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순간 정신적인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종종 벌어지는 일이 네흘류도프에게도 일어났다. 처음에는 이상하고 역설적이기도 하며 심지어는 농담처럼 보이던 것들이 점차 삶의 확신으로 나타났고, 결국은 그에게 있어 가장 단순한 부동의 진리가 되었다. 그래서 인류가 고통받는 그 죄악으로부터 구원받은 수 있는 유일하고 확실한 방법은, 하느님 앞에서 사람들은 언제나 죄인이며 따라서 다른 사람들을 처벌한다든지 교화할 능력을 부여받지 못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임을 이제 명확히 깨닫게 되었다.


마태복음18장을 읽던 주인공 네흘류도프에게 일어난 각성의 순간이다.

왜 우연히 펼친 성경에서 마태복음18장에 끌려 들어갔을까?


"그러나 나를 믿는 이 보잘 것 없는 사람들 가운데 누구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사람은 그목목에 연자 맷돌을 달고 깊은 바다에 던져져 죽는 편이 오히려 나을 것이다."(6)

라는 구절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자신으로 인해 비참한 삶을 살아왔고 무죄함에도 죄수의 신분이 된 여인 마슬로바에게 참회하기 위해 유형지까지 따라가면서 네흘류도프는 동행하는 죄수들을 보며 고뇌한다. 저마다 유형수가 된 이유가 무지하고 가난함에서 비롯된 것들이었다. 특히 무죄한 자들이 유형지로 끌려가는 모습을 보면서 부조리에 대한 질문을 던지게 된다. 가난과 무지한 농민들, 마슬로바와 같이 무죄하나 힘이 없는 자들이 그에게는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인 것이다. 그들을 죄짓게 하는 존재는 부패한 국가, 귀족, 자기와 같은 지주일 것이다.


탐욕과 죄가 가득한 사람들이 만든 법과 권력은 다른 작은 자들의 죄를 교화할 수 있는가? 죄를 죄로 다스릴 수 있는가? 네흘류도프는 질문을 던진다. 그리고 답을 찾는다.


「사회와 질서가 유지되는 것은 사람들을 재판하고 처벌하는 합법적인 죄인들이 존재하기 때문이 아니라, 이런 타락상에도 불구하고 서로 동정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이제 네흘류도프는 명확히 깨달았다.


그는 길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으러 나선 목자의 심정을 유형지의 정치범들의 동정과 사랑에서 보게 되었고 사랑만이 사회의 정의를 세우는 법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마슬로바의 결정은 어쩌면 네흘류도프를 훨씬 자유롭게 하고 그의 삶을 확장시켰다고 생각한다. 그 결정에 네흘류도프도 슬프고 당황했지만, 그녀의 결정 속에는 그를 향한 사랑과 더 큰 용서가 있었고, 그는 그의 삶을 앞에서 말한 약자들에게 헌신할 결심에 이를 수 있었다. 이것이 1만 달라트를 탕감 받은 자의 마땅히 해야 할 행동이고 용서받은 사람이 다른 사람을 용서해야하는 사랑의 원리인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할 것이 아니냐?> 33

 

그는 결심한다. 마슬로바에게 참회하기로 하면서 시작했던 일, 토지를 파는 일부터 시작했던 정의를 실천하는 일을 위해 계속 전진하고 확장시킬 것을 결심한다.


우리는 스스로가 생명의 주인이며, 생명은 우리의 쾌락을 위해 부여된 것이라는 착각 속에 살아간다. 그러나 그것은 분명히 어리석은 생각이다. 만일 우리가 세상에 보내졌다면, 그것은 누군가의 의지와 어떤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가 자신의 기쁨만을 위해 살기로 결정한다면, 주인의 의지를 이행하지 않는 포도밭 농부의 어리석음을 반복하는 셈이 된다. 주인의 의지는 이 계율들 속에 묘사되어 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계율을 실천할 때에만 지상에 신의 왕국이 건설되고 사람들은 그에 걸맞는 은혜를 입을 것이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것을 구하라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라고 하는데도 우리는 곁들여 받게 될 것만을 구하고 있으니아마 그것을 찾지 못할 것이다.

내 필생의 사업은 바로 이것이다이제 한 가지 일이 끝나고 다른 일이 시작되는 것이다.


 

네흘류도프는 진정한 자유와 새로운 생활 즉 부활의 삶을 살게 된 것이다.

