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의 사회주의 지도자 중에 대표적인 인물을 떠올리면 아마도 호치민과 마오쩌둥이 인지도가 가장 높을 것이다. 그 이유는 아마도 이들이 무장투쟁을 통해 혁명을 성공시켰다는 점, 그리고 게릴라전을 통해 제국주의에 맞서 싸웠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필립 쇼트가 쓴 <마오쩌둥 평전> 개정판에 따르면 1960년대 베트남 전쟁이 한 참일때, 베트콩의 게릴라전과 마오쩌둥 홍군의 게릴라전을 비교한 서방의 연구들이 많이 나오기도 했었다. 이런점에서 마오쩌둥과 호치민의 공통점이 부각되는건 당연할 일이었을 것이다.

 

사실 호치민은 혁명과정에서 마오쩌둥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마오쩌둥은 국공내전에서 승리한 이후 프랑스에 맞서 싸우고 있던 호치민과 공산당 군대에게 적잖은 물자를 지원했다. 심지어 군사고문단도 보내어 베트민을 훈련시켰으며, 트럭과 의약품, 대포, 소총화기 등은 중국에서 온 것이 많았다.

 

이는 베트남 전쟁에서도 마찬가지였다. 1956년 흐루쇼프의 스탈린 격하 운동 이후 사회주의 형제 국가인 중국과 소련은 수정주의 논쟁에서 대립하였지만, 1960년대 미제국주의에 맞서 북베트남에 막대한 물자지원을 해주었다. 이때도 중국제 트럭과 무기 그리고 식량은 북베트남군에게 있어 필수적인 것이었다. 특히 존슨 정부가 롤링썬더 작전을 감행하면서 북베트남은 식량 부족 현상에 시달렸는데, 이때 중국이 쌀을 지원하지 않았다면 많은 베트남인들이 굶어죽었을 것이다.

 

아무튼 20세기 역사에서 사회주의 중국과 베트남은 적어도 미국과 맞서 싸우는 과정까지는 동맹관계였다. 이런점도 호치민과 마오쩌둥이 같이 비교되기도 하는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거기다 둘다 총한번 안들고 동지들이 총을 들고 싸웠다는 점에서도 공통점이 있다. 그러나 호치민과 마오쩌둥은 가장 결정적인 차이점이 있다. 그 차이점은 무엇일까?

 

그 차이점은 바로 그들의 젊은시절 경험이다. 마오쩌둥은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을 건국하고 나서 스탈린을 만나러 소련을 방문할 때까지, 단 한번도 해외를 나간적이 없다. 무정부주의자였던 젊은 시절의 마오는 프랑스 유학을 꿈꾸기도 했지만, 본인은 다른 동지들의 초기 유학비용을 대느라 중국에 남았다. 거기다 그는 1930, 40년대 중국 연안의 홍군 기지에서 대부분을 보냈다. 쉽게 말해 외국을 깊게 알지 못했고, 그러기에는 경험상 부족했다.

 

반면 호치민의 경우는 달랐다. 호치민은 21살이 되던 1911년에 프랑스 기선인 아미랄 라투셰 트레빌호를 타고 베트남을 떠나 거의 전 세계를 돌아다녔다. 그는 5대양 6대륙을 다 다녔고, 특히나 세네갈이나 콩고와 같은 아프리카 국가에서 제국주의의 잔혹함을 두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1969년 당시 베트남을 방문한 칠레의 살바도르 아옌데를 스페인어로 환영할 정도로 스페인어도 나름 할줄 알았고, 이러한 내공은 젊은 시절 아르헨티나를 포함한 중남미 국가에서 쌓은 경험에서 나왔다.

 

그외에도 호치민은 1941년 중월 국경지대 팍 보에 기지를 세우기 전까지 베트남 독립운동을 해외에서 전개했다. 1930년에 창당된 인도차이나 공산당도 홍콩에서 창당됐다. 거기다 최근에는 젊은 시절 프랑스 파리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 인사들과 교류한 것이 문서로 밝혀졌다.


