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 보이는 창"

 

우리는 삶을 살아간다. 그런데 가끔은 자신의 삶을 제대로 보지 못한다. 삶이라는 늪에 빠져 허우적 거릴 뿐이다. 더이상 자신을 객관적으로 보지 못하고, 그 삶에서 다른 것을 보지 못하고, 오로지 제 삶에 빠져 있을 뿐이다.

 

가끔씩만 그러면 괜찮을텐데, 너무도 자주 그렇게 된다. 그렇기에 자신의 삶을 보게 만들어줄 무언가가 필요하다.

 

그 무언가의 역할을 "삶이 보이는 창"이 한다.

 

내 삶을 다른 사람들을 통해서 볼 수 있다는 것. 그것은 어쩌면 행복일지도 모른다.

 

한 번도 제 삶을 보지 못하고 제 멋에 겨워 살다가 가면 그 얼마나 불행한가.

 

따라서 삶창을 통해 내 삶을 볼 수 있다는 것, 삶을 볼 수 있는 창이 있다는 것, 그 삶이 보이는 창을 갖고 있다는 것, 그것은 행복이다.

 

잊고 싶은 일들, 감추고 싶은 일들, 외면하고 싶었던 일들, 또는 잊고, 감추고, 외면하던 일들을 삶창을 통해 대면하게 된다.

 

그 대면은 곧 깨달음으로 나아가고, 깨달음이 행동으로 나아갈 때 힘이 된다. 그 힘은 나를 바꾸고 사회를 바꿀 수 있는 원동력이 된다.

 

"삶창 99호"

 

세월호가 침몰한 지 90일이 넘어 100일 되어가고 있지만 아직도 해결되지 않고 있다. 해결할 의지가 있는 건지 의심스럽기도 하다.

 

'세월호 특별법'은 6월 국회에서 처리되지 못하고 7월 국회로 넘어 왔으며, 책임자는 여전히 오리무중이고, 누구도 제대로 진상규명도 책임지지도, 그렇다고 실종자에 대한 완전한 해결도 되지 않은 상태다.

 

그런 상태... 도대체 '세월호는 나에게 무엇인가'라는 특집으로 삶창 99호가 시작된다. 세월호는 나에게 무엇인가? 이 말은 계속 우리들의 가슴 속에 남아 있을 것이다.

 

이 물음을 가슴 속에 지니고, 대한민국이라는 더 큰 '세월호'에 대해서 생각해야 한다. 세월호에 대한 생각이 사회를 바꾸는 힘으로 바뀌어야 한다.

 

그냥 또 하나 과거의 사건으로 넘어가서는 안된다.

 

슬픔이 우리 삶을 바꿀 수 있는 힘으로 전환되게 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 삶이 바뀌어야 한다.

 

삶을 바꾸는 일, 그것이 바로 세월호에 대한 우리의 질문일 것이다. 또한 삶창을 보는 이유이기도 하리라.

 

다시 한 번 "삶창"을 통해 내 삶을 본다. 내 삶... 그 속에 매몰되지 않고, 나를 객관적으로 보고, 실천할 수 있도록 나를 채찍질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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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근과 끈기.

 

이를 우리나라의 특성이라고 한 사람이 있었는데...

 

녹색평론을 보면 이 말이 꼭 들어맞는다는 생각을 한다. 사실, 은근이라는 말보다는 직설이라는 말이 더 어울리겠지만, 나서지 않으면서도 자신이 해야 할 말을 끊임없이 하는 잡지가 녹색평론이니 은근과 끈기라고 하는 편이 더 좋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나라에서 생태와 환경, 민주주의에 대해서 이만큼 집요하게 끈질기게 이야기하고 있는 책이 있을까 싶기도 한데, 민주주의가 좀 생뚱맞다는 느낌을 주지만 민주주의는 우리가 인간중심주의를 넘어서서 자연과 하나가 되는데 꼭 필요한 요소이다.

