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냐의 깃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소냉전이 시작되면서 또 다른 운동이 발발했다. 그 운동은 주로 19세기 식민지 지배를 받던 나라들에서 발생했는데, 이것을 통틀어 제3세계 운동이라고도 표현한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영국과 프랑스는 전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는 제3세계 운동에 직면했는데, 영국의 경우에는 말레이시아에서 가장 격렬하게 일어났고, 프랑스의 경우에는 베트남을 포함한 인도차이나와 알제리에서 강력한 저항이 발생했다. 특히나 인도차이나의 경우 1946년에 독립전쟁이 발발했으며,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를 통해 프랑스의 식민지 지배가 종결됐고, 알제리에서는 1954년부터 1962년까지 독립전쟁이 전개되어 프랑스의 식민지 지배가 종결됐다.


당시 영국도 곳곳에서 독립운동이 발생했다. 인도에서는 간디와 네루가 이끄는 민족운동이, 버마에서는 아웅산을 중심으로 한 독립운동이 벌어졌으며, 말레이시아에서는 좌파 게릴라들이 무장봉기를 일으켜 영국의 식민 지배에 저항했다. 이러한 반영투쟁은 아프리카에서도 일어났다. 대표적으로 이집트의 가말 압델 나세르 또한 영국에 맞서 반영투쟁을 전개했으며, 이집트 또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독립국가로 등극했다. 아프리카에서는 이른바 영국령 케냐에서 격렬한 저항이 일어났는데, 오늘은 케냐의 마우마우단 봉기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아프리카 동쪽 중앙 끝자락에 있는 나라인 케냐는 수십 개의 부족으로 이루어진 사회였다. 반투어를 사용하는 키쿠유족과 타베타족, 키쿠유족 그리고 마사이족 등 무수히 많은 아프리카의 부족들이 현재 케냐에 거주하고 있었으며, 이들은 부족 단위로 전쟁 및 분쟁을 겪었다. 19세기 후반에 들어서 케냐는 영국의 식민 지배를 받게 됐다. 1884년 독일 베를린에서 열린 회담으로 케냐는 영국의 보호령이 되었고, 1890년에는 영국의 동아프리카 회사가 내륙진출을 개시했다. 세계사를 들어본 사람이라면, 영국의 동인도 회사를 생각하면 이해가 빠를지도 모르겠다. 영국의 이러한 식민지 지배는 20세기 초중반까지도 지속되었으며, 이 기간에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당시 아프리카인들은 영국 및 프랑스의 식민지 지배로 인해 강제로 징집당했다. 징집당한 아프리카인들은 백인 지배자들에 의해 차별과 멸시에 시달렸었다. 물론 영국의 지배를 받는 케냐인들은 당연히 악랄한 착취와 폭압에 직면했었다. 케냐를 지배하던 영국의 입장은 아래의 인용문으로 요약이 된다. 아래의 인용문은 케냐에 파견된 청년장교 마이너차겐 대위가 델라메어 경을 만나서 직접 본 것을 글로 쓴 것이다.


“그는 동아프리카의 장래에 관해, “나는 당신들 모두에게 이 나라가 백인의 나라임을 입증해 보이겠소.”라고 말했다. 나는 공손하게 “이곳 흑인들의 나라입니다. 어떻게 흑인 위에 백인이 군림할 수 있단 말입니까?”라고 했다. 델라메어는 성미가 급한 사람이었다. 그는 성가신 듯 “흑인들은 협력을 통해 혜택을 볼 겁니다.”라고 내뱉었다.”


이 인용문에서 표현된 것과 같이 당시 흑인들은 백인들에게 사람이 아니었다. 1900년대 초 케냐를 지배하던 영국인들은 자기 것도 아닌 땅을 차지했을 뿐만 아니라, 이 땅에 사는 아프리카인들은 노예처럼 부려먹고 착취했다. 그리고 이러한 폭압적인 통치는 케냐인들의 경제적인 반란과 봉기를 불러왔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케냐인들은 정치적 발언을 얻고자 애썼지만, 아프리카인들의 지휘는 전혀 상승되지 않았다. 그리고 당시 영국인들은 케냐인들에게 기독교적 교리를 강조했지만, 이는 당시 케냐 사람들이 글을 읽고 쓸 줄 모른다는 점에서 민낯이 드러난다. 이에 따라 1921년 케냐에서는 청년 키구유회(Young Kikuyu Association)라는 조직에 의해 정치활동이 시작되었으며, 이 단체는 1920년대와 1930년대에 “도둑 맞은 땅”에 관한 불만을 토로했다. 청년 키구유회는 강제적 흑인 노동자 등록제도, 저임금 고착취, 흑인의 커피 재배 금지, 식민지 의회에서의 아프리카인 차별 등을 문제 삼았다.

