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는 먼저, 특정한 몸짓언어가 우리에게 무엇을 가리키는지를 살펴본다. 그 몸짓의 사회적 기능은 무엇이고, 어떤 감정을 그려내는 것인지를 알려준다. 그 몸짓들은 시대와 장소를 불문하고 이해되는 경우도 있고, 반면에 특정한 시대, 한 지역사회와 깊은 관련이 있는 행동들도 있다. 이것들은 특정한 관습과 깊이 얽혀 있는 행동들이다. 작가는 이 행동들을 인간의 몸짓과 언어, 사회적 관습의 문화사, 예술 양식이 변화의 세 부분에서 논의한다. 선사시대에서부터 현대 예술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시각 예술을 다루고 있다.
첫 번째로 환영의 의미를 담은 몸짓들- 팔 치켜들기, 악수, 포옹, 절과 커트시, 무릎 꿇기, 큰절-에 대하여 이야기 한다. 파시스트와 나치가 채택한 인사법은 고대 로마부터 있었다는 주장이 있었으나 제롬의 그림 제목처럼 「황제께 경례! 목숨을 바치려는 이들이 인사 드립니다」의 의미보다는 죽음을 앞두고 황제의 관용을 바라는 몸짓이었다고 한다. 올림픽 선수들의 인사나 미국의 국기에 대한 경례는 히틀러를 연상시키는 이유로 폐지했다고 한다. 악수나 포옹과 달리 절과 커트시, 무릎꿇기, 큰절은 자신을 낮추는 인사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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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로 축복의 몸짓들-안수, 로마 가톨릭 교회와 동방 정교회의 축복, 불교의 축복-은 주로 종교적인 의미가 담겨 있으며 손의 모양이나 위치 방향과 관련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살바토르 문디>와 알비제 비바리니의 <그리스도의 축복>에 보이는 손의 모양은 각각 로마 가톨릭과 동방 정교회의 손 모양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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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로 지위를 나타내는 포즈-꼿꼿한 자세, 이중으로 벌린 손, 숨긴 손, 우월한 팔꿈치, 샅주머니, 튀어나온 발, 허리굽힌 몸, 절제되지 않은 행동과 도시의 비참함- 중에는 지금으로서는 이해가 안가는 것들이 많고, 또 사라진 것들도 많다. 지위를 상징하는 의복이나 예절 등의 트랜드는 잘 변화한다. 한편, 대 피터르 브뤼헐은 농촌 마을 사람들의 절제되지 않은 행동을 그리고 있다는 것 때문에 비판을 받았다. 보들레르는 “누구도 내 앞에서 브뤼헐의 불쾌하고 상스러운 잡동사니를 설명하려고 하지 말기를.”이라고 비판했다. 지금은 브뤼헐의 의도를 농촌의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생활을 찬미하고 있다고 해석한다. 또한 밀레의 <이삭 줍는 여인들>도 1857년 ‘살롱전’에 출품했다가 평단의 분노를 샀다. 시골의 비천한 여성들을 주인공으로 그려 넣었다는 것 때문이다. 당시 신화나 종교의 한 장면이 주제를 이뤘던 살롱전 출품작들을 보면 그런 비난을 받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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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번째로는 모욕의 몸짓들- 얼굴 일그러뜨리기, 혀 내밀기, 콧등에 엄지대기, 손가락 자세, 손짓, 주먹감자, 엉덩이 까기- 이다. 미술 작품에 이런 몸짓들이 있다는 것이 생소하거나 당황스러운 감상자들도 있을 것이다.
다섯 번째로는 위협의 몸짓들- 치켜든 주먹, 허공 움켜쥐기, 위협하는 얼굴, 장갑으로 뺨치기, 상징적인 위협의 몸짓-이다. 거트루드 에버크롬비의 <구애>라는 그림은 남자가 여자를 향해 집게손가락을 뻗어서 위협하고 있고, 여자는 전통적인 ’손들어’자세를 취하고 있다. 남성의 구애가 일방적이고 폭력적인 경우를 상징하고 있는 것으로 읽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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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 번째로 고통의 몸짓들-눈물 흘리기, 애도, 괴로움, 공포, 혐오, 상징적인 고통-이다.
일곱 번째로 자기보호의 몸짓들- 달아나기, 항복, 갑옷, 차단, 몸십자가, 팔짱, 허리에 손, 손가락 꼬기, 보호용 코르누타, 문신, 베일-이다. 고야의 <1808년 5월 3일>은 반도전쟁 때 나폴레옹 군대에 맞선 스페인인들의 저항을 기린 작품이다. 흰 셔츠를 입은 남자는 두 손을 높이 들어 올리고 있다. 동료들은 총에 맞아 발치에 쓰러져 있고, 그의 몸짓은 절망적이지만, 감상자들은 총에서 불이 뿜지 않기를 바라는 가슴 졸이는 시선을 보내게 된다.
여덟 번째로 에로틱한 몸짓들- 나체, 여성의 젖가슴, 무화과 잎, 성적인 입맞춤, 속박-이다.
