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 북 - 리비아혁명의 정치철학
무아마르 알 카다피 지음 / 형성사 / 198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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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생각해보니 카다피는 위대한 혁명가다. 그가 비참한 최후를 맞은건 미제국주의 반대했기 때문이다. 미제가 남미에서 좌파정권을 어떻게 전복시키는지를 생각해봐라. 그놈에 민주주의니 인권이니 자유니 떠들어 대지만 궁극적인 목표는 그 나라 자본 강탈 아니던가. 현재의 리비아가 그런 상황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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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북주의자들이 항상 집회에서 하는 주장이 있다. 그 주장은 바로 ‘북진통일‘ 혹은 ‘북한동포 해방‘이다. 이들이 주장하는 북진통일과 북한동포 해방은 군사력 증강을 통해 북한을 굴복시키자는 정치적 의도가 다분히 깔려있는데, 즉 전쟁을 해서라도 북한을 멸망시켜야 한다는 얘기라 할 수 있다.

사실 이런 류의 주장은 1948년 대한민국 정부수립때부터 친일파 세력을 결집하여 권력을 차지했던 이승만이 해왔던 것이었다. 이승만은 ‘북진통일‘을 주장하며 북한을 무력으로 정복시켜 통일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물론 이 주장에는 북진통일만 하면 모든게 해결될 것이라는 의도도 깔려있다고 할 수 있다.

과거 이승만이 외치던 북진통일론은 박정희가 한국을 반공국가로 체계화하면서 소위 반공웅변 대회를 포함한 전 사회적 영역에서 이를 더 확실히 적용했다. 따라서 북한을 무력으로 굴복시켜야 한다는 관점은 박정희 시절 전 국민들에게 교육됐다.

그런 반공주의적 통일론은 이후 반민중 반통일 세력에게도 지금까지 남아있는 통일 레파토리가 됐다. 그들에게 있어 북한은 통일의 대상이 아닌 무너뜨려야할 적일 뿐이다. 거기다 북한이 경제적으로 고립되어 기근에 시달리기 시작할 때 1990년대 미국의 클린턴 행정부는 실제로 북폭과 제2차 한국전쟁을 준비했었고, 전쟁이 일어날 뻔했다.

그러나 이들의 바람과는 달리 필자는 아주 확실하게 말 할 수 있다. ˝한반도에서의 군사적 해법은 없다!˝라고 말이다. 북한 정권을 무력으로 정복하자는 이들의 주장은 군사적 통일만 하면 다 끝날 것이라는 저급한 인식에서 비롯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만일 군사적으로 대한민국과 미국이 북한을 정복한다면, 그 결과는 절대로 긍정적일 수가 없다.

얘를 들면 북폭과 북진에 성공하여 북한의 최고지도자 김정은이 죽거나 체포당했다고 가정해보자. 어쨌든 북의 사회가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는 것은 북의 지도자를 북인민들이 지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북인민들은 미국의 고립속에서 고난의 행군을 겪으며 살아남은 것에 대해 큰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대다수의 인민들이 그러하다. 따라서 그 사회가 미국의 고립속에서도 유지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던 상태에서 만약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난다면 그들이 과연 북한에게 총구를 돌릴까? 이건 현실성 없는 상상력이다. 북진통일이 모든것을 해결할 것이라는 관점도 전혀 상황파악을 하지 못한 관점이다. 북진을 하게 되면 북한에 있는 대도시들을 중심으로 미국은 폭격을 감행하게 된다. 그렇게 됐을 시 무수히 많은 민간인들이 미국의 폭격으로 죽게 된다. 이런 참상을 북한인민들이 경험하게 되면 설사 북진통일에 성공한다 하더라도 북한민중이 전 게릴라화할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베트남 전쟁에서 베트콩들과 북베트남군이 미국과 남베트남에 저항했던게 그런 이유였다.

김정은 정권 전복도 마찬가지로 오히려 더 상황을 악화시킬 것이다. 2003년 미국은 현재 북을 보듯이 이라크의 후세인 정권을 보고 독재라고 하며 무력으로 침공을 감행했다. 초기 전세는 미국이 이라크의 모든 지역을 점령하면서 다 끝나는 것 같았다. 후세인도 체포되어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러나 이라크 전쟁은 미국을 다시한번 전쟁의 수렁에 빠지게 했다. 후세인 처형과 이라크 침공이 결과적으로 ISIS를 불러왔다.

2011년 리비아 내전도 그랬다. 미국을 위시한 서방의 NATO군은 반카다피 세력에게 공군력을 지원하여 카다피 세력의 거점을 폭격했고, 궁극적으로 카다피를 살해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카다피가 죽고나서 리비아는 더 혼란스러워졌고, 지금도 내전이 벌어져 상황만 악화됐다. 아프가니스탄 시리아 등도 비슷하다.