이처럼 호치민은 마오쩌둥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매우 국제적인 인물이었다. 따라서 두 사회주의 지도자에 대해 평가할 때, 항상 이러한 차이점을 염두해두며 평가해야한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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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4월 12일인 오늘은 인류 최초의 우주비행사 유리 가가린이 인류 최초로 우주탐험을 하게 된 날입니다. 그는 보스토크호를 타고 지구 한바퀴를 돌았고, 무사히 귀국하여 인류 최초의 우주비행사가 되었습니다. 인류 최초의 우주비행사라는 타이틀은 그 상징성이 매우 높습니다.


1961년 4월 12일 유리 가가린은 소련의 영웅이자 전 세계 노동인민의 영웅입니다. 그가 우주탐험을 하게 된 지 60년이 흘렀습니다. 비록 소련은 30년 전에 해체되었지만, 러시아인들을 위대한 영웅 유리 가가린을 결코 잊지 못합니다. 저 또한 그를 좋아합니다. <아무도 말하지 않는 미국 현대사>에 나오는 내용을 인용하며 마치겠습니다.
“소련은 우주 분야의 성취를 통해 적지 않은 정치적 효과도 보았다. 피그만 침공 5일 전인 1961년 4월 12일, 소련 우주인 유리 가가린이 인류 최초로 지구궤도 우주 비행에 성공했다. 아프리카 대륙 상공을 자나면서 가가린은 식민주의와 싸우고 있는 아프리카인들에게 격려 메시지를 보냈다. 3주 후 미국인 앨런 셰퍼드가 우주 비행에 성공했지만 궤도 비행에는 못 미쳐 빛이 바랬다. 이후 서유럽인의 40%가 소련이 전체 군사력 및 전반적인 과학적 성취 면에서 미국을 앞선다고 생각했다. 미국의 우위가 위태로워지는 것에 불안을 느낀 케네디는 이례적으로 상하 양원합동회의를 요청하고 그 자리에서 이렇게 선언했다. “우리가 자유냐 압제냐 하는 전쟁에서 이기려면 우리나라는 1960년대가 끝나기 전에 인간을 달에 착륙시키고 다시 안전하게 지구로 귀환시키는 목표를 달성해야 합니다.” 이 연설이 있고 나서 1년 가까이 지난 시점인 1962년 2월 존 글렌은 미국인으로는 최초로 지구궤도 비행에 성공했다. 지구궤도를 세 바퀴 돌고 아슬아슬하게 귀환했지만 미국인의 사기를 드높이기에는 충분했다. 그러나 62년 8월, 소련은 다시 지구궤도를 17바퀴 도는 우주비행선 보스토크 3호를 발사하고, 그다음 날에는 보스토크 4호까지 쏘아 올렸다. 이듬해인 63년 6월에는 일주일간 궤도 비행을 함으로써 세계의 주목을 끌었다. 우주선에는 최초의 여성 우주인 발렌티나 테레시코바도 타고 있었다.”
출처 : 아무도 말하지 않는 미국 현대사 I p.524~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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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미 2021-04-12 09: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놀라워서 찾아보니 이분이 세계최초 우주비행사네요!

NamGiKim 2021-04-13 12:51   좋아요 1 | URL
세계 최초죠!
 

(이 글은 지옥의 묵시록에서 주인공으로 출연한 배우이자 감독인 마틴 쉰이 제작한 다큐멘터리 ‘Vietnam American Holocaust’의 리뷰입니다.)

 

베트남 전쟁은 건국 이래 미국이 최초로 패배한 전쟁이다. 1960년대부터 1975년까지 대략 15년 동안 이 참혹하고도 잔인한 전쟁에 참전했던 미국은 핵폭탄을 제외한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이 전쟁을 수행했다. 물론 대니얼 엘스버그가 폭로한 펜타곤 페이퍼에 따르면 미국의 베트남 문제 개입은 대략 30년이나 된다. 베트남 전쟁은 참으로 참혹한 전쟁이자, 추악한 미국의 침략전쟁이었다. 미국은 북베트남과 남베트남 할 거 없이 대량의 폭탄을 투하했고, 이로 인한 베트남인들의 사망자는 급증했으며, 사실상 수백만이 죽었다.