 

민주주의는 적어도 인간 하나하나를 주체로 세우는 이념이자 행동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민주주의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다보면 인간이 하나의 주체가 되기 위해서는 자연을 객체로 돌려서는 안된다. 내가 주체가 되기 위해서는 타자 역시 주체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민주주의는 자연히 생태의 문제로 넘어갈 수밖에 없다. 하여 녹색평론에서 이야기하는 것들이 얼핏 다 따로 떨어져 있는 것 같지만, 이들은 자연과 인간이 공생하는, 행복하게 자족하며 살아가는 사회를 바란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이번 호에서는 역시 '세월호'를 비껴갈 수가 없다. '세월호'는 아직도 진행중이기 때문이다. 원인도 밝혀지지 않았고(오래된 배를 무리한 증축을 하고, 수평수를 적게 넣었으며, 화물들을 제대로 고정시키지 않았고, 승무원들이 제대로 대처를 하지 못했다는 등등의 말들은 많으나, 정확한 원인에 대해서는 아직도 제대로 밝히고 있지 않다), 누구도 책임지지 않고 있으니, 우리는 언제나 '세월호'의 문제를 바로잡을 수 있으려나 하는 생각이 든다.

 

'세월호'와 관련지어 우리 사회의 문제점이 '돈'이면 우선이 되는 풍조로 바뀌었다는 점에 대해서는 의견이 일치한다. 돈보다 사람이다라는 말을 외쳐야 하는 시대가 되었는데, 그런 사회 풍조를 막기 위해서는 다당제 사회로 변해야 하고, 또 '인권경제'(송기호의 글)를 확립해야 한다고 한다.

 

다당제... 우리나라는 여러 정당을 허용하고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양당제 국가이다. 지금 새누리당과 새정치민주연합이라는 거대 양당이 우리나라 정치를 이끌고 있다. 나머지 정당들은 자신들의 존재를 나타내기에도 급급한 형펀이다.

 

이렇게 된 데에는 선거에서 승자독식주의가 횡행하기 때문인데, 승자독식주의를 막고 실질적인 다당제로 가기 위해서는 정당비례대표제를 확대하는 길밖에 없다. 그런 운동에 대해서, 또 다당제 사회가 사회안전망을 구축하는데 얼마나 효율적이고 유리한가에 대해서는 최태욱의 글을 읽어보면 잘 알 수 있다.

 

그러나 기득권을 쥐고 있는 정치인들이 정당법과 선거법을 개정하려는 움직임을 보일 리가 없다. 이들을 움직이는 것은 결국 시민들의 힘이고, 이런 시민들은 돈이 움직인다는 경제분야에서도 인권이 우선이 되게 하는 '인권경제'에 대해서 자각하고 강제하도록 할 수 있어야 한다.

 

적어도 다음 국회의원 선거까지는 선거법을 개정하겠다는 운동을 한다고 하는데, 이 제도의 필요성에 대해서 공감한다면 이 사이트를 참조하면 좋겠다.(http://reform2014.net)

 

이번 호에서 가장 핵심은 바로 '인권 경제'란 말이 아닐까 싶다. 인권이 경제분야에서도 적용될 수 있다는 것. 아니, 인권은 어떤 분야에서든지 가장 우선이 되어야 한다는 것. 이 인권이 꼭 사람의 권리만이 아니라 모든 존재의 권리라고 해석이 되어야 한다는 것. 그것이 바로 이번 호의 핵심이지 않을까 싶다.

 

돈보다 사람이다. 사람의 안전이 우선이고 돈은 그 다음이다. 사람과 자연의 지속, 안전이 우선이고 발전은 다음이다. 이렇게 바꿔도 무방하겠다.

 

'인권 경제'라는 말이 사람들 마음 속에 자리잡을 때, 그래서 인권경제를 강제할 수 있는 힘들이 모아질 때, 이 때는 우리 사회도 양당제 사회가 아니라 다당제를 향해 가는 노력이 이루어지고 있는 사회로 변해 있을 거라는 기대를 한다. 

