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hn F, Kennedy's Anti-Communist Foreign policy)

 

20세기 미국의 이상을 대표하는 대통령은 과연 누구일까? 아마도 존F케네디(John F. Kennedy)일 것이다. F케네디는 역대 미국 대통령들 중 가장 젊은 나이에 대통령에 당선된 최연소 대통령일 것이다. 2008년 흑인 최초로 대통령에 당선된 버락 오바마(Barack Obama)48세의 젊은 나이에 대통령 자리에 올랐지만, 44세에 대통령이 된 케네디의 최연소 기록을 깨지는 못했다. F케네디의 인기는 지금도 미국사회에 많이 남아있다. 공화당(Republican)과 민주당(Democrat)이 각축을 이루고 있는 미국정치구도에서 존F케네디라는 인물은 미국 민주당에게 일종에 진보의 화신 같은 인물(?)로 기억되고 있다. 실제로 케네디는 미국사회에서 의료제도를 개혁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미국 뉴욕에 있는 국제공항의 이름도 존F케네디의 이름을 딴 존F케네디 공항이다. 이처럼 케네디는 미국인들의 기억속에 각인되어 있다. 그리고 케네디는 미국의 최연소 대통령 답게 당대 최고의 여배우라고 할 수 있는 마릴린 먼로(Marilyn Monroe)하고의 연애 소문이 있을 정도로 여성에게도 인기가 많았고, 그가 대통령으로 있던 당시 영부인이던 재클린 케네디((Jacqueline Kennedy)도 상당한 미모의 소유자였으며, 영부인으로서 인기도 많았다. 케네디 또한 준수한 외모를 가지고 있어, 이런 이미지는 미국인들에게 이상적으로 비추어 졌다. 무엇보다 최연소 대통령인 그는 미국 정치계에서 화려한 경력을 가지고 있었다. 1917년에 태어난 그는 미국 하버드 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할 정도로 인재였고, 2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태평양 전쟁에 참전하여 병사로서 활약했었다. 전쟁 이후 정계에 들어가 1950년대부터 민주당 정치인으로써 두각을 드러냈고, 결과적으로 1960년에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비록 2~3년이라는 매우 짧은 대통령 집권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도 인기가 많은 이유는 바로 거기에 있을지도 모르겠다.

 

F케네디는 한국현대사에서도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일 것이다. 19615.16 쿠데타를 통해 정권을 잡게 된 박정희(Park Jung Hee)가 우선적으로 했던 일이 자신과 동갑내기인 미국 대통령 케네디로부터 정권을 인정받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케네디는 박정희의 과거 남로당 경력을 끝까지 의심했던 인물이었고, 박정희는 자신이 좌익과 완전히 결별했다는 것을 인정받기 위해 미국으로 날아가 케네디를 설득해야만 했다. 궁극적으로 케네디는 박정희 정권을 인정했고, 그가 인정한 결정적인 이유는 박정희의 충실한 반공주의에 있었다. 즉 케네디는 박정희라는 반공주의적 성향의 지도자를 통해 한국을 공산주의에 맞서는 반공보루로써 이용할 생각이었던 것이다.

 

현재 미국의 정치가 공화당과 민주당의 구도이기 때문에 민주당이 공화당 보다 조금 더 진보적인 것처럼 비추어지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국제정치라는 영역에서 접근해보게 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오히려 민주당 쪽이 공화당만큼 혹은 그 이상으로 강경적이고, 더 친미적인 정책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현재 미국 민주당에게 있어 소위 진보의 이상으로 비추어지는 존F케네디도 본질적으로 공화당 못지않게 혹은 그 이상으로 반공주의에 기반한 제국주의적 외교정책을 추구했던 인물이다.

 

대표적으로 케네디의 반공주의적 성향을 입증할 수 있는 사례른 크게 두가지로 볼 수 있다. 첫 번째는 쿠바고 두 번째는 베트남이다. 1959년 피델 카스트로와 체게바라가 혁명에 성공하여 사회주의 국가를 수립했을 때, 미국의 아이젠 하워(Dwight Eisenhower) 대통령은 사회주의 정권을 전복시키려는 계획에 착수했다. 그는 CIA를 통해 쿠바 망명자들로 구성된 군대를 만들었다. 그러나 실제로 이 계획을 쿠바에서 실행한 인물은 바로 케네디였다. 19614월 케네디는 쿠바 망명자 1500명으로 구성된 CIA 군대를 상륙시키 피그스만 침공(Bay of Pigs Invasion)을 감행했다. 피그스만 침공은 실패로 끝났지만, 여기서 만족하지 않은 케네디는 소위 몽구스 작전(Operation Mongoose)이라 하여 쿠바를 겁박하는 작전을 그해 11월에 개시했었다. 또한 케네디는 CIA를 통해 쿠바의 지도자 피델 카스트로(Fidel Castro)를 암살하는 작전을 여러번 시도했었다.

 

19624월에는 미군 4만 명이 카리브해의 한 섬에 대한 상륙작전을 목표로 2주간 군사훈련을 시행했었다. 실제로 미국이 쿠바를 침공하고, 터키에 핵미사일을 배치하여 모스크바까지 타격할 수 있는 거리를 확보하자 쿠바와 소련은 이에 대응할 수밖에 없었다. 소련의 흐루쇼프(Nikita Khrushchev) 또한 핵미사일을 쿠바에 배치했고, 결국 이렇게 해서 일어난 일이 바로 쿠바 미사일 위기(Cuban Missile Crisis). 물론 여기에는 흐루쇼프가 케네디의 역량을 과소평가했었는데, 이것도 큰 패착이었다. 왜냐하면 케네디는 대외정책에 있어서 매우 강경한 입장이었기 때문이다.

