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세화 선생이 별세했다는 소식을 어제 들었다.


  아직 더 살아계셔도 될 나이인데... 누군가가 '나이 70이 넘으면 자연사라고 할 수 있다'고.


  그러나 요즘 나이 70은 자연사할 나이가 아니다. 기대수명이 80을 훌쩍 넘은 이 시대에 70대에 세상을 뜨는 일은 자연스러운 일로 다가오지 않는다.


  홍세화 선생도 그렇다. 1947년 생이라고 하니, 아직 더 이 세상에 있어도 좋을 나이다. 그런데도 무엇이 급하다고 세상을 떴는지.


'세화'라는 이름이 세계 평화의 줄임말이라고 하던데, 그러한 세계 평화가 오지 않고, 세계 곳곳에서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현실이 선생을 더욱 힘들게 했는지...


그동안 해온 마음고생들이 수명을 단축시키지는 않았는지, 저 세상에 가서는 마음 편히 지내셨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적어본다.


그의 책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를 읽었을 때 많은 충격을 받았다. 홍세화 선생이 살아온 이력도 그렇지만 우리가 놓치고 있던 부분을 프랑스를 통해서 생각하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두번째로 [쎄느강은 좌우를 나누고 한강은 남북을 가른다]도 좋게 읽었다.


좌파와 우파라는 말이 프랑스혁명에서 나왔다고 하던데, 이런 좌파와 우파를 우리는 남북으로 갈라져 서로 갈등하고 있으니 말이다. 지금은 좌파와 우파를 꼭 남북으로 가르지 않아도 되지만, 여전히 종북좌파라는 말이 살아 있으니, 좌우가 남북을 가르는 기준이 되기도 한다.


그의 책에서 기억나는 말은 바로 '똘레랑스(관용)'이다. 이 똘레랑스를 지니는 것은 무조건 용서하라는 말이 아니다. 상대를 나와 같은 존재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 그런 자세를 지녀야 너와 나가 적이 아니라 함께 할 수 있음을 생각하게 했던 말.


좌우나 남북이나 서로가 서로를 밀어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접점을 찾아 공통분모를 점점 넓혀가는 것. 그것이 바로 '관용' 아닐까 하는데...


이러한 관용을 이야기한 지가 20년이 넘었는데, 여전히 우리는 상대는 함께해야 할 존재가 아니라 밀어내야 할 존재로 여기고 있는 것은 아닌지.


선생의 부음을 듣고 다시 '똘레랑스'를 생각한다. '똘레랑스'라는 말은 있는데, 이 말이 있음도 알고 있는데, 그런데도 상대를 배척하기만 하고 있는 현실이 사라지지 않고 있으니... 이 말이 우리 사회에 정착할 날이 언제일까 하는 생각도 한다.


그간 선생이 우리 사회에 던져준 많은 화두를 이어받아 그것을 실천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것이 선생이 원하는 후배들의 모습이겠지 하면서.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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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곳곳에 틈이 있다. 이미 있는 틈을 메워도 시원찮은데, 하나로 되어 있던 곳을 헤집고 파헤쳐 기어코 갈라놓는다.


 서로 닿아서는 안 되는 듯, 이 편과 저 편이 극명하게 나뉜다. 둘을 이으려고 하는 사람에게는 온갖 비난이 쏟아진다. 


  과일 이름까지 동원해가면서 이쪽이냐, 저쪽이냐를 묻는다. 아니 밝히라고 한다. 틈 사이에 서서 양쪽을 당겨서 이어주는 역할을 할 수 없게 만든다.


  아니, 그런 역할 자체가 문제라고 한다. 그냥 갈라져 있는 편이 좋단다. 애초에 하나였던 적이 있었던가? 하나였는데, 하나였음을 잊어버리고, 이쪽 저쪽으로 나뉘어 서로 힘겨루기를 하고 있다.


이런 힘겨루기 상황에서 양쪽을 이어주는 역할. 옷을 입을 때 이 편과 저 편을 각각 집어넣지만 마지막으로 양 쪽을 이어주지 않으면 제대로 옷을 입었다고 할 수 없다.


더워서 또는 멋으로 양쪽을 붙이지 않는 경우도 있지만, 그것은 한때일 뿐. 본질은 하나로 이어져야 한다. 이어주는 역할을 하는 존재가 있다. 바로 단추다.


