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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절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60
임레 케르테스 지음, 한경민 옮김 / 민음사 / 2018년 11월
평점 :
『운명』에 이어 『좌절』은 지속되는 삶의 이야기다. 『운명』을 읽지 않고서는 『좌절』을 이해할 수 없다. 『좌절』을 읽고 나면 『운명』의 의미들이 생성되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전작 『운명』의 원제는 Sorstalanság이다. 직역하면 ‘sors운명+talan없는+ság것’이라고 한다.(299p 『운명』 민음사) 주인공이 ‘운명이란 없다.’ ‘자신이 곧 운명’이라고 했던 절규를 떠올리게 한다. 군중과 함께 걸어갔고, 화물차에 실리고, 가스실로 가는 행진에서 벗어나고, 지옥에서 살아온 것을 운명이라 여기는 것은 가혹하다. 자신으로 계속해서 살아가겠다는 결심이 『좌절』에서 이어지고 있다.
1장(157p)에서 시작되는 소설의 주인공 쾨베시는 공항에 도착한다. 낯선 남자에게 묻고서야 그곳이 고향 헝가리의 공항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쾨베시의 정체성과 그곳에서의 삶에 대해 암시한다. 공항 대합실에서 세관 절차를 기다리는 동안 공포를 느끼고, 이 공포는 과거를 회상하게 한다. 살아남은 그는 죽음의 요구를 거역한 것으로 느낀다. 이 죄의식은 그의 삶과 모든 행위에 해를 끼쳤다. 절차를 마치고 정해진 거주지로 가는 길에 피아니스트를 만난다. 그는 거리의 사람인 듯 보인다. 그들이 앉았던 벤치, 피아니스트가 기다린다는 화물차는 죽음과 관련 있다. 수용소를 떠난 그의 거주지에도 죽음은 도처에 있다. 그가 사는 집 소년의 자살처럼.
쾨베시는 유대인으로 태어났고, 아우슈비츠로 끌려갔고, 죽음에서 제외된 작가 자신이다. 고국으로 돌아와 위(上)의 결정에 따라 기자, 공장노동자, 홍보부 직원으로 보내지고 해고되기를 반복한다. 어디로 가야할지 모르던 쾨베시는 작가 베르그를 찾아간다. 쾨베시는 베르그가 쓰고 있는 소설에 관하여 질문을 하고, 두 사람은 대화를 나눈다. 무엇에 관하여 쓰느냐는 질문에 베르그는 “은혜”에 대하여 쓴다고 한다. “은혜”는 “필연적인 것”이고 “필연적이지 않은 것”은 “사는 것”(397p)이라는 베르그의 말은 그를 비껴간 죽음에 매여 있음을 의미한다. 생존자의 죄의식이다.
베르그의 소설은 독자를 향한 작가의 말로, 연극의 방백(傍白)을 떠올리게 하는 형식으로 되어있다. ‘사형 집행관’이란 제목이 붙어있는 그 글은 수용소와 생존의 경험을 통해 인간의 본질에 대한 질문을 하고 있다. 많은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범죄는 한 사람을 살해함으로 시작된 자신의 폭력성과 다를 바 없다는 이야기다. 단지 자신은 연기하라고 던져진 연극배우가 아니냐는 질문과 도덕적 평가는 절대적일 수 없다는 말에 쾨베시는 당혹해 한다. 쾨베시는 당신은 “사형수입니까? 사형집행관입니까?” 라고 질문한다. “둘 다”라고 대답하는 베르그에게 그럼 주인공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 당신의 글은 무엇이냐고 질문한다. “유예, 도피, 핑계”라고 한다. 사실 이해하기 힘든 이들의 대화는 오랫동안 미궁에 빠지게 한다. 쾨베시가 돌아와 베르그에게 쓴 편지를 읽기 전까지.
쾨베시는 간수가 되어 독방에 갇힌 죄수에게 휘둘렀던 폭력에 대해 쓰며, 베르그에게 대답한다. 자신이 폭력을 휘둘렀던 이 에피소드가 3만 명의 주검으로 가는 길을 연 것으로 보이지만 아니라는 것이다. 처음의 살인이 불가피했다고 학살을 정당화할 수 있는가?라는 의미로 읽힌다. 베르그의 전혀 다른 의미의 ‘은혜’는 사실 그에게 영겁의 벌과 같다고 쓴다. 은혜가 필연이고 살아가는 것이 필연이 아니라면 그가 지금 살고 있는 것은 벌이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베르그의 극단적인 사유를 비판한 쾨베시의 생각은 정신을 잃고 부축을 받으며 걷고 있는 베르그의 모습으로 증명되는 듯하다. 유예나 도피, 변명이 아닌 그의 실존을 위한 글쓰기의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
쾨베시는 헝가리의 국경이 열렸으니 화물열차를 타고 탈출하자는 시클러이의 제안을 뿌리친다. 화물열차는 자신의 의지가 아닌 곳으로 끌고 가는 메타포적 언어다. 그는 남겠다고 한다. 자신의 언어로, 자신만이 쓸 수 있는 소설을 쓰는 것이 진정한 자유이기에. 더 이상 밀려갈 수 없다. 의지대로 살아가는 것이다. 거리에서 살면서 화물차를 기다리는 피아니스트, 탈출하는 시클러이, 글을 씀으로 ‘유예, 도피, 변명’하는 베르그, 자유를 위해 남아서 자신의 언어로 글을 쓰기로 하는 쾨베시, 이 글을 쓰고 있는 노인 모두 임레 케르테스 자신이다.