 

이렇게 또다시 두 달만에 따끔하게 나를 깨우치는 죽비...녹색평론 13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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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헌책방에 들렀다. 가끔 가고 싶기는 하나, 여유가 없다고 해야 하나 그렇게 자주 가지는 못한다.

 

많은 책들이 첫주인을 떠나 새로운 주인을 기다리고 있는데, 그 중에서 나와 인연이 닿는 책들은 어떤 것들일지... 그 많은 책들 중에 우연히 또는 이거다 싶게 눈에 들어오는 책이 있다.

 

어떤 책은 작가의 이름만으로, 어떤 책은 제목으로, 또 어떤 책은 평소에 꼭 읽고 싶었던 책인데, 이래저래 미루다 사지 못했는데, 헌책방에서 만나게 되기도 한다.

 

이 책은 제목이다. 아니 작가도 안다. 이 작가의 같은 제목의 책을 읽었으니 말이다. 그래서 나는 당연히 소설가라고만 알고 있었다. 그가 시를 쓰리라곤 생각지도 못했는데, 알고보니 시집을 여러 권 내었다.

 

여러 권 낸 시집 중에 이 시집은 제목이 소설과 똑같다. 또 독일의 작가인 브레히트의 시집 제목과도 같고. 물론 내용은 좀 다르지만.

 

격동의 80년대를 거쳐오면서 겪었던 마음이나 행동들, 그리고 한 사람과의 사랑이 이 시집에 담겨 있다.

 

이미 지난 일들. 80년대... 멀다. 먼데 그런데 그 80년대에 벌어졌던 일들이 버젓이 2010년대에 벌어지고 있으니 참...

 

역시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다.

 

세상이 변하지 않고 반복되고 있음을, 비극이 점점 더 심화되고 있음을, 예전에는 가난 속에서도 연대가 있고, 우정이 있고 행복이 있었다면, 이제는 가난은 연대와 우정, 행복을 모두 빼앗아 가고 있음을...

 

그래도 80년대는 미래를 보고, 희망을 지니고 살았던 시대라면 지금은 미래가 보이지 않는, 현재에도 행복을 느끼기 힘든, 미래의 행복은 기대하기 더 힘든 그런 시대가 되지 않았나 싶다.

 

사회 안전망의 해체... 대형사고가 나도 누구도 책임지지 않으려는 모습... 오로지 자신들의 권력을 향해 나아가는 후안무치한 사람들의 모습을 보며...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다.

 

그래, 이 시집은 80년대 작가 개인의 감수성이 잘 녹아들어 있는 시집이지만... 지금 우리에게도 그러한 감수성이 살아 있어야 함을 생각하게 한다.

 

슬픔에 대한 애도... 그것은 잊음이 아니고 기억이고, 다시는 이런 일을 반복하지 않겠다는 의지다.

 

이제는 '살아남은 자의 슬픔'에 빠져 있을 것이 아니라, 살아남은 자가 해야만 할 일이 있다는 인식을 해야겠다.

 

강한 자가 살아남는다고 브레히트는 그의 시에서 말했지만... 그리고 슬픔에 빠졌지만, 강자든 약자든 살아남은 자는 살아남았기에 해야할 일이 있다.

 

그 일을 찾지 못하면 정말 '살아남는 자의 슬픔'이란 늪에 빠져 계속 밑으로 밑으로만 잠겨들 뿐이리라.

 

이제 살아남은 우리들... 우리들에게 주어진 일을 해야겠다. 그것이 진정한 애도가 될테니...

 

시들이 이미 지난 시절의 감성을 담고 있어서 굳이 인용할 필요는 없겠단 생각이 든다. 다만, 그 제목에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들을... 찾아내야 할 것이다.