「서양 미술에서 나체의 역사는 복잡하다. 대체로 나체는 다음의 두 범주 중 하나에 속한다면 미술에서 자유롭게 허용되고 받아들여졌다. 첫 번째 범주는 인체 해부 구조를 찬미하는 태도를 미술 작품에 포함시키는 것이다. 이런 유형은 수천 년 동안 이술에 있었지만, 특히 고대 그리스와 관련이 깊다. 두 번째 범주는 목욕이나 샤워나 수영처럼 옷을 벗어야 하는 성적이지 않은 활동, 또는 대상자를 벌거벗기는 처벌이나 순교나 굴욕 장면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그러나 일상생활에서 보이면 불법적이거나 사회적 비난을 받았을 수준의 나체 장면도 많았다.」 237p
아홉 번째로 휴식의 포즈- 다리꼬기, 웅크리기, 기대기, 눕기, 흔들기, 하품하기, 잠자기-들이다. 헨리 퓨셀리의 <악몽>과 살바도르 달리의 <잠>은 휴식이라고 보기 어렵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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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몸은 가시적이다. 이렇게 타인에게 보여 지는 자신에 대한 의식에는 사회적 존재로서의 의식이 포함되어 있다. 관계 속에서 내가 어떻게 보여 질 것인가에 대한 의식을 말한다. 실재로 보이는 자신과 어떻게 보여 졌으면 좋겠다는 의식 사이에는 간극이 있게 마련이다. 어떻게 보일까에 대한 의식을 ‘자기의식’이라고 하는데, 이 ‘자기의식’은 타인에게 실제로 보이는 모습과 관련을 맺고 있다. 실제로 내가 욕망하는 이상적인 모습은 자신이 살고 있는 사회의 관습이나 부모님이 바람직하게 제시하는 모범의 영향을 받을 것이다. 자아와 초자아는 자신의 모습을 만들어 간다.
이런 자신의 모습을 극단적으로 드러내는 예술 행위가 초상화와 사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림의 경우 원하는 모습과 실재의 모습 사이의 간극은 화가에 의해 메워질 수 있으나, 사진의 경우 그렇지 못하다. 초상화에서는 고귀하고 지적인 용모로 등장하는 데 성공할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카메라는 디지털 카메라와 포토샵이 나오기 전까지는 그렇지 못했다.
카메라 렌즈가 나를 향하고 있다고 느끼자마자 모든 것이 변한다. 나는 ‘포즈를 취하는’ 태도를 취하면서, 그 자리에서 나를 다른 육체로 만들고, 이미 나 자신을 [사진에 찍히기]에 앞서 하나의 이미지로 변형시켜 버린다. 이 변형은 능동적인 것이다. 나는 사진이 제멋대로 내육체를 만들어 내거나 죽여 버린다고 느낀다. ……하나의 이미지 – 나의 이미지- 가 태어날 것이다. 나는 불유쾌한 개인으로 세상에 태어날까 아니면 ‘멋진 놈’으로 태어날까? 어떻게 하면 고전적인 유화에서처럼 고귀하고 지적인 용모로 등장하는 데 ‘성공’ 할 수 있을까? -롤랑 바르트, 『Die helle Kammer』,19~20쪽에서
-김남시, 『보여진다는 것』, 68p
최초의 대중화된 사진기술인 다게레오타이프(Dagereotype)는 오랜 노출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에 오랜 시간 부동자세로 있어야만 했다. 초상화의 모델 보다는 시간이 덜 걸렸겠지만 여기에도 연출된 포즈가 필요했고, 표정은 그림보다 근엄하며 생기 없어 보이는 것이 당연했다.
여기 미국의 지난번 선거에 널리 배포된 보도사진이 한 장 있다. 그것은 측면에서 보여지고, 눈은 하늘을 향해 있고, 두 손은 모아져 있는, 케네디 대통령의 상반신 사진이다. 여기에서 젊음, 경건함, 순수함이라는 코노테이션의 시니피에들의 독해를 준비하는 것은 포즈 자체이다. 왜냐하면, 모든 의미작용 요소들(하늘을 향한 시선, 모아진 두 손)로 구성된 스테레오타입화 된 태도의 저장고가 존재하기 때문만으로 사진은 명백히 의미있는 것이다. 초상화적 코노테이션의 <역사적 문법>은 따라서 그 재료들을 회화, 연극, 사고의 연합, 일상적 은유 등, 즉 정확하게는 <문화> 속에서 찾아야만 할 것이다.
- 『이미지와 글쓰기』 롤랑 바르트 73p
미술이나 사진에서 보여 지는 포즈는 사회적 규범의 영향을 받기 마련이다.
미술작품의 순간포착 그림이나 초상화에 나타나는 포즈는 오늘날 sns를 통해 자신을 표현하려는 활동과도 통하는 부분이 있다. 현재 상황을 사진으로 포착해서 올리고, 또는 해시태그를 들고 사진을 찍어 올리며 메시지를 전달하기도 한다. 이런 셀피, 순간포착 사진들은 사회의 관습과 통념을 깨뜨리는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나는 어떤 사람으로 보여 지기를 원하는가?
나이가 들면서 사진 속의 나의 모습은 언제부터인지 맘에 들지 않았었다. 피사체를 보는 미의 기준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특히, 영상을 만들어 보면서 놀랍게도 전혀 다른 모습들을 발견하고 놀라게 되었다. 생각하지 못했던 버릇들이 보이고, 입모양이나 눈동자의 움직임, 손짓, 말투, 음성 등이 내가 원했던 이미지를 만들지 못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이상적으로 생각한 나의 이미지는 어떤 것일까? 아마도 외부로부터 온 관습과 문화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것들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 못하겠지만 조금은 나를 억압하는 이미지들로부터 벗어나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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