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이 마음에 와 닿는다. "아직은 저항의 나이"

일과시 동인 제7집이란다. 인터넷 검색을 해보니, 내가 찾을 수 있는 건 2005년에 나온 일과시 동인 제8집이 있다. 이것까지만 보면 8집까지 이들이 함께 시집을 내었다는 말이 된다.

 

일과시라는 동인들 이름도 맘에 든다. 인간에게 일은 삶을 이루는 필수 요소이듯이 시 또한 우리네 삶에 중요한 요소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시가 특정한 사람들만이 향유하는 문학이 아니라 일하는 사람들도 누릴 수 있는 문학이라는 느낌이 들어서 좋고...

 

무엇보다도 일하는 사람들이 시인으로서 시를 쓴다는 것, 일과시가 동떨어지지 않고 하나로 존재한다는 사실이 좋다.

 

여기에 저항이라는 말이 주는 느낌이 좋고. 저항을 잃으면 과연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까? 저항을 할 수 있다는 얘기는 자유가 있다는 얘기고, 그 자유를 자신이 의식하고 있다는 얘기도 되고, 자유를 억압하는 것들에 대해 주체적으로 나설 수 있다는 얘기가 되니, 저항의 나이라는 말이 마음에 와 닿을 수밖에.

 

그냥 죽어지낼 수 없는 시대에, 저항하는 것은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몸부림 아니겠는가. 저항도 하지 못한다면 그것이 어찌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속된 말로 "남자는 군대 갔다 와야 사람 된다", 또 "군대 갔다 와서 사람 됐다"는 말이 있는데, 이 말은 한 사람이 지니고 있었던 저항의식을 군대에서 없애 이제는 고분고분 시류에 편승하는 사람을 만들었다는 이야기밖에 되지 않는다.

 

저항정신을 잃은 순응하는 사람. 그것이 바로 군대를 마친 사람이고, 그 다음부터는 "모난 돌이 정 맞는다"는 속담처럼 나서지 마라, 나서 봤자 네 손해다라는 말이 팽배해지게 된다.

 

그러므로 저항을 잃은 나이는 사람으로서의 존재감을 잃은 나이가 되고, 이는 주체성을 잃은 남이 시키는대로 할 수밖에 없는 수동적인 존재가 된다.

 

이 사회에 그런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자신의 생각을 잊고, 잃고 남이 시키는 대로 하는 사람, 자신이 출세하기 위해서 자신의 판단을 모두 유보하고 그냥 위에서 시키는 대로 하는 사람,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는 옳고 그름에 대한 생각을 전혀 하지 않고, 오로지 이익만을 위해 행동하는 사람 등등.

 

저항을 하지 못하는 시대... 저항을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은 시대. 그런 시대가 과연 좋은 시대일까? 행복한 시대일까?

 

자신의 의견을 자유롭게 말하는 것도 일종의 저항일진대, 우리는 지금 말을 잃어가고 있지는 않는지... 무엇에 대한 저항이어야 하는지, 무엇을 위한 저항이어야 하는지 알아가야 할텐데.

 

2002년이면 이미 10년이 지난 시집이다. 시의 내용은 그보다 더 오래 되었을텐데...이 시집에서 말하는 일들이 왜 오래 전의 일같지 않고, 지금 벌어지는 일 같은지...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했는데, 우리는 그동안 강산만 변하게 한 건 아닌지... 그 때 어렵게 살던 일하던 사람들, 지금도 힘들게 살고 있는데.. 이제는 그런 일도 잃고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래서 "아직은 저항의 나이"가 아니라 "지금은 저항의 나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런지. 우리가 저항을 잃으면 사람으로서 지녀야 할 가장 중요한 요소를 잃은 것일테니... 

 

나이에 상관없이 우리는 모두 "저항의 나이"에 속해 있어야 하지 않을까. 우리 모두 저항의 나이에 머물러 있어야 하지 않을까? 세상의 모든 나이에 저항하지 않을, 저항하지 못할 나이는 없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그렇다. 생각하고 행동하기.. 이것이 바로 저항이다. 옳고 그름을 판단하고 행동하기... 이것이 저항이다. 우리는 모두 "저항의 나이"에 속해 있다. 저항해야 할 것에 저항하는 것. 그것은 우리의 의무이자 권리이다. 

