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진보당 이석기 의원 내란음모 사건에 대한 공판이 있었다. 1심에서 징역 12년에 자격정지 10년이라는 판결을 받았다고 한다.

 

내란음모에 선동, 국가보안법 위반까지 모두 인정했다고 하는데... 물론 이석기 의원 측에서는 항소를 할 예정이고, 이와 함께 헌법재판소에서는 이석기 의원이 속한 통합진보당에 대한 해산청구 심판이 진행되고 있는데...

 

이 판결이 어떻게 작용을 할지 초미의 관심사가 되고 있다.

 

내란음모라? 어디서 많이 들어본 말인데... 한겨레신문에 한홍구 교수가 '내란의 나라?' 비슷한 제목으로 글을 연재하고 있던데... 내란의 나라임에도 성공한 내란(그걸 쿠테타라고 할 수도 있는데)은 처벌받지 않는다는 이상한 논리도 한 때 유행했던 나라이기도 하니...

 

통합진보당이 왜 해산되어야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아서 헌법을 찾아 보았더니...

 

제 8조 4항  정당의 목적이나 활동이 민주적 기본질서에 위배될 때에는 정부는 헌법재판소에 그 해산을 제소할 수 있고, 정당은 헌법재판소의 심판에 의하여 해산된다.

 

그렇다면 통합진보당이 민주적 기본질서에 위배된다고 정부가 판단했다는 얘긴데... 정당은 정권을 획득할 목적으로 결성된 조직이고, 이들은 정권을 획득하기 위해서 국민들의 지지를 얻어야 하는데, 국민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서 하는 활동이 민주적이 아닐 수가 있는가.

 

그 정당을 지지한 국민들도 많은데... 어쩌면 이것은 국민들에게도 너희들은 민주적 질서에 위배된 활동을 했어라고 하는 것은 아닌지...

 

헌법재판소가 현명한 판단을 하리라 생각을 하고...

 

다만, 지금 내 마음이 어두운 것은 통합진보당의 해산 심판 청구나, 이석기 의원의 내란음모 재판이나 결과가 나와봐야 하는 일이니 더 논의할 것은 아니지만, 이 시대에, 2010년이 지난 시대에 구시대적인 내란음모, 민주적 질서에 위배라는 말들이 난무하는 현실 때문이다. 

 

우리 국민의 의식 수준으로는 민주적 질서에 어긋한 정당이나 사람이라면 결코 지지하지 않으리라는 믿음이 내게는 있는데...

 

김삼웅이 엮은 "해방후 정치사 100장면"

 

우리나라가 일제로부터 해방이 되고 지금까지 약 70년 동안 정치사에서 주요한 장면을 100장면을 뽑아놓은 책인데...

 

이 책에서 이번 일을 연상시키는 장면이 있는가를 찾아보니, 데자뷰라고 할 수 있는 일이 두 개가 있다.

 

22. 비운의 정치가 조봉암의 죽음 - 진보당 사건

77. 체포, 사형선고,  해외망명 - 김대중 내란음모사건과 망명

 

앞으로 판결이 어떻게 될지... 그것은 알 수 없지만... 이런 일로 정치사에 기록을 남기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적어도 나는 민주화된 시대에 살고 있다고 믿고 있으므로.

이 시대에 이런 일이 정치사에 추가되어서는 안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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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유 없이 세상을 살 수 있을까? 어느 순간 세상의 석유가 모두 없어져 사용할 수 없게 된다고 상상을 해보면 끔찍하다.

 

지구상에 있는 대부분의 기계들이 작동을 멈추어야 하고, 난방도 제대로 될 수가 없으며, 우리들의 삶은 빙하기를 만난 공룡들과 비슷한 처지로 전락할 것이다.

 

얼마 전부터는 석유가 고갈될 것이라고, 석유 피크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오고 있고, 따라서 대체 에너지를 개발해야 한다는 말들이 계속 나오고 있는데....

 

그런 대체 에너지로 원자력을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는데... 그건 석유보다도 더 위험하다고 말하는 '전문가'들이 많으니...

 

그래서 원자력을 제외하고 천연에너지 개발을 위해 전세계가 움직이고 있는데...

 

우리는 아직도 석유에 대한 의존도가 높은 편이니...

 

지금 당장 석유에 대한 의존도를 아예 없앨 수는 없지만, 그래도 석유에 대한 의존도를 조금씩 낮춰갈 수 있는 에너지 정책이 필요하다.

 

석유는 한 때 '검은물'이라고 해서 신의 재앙이라고 했다. 근대가 시작되기 전까지만 해도.

 

그러나 산업화가 되면서 재앙이라던 검은물이 신의 축복이 되었고, 사막이었던 아랍국가들이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국가들이 되었다. 석유때문에.

