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은 세상을 비춘다. 그런데 별은 밤에만 비춘다. 낮에는 별들의 빛이 세상이 닿지 않는다. 아니 닿을 필요가 없다. 별빛이 필요없을 만큼 밝기 때문이다.(사실 별빛은 낮이나 밤이나 같다. 다만 우리의 눈에 보이냐 보이지 않느냐의 차이일 뿐이지만... 그러한 과학적 사실 말고... 우리가 느끼는 진실의 면에서는 이렇다)

 

그렇다면 별은 어둠 속에서 빛을 발한다. 결국 별의 바탕은 어둠이다. 어둠이 없다면 별은 제 진가를 발휘하지 못한다.

 

지금 우리나라 청문회 문제로 말들이 많다. 청문회라는 것은 그 사람이 그 직책에 어울리는지를 함께 묻고 답해보는 시간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청문회 자리에 나선다는 것 자체는 세상의 별이 되고자 한다는 얘기다. 그는 자신의 빛으로 세상을 조금더 밝게 비추고자 한다는 얘기다.

 

그런데 이런 별이 되고자 하는 사람들이 너무도 밝아서, 그들의 삶이 대낮이어서 도리어 별이 될 수 없는 사람들이 많다.

 

무슨 무슨 비리 비리 비리......

 

언론에는 그 많은 비리들이 감자를 캘 때 감자들이 줄줄히 딸려나오듯이 나오고 있다. 세상에 그들은 자신의 삶이 너무도 밝아서 그러한 어둠 쯤은 쉽게 감춰질 줄 알았나 보다.

 

그러나 자신의 어둠을 감추었던 밝음이, 그러한 대낮이 청문회라는 자리에서는 결코 대낮이 되지 못한다. 청문회는 어둠이다. 별의 바탕이다.

 

별이 되고자 하는 사람들이 서야 하는 바탕이다. 청문회라는 바탕에 서 있을 때 그는 진짜 별인지 아니면 별 흉내를 내고마는 가짜 별인지 판명이 된다.

 

청문회라는 바탕, 철저하게 어두운 바탕에서 그 동안 자신을 가리고 있던 낮, 밝음을 제거하면 진짜 별이 되는 사람들은 그 때부터 빛을 발하기 시작한다. 대낮에 가려져 있던 빛들이 제 구실을 하기 시작한다.

 

반대로 대낮에 가려져 있던 어둠을 지니고 있던 사람들... 대낮을 제거하고 나면 이제는 어둠만이 남는다.

 

그들에게는 청문회라는 어둠에서 자신들의 어둠밖에 남지 않기 때문에 빛을 발할 수가 없다. 별이 될 수가 없다. 그냥 묻힐 뿐이다.

 

그런 사람들이 왜 이리 많은지... 이렇게 자신의 대낮에 가려져 있던 어둠이 청문회라는 바탕에 의해 드러나는데도 그걸 한사코 부인하고 '난 별이다. 난 빛이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으니...

 

대낮일 때 자신의 어둠을 감추는 것이 아니라, 어둠을 없애려고 하고, 대낮이라 티가 나지 않더라도 자신만의 빛을 간직하려는 자세를 지녀야 하는데.. 그래야 정말 별이 될 수 있는데...

 

세상의 별이 되고자 하는 사람들... 청문회라는 바탕에 서고자 하는 사람들... 대낮에는 빛을 발하지는 않지만 결국 빛을 발하게 되는 자신만의 빛을 간직하는 삶을 살기를...

 

자신만의 빛이 없이, 대낮에 겨우 자신의 어둠을 감추고만 있던 이들... 청문회라는 바탕에서 빛은 커녕 자신의 존재조차도 가두어버리는 이들. 반성하길.

 

정진규의 '별'이란 시... 마음에 와 닿는다.

 

 

별들의 바탕은 어둠이 마땅하다

대낮에는 보이지 않는다

지금 대낮인 사람들은

별들이 보이지 않는다

지금 어둠인 사람들에게만

별들이 보인다

지금 어둠인 사람들만

별들을 낳을 수 있다

 

지금 대낮인 사람들은 어둡다

 

정진규, 별들의 바탕은 어둠이 마땅하다. 문학세계사. 1990년. 3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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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특집이다.

 

너무도 슬픈.

너무도 참담한.

그러나 우리가 잊어서는 안되는.

 

노아의 방주는 세상 생물의 종말로부터 생명체들을 구해냈다고 하는데, 세월이라는 이름을 가진 배는 청춘들을 비롯한 많은 생명들을 바닷속에 가두어 버렸다.

