이다. 다시는 돌아보지 않는다. 돌아보고 싶지 않다. 정치인은 믿음 속에서 사라져 표를 얻을 수가 없고, 시인은 더이상 시집을 팔 수 없게 된다.  

 

백학기의 신작시집은 사지 못했다. 그동안 시에서 멀어져 온 삶도 있겠고, 그의 시집을 억지로 다시 찾으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딱히 마음에 들지 않은 것도 아닌데... 마음을 그리 움직이지도 않으니...

 

공통점이라는 것이 이렇듯 많이도 있는데... 이 시집을 읽으며 마음이 별로 편하지는 않았다. 우선 제목이 '나는 조국으로 가야겠다'는 것에서부터...

 

조국으로 간다는 말은 내가 조국을 떠나 있단 말인데... 이 시집의 내용은 모두 조국에서 살고 있는 화자들이 전개해가고 있다. 그럼에도 조국으로 가야겠다는 다짐은 내가 원하는 조국이 아니라는 뜻이다.

 

즉, 내가 원하는 조국은 아직 오지 않았다는, 만들어지지 않았다는 뜻이고, 그러므로 이 시에 나오는 조국은 상처받은 조국, 아직도 어둠 속에서 헤매고 있는 조국이다. 이미 30년 전 시집인데... 그 때는 그래도 되었겠지... 해방이 되고 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고(해방이 된 지 30-40년 뒤를 이렇게 얘기해도 된다면), 조국은 막 건설되기 시작했을 때일테니...

 

마음이 편하지 않은 이유는 이 시가 쓰여지고 난 시점에서 또 그만큼의 시간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엄청난 공약(空約-공수표들)들에 휩싸여 살았음을 이 시집을 읽으며 계속 깨달아야 했기 때문이다.

 

당하고 당하고 ,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시집을 바꾸는 것보다도 더 힘들게 정치인을 바꾸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에고...하여 시인은 '시란 언제나 가난한 아버지 곁에 함께 하며/고스란히 물려받은 귀한 아버지의 무명옷처럼/질기고 확실한 유산이어야 함을/... /아버지의 눈꺼풀 위에 내려앉는 잠만큼이나/달콤해야 함을/(백학기 '불꺼진 용서의 간이역에서 떨고 있는 나의 시는'의 부분: 101쪽)'이라고 노래하고 있는데...

 

이 시를 읽으며 그랬으면 좋겠는데... 그런 세상이 와야하겠는데... 그것이 바로 시인이 바라는 조국이 아니겠는가. 그러한 조국으로 나도 가고 싶다.

 

짧은시... 오늘 한겨레 신문에서 본 어느 주장이 떠오르는 시.

 

밥을 위하여

 

내 밥에 눈물꽃 피네

목에 걸려 또한 타흐르는 밥알들이여

정든 산하 정든 이들이 기운 밥덩어리

 

백학기, 나는 조국으로 가야겠다, 문학과지성사. 1989년 초판 2쇄. 108쪽

 

그 주장은 "농민들에게 월급을 주자"였다. 밥없이는 살 수 없는 우리들. 그 밥을 위하여 평생을 바치는 사람들. 그러나 농사를 지으면 지을수록 빚만 늘어나는 사람들. 그들에게 우리는 생계를 빚지고 있으면서도 그들의 생계를 무시하고 있지는 않은지...

 

기본소득과 연계하여, 우리의 생명줄을 쥐고 있는 그들에게 우리 "월급"을 주는 방안. 이 시를 보자. 그들이 생산한 밥에는 이러한 것들이 들어있는데... 그 밥이 그냥 편하게 넘어갈 수는 없지 않은가.

 

시집. 정치인. 그리고 아직도 진행형인 "조국". 그러한 조국으로 가야겠다는 시인의 외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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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이다. 겨울에 맞는 시, 뭐가 있을까 하다가 오래 전에 읽었던 정대구의 이 시집을 꺼내들었다.