(조모 케냐타, 케냐의 독립운동을 이끈 독립운동가이자 초대 대통령으로 현재 케냐에서 국부로 존경받고 있는 인물이다.)


영국령 케냐에서는 조모 케냐타라는 독립운동가가 존재했다. 그는 1893년 나이로비 외곽의 어떤 부족 보류지에서 태어났으며, 미션스쿨에서 교육받았다. 그는 나이로비에서 사무원, 신문 편집인 등의 경력을 쌓은 후 1925년에 청년 키구유회를 계승한 키구유 중앙회(KCA)에 가입했으며, 1928년에는 사무총장이 됐다. 1년 후 케냐타는 영국 공산당에 가입했으며, 스탈린 집권 하의 소련을 여행했다. 그는 영국으로 가서 런던 경제대학원에서 인류학을 전공한 뒤에 학위를 받았으며,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인 1946년 케냐로 귀국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후에도 영국의 케냐 식민지배는 지속됐다. 키구유 중앙회는 이미 영국 식민지 지배 하에서 불법화된 상태였으며, 케냐타는 독립운동 조직을 재건하기 위해 케냐 아프리카 동맹(Kenya African Union)이라는 정당을 창설하여 1947년에 당수가 됐다. 이에 따라 이 정당을 중심으로 하는 이른바 마우마우단 운동(Mau Mau Movement)도 이렇게 시작됐다.


당시 마우마우단은 영국의 지배하에서 여러 활동 및 무장 테러활동 및 봉기활동도 전개했는데, 당연히 영국 당국은 이에 대해 테러라고 비난하기 바빴다. 1950년 들어서 영국 정부는 마우마우단을 사악한 테러 단체로 규정하며 마우마우단 인사들을 기소하기도 했었다. 케냐의 마우마우단은 1950년에 이르러 지하 대중운동 조직으로 변모했으며, 마우마우단 본부는 각 지방에 조직요원을 파견하여 신규단원을 모집했고, 세포조직을 만들었다. 마우마우단이 케냐의 아프리카인들에게 지지를 받을 수 있었던 이유에는 당시 토지문제가 있었다. 아래는 나이로비의 입법회의 의원 마투가 1951년 어떤 회의에서 한 말이다.

(마우마우단의 게릴라 무장 병력)


“토지는 아프리카인에게는 모든 것을 의미한다. 아프리카인은 장사를 해서 살 수도 없고 임금을 받아 살 수도 없다. 우리는 땅으로 돌아가야 한다. 도둑맞은 땅을 되찾아야 한다. 신은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실 것이다. 왜냐하면 땅은 신이 우리에게 주신 것이기 때문이다.”


1952년에 들어서 마우마우단은 보다 무장력을 갖춘 조직이 됐다. 당시 기준으로 최소 400~800정의 근대식 총기를 보유하고 있었고, 그해 초부터는 아프리카인 공무원들의 주택과 일부 백인 농민들의 밭을 불태우는 행위도 착수했다. 백인 지배자들을 살해하기도 했다. 케냐에서 마우마우단의 활동이 활발히 전개되자 영국 정부는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영국군 병력을 이집트로부터 공수했으며, 순양함 1척까지 케냐 몸바사 항에 진입시켰다. 그리고 마우마우단의 지도자 케냐타와 그의 추종자 182명을 체포했다. 당시 영국의 베어링 총독은 비상사태를 선포하면서 다음과 같이 호소했는데, 이 비상사태 선포문에는 영국의 지배가 얼마나 무지했는지를 반증한다.


“평화와 질서가 유지된다면, 케냐의 앞에는 모든 종족의 생활수준이 향상될 밝은 미래가 열릴 것이다. 지금껏 이 나라의 경제발전, 특히 가난한 주민들을 돕기 위한 계획이 작성되고 있었다. 예컨대 아프리카인들을 위한 주택건설 아프리카인의 교육 확대, 그리고 아프리카인 공무원의 처우개선 등이 촉진될 밝은 희망이 있었다. 만일 무질서한 상태가 계속된다면, 이 모든 것이 실현될 수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우마우단은 여전히 독립운동을 전개했고, 비상사태 선포 2주 후에 마우마우단은 백인농장주 1명과 아프리카인 하인 2명을 살해했다. 그리고 11월 말에는 백인 해군 퇴역장교 1명을 죽였으며, 그의 부인에게 중상을 입혔다. 결국 지도부의 체포에도 불구하고 영국 식민지 당국은 봉기를 분쇄하지 못했다. 이후에도 마우마우단은 세력을 확장하여 영국의 공군력까지 동원되기에 이르렀다. 마우마우단은 점차 게릴라조직으로 변모하여 1954년에는 키쿠유 지역에서 게릴라전을 전개했다. 1953년 말까지 영국이 지원하는 병력 규모가 1만 명을 넘어섰고, 경찰력도 7,000명에서 1만 5,000명으로 증가했으며, 자경단 수가 2만에 달했다. 1953년 말까지 영국 정부는 마우마우단 단원 3,000명 이상을 사살하고 1,000명 이상을 생포했다고 발표했지만, 마우마우단의 세력을 약화시키지는 못했다.