 

F. 케네디 행정부에서 근무하며 이 전쟁을 계획했던 로버트 맥나마라는 베트남과 미국이 수교를 맺은 뒤, 미국이 베트남 전쟁에서 340만 명의 베트남인을 죽였다고 고백했다. 한 마디로 이 전쟁 자체가 미국의 일방적인 베트남인 학살극이었다는 것이다. 그런 전쟁을 일으키고 행한 주체가 바로 미국이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베트남 전쟁에서의 교훈을 얻지 못한 채 2003년 이라크 전쟁을 일으켜 똑같은 실수를 저지르고 있다는 것이 이 다큐멘터리 내용의 핵심이다.

 

다큐멘터리는 미국이 베트남 전쟁에 개입하게 된 역사에 대해 설명한다. 베트남의 역사는 2천 년 동안 중국의 침략에 맞서 저항해온 역사다. 이들은 939년에 중국의 지배에 맞서 자주적인 국가를 세웠으며, 그 이후에도 중국의 침략에 저항해왔다. 그러던 19세기 프랑스가 베트남을 식민지화했고, 베트남은 라오스와 캄보디아를 포함하여 프랑스의 식민지가 됐다. 당시 프랑스는 베트남을 식민지화하면서 베트남의 자원을 갈취해가고, 베트남인들을 차별했으며 폭압적인 식민통치를 자행했다.

 

그러던 1940년 프랑스가 제2차 세계대전에서 나치 독일에게 점령당하자, 일본이 인도차이나 반도를 접수했고, 일본은 기존에 있던 프랑스 식민통치 기반을 유지해나가며 인도차이나 반도를 식민 지배했다. 이 기간에 베트남인들은 프랑스와 일본에 맞서 독립운동을 벌였는데, 그 조직이 바로 베트민이었고, 그 베트민의 지도자가 바로 호치민이었다. 호치민은 젊은 시절 전 세계를 돌아다녔던 인물로 미국의 흑인인권운동가 마커스 가비에게 감명 받았었고, 미국의 자유주의 사상에도 나름의 호감을 가졌던 인물이다. 이후 1920년대 모스크바로가 코민테른 요원으로서 활동하기도 했지만, 이후 그는 미국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고 했었다.

 

1945년 일본이 패망한 이후 호치민은 베트남의 독립을 선포했다. 놀랍게도 그의 독립선언은 미국의 독립선언문과 비슷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의 대통령이었던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은 동맹국 프랑스의 식민정책에 반대 했었다. 그러나 루스벨트를 이어 대통령이 된 해리 트루먼은 반공주의적인 인물로써, 베트남의 문제를 냉전의 논리로 접근했다. 그 결과 트루먼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프랑스의 베트남 식민지 정책을 옹호했다.

 

베트남 독립을 선포했던 호치민은 1946년 항구도시 하이퐁이 프랑스군의 포격을 받자, 독립전쟁 즉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을 치르게 되었고,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프랑스를 몰아냈다. 당시 프랑스는 자신들의 치르고 있던 식민지 전쟁을 냉전의 흐름에 빚대어 자유주의 대 공산주의의 구도로 포장했고, 꼭두각시 황제 바오다이를 베트남 남부의 지도자로 내세웠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트루먼은 프랑스를 지원했다. 디엔비엔푸 전투 이후 제네바 회담이 개최되었고, 베트남은 북위 17도선으로 남북 분단됐다. 물론 이 분단에는 2년 이내에 통일을 위한 총선거를 실시한다는 전제조건이 붙었다.

 

여기서 미국은 바오다이가 통치하던 남베트남에 자신들의 꼭두각시인 응오딘지엠을 내세워 남베트남 공화국을 수립했고, 80%가 호치민을 지지할 것이라 판단하여 총선을 일방적으로 파기해버렸다. 그 결과 남베트남에는 응오딘지엠이 통치하는 무자비한 체제가 들어섰고, 민중들은 이에 저항하기에 이르렀다. 결국 이렇게 해서 남베트남에 창설된 것이 바로 베트콩이었던 것이다. 베트남 문제에 개입하던 미국은 존 F. 케네디 대통령때 미군사고문단을 보냈다. 이 숫자는 196316,000명으로 증가했다. 다큐멘터리에선 이를 프랑스 특수부대에서 미국의 그린베레로 바뀐 것이라 표현한다.