톨스토이에게 있어 문학은 사상과 윤리를 제시하고 삶으로 실천하는 것이다. 톨스토이의 주인공들이 자신의 사상대로 살아가는 것처럼.

 


182512월에 러시아 귀족층 젊은 지식인들에 의해 데카브리스트 혁명이 일어난다. 이들을 12월 혁명당원(黨員)이라 한다. 러시아어()12월인 데카브리에서 유래했다.

나폴레옹 전쟁에서 승리한 러시아군은 파리로 입성하고(1815), 러시아 젊은이들은 파리에서 서유럽의 자유주의 사상과 정치에 영향을 받게 된다. 사실, 나폴레옹 전쟁에 참여한 러시아는 프랑스 혁명 발 자유주의가 제정러시아를 무너뜨릴 수 있다는 위기감 때문에 그것을 막기 위해 참전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군대의 젊은 장교들에 의해 혁명을 맞이했다.

이들은 왕정을 폐지하고 새로운 정치제도를 세우고, 전근대적인 농노제를 폐지할 것을 주장한다. 이 혁명은 실패하고 많은 당원들이 시베리아로 유배되었다. 이 혁명은 젊은 지배계층 지식인들에 의한 것이라는 데 의의가 있다. 러시아의 문학계도 이들과 연관되어 있고, 그 사상에 영향을 받았다. 푸시킨의 경우,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의 경험과 데카브리스트들과의 교유 등은 그의 형성에 큰 영향을 주었다.

고골리와 투르게네프, 곤차로프, 도스토옙스키, 톨스토이 등은 러시아 농민의 처참한 삶과 전제정치를 비판하는 글을 썼다. 데카브리스트 혁명의 정신이 19세기 문학에 그대로 녹아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로트만은 18세기 러시아 문학과 독자들의 관계양상을 책에 따라 살기라고 표현했다. “독자들에게 책을 읽을 것이 아니라 책에 따라 살 것이 요구되었다고 주장했다. 러시아인들은 개인성, 자유, 도덕을 포함한 거의 모든 종류의 철학적, 이념적 사유를 문학으로 표현했다. 18세기 이후(푸시킨 이후) 러시아에서 철학자나 비평가, 정치가나 법률가, 언론인이나 역사가가 담당했을 문제가 문학의 대상이 되는 두드러지는 현상은 제정러시아의 현실을 역으로 설명하는 것이라고 한다.

 

19세기 러시아 중엽에 비평가 벨린스키는 러시아인을 책을 읽는민족으로 정의한 바 있다. “오직 러시아 문학을 사랑하고 이해하는 자만이 러시아 인이 될 수 있다. 말하자면, 여기서 민족을 결정짓는 요인은 피도 계급도 아닌 독서의 재능인 것이다.” 19세기 러시아 문학의 작은 인간은 같은 계급의 프랑스인과 달리, 사회적 신분의 상승을 꿈꾸지 않는다. 그 대신 그가 꿈꾸는 것은 훌륭한 글쓰기이다. 러시아에서 작가는 언제나 일종의 비공식적 권력, 말하자면 두 번째 정부로 간주되어왔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실제의 통치자들(예카테리나 2세부터 레닌에 이르기까지)역시 부단하게 스스로를 문학가로 표상하려 시도해왔다. 레닌은 문학 비평가, 스탈린은 언어학자였으며, 흐루쇼프는 현대예술 비평가였고, 브레즈네프는 직접 소설3부작을 썼던 작가였다. 요컨대, 문학이면서 동시에 언제나 문학보다 언제나 문학보다 어떤 것이어야 했던 러시아 문학은 철학적 사유의 시험대이자 사회 변혁을 위한 프로그램이었으며, 민족의 과거를 이해하는 방법이자 미래를 향한 예언의 기초였던 것이다.

-김수환, 책에 따라 살기-유리 로트만과 러시아 문화, 25~26p

 

삶과 예술을 가르는 경계를 고의로 뚜렷하게 긋지 않는그들의 태도를 가리켜 벌린은 윤리적이라고 말했다. 이러한 태도가 현대문학에 익숙한 우리들에게는 지나간 시대의 계몽주의적인 것으로 읽혀질 수 있다. 그럼에도 문학을 읽은 뒤, 삶이 뒤따르는 것이야 말로 살아있는 독서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이런 문장을 쓰고 있는 것이 부끄럽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책만 읽을 뿐 뚜렷한 삶의 궤적이 없는 듯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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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미 2021-05-11 20:53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책에 따라 살기>표지가 눈에 확 들어옵니다. 전쟁직후 모습인가봐요? 어디선가 본것 같기도하고요. 저 상황에 책을 둘러보고 있다니...ㅠ 러시아 문학을 사랑하는 저의 일부는 러시아인♡ 좋은데요?!ㅋㅋㅋㅋ

그레이스 2021-05-11 22:52   좋아요 4 | URL
저도 표지를 보고 감동받았어요 ^^
예 미미님은 러시아인.