(마우마우단원으로 의심되는 케냐인을 체포 및 수색하는 영국군)


당시 영국은 자신들에게 충성하는 일부 부족들을 내세웠고, 이들을 토대로 경찰력을 구성하기도 했다. 1955년 1월 영국측은 대략 1개 사단을 동원하여 마우마우단을 소탕하기 위한 해머작전을 게시했다. 대략 2개월 동안 400명 이상의 마우마우단을 살해 및 생포했다. 1955년 말경부터는 이른바 특수부대를 보내 마우마우단 지역 게릴라 2,000명을 추적하였으며, 이 추적 작전은 당시 마우마우단 게릴라를 지휘한 키마티가 생포됨으로써 1956년 10월에 종결됐다. 키마티는 나중에 처형됐다. 키마티가 생포되며 마우마우단의 저항은 사실상 종결됐다. 전쟁 기간 영국과 친영 정부군 측은 마우마우단 1만 1,000명 이상을 살해하고, 2만 5,000을 생포했다. 당시 영국 측 피해는 대다수가 현지 케냐인들이었지만, 수백 명 정도였다고 한다.


영국의 학살은 극심했다. 당시 영국은 군대를 투입해 마우마우단 관련자는 물론 그 주축을 이루는 키쿠유족을 학살했다. 케냐 국가인권위원회의 자료를 보면, 영국이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무력 개입한 1952년 이후 10년 동안 9만여 명의 케냐인이 영국 군대에 의해 숨졌고, 16만여 명이 수용시설에 감금됐다고 한다. 이것만 보더라도 신사의 나라 영국이 얼마나 끔찍한 학살을 벌였는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반면에 전쟁 기간 동안 마우마우단에 의해 살해된 영국 협력자들은 1,800명이 죽고, 백인 정착민 32명이 사망했다. 당시 영국은 무시무시한 강제 수용소를 운영했다. 남색, 거세, 전기충격, 물고문, 심리적 고통 가하기, 개를 이용한 고문 등이 영국 식민지 지배 하의 수용소에서 행해졌다. 따라서 1950년대 영국의 케냐 지배는 여전히 폭력과 인권유린이 판을 쳤던 것이다.

(마우마우단 운동을 기념하는 기념물, 현재 케냐에 있다.)


비록 케냐타와 그의 참모들은 구금되었고, 이후 석방되어 가택연금 상태에 놓였지만, 1961년에 이르러 정부는 케냐타를 완전히 복권했다. 그로부터 2년 뒤인 1963년 케냐는 공화국이 됐고, 케냐타가 케냐의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대다수의 케냐인들은 케냐타가 주도한 마우마우단 운동에 대해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마우마우단 운동이 영국 제국주의의 식민지배로부터 해방시켰다고 진심으로 믿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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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dvs117 2023-06-29 21: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계사 교과서에는 이런 내용이 하나도 안 나오죠.
 
우크라이나전쟁과 신세계질서
이해영 지음 / 사계절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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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페이스북 친구인 이해영 교수의 신간을 완독했다. 내가 이해영 교수를 처음 본 것은 남북역사문화협회에서의 강연에서였다. 당시 이해영 교수의 강연은 그 시점까지 내가 들어보지 못한 신선한 내용이었다. 사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미국에 의한 여론조작이나 우크라이나의 네오나치즘 그리고 편향된 서구의 반러주의적 분노에 대해선 잘 알고 있었지만, 당시 언론들(현재도 마찬가지다.)은 그저 러시아의 침공은 부당하고, 우크라이나는 잘 싸우고 있으며, 러시아군은 오합지졸이다.”는 식의 보도를 앵무새마냥 반복했기에, 나 또한 러시아군이 초기 침공에서 실패하여 잘못하면 밀릴 수도 있다는 사실에 근거하지 못한 생각을 했었다.

 

그러나 이해영 교수의 강연은 그러한 언론의 여론조작과 나 자신이 가지고 있었던 편견을 바로잡는데, 많은 도움이 됐다. 그 이후 나는 이해영 교수와 페이스북을 통해 페친이 되었고,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관련한 자료들을 이해영 교수의 페이스북 게시물들을 통해 얻었다. 현재 내가 얻고있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관련 정보망은 이해영 교수의 페이스북과 한설 장군의 페이스북, 유튜브에 있는 박상후의 문명개화와 벨라루스 교민이 운영하는 러시아 학당 그리고 재미교포 Scott LeeSCOTT 인간과 자유 등이 있다.