 

석유 한 방울 나지 않는다는 우리나라에서는 석유를 수입하기 위해서 막대한 돈을 투자하고 있고... 이렇듯 석유는 우리의 삶에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데...

 

이 석유로 인해서 우리네 삶에 막대한 피해를 주는 큰 사고가 얼마간이 간격을 두고 연이어 일어났다. 바다에 기름이 유출되는 사고. 그것도 대량의 기름이 유출되어 바다를 업으로 삼고 사는 사람들에게 막대한 피해를 주고 있다. 한 사고는 해양수산부 장관까지 사퇴하게 만들 정도로 파급이 컸고.

 

바다에 기름 유출 사고. 내 기억에만 벌써 세 번째다. 태안에서, 여수에서, 그리고 이번에 부산에서.

 

외국에서 힘겹게 실어나르는 원유가 바다에 유출되는 것은 원유가 아깝다는 차원을 넘어 원유로 인해 생계가 막막해지는 사람들이 있다는 점이 더욱 우려가 된다.

 

조심. 조심. 더 조심해도 시원찮을 판에... 이런 사고들이 연달아 나고 있으니... 석유에 대한 의존도를 하루바삐 낮추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 에너지 정책을 펼쳐야 할텐데... 단순한 사고수습대책에서 벗어나 정말로 우리나라의 미래를 내다보는 그런 정책... 그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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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집을 고른 이유는 오직 하나.

 

제목에 카프카가 들어 있기 때문.

 

카프카에 관심이 있었을 때 검색어를 카프카로 놓고 검색을 해보면 많은 책들이 뜨는데, 시집 제목에 카프카가 들어간 시집이 두 권이 있었다.

 

언젠간 읽어야지 하면서 사게 된 시집인데...

 

"카프카의 집"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고, 카프카 작품 중에서 "성"에 나오는 구절을 인용하고 있다.

 

"성"이라는 카프카의 소설은 결코 성에 도달하지 못하고 성의 주변을 맴돌 수밖에 없는 사람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데...

 

이루는 절대의 세계에, 진리의 세계에 도달하지 못하고, 늘 안개에 쌓여 그렇게 헤매면서 어디론가 가기만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진리의 세계가 분명 존재한다고, 눈에 보인다고 생각하고 가는데, 가도가도 그 곳은 저 멀리에만 있고, 그곳은 또 뿌연 안개에 쌓여 있어 실체를 의심하게도 하는데...

 

그래도 그곳은 눈에 보이니 없다고 할 수도 없고, 하여 우리는 갈 수밖에 없는데...

 

진리의 세계를 향한 여정, 가야만 하는, 그러나 갈 수 없는 그런 세계에 대한 탐구, 그것이 카프카 소설이었다면, 이 시집에서는 그런 세계에 대한 시적인 추구가 이루어지고 있어야 하지 않나.

 

제목이 된 시 '카프카의 집'을 본다.

 

카프카의 집

  어느 낯선 세계, 공기조차도 고향 공기의

 어떤 요소도 갖지 않은, 낯섦으로 질식할 듯

한 곳, 미친 유혹들 속에서, 그저 계속 갈 뿐

                                                  - <城>에서

 

저녁 어둠이 안개에 젖을 때

만종 종소리는 낮은 곳으로 잦아들고

한사코 사물을 밀어내치려 해

집의 낯익은 현관 문고리를 잡고서도

여기가 어디던가,

묻게 한다.

 

불그스레한 가등 불빛 아래

포도 돌바닥이 번들거릴지라도

끝내 고독했던 사람은

여전히 그늘진 모퉁이에서 서성대며

그의 집에 붙은 포스터의

얼굴 또한 춥고 그로테스크하다.

 

다만 헤매다닐 뿐.

(굴뚝에서 한가롭게 풀려나는 연기

나무 끝에 오도마니 올라앉은 둥지

가족의 웃음 소리)

그 성은 멀고 머어

이방인의 집은

비어 있다.

 

밤이 더 싶어선 안 된다. 프라하여.

불안은 언제나

한걸음 앞서 스멀거리지만

보헤미아 처녀여

귀가를 서두르지 말라

머리카락카락 물 미립자 방울 맺히기 전엔.

 

신중신, 카프카의 집, 문학과지성사. 1998년 초판. 66-67쪽

 

상당히 몽환적이다. 무언가 도달했음에도 도달하지 않았음을, 가야 하지만 갈 수 없음을 이 시에서 느낄 수 있다. 마치 카프카의 "성"에서 느껴지는 분위기가 이 시에서 고스란히 느껴진다.

 

그럼에도 가야한다. 그것이 바로 진리의 세계를 대하는 우리의 자세다. 우리는 늘 어디론가 가야만 한다. 가지 않으면 우리는 제대로 된 삶을 살 수 없다.