 

인간의 기억은 한계가 있어 읽었는지, 읽지 않았는지 참으로 가물가물한 시집이다. 분명히 읽었을텐데... 시란 이렇게 기억의 저편으로 사라지기도 한다. 그렇다고 아쉬워하지 않는다. 분명 내 마음 속 어딘가에, 또는 내 몸 어딘가에 살아있을테니.

 

이 시집을 꺼낸 이유는 제목 때문이다. "겨울기도" 지금은 겨울.

 

계절만이 아니라 우리네 삶 역시 겨울.

 

겨울임에도 황사가, 미세먼지가... 우리를 습격하고... 경제는 더욱 어려워진다고 난리고... 노동자들은 힘든 삶을 보내고... 시민단체들은 제 역할을 못하고... 남과 북은 여전히 경색국면이고...

 

이럴 때 경건하게 기도를 하지 않겠는가. 겨울에는 이 겨울을 잘 보내게 해달라고. 이 겨울을 이겨내고 움트는 봄을 맞이하게 해달라고. 이 시집의 제목이 된 '겨울 기도'처럼 힘듦은 자신에게, 그리고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그 힘듦이 비켜가기를...

 

힘든 계절, 힘든 시대...기도를 통해... 행동으로 나아가는 힘을 얻게 되기를 바라지 않겠는가.

 

추위가 봄을 더욱 즐겁게 맞이할 수 있게 해달라고. 그런 기분으로 시집을 꺼내들었는데...

 

오래된 시집이다. 오래된 시들이다. 어렵지 않게 읽히는 시들이다. 그럼에도 생각할 수 있는 시들이 여러 편 있다. 시란, 시대가 흘러가도 언제나 시대와 함께 하는, 그 시대에 맞게 재해석 될 수 있는 그런 존재임을 다시금 깨닫게 된다.

 

여기서 발견한 시. '워키토키' 참 오랜만에 들어보는 이름이다. 이제는 사라진 물건이라고 해야 하나. 한 때 이것을 지니고 멀리 있는 사람과 무전기 놀이를 할 수 있었던 그런 물건.

 

이 워키토키에서 소통을 생각하게 된다. 소통은 서로 믿음이 있어야 이루어질 수 있음을 생각하게 된다. 소통이 그리운 시대...

 

이렇게 소통이 되는 상황이 우리에게 온다면 그야말로 봄이 온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데... 예로부터 시인들은 이러한 상황을 많이들 꿈꾸어 왔으니... 

 

워키토키

 

이쪽은 자유의 마을, 그쪽 나와라 - 오버

이쪽은 평화의 마을, 왜 그러냐 - 오버

 

지금 말잠자리 한 마리 철조망을 넘어 그쪽으로 날아간다 - 오버

지금 고추잠자리 한 마리 역시 철조망을 넘어 그쪽으로 날아간다 - 오버

이쪽 하늘엔 구름이 한가롭다 - 오버

이쪽 하늘에도 구름이 한가롭다 - 오버

 

휴전선 일대의 하늘엔

우리말 워키토키의 전파가 무성하고

땅 속의 풀뿌리들도

저희끼리 왕성하게 뒤엉키는구나.

 

남남북녀 이쪽에 미끈한 총각 있다 - 오버

남남북녀 이쪽엔 어여쁜 처녀 있다 - 오버

 

새 소리 바람 소리 이쪽저쪽 넘나들며 짝을 맺고

사랑합니다. 사랑합니다 - 똑같은 우리 말

우리들의 자유만, 우리들의 평화만

철조망에 얽혀서 찢어지는가.

 

이쪽을 겨눈 그쪽의 총부리

그쪽을 겨눈 이쪽의 총부리.

 

정대구, 겨울기도. 문학과지성사. 1987년 초판 4쇄. 14-15쪽.

 

이렇게 봄이 왔으면 좋겠다.