 

비록 유튜브나 페이스북 관련 SNS를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것은 아니지만, 국내 언론들의 보도들이 항상 군사적 피해는 러시아’, ‘민간인의 피해는 우크라이나라는 노골적으로 편향되다 보니 러우전쟁 관련 국내 보도들을 전혀 신뢰할 수가 없기 때문에, 이러한 소셜 미디어를 통해 자료를 얻게 됐다. 본질적으로 유튜브의 영상이나 페이스북의 글들은 사실 전문성을 담보하지는 못하기에 한계가 있지만, 언론이 제대로된 역할을 하지 못하는 상황에선 그와 반대되는 입장을 얘기하는 자료를 보는 것이 최선이다. 따라서 나는 아이러니 하게도 러우전쟁 관련 정보를 페이스북 페이지와 유튜브 영상을 통해 얻게 됐다.

 

올해 2월 페친인 이해영 교수가 책을 출판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참으로 기뻤다. 전쟁 초기부터 최근까지 국내 출판사들은 우크라이나의 대통령 블라디미르 젤렌스키를 미화하는 서적들을 출판했었고, 우크라이나를 절대적으로 피해자화했다. 2021년부터 영화 감독 올리버 스톤이 만든 다큐멘터리인 ‘Ukraine On Fire’를 본 나는 우크라이나를 미화 및 옹호하는 관점이 지극히 서구적 편향임을 알고 있었고, 따라서 러우전쟁 과정에서 출판된 책들이 그 가치가 떨어질 수 밖에 없음을 당연히 예감하고 있었다. 비슷한 시기 젤렌스키의 연설을 모아서 출판한 어떤 책을 보며, 경악과 충격을 감추질 못했었다.

 

그런 과정에서 이해영 교수의 책이 출판됐다. 워낙 바쁘게 살다보니 책을 읽는데 적잖은 시간이 걸렸지만, 읽으면서 다시 한 번 러우전쟁의 실체를 깨달을 수 있었다. 이해영 교수가 이 책에서 얘기한 것들 대다수가 내 생각과 거의 일치한다. 예를 들어 이해영 교수는 푸틴이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이후 미국 바이든 정부가 게시한 대러 경제제재에 대해 효과가 없다고 주장한다. 현재 국내 언론(좌우 할 것 없이)들은 서구 사회가 진행하는 대러시아 경제제재가 효과가 있는 것처럼 말한다. 그러나 현실은 다르다. 대러제재는 전 세계 국가 13%만 참여하고 있을 뿐, 87%는 거부했다. 따라서 대러제재만 놓고 보자면, 현 미국의 바이든 정부는 오히려 대러제재를 통해 고립을 자초했다.

 

현재 자본주의 국가인 러시아는 소위 제3세계라는 경제적 출구가 있다. 대러제재에 비판적인 국가들 중에선 중국과 인도가 있다. 전 세계 인구가 80억이라고 할 때, 중국과 인도의 전 세계적 인구 비율은 20%를 넘는다. 전 세계 인구 비율 20%가 넘는 중국과 인도는 이 대러제재에 참가하지 않고 있으며, 오히려 러시아를 돕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거기다 앞서 말한 것과 같이 수많은 제3세계 국가들이 미국의 대러제재에 동조하지 않고 있다. 따라서 미국과 서구 중심의 대러제재는 결과적으로 미국과 서구 유럽 중심의 오만한 행위이자, 경제적으로 아무런 효과가 없는 자살행위다. , 한국의 윤석열 정부는 러시아와의 관계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철저히 망각한 채, 이런 자살행위에 동참하고 있는 셈이다.

 

이해영 교수가 쓴 책에서 가장 신선하게 다가온 내용은 바로 초기 러시아군의 기만전술이다. 이해영 교수에 따르면, 20222월에 시작된 러시아의 전면적인 우크라이나 침공은 사실 푸틴 정부의 기만전술이었다. 푸틴 정부는 우크라이나를 전면적으로 침공하는 것처럼 보였다. 특히나, 우크라이나의 수도 키예프까지 단번에 진격하는 것처럼 느껴졌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우크라이나군이 대대적인 반격에 나서 러시아 침략군이 격퇴 당했다는 서구 및 국내 기사가 나오기 시작했다. 전쟁 초기 이러한 현상을 보면서, 나는 러시아군이 진행한 전격전(BlitzKrieg)이 실패한 줄 알았고, 우크라이나군이 제법 반격을 잘한 것으로 생각했다.