그레이스 2021-05-23 21:55   좋아요 1 | URL
2차대전 런던 공습때 폭격으로 무너진 서점의 모습이랍니다.
저도 어디서 봤나 계속 생각 중이었는데 찾았어요
<독서의 역사>에서^^

미미 2021-05-23 22:21   좋아요 0 | URL
와 감사합니당~^^♡

mini74 2021-05-11 21:30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전 어릴 적 가요무대에서 나오던 카튜사의 순정? 이란 노래 들으며 카튜사가 누굴까 궁금했던 기억이 나요. 그런 문장을 쓰고 잠시 다짐 ㅎㅎ 하는 것만으로도 훌륭하다 생각합니다 *^^*

그레이스 2021-05-11 22:53   좋아요 5 | URL
고민의 흔적이 삶에 배어들겠죠?!

그레이스 2021-05-11 22:51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어제 기호학 책 얘기 나누다가...
오늘 로트만을 인용하게 되네요.^^

새파랑 2021-05-11 22:58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톨스토이 <부활> 정말 좋아요~! 이 책 읽고 나서 책임질 줄 아는 삶에 대해서 생각했었는데, 다시 까먹고 살지만 ㅜㅜ 삶이 뒤따르는 독서를 하고 싶지만 쉽지는 않은 같아요. 저도 다짐만^^

그레이스 2021-05-11 23:10   좋아요 3 | URL
하지만 우리는 삶이 뒤따르지 못하게 하는 세상보다는 깨달은 내용대로 살 수밖에 없는 불가피성에 기울어진 사람들이라고 생각합니다.^^

겨울호랑이 2021-05-12 00:1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톨스토이 작품에 강조되는 ‘그리스도의 사랑‘ 은 갑작스럽게 전류처럼 다가가는 경우가 많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불교식으로는 ‘돈오돈수‘가 될까요... 분명 아름다운 이야기이지만, 감작스럽게 모든 갈등을 뒤덮으며 사랑으로 마무리 짓는 부분이 개인적으로는 ‘마땅히 해야하는‘ 당위로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레이스 2021-05-12 01:04   좋아요 3 | URL
예 톨스토이 작품에는 대부분 그렇죠.
전쟁과 평화도, 안나 까레니나도 사랑이 모든 것을 덮는 내용이 나오죠.
갑자기 설교조가 삽입되기도 하구요.
사랑은 톨스토이의 주된 사상이었다고 생각해요. 삶(사상)이 문학이고 문학이 삶이길 추구했던 작가여서 그런듯요.
저도 당위로 느껴져서 그 부분은 소설 같지가 않았어요. 글은 아름답지만.
그런데 그가 추구하는 사상을 실천하는데 엄청난 노력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면서 생각이 달라졌어요. 그 현실과 사상사이의 간극을 뛰어넘는 것이 부자연스럽게 느껴질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죠.

겨울호랑이 2021-05-12 07:27   좋아요 2 | URL
그렇군요... 개인적으로 톨스토이를 좋아하지만, 작품 인물을 통해서 직접적으로 느껴지는 ‘톨스토이‘의 그림자는 썩 마음에 들지는 않습니다. 마치 고대 그리스 비극의 의 ‘데우스 엑스 마키나‘같은 느낌이랄까요... 대체적으로 저는 작가와 작품을 구분해서 읽으려 하는 편입니다만, 그레이스님 말씀을 듣고보니, 톨스토이는 다르게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덕분에, 새롭게 배워 갑니다. 감사합니다.^^:)

그레이스 2021-05-12 10:53   좋아요 2 | URL
톨스토이는 톨스토이로, 고골리는 고골리로, 도스토예프스키는 도스토예프스키로 읽죠.
작품은 도스토예프스키에게 더 끌려요!
댓글 주셔서 덕분에 저도 이런저런 문학에 대한 사유를 할 수 있어 감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