 

이 배가 그런 것이 아니라, 이 배를 둘러싼 사회가, 사람들이 그랬지만... 너무도 어이없고, 너무도 덧없는 그런 일이 일어나고 말았다.

 

문제는 일이 일어난 다음에 벌어졌다. 제대로 해결이 되지 않아 지금까지도 미해결의 상태로 남아 있으며, 문제가 발생했는데 아무도 책임을 지려고 하지 않고 있으며, 책임져야 할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책임질 자리에 있는지조차 알지 못하고 남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있으며, 그 불똥이 온전히 행복한 오늘을 살아가야 할 아이들에게 떨어지고 말았다.

 

수학여행 전면 유보, 더불어 수련회 유보.

 

학교라는 공간을 벗어나 자기들만의 공간과 시간을 갖고자 열망했던 전국의 많은 학생들이 어쩔 수 없이 학교라는 공간과 가정이라는 공간을 벗어날 기회를 놓쳐 버리게 되었으니...

 

이는 그들의 놀이 시간을 뺏은 것이 아니라 그들이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박탈했다고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성장은 집과 학교와 같은 자신에게 익숙한 공간을 벗어나 다른 경험을 함으로써 얻어지는 경우가 더 많기 때문이다.

 

그러니 사고로 인해서 전국적으로 학생들이 가져야 할 성장의 기회를 교육을 주관하는 교육부에서 박탈한 것이 과연 온당한 것이었는지, 이번 호를 읽으면서 생각하게 되었고...

 

무엇보다도 이번 호를 읽으며 생각한 것은 우리가 한 교육이 과연 무엇이었나 하는 것.

 

도대체 17-18세가 된 아이들이 자신들의 생명이 위급한 상황에 처했음에도 남의 말에만 의존할 수밖에 없게 만들었던가 하는 문제.

 

쥐는 배가 좌초할 것 같으면 먼저 탈출을 한다고 하는데, 그래서 선원들은 쥐가 탈출하는 것을 보고 배의 위험을 알아낼 수 있다고 하는데, 동물들이야 본능적인 직감으로 그렇게 한다고 해도, 사람 역시 동물적인 생존 본능이 있을텐데...

 

쥐를 열등한 동물로 취급하는 우리들이, 정작 목숨이 위험한 상황에서 쥐만도 못하게 행동하다니...

 

어쩌면 우리는 교육을 통해서 학생들의 이러한 생존본능을 아주 철저하게 죽였던 것은 아닌지...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아이들은 학교를 통해서 순응하는 법만 배웠지, 자신이 처한 상황을 판단하는 법에 대해서는 배울 수 없었는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학교에서 가르치는 것은 모두가 순응이지 결코 비판적인 사고는 아니기 때문이다.

 

학교에서 듣는 소리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라.

 

똑바로 앉아. 조용히 해. 왜 말대꾸야. 가만히 있어. 제대로 줄 맞춰. 자세 바르게. 나서지 마라 등등.

 

'모난 돌이 정 맞는다'는 속담처럼 우리는 남과 다름을 인식하고 다름을 강화하는 교육을 할 생각을 하지 않고 오로지 같아야 된다는 신념으로 모두가 같아지는 교육을 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생각까지도 같아지는 교육.

 

그래서 남과 다른 생각, 남과 다른 행동을 하면 눈총을 받고 비판을 받고 문제가 있다는 지적을 받는 그런 생활들, 그런 교육들.

 

그 교육의 효과가 바로 이런 사태 아닐런지. 말을 잘 듣는 학생들이 속절없이 자신들의 목숨을 잃을 수밖에 없었던 이런 현실을 낳았던 것은 아닌지...

 

그렇다면 우리들은 이 세월호를 기억하는 일은 이런 교육 현장을 바꿔가는 일에서 시작해야 하지 않을지.

 

남을 보지 말고 우런 나를 보는 연습부터 해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이 바로 '세월호 사건'을 잊지 않는 길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으니.

 

이번 호에 있는 메르코글리아노의 글 중에 '전자미디어와 이별하기'라는 제목을 단 글이 있는데(78-79쪽) 이 글을 읽으며 세월호와도 연결이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계에서 최고속 인터넷망이 가장 발달해 있으며, 국민들의 사용량도 세계 최고이고, 스마트폰 사용도 세계 최고를 자랑하는 우리나라에서 그런 스마트폰을 대부분의 학생들이 지니고 있었음에도 자신들의 생명이 위험에 처했을 때 그것이 제 구실을 전혀 하지 못했음을, 그 기계가 신고는 했을지언정 그 다음 생명의 구조로는 이어지지 못했음을 우리는 너무도 잘 알고 있지 않은가.

