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에서, 또 신문에서 대통령이 한 말이 머리 속에서 사라지지 않고 있다. '공기업 노조 개혁방해 용납 안해'라는 제목을 달고 있는 말.

 

나라빚이 많고, 공기업들이 방만하게 운영해 와서 경영이 악화되었음에도 흥청망청 예산을 낭비한 경우가 많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그런데 그 책임이 노동자에 있다? 과연 그럴까? 노동자가 개혁 방해세력일까? 경영을 제대로 못 한 것은 경영자의 책임이 아닌가.

 

평생동안 일만 하던 사람들을 상황이 악화되었다고 해서 이렇게 다르게 대우해도 되는가 하는 생각이 들면서 어리석게도 카프카의 [변신]이 떠올랐다. 아니 [변신]이라고 하기보다는 카프카의 그 작품 주인공인 '그레고리 잠자'가 떠올랐다고 하는 편이 맞다.

 

왜 그럴까? 곰곰 생각해 보니, 그레고리는 가족을 위해서 일한 죄밖에 없었다. 그는 정말로 가족을 위해서 자신의 성향도 죽이고 일을 한다. 그런데 어느날 자신이 흉측한 벌레로 변해있음을 발견한다.

 

자신을 죽이고 일한 대가가 벌레가 된 것이다. 그 벌레는 그에게는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는 그 자신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족에게는 아니다. 그는 이미 이전의 그레고리가 아니라 벌레일 뿐이다.

 

보기에도 흉측하고 가족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 그래서 가려야만 하는, 없애야만 하는 존재. 이전의 그의 모습은 가족에게 상관이 없다. 지금 그의 모습만이 중요할 뿐이다. 그리고 그는 이제 가족에게 필요 없는 존재다.

 

여기에 외부 손님이 있다. 그의 가족을 생활하게 하는 경제력을 지닌 외부 손님들. 그 손님들에게 이 벌레는 장애일 뿐이다. 손님들에게 벌레는 가려져야 하는 존재, 즉 알려져서는 안되는 존재이다.

 

그들에게 벌레의 존재가 알려진다면 가족들은 살아가기 힘들어진다. 그래서 그는 철저하게 가려져야 한다. 그래서 그를 도와주고 지지해주야 하는 가족들은 그를 귀찮아 하고, 사라졌으면 하는 존재로 여기고, 또 그렇게 행동한다.

 

무언가가 연상이 된다. 그레고리는 노동자다. 그들은 일만 한다. 그는 늘 같은 일을 한다. 그럼에도 상황이 변하니 그는 같은 존재가 되지 못한다. 꼭 필요한 존재에서 없어져야만 하는 존재가 된다.

 

경제성장의 주역이라던 노동자는 이제 경제성장의 발목을 잡는 존재가 되었다. 여기에 다국적기업으로 표상되는 외국 기업들에게는 그들의 고임금은 투자를 저해하는 요소가 된다. 예전에는 저임금으로 외국 투자를 이끌어들였던 노동자들이 이제는 외국의 투자를 막는 요소가 된 것이다.

 

마치 [변신]의 그레고리가 가족에게 꼭 필요한 존재에서 필요없는 존재가 되었고, 그의 가족의 생계를 도와줄 손님들을 쫓아버리는 존재가 되었듯이, 지금 우리 경제의 주역이었던 노동자들이 그런 대접을 받고 있는 것은 아닌지.

 

1900년대 초반에 살았던 카프카가 이런 노동자의 현실을 감안해서 소설을 쓰지 않았을텐데, 세계 명작이란, 세계에서 꾸준히 읽히고 있는 작품이란 이렇게 다양하게 시대에 따라서 또 사람에 따라서 해석이 될 수 있음을 이 소설이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난 어리석게도 요즘 이 소설을 우리 사회에서 느끼면서 섬뜩한 마음을 지니게 되었다.

 

나도 이렇게 ‘그레고리’에 불과하지 않을까?

우리는 ‘그레고리’처럼 대우받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러면 안 되지 않는가.

 

아니겠지.

아니라고 자위를 해본다.

그래야만 하지.

‘그레고리’는 무력하게 죽음의 세계로, 내쳐짐의 세계로 갔지만... 바우만의 용어로 하면 그레고리는 '쓰레기'가 된 삶이 되어 폐기되어 버렸지만,

우리는... 노동자들은... 

그렇게 ‘그레고리’처럼 만들어서는 안 된다.

 

그렇게 하지 말라고 카프카가 미리 경고한 것 아닌가. 난 그런 생각이 든다.

 

카프카의 [변신]을 2014년에 우리나라에서 만나게 될 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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