그런데 손택수 시에서는 이런 꽃이 단추 역할을 한단다. 시인의 상상력은 역시 한 발 더 나아간다. 지상과 지하를 이어주는 역할을 하다니... 꽃이, 이제 봄!


땅에서 온갖 꽃들이 피어나고 있다. 이들이 바로 이렇게 지상과 지하를 이어주는 단추 역할을 하는 꽃단추라는 생각을 하니, 더 귀하게 여겨진다.


       꽃단추


내가 반하는 것들은 대개 단추가 많다

꼭꼭 채운 단추는 풀어보고 싶어지고

과하게 풀어진 단추는 다시

얌전하게 채워주고 싶어진다

참을성이 부족해서

난폭하게 질주하는 지퍼는 질색

감질이 나면 좀 어떤가

단추를 풀고 채우는 시간을 기다릴 줄 안다는 건

낮과 밤 사이에,

해와 달을

금단추 은단추처럼 달아줄 줄 안다는 것


무덤가에 찬바람 든다고, 꽃이 핀다

용케 제 구멍 위로 쑤욱 고개를 내민 민들레

지상과 지하, 틈이 벌어지지 않게

흔들리는 실뿌리 야무지게 채워놓았다


손택수, 나무의 수사학. 실천문학사. 2010년. 11쪽.


우리 사회에 많은 일들이 있다. 봄! 봄! 지상과 지하를 채워주는 꽃단추들이 많이 나오는 때. 그런데 과연 우리 사회에 봄이 왔는가?


각자 자신의 영역을 고수한다고, 자신의 입장만을 주장하면서 이 틈과 저 틈이 벌어져서 그 사이로 많은 사람들이 빠져나오지 못하게 되는데도, 틈과 틈을 이어주는 단추 역할을 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서 있을 자리가 없다.


꽃단추가 아니라 사람단추가 필요한 때인데, 사람단추에 달 실을 스스로 끊어버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냥 이 편과 저 편으로 나뉘어 있는 것이 좋다고, 그대로 가자고, 단추는 필요없다고 하는 듯하다.


하지만 단추는 필요하다. 단추를 채우지 않을 수는 있어도 그것이 마냥 지속될 수는 없다. 언젠가는 단추를 채워야 한다. 이런 점을 생각하면 사람단추가 더더욱 그리워지는 지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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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모모 2024-03-26 16: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이 좋네요. 단추에 대해 생각하는 글...잘 읽었습니다. 감사해요^^

kinye91 2024-03-26 18:49   좋아요 0 | URL
제가 감사하죠. 이렇게 다양한 생각을 하게 하는 시가 좋아요. 손택수 시인에게도 감사한 마음이 들어요.
 

  표준국어대사전에서 '수자리'를 찾아보면 '국경을 지키던 일, 또는 그런 병사'라고 나온다. 그러니 수자리는 군인이라고 보면 된다.


  나라가 있으면 나라를 지키는 군인들이 필요하다. 우리나라 헌법 39조에 국방의 의무라고 해서 1항 모든 국민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국방의 의무를 진다. 2항 누구든지 병역의무의 이행으로 인하여 불이익한 처우를 받지 아니한다고 되어 있다.


  이런 군인들이 있는 곳이 군대인데, 군대가 좋은 경험으로 남아 있는 사람은 별로 없다.


  오죽하면 '부대 쪽으로는 오줌도 누지 않겠다'는 말이 있겠는가. 군대에서 갖은 고생을 했기에 군대는 생각만 해도 싫다는 말을 대변하는 표현이다. 이와 비슷하게 군대에 갔다온 사람들이 제대하고 나서도 군대에 다시 가는 꿈을 꾼다고 한다. 악몽이라고... 얼마나 군대가싫었으면...


이와 반대로 '군대 갔다 와야 사람된다'는 말이 있는데, 어려운 환경에서 힘들게 지내보면 조금 성숙해진다는 말로 쓰인다. 그런데 이때 사람된다는 말이 다른 사람의 말을 잘 따른다는 부정적인 의미로도 쓰이니... 하여튼 군대는 여러 생각을 하게 한다.


군대에 관련된 헌법에 있는 2항을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병역의무의 이행으로 인하여 불이익한 처우를 받지 아니한다고 되어 있는 이 구절...


불이익을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예전에(지금도 그럴지도) 군대에 갔다온 사람들은 불이익을 받았다. 무엇이 불이익일까?