지금까지 미국의 군사적 개입사례를 보았을때 북한을 무력으로 통일하고 김정은을 죽인다면 다 해결될 것이라는 생각은 말 그대로 국제정치와 역사를 너무나도 모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한국전쟁의 기원을 집필한 브루스 커밍스가 얘기하듯이 북한에 대한 군사적 해법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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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미 없는 북진통일론과 반공포로 석방 그리고 한미상호방위조약

(이승만과 워커 장군)

 

1950년 6월 25일에 시작된 한국전쟁은 인민군의 진격도 신속했지만전쟁 초기 인민군의 진격 속도만큼이나 미군의 군사개입 또한 매우 신속했다지난번 이승만 정부의 민간인 학살 파트에서도 언급했듯이 이승만은 전쟁 초기 도망치기 바빴으며미국의 즉각적인 군사개입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 영토 90%가 인민군이 점령하게 되는 상황에 놓이게 됐었다그러나 그 시기 워커 장군의 이름을 딴 워커라인 즉 낙동강 전선이 형성되면서 인민군 또한 길게 진격하지 못했다미국은 이 전쟁에서 UN군이라는 이름하에 총 15개국을 전쟁에 끌어들였고영국프랑스캐나다호주뉴질랜드터키태국필리핀 등이 이 전쟁에 군대를 보냈다.

 

1950년 9월 15일 UN군 사령관인 더글라스 맥아더(Douglas MacArthur)가 인천상륙작전을 개시하면서 전세는 인민군 쪽에게 불리해졌지만항미원조 보가위국의 기치를 내세운 마오쩌둥(Mao Ze Dong)의 중국군대가 참전하면서 북진했던 연합국은 다시 후퇴하여 1951년 1월 4일엔 수도 서울이 인민군과 중공군에게 함락 당했다이렇게 되자 유엔군 총사령관인 더글라스 맥아더는 1951년 4월 중국공산당 영토인 만주에 대한 대대적인 폭격 및 핵폭격 그리고 국공내전 당시 대만으로 피신한 장제스 군대의 반격을 주장했다만약 맥아더의 말대로 만주에 핵공격이 가해졌다면 만주와 한반도 지역의 방사능 피해는 이루 해아릴 수 없었을 것이다결국 스탈린의 참전으로 인한 제3차 세계대전을 우려한 대통령 해리 트루먼에 의해 해임됐고2차 세계대전 당시 유럽 전선에서 활약했던 매슈 리지웨이(Matthew Ridgway)가 임명됐다.

 

1951년 봄에서 여름 사이 한국전쟁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우선 맥아더가 해임되고 리지웨이가 임명되었다그리고 그해 7월부터 휴전회담이 시작됐다하지만 전쟁초기부터 미국이 군사적인 목적을 가지고 해오던 폭격은 휴전회담이 진행되는 와중에도 계속됐다태평양 전쟁 당시 미국이 일본 본토를 폭격하기 위해 사용했던 폭탄은 네이팜 폭탄을 합쳐 20만 톤 안팎이었지만한국전쟁 시기 북한을 폭격하기 위해 사용된 폭탄개수는 네이팜 폭탄을 포함하여 66만 7000톤이나 달했다당시 이승만은 미공군이 한국전쟁에서 감행한 폭격에 대해 다음과 같은 말을 하기도 했다.

 

미국 전투기가 적의 주요시설을 강타하고 대단히 큰 피해를 입혔습니다이번 전쟁에서 미국 전투기가 중요하다는 걸 우리는 압니다.”

 

이승만의 이러한 발언에는 미군 전투기가 행하고 있던 폭격의 민간인 피해에 대한 고려나 비판의식이 1% 존재하지 않는다당시 미국은 주로 북한을 타켓으로 폭격을 감행했지만남한땅 안에서도 비인간적인 폭격을 감행했었다따라서 이승만에게 있어 미국의 폭격 학살은 그저 공산주의자들을 약화시키고 섬멸하는 자유를 위한 반공성전의 위대한 과정이었다. 1951년 휴전회담이 진행되자 이승만은 휴전회담을 결사반대하고 나섰다여기서도 이승만이 주장한 것은 바로 그의 정복주의적 비전인 북진통일론이었다이승만은 북진통일을 계속 주장하면서 휴전회담을 주선하는 미국과 북한중국 측에 강력히 반발했다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 외치던 북진통일처럼 휴전회담 과정에서도 그가 외친 북진통일은 정치적 허세 혹은 무의미한 정치적 구호였다.