 

이 시를 보는 순간 신동엽의 시가 생각이 났다. 신동엽은 꿈을 꾸었다고 했지. 또 그는 "봄은"이라는 시에서 봄은 외부에서 오는 것이 아닌, 우리들의 내부에서 우리들이 맞아들일 수밖에 없다고 했는데... 그가 꾼 꿈은 이렇다.

 

술을 많이 마시고 잔 어제밤은

                                       - 신동엽

 

술을 믾이 마시고 잔

어제밤은

자다가 재미난 꿈을 꾸었지.

 

나비를 타고

하늘을 날아가다가

발 아래 아시아의 반도

삼면에 흰 물거품 철썩이는

아름다운 반도를 보았지.

 

그 반도의 허리, 개성에서

금강산 이르는 중심부엔 폭 십리의

완충지대, 이른바 북쪽 권력도

남쪽 권력도 아니 미친다는

평화로운 논밭.

 

술을 많이 마시고 난 어제밤은

자다가 참

재미난 꿈을 꾸었어.

 

그 중립지대가

요술을 부리데.

 

너구리새끼 사람새끼 곰새끼 노루새끼들

발가벗고 뛰어노는 폭 십리의 중립지대가

점점 팽창되는데,

그 평화지대 양쪽에서

총부리 마주 겨누고 있던

탱크들이 일백팔십도 뒤로 돌데.

 

하더니, 눈 깜박할 사이

물방게처럼

한 떼는 서귀포 밖

한 떼는 두만강 밖

거기서 제각기 바깥 하늘 향해

총칼을 내던져 버리데.

 

꽃피는 반도는

남에서 북쪽 끝까지

완충지대,

그 모오든 쇠붙이는 말끔이 씻겨가고

사랑 뜨는 반도,

황금이삭 타작하는 순이네 마을 돌이네 마을마다

높이높이 중립의 분수는

나부끼데.

 

술을 많이 마시고 잔

어제밤은 자면서 허망하게 우스운 꿈만 꾸었지.

 

신동엽, 신동엽 전집. 창작과비평사. 1985년 3판. 76쪽.

 

이런 꿈을 꾸고 싶다. 아니 꿈이 현실이 되었으면 좋겠다. 이런 평화가 바로 우리들의 봄일텐데...

남과 북에서만 아니라, 우리 사회 모두에서 이렇게 껍데기들이 사라진 세상, 서로가 서로 소통이 되는 세상. 그런 세상이 곧 봄이다.

 

지금은 겨울. 이런 봄을 꿈꾸는 기도를 해본다.

 

봄은 온다. 겨울은 간다. 그것이 순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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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된 시집이다. 하긴 성석제의 첫 시집이라고 하니. 그를 누가 시인으로 기억하고 있을까.

 

성석제는 소설가로 우리에게 더 많이 알려져 있지 않은가. 마치 황순원이 소설가로서 알려져 있지 그가 처음에는 시를 썼다는 사실을 잘 모르듯이.

 

집에 있는 시집들의 제목을 보다가 어라, 성석제 시집도 있네. 내가 산 것은 아닌데... 지금 나와 같이 사는 사람이 산 시집인가 보다.

 

읽어보지 않았는데, 이 책은 읽히지 않는 낯섬을 견디고 책꽂이에서 다시 펼쳐지길 기다리고 있었나 보다. 이제는 헌책방에서나 구할 수 있는 책이 되었는데...

 

제목도 마음에 든다. "낯선 길에 묻다"

 

우리는 모두 낯선 길을 간다. 인생이란 바로 이러한 낯선 길을 걸어가는 여행 아니던가.

 

낯설기에 가슴이 두근거리는, 그리고 새롭게 출발할 수 있는, 우리에게 무언가를 느끼게 해주는.

 

그런 길을 걸어본 적이 얼마나 오래되었던가. 아니, 요즘은 나이 먹었다는 이유로 낯섬을 의도적으로 피하고만 있었던 것은 아니던지.

 

시인은 늘 보던 것도 낯설게 볼 수 있는 사람이고, 우리가 시를 읽는 이유는 일상이 단조로움에서 벗어나 낯섬을 만나는 즐거움을 누리기 때문이 아니던가.