 

어쩌면 아이들은 이 스마트폰을 믿고 승무원들의 방송을 믿으며, 또 교사들의 지시를 따르며 마냥 기다리고만 있지 않았을까. 직접 현실을 볼 생각을 하지 않고 오로지 스마트폰 화면으로 자신들의 현실을 보지 않았을까... 이런 생각이 드는 것은 나만일까?

 

이런 가정은 위험하고 불필요하지만, 그래도 만약, 만약 스마트폰이 없었다면 그 혈기왕성한 나이의 아이들이 배 안에서 가만히 기다리고만 있었을까... 누군가는 참지 못하고 배 위로 올라가 보지 않았을까. 누군가 올라가 보라고 밖으로 보내 보지 않았을까?

 

스마트폰이 없는 그 시간을 아이들은 절대로 가만히 있지 않았을 것이라는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은 왜일까?

 

하여 우리는, 아니 나는 '세월호'을 잊지 않겠다. 아니 잊어서는 안된다. 잊을 수가 없다. 그 잊지 않는 방법으로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늘 생각하겠다.

 

아이들이 지금처럼 자라지 않게, 이렇게 무능하고 어리석은 어른들로 자라나지 않게... 그렇게 하도록 노력하겠다. 그것이 내가 '새월호'을 잊지 않는 방법이라는 생각이 든다.

 

민들레 93호.

과연 우리는 '세월호'에서 무엇을 기억해야 하는지, 무엇을 잊지 말아야 하는지 생각해 보게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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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무거운 나날들이었다.

 

세상에 나서 무언가를 이루고 세상을 떠나야 하는데, 그럴 틈도 없이 어느 순간 세상을 뜨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다.

 

더 이상 무엇을 할 수도 없는 상황.

 

이승과 저승이 참 멀리도 있다고 느끼고 있었는데, 한 순간 이곳이 바로 이승이고 저승이구나 하게 만드는 일이 일어나고 있다.

 

"메멘토 모리!"

 

한 순간만 방심해도 죽음은 이렇게 우리에게 다가와 자신을 잊지 말라고 강요한다. 도저히 잊을 수 없게 우리에게 다가온다.

 

나는 바로 이 곳에 있다고 늘 죽음은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데, 우리는 죽음에게 벽을 쌓고, 마치 죽음은 이 곳에 없는 것처럼 생각하고 행동한다.

 

그러다 순간, 그 벽이 아무 소용이 없음을 깨닫고, 다시 죽음을 이 곳에서 만나게 된다. 경계는 여지없이 무너지고 만다. 이승의 길을 열심히 달리고 있었는데, 죽음의 길은 전혀 다른 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승의 길을 달리다 보니 죽음의 길이 바로 눈 앞에 있었다. 아니, 죽음의 길로 들어서 있었다.

 

이런 일들... 나이 들어가면서 점점 더 많이 겪게 된다. 나이 들어간다는 것, 하루하루 죽어간다는 것. 이승의 길을 많이 달리고 달려 죽음의 길을 만나게 된다는 것.

 

그렇기에 이승의 길을 달릴 때 더욱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것. 한 순간 길을 바꿔버린 사람. 그런 사람을 애도하며, 다시 한 번 "메멘토 모리!"

 

경계, 무너짐

-삶과 죽음

선이 있다고

명확한 경계가 있다고

생각했다.

삶을 충실히 살고,

죽음을 향해 가야 한다고,

한 면과 다른 면이

같지 않다고,

만나지 않는다고,

선을 넘어가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안과 밖이

하나임을,

한쪽을 달리다 보면

이미

다른 쪽에 와 있음을

선과 선이

엉켜있음을,

삶이 곧 죽음인 것을

나이들어 비로소

알게 되었다.

 

 

이런 일들과 더불어... 세상에 이런 어처구니 없는 일들이 너무도 많이 일어나고 있으니, 이번에 읽은 황규관의 시집 "태풍을 기다리는 시간"에는 이런 죽음에 대한 시들이 있다. 그게 현실이니...