 

아직은 저항의 나이

 

 

                              - 문동만

 

눈꽃

너는 피어라 나는 네 안에 지마

그래도 울지 않으리

이마 위에 아이 눈썹 만한 눈이파리

예수가 죽어 간 나이

시인이 요절한 나이

초월하지도 못했네 순응하지도 않았네

아 아직은 저항의 나이

내가 쓴 길도 내가 지운 길도

덮고야 마는 단호한 눈발이여

앞선 발자국 하나 없이 내 흔적을 남겨서

당신에게 가야 하네

눈꽃 피는데, 당신에게 닾기도 전에

눈꽃만 피는데,

우두둑 솔가지 부러지고

나는 먹먹한 눈물 한 방울로

길을 녹이네

 

문동만 외, 아직은 저항의 나이.  삶이보이는창, 2002년초판. 22

 

(그런데 창비에서 나온 문동만의 시집 "그네"에 실려 있는 이 시는 맨 마지막 행이 수정되어 있다.   '길을 녹이네 -> 뵈지 않는 눈길을 녹이네'로)

 

 일과시 동인들, 이 시집에 시를 수록한 시인들 모두 귀한 분들이다. 아직도 우리에게 저항의 정신을 잃지 말라고, 우리가 사는 세상의 본모습에 대해서, 우리들에 대해서 알려주고 있으니 말이다.

 

이 시집에는 문동만, 조태진, 오도엽, 송경동, 손상열, 서정홍, 김해화, 김해자, 김용만, 김기홍 시인이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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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이 넘도록 충격에 휩싸여 지내고 있는데... 그래서 무언가를 털어놓아야 건강을 유지할 수 있겠다 싶어 "털어놓기와 건강"이란 책을 집어들고 읽었는데...

 

얼마 전에는 국민을 미개하다고 한 사람이 나타나질 않나(국민들 힘으로 민주화를 이루어낸 우리나라인데, 그렇게 민주화를 이루어낸 국민이 미개하다면, 그 국민들로 하여금 민주화를 하게 한 정치인들은 도대체 어느 정도 수준인지... 미개보다 못한 수준은?), 또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나타나지 않나 참으로 한심하다.

 

"가난한 집 애들이 설악산이나 경주 불국사로 수학여행을 가면 될 일이지, 왜 배를 타고 제주도로 수학여행을 가다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모르겠다." 어느 목사의 말.

 

부끄러워서 실명을 거론하기조차 싫은 그런 말이다. 이게 말이 되나? 목회자란 사람이. 도대체 이 사람이 진정 종교인 맞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종교인이라면 힘든 상황에 처해 있는 사람들을 위로해주어야 하지 않나?

 

종교인이라면 사람들의 영혼을 파 먹는 것이 아니라, 황폐화된 영혼을 사랑으로 가득차게, 기쁨으로 가득차게 해 주어야 하지 않나?

 

존 러스킨은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란 책에서 모든 사람이 동등하게 행복한 사회를 꾸리는 모습을 상상했고, 주장했는데... 이것이 바로 예수가 꿈꾸던 세상이고, 모든 종교인이 꿈꾸는 세상 아니던가.

 

가난하다는 이유만으로 이런 소리를 들어야 하다니.. 그것도 종교인에게서. 이렇게 종교인이 사람들의 영혼을 파먹어도 되는 것인지... 답답하다. 종교는 사람들에게 평화와 위안과 행복을 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렇게 되도록 사람들을 이끄는 존재가 바로 종교인 아니던가. 오강남의 역설적인 제목이 붙은 책이 생각나는 나날들이다.

 

"예수는 없다"

 

예수는 없다. 이렇게 말하는 종교인들에게는 예수는 없다. 그들은 예수가 가장 나중에 온 사람에게도 동등한 대우를 해주었다는 사실을, 예수는 모든 사람을 평등하게 사랑으로 대한 존재라는 사실을 잊고 있다.

 

그들에게 과연 예수가 있을까? 하여 오강남이 쓴 또 다른 책이 생각난다. "예수가 외면한 그 한 가지 질문"

 

진정한 종교인이란, 우리의 영혼을 충만하게 하는 종교란 어떤 것일지... 우리를 동등한 사람으로 대우해주는 종교 아니던가. 하느님 아래에서는 모두가 평등한 존재. 모두가 사랑을 받아야 할 존재. 그것이 바로 우리 사람 아니겠는가.