 

쿠마 미사일 사태에서 가장 호전적인 모습을 보인건 바로 미국의 케네디였다. 케네디는 10월에 오르트색 작전(Operation Ortsac) 작전을 실시한다고 공표했었으며, 쿠바에 핵미사일이 배치되자 쿠바를 공격할 계획가 소련의 모스크바를 타격할 계획까지 세웠었다. 결국 쿠바 미사일 사태는 흐루쇼프가 케네디에게 굴복하면서 마무리 되었다. 세간에 알려진 것과는 다르게 여기서 가장 호전적인 나라는 소련이 아니라 바로 미국이었다. 19621022일 미국은 데프콘 3를 발령했고, 1024일에는 사상 처음으로 데프콘 2까지 발령했으며 소련 지역 목표물들에 대한 타격 준비를 마쳤었다. 케네디는 소련에 대한 자신의 최후통첩에 힘을 실어주기 위해 쿠바 고립책의 일환으로 해상 봉쇄 명령을 내렸고, 쿠바 침공을 위한 총공격 태세에 돌입했으며, 핵무기를 탑재한 B-52 폭격기까지 발신시켰었다. 또한 쿠바 미사일 사태의 궁극적인 원인은 소련의 쿠바 핵무기 배치가 아닌 미국이 터키 핵무기 배치에 있었다.

 

케네디는 대외반공정책은 쿠바에만 국한되지 않았었다. 그는 아주 비밀스럽게 베트남에서 새로운 유형의 전쟁에 착수했다. 당시 베트남은 북위 17도선을 중심으로 남북분단된 상태였다. 북부에는 독립운동가 호치민(Ho Chi Minh)을 중심으로 하는 사회주의 정권이 들어섰고, 남쪽에는 미국의 지원을 바탕으로 하는 응오딘지엠(Ngo Dinh Diem) 정권이 들어선 상태였다. 당시 미국이 내세웠던 응오딘지엠은 매우 부패한 정권이었다. 이들은 정통성에서도 북베트남 호치민에게 밀렸는데, 당시 응오딘지엠은 그 모순을 더욱 극대화하는 일들에 착수했다.

 

프랑스와의 전쟁 당시 독립운동을 했던 전직 베트민(Viet Minh)들은 응오딘지엠의 남베트남 사회에서 공산주의자로 몰려 감옥에 구금되고 처형됐다. 즉 응오딘지엠은 이런 강경한 반공산주의 정책을 추진함으로써 반공독재국가를 남베트남에 수립했다. 이런 배경속에서 바로 베트콩(Viet Cong)이 남베트남에서 탄생한 것이다. 제네바 협정을 위반했던 미국은 남베트남의 응오딘지엠 정권을 지원했다. 1950년대부터 소규모의 군사고문단을 배치해놓았는데, 1961년 존F케네디가 당선된 이후로 그 숫자는 점진적으로 증가했다. 케네디가 대통령에 당선됐을 당시 남베트남 주둔 미군사고문단(American Advisor)의 숫자는 800명에 불과했지만, 1963년에는 16000명까지 증가했다.

 

당시 케네디는 남베트남에서 소위 베트콩을 뿌리뽑고, 응오딘지엠 정권을 강화하기 위해 고문단을 증가하는 방식으로 맞섰다. 케네디는 소위 대게릴라전(Counterguerrilla Warfare)이라고 하여 그린베레(Green Beret)로 구성된 특수부대를 남베트남에 파병했는데, 이들의 목적은 남베트남에서의 게릴라를 소탕한다는 것이었다. 이들은 남베트남 중부고원지대에 들어가 그 지역 소수민족들을 민병대로서 활용했고, 라오스와 캄보디아에서도 작전을 전개했다. 이것은 사실상의 1954년에 맺은 제네바 협정을 명백히 위반한 행위였다. 더 나아가 그는 APC와 같은 최신식 장갑차량과 전투헬기를 남베트남군에게 지원했고, 고엽제 살포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러나 더 기가 막히는 사실은 존F케네디는 베트남 전의 본질을 잘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1950년대 사이공을 방문했던 케네디는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말기 호치민은 자국의 독립을 위해 싸우고 있고, 프랑스는 식민지배를 유지하고자 하기 때문에 독립을 위해 싸우는 이들이 그것을 쟁취해야 한다라는 연설을 했었다. 하지만 대통령이 되고 나서 그가 베트남에서 착수한 것은 프랑스 제국주의자들이 했던것과 똑같은 일이었다. 결국 그도 동남아시아에서 잔혹한 전쟁범죄를 저지르게 되는 물질적 토대를 형성해놓고, 1963년 암살당했다.

 

위에서 상술했듯이 많은 사람들이 존F케네디를 하면 이상적인 존재로 착각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하지만 케네디 또한 미국의 제국주의적 이익과 정치관계를 잘 대변하는 인물이었다. 한국의 박정희 정권 지원, 쿠바의 피델 카스트로 정권 전복 시도 그리고 남베트남에서의 미군사고문단 증강과 같은 일련의 행위는 존F케네디가 주도한 것이고, 그 일련의 행위를 통해 케네디가 이루고자 했던 것은 반공주의 보루를 견고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따라서 그는 제국주의를 대변하는 반공주의자다. 그가 미국 대통령으로 집권하면서 저지른 일련의 범죄행위들은 역사적 심판을 받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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