 

불교도와 학생 그리고 민중의 시위로 혼란스럽던 남베트남은 무너지고 있었다. 이걸 우려한 미국의 CIA는 응오딘지엠을 제거하고 새로운 정권을 남베트남에 만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베트남이 무너질 거라 걱정한 미국은 1964년 통킹만 사건을 조작하여 전면적인 침략을 게시하기에 이른다. 이것이 바로 미국의 베트남 전쟁 개입 전개과정이었으며, 명백히 미국의 침략전쟁이었다.

 

사실 1964년 통킹만 사건은 미국의 자작극이었다. 이들은 전쟁의 명분을 만들기 위해 북베트남 영해에 구축함을 포함한 함정들을 배치했고, 사건을 조작하여 북베트남 침공을 정당화했다. 19653월에는 미지상군이 상륙했고, 그 숫자는 해가 지날수록 더 늘어났다. 미 지상군이 참전하면서 베트남 전쟁의 전개양상은 참으로 추악해지고 잔혹해졌다. 특히나 수색과 섬멸 작전이라는 이름하에 수많은 민간인들이 베트콩으로 몰려 학살당했다. 당시 전쟁에 참전했던 참전용사들의 증언에 따르면, 이른바 자유 사격 지대에선 보이는 생명체는 모든 죽여도 됐다고 한다. 또한 베트콩이라는 의심만 가지고 증거 없이 죽일 수 있었다.

 

사살당한 민간인은 적군으로 바디 카운트가 되었으며, 그러한 위조와 조작은 수도 없이 많았다. 다큐멘터리는 미국이 베트남 전쟁에서 사살한 100~150만 명 이상의 베트콩과 북베트남군의 수치에 민간인들도 적잖게 포함되었다는 사실을 얘기해준다. 대표적인 민간인 학살 미라이 학살도 사실은 그런 날조된 바디 카운트로 군에 보고되었으며, 진상이 규명되기 전까지는 그저 베트콩 사살로 군 기록에 남아있었다. 이 과정에서의 부녀자 강간이나 아동사살이 빈번히 일어났고, 주민들이 살던 마을은 죄다 불에 태워졌다. 문제는 이러고 나면 민간인들이 거주할 곳이 사라졌고, 식량과 집 그리고 가족을 잃은 주민들이 당연히 분노할 수밖에 없었다. 이들이 베트콩을 지지한 이유도 그러했다. 미국이 전개한 피닉스 작전의 경우도 민간인을 베트콩으로 몰아 학살한 행위였다.

 

베트남 전쟁에선 미국은 대규모의 헬리콥터 작전을 전개했다. 수많은 헬리콥터가 베트남에 배치되었고, 이것은 미국이 화력 면에서 베트콩이나 북베트남군을 압도했다는 것을 몸소 보여줬다. 그러나 이 헬리콥터가 수행한 작전에서도 적잖은 민간인들이 죽었다고 다큐멘터리는 얘기한다. 헬리콥터가 발사한 기관총과 건쉽 그리고 미사일 등은 베트콩뿐만 아니라 민간인들을 베트콩으로 간주하고 사살하는 경우가 빈번했다. 물론 이것도 적군 사살로 얼마든지 군 자료에는 표기됐다.

 

베트남 전쟁에서 가장 많은 사망자를 야기한건 당연하게도 융단폭격이었다. 미국은 베트남 전쟁에서 대략 750만 톤에서 800만 톤에 달하는 폭탄을 투하했다. 남북베트남 할 거 없이 국토가 초토화되었다. 이 폭격을 계획했던 인물은 바로 로버트 맥나마라와 커티스 르메이 같은 미국의 관료들이었다. 특히나 닉슨 정부의 캄보디아 침공에선 이런 융단 폭격으로 캄보디아인 80만 명이 폴포트의 킬링필드 이전에 학살당했다고 다큐멘터리는 얘기한다. 한마디로 미국도 캄보디아에서 킬링필드를 저질렀다는 것이다.

