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4년 1월 21일 블라디미르 레닌(Vladimir Lenin)이 사망했다. 올해 2024년은 레닌 서거 100주년이다. 20세기 레닌은 혁명의 상징과도 같은 인물이었다. 이후 등장한 수많은 현실 사회주의 국가들에서 레닌은 위대한 혁명가이자 이론가로서 존경받았다. 레닌이 죽고 난 다음 소련 공산당에서 최종적으로 최고지도자의 자리에 오른 인물은 이오시프 스탈린(Joseph Stalin)이었다. 레닌 사후 소련 공산당 내에서는 당내투쟁이 있었다. 트로츠키(Trotsky), 부하린(Bukharin), 지노비예프(Zinoviev) 그리고 스탈린이 경쟁했는데, 스탈린이 승리했다. 


이에 대해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들이 있다. 바로 트로츠키의 이데올로기를 따르는 트로츠키주의자(Trotskyist)들이다. 트로츠키주의자들이 스탈린에 대해 비난할 때 사용하는 소재 하나가 있다. 바로 ‘레닌의 유언’이다. 즉, 스탈린이 레닌의 유언을 조작했다거나, 스탈린이 레닌의 유언을 제대로 따르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러한 트로츠키 및 트로츠키주의자들의 주장들은 서구의 부르주아 학자들도 잘만 인용 및 이요하며 스탈린을 헐뜯기 바쁘다. 이 부분에 대한 반론도 있다. 과연 트로츠키와 트로츠키주의자들이 말하는 이른바 레닌의 유언의 진실이 무엇인지 보도록 하자.


사실 레닌은 트로츠키에 대해 안 좋은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이를 알기 위해선 19세기 말 20세기 초 러시아 사회주의 세력들에 대해 알 필요가 있다. 1898년 벨라루스 민스크에서 노동자계급해방투쟁동맹 전 러시아 대회는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 창당의 기초를 마련했다. 1903년 영국 런던에서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이 창당됐고, 이후 당 내에서 레닌과 마르토프를 중심으로 파가 분리됐다. 당시 레닌이 이끄는 세력을 러시아어로 다수파를 의미하는 볼셰비키라 불렀고, 마르토프가 이끄는 세력을 러시아어로 소수파를 의미하는 멘셰비키라 부르게 됐다. 당시 트로츠키는 레닌을 비방하고 헐뜯는 멘셰비키파에 있었다. 트로츠키가 볼셰비키로 노선을 바꾼 것도 1917년 러시아로 귀국한 다음이었다.


트로츠키가 1917년 10월 혁명에 참가했으며 적백내전에서 붉은 군대를 지휘한 공로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공로가 스탈린에게 전혀 없는 것일까? 그것 또한 아니다. 스탈린 또한 적백내전에서 소련의 붉은군대를 지휘했다. 특히나 1919년 5월에는 유데니치가 지휘하는 백군에 맞서 페트로그라드의 방어를 지휘하기 위한 전권을 볼셰비키로부터 물려받았다. 또한 차리친(현재 볼고그라드)에서 그는 붉은군대 지휘관으로서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그리고 1921년부터 1923년 동안 볼셰비키 공산당에서 레닌 다음의 2인자는 스탈린이었다. 


스탈린은 1922년 4월 23일 레닌의 추천에 의해 총서기장에 임명됐고, 당시 중앙위원회, 정치국, 조직국 위원이자 볼셰비키 공산당의 총서기장이었던 인물은 스탈린이 유일했다. 트로츠키주의자들은 스탈린이 레닌의 유언을 조작했다고 자주 주장한다. 그렇다면 이 진실은 무엇일까? 