 

이제는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노래하지 말고, '살아남은 자들이 해야 할일' 또는 살아남은 자들이 할 일'을 노래해야겠다.

 

이것이 진정한 애도다. 애도는 뒤로 가는 것이 아닌, 자신의 슬픔에만 빠져 있는 것이 아닌, 슬픔을 변화의 힘으로 바꾸는 일이다.

 

그러한 '애도'가 필요한 지금이다.

 

덧글

 

이 작가에 대하여 검색해 보면 안 좋은 일이 일어났음을 알 수 있다. 시인이 자신의 시와 행동을 일치시키지 못한 경우... 또는 변절이 된 경우. 어떤 경우일지 모르지만... 여하튼 '살아남은 자의 슬픔'은 이제 안녕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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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잔한 시들이다.

 

그런데 마음이 애잔해 진다.

 

슬프다. 농업은 사람을 살리는 일인데, 정작 그 농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생명을 갉아먹고 있다.

 

자신의 희생으로 우리들을 살리는 사람들에 대해 우리는 너무도 예의를 지키지 않고 있지 않은지.

 

자유무역협정으로 인해 농업개방도 거의 이루어졌고, 이제는 쌀 마저도 개방되어 우리나라 식량자급률이 아주 낮은 수준으로 떨어지는데...

 

도시는 개발이 되어 빌딩들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점점 솟아오르고 있는데, 농토는 빈 들이 되어 가고 있는 현실.

 

농촌에 가면 놀고 있는 땅 (하긴 어떤 때는 농사를 짓지 않으면 아주 잘했다고 보조금을 지급하던 때도 있었는데...)도 많고, 곳곳에는 폐가가 남아 있는데...

 

여기에 농촌에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노인이라서 50대면 청년이라는 소리를 듣는다는데...

 

그렇게 우리나라 농촌은 점점 황폐해져 가고 있는데... 우리는 아직도 농업에 대해서 제대로 된 투자를 하지 않는다.

 

아니 농업은 투자가 아니라 우리의 생존을 위해서 우리가 반드시 해야 할 일이다. 그래야 한다.

 

이 시집은 오래 전에 나왔다. 내가 헌책방에서 구입해 갖고 있는 시집이 1990년에 나온 것이었으니.  90년이 되기 전에도 우리나라 농촌은 이리도 힘들었는데... 그것이 지금도 나아지지 않고 있으니.

 

농업. 생명을 살리는 일이다. 우리가 우리의 목숨이라고 생각해서 가장 중요하게 여겨야 할 일이다.

 

"농민에게 월급을!"이라는 주장... 공허한 주장이 되어서는 안된다.

 

고진하의 시집 중에 한 폭의 수채화같은, 그러나 너무 슬프고 애잔한 수채화 같은 그런 시. '폐가'

 

폐가

 

휘영청 밝은 달빛 쏟아지는

솔고개 마루터

폐가 한 채

반쯤 내려앉은 썩은새 지붕 위엔

올망졸망

쫓겨난 흥부네 새끼들 같은

탐스런 조롱박들이 뒹굴고 있었다

 

고진하, 지금 남은 자들의 골짜기엔. 민음사. 1990년. 13쪽

 

중국 주석인 시진핑이 방한 한 지금. 중국에게 농산물까지 완전히 개방해서 우리 농촌이 더 힘들어진다면 정말로 우리나라 농토엔 무엇이 남을까... 우리는 그 빈들에 집들만 지을까? 공장만 지을까?

 

빈들이 식물들도, 곡물들로, 우리들의 삶으로 차게 해야 할텐데... 이렇게 '폐가'가 늘어나는 농촌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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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문회 이야기로 나라가 들썩이고 있다. 청문회가 아니라 청문회를 통과하지 못할 사람들(?)이 청문회 대상이 되고,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청문회법을 개정하자는 이야기가 나와 시끄러운 것이다.