 

죽음들

귀신 따위는 믿지 않던 내게도

얼굴의 핏기를 싹 빼앗긴 이들이

매일매일 찾아온다

반복은, 심장을 두려움으로

천천히 진화시키는 힘인가

하얀 알약을 한 움큼 털어 먹고 죽고

유독가스를 울음처럼 울쩍이다 죽고

일가족을 태운 채 강물에 뛰어들어 죽고

고전적으로 공중에 목을 매단

숱한 죽음들이, 조간신문처럼

꼭 눈을 뜨면 찾아온다

전쟁을 치른 어머니의 공포가

유전된 것도 아닐 텐데

심지어 맞아 죽고

까마득한 절벽 아래로 떠밀려 죽고

몽땅 방화된 죽음도 섞여 있다

비슷비슷한 내력으로

별다를 게 없는 설움으로

굴욕에 무너진 식은땀으로

자꾸 내 삶에 부벼대는 것이다

오늘도 부산의 조선소에서

어제는 집에서 멀지 않는 전자공장에서

그제는 강 건너 허름한 재개발 지역에서

그리고 물고기가 모여 사는 냇물에서

식어버린 몸들이 매일매일 찾아온다

 

황규관, 태풍을 기다리는 시간, 실천문학사. 2011년. 96-97쪽

 

개인적인 죽음이든, 사회적인 죽음이든 죽음은 우리에게 슬픔을 가져다 준다. 그러나 언제까지 슬픔에만 빠져 있을 수는 없다. 이 슬픔을 딛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가 해야 할 일 아니겠는가.

 

다시는 이런 죽음이 없게. 비록 죽음은 늘 삶에 따라오는 그림자 같은 존재지만, 그 죽음을 잘 맞이할 수 있게 우리의 삶을 잘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 생각이 드는 요즘이다.

 

잘 살자, 그것이 잘 죽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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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선거를 보면서 든 생각. 녹색당을 찍으면 사표가 된다고, 의미 없는 투표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소수 정당에 투표를 하면 안된다고... 될 만한 정당을 찍어야 한다고. 최선이 아닌 바에야 차악을 선택하는 것이 좋다고.

 

그러나 그렇다고 자신들의 목소리를 언제까지 남들에 의탁해서 내려고 하는가? 

 

비록 소수 정당이라고 하더라도 꾸준히 자신의 목소리를 내야 하고, 적은 수의 사람이라도 지지하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어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을 했는데... 투표가 끝난 다음 녹색당의 득표가 얼마나 될까 궁금해서 찾아 보았다.

 

2년 전에 녹색당의 득표율이 0.48%, 103,811표였다. 정당이 해산되었다가 정당법의 개정을 거치는 우여곡절 끝에 다시 녹색당의 이름을 걸고 지방자치 선거에 도전했는데...

 

몇 %인지는 계산을 해보지 않았다. 선관위에 들어가 광역시비례대표 득표수를 계산해 보았더니, 170,522표가 나왔다. 2년 전보다는 7만표 정도 더 얻었는데, 아직도 갈 길이 멀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급진적인 정당은? 또는 가장 좌파인 정당은?이라는 질문을 하면 대답이 각양각색으로 다양하겠지만, 우리나라 정당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고 알고 있는 사람은 그에 대한 답을 "녹색당"이라고 한다.

 

녹색과 좌파는 어울리지 않을 것 같지만, 사실 녹색은 지금 체제를 부정하면서 우리가 살 길을 찾아야 한다는, 근본부터 다시 살펴야 한다는 가장 급진적인 정책이라고 할 수 있다.

 

녹색이 편안함을 주지만, 그 편안함은 바로 우리가 자연과 사람과 함께 할 때만이 서로가 함께 공존할 때만이 주어질 수 있음을 녹색당은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공약을 내걸고 광역자치단체 비례대표로 출마를 했다. 정당의 이름으로. 지난 번보다는 더 나은 결과를 얻으리라는 생각도 있었겠지만, 무엇보다도 지금 이 시대에 녹색당을 알린다는 목표로, 이런 정당도 있다는 것을, 녹색당의 정책을 알린다는 목표로 나왔다고 하는 편이 더 좋을 듯하다.

 

광역자치단체 어느 곳에서도 5%이상을 득표를 하지 못해 아마도 비례대표를 내지는 못했을 거 같은데, 그래도 조금씩 나아가고 있다.

 

그 나아감을 보며 황규관의 시집 "패배는 나의 힘"이 생각났다.

 

이 시집에 실린 시들 중에 녹색당과 어울리는 시들이 많이 있고, 또 제목이 된 '패배는 나의 힘'은 지금의 녹색당을 너무도 잘 말해주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시를 보자.