 

당시 미국이 베트남에 투하한 폭탄 800만 톤은 히로시마에 떨어진 원자폭탄 640개와 맞먹는다고 한다. 커티스 르메이가 자주 표현하던 대로 미국은 베트남을 석기시대로 만들려고 있다. 다큐멘터리 또한 이러한 폭격에는 네이팜 폭탄을 비롯한 각종 폭탄이 투하되었으며, 미 공군의 폭격으로 파괴된 시설들 대다수는 민간 시설이었음을 지적한다. 미국의 이러한 민간인 학살 행위는 베트남인들이 미국에 저항하는 결정적인 이유가 되었다. 다큐멘터리는 미국의 이러한 맹목적인 무차별 폭격은 명백히 국제법을 위반한 행위였다고 설명한다. 특히나 그 피해자 대다수가 민간인이었기 때문이다.

 

미국은 이 전쟁에서 화확무기를 사용했는데, 그것이 바로 에이전트 오렌지로 대표되는 고엽제였다. 이 고엽제는 라오스와 캄보디아 그리고 베트남에 살포되었고, 400만 명의 베트남인이 고엽제에 노출되어 피해를 보았다고 한다. 그리고 이 고엽제로 최소 수십만 명이 사망했으며, 베트남 전쟁 이후에도 2008년 기준으로 최소 40만 명 이상의 고엽제 피해자들이 존재했다. 특히나 고엽제에 노출되었던 베트남인들 사이에선 기형아가 무수히 많이 태어났으며, 베트남의 국토 또한 이 고엽제로 고통을 받았다. 이 고엽제 투하 또한 미국의 융단 폭격과 더불어 전쟁범죄였다.

 

마틴 쉰 감독이 제작한 이 다큐멘터리는 이러한 사례를 들어 미국이 참전한 베트남 전쟁이 미국이 저지른 홀로코스트 행위였다는 사실을 입증한다. 또한 이 전쟁에서 미국이 300만에서 500만을 학살한 책임이 막중하다고도 설명한다. 다큐멘터리에서 설명한 것과 같이 호치민과 베트남인들은 그저 자신들의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침략자들과 압제자들에 맞서 싸운 것이었다. 그러나 이것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은 바로 미국이었다. 그리고 미국은 부도덕한 침략전쟁을 베트남에게 자행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수백만의 베트남인을 무차별 학살하는 야수적인 만행을 저질렀다.

 

다큐멘터리에선 미국 대통령들의 연설도 보여준다. 통킹만 사건을 조작하여 베트남에 침략을 자행한 미국의 린든 B. 존슨 대통령의 연설이 다큐멘터리에서 나온다. 존슨 대통령은 베트남이 계속 독립을 유지하고자 한다면, 본인들 나라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확인해라!”라고 지껄인다. 나는 이러한 존슨 대통령의 연설에 분노를 참기가 매우 힘들었다. 왜냐하면 이것이 바로 제국주의자들이 본인들의 침략 행위를 정당화 하는 구실이기 때문이다. 거기다 본인들이 그 나라의 독립을 방해한다는 사실을 아주 뻔뻔스럽게 인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화가 치밀어 오른다. 제국주의자들의 잔혹함과 파렴치함은 이처럼 침략전쟁을 말도 안되는 논리로 정당화한다는 점에 있다고 생각한다.

 

이 다큐멘터리는 이라크 전쟁이 일어난 지 5년 뒤인 2008년에 만들어졌다. 따라서 미국의 또 다른 침략전쟁이 이라크 전쟁이 베트남 전쟁과 같은 선상에서 많이 오버랩 시키는 측면이 있다. 물론 이 두 전쟁은 미국의 침략이라는 점에서 상당히 유사하고, 수많은 사망자가 미국에 의해 나왔다는 점도 일치한다. 거기다 미국이 이라크 전쟁에 개입한 것 또한 1964년 통킹만 사건 조작과 매우 비슷하다. 다큐멘터리는 미국이 베트남에서 3~5백만을 죽게 만들었지만, 2003년 이라크 침공으로 또 다른 백만 명의 이라크인을 학살했다고 규탄한다. 정말 훌륭한 다큐멘터리를 감상할 수 있었다. 이 다큐멘터리를 통해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미국의 추악하고 부도덕한 제국주의다. 베트남 전쟁이 어떻게 해서 미국의 학살극인지를 알고 싶어하는 이들에게 감상하길 매우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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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소병국 교수의 저서 동남아시아사에 있는 내용을 바탕으로 작성되었습니다.)