쉽게 군대 가산점이 있으니 불이익이 아니라고 할 수도 있지만, 군대에 있는 동안 경제활동을 하는 만큼의 보상이 주어졌느냐 하면 아니다. 


요즘에야 병사들 월급을 인상해준다고, 병장 월급이 200만 원이 되게 하겠다고 하지만, 2-30년 전만 해도 병장 월급이 1만 원이던 시절이 있었다. 최소한의 용돈을 주고 젊은이들을 군대에 잡아놓았던 시절.


헌법에 위배된다는 생각이 드는데, 그렇다면 군대에 있는 1년 6개월 동안 그에 합당한 보수를 국가가 지불해야 불이익을 받지 아니한다는 헌법에 맞는다.


여기에 군대에서 자행되던 온갖 폭력들, 반인권적인 행위들을 생각해 보라. 이것은 말할 것도 없이 불이익이다.


구타라는 말, 지금은 그것이 범죄로 인식되어 거의 없어졌다고 하지만 예전에는 '얼차려'라고 해서 구타는 일반적이었다. 오죽하면 '구타 없는 부대'를 만들겠다고 하는 사단장이 있었겠는가. 그것이 구호로만 그친 경우가 많았지만.


소원수리라고 해서, 군대에서 일어난 비리, 억울함 등을 호소하는 활동이 있었다. 하지만 이것은 눈 감고 아웅하는 그런 요식 절차였다. 편지까지 검열당하는 군대에서 누가 용감하게 군대의 문제점을 지적할 수 있었겠는가.


이런 반인권적인 행위는 헌법에 위배된다. 당연히 해서는 안 될 일이었다. 서로를 존중하는 군대가 강한 군대가 되지 않겠는가.


이 시집은 시인이 군대에 가는 과정부터 군대 생활, 제대, 그리고 예비군과 민방위에 편입되는 과정을 거쳐 아들에게 신체검사 통지서가 오는 것으로 끝난다.


한 사람이 군대에서 겪는 일이 모두 들어가 있다고 보면 된다. 예전 군대가 이랬다고, 지금은 안 그런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군대였으면 좋겠다.


군대가 없는 나라가 거의 없으니 (예전에 코스타리카가 군대 없는 나라라고 했는데, 더 늘었는지는 모르겠다) 그 군대가 적어도 이 시집에 나온 행위들을 더이상 하지 않는 군대였으면 한다.


'양조장집 아들은 무종을 받았고 / 산업과장 아들은 폐결핵이란다 / 무종을 받고 폐결핵이면 / 군에 가지 않는단다' ('신체검사' 중에서 17쪽)


이 구절은 다음에 '이 땅의 젊은이면 가야하는 군대'('영장' 중 20쪽)과 어긋난다. 원칙적으로는 다 가야하지만, 이상하게 가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그것이 바로 앞의 신체검사에 나오는 내용이다.


반인권적인 내용을 보자.


'우리를 서로 마주 향해 세우더니 / 앞에 선 전우의 빰을 치란다' ('소등 이후' 중에서 48쪽)

'5초안에 식사를 못 마쳤다고 / 식기를 입에 물고 오리걸음 연병장을 수도 없이 돌았네' ('식사시간 '중에서 58쪽)

'사실을 사실대로 쓸 수도 없는 / 군사우편 서신검열 우리들 편지' ('첫 편지' 중에서 66쪽)

'내무반에 돌아오면 사나운 내무반장의 / 가학적 기합이 기다리고 있었다 / 지금 생각해도 기가 막힌 성적(性的)인 학대를' (내무반 내무생활' 중에서 112쪽)

'현역병 제대는 무기한 연기되고 / 제대특명 조치는 금지되었다' ('제대명령을 기다리며' 중에서 149쪽)


이런 일들이 당시의 군대에는 비일비재했다. 헌법에 있는 말들은 그냥 말일뿐인 세상.


지금은 그렇지 않겠지. 그렇지 않아야 한다. 군대에 대해서 생각하게 한 시집이었다. 한 편의 이야기. 이제는 할 수 있는 군대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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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려 있는 건 다 꽃이지" (엄재국, 정비공장 장미꽃. '문' 중에서. 애지. 2006년. 100쪽)


  이것이다. 꽃 하면 아름다움을 생각한다. 그 아름다움이 어디에서 왔을까 했더니 열려 있음에서 왔구나 하는 생각을 한다.