 

패배는 나의 힘

 

어제는 내가 졌다

그러나 언제쯤 굴욕을 버릴 것인가

지고 난 다음 허름해진 어깨 위로

바람이 불고, 더 깊은 곳

언어가 닿지 않는 심연을 보았다

오늘도 나는 졌다

패배에 속옷까지 젖었다

적은 내게 모두를 댓가로 요구했지만

나는 아직 그걸 못하고 있다

사실은 이게 더 큰 굴욕이다

이기는 게 희망이나 선(善)이라고

누가 뿌리 깊게 유혹하였나

해야 할 일이 있다면 다시 싸움을 맞는 일

이게 승리나 패배보다 먼저 아닌가

거기서 끝까지 싸워야

눈빛이 텅 빈 침묵이 되어야

어떤 싸움도 치를 수 있는 것

끝내 패배한 자여

패배가 웃음이다

그치지 않고 부는 바람이다

 

황규관, 패배는 나의 힘, 창비 2014년 초판3쇄. 72-73쪽

 

이 시에서 말하고 있듯이 녹색당은 해야 할 일이 있다. 그래서 이들의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패배를 웃음으로 다시 시작한다.

 

그러나 녹색당의 싸움은 배제가 아니라 품는 것에 있다. 이들은 모든 것들을 품으려 한다. 그래서 모두 함께 살자고 한다. 그런 지난한 싸움... 녹색당의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황규관의 또 다른 시 '품어야 산다'를 보면 아마도 이런 자세가 바로 녹색당이 지향하고 있는 자세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지금은 비록 미미하지만, 정당법, 선거법을 개정해서 녹색당이 자신의 목소리를 당당히 내면서 남들을 품는 정책을 펴기를 바란다.

 

적어도 이런 정당이 우리나라에 있어야 하지 않을까?

 

 

품어야 산다

 

어머니가 배고픈 아기에게 젖을 물리듯

강물의 물살이 지친 물새의 발목을

제 속살로 가만히 주물러주듯

 

품어야 산다

 

폐지수거하다 뙤약볕에 지친

혼자 사는 103호 할머니를

초등학교 울타리 넘어온 느티나무 그늘이

품어주고,

 

아기가 퉁퉁 분 어머니 젖가슴을

이빨 없는 입으로 힘차게 빨아대도

물새의 부르튼 발이

휘도는 물살을 살며시 밀어주듯

 

품어야 산다

 

막다른 골목길이 혼자 선 외등을 품듯

그 자리에서만 외등은 빛나듯

우유배달하는 여자의 입김으로

동이 트듯

 

품는 힘으로

안겨야 산다

 

황규관, 패배는 나의 힘, 창비 2014년 초판3쇄.  104-10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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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자치 단체장 선거가 끝나고, 광역단체장과 기초단체장, 광역의원, 기초의원, 교육감이 뽑혔다. 이들은 이제 4년간 지방자치를 실시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다.

 

단체장이라고 하면 남 앞에 나서서 남들을 이끌어야 할 사람이라고 생각하는데, 거꾸로 공무원이 국민의 종이라면, 단체장은 시민의 뜻을 대변해서 행하는 대리인이라는 생각을 해야 한다.

 

그들은 군림하는 자들이 아니라 섬기는 사람이어야 하는데, 몇 천 년 전에 살았던 맹자의 말에 의하면 군주는 배고, 백성은 물이라고 했다 배가 제 맘대로 가는 것 같지만, 물이 없으면 배가 갈 수 없고, 또 배가 제대로 가지 않으면 물이 배를 엎어버릴 수도 있다는 그런 말.

 

하여 이번에 뽑힌 지방자치 단체장들은 자신들이 바로 물 위에 위태롭게 떠 가는 배라는 생각을 하고, 물의 흐름을 거스리지 않는 정책을 펼 수 있기를 바란다.

 

우연히 황규관의 시집을 읽게 되었다. 꼭 지방자치 단체장 선거와 맞물리는 것은 아니지만, 이 시집에 첫번째로 실린 시가 눈에 확 들어왔다.