(북진통일 시위, 이승만은 대한민국 정부수립부터 물러날 때까지 항상 북진통일을 입에 달고 살았다.)

 

이승만은 휴전문제 그 자체를 문제 삼았었다그리고 그가 외치는 북진통일론을 국민들로 하여금 구호로 외치게 했다. 1952년 부산을 비롯하여 광주대구대전서울에서 학생들이 통일이 아니면 죽음을 달라는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여기에는 이승만이 미국으로부터 휴전회담 압박을 통해 미국으로부터 일정한 대가를 받아내려는 그의 정치적인 계산도 있었다조성훈의 책 <왜 이승만은 휴전협정에 반대했을까>라는 책에는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이승만은 아무런 성과 없이 휴전이 성립되면국민적 기대에 부응하지 못해 그의 정치적 위기를 초래할 수 있는 형편이었다.”

 

휴전회담은 거의 2년을 끌었다휴전회담에서 가장 중심적으로 논의된 사항은 3가지로 나눌 수 있다첫 번째는 비무장지대 설치 즉 군사분계선의 설정 문제였고두 번째는 양측에 대한 휴전감시기관 설치 문제였으며세 번째는 양측의 포로교환 문제였다이중에서 가장 큰 논쟁거리 내지는 대치했던 문제가 바로 양측 포로문제였다우선 세계는 제네바 협정에 따라 포로에 대한 보호를 우선시하고 있었다이에 따라 유엔군 쪽은 포로 개개인의 자유의사에 따라 남쪽과 북쪽 그리고 중국과 대만으로 갈 수 있도록 하자고 주장했고북한과 중국측은 모든 포로가 그 본국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맞섰다따라서 양측의 회담이 난항에 빠졌던 것이었다.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수용된 친공포로들, 한국전쟁 당시 남한에 있던 포로수용소는 친공포로와 반공포로로 나뉘었다. 이 사진에서 스탈린 초상화를 들고있는 친공포로가 참으로 인상적이다.)

 

남한에는 인민군 및 중공군 포로가 거의 13만 2474명이 있었고북한에는 한국군 및 유엔군 포로 1만 1559명이 있었다북한측에 잡힌 포로들의 경우 인민군 측이나 중공군 측의 포로 학대 및 고문이 있었다는 일부 증언을 하기는 했지만대체로 큰 반발 없이 지냈던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적어도 북한에 있던 포로수용소의 경우 국군이나 유엔군 포로가 편이 갈려 서로를 죽고 죽이는 일은 없었던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한국전쟁 당시 북한측 포로의 대우에 대해선 아직 연구가 많이 되지 않은 편이라 학자들의 연구가 필요한 것도 있겠지만북한에 있던 수용소의 경우 포로들이 모여 체육대회도 하는 화기애애한 모습이 서방측 언론에 보도되기도 했던 것을 보면적어도 남한 내의 포로수용소하고는 달랐던 것을 알 수 있다.

 

남한에 있던 포로수용소의 경우 포로들 끼리 편이 갈려 죽고 죽이는 일이 반복됐다남한 내에 최대 포로수용소 시설인 거제도 포로수용소는 소위 북측을 따르는 친공포로와 북측에 반감을 가지고 있던 반공포로로 나뉘었다반공포로의 경우 전쟁 초기 인민군에게 포로로 붙잡혀 인민군이 되었다 다시 국군의 포로가 된 사례로 북한과 인민군에 대한 반감이 강했다결국 유엔측은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그들을 분리해서 수용했지만이들끼리의 싸움은 끊이질 않았으며양측은 서로에 대한 반감만 생겨갔다.

(석방된 반공포로들, 수용소에는 소위 인민군과 북한체제를 싫어하는 반공포로들이 있었다. 이승만은 이들을 휴전회담을 막기 위해 정치적으로 이용했다.)

 

휴전회담은 양측 포로문제로 중단되기도 했었다이러는 도중 휴전회담을 좀 더 앞당긴 사건이 일어났다. 1953년 3월 5일 소련의 지도자 이오시프 스탈린(Joseph Stalin)이 사망한 것이다스탈린이 사망하자 포로교환이 이루어지면서 휴전회담이 재개됐고포로 송환협정이 조인되었다그러나 이승만은 휴전회담에 반대하여 이 회담에 찬물을 끼얹었는데그게 바로 반공포로 석방이었다. 1953년 6월 18일 이승만은 반공포로를 일방적으로 석방하는 조치를 취했다마산대구영천논산부산 등 7개 수용소에 갇혀 있던 3만 7000명의 반공포로 중 2만 7000명을 석방시켰다그러면서 이승만은 한국 측 요구가 관철되지 않으면 휴전협정 파기를 위해 보다 강력한 조치를 취하겠다라며 엄포를 놓았다이것은 결국 국제적인 물의를 일으켰다이에 분노한 북한 측은 포로들의 재수용을 요구하기까지 했다.