 

그런 생각을 하는 종교인들이 많고, 종교도 많다. 이들이 굳이 언론이 드러낼 필요가 없어서 그렇지, 세상에는 훌륭한 종교인들이, 진정한 종교가 많다.

 

이제는 이들도 좀 드러났으면 좋겠다. 영혼이 맑아지는 소리를 듣고 싶어서. 매번 이렇게 내 영혼을 갉아먹는 소리를 이제는 언론을 통해서 듣지 않았으면 좋겠다.

 

 

 

 

 

 

 

 

 

 

 

내가 알고 있기로 60-70년대 그 험악했던 시절에 진정한 종교인으로 살아간 사람들이 많았으니 말이다. 강원룡 목사 같은 분도 있었고, 김재준 목사 같은 분도, 문익환 목사 같은 분도... 지학순 주교 같은 분도, 김수환 추기경 같은 분도... 함석헌, 유영모 같은 그런 종교인들... 우리의 영혼을 채워주었던 그런 종교인들이 많았으니,

 

강원룡 목사(강원용이라고 나온다. 그럼에도 나는 강원룡이라는 이름에 더 친숙하다)의 자서전인 "역사의 언덕에서1-5"를 읽고 얼마나 마음이 따뜻해졌던가. 어떻게 지내야 진정한 종교인의 자세인지를 알게 되었던가.

 

다시는 내 영혼을 파 먹는 소리를 하는 종교인, 내 귀를 씻게 만드는 종교인, 그런 사람들 소리가 안 들렸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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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전 불감증 사회.

 

이게 우리 사회를 일컫는 말이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는 말이 좋지 않은 말이라고 생각했는데... 요즘은 '소 잃고 외양간이라도 고치면 좋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도대체 벌써 몇 번째 소를 잃었는데... 외양간을 고치기는 커녕 그냥 놓아두고, 거기다가 다시 소를  키우고 있었던 말인가.

 

대형참사가 일어난 다음에 이래선 안된다 근본부터 고쳐야 한다고 말들을 많이 하지만 이상하게도 대형 참사는 연이어 일어나고 만다.

 

소는 잃었어도 외양간을 고칠 사람이 없는 상태. 어쩌면 외양간 고치는 것보다는 소를 잃는 것이 더 싸게 먹힌다는 자본의 논리가 작동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근본부터 철저히 고치는 것은 당장 표나지 않고 자본이 많이 들고 시간도 오래 걸리기 때문이다. 이런 일을 하지 않으려 하고 그때그때 대증요법만 난무하고 있으니... 거기에 누구도 제대로 책임지려고 하지 않으니, 소도 잃고 외양간도 고치지 못하는 상태가 지속되고 있는 것이다.

 

생각하기도 싫은 참사가 일어나고 제대로 해결도 되지 못했는데.. 학생들의 수학여행을 전면 금지한다는 그런 대책만 나오지, 더 큰 사고 일어나지 않도록 사회 전반에 걸친 철저한 점검 얘기는 나오지 않고 있다.

 

근본적인 대책.. 그것은 우리 사회의 지향점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보아야 한다는 말이다.

 

녹색평론 이번호 특집은 5월에 영면하신 이 땅의 스승의 기리며인데... 그 중에서 무위당 장일순 선생에 관한 글이 실렸다. "무위당의 삶과 사상"

 

그는 사회운동이 한창일 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생태운동을 시작했고, 협동조합운동을 시작했다. 그 때는 그게 무슨 운동이냐고 지금 그렇게 한가한 운동을 할 때가 아니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는데...

 

운동이 한 시대만 보고 하는 것이 아닌 사람의 삶을 제대로 영위하게 하기 위한 사회를 건설한다는데 목표를 두고 있다면 무위당은 그런 운동은 단지 사회변혁운동으로 국한되어서는 안된다고, 생명, 생태 운동이 되어야 한다고, 더불어 사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고 오래 전부터 주장해 왔다.

 

그런 그의 사상이 그가 세상을 뜨고 나서 주목을 받게 되고, 그의 사상을 이어받아 실천하는 사람이 많아졌는데... 다시 재건된(?) 녹색당도 그 중의 하나일 것이다.

 

이렇듯 무위당은 외양간을 제대로 고쳐야 한다고...오래 전부터 주장해왔는데.. 그의 사상을 제대로 받아들인다면 우리나라에서 이러한 대형참사는 일어나지 않았을 터.