 

그래서 이런 낯섬은 반갑기도 하다. 그가 소설가로 유명하다는 사실에서 그의 시집을 만나는 것도 또한 낯선 일이기도 하다.

 

'낯섬'과 '묻다'라는 말이 제목에 있는데, 이런 제목을 가진 시는 이 시집에 없다. 시집 전체를 읽으며 우리는 낯섬을 만나고, 그리고 물어야 하는 지도 모른다.

 

시집 내용이 밝지가 않다. 밝지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슬프다. 너무도 슬프다. 91년에 발간된 시집인데, 그런데도 이 시집에 나오는 내용들이 아직도 진행형이라는 사실이...

 

또 불행하게도, 참으로 낯설게도, 이렇게 된 경우는 거의 없는데, 내가 가지고 있는 이 시집은, 33쪽부터 40쪽이 없다.

 

막내의 여섯 가지 심부름. 아버지와 아들, 수술실. 이렇게 세 편의 시가 빠져 있다. 낯설다. 그것도 모르고 지금까지 이 시집을 지니고 있었다. 이제는 어쩔 수 없이, 이 없음을 받아들이고 함께 해야 한다.

 

나중에 어디선가 이 세 편의 시를 적어서 끼워넣어야 되겠지.

 

이런 불행과 함께 시에 나오는 내용들은 참으로 불행하다. 어둡다. 슬프다. 90년대에는 그로테스크라는 말을 많이 썼나 본데... 지금은 우리가 살아간 현실을 시인이 직시하고 표현했다고밖에는 표현하지 못하겠다. 이 시집에 있는 내용들은 그로테스크가 아니라 우리의 현실이므로.

 

특히 이런 시들은 눈물이 날 정도로 슬프다. 시에 이야기가 있으므로, 그 이야기를 우리가 머리 속에서 생생하게 영상으로 떠올릴 수 있으므로,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시들에서 다루고 있는 내용이 지금 현실에서 계속되고 있으므로.

 

한 상사. 유리 닦는 사람. 가족1. 하늘 가까운 방. 그리고 3부의 동물이 등장하는 시들.

 

현실임에도 낯설다고, 여기서 물어야 한다고 한다. 20여년이 지났는데... 정말로 이 시집에 나오는  시들이 낯설었으면 좋겠는데... 그래서 당시의 사회 상황에 대해서 공부하고, 이런 일이 있었나 하면 좋겠는데...

 

성석제는 타고난 이야기꾼이다. 그래서 이 시집에 수록된 시들도 이야기로 되어 있는 시들이 많다. 마치 옛날에 임화나 이용악의 시에 이야기가 나와 있듯이. 그들 시를 '단편서사시' 또는 '이야기시', '리얼리즘시'라고 이름지었듯이 성석제의 시도 그 계보를 잇는다고 볼 수 있다.

 

이야기를 통해 우리 현실을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읽으면서도 시의 내용이 머리 속에 그려진다. 그것이 더 큰 울림을 준다.

 

새해 벽두. 20여년이 지난 지금 읽어본 성석제의 시집. 이 시집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2000년대는 1990년대를 또는 1980년대를 낯설게 볼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을 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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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를 맞이하기 위하여 송년회란 이름으로 술어 절어 산 나날들이다. 술에 젖어드는 만큼 세월의 무게가 나를 짓누른다. 그리고 세상의 습기가 나에게 스며든다. 술과 세월과 세상과 나이가 한꺼번에 나에게 다가온다. 무겁다.

 

이 삶의 무게는 정말 도도하다. 도저히 나에게서 벗어나지 않으려 한다. 그럼에도 나는 낙타처럼 이 무게들을 지고 간다. 아직은 쓰러지지 않았으므로. 쓰러질 수 없으므로. 나에게는 이 짐들을 지고도 가야 할 길이 있으므로. 

