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의 서두는 영화의 오프닝 시퀀스를 떠올리게 한다.

대서양 상공에 기압계상 최저기압이 자리하고 있었다.”로 시작한 묘사는 카메라처럼 대기와 달과 태양계로 상승했다가 다시 하강해서 대기 중의 수증기 장력은 최고치를 나타냈고, 대기 습도는 낮았다고 언급한다. 갑자기 땅으로 쑥 내려와 자동차들의 질주를 실타래 같은 보행자 무리를 앵글에 담는다. 그 이미지 안으로 소리가 삽입된다.

 

한층 강렬한 속도의 선들은 다소 느슨하게 움직이는 보행자 무리를 가로지르는 순간 굵어졌다가, 나중엔 더 빨라지더니 약간의 진동 끝에 다시 고른 리듬을 유지했다. 수많은 소리들이 철선처럼 억센 하나의 소음으로 뒤엉켰다. 그 소음에서 뾰쪽한 끝이 여기저기 튀어나왔고, 소음을 따라 날선 모서리가 길게 이어지다가 다시 평평해졌으며, 소음에서 명확한 소리들이 산산이 부서져 공중으로 흩어졌다. …… 지그시 눈을 감고 이 소음에 귀를 기울이면 지금 자신이 제국 수도이자 황궁이 자리 잡은 빈에 있음을 알아차릴 것이다.(111p)”

 

정말 기가 막힌 표현들이다. 19138월의 빈이라는 시간과 장소를 설명하기 위해 동원된 시청각적 묘사들은 처음부터 작가가 예사로운 사람이 아님을 알려준다. 이 작품 전체의 글에 담겨있는 비유와 상징 언어들은 눈물이 날 만큼 아름답다.

 

그렇게 작가의 앵글은 자동차 사고를 포착하고 이것을 구경하는 구경꾼들 무리들 중 한 여인에게 포커스를 맞춘다. 이 사고를 목격하고 그 원인을 제동거리라는 과학적 설명을 해주는 행인1과 그 사고원인을 듣는 행인2(중년여성)의 안도는 과학의 진보시대를 사는 사람들의 심리상태를 보여준다. 무엇인가 설명 가능한 것에 편안함을 느끼는 현상을 보여준다. 한편, 이 사고는 사람들의 믿음과 달리 1914년의 전쟁을 암시하는 듯 불안하기도 하다.

 

이것이 어쩌면 그 시대가 요구하는 특성 중의 하나일 것이다. 진보하는 과학적 사고에 발맞추어 사고하도록 요구받는 특성! ‘특성이란 그가 속한 세계에서 존재가 가져야 할 것으로 요구되는 정체성이나 자질 같은 것으로 이해된다. ‘특성 없음은 그것을 거부하는 것이다. 주인공 울리히는 실제로 특성을 거부하고 가능성 감각을 추구한다. “열린 문을 잘 지나가려면 문에 단단한 테두리가 있다는 사실에 유의해야 한다.(123p)” 그의 아버지 노교수의 좌우명은 시대의 특성에 부응하는 현실적 감각을 가진 인간에 대한 적절한 비유다. 그에 반하는 것이 가능성 감각이다. 어느 곳에서 어떤 일이든지 일어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받아들이고 경계를 넘어 새로움을 추구하고 창조한다. 그는 사회에서 환영받을 천재성과 특성을 사용하지 않는다.

 

그런 그를 자극한 것이 살인범 모스부르거다. 모스부르거는 사회적 관습, 도덕, 법과 같은 어떤 규범으로도 포획되지 않는 사람이다. ‘특성없음의 왜곡되고 극단적인 존재다. 울리히의 모스부르거에 대한 관심은 잊혀지지만, 그의 친구인 화가 클라리세는 모스부르거에게서 영감을 받는다. 그녀는 니체의 해를 생각해내고 살인과 초인을 연결시키는데까지 나아간다. 클라리세는 디오니소스적 인간의 극단적인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그녀의 이러한 정신은 남편 발터를 지배한다. 발터의 열등의식은 클라리세의 욕망과 결합되어 울리히를 살인하라고 압박하는 꿈으로 나타난다.