전반부 150페이지 정도는 이 글을 완성하고 있는 노작가의 이야기다. 노인은 오랫동안 넣어놓고 보지 않았던 서류들을 꺼내 읽는다. 자신의 소설과 출판사의 거절 편지를 읽으며 글을 쓰던 순간을 회상한다. 당시에 작가는 “아주 작은 자극만 있어도 과거로 돌아갈 수 있었고”, 아우슈비츠는 “소화되지 못한 고기완자”처럼 “그의 위장 안에”(78p) 있었다. 그것은 예기치 않은 순간에 그의 안에서 솟아올랐다. 쓸쓸한 지역을 볼 때, “황량한 공장 지대나 해가 쏟아지는 길, 집의 뼈대로 세워 놓은 시멘트 기둥, 동물의 냄새나 타르와 나무판자의 역한 냄새를 맡는 것으로도 충분했다.”(98p)
소설의 어느 지점에서 얼마나 힘이 들었으며 많은 고민을 했었는지, 어떻게 영감이 떠오르고 문장을 써내려갔는지 기억이 살아난다. 글을 쓰면서 아우슈비츠에 대한 기억이 생생해질수록 글은 점점 비참한 빛깔을 띠었고, 기억에 몰두하는 한, 작가는 소설을 쓸 수 없었다. 반대로 소설을 쓰기 시작하면서 기억이 중단되고 변화되었다. 경험을 쇠약하게 만들면서 글쓰기가 진행되었다. 그것은 “개인적인 것으로부터 사건 속으로, 보편적인 일 속으로”(99p) 들어가는 도약(跳躍)이었다.
“소설은 그 단순한 본성으로 인해 무언가를 중재할 때에만 소설이라고 불린다.”(99p) 그도 중재하기를 원했다. 다른 무엇보다 그 자신을 중재하기 원했다. 그를 내리누르는 짐이 너무 무거워서. 하지만 인간은 결코 자신을 위해서 자기 자신을 중재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를 아우슈비츠로 데리고 간 것은 “소설 속의 기차가 아니라 현실의 기차”(100p)이기 때문이다. 그러다면 그는 무엇을 위해 글을 썼을까? 그 일의 본래적인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하고 질문한다.(101p)
이제 그는 서류 뭉치들에서 다른 습작에서 그가 고통스러운 시간들을 지냈음을 짐작하게 된다.
“모든 확신을 잃어버렸음에도 내가 존재하고 있음을 나 자신에게 증명해야 했다. 나는 계속해서 자살을 시도했다. 실제로도 시도하고 상징적으로도 시도했다. 때로는 실어증을 동반한 신경 쇠약증을, 때로는 공격적인 태도를 선택했다.”(124p)
이런 자신을 객관화시켰다. 그의 개성을 대상으로 변화시키고, 자신의 비밀을 보편화하여 약화시키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현실을 상징으로 증류시켜 버렸고, 소설 속에 자신을 이식시켰다. 그것은 자신의 동사를 잃어버린 것이고, 존재를 부정하는 것처럼 여겨졌을 것이다.
노인은 서류장에서 “아이디어, 원고 초안, 미완성 원고”(153p)라고 메모가 적힌 다른 노트를 꺼낸다. 이 초고를 노인이 완성시킨 내용이 1장부터 8장까지 쾨베시의 이야기다.
퀘베시(작가)는 고국에 남기로 선택했고 투쟁했다. 거절된 원고를 들고 좌절감에 몸을 움츠리는 순간이 오더라도, 글을 쓰는 동안에 겪어 낸 것들이 그 소설보다 더 중요했다. 투쟁은 좌절을 넘어선다.
“자기 자신과 그 운명과 마주하는 자유, 주변을 압도한 힘, 부득이하게 파묻힌 음모. 만일 이것이 작품이 아니라면 대체 어떤 것이 인간의 작품이란 말인가?”(483p)
작가의 실존적 글쓰기는 삶이 지속되는 한 완성되지 않고 계속될 것이다. 작가 스스로는 중재하지 못하더라도 그 글을 읽는 사람은 중재할 수 있다. 자신을 객관화시켜 인류의 보편성으로 이식시키는, 그럼에도 생생하게 살아있는 의미를 전하는 작가의 고통스런 투쟁이 있기에 나는 여전히 책을 읽는다. 어려웠다. 책을 덮고도 의식은 작가의 글들 속에서 길을 찾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