 

가끔 오아시스를 그리워한다. 오아시스를 찾는다. 잠시 목이라도 축이게. 몸이라도 쉬게. 짐을 잠깐 동안이라도 내려놓을 수 있게. 앞만 보고 걸어왔던 길을 되돌아 볼 수 있게. 그리고 조금 더 멀리 볼 수 있게.

 

몸과 마음이 모두 지친 상태에서 책장을 기웃거린다. 며칠 동안 읽었던 바우만의 책들이 더 삶의 무게를 더해주고 있기에.. 그런 분석에서 내 삶도, 우리들의 삶도 자꾸 '부수적 피해' 쪽으로, '밑바닥 계급' 쪽으로 가고 있기에.

 

최장기간 파업이라는 기록을 세웠던 철도노조 파업이 막을 내렸다. 노동자들이 얻은 것이 무엇일지. 과연 민영화라는 이름의 사영화(私營化)가 막아질지 그것은 지켜볼 일이지만, 파업 내내 마음을 졸였던 노동자들. 또 앞으로 그들에게 발부된 체포영장, 구속영장 등은 더 많은 짐을 지우게 될텐데...

 

즐거운, 밝은 내용의 시로 시작을 해야 하는데... 한 해 우리는 우리네 삶을 이 시로 표현해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정말로 사냥꾼에 몰린 사냥감이 된 해라고 해야 하나.

 

인간이 다른 생명체에게는 사냥꾼이겠지만, 이 시에서 보듯이 인간은 인간에게 더 무서운 사냥꾼이 된다. 약자들은 세계화 시대에, 신자유주의 시대에 자유란 이름으로, 자본이라는 권력을 휘두르는 사람들에 의해 사냥감으로 전락한다.

 

현실을 직시하자. 그래야 벗어날 길이 보인다. 슬프지만... 우리의 현실을 보여주는 시.

 

사냥꾼

- 이희중

 

벌레의 집으로 옷을 짓고

꽃으로 베를 짜며 짐승의 살갗을 뺏어 입는다

식물의 시체 썩은 검은 물을 태워 수레를 굴리고

돌을 녹여 생각 없는 무서운 짐승과

그의 이빨을 만든다 흙을 박제한 후

의자에 의지하고 제 비린내를 강물에 씻어

세상을 더럽힌다 그리고 직설적으로

더 상징적으로 동족을 사냥한다

 

안도현 엮음, 바람난 살구꽃처럼, 현대문학북스. 2002년 1판. 22쪽

 

그래. 인정하자. 작년 한 해는 이러한 사냥꾼들이 득세를 한 해였다. 사냥꾼들에게 우리는 마냥 쫓기고만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단지 쫓기고만 있었을까? 아니다. 분노도 했다. 광범위한 분노. 그러나 그 분노는 결코 그릇을 넘지 못했다. 그릇 안에서만 부글부글 끓고 있었을 뿐이다.

 

스테판 에셀의 "분노하라"는 외침은 외침으로만 끝나고.. 우리는 우리의 분노를 그릇 안으로, 그릇 안으로만 삭여내고 있었다. 세상에... 분노할 일에 분노해야 하는데...우리는 단순한 '원민'이 아닌데... 분노도 못 하는 '항민'이 아닌데... 우리는 우리 스스로 '호민'이 되어야 하는데...

 

이 시집에서 이 시가 내 맘에 꽂힌 이유이기도 하다. 이 시의 내용은 바로 내 얘기이기도 했으므로. 우리들의 이야기이기도 했으므로. 우리는 우리에게 짐 지운 자들에게 분노하고, 끓어오르기도 했지만, 그것이 겨우 그릇 안에서만 그랬으므로. 이제는 넘쳐야 한다. 끓어 넘쳐야 한다. 뜨거움을 보여주어야 한다. 