 

이렇게 카프카를 느끼기도 했지만, 또 하나 시집에서 반가운 제목을 만났다. '풀잎'

 

이 시에서 김수영의 '풀'을 느낀 건 나만의 착각일까. 진리의 세계에 사람은 혼자 갈 수가 없음을, 함께 가야만 함을, 어쩌면 이 '풀잎'이라는 시를 통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되었는데...

 

풀잎

 

풀잎이 한들바람에 흔들린다

천둥 뇌우 속에서 한결 명징해진다

혼자이면서 여럿으로

씨를 여물게 해 흩뿌리고

풋풋한 목숨 면면히 이어간다

 

풀잎은 죽음 곁에서 새 움이 돋아나고

꿈꾸지 않으면서

꽃을 피운다

흔들려 바람을 부르고

흔들리지 않으므로 나비의 요람이 된다

 

풀잎이 숲을 만들고

강바닥이 마르는 걸 막아준다

새벽에는 이슬에 젖어

태어난 아이가 힘찬 울음을 터뜨리도록

노래한다 한 소절마다의 엽록소로

 

풀잎은 항구하게 원시의 힘

농경의 고단한 쟁기질과

타오르는 풀무의 불길.

마침내 민초(民草)가 주인임을 터득시키는

민주주의의 지반이 된다.

 

신중신. 카프카의 집. 문학과지성사. 1998년 초판. 80-81쪽   

 

자, 내가 원하는, 가야만 하는 세계는 어디인가. 그곳으로 나만이 아니라, 함께 갈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이 '풀잎'들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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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에서, 또 신문에서 대통령이 한 말이 머리 속에서 사라지지 않고 있다. '공기업 노조 개혁방해 용납 안해'라는 제목을 달고 있는 말.

 

나라빚이 많고, 공기업들이 방만하게 운영해 와서 경영이 악화되었음에도 흥청망청 예산을 낭비한 경우가 많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그런데 그 책임이 노동자에 있다? 과연 그럴까? 노동자가 개혁 방해세력일까? 경영을 제대로 못 한 것은 경영자의 책임이 아닌가.

 

평생동안 일만 하던 사람들을 상황이 악화되었다고 해서 이렇게 다르게 대우해도 되는가 하는 생각이 들면서 어리석게도 카프카의 [변신]이 떠올랐다. 아니 [변신]이라고 하기보다는 카프카의 그 작품 주인공인 '그레고리 잠자'가 떠올랐다고 하는 편이 맞다.

 

왜 그럴까? 곰곰 생각해 보니, 그레고리는 가족을 위해서 일한 죄밖에 없었다. 그는 정말로 가족을 위해서 자신의 성향도 죽이고 일을 한다. 그런데 어느날 자신이 흉측한 벌레로 변해있음을 발견한다.

 

자신을 죽이고 일한 대가가 벌레가 된 것이다. 그 벌레는 그에게는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는 그 자신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족에게는 아니다. 그는 이미 이전의 그레고리가 아니라 벌레일 뿐이다.

 

보기에도 흉측하고 가족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 그래서 가려야만 하는, 없애야만 하는 존재. 이전의 그의 모습은 가족에게 상관이 없다. 지금 그의 모습만이 중요할 뿐이다. 그리고 그는 이제 가족에게 필요 없는 존재다.

 

여기에 외부 손님이 있다. 그의 가족을 생활하게 하는 경제력을 지닌 외부 손님들. 그 손님들에게 이 벌레는 장애일 뿐이다. 손님들에게 벌레는 가려져야 하는 존재, 즉 알려져서는 안되는 존재이다.

 

그들에게 벌레의 존재가 알려진다면 가족들은 살아가기 힘들어진다. 그래서 그는 철저하게 가려져야 한다. 그래서 그를 도와주고 지지해주야 하는 가족들은 그를 귀찮아 하고, 사라졌으면 하는 존재로 여기고, 또 그렇게 행동한다.

 

무언가가 연상이 된다. 그레고리는 노동자다. 그들은 일만 한다. 그는 늘 같은 일을 한다. 그럼에도 상황이 변하니 그는 같은 존재가 되지 못한다. 꼭 필요한 존재에서 없어져야만 하는 존재가 된다.

 

경제성장의 주역이라던 노동자는 이제 경제성장의 발목을 잡는 존재가 되었다. 여기에 다국적기업으로 표상되는 외국 기업들에게는 그들의 고임금은 투자를 저해하는 요소가 된다. 예전에는 저임금으로 외국 투자를 이끌어들였던 노동자들이 이제는 외국의 투자를 막는 요소가 된 것이다.