(휴전회담 당시 사진, 휴전회담은 2년을 끌었다. 회담을 2년이나 끝 이유에는 양측 포로문제가 항상 있었다.)


(휴전협정에 조인한 각국 대표자들의 서명, 당연히 여기에 이승만의 이름은 적혀있지 않다.)

 

이승만이 반공포로들을 일방적으로 석방하면서 휴전회담이 진행되지 않을 뻔했지만결국 휴전협정은 1953년 7월 27일 유엔군수석대표 해리슨 중장과 공산군 측 대표 남일(南日사이에 3통의 휴전협정서와 부속협정서에 각각 서명한 뒤 클라크 유엔군사령관김일성 북한군총사령관중국의용군사령관 팽덕회가 각각 자신들의 후방사령부에서 휴전협정에 서명하면서 3년 1개월간 지속되던 한국전쟁도 끝이 났다당연히 이승만은 휴전회담에는 서명하지 않았기에 휴전회담도 미국과 북한만 한 것이 됐다거기다 전쟁 초기 이승만은 한국군의 전시작전권을 미국에게 넘겼기에 한국의 작전권은 현재 미국이 가지고 있는 상황에 놓여있다한국전쟁이 끝나고 나서 미국은 소련과 중국의 팽창을 막고 한국일본에 대한 효과적인 방어를 목적으로 1953년 10월 1일 수도 워싱턴에서 한국 측 전권위원 변영태와 미국 측 전권위원 델러스 사이에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였다전문과 6조로 된 조약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한미상호방위조약 조인식, 사진속에는 이승만도 보인다.)

 

① 미 양국은 국제평화와 정의를 위협하는 무력행사를 삼갈 것을 약속한다.

② 양국 중 어느 1국이 외부로부터 무력공격의 위협을 받을 때는 양국이 상호 협의하여 외침을 방지하는 적절한 조치를 취한다.

③ 양국은 자국의 영토 및 자국의 영토를 위태롭게 하는 태평양지구에 있어서의 무력적 외침에 대처하여 공동투쟁을 전개할 것을 선언한다.

④ 양국은 상호합의에 의하여 미합중국의 육공군을 대한민국 영토내와 그 부근에 배치하는 권리에 대해 대한민국은 이를 허용하고 미합중국은 이를 수락한다.

⑤ 이 조약은 양국이 각각 자국의 헌법상 절차에 따라 비준한다.

⑥ 이 조약은 무기한으로 유효하며어느 1국이 이 조약을 폐기할 의사가 있을 때는 그 의사를 상대국에 통고한 지 1년 후라야 폐기될 수 있다.

 

이 조약은 궁극적으로 1954년 1월 13일 양국의 국회에서 비준이 이루어지면서 발효되었다결과적으로 한국전쟁 이후 이승만이 미국과 체결한 한미상호방위조약에 따라 현재까지 대한민국 영토에는 주한미군이라는 형태로 미군이 주둔하게 된 것이다일각에서는 주한미군이 한국에 주둔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며 숭미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어쨌든 미국이 한국에 주둔하는 명분은 소위 양국 공동의 적인 북한에 맞서 군사력으로 견제한다는 것이기 때문이다하지만 이것은 지극히 반공주의적인 시각에 근거한 것이고이런 시각의 근본은 바로 이승만식의 반공사상에 있다.

(윤금이, 1992년 미군 기지촌에서 일하던 윤금이는 주한미군 병사에 의해 아주 잔혹하게 살해됐다. 당시 주한미군 병사가 저지른 폭력은 올해 이슈가 됐던 N번방을 능가했다.)

 

또한 주한미군이 주둔함으로써 대한민국 내에서 일어나는 미군문제는 이루 해아릴 수가 없을 정도로 문제가 심각하다대표적으로 1992년에 일어났던 윤금이 피살 사건을 들 수 있다당시 미군 기지촌에서 일하던 술집 종업원 윤금이는 주한미군 소속 케네스 마클 이병에게 살해당했는데사망 원인은 콜라병으로 맞은 얼굴의 함몰 및 그로 인한 과다 출혈이었지만살해된 시신에는 차마 입으로 표현하기 힘든 폭행이 저질러졌으며소위 N번방 사건을 능가하는 수준이었다그랬지만 이런 범죄를 저지른 미군은 제대로 처벌받지 않았다. 2012년에 한 미군이 저지른 성폭행 사건도 처벌를 제대로 받지 않았다는 점에서 비슷했다.