 

물이 끓어서 그릇 밖으로 넘쳐 나지 않으면 그것은 그냥 끓을 뿐이다. 사라져갈 뿐이다. 이제는 정당한 분노는 제대로 끓어오르게 해야 한다. 뜨거움이 번지게 해야 한다. 그것이 진짜 분노다. 진짜 끓어오름이다.

 

                      물 끓이기

          - 정양

 

한밤중에 배가 고파서

국수나 삶으려고 물을 끓인다

끓어오를 일 너무 많아서

끓어오르는 놈만 미친 놈 되는 세상에

열받은 냄비 속 맹물은

끓어도 끓어도 넘치지 않는다

 

혈식(血食)을 일삼는 작고 천한 모기가

호랑이보다 구렁이보다

더 기가 막히고 열받게 한다던 다산 선생

오물수거비 받으러 오는 말단에게

신경질 부리며 부끄럽던 김수영 시인

그들이 남기고 간 세상은 아직도

끓어오르는 놈만 미쳐 보인다

열받는 사람만 쑥스럽다

 

흙탕물 튀기고 간 택시 때문에

문을 쾅쾅 여닫는 아내 때문에

'솔'을 팔지 않는 담뱃가게 때문에

모기나 미친 개나 호랑이 때문에 저렇게

부글부글 끓어오늘 수 있다면

끓어올라 넘치더라도 부끄럽지도

쑥스럽지도 않은 세상이라면

그런 세상은 참 얼마나 아름다우랴

 

배고픈 한밤중을 한참이나 잊어버리고

호랑이든 구렁이든 미친 개든 말단이든

끝까지 끓어올라 당당하게

맘 놓고 넘치고 싶은 물이 끓는다

 

                                  안도현 엮음, 바람난 살구꽃처럼, 현대문학북스. 2002년 1판. 56-57쪽

 

새해에는 '끓어오른 놈만 미쳐보이는, 열받는 사람만 쑥스러운' 모습으로 남지 않고, '끓어올라 넘치더라도 부끄럽지도, 쑥스럽지도 않은 아름다운 세상'이 되도록 해야지. 그래서 '끝까지 끓어올라 당당하게 맘 놓고 넘치'는 물이 되도록 해야지.

 

아름다운 시어들이, 세상을 밝고 명랑하게 보는 시로 시작하지 않고, 이런 시로 시작한 아름다움. 지금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아름다움은 바로 이런 것 아닐까... 하여 한 해를 되돌아보고, 새해를 다짐하는 시가 내게는 바로 이런 시가 된다.

 

시가 다시 내게로 다가왔다. 내 삶 속으로 스며들어 왔다. 고맙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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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근에 두 편의 영화를 봤다. 둘 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지만, 실화보다도 더 실감나는 배우들의 연기로 상당한 호평을 받고 있는 영화다.

 

사실, 두 영화 모두 보고 싶지 않았다. 마음이 편치 않을 거라 예상했기 때문이고, 본 결과 역시 맘이 편치 않았다.

 

 

도대체 이런 영화가 지금 개봉이 되어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있다니... 조금 우습기도 하다.

 

영화 속의 내용과 실제의 사실이 다를 수밖에 없고, 영화에서 사실을 찾아내려고 하는 모습이 우습기도 하지만, 예술이란 현실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하는 영화들이라고 해야 하나.

 

 

 

하나는 "집으로 가는 길"

 

마약 사범으로 몰려 프랑스 감옥에서 거의 2년을 갇혀 있다가 나오는 사연을 내용으로 하고 있는 영화.

 

마약이라는 범죄보다는, 그러한 일을 저지른 국민을 대하는 외교관을 태도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게 하는, 외교관은 국가를 대표한다고 하면, 국가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게 하는 영화.

 

 

이 영화를 보면서 2000년대의 대한민국이 아직도 후진국이라는 사실, 국가는 국민을 바탕으로 유지가 되는데도, 국민을 위해서 존재하기 보다는, 즉, 링컨이 말했다는 그 유명한 말. 국민을 위한, 국민에 의한, 국민의 정부라는 말. 그것이 국가라는 사실을 잊게 해준 그런 영화.