 

전 세계에서 4번째로 인구가 가장 많은 나라 인도네시아는 20세기 당시 네덜란드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인도네시아를 통치했던 네덜란드는 영국프랑스미국스페인이 다른 동남아시아 국가들에서 그랬듯이 폭압적인 통치를 자행했다. 20세기 초 인도네시아에선 이슬람 개혁주의자 집단과 이로 인한 개혁운동이 벌어졌고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던 1914년에는 스네블리트(마링으로 중국에서 제1차 국공합작을 성사시켰던 인물이다.)의 주도로 사회주의 단체가 창설되었다러시아 혁명 이후 인도네시아에선 1920년에 인도네시아 공산당이 창당됐다.

(수카로노, 수카르노는 현대 인도네시아의 건국의 아버지다. 지금도 국부로써 인정받고 있는 인물이다. 이후 제3세계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네덜란드의 식민 지배에 맞서 인도네시아에선 독립운동과 각종 사회혁명이 일어났는데여기서 큰 두각을 나타낸 인물이 있었다그가 바로 인도네시아 건국의 아버지 수카르노(Sukarno). 1920년대부터 독립운동을 전개한 수카르노는 이슬람과 마르크스주의 그리고 민족주의적인 요소를 결합하고자 했다. 1930년대에는 네덜란드 당국의 탄압을 받아 감옥을 왔다 갔다 했다. 1930년대 인도네시아는 네덜란드 당국의 탄압으로 독립운동 단체 활동이 크게 타격을 받았는데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 네덜란드가 나치 독일의 지배에 들어가면서 점차 바뀌기 시작했다.

 

대동아공영권이라는 망상에 사로잡혔던 일본은 1941년 진주만을 기습 공격하여 태평양 전쟁을 일으켰고동남아시아 국가들을 차례대로 점령했다. 1942년 일본은 인도네시아를 침략했고, 3월 8일 네덜란드 총독의 항복을 받아 점령을 마쳤다태평양 전쟁 초기 일본군이 대승을 거두었던 자바 해전이 있었던 것도 1942년 초였다자바해전 승리 이후 인도네시아의 점령을 마무리한 일본은 보르네오를 포함한 동부 인도네시아 지역을 제2함대의 병참기지로 만들기도 했다.

(수카르노와 인도네시아 현대사, 2018년 국내에 출판된 인도네시아사 관련 서적이다. 비교적 최근에 출판됐다.)

 

일본이 인도네시아에 입성하자 수카르노를 포함한 인도네시아 독립운동 세력들은 일본군을 환영하기에 이르렀다수카르노 또한 일본에 협력하는 방향으로 나갔는데얼마 지나지 않아 일본 군정 알 인도네시아 사람들은 고통에 시달리게 되었다수많은 인도네시아인들이 강제로 징용되어 버마나 태국 등지로 끌려갔고이들의 숫자는 최소 15만 명에 달한다그 외에도 일본 군정의 화폐 남발로 1943년엔 미드웨이 해전 이후 불리해진 전황과 더불어 인도네시아에는 인플레이션이 발생했다.

 

1943년 초 전황이 불리해지자 군정은 준 군사 조직을 만들어 대중 동원에 힘을 쏟았는데, ‘뻬따로 불리는 조국방위군이 창설되었다전쟁이 끝날 무렵엔 각종 준군사조직을 총칭해서 의용군의 수가 자바에서는 3만 7,000발리에서는 1,600명 그리고 수마트라에서는 2만 명에 달했다이 군대는 전후 인도네시아 국군의 근간이 되었다.