 

이해영 교수가 책에서 전하는 이야기는 전혀 다르다. 서방 언론들은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의 수도 키예프를 단기간에 점령해서 전쟁을 끝내는 것이 목표라고 선동했다. 사실 이러한 주장들은 하나의 가설일 뿐이었지만, 가설을 사실로 둔갑시킨 것이다. 심지어 미국 CIA의 국장은 전쟁 초기 키예프 2일 점령설을 만들어 냈으며, 이를 통해 우크라이나군의 전과를 미화 및 과장했다. 그러나 그 당시부터 현재까지의 러시아의 목적은 특수군사작전에 따른 돈바스 지역이었다.

 

따라서 개전 초기 푸틴이 키예프를 포함한 서우크라이나쪽으로 진격한 것은 과거부터 러시아가 목표한 돈바스로의 진격을 강화하기 위한 기만전술이었다. 이해영 교수에 따르면, 서우크라이나로 진격했던 러시아군은 계획적으로 철수를 마무리 했으며, 동부 쪽으로의 진격을 강화했다. , 푸틴 정부의 기만전술에 따른 서부에서의 철군을 가지고, 서방의 언론들은 온갖 과장되고 편파적인 오보와 가짜뉴스들을 끊임 없이 재생산하고 있으며, 지금도 그러한 위선적 행위를 멈추질 않고 있다.

 

거기다 이번 전쟁이 시작되면서, 국내 언론들은 아주 중요한 맥락을 의도적으로 생략했다. 푸틴이 우크라이나를 침공하기 1주일 전인 216일 우크라이나군은 의도적으로 돈바스에 대한 대규모 포격을 개시했다. 그리고 그 보다 일찍 우크라이나 주력군이 친러 반군이 관할하는 지역의 경계선에 집결해 있었으며, 우크라이나와 NATO는 러시아로 하여금 이러한 전쟁을 자극하는 행위들을 끊임없이 해왔다. , 이러한 큰 그림에서 보았을 때, 서구가 이 전쟁을 조장한 다음 우크라이나에서의 유혈을 통해 이득을 취하는 행동을 하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 우크라이나 네오나치즘에 대해서도 얘기하겠다. 책에서도 잘 설명하고 있지만, 우크라이나의 네오나치즘은 지금으로부터 80년 전인 제2차 세계대전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1941년 히틀러가 소련을 침공한 이후 우크라이나에서는 스테판 반데라를 포함한 나치 협력자들이 생겨났고, 이들은 러시아인, 유대인, 폴란드인 등 나치가 열등인종으로 지목한 사람들을 무차별 인종청소 및 학살을 자행했다. 1943년 우크라이나 나치들이 저지른 이른바 볼린 학살로 20만 명의 폴란드인(특히 노인과 여성, 어린아이)을 아주 잔인하게 학살했다. 당시 학살을 주도한 우크라이나 민족주의민병대(UPA)의 우두머리가 바로 스테판 반데라(Stepan Bandera)였으며, 반데라는 현재 우크라이나에서 민족 영웅 혹은 국민 영웅으로 미화되고 있다. 이해영 교수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1943년 우크라이나를 점령한 나치독일은 우크라이나 민족주의를 이용했고,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들은 나치를 등에 업고 볼린에서 약 20만 명의 폴란드인-특히 노인과 여성, 어린아이-을 잔인하게 학살했다. 20만 명은 유대인과 러시아인을 제외한 숫자이다. 학살을 주도한 우크라이나 민족주의민병대(UPA)의 우두머리가 스테판 반데라다. 아조프연대가 추앙하는, 그래서 깃발에 새기고 다니는 자이다. 이 자는 반러 정권이 집권한 뒤 국가 영웅으로 추서되었다. 학살 주범들은 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은 채 서우크라이나에 자리 잡았다. 이들이 우크라이나 네오나치의 원조이다. 동우크라이나 돈바스 주민과 서우크라이나의 민족주의 반데라주의자(Banderite)의 반목의 기원에는 1943년 대학살이 있다. 우크라이나 반데라주의자를 그저 민족주의자로 칭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일전에 젤렌스키는 한국 국회 연설에서 러시아군이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를 박해한다고 말했다. 젤렌스키는 우리 국민을 우롱했다. 러시아군이 목표한 '탈나치화' 대상은 네오나치 반데라주의자이지 단순한 민족주의자가 아니다. 네오나치들은 우크라이나 국내 정치에서 일종의 딥스테이트(Deep State)와 비슷한 인종 파시스트(ethni fascist)이다. 그리고 나치즘과 나아가 우크라이나 네오나치즘을 이해하는 키워드가 바로 인종이다.”