(평택 코로나 확진자, 2020년 전세계를 강타한 전염병에 가장 무능한 나라는 미국이다. 이에 따라 주한미군에게도 코로나가 퍼지고 있는 중이다. 하지만 여기에 대해 문제의식을 가지거나 대응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2002년엔 소위 효순이 미선이 사건이라 하여 두명의 여중생이 미군 장갑차에 의해 압살당한 사건도 일어났다이것도 제대로 된 처벌을 받지 않아서 많은 사람들의 분노를 사기도 했다즉 한국전쟁 이후 주한미군이 저지른 범죄는 무수히 많다그러나 더욱 기가막힌 건 한국정부는 미국이 저지르는 짓에 대해 어떠한 조치조차 취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올해 7월 전 세계적으로 강타한 전대미문의 질병인 COVID-19가 미국 전역에 퍼지면서 한국사회에도 피해를 줬다미군기지가 있는 평택은 현재 확진자 72.5%가 미군이지만한국정부는 아무런 대응조차 하지 못하고 있다따라서 주한미군의 이런 악순환적 구도의 뿌리는 바로 1953년 이승만 정부가 체결한 한미상호방위조약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즉 이승만 정부가 심어놓은 반공의 뿌리는 주한미군이라는 형태를 남겨 이러한 피해에도 확실한 처벌조차 못하는 구도를 만들어 놓은 것이나 다름없다.

(이승만과 응오딘지엠, 1957년 이승만은 남베트남의 지도자 응오딘지엠이 서울을 방문하자 매우 환영해주었다. 둘의 반공성향은 일란성 쌍둥이라 불러도 될 정도로 매우 유사하다. 이승만에게 있어 응오딘지엠은 공산주의에 맞서는 투사였다.)

 

1953년 한국전쟁이 끝난 뒤 이승만 정부는 또 다른 흑역사를 시도했었다바로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에 반공십자군을 파견하는 것이었다한국전쟁 당시 인도차이나 반도에는 프랑스와 베트남 사이의 전쟁이 벌어졌는데미국은 자신들의 우방인 프랑스를 지원하고 있었다물론 프랑스는 한국전쟁에 군대를 파병한 국가였고이승만의 입장에서 프랑스가 치르고 있던 전쟁은 식민지를 유지하기 위한 전쟁이 아닌 공산주의에 맞서는 성전이었다. 1954년 1월 이승만 정부가 자청한 인도차이나 반도에 대한 한국군 1개 사단 파병이 미국 정부에 의해 재검토되었는데당시 이승만은 “1950년 한반도에서 전쟁이 발발하자 16개국이 군대를 파견하여 우리 정부를 도와준 데 대한 보답과 동남아시아에서 반공정신의 고취가 파병의 목적이다라고 말했다물론 이 요청을 미국이 거절하면서 실패했지만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공산주의에 맞서기만 한다면 식민지 해방 전쟁도 결국 반공이라는 이름으로 합리화 되는 이승만의 저급한 인식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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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hn F, Kennedy's Anti-Communist Foreign policy)

 

20세기 미국의 이상을 대표하는 대통령은 과연 누구일까? 아마도 존F케네디(John F. Kennedy)일 것이다. F케네디는 역대 미국 대통령들 중 가장 젊은 나이에 대통령에 당선된 최연소 대통령일 것이다. 2008년 흑인 최초로 대통령에 당선된 버락 오바마(Barack Obama)48세의 젊은 나이에 대통령 자리에 올랐지만, 44세에 대통령이 된 케네디의 최연소 기록을 깨지는 못했다. F케네디의 인기는 지금도 미국사회에 많이 남아있다. 공화당(Republican)과 민주당(Democrat)이 각축을 이루고 있는 미국정치구도에서 존F케네디라는 인물은 미국 민주당에게 일종에 진보의 화신 같은 인물(?)로 기억되고 있다. 실제로 케네디는 미국사회에서 의료제도를 개혁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미국 뉴욕에 있는 국제공항의 이름도 존F케네디의 이름을 딴 존F케네디 공항이다. 이처럼 케네디는 미국인들의 기억속에 각인되어 있다. 그리고 케네디는 미국의 최연소 대통령 답게 당대 최고의 여배우라고 할 수 있는 마릴린 먼로(Marilyn Monroe)하고의 연애 소문이 있을 정도로 여성에게도 인기가 많았고, 그가 대통령으로 있던 당시 영부인이던 재클린 케네디((Jacqueline Kennedy)도 상당한 미모의 소유자였으며, 영부인으로서 인기도 많았다. 케네디 또한 준수한 외모를 가지고 있어, 이런 이미지는 미국인들에게 이상적으로 비추어 졌다. 무엇보다 최연소 대통령인 그는 미국 정치계에서 화려한 경력을 가지고 있었다. 1917년에 태어난 그는 미국 하버드 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할 정도로 인재였고, 2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태평양 전쟁에 참전하여 병사로서 활약했었다. 전쟁 이후 정계에 들어가 1950년대부터 민주당 정치인으로써 두각을 드러냈고, 결과적으로 1960년에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비록 2~3년이라는 매우 짧은 대통령 집권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도 인기가 많은 이유는 바로 거기에 있을지도 모르겠다.