우선 사회주의 혁명을 성공시킨 이후 레닌의 건강상태를 알 필요가 있다. 1917년 러시아 혁명을 성공시킨 레닌은 1년 뒤인 1918년 8월 러시아 사회혁명당원인 핀야 카플란의 암살 시도 때문에 총상을 입었다. 그 때문에 1922년 4월 23일 총탄들의 하나를 처치하기 위한 외과수술을 받았으며, 1달 뒤 그의 오른쪽 손과 발이 마비됐다. 1922년 12월 16일 레닌은 두 번의 위험한 발작을 겪었고 12월 23일에 또 한 번의 발작이 있었다. 1923년 3월 10일 레닌은 새로운 발작 때문에 신체 절반이 마비되었고, 언어 능력도 앗아갔다. 그렇게 해서 레닌은 더 이상 정치적 활동을 할 수 없게 되었으며, 1924년 1월 21일 사망했다. 따라서 레닌은 1922년부터 생과 사를 오갔으며, 유언을 작성했다. 그 유언으로 알려진 문서가 있는데, 이 유언이 작성된 문서의 시점을 볼 필요가 있다.


소위 ‘레닌의 유언’이라고 알려진 문서는 1922년 12월 23일과 31일 사이에 구술됐다. 1923년 1월 4일에 한층 보충되었으며, 이는 그가 발작을 겪어 건강상태가 안 좋던 시기였다. 특히나 공산주의의 적들이 ‘레닌의 유언’이라고 말하는 것은 1922년 12월 23일부터 25일까지의 기간 동안 구술된 것이다. 1922년 12월 22일 스탈린은 레닌에게 선별적인 정보의 조각들을 가져다 주는 것에 대해 전화로 레닌의 아내 크룹스카야를 힐책했다. 결과적으로 이 전화 통화가 크룹스카야로 하여금 카메네프에게 스탈린의 무례함에 대해 불평하는 글을 쓰게 된 원인이었다. 


그러나 서구의 부르주아 학자 내지는 작가들은 레닌의 유언에 집중했다. 여기서 서구 학자들은 레닌이 유언에서 트로츠키를 위해 스탈린의 제거를 요구했다는 것이다. 벨기에 왕립군사학교의 명예 교수인 앙리 베르나르는 다음과 같이 책에 썼다.


“정상적으로는 트로츠키가 레닌을 계승했어야 했다.... (레닌은) 그를 후계자로 여겼다. 레닌은 스탈린이 너무 잔인하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출처는 어디일까? 바로 트로츠키 자신이다. 트로츠키는 자신의 자서전에서 스탈린이 당에 숨긴 레닌의 유언과 관련해 분개했다. 그러나 1922년 12월 23일과 1923년 1월 5일 사이에 레닌이 구술한 서신을 보면 내용이 다르다. 아래의 내용을 보자.


“나는 중앙위원회의 신망을 두텁게 하기 위해, 우리의 행정 기구를 충분히 개선하기 위해, 그리고 중앙위원회 분파 간의 갈등이 당의 미래에 과도한 영향을 끼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반드시 그렇게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우리 당이 노동계급 출신에서 50명에서 100명의 중앙위원회 위원을 요구할 모든 권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것들은 ‘분열을 막는 방책’이 될 것이다. 나는 이러한 관점에서 안정성의 문제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들은 스탈린과 트로츠키와 같은 중앙위원회의 그러한 위원들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그들 사이의 관계가 분열의 위험에서 커다란 부분을 차지한다고 생각한다. 이론적인 부분에 대해 이야기하면 끝이 없다.”


뿐만 아니라 레닌이 진술한 전문을 보면, 스탈린이 크룹스카야에게 보인 태도를 비판하기는 했지만, 트로츠키가 지도자가 되어야 한다는 주장은 그 어디에도 없다. 레닌은 스탈린이 크룹스카야에게 보인 행동에 대해 비판적이었고, 1923년 3월 5일 새로운 서신을 구술했다.