 

출처: 우크라이나 전쟁과 신세계 질서 p.106~108

 

2013년 유로마이단 운동 당시 미국의 네오콘들과 민주당 매파들은 당시 우크라이나의 네오나치 세력들을 등에 업고, 이 시위를 조장했다. 이해영 교수에 따르면, 당시 유로마이단을 이끈 스보보다당은 네오나치 조직이었고, 이들은 우크라이나 총선에서 최소 10%를 득표한 세력이었다. 유로마이단 이후 전개된 돈바스 내전에서 미국이 우크라이나 네오나치 군대를 지원했다는 사실은 명백히 근거가 있다. 2022년 러우전쟁 초기 마리우폴 포위전 이후, 아조프 연대 본부에서는 히틀러의 자서전 나의 투쟁을 비롯한 나치 상징물이 다수 나왔으며, 그 가운데 미국 육규본부가 2008년에 편찬한 야전교범과 미군만 사용하는 저격용 탄환도 발견됐다. 이를 통해, 미국의 네오콘 세력과 민주당 매파 세력들이 우크라이나의 네오나치 세력을 지원했다는 사실은 너무나도 명명백백하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은 국내에 제대로 전달되지 못했으며, 현재도 마찬가지다. 왜 그럴까? 그 이유는 현재 조선일보나 동아일보 뿐만 아니라 한계레와 경향신문 같은 좌우를 막론한 언론들이, 서구 언론을 말 그대로 복사하기 때문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현재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관련한 국내 언론들은 전혀 믿을 수 없는 내용들뿐이다. 그러한 현실 속에서 이번 러시아 우크라이나 전쟁의 본질을 아주 명확히 알려주는 책이 나왔다. 나는 그 책을 이해영 교수가 쓴 우크라이나 전쟁과 신세계질서라고 생각한다. 지금까지 대다수 국민들이 모르고 있던 러시아 우크라이나 전쟁 관련 사실들을 아주 논리적으로 설명하며 명확히 정리한 책이다. 많은 이들에게 이 책의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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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dvs117 2023-06-29 21: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러고보니 미국의 공화당과 민주당 모두 우익 일색이죠. (즉 다시 말해 극우적이고 우편향된 양당제로, 공화-민주 양당 모두 친기업정책과 군사력강화에 매몰되었습니다. 그러니 그런 결과가 나올 수밖에...)
 
[세트] 한국전쟁의 기원 1 + 2-1 + 2-2 - 전3권 현대의 고전 16
브루스 커밍스 지음, 김범 옮김 / 글항아리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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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나왔다. 너무나도 기대가 되는 책이다. 특히나 사학전공자다 보니 너무 기쁘다. 원서는 4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현대사 공부에 있어서 너무나도 중요한 책이다. 전권을 다 사서 꼭 완독할 생각이다. 많은이들이 이 책을 읽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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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종백제인 2023-04-26 21: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일월서각에서 86년에 출판한 책이었는데 오타가 많아 짜증나긴 했어도 기대합니다
 

현재 우리나라를 정치지형만 놓고 보면, 민주당은 전라도 국민의힘(이라 쓰고 국민의짐 혹은 국민의암이라 읽는다.)은 경상도로 분리할 수 있을 것이다. 지난 대선에서도 특히나 대구 경북 지역은 국민의힘 후보인 윤석열이 압도적으로 많은 득표율을 얻었다. 사실 우리나라의 정치지형이 진보는 전라도 보수는 경상도로 등식화 된 계기는 아마도 박정희 시절 야당 후보인 김대중과의 대립의 산물일지도 모르겠다.


사실 대구는 과거에 조선의 모스크바라고 불리던 도시였다. 해방 이후 미군정의 폭력과 착취에 맞서, 민중들이 봉기하기도 했었다. 대구 10.1항쟁이 바로 그것이다. 또한 한국전쟁 시기 이승만 정부가 자행한 천인공노할 민간인 학살이 벌어져 무수히 많은 보도연맹원이 산골짜기에서 학살당했다. 심지어 이승만 정부는 이들을 집단학살 해놓고서, 시신을 콘크리트로 덮어버리는 천인공노할 만행을 저지르기도 했다. 


이승만 정권 시절을 보면, 대구를 포함한 경북지역은 현재와는 달리, 야당 성향도 제법 강했다. 1956년에 치러진 선거를 보면, 비록 민주당의 신익희가 열차에서 급사하기는 했지만, 진보당 소속이던 조봉암이 이승만과의 선거대결에서 210만 표를 득표하기도 했다. 흥미로운 건 당시 선거에서 경상도 일부 지역은 조봉암이 승리를 거두었다. 대구와 경주 그리고 진주에서 진보당 후보인 조봉암이 많은 득표율을 얻었고, 이는 이승만보다도 높은 득표율이었다. 사실 이승만의 득표율은 부정선거였기에, 정당한 득표율이 아니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조봉암의 득표율이 이승만 보다 높았다는 건 명백한 사실이다.