 

이런 사고도 사고지만 이제 세계화다 자유무역협정이다 뭐다 해서 우리 사회는 정말로 외양간조차 지키지 못할 지경에 이르고 말 위기에 처했는데...

 

정치권은 나 몰라라 하고, 대부분의 사람들도 언론에서 다루어주지 않으니 그냥 싸게 외국 물품을 구입해서 좋은 것 아니냐고 하고 있는데...

 

녹색평론 이번 호를 읽어보면 이런 자유무역협정이 우리의 먹을거리에까지 엄청난 파장을 미친다는 사실... 우리의 삶을 유지시켜 주는 농업이 고사될 위기에 처해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니...

 

우리는 지금 더 큰 위기에 처해 있는 셈이다. 보이지 않는 위기. 그러나 분명 우리에게 닥칠 위기. 그렇게 위기는 닥치고 있는데... 힘있는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들 외면하려고만 하고 있다.

 

녹색당이나 기타 다른 시민단체, 농민단체에서 그러면 안된다고 외치고 있는데..이 외침이 멀리멀리 퍼져나가지 않고 있다. 더 멀리 퍼져나가야 하는데.. 그래서 이번 지방자치 선거에 녹색당 후보로 나온 사람들은 자신들의 당선보다는 녹색당이 지향하고 있는 점을 알리는데 주안점을 두고 선거 운동을 한다고 하는데...

 

위기다. 위기다. 이것은 양치기 소년의 외침이 아니다. 이제 우리는 타이타닉호를 타고 있다는 말을, 세월호를 타고 있다는 말로 바꾸어야 한다. 충분히 막을 수 있는 재앙을 막지 않음으로써 얼마나 비극적인 일이 일어났는지 경험하지 않았던가.

 

그런 일이 또다시 일어나서는 안되는데... 우리 사회 전체가 그런 위기에 처해 있는데... 왜 모르쇠로 일관하지... 모르쇠할 사항이 아니라는 점을 녹색평론이 이렇게 강조하고 있는데...

 

제발, 이제는 외양간이라도 고치자. 소 잃었다고 외양간 고칠 필요없다고 하지 말고, 다시는 소를 잃지 않게 외양간을 튼튼하게 고치자. 외양간보다도 더 중요한 우리 사회... 우리의 삶을 잃지 않도록 정신차리고 고치도록 하자.

 

사고가 난 순간, 그 순간부터는 더 힘들어진다. 사고가 나지 않도록 우리 사회가 어떻게 나아가야 할지, 우리의 삶을 위해서 우리가 정신차리자. 그러기 위해서 깨어 있자. 우리 사회의 진로를 우리가 깨어 있는 눈으로 지켜보고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녹색평론은 지금 우리 사회의 파수꾼이다. 이 파수꾼이 위기라고, 위험하다고 외치고 있다. 결코 카산드라의 외침으로 만들지 말자. 그래야 한다. 이런 생각이 드는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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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 보이는 창" 98호를 읽다.

 

한 때 '개미와 베짱이'라는 우화에서 우리는 베짱이를 게으름뱅이의 전형으로, 그러면 망한다는 것을 보여준 대상으로 배워왔다. 놀이는 게으름과 통하고, 그것은 곧 인생을 잘못 산 것으로 치환되는 그런 시대.

 

그런데 어느 때부터인가 베짱이 다시 보기가 이루어졌고, 베짱이는 그냥 논 것이 아니라 예술가로서 조명을 받았다. 그는 다른 사람을 위해 꼭 필요한 존재가 되었고, 오히려 일만 하는 개미가 골병이 들어서 힘들어하는 내용으로 바뀌기도 했다.

 

그러나 다시 베짱이는 예술가라고 해도 그것은 놀이가 아니다. 그는 논 것이 아니라 일을 한 것이다. 이런 상황을 공유한다면 베짱이나 개미나 결국 자신이 해야 할 일 또는 하고 싶은 일을 한 것에 불과하다.

 

여기에 놀이가 들어설 틈은 없다.

하지만 '호모 루덴스'라 말이 있듯이 인간은 놀이적 인간이다. 놀지 못하는

 

인간은 인간으로서 불행한 삶을 살게 된다. 놀이는 인간의 본질과도 같다.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 아이들을 놓아두면 아이들은 기가 막히게도 놀이를 만들어낸다. 그리고 즐겁게 논다.