 

내가 세운 뜻

 

나이 서른을 몇 년 넘기고서야 뜻 하나 세운다

뭐 그리 큰 뜻은 아니고

인적도 드문 벌판 한 가운데

나무 한그루로 서는 것이

이제사 슬며시 바래보는 소망이다

저 울울창창한 산자락의 숲이

얼마나 보기 좋으냐, 하지만

아무래도 내 자리는

가끔 지나는 새가 한번씩 앉아 쉬고 

그늘이라고 해야 듬성듬성 뙤약볕 내리쬐는

못난 그림자 한 뼘 있으면

좋겠다는, 뜻 하나 세운다

정말 아무래도 그 모습이 내 본모습인 것 같아

나도 가슴이 서늘해지지만

부는 바람에 다른 세상 소식 귀동냥하고

새의 낯빛으로

내 벗들 근황 읽어내면 그만이지

나이 서른을 몇 년 넘기고서야

뜻이라고 세워본다

혼자 묻고 혼자 답하고

내 잎에게

땅 속 벌레 얘기 전해주는 뜻,

이제사 슬며시 세워본다

 

황규관, 물은 제 길을 간다, 갈무리. 2000년. 9쪽-10쪽 

 

이렇게 소박하게 자신의 위치를 소망하는 사람. 남 앞에 서되, 남 위에 군림하지 않고 남과 함께 가는, 그래서 남에게 작은 그늘이나마 줄 수 있는 그런 사람.

 

너무 많은 것을 욕심내지 않고 작은 것에 만족하며 사는 사람.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 그런 사람이 되겠다는 소망, 참 작은 소망같지만 너무도 큰 소망이다. 이런 사람이 되기가 얼마나 힘든지 우리는 너무도 잘 알고 있지 않은가.

 

단체장이 되면 이런 작은 소망을 세웠어도 지키기가 힘들다. 이것이 작은 소망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단체장들, 정말로 남에게 그늘이 되어 줄 수 있는 그런 정책을 펴는, 자신의 이익이 아니라,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감추어도 남들은 편안해질 수 있는 그런 정책을 펴겠다는 소망을 세웠으면 한다.

 

하여 그런 소망은 이렇게 이루어내야 한다. 그는 '폭포'라는 시에서 말한다.

 

폭포

 

물이 비명을 지른다

 

곤두박질이 두려워서가 아니다

먼바다로 가는 길에

꼭 맞아야 할 제 운명에

물이 소리를 지른다

공포에 질린 괴성이 아니라

온몸을 던져 저를 부수는 파열음이다

숲도 그 소리에

한결 더 푸르러진다

떨어져야 하는 운명 없이

누구도 빛나는 바다에 다다르지 못한다는 걸

물은 아는 것이다

물은 제 비명에 담긴

운명에 대한 남김 없는 사랑을

쉴새없이 내지른다

날벌레 한 마리까지 비추는 마음도

자신에 대한 아득한 사랑부터라고

 

황규관, 물은 제 길을 간다. 갈무리, 2000년. 15쪽-16쪽

 

남에게 작은 그늘이 되고 싶다는 소망, 다른 사람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겠다는 소망, 결코 작은 소망이 아니다. 이 시에서 말하는 '빛나는 바다'다. 이 '빛나는 바다'에 가기 위해서는 자신을 온전히 내던져야 한다. 자신을 내던지는 울음소리, 온몸이 내지르는 소리를 자신이 들을 수 있어야 한다. 내가 그렇게 살 때 나 자신도 잘 살게 되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도 도움이 된다는 사실...

 

이 두 시를 읽고 마음에 새기는 단체장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 소수의 이익을 위해서 정책을 펼 수는 없으리라. 그들은 약한 사람을 위해서, 힘든 사람을 위해서,무언가가 필요한 사람을 위해서 정책을 펼칠 수 있으리라. 그러면 그들은 '빛나는 바다' 즉 자신이 가고자 했던 곳에 도달할 수 있으리라.

 

시인 김수영은 이 시와 같은 제목의 시에서 '곧은 소리는 곧은 소리를 부른다'고 했다. 물은 저 혼자 흐르지 않는다. 함께 흐른다. 함께 흐르면서 엄청난 힘을 발휘한다. 그래서 물은 곧 시민이다. 국민이다.

 

새로 출범하는 자치단체장들... 시민이 물임을, 자신들은 물 위에 떠 있는 배에 불과함을 명심했으면 좋겠다. 그래서 그들은 거창한 정책이 아니라 시민들이 자유롭게, 언제든지 편하게 쉴 수 있는 그늘을 마련해주는 일에 '폭포'처럼 온몸을 던져 나서주었으면 좋겠다.

 

그들이 그렇게 하도록 지켜보는 존재, 길을 알고 제 길을 가는 존재, 그것이 바로 우리 '시민들'이니... 우리 역시 두 눈 똑바로 뜨고 우리의 길을 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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