선거가 끝난 이후 조봉암은 새로운 당을 창당했다. 그 당이 바로 진보당이다. 당시 조봉암이 주장한 것은 사실상 사회민주주의에 가까운 것이었다. 조봉암은 1956년 11월 10일 진보당 개회사에서 “자본주의 세계도 날로 수정되어 사회민주주의적인 전법을 쓰고 있고, 공산주의 세계도 날로 변해서 사회민주주의적인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수렴론을 펴면서 사회민주주의 사회로 가자고 호소했다. 즉, 진보당의 강령은 1951년 독일 프랑크푸르트 선언에 기반을 두었다. 흥미로운 건 당시 진보당원의 대다수가 사회민주주의도 프랑크푸르트선언도 몰랐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승만의 반공국가는 그러한 가치 마져도 절대 인정하지 않는 사회였다. 진보당은 각 지역에서 도당 결성대회를 가졌는데, 유지광과 같은 정치깡패들의 테러에 시달렸다. 심지어 전남도당 결성대회 때는 괴한들이 권총과 단도를 가지고 단원들에게 테러를 하는가 하면, 당시 야당 쪽에 있는 인사들도 이를 두둔하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심지어 진보당의 평화통일에 대해 문제 삼았던 것이 바로 당시의 민주당이었다.


결국 진보당은 1958년 1월 12일부터 정부에 의해 검거되기 시작했다. 조봉암은 자진 출두하기로 했다. 당시 검사였던 조인구는 진보당의 평화통일론을 북괴 남침구호로 단정했으며, 신문들은 매일같이 조봉암이 북괴지령문을 보고 불태웠다거나 간첩과 접선했다는 식의 가짜뉴스들을 보도했다. 1958년 1월 21일자 동아일보의 사례를 들자면, 조봉암 관련 기사 제목이 바로, “조봉암씨 김일성과 모종내통”이다. 기사 내용의 핵심은 “진보당의 평화통일론이 공산당이 부르짖는 노선 및 방법과 똑같은 것을 문구상 합리화시켜 놓은 것”이었다.


1958년 6월 검사는 조봉암과 양명산에게 중형을 구형했으며, 7월 2일 유병진 판사는 불법 무기 소지 등으로 조봉암에게 5년을, 양명산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5년을 선고하고, 나머지 진보당 간부들한테는 무죄를 선고했다. 그러나 판결 3일 후인 7월 5일 소위 반공청년을 자처하는 괴한 300명이 법원에 난입하여, “친공 판사 유병진을 타도하자”, “조봉암을 간첩죄로 처형하라”라고 외치며 시위했다. 또한 이승만의 정당인 자유당은 산하 단체들로 하여금 친공판사규탄대책위원회를 구성케 하여 사법부를 위협했다. 


1심 판결 후 이승만은 국무회의에서 분통을 터뜨렸다. 2심 재판은 결국 김용진이라는 인물이 맡았다. 그는 1심과는 반대로 양명산이 혐의 사실을 부인했는데도 조봉암과 양명산에게 사형을 선고하고 진보당 간부들에게도 실형을 선고했다. 대법원 주심은 김갑수였다. 이 판결이 있기 전 홍 법무장관은 국무회의에서 김갑수 대법관 등은 신국가보안법에 대한 견해가 우리와 같고, 정부로서 그에 대해 특별한 대우를 해왔고, 본인으로서도 그를 설득시킬 자신이 있다고 말한 것으로 국무회의 기록에 쓰여 있다. 1959년 2월에 있은 대법원 판결에서는 결과적으로 조봉암은 사형을 나머지 진보당 간부들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물론 당시 미국도 이 사건을 주시했다. 다울링 주한미대사는 이기붕을 만나 영향력을 행사하고자 했다. 그러나 조봉암은 미국한테 아무래도 위험한 인물로 비칠 수 밖에 없었다. 그는 시대를 앞서간 현실정치가였지만, 민족을 냉전보다 위에 놓고 냉전을 타넘고 가려고 했기 때문에 역풍의 정치가라는 말을 들었다. 결국 1959년 7월 31일 조봉암은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 버렸다. 조봉암이 죽기 전 남긴 말은 다음과 같다.


“나는 이 박사와 싸우다 졌으니 승자로부터 패자가 이렇게 죽음을 당하는 것은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다만 내 죽음이 헛되지 않고 이 나라의 민주 발전에 도움이 되기 바랄 뿐이다.”