 

이런 내용은 미하엘 엔데의 소설인 "모모"에서도 나온다. 그 소설에서 모모는 가진 것 없는 누더기를 입은 소녀지만 남들보다 많은 시간을 갖고 있는, 남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소녀로 나오는데.. 이 소녀와 함께 있으면 환경은 중요하지 않다.

 

오직 모모와 함께 있는 그 자리에서 아이들은 온갖 놀이를 만들어낸다. 아주 즐겁게... 놀이를 통해 아이들은 시간을 잊고 즐긴다.

 

이것이 진정한 놀이다. 이런 놀이가 우리 삶에서 낭비라고 생각되고, 놀이를 부정적인 대상으로 치부하여 거부하는 문화를 만들어간 것이 요즘 우리 사회라고 할 수 있다.

 

지금은 사회 상황도 상황이리만큼 놀이를 추구한다는 것은 무슨 죄를 짓는 듯한 느낌까지 주고 있으니...

 

삶창 저번 호는 '잠 좀 자자'가 기획이었다. 우리는 밤에 너무도 많은 시간을 가지려고 했다는 것. 이것이 결국 우리를 피곤에 절게 했다는 것을 다루었는데.. 여기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무엇을 할까?

 

이번 호의 기획이 이것과 연결된다. 즉, '놂'을 찬양한다.  '놂'... 그것이 바로 우리 삶을 풍요롭게 한다는 것이다. 놀지 못한다는 것은 삶에서 유머가 없다는 얘기와 같다. 이는 늘 긴장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고, 이러한 긴장 상태는 오래 유지되지 않는다.

 

긴장을 이완시켜 주지 않으면 긴장 속에서 우리는 우리를 소모해버리고 말기 때문이다. 하여 이 '놂'은 우리에게 명사로 다가와서는 안된다. 이 '놂'은 우리가 연구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우리가 그냥 실행하고 즐겨야 할 동사다. '놂'은 곧 '놀다'다. 잘 놀아야 한다.

 

아이들도 잘 놀게 해야 한다. 하여 잘 논다는 것이 무엇일까 생각해 보아야 한다. 아니 생각을 하지 말고 사람들에게 놀 시간을 주어야 한다. 결국 논다는 것은 시간이 있다는 것이다. 

 

하여 아이들에게 시간을 주어야 한다. 전자기기에 매달려 보낼 시간이 아닌, 학원이나 학교에서 공부에 찌들어 보내야 할 시간이 아닌,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보낼 시간... 너무도 무료해서 도저히 무언가를 하지 않음면 안되게 할 시간.. 그래서 무언가를 자신들이 만들어갈 시간. 그 시간이 바로 '놂'의 시간이 된다.

 

어른들도 마찬가지다. 어른들에게도 놀 시간을 주어야 한다. 세계 최장의 노동시간을 자랑하지 말고, 놀 시간이 많게 노동시간을 줄여야 한다. 휴일도 지금 많은 것이 아니다. 더 늘려야 한다. 실질적인 휴일을.

 

그래서 국민들이 놀 시간이 많으면 자연스레 '놂'은 우리의 문화가 된다. 이제 '놂'은 '놀이'라는 명사에서 '놀다'라는 동사가 된다. 우리는 즐겁게 놀 수 있다. 즐겁게 놀아야 한다. 고통을 잊게 해주는 것은 웃음이라는 말이 있다.

 

사회가 어지러울수록 놀이는 필요하다. 잘 노는 사람... 그 사람은 삶이 풍요로운 사람이다. 그런 풍요로운 삶들을 살아가는 사람이 많은 사회... 좋은 사회다.

 

'놂'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이번 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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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르름이 약동하는 오월임에도 우리의 마음은 아직도 겨울이다. 세상의 모든 것들이 새로운 옷을 입고 즐기기 시작할 때, 아직도 어두운 심연에서 차갑게 드러누운 채 세상에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존재들이 있고...

 

까르르 까르르 밝은 웃음으로 세상을 더욱 환하게 밝혀줄 존재들이 그 웃음을 미처 다 웃지도 못하고 우리와 다른 곳으로 가버린 이 시절.