 

이 소설에는 울리히와 연결된 4명의 여성이 등장한다. 보니파티아, 디오티마, 클라리세, 아가테이다

보니파티아는 울리히의 정부이고 가벼운 성적 상대일 뿐이다. 그녀의 도착적 성충동을 관찰하는 울리히의 시선에서 나는 오히려 그녀의 고독을 본다

디오티마는 평행운동의 중심에서 준비 위원회를 모집하고 주도한다. 본명이 에르멜린다 투치인 그녀를 디오티마라 부르는 것에 상징성이 있다. 향연에서 소크라테스는 사랑에 관한 디오티마의 말을 인용한다. 지혜로운 여인이란 뜻일 테다. 울리히와 사촌관계인 그녀는 상징적 지도자나 공허한 이상주의자로 인식된다. 그녀가 주도한 평행운동은 실패로 끝난다.

클라리세는 어릴적 친부에게서 받은 상처를 안고 있다. 그녀의 결핍은 니체적 의지에 전도되어 초월욕망으로 변형된다. 그녀의 욕망은 광기를 띈다. 울리히는 그녀에게 이념이란 페티시와 같다고 생각한다. 그녀는 모스부르거에 집착하고, 그를 만나려고 시도하지만 실패한다.

아가테는 울리히의 이란성 쌍둥이로 마치 울리히에게 그동안 잊혀져 있던 듯 갑자기 등장한다. 아버지의 장례 때문에 오누이는 재회한다. 아버지의 가부장적 권위 아래 억눌린 삶을 살았던 그녀는 첫 번째 남편과 사별하고 다시 재혼했다. 그녀는 현재의 삶에 만족하지 못하고 불행하다. 울리히와의 대화를 통해 자신의 욕망을 확인하고 자유를 찾아 오빠와 함께 살기 위해 남편과의 이혼을 결심한다. 울리히의 사상, 책을 통해 영향을 받아 진정한 자유가 주는 삶을 꿈꾸고 실행하지만, 한계에 부딪친다.

이들은 각각 여성으로서 상처를 갖고 있고 억압된 욕망을 발현시키려는 나름대로의 길을 찾지만 모두 실패하고 있다. 이 여성들은 시대가 요구하는 특성을 갖도록 억압당하고, 그것을 거부하기에는 신체적, 사회적으로 취약한 존재들이다. 이들의 욕망, 허영, 광기, 의지를 마주하면서 울리히의 사유는 변하고 발전한다. 그녀들과의 대화나 관계는 울리히의 사유에 변화를 가져오는 촉매역할을 한다.

 

울리히에게 중요한 사람은 없는 듯하다. 사람들을 대하는 고정된 태도나 사상이 없다. 그러기에 아른하임 앞에서는 디오니소스적이고, 클라리세 앞에서는 아폴론적이다. 이들과의 대화(1권)에서는 니체의 『비극의 탄생이 오버랩된다. 그가 희구하는 사상은 그의 시대 사유를 벗어나는 어떤 것이기에 그런 듯하다. 디오티마와의 이야기 중 다이아몬드에 대한 비유가 힌트를 준다. 아시아와 아프리카에서 발견된 다이아몬드 둘 다 다른 환경에서도 그 속성이나 사용가치가 변하지 않음을 들어 인간의 고유함을 설명한다. 그 변하지 않는 고유한 개성을 찾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가 특성 없음을 견지하고 가능성 감각을 열어놓는 이유는 이 본래적 특성을 찾기 위함이다.