죽산 조봉암의 죽음은 이승만식 파시스트 독재가 얼마나 비민주적이고 폭력적인지를 보여주는 또 다른 예시다. 한국전쟁이 휴전협정으로 마무리 된 1950년대 중반, 이 사회는 조금이라도 좌파 내지 진보적 색채를 띤 사람들은 철저히 학살당하거나 북으로 가거나 아니면 지리산으로 들어가 죽거나 감옥에 갇힌 상태였다. 전쟁의 결과는 한반도 남쪽에 만들어진 멸균실 수준의 반공사회였다. 전 독립기념관장 김삼웅의 말대로 조봉암은 이승만의 반공 히스테리의 희생물이었다.


사실 이승만에게 도전하는 사람들은 죽음이 따랐다고 할 수 있다. 제헌의원 선거 때 이승만과 대결한 독립운동가 최능진은 국가보안법이 적용되어 처형당했고, 잠재적 라이벌 관계였던 백범 김구도 암살됐으며, 그 이전에는 여운형 또한 이승만의 지지자에 의해서 암살당했다. 1950년대 당시 야당 대통령 후보 신익희와 조병옥은 선거 도중 병사했고, 현직 부통령 장면도 이승만의 수하들이 총을 쏴서 죽을 뻔했다. 결국 조봉암 또한 그런 사례였던 것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반공과 안보를 내세워 조봉암을 죽음으로 그리고 형장의 이슬로 몰고 간 이들의 출신성분이다. 조봉암을 사법살인으로 몰고 간  관료, 청지인, 검사, 판사 중에는 과거 일제 때 친일을 했던 이들이 적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은 누대를 두고 잘 먹고 잘 살았다. 조봉암의 죽음을 큰 틀에서 보자면, 이승만을 지지하는 친일파 세력들이 독립운동가를 빨갱이로 몰아 사법살인한 사건이었다. 따라서 조봉암의 죽음은 결국 이승만과 일본 제국주의 협력자 무리배들이 독립운동가를 죽인 천인공노할 범죄인 것이다.


참고문헌


서중석, 『이승만과 제1공화국』, 역사비평사, 2007.

김삼웅, 『죽산 조봉암 평전』, 시대의창,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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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dvs117 2023-07-16 21: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리고 이는 박정희-전두환-노태우 군사독재 시기 민주항쟁 탄압으로 이어졌다가, 21세기에는 MB, 윤석렬, 국짐당 등 現 수구세력들의 민주인사 박해 및 노동운동 탄압, 통일운동 탄압으로 이어지고 있지요! (역사는 반복된다)
 
빈곤의 역사 - 교수대인가 연민인가 역사도서관 8
브로니슬라프 게레멕 지음, 이성재 옮김 / 길(도서출판) / 2011년 3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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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듣는 수업 덕분에 읽게 됐다. 발표분담을 하게되면서 읽게 됐고, 어쩌다보니 생각 이상으로 흥미진진하게 읽었다. 원생이라 참으로 바쁜 인생을 살고 있지만, 그래도 이렇게 책에 대한 리뷰를 한번 남겨본다.

사실 나는 이 책의 제목에 제법 끌렸다. 자본주의 사회의 고질적인 문제인 ‘빈곤‘의 역사를 다룬다고 하니 제법 끌렸다. 물론 이 책 저자의 이력을 보니 내가 싫어할만한 이력을 가지고 있긴 하다.

우선 냉전시기 폴란드에서 미국의 지원을 받으며 반공투쟁을 했던 자유노조 운동의 제법 급이 있는 일원이었고, 냉전 이후에도 폴란드 정계에서 활동한 것이 확인된다.

물론 인물의 이력은 내가 싫어할만한 점이 있지만, 책 자체는 그래도 읽을만 했다. 저자는 빈곤의 문제에서 현대의 빈곤을 너무 짧게 다룬다는 한계가 분명있지만, 중세나 근대 과정의 빈곤에 대해선 상당히 상세히 다룬다.

나는 이 책을 통해 유럽 역사에서의 빈곤이 중세와 근대에 어떤 형식으로 나타났는지 알 수 있었다. 기득권에 있으면서 표면적으로 종교를 앞세우며 보시행위를 하는 것과 농촌의 소외화 그리고 도시화 과정에서 나타나는 부재한 생계보장 및 빈민들의 슬럼화 등 중세와 근대의 빈민들 삶을 배우는데 제법 공부가 됐다.

근대 시기 감옥 제도도 마찬가지다. 나는 감옥에 대해 단편적으로 범죄자의 처벌만 생각했는데, 빈민들을 감시하고 탄압하고 수용하기 위한 존재로 사용한다는 사실에서 제법 놀랐다. 책에 따르면 영국과 미국의 처벌식 감옥은 19세기쯤 자리 잡았다고 한다.

사실 일반인들이 읽기에는 조금 어려울수도 있는 내용들이 제법 나오는 것 같다. 뭐 그래도 다 읽었고 모르는 사실도 제법 알게 됐으니 그거대로 만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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