려운 처지에 놓인 국민을 국가가 어떻게 대하는지에 대해서 너무도 적나라하게 알려준 영화라고 해야 하나.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를 보면서 저런 외교관은 되지 말아야지 하는 생각을 했을 거라 생각하는데. 그런 외교관이 존재하는 나라는 제대로 된 나라라고 할 수 없다는 생각.

 

외교에서 목표로 삼고 있는 국가의 이익이란 다른 말로 하면 국민의 이익이 아니던가. 그걸 망각한 외교관은?

 

역시 또 하나의 영화. "변호인"

 

 

 

보고 싶다와 보고 싶지 않다가 공존했던 영화. 어차피 일은 뻔한 거고, 역시 실화를 바탕으로 했기에 결말은 뻔하지만, 그렇지만, 그 결말이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에, 보고 나면 마음이 더 무거워지지 않을까 생각했던 영화.

 

그래도 현실을 비껴갈 수 없다면, 그런 영화에서 표현하고 있는 국가와 국민의 문제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볼 수도 있지 않을까 하고 본 영화.

 

역시 보고 난 다음에는 "국가란 무엇인가"를 또다시 생각하게 만든 영화. 아니 생각하게 한다기보다는 절규하게 한다고 해야 하는 영화.

 

이 영화가 마음 아프게 다가온 이유는 이 영화가 과거의 사건으로 끝나지 않았다는 생각 때문일 것이다. 아직도 진행중이라는. 무려 30년이 더 지난 일인데도, 민주화가 되었다고 하는데도, 왜 진행중이라는 생각이 들까?

 

내 생각이 잘못되었든지, 아니면 정말로 이 사회가 한 발짝도 더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든지 둘 중 하나 아니던가.

 

읽고 있는 책 중에 이런 구절이 있었는데... 두 영화를 보면서 이 구절이 딱 들어맞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 정치 체제의 민주주의적 성숙도는 이러한 번역(사적인 관심과 욕구를 공적인 쟁점으로 재구성하고, 역으로 공적인 관심사를 개인의 권리와 의무로 재구성하는 것)의 성공과 실패, 매끄러움과 거칢에 의해 측정될 수 있다. 즉 그 주된 목적을 달성한 정도에 의해 측정되어야지,종종 민주주의의 필요충분조건으로 오인되곤 하는 이러저러한 절차의 완고한 준수 여부에 의해 측정되어서는 안 된다. (바우만, 부수적 피해.민음사. 2013년. 21쪽에서)

 

 

지금은 그래도 절차적 민주주의는 어느 정도 확립되었다고 하는데, 이것은 민주주의의 필요조건이지 필요충분조건이 아니라는 사실을...

 

절차적 민주주의조차 확립되어 있지 않던 시대를 보여주고 있는 "변호인"이란 영화를 보면서 더욱 실감하고 있다고나 해야 할까.

 

우습게도, 아주 오래 전에 나온 소설인 채만식의 "논 이야기"까지가 떠올랐다. 해방이 되고 나서 만세를 부르지 않길 잘했다고 자조하는 주인공.

 

그에게 나라란, 국가란 자신에게 피해만 주는 존재였다. 영화에서 주인공이 외치는 우리나라 헌법 제 1조 제2항은 그 때는 요원했다. 그런데, 2000년대에 벌어진 "집으로 가는 길"에서도 역시 요원했다.

 

아니, 헌법이 87년 민주화 운동의 결과로 나타났듯이, 그래서 우리가 헌법, 헌법, 우리나라 모든 법 위에 있는 최상위 법으로 헌법을 인정하고 있듯이 헌법의 가장 앞에 나와 있는, 국가의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그 당연한 귀절을, 헌법 책에만 있는 조항으로 여겨서는 안될 것이다.

 

적어도 영화에서 표현된 내용들이, 소설에서 표현된 내용들이 과거의 것으로만 머물게 할 의무는, 권리는 우리에게 있을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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