 

그런데 잘 이해를 못하겠다. 청문회라는 것이 그 자리에 맞는 사람인지 아닌지를 검증하는 제도 아닌가? 그것도 나라를 좌지우지 한다는 정치권 중에서도 장관급 이상에 해당하는 것 아닌가?

 

조선시대로 따지면 판서급 이상에 대한 청문회를 한다고 하는데, 그 청문회 무용론이 나오질 않나, 아니면 왜 청문회를 하는데 그 사람이 그 자리에 맞는 능력을 지니고 있느냐 있지 않느냐를 따지지 않고, 개인신상에 관한 것들부터 따지냐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

 

자기가 하면 로맨스고 남이 하면 불륜이라고 하더니, 자신들이 야당인 시절 행정부의 관료들을 엄격한 잣대로 선별해야 한다고 기를 쓰고 청문회법을 만들어 놓더니, 이제 여당이 되니, 그것과 이것은 다른 문제라고 개인의 능력과 비리를 같은 선상에 놓지 말라고 하고, 그런 기준으로는 어느 누구도 통과할 자신이 없으니 청문회법을 개정하잖다.

 

조변석개. 때에 따라 이렇게 행정부 관료들에 대한 기준이 달라져도 되는지 모르겠다. 굳이 옛말을 들먹거리지 않더라도 "수신.제가.치국.평천하' 아니던가.

 

세상에 제 몸 하나 깨끗히 하지 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가정을 제대로 다스릴 수 있으며, 또 제 집 하나 다스릴 능력이 없는 사람이 나라를 경영할 수 있으며, 제 나라를 제대로 경영하지 못하는 통치자가 어떻게 세계 평화에 기여하겠는가.

 

물론 이 '수신제가치국평천하'가 순서대로 가진 않겠지만, 적어도 '수신과 제가'는 '치국'에 앞서거나 동시에 가야 하지 않겠는가. 그렇지 않으면 사회는 혼란에만 빠지게 된다. 그러니 개인신상에 관한 것들이 청문회에서 다루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물론 서양의 경우, 청문회에서 이런 문제를 다루지 않는다고 한다. 왜냐. 이미 추천과정에서 이런 문제는 다 검증이 되기 때문이다. 청문회에서 언급하지 않을 정도로 철저하게 검증을 마치고, 이 검증 기준을 통과한 사람만이 청문회 대상으로 추천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청문회에서 굳이 개인의 문제를 다룰 필요가 없다.

 

이미 검증을 거친 것들을 반복할 만큼 시간 여유가 있는 것도 아니고, 시급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이 때는 자리와 능력이 어울리느냐를 중심으로, 또 정책 비전을 중심으로 청문회를 실시하면 된다.

 

그런데 그렇게 되기도 전에 우리는 개인 문제로 사회가 시끌시끌하다. 위장전입, 병역미필(가족까지 포함하여), 논문 표절, 전관예우, 부적절한 언행 등이 청문회 대상자들마다 오르내리고 있으니...

 

이래서 청문회장에 가기 전에 이미 까발려질 대로 다 까발려지니 '청문회에 가기도 전에 개인적 비판이나 가족들 문제가 거론되는 데는 어느 누구도 감당하기가 어려웠던 것 같고, 높아진 검증 기준을 통과할 수 있는 분을 찾기가 현실적으로 매우 어려웠다'(인터넷 한겨레 신문에 난 2014년 7월 1일자 기사 중에서 대통령의 말이라고 한 부분 재인용)는 말이 나온다.

 

이 말이 곧 청문회 검증 기준을 낮춰야 한다는 말로 들리는데... 

 

정작 문제는 청문회 검증 기준이 아니라 그 기준에 미달되는 사람을 추천하는데 있지 않나. 행정부의 장관이 되려는 사람이면 검증 기준이 매우 높아야 하지 않나. 적어도 선비란 개인적인 청렴함이나 가족들의 청렴함은 기본이요, 여기에 능력까지 갖추어야 하지 않나.