 

구구한 변명은 필요없다. 우리의 잘못이다. 오월을 오월이지 못하게 하는 것은. 봄을 봄으로 느끼지 못하게 하는 것은.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는 일만이 남았다. 황금연휴라고 하는 이 때 전국민의 마음이 편치 않은 것은 우리가 했어야 할 일을 제대로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래서 이제는 우리가 해야 할 일을 제대로 해야 함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기 때문에...

 

마음이 우울하여 여행은 포기하고... 헌책방 나들이로 대체하였다.

 

헌책방은 자신의 첫주인에게서 떠난 책들이 다른 주인을 기다리고 있는 곳. 자신의 생명이 아직도 다하지 않았음을 절절하게 보여주고 있는 곳. 이처럼 한 생에서 다른 생으로 삶이 계속 이어진다면... 마음이 조금이라도 위로가 되려나...

 

강은교의 "풀잎"을 만나게 되었다. 그의 시 가운데 가장 많이 알려진 것이 '사랑법' 아니던가. 또 '우리가 물이 되어'인데...

 

지금 이 때는 '우리가 물이 되어'와 어울리지 않는다. 강은교의 '물은' 긍정의 물이자 생성의 물, 생명의 물인데... 올 4-5월 우리게에 다가온 물은 부정의 물이자 소멸의 물, 죽음의 물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시는 어느 정도 위안을 준다. 마음을 조금이나마 편안하게 해준다고 할까? 마음 속에 꽉 차 있던 어떤 울분, 억울함 등을 시를 통해 달래보려 한다. 그래서 강은교의 시집을 서슴없이 고르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그의 시에는 죽은이를 관장한다는 '비리데기'가 나오기 때문이다. 저승에 가서 자신의 부모를 살릴 물건을 가져와 살렸다는.

 

이 시집에도 '비리데기의 여행' 5곡(曲)이 실려 있다. 그에 대한 시를 읽으며 마음을 조금 달래보고... 그러다가 이미 하늘로 간 혼들에 대한 마음에 김소월의 시를 읽으며 달래본다.

 

초혼(招魂)

 - 김소월

 

산산히 부서진 이름이여!

허공중에 헤어진 이름이여!

불러도 주인없는 이름이여!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심중에 남아 있는 말 한마디는

끝끝내 마저 하지 못하였구나.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붉은 해는 서산마루에 걸리었다.

사슴이의 무리도 슬피 운다.

떨어져 나가 앉은 산 위에서

나는 그대의 이름을 부르노라.

 

설움에 겹도록 부르노라.

설움에 겹도록 부르노라.

부르는 소리는 비껴가지만

하늘과 땅 사이가 너무 넓구나.

 

선 채로 이 자리에 돌이 되어도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이렇게 애타게 혼을 부르는 일이 없기를...

 

강은교의 이 시집에도 수록되어 있는 '사랑법'을 보자.

 

  사랑법

 

떠나고 싶은 자

떠나게 하고

잠들고 싶은 자

잠들게 하고

그리고도 남는 시간은

침묵할 것.

 

또는 꽃에 대하여

또는 하늘에 대하여

또는 무덤에 대하여

 

서둘지 말 것

침묵할 것.

 

그대 살 속의

오래 전에 굳은 날개와

흐르지 않는 강물과

누워있는 누워있는 구름,

결코 잠깨지 않는 별을

 

쉽게 꿈꾸지 말고

쉽게 흐르지 말고

쉽게 꽃피지 말고

그러므로

 

실눈으로 볼 것

떠나고 싶은 자

홀로 떠나는 모습을

잠들고 싶은 자

홀로 잠드는 모습을

 

가장 큰 하늘은 언제나

그대 등 위에 있다.

 

강은교, 풀잎. 민음사. 1994년 초판 20쇄. 90-91쪽.  

 

이제 우리가 진정으로 이들을 사랑하는 법은 무엇일까? 우리 시대 우리 사회를 사랑하는 법은 무엇일까? 그러한 사랑법.

 

가장 큰 하늘은 바로 우리의 등 뒤에 있다는데.. 바로 우리들 자신이 하늘을 엎고 있는 그런 존재들인데... 하나하나 소중한 하늘같은, 아니 하늘인 우리들이 잘 살 수 있게, 행복하게 살 수 있게 하는 그런 사회.

 

우리 어른들이 그런 사회를 이제 약속해야 하지 않을까. 그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큰 사랑법 아니겠는가... 그런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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