 

특별히 고향에서 재회한 울리히와 아가테는 대화를 통해 정신적 합일의 순간을 맛본다. 아가테가 묻고 울리히가 답하는 식의 대화는 니체를 떠올리게 한다. 그는 도덕에서 무엇이 비본질이고 본질인지를 알려면 습관이 무엇인지부터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울리히와 아가테의 대화는 구체적으로 니체의 선악의 저편이나 도덕의 계보를 연상시킨다. 도덕은 외부로부터가 아닌 인간의 내면에 존재하는 것이며, 이것을 지킬 힘 역시 그 내면에 있고, 사회의 도덕적 와해는 개인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것이라는 의미로 읽힌다. 그는 선악의 문제와 같은 이분법적 논리를 거부하고 해체한다. 이런 해체는 무화시키기 위함이 아니라 존재를 둘러싼 시대와 세계의 경계를 넘어 인간의 본래적이고 고유한 특성을 찾기 위한 것이다. 울리히는 그것을 사랑이라 깨닫고 아가테와의 동거를 통해 완벽히 이루려는 꿈을 꾼다. 외부의 그 어떤 영향도 받지 않고 자유함 속에서 맛보려했던 천년의 제국이라 이름붙인 그 세계는 종말론적인 빛을 띄고 의미만을 전달한 채 실패한다. 실패할 수밖에 없다. 1960년대 해체주의나 현대 철학에 가까운 사유를 담고 있는 이 작품을 1932년에 썼다는 데 작가의 천재성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동시대 니체의 사상에서 앞으로 나타날 사상을 전망한 것일까? 그는 철학자가 되었어야 하지 않을까?

 

산중의 쓰러진 나무나 벤치에 앉아 풀을 뜯어먹는 소떼를 보면서도 한순간에 다른 삶으로 옮겨가는 듯한 특별한 경험을 할 수 있어!(150p,3권)”

 

니체의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연상하게 하는 말이다. 울리히는 아가테에게 습관을 벗어나는 순간이 있음을 이야기한다. 어떤 순간적 깨달음의 상태, 혹은 다른 세계가 열리는 체험의 순간이 그들의 대화 중 찾아온다. 그들이 경험한 환영(幻影)”과 대화의 내용은 니체의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의 낙타에서 사자로 사자에서 아기로 변화하는 변용(Verwandlung)”을 연상시킨다.

 

인내심 많은 정신은 이 모든 무겁기 그지없는 짐을 짊어지고 그의 사막을 달려간다. 가득 짐을 실은 채 사막을 달리는 낙타처럼.

하지만 고독하기 그지없는 사막에서 두 번째 정화가 일어난다. 여기에서 정신은 사자가 된다. 정신은 자유를 쟁취하려 하고 사막의 주인이 되고자 한다. 자유를 쟁취하고 의무 앞에서도 신성하게 아니요, 라고 말할 수 있기 위해서는, 형제들이여, 사자가 되어야 한다.…… 정신도 한때 너는 해야 한다를 가장 신성한 것으로서 사랑했다. 하지만 이제 정신은 가장 신성한 것에서도 미혹(迷惑)과 자의(恣意)를 찾아내야 한다. 그의 사랑으로부터 자유를 강탈해 내려면 말이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강탈을 위해 사자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아이는 순진무구함이며 망각이고, 새로운 출발, 놀이, 스스로 도는 수레바퀴, 최초의 움직임이며, 성스러운 긍정이 아닌가. 그렇다. 창조라는 유희를 위해서는, 형제들이여, 성스러운 긍정이 필요하다. 이제 정신은 자신의 의지를 원하고 세계를 상실한 자는 이제 자신의 세계를 되찾는다.(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1부 차라투스트라의 가르침,‘세 가지 변화에 대하여’, 35-38p, 민음사)“

 

울리히와의 대화 중 자유를 쟁취하려는 사자가 된 아가테는 빈으로 오고 두 사람은 완전한 자유와 사랑만이 존재하는 천년제국을 이루려 한다. 그러나 결국 그녀는 완벽한 자유보다는 의무가 주어진 삶에서 더 편안함을 느낀다. 이 과정에서 칸트가 잠깐 고개를 내밀기도 한다.