 

그러니 청문회의 검증 기준은 낮아져야 하는 것이 아니라, 더 높아져야 하고, 적어도 자신이 행정부의 장관 정도 하려면 이 높아진 검증 기준을 가뿐히 통과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이 정도 기준도 통과 못할 사람은 나와 같은 장삼이사(張三李四)에 불과하니 행정부에서 일을 한다는 헛된 욕심을 버리는 것이 자신의 삶과 우리 사회의 삶에 더 도움이 되는 것 아닐까.

 

따라서 청문회 검증 기준은 낮아져야 하는 것이 아니라 더 높아져야 한다. 그리고 이런 검증 기준을 통과한 사람만이 진정한 선량(選良)이라는 소리를 듣고 책임있는 자리에 갈 수가 있어야 한다. 그런 사회가 진정 좋은 사회이다.

 

그런데... 이런 당연한 말이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싸움"이 되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왜일까?

 

'당연과 물론의 세계'(김승희의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싸움" 자서에서)에 우리는 너무도 물들어 있기 때문에, 이 세계에서 벗어나는 일은 너무도 무거운 싸움이 된다.

 

내가 평소에는 느끼지 못하던 것을 느끼면서 그것을 털어내기 위해서 싸우는 싸움, 결코 쉽지 않은 싸움이고, 너무도 '무겁고 힘든' 싸움이다.

 

나와 같은 보통 사람도 이럴진대 정치를 한다는 사람들, 이 사람들은 이 '당연과 물론의 세계'와 싸우기 위해서는 얼마나 힘들 것인가. 그들에게는 얼마나 엄격하고 높은 잣대가 주어진 것인가. 그걸 알아야 하지 않나.

 

검증 기준을 탓할 것이 아니라 검증 기준을 가볍게 통과할 수 있는 사람이 주변에 없는 것을 부끄러워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위로 올라갈수록 자신이 말 하나하나 행동 하나하나는 정말로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싸움'이어야 할테니 말이다. 

 

하여 정치를 한다는 사람, 또 행정부에서 고위관료로 일을 하겠다는 사람, 더 높은 곳에서 나라를 위해서 사람들을 위해서 일을 한다는 사람들은 적어도 '당연과 물론의 세계'에 속해 있으면 안된다. 이들은 끊임없이 이 '당연과 물론의 세계'에서 벗어나려고 해야 한다. 그리고 어느 정도 벗어나 있어야 한다. 그래야 그 자리에 있을 자격이 주어진다.

 

김승희의 제목과 같은 시를 보자.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싸움·1

 

「이 문은 자동도어이오니

개폐를 운전자에게 맡겨주십시오」

 

누군가 나에게 넥타이를 입힌다

그리고 질질 끌고 간다

 

김승희,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싸움, 세계사. 1995년. 11쪽

 

하여 우리는 이런 '토끼장의 평화'를 벗어나기 위해서 정말로 또다시 '무거운 싸움'을 해야 한다. 성경에 나오는 팔복을 빗대어 시인은 이렇게 표현한다. 마치 윤동주의 '팔복'을 읽는 느낌이 난다. 진정 이런 복은(이게 복이라니, 참 무서운 역설이다) 우리가 '무거운 싸움'을 하지 않으면 우리에게 다가오리라.

 

八福(팔복)

 

의심하지 않는 사람은 복이 있나니

의심하지 않는 사람은 복이 있나니

의심하지 않는 사람은 복이 있나니

의심하지 않는 사람은 복이 있나니

 

땅의 나라가 저의 것이요

 

당연을 따르는 사람은 복이 있나니

당연을 따르는 사람은 복이 있나니
당연을 따르는 사람은 복이 있나니

당연을 따르는 사람은 복이 있나니

 

토끼장의 평화가 저의 것이라

 

김승희,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싸움, 세계사. 1995년.  8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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