“존경하는 스탈린 동지. 귀하는 전화상으로 나의 아내를 호출하여 질책하는 무례함을 저질렀습니다. 나는 나에 대해 저질러진 일을 쉽게 용서하지 않을 것이며, 나는 내 아내가 당한 것이 또한 내가 당한 것으로 생각한다는 점을 강조할 필요가 없습니다. 따라서 나는 귀하가 말한 것을 취소하고 사과하는 것에 기꺼이 동의하는 지, 혹은 우리 사이의 관계를 끊어버리는 것을 선호하는지에 대한 여부를 귀하가 신중하게 숙고하기를 요청합니다. (레닌)”


레닌은 이러한 구술 서신을 남겼지만, 역사학자 이안 그레이에 따르면 크룹스카야는 비서에게 그 서신을 스탈린에게 전달하지 말라고 요청했다. 그렇게 해서 스탈린에게 전달이 안됐던 것이다. 거기다 레닌이 진술한 유언에서 트로츠키에 대해 비볼셰비즘이라고 비난하고 카메네프와 지노비예프가 10월 혁명(레닌이 주도한 러시아 혁명) 동안에 했던 실수에 대해 우연적인 것이 아니었다고 말한 사실은 잘 알려지지도 않았다. 반면에 스탈린에 대해선 크룹스카야에게 보인 무례함을 지적하기는 했으나, 스탈린이 실수들을 했다는 것에 대한 단 한마디도 없었다. 참고로 트로츠키는 말년에 “스탈린이 레닌을 죽였다.‘는 억지스러운 주장을 했다. 앞서 언급한 벨기에 제국주의자 앙리 베르나르는 이와 같은 트로츠키의 억지주장을 다음과 같이 상상력을 추가하며 책에 서술했다.


“나는 이와 같은 사건의 경과를 어느정도 상상해본다. 레닌은 1923년 2월 말에 독약을 요구했고, 겨울이 다가오자 레닌은 서서히 회복되기 시작햇으며 그의 언어 기능은 돌아오기 시작했다. 스탈린은 권력의 다음 차례였다. 그의 목적이 가까워졌으나, 레닌으로부터의 나오는 위험은 훨씬 더 가까웠다. 이런 때에 스탈린은 지체 없이 행동에 옮겨야 되는 결심을 해야 했다. 레닌이 회복할 가망이 없다는 의사들의 이야기를 듣고 스탈린이 레닌에게 독약을 주었는지, 아니면 스탈린이 보다 직접적인 수단에 의존했는지는 나는 모른다.”


애초에 1923년 3월 6일부터 레닌이 죽을 때까지, 거의 완전히 마비되었고 말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의 아내인 크룹스카야와 그의 누이 그리고 그의 비서들은 그의 침대 곁에 있었다. 즉, 레닌은 그들 몰래 독약을 먹을 수 없었으며, 스탈린이 암살할 수 있는 상황이 전혀 아니었다. 그러나 트로츠키와 이를 받아 적는 부르주아 학자들은 이와 같은 상상력을 발휘해 스탈린이 레닌을 죽였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따라서 무슨 레닌이 자신의 후계자를 트로츠키로 임명했다거나, 레닌이 그의 유언을 통해 스탈린을 공격하는 등 반스탈린 투쟁을 했다는 주장이나 스탈린이 레닌을 독살했다는 주장은 완전히 날조된 사실이다. 이러한 부분에 대해 사하로프라는 러시아 학자가 잘 반박했으며, 이는 서구 역사학계에서도 유명한 스티븐 코트킨 또한 높게 평가하는 자료다. 스탈린에 대한 얘기 중 하나는 그가 소련 공산당에서 인기가 없었다는 얘기가 있다. 이는 말 그대로 엉터리 주장이다. 마지막으로 빌 블랜드의 말을 인용하며 마치겠다.


“세계의 지도적 맑스주의자로서 레닌의 논박에도 불구하고 서기장의 자리로부터 스탈린의 제거에 대한 그의 유언에서의 요구는 소련 공산당 제13차 대회에 의해 거부되었다는 사실은 그 문서가 쟁점이 된 환경들에 대해 많은 것을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스탈린이 당으로부터 많은 존경을 받고 있다는 것에 대해 훨씬 더 많은 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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