  아이들이 귀엽다고, 순수하다고 한다. 왜? 바로 마음이 열려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아이들은 꽃이다.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라는 말이 있다. 안치환이 부른 노래 제목이기도 하고, 가사에도 이 구절이 나오는데, 이때 아름다운 사람은 열려 있는 사람이다.


  꽃보다 아름답다는 표현은 우열을 가르는 말이 아니라, 꽃을 아름답다고 하니, 사람 역시 아름답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하는 말이라고 보면 된다.


그렇다면 사람도 꽃이다. 이런 표현이 가능하려면 열려 있어야 한다. 자신을 활짝 연 사람에게는 벌이 찾아드는 꽃처럼 많은 사람들이 찾아온다.


열려 있음, 이것은 곧 나의 것을 다른 존재에게 준다는 말이다. 내 것을 가져가시오. 맘껏 가져가시오. 이것이 바로 열려 있음이다. 꽃은 자신을 통째로 내어준다. 그래서 꽃은 아름답다. 또한 그런 사람도 아름답다.


시 제목이 '문'이다. 문은 열려 있기도 하고 닫혀 있기도 한다. 하지만 문의 기능이 무엇인가? 안과 밖을 연결해주는 역할을 하지 않나. 안과 밖의 소통 창구. 


문은 닫혀 있기만 해서는 안 된다. 그렇다고 늘 열려 있기만 해도 안 된다. 열릴 때 열리고, 닫힐 때 닫혀야 한다.


꽃도 마찬가지다. 꽃이 늘 활짝 열려 있지는 않다. 꽃도 자신을 내어줄 수 있을 때 열린다. 그때서야 비로소 아름다움이라고 할 수 있다.


시인은 '문'이라는 시에서 아이를 꽃에 비유하고 있다. 아이의 말은 벌이다. 꿀을 발라 나르는 벌들. 그렇게 아이는 우리에게 아름다움과 달콤함을 함께 선사하고 있다.


엄재국 시집을 읽다가 만난 구절. 


"열려 있는 건 다 꽃이지"


마음을 열어야겠다. 꼭꼭 걸어 잠그는 것이 아니라, 다른 존재를 환대할 수 있게 활짝 열린 문처럼. 


어쩌면 시는 마음의 문을 여는 열쇠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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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집을 읽다가 한 구절을 발견한다.


  그 구절이 머리 속에서 떠나지 않는다.


  다른 시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오직 그 구절뿐,


  그런데 그 구절이 왜 이렇게 마음에서 떠나지 않을까?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일들 때문이 아닐까.


  많은 일들이 동영상으로 어디서나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시대가 되었지만, 그럼에도 동영상 중에서 한 장면이 멈춘 듯, 마치 사진처럼 남아 있기도 한다.


그런 사진처럼 남아 있는 장면.


좋은 장면이었으면 얼마나 좋을까마는, 꼭 그렇지 않다는 데 문제가 있다.


황학주가 처음 펴낸 시집을 다시 복간한 시집이다.


오랜 세월이 흘렀어도 시는 다시 우리들에게 다가온다.


그래야 시다.


한 시대가 지났다고 잊혀져서는 안 된다.


이 시집에서도 많은 시들이 다시 지금을 환기시키고 있지만, '단단한 벙어리를 깨고'란 시에 나오는 이 구절이 가슴 속에 들어와 박혔다.


'평화보다 잘 찍힌 불행은 역사에 많다'(황학주, '단단한 벙어리를 깨고' 중에서. 23쪽)


평화. 평화가 유지될 때 우리는 평화를 생각하지 않는다. 마치 중국에서 태평성대라던 요 임금 때 누가 임금인지 모르고 지냈던 사람들처럼.


그냥 평화롭기 때문에 특정한 장면으로 남길 필요가 없다. 그런데 불행은?


불행은 그냥 지나가지 않는다. 불행은 우리의 눈을 잡아 놓는다. 그래서 불행은 사진으로 남는다.


평화보다 잘 찍힌 불행이라는 표현에서 그런 불행들은 결코 우리를 스쳐지나가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요즘 우리나라에서 방송되는 여러 일들 중에 기억에 오래 남는 것들... 그런 장면들이 하나의 사진처럼 남아 있게 되는데...


들을 귀가 없는 사람에게 들으라고 했다가 온몸이 들려 끌려나가는 장면. 불행은 평화보다 잘 찍힌다.


이 시 구절이 확 들어온 이유가 이런 장면들 때문인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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