 

F케네디는 한국현대사에서도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일 것이다. 19615.16 쿠데타를 통해 정권을 잡게 된 박정희(Park Jung Hee)가 우선적으로 했던 일이 자신과 동갑내기인 미국 대통령 케네디로부터 정권을 인정받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케네디는 박정희의 과거 남로당 경력을 끝까지 의심했던 인물이었고, 박정희는 자신이 좌익과 완전히 결별했다는 것을 인정받기 위해 미국으로 날아가 케네디를 설득해야만 했다. 궁극적으로 케네디는 박정희 정권을 인정했고, 그가 인정한 결정적인 이유는 박정희의 충실한 반공주의에 있었다. 즉 케네디는 박정희라는 반공주의적 성향의 지도자를 통해 한국을 공산주의에 맞서는 반공보루로써 이용할 생각이었던 것이다.

 

현재 미국의 정치가 공화당과 민주당의 구도이기 때문에 민주당이 공화당 보다 조금 더 진보적인 것처럼 비추어지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국제정치라는 영역에서 접근해보게 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오히려 민주당 쪽이 공화당만큼 혹은 그 이상으로 강경적이고, 더 친미적인 정책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현재 미국 민주당에게 있어 소위 진보의 이상으로 비추어지는 존F케네디도 본질적으로 공화당 못지않게 혹은 그 이상으로 반공주의에 기반한 제국주의적 외교정책을 추구했던 인물이다.

 

대표적으로 케네디의 반공주의적 성향을 입증할 수 있는 사례른 크게 두가지로 볼 수 있다. 첫 번째는 쿠바고 두 번째는 베트남이다. 1959년 피델 카스트로와 체게바라가 혁명에 성공하여 사회주의 국가를 수립했을 때, 미국의 아이젠 하워(Dwight Eisenhower) 대통령은 사회주의 정권을 전복시키려는 계획에 착수했다. 그는 CIA를 통해 쿠바 망명자들로 구성된 군대를 만들었다. 그러나 실제로 이 계획을 쿠바에서 실행한 인물은 바로 케네디였다. 19614월 케네디는 쿠바 망명자 1500명으로 구성된 CIA 군대를 상륙시키 피그스만 침공(Bay of Pigs Invasion)을 감행했다. 피그스만 침공은 실패로 끝났지만, 여기서 만족하지 않은 케네디는 소위 몽구스 작전(Operation Mongoose)이라 하여 쿠바를 겁박하는 작전을 그해 11월에 개시했었다. 또한 케네디는 CIA를 통해 쿠바의 지도자 피델 카스트로(Fidel Castro)를 암살하는 작전을 여러번 시도했었다.

 

19624월에는 미군 4만 명이 카리브해의 한 섬에 대한 상륙작전을 목표로 2주간 군사훈련을 시행했었다. 실제로 미국이 쿠바를 침공하고, 터키에 핵미사일을 배치하여 모스크바까지 타격할 수 있는 거리를 확보하자 쿠바와 소련은 이에 대응할 수밖에 없었다. 소련의 흐루쇼프(Nikita Khrushchev) 또한 핵미사일을 쿠바에 배치했고, 결국 이렇게 해서 일어난 일이 바로 쿠바 미사일 위기(Cuban Missile Crisis). 물론 여기에는 흐루쇼프가 케네디의 역량을 과소평가했었는데, 이것도 큰 패착이었다. 왜냐하면 케네디는 대외정책에 있어서 매우 강경한 입장이었기 때문이다.

 

쿠마 미사일 사태에서 가장 호전적인 모습을 보인건 바로 미국의 케네디였다. 케네디는 10월에 오르트색 작전(Operation Ortsac) 작전을 실시한다고 공표했었으며, 쿠바에 핵미사일이 배치되자 쿠바를 공격할 계획가 소련의 모스크바를 타격할 계획까지 세웠었다. 결국 쿠바 미사일 사태는 흐루쇼프가 케네디에게 굴복하면서 마무리 되었다. 세간에 알려진 것과는 다르게 여기서 가장 호전적인 나라는 소련이 아니라 바로 미국이었다. 19621022일 미국은 데프콘 3를 발령했고, 1024일에는 사상 처음으로 데프콘 2까지 발령했으며 소련 지역 목표물들에 대한 타격 준비를 마쳤었다. 케네디는 소련에 대한 자신의 최후통첩에 힘을 실어주기 위해 쿠바 고립책의 일환으로 해상 봉쇄 명령을 내렸고, 쿠바 침공을 위한 총공격 태세에 돌입했으며, 핵무기를 탑재한 B-52 폭격기까지 발신시켰었다. 또한 쿠바 미사일 사태의 궁극적인 원인은 소련의 쿠바 핵무기 배치가 아닌 미국이 터키 핵무기 배치에 있었다.

