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의 날개는 난해하기에 앞서 매춘을 하는 아내와 커튼 하나 친 건너편에서 기생하는 남편의 두 관계를 이해할 수도 없고 바라보기조차 어렵다.

방황하는 지식인이 타락의 근처에서 고상하고 그로테스크하게 세상의 모든 일을 신과 어깨를 나란히 한 포도주와 시에 젖어 있는 방관자처럼 그저 자신의 주위 세상을 그려본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래서 해설을 읽고 그것이 일제 강점기의 조선과 친일과 일본을 나타낸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어느 정도 수긍의 끄덕임을 하다 제임스 조이스의 더블린 사람들이 떠올랐다. 그 단편들은 내가 더블린 토박이가 아니면 이해할 수 없는 지역적인 이야기들이 가득했던 그 단편들은 이해하기 힘들었고, 마찬가지로 해설을 읽고 조국 아일랜드를 아끼며 통렬히 비판한 조국애의 산출물임을 알았다.

사대주의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날개와 더블린 사람들은 이처럼 배경과 은유의 기법이 비슷한데도 나에게 다르게 다가왔다.

이상이 조선 총독부의 건축 기수로 일을 한 것이, 그 시절 엘리트로 건축과를 나왔으니 그렇게 일할 수도 있겠다고 이해도 할 수 있지만, 폐병으로 그만두고 문학을 시작한 것을 보면, 애국을 위해라기 보다는 문학을 했고 그때의 시대 상황이 제재가 된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내가 만약 더블린 사람들이었다면 더블린 사람들을 읽고 분개하다 결국엔 부끄러워하고 각성했을 것처럼, 날개도 내가 강점기의 사람이었다면 분개했을 것이다.

그런데, 더블린에서는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나타나지 않는다. 각성한 자, 개혁자도 없다. 그래서 그런 것들은 신성하게 조국애와 함께 보존되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상은 기둥서방 같은 주인공 남편이 각성의 의지로 '날개'가 돋기를 바라는 대목에서 각성하려고 한다. 그것은 식민치하의 나와 기둥서방인 내가 동일시되려고 하는 것이다. 달갑진 않다. 차라리 그 대목이 없었다면 좋았겠다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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