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아 캠프의 첫 번째 날, 스토아철학에 대한 내 생각이 전부 틀렸음을 깨닫는다.

인정머리 없고 냉정한 스토아철학의 이미지는 에피쿠로스학파의 식도락가 이미지만큼이나 사실과 거리가 멀다. 스토아학파는 차가운 사람들이 아니다. 강렬한 감정을 억누르지도, 안으로는 벌벌 떨면서 겉으로만 용감한 표정을 짓지도 않는다. 이들은 모든 감정을 다 내던지지 않는다. 불안, 두려움, 질투, 분노, 그 밖의 다른 ‘정념’처럼 오직 부정적인 감정만 내던진다(정념이라는 의미의 pathe는 ‘감정’과 가장 가까운 고대 그리스어 단어다).

"즐거워하는 스토아학파"는 모순적인 표현이 아니라고, 라이트 주립대학의 철학 교수이자 스토아철학을 실천하는 윌리엄 어빈이 말한다.

성격 나쁜 쇼펜하우어와는 달리 스토아학파는 우리가 가능한 최선의 세상,유일하게 가능한 세상에 살고 있다고 믿는다. 스토아학파는 유리잔에 물이 반이나 차 있다고 생각하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이들은 자신에게 유리잔이 있다는 사실을 기적으로 여긴다.

철학은 "우리 자신의 나약함을 의식하는 것"에서 시작한다고, 에픽테토스는 말했다.

"사람들을 화나게 하는 것은 문제 자체가 아니라 그 문제에 대한 그들의 판단이다."

"어떤 것들은 우리에게 달렸고 어떤 것들은 우리에게 달려 있지 않다." 너무나도 참인 동시에 너무나도 명백한 문장이다.

에픽테토스는 모르는 사람에게 자기 몸을 맡기는 상황을 상상해보라고 말한다. 터무니없지 않나? 하지만 그것이 바로 우리가 매일 마음속에서 하는 일이다.

세상을 바꾸는 것보다 스스로를 바꾸는 것이 훨씬 쉽다.

자기 소설이 출간되는 것을 보고 싶어 하는 대신 자신이 쓸 수 있는 가장 훌륭하고 진실한 소설을 쓸 것. 그 이상도 이하도 바라지 말 것.

대부분이 자기 통제하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사실 우리의 통제 밖에 있다. 부도 명성도 건강도 통제할 수 없다.

스토아철학은 이처럼 우리의 통제를 벗어나는 상황과 성과를 "무관한 것"이라 칭한다.

지난 일을 돌아보면 이런 스토아적 태도가 결과를 바꾸진 않았음을 롭도 안다. 하지만 이런 태도는 롭이 고통을 견디는 방식을 바꿔주었다.

그러므로 스토아철학은 무관한 것들에 ‘무관심’하다.

이 최초의 충격은 감정이 아니라 당황했을 때 얼굴이 빨개지는 것과 같은 반사 반응이다.

인상에서 동의로 이어지는 끈을 잘라내야만 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소크라테스식 멈춤(나는 이를 "위대한 멈춤"이라 부른다)이 도움이 된다. 에픽테토스는 이렇게 말한다. "선명한 인상에 빠져들지 말고 이렇게 말하라. ‘인상이여, 잠시 기다리게. 네가 무엇인지, 무엇을 나타내는지 살펴보게 해주게. 너를 따져보게 해주게.’" 고난에 대한 우리의 반응이 자동으로 따라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내리는 선택임을 깨달아야만 더 나은 선택을 내리기 시작할 수 있다.

몸이 경험한 것을 마음이 경험하고 증폭시키도록 두지 않았다.

"어느 면에서든 불평은 하지 않는 것이 가장 좋다."

하지만 자발적 박탈의 목표는 고통이 아니라 기쁨이다. 때때로 삶을 편안하게 해주는 것들을 스스로 거부함으로써 우리는 그것들에 더욱 감사하게 되고, 덜 얽매이게 된다.

자발적 박탈은 용기를 길러준다. 또한 그리 자발적이지 않을 수도 있는 미래의 박탈에 대비해 예방 주사를 놔준다.

바뀐 건 호텔이 아니었다. 나였다.

에픽테토스는 우마차에 묶인 개를 비유로 든다. 우마차는 움직이고 있고, 무슨 일이 있어도 계속 움직일 것이다. 개에게는 선택지가 있다. 땅에 질질 끌려갈 것이냐, 우마차를 따라 달릴 것이냐. 나는 달리기를 시작해야 한다.

스토아철학의 핵심에는 깊은 숙명론이 있다. 우주는 내가 쓰지 않은 대본에 따라 움직인다.

에픽테토스는 기원후 55년에 오늘날 터키 지역에서 노예로 태어났다.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는 모든 것이다.

어려운 시기의 철학인 스토아철학은 재앙 속에서 태어났다. 기원전 300년경 제논이라는 이름의 페니키아 출신 상인이 배를 타고 아테네의 피라에우스 항구로 향하다 난파되었고, 자색 염료를 실은 귀중한 화물을 전부 잃었다.

롭은 스토아주의자로서 더 도움이 되는 아빠, 더 나은 아빠가 되었다. 그리고 스토아철학에서 거의 사용하지 않는 단어이긴 하지만, 더 다정한 아빠가 되었다.

고대 그리스에는 시간을 의미하는 단어가 두 개 있었다. 바로크로노스chronos와 카이로스kairos다.크로노스는 일반적인 시간이다. 시계 속의 분, 달력 속의 달이다.카이로스는 딱 맞는 적절한 때를 의미한다.

보부아르는 스물두 살에 최연소로 그 어려운 철학 교수 자격시험을 통과했다. 사르트르에 뒤이은 차석이었다.

보부아르가 보기에 노화는 타인이 내리는 문화적·사회적 판결이었다.

(진정성authenticity이라는 단어는 독립적으로 행동하는 사람이라는 뜻의 그리스어이우텐테스authentes에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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