 

케네디는 대외반공정책은 쿠바에만 국한되지 않았었다. 그는 아주 비밀스럽게 베트남에서 새로운 유형의 전쟁에 착수했다. 당시 베트남은 북위 17도선을 중심으로 남북분단된 상태였다. 북부에는 독립운동가 호치민(Ho Chi Minh)을 중심으로 하는 사회주의 정권이 들어섰고, 남쪽에는 미국의 지원을 바탕으로 하는 응오딘지엠(Ngo Dinh Diem) 정권이 들어선 상태였다. 당시 미국이 내세웠던 응오딘지엠은 매우 부패한 정권이었다. 이들은 정통성에서도 북베트남 호치민에게 밀렸는데, 당시 응오딘지엠은 그 모순을 더욱 극대화하는 일들에 착수했다.

 

프랑스와의 전쟁 당시 독립운동을 했던 전직 베트민(Viet Minh)들은 응오딘지엠의 남베트남 사회에서 공산주의자로 몰려 감옥에 구금되고 처형됐다. 즉 응오딘지엠은 이런 강경한 반공산주의 정책을 추진함으로써 반공독재국가를 남베트남에 수립했다. 이런 배경속에서 바로 베트콩(Viet Cong)이 남베트남에서 탄생한 것이다. 제네바 협정을 위반했던 미국은 남베트남의 응오딘지엠 정권을 지원했다. 1950년대부터 소규모의 군사고문단을 배치해놓았는데, 1961년 존F케네디가 당선된 이후로 그 숫자는 점진적으로 증가했다. 케네디가 대통령에 당선됐을 당시 남베트남 주둔 미군사고문단(American Advisor)의 숫자는 800명에 불과했지만, 1963년에는 16000명까지 증가했다.

 

당시 케네디는 남베트남에서 소위 베트콩을 뿌리뽑고, 응오딘지엠 정권을 강화하기 위해 고문단을 증가하는 방식으로 맞섰다. 케네디는 소위 대게릴라전(Counterguerrilla Warfare)이라고 하여 그린베레(Green Beret)로 구성된 특수부대를 남베트남에 파병했는데, 이들의 목적은 남베트남에서의 게릴라를 소탕한다는 것이었다. 이들은 남베트남 중부고원지대에 들어가 그 지역 소수민족들을 민병대로서 활용했고, 라오스와 캄보디아에서도 작전을 전개했다. 이것은 사실상의 1954년에 맺은 제네바 협정을 명백히 위반한 행위였다. 더 나아가 그는 APC와 같은 최신식 장갑차량과 전투헬기를 남베트남군에게 지원했고, 고엽제 살포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러나 더 기가 막히는 사실은 존F케네디는 베트남 전의 본질을 잘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1950년대 사이공을 방문했던 케네디는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말기 호치민은 자국의 독립을 위해 싸우고 있고, 프랑스는 식민지배를 유지하고자 하기 때문에 독립을 위해 싸우는 이들이 그것을 쟁취해야 한다라는 연설을 했었다. 하지만 대통령이 되고 나서 그가 베트남에서 착수한 것은 프랑스 제국주의자들이 했던것과 똑같은 일이었다. 결국 그도 동남아시아에서 잔혹한 전쟁범죄를 저지르게 되는 물질적 토대를 형성해놓고, 1963년 암살당했다.

 

위에서 상술했듯이 많은 사람들이 존F케네디를 하면 이상적인 존재로 착각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하지만 케네디 또한 미국의 제국주의적 이익과 정치관계를 잘 대변하는 인물이었다. 한국의 박정희 정권 지원, 쿠바의 피델 카스트로 정권 전복 시도 그리고 남베트남에서의 미군사고문단 증강과 같은 일련의 행위는 존F케네디가 주도한 것이고, 그 일련의 행위를 통해 케네디가 이루고자 했던 것은 반공주의 보루를 견고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따라서 그는 제국주의를 대변하는 반공주의자다. 그가 미국 대통령으로 집권하면서 저지른 일련의 범죄행위들은 역사적 심판을 받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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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 핀란드 전쟁은 1939년 11월 30일 부터 1940년 3월 13일까지 대략 4개월간 전개된 전쟁이다. 서방의 많은 사학자들이 소련 핀란드 전쟁에 대해 주로 소련의 팽창주의적 욕심에서 비롯된 것이라 판단하고 있고, 소련과 스탈린의 정복욕에 기반한 것이라 판단하고 있다. 그렇다면 당시 소련과 스탈린 그리고 소련의 진보성을 믿는 사회주의자들이 생각하는 소련 핀란드 전쟁에 대한 입장은 무엇일까? 아래에 있는 글은 2013년 그리스공산당(KKE)에서 출판한 책 중 역사왜곡에 대한 파트 중 하나다.