 

마치 [변신]의 그레고리가 가족에게 꼭 필요한 존재에서 필요없는 존재가 되었고, 그의 가족의 생계를 도와줄 손님들을 쫓아버리는 존재가 되었듯이, 지금 우리 경제의 주역이었던 노동자들이 그런 대접을 받고 있는 것은 아닌지.

 

1900년대 초반에 살았던 카프카가 이런 노동자의 현실을 감안해서 소설을 쓰지 않았을텐데, 세계 명작이란, 세계에서 꾸준히 읽히고 있는 작품이란 이렇게 다양하게 시대에 따라서 또 사람에 따라서 해석이 될 수 있음을 이 소설이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난 어리석게도 요즘 이 소설을 우리 사회에서 느끼면서 섬뜩한 마음을 지니게 되었다.

 

나도 이렇게 ‘그레고리’에 불과하지 않을까?

우리는 ‘그레고리’처럼 대우받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러면 안 되지 않는가.

 

아니겠지.

아니라고 자위를 해본다.

그래야만 하지.

‘그레고리’는 무력하게 죽음의 세계로, 내쳐짐의 세계로 갔지만... 바우만의 용어로 하면 그레고리는 '쓰레기'가 된 삶이 되어 폐기되어 버렸지만,

우리는... 노동자들은... 

그렇게 ‘그레고리’처럼 만들어서는 안 된다.

 

그렇게 하지 말라고 카프카가 미리 경고한 것 아닌가. 난 그런 생각이 든다.

 

카프카의 [변신]을 2014년에 우리나라에서 만나게 될 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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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만...

 

이름만 들었던 시인이다. 한수산 소설 필화사건에 연루되어 고문을 받고 힘든 세월을 보내다 돌아가셨다는.

 

그의 시집을 구해서 읽어본 기억이 없고, 그의 시도 기억에 없다. 다만, 이 구절 '나는 사라진다 저 광활한 우주 속으로'만 머리 속에 남아 있을 뿐이었다.

 

정지용 문학관에 갔을 때 역대 정지용 문학상을 받은 시인들과 시들이 있었는데... 그 중에 박정만도 있었다. 어떤 시로 받았는지, 정지용 문학관에 전시되어 있던 시가 어떤 시였는지 기억은 나지 않는데...

 

헌책방에서 발견한 박정만 시집. 시집으로 발간된 것이 있어서 그것을 손에 들었다가, 박정만 시를 잘 알지도 못하는데... 시집 한 권으로 되겠나 싶어, 그 헌책방에 있는 박정만 시전집을 고르게 되었다.

 

값은 좀 비싸지만, 정가에 비하면 헌책방이라 60%정도이 가격으로 살 수 있기에 골라들게 되었는데... 700쪽이 넘는 책이기에... 읽기에 수월하지는 않았다.

 

내 취향하고는 좀 거리가 있는 시들이 많았고, 또 특정한 시기에 엄청나게 많은 시가 쓰여졌기에, 그 시에서 느껴지는 분위기가 비슷해서, 특히나 시의 느낌이 너무도 어둡고 죽음을 연상시켜서 좀처럼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

 

그래서 읽는데 꽤나 오래 걸렸는데...

 

한 시인의 전 생애가 담겨 있는 시전집을 주마간산식으로 읽을 수는 없는 일. 시간을 두고 차근차근 맘이 내킬 때마다 손에 들고 읽었으니...

 

어둡다. 그가 받은 고문이 시에서도 적나라하게 나타나고 있는데...

 

그 중에 한 시를 보면 이렇다.

 

수상한 세월1

 

그 막막하고 깊은 어둠 속에서

군화 신은 아이들이 내 몸뚱어리에

뼛속까지 스며드는 상처를 내고

나이팅게일 그려진 안티플라민을 주었어.

 

1981년 5월. 국풍(國風)이 여의도에서 흐느끼던 날.

 

박정만, 박정만 시전집. 해토. 2005년 초판. 603쪽

 

그렇다. 남들은 축제라고, 그것도 관제 축제지만, 흐드러지게 놀 때 그는 고문을 당하고 있었다. 그 고문의 후유증으로 힘든 나날을 보내다 세상을 뜨고 마는데...

 

그런 고통들이 시에 오롯이 나타난다. 그래서 어둡다. 죽음이 늘 시에 나타난다. 그럼에도 그는 좀더 좋은 세상을 기대한다. 그 기대가 이루어질 때까지 살지 못하지만 말이다.

 

시인이 고문을 받는 시대... 이제는 없다. 그러나 아직도 필화가 일어나고 있다. 표현의 자유가 가끔은 질서안정이라는 이름으로 억압될 때가 있다. 그러면 안 되는데.. 이제는 그러면 안 되는데...

 

2010년이 넘은 지금은 그렇지 않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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