 

1866년 프러시아와 오스트리아의 7일 전쟁 이후 통일된 독일과 오스트리아는 1879년 동맹을 맺는다. 1879년 독오동맹 이후 독일과 오스트리아는 대등한 동맹에서 의존적 동맹으로 그 관계가 이어진다. 그 관계는 경쟁적이지만 필요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다. 반면 오스트리아의 통치 아래 있던 발칸반도 슬라브족의 독립요구가 높아지고, 독일은 오스트리아를 지지한다. 오스트리아 내에서도 범게르만민족운동과 범슬라브주의가 충돌하면서 긴장상태가 이어졌다. ‘평행운동은 이런 배경에서 추진되었다. 민족주의, 국가주의, 제국주의, 종교적 권력 하에서 평행운동과 같은 거대 담론이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모임을 만들고 이끈다. 그러나 평행운동거대 담론이 얼마나 공허한지를 드러내는 소설의 장치라고 할 수 있다. 이 담론은 이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포섭하지 못한다. 심지어 이 모임을 계획하고 주도하는 자들조차 소외되고 있다. 20세기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몰락 직전을 배경으로 각기 다른 시대정신을 갖고 있는 인물들이 자신의 혈통, 민족, 사상을 지지해줄 무리와 모임 속으로 재편된다. 또한 모스브루거와 같이 어떤 담론 어떤 가치로도 포획되지 않는 존재도 등장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욕망의 발산과 자유를 원하지만 그것을 이룰 수 있는 경계를 넘지는 못한다. 아가테가 실망하고 교외로 나갔을 때 그녀만 하고 싶은 일이 없었다.(473p,3)”고 깨닫고, 세상은 그녀 없이도 완벽하다고 느낀 소외감은 당시 대부분 사람들의 것은 아니었을까? “나는 당신들에게 아무것도 아니었노라!(475p,3)”라고 한 시인의 말을 인용하는 아가테의 감정은 사람들의 것은 아니었을까?

 

길거리의 포고문과 광고를 읽는 울리히는 일상적 시민 세계에 대한 허기(313p, 3)”를 그것들로 채우려고 한다. 이 의도에서 울리히가 일상적 시민들과는 이격된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 그 벽보판의 내용들은 당시 유럽, 혹은 오스트리아의 문화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시대가 요구하는 특성, 특히 자본주의 정신이 지배하는 사람들의 욕망을 드러낸다. 사람들은 아마도 이 광고를 보면서 아가테가 느끼는 소외나 불안을 느낄 것이다. 울리히는 도덕의 부재, 삶의 실재성이 가져오는 아름다움에 대한 감상을 남긴다. 그야말로 가능성 감각을 갖고 있는 그만이 할 수 있는 사유다.

 

시대가 요구하는 특성을 거부하고 살아가는 세계 속의 인간은 평온함을 지켜내기가 어렵다. 철학적 사유와 실천을 견지하며 살아가더라도 급변하는 세계와 그로부터 압박해오는 요구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AI’는 이 시대의 화두이자 여러 담론을 파생시키는 제시어가 되었다. 우리는 인간의 전문성을 박탈당하는 미래를 향해 가고 있다. 전문성 뿐 아니라 인간을 규정하던 특성들도 점점 의미를 잃어가고 있다. 친절, 인내, 관용, 배려와 같은 미덕을 장착한 인공지능이나 휴머노이드가 돌봄이나 공공서비스 영역에서 활용되고 있다. 또한 사적인 인간관계에서 사랑을 교류하게 될 미래를 전망한다. 이 시대는 인간에게 어떤 특성을 요구하게 될까? 그러면 나는 무엇을 거부해야 할까? 그 시대 특성 없음이란 그리고 또 다른 세계를 향한 해체는 어디까지 용인하게 될까? 아직 상상이 안 되지만 이상하게 암울해진다.

 

철학적 에세이즘이라고 이름붙일 만큼 철학적 질문들이 제시되는 소설이다. 이 책을 통해 다른 방향에서 본 니체를 조금은 더 이해할 수 있었다. 목적론적 세계관을 갖고 있는 나에게는 이해에서 그칠 수밖에 없는 지점이 많은 독서였다. 하지만 더 확장된 사유를 통해 인간의 본래적 특성이 무엇인가를 생각해본 계기가 되었다. 인간의 고유함은 사랑에 있었다.


* 니체 전집이 있으나 번역도 활자도 읽기가 불편하다. 일단 <비극의 탄생>만 새것으로 나머지는 장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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