핀란드의 경우는 다르다. 몰로토프-리벤트로프 조약 체결 직후 소련은 핀란드 국경의 차단과 방어 강화 노력을 시작했다. 핀란드 국경은 레닌그라드에서 불과 32km 떨어져 있으므로 소련 방어를 위해 핀란드-나치 독일 간 기존의 원만한 외교관계와 소련에 맞서 핀란드 국경에서 벌어지고 있었던 거대한 군사적 준비를 고려할 때 핀란드와의 협정이 중요했다. 두 국가 사이의 협상은 1939년 10월 12일에 시작되었다. 자본주의 국가들의 목표는 핀란드가 소련에 맞서는데 이용되는 것이었는데, 핀란드가 다방면으로 지원을 받았던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었다.

소련은 처음에는 핀란드에게 상호원조협정 체결을 제안했다. 그에 대한 핀란드의 거부 이후 소련은 핀란드 국경선을 이동하여 두배 정도 규모의 영토를 교환하여 해군기지 설치를 위한 땅을 임대해달라는 역제안을 했다. 핀란드는 이 제안 역시 거절했다. 소련의 제안을 핀란드가 거절한 것은 두 나라 사이의 전쟁을 초래했다.

이 전쟁에서, 핀란드는 국제 제국주의 진영의 지원에 의존했다. 미국, 영국과 프랑스는 소련에 맞서는 총체적인 공세뿐만 아니라 원정군을 준비하면서 핀란드에게 아낌없이 자금과 무기를 제공했다. 전쟁을 계속시키기 위해 미국, 영국, 프랑스가 핀란드에 극심한 압력을 가했지만, 군대가 이미 2월에 헬싱키로 들어와 있었던 핀란드와 소련은 1940년 3월 12일 평화조약을 체결했다.

양국은 전쟁을 중단하고 다른 나라를 겨냥한 어떠한 연합에도 참여하지 않을 책임을 지게 되었다. 핀란드는 일부 영토를 소련에 양도했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 중 일부는 역사를 조작하기 위해 은폐되거나 왜곡된다. 소련은 몰로토프-리벤트로프 협약을 체결하여 방어선을 강화시킬 수 있었고 나치 독일의 막강한 공격에 맞설 수 있었다. 이 진실은 부인할 수 없으며 댈러스(F- Dallas)와 같은 부르주아 역사학자조차도 "소련에 대한 독일의 직접적인 공격을 막고 방위력을 강화하는 시간을 갖기 위해" 그리고 "그 당시의 특정한 역사적 조건에서 소련의 이러한 입장은 아주 현실적이었다."며 이 조약의 체결이 소련의 요구 때문이었다고 분명하게 말했다. 그러나 반공주의자인 윌리엄 엘, 쉬러(William L, Shirer) 역시 다음과 같이 썼다.

"부끄러운 비밀협정이 스탈린에게 숨 쉴 틈을 준 것은, 차르 알렉산더(Czar Alexander)가 1807년 나폴레옹으로부터, 레닌이 1917년 브레스트-리토프스크(Brest-Litovsk)에서 독일인들로부터 안전을 보장받았던 것처럼 분명했다. 나중에 소비에트 공식 외교사가 강조했던 것처럼, 또한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만일 러시아가 나중에 독일에 의해 공격을 당했더라면 서구 열강들은 이미 독일 제3제국(Third Reich)에 맞서 돌이킬 수 없는 개입을 했을 것이고, 소련은 1939년 여름에 그랬던 것처럼 독일 열강에 맞서 혼자 싸우지는 않을 것이라고 크렘린은 확신했다. 이 모든 것은 논란의 여지없이 사실이다."

21개월간의 귀중한 시간 덕분에 소련은 당시까지 "무적의" 독일군(Wehrmacht)을 물리칠 수 있었고 소련을 파괴하고자 하는 제국주의 계획을 박살내, 베를린에 적기(Red Flag)를 게양하며 유럽을 해방시킬 수 있었다.

출처 : 소련 사회주의에 대한 진실과 거짓 p.131~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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