(당시 네덜란드에 맞서 독립전쟁을 벌였던 인도네시아 독립군)

 

1945년 초 인도네시아에서는 반일감정이 극에 달하게 됐다특히나 일본군의 폭압적이고 식민주의적인 통치가 불러온 결과였다초기에 일본군정 아래 성장했던 청년들과 군사조직들은 전국적으로 흩어져 있었다이를 계기로 1945년 3월 인도네시아 지도자들은 인도네시아독립준비위원회(BPUPKI)를 설립하고독립을 향한 활동을 전개하기에 이르렀다당연히 여기에는 수카르노도 참가했으며대통령 중심제와 단일 공화국을 근간으로 하는 인도네시아 최초의 헌법인 45년 헌법을 입안했다이들은 독립 실무준비위원회를 자카르타에서 발족하고 일본으로부터 독립을 얻고자 했다.

 

그러는 사이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항복을 선언했다수카르노와 하타가 독립 선포를 주저했었는데청년 집단들이 그 둘을 납치해 독립 선포를 강요했다이러한 우여곡절 끝에 수카르노는 결국 8월 17일 자신의 집 앞에서 우리 인도네시아 국민은 이 선언서로써 인도네시아 독립을 선언한다는 독립선언문을 낭독했다이렇게 해서 한국의 광복절보다 2일 늦은 8월 17일을 인도네시아의 독립기념일로 국가에서 기리게 되었다.

(인도네시아 독립전쟁에 참가했던 조선인 양칠성, 일본군에 강제징용되었던 그는 1945년 일본이 패망한 이후 인도네시아 독립군에 합류해서 싸우다 1949년에 전사했다. 이는 신비한 티비 서프라이즈에서도 다룬적 있다.)

 

수카르노의 독립선포 이후 청년집단을 무장투쟁 단체를 결성해 일본군 기지를 습격하여 하나하나 접수해 나갔다그러던 과정에서 그해 9월 말부터 10월 중순까지 영국 동남아시아 사령부 예하의 호주군이 인도네시아 대부분을 점령했다. 10월 25일 이후 인도네시아 무장세력과 영국군 간에 치열한 전투가 벌어져 영국군 사령관인 말라비 장군이 사망했는데교전이 있었던 수라바야 같은 경우 3주 동안 평정작업이 이루어졌다여기서 인도네시아인 6,000명이 사망했다.

 

그 이후 영국군과 호주군은 철수하고 네덜란드 세력의 복귀가 임박해졌다인도네시아에 다시 복귀한 네덜란드는 이른바 연방을 수립하려는 시도를 반복했다그러면서 1946년 7월부터 자보와 수마트라 외의 인도네시아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강화하기 시작했으며이로 인한 인도네시아인 들의 불만도 커져갔다. 1947년 7월 20일 네덜란드는 15만 명 규모의 군대를 동원해 대대적인 공세를 취하기 시작했다네덜란드에 맞선 인도네시아 독립전쟁이 발발한 것이다.

 

초기 전세는 네덜란드군이 삽시간에 자바의 주요 항구와 마두라동부 자바의 설탕 산지 등고같은 시설들을 점령하면서 공화국의 군대가 후퇴하게 됐다이후 독자적인 사회주의 세력이 이른바 마디운 쿠데타를 일으켰는데여기서 수카르노는 이들을 진압했다이로 인하여 공화국에서 좌파 세력이 제거되고미소냉전 쪽에서 서방의 지지를 얻을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그 결과 미국을 포함한 서방 진영이 인도네시아 독립투쟁을 적극적으로 지지하게 됐다물론 이 과정에서도 인도네시아 공화국군과 네덜란드 사이의 전투와 교전은 지속되었으며네덜란드는 공화국 정부를 전복하려고 안간힘을 썼다.

(인도네시아 독립전쟁 표현한 상상화)

 

1948년 12월 8일 네덜란드는 이른바 렌빌 휴전협정을 파기하고군사행동을 통해 공화국의 임시 수도인 족자카르타를 점령했다그러나 이것은 국제 사회에서 네덜란드가 비난에 휩싸이기 충분했다더 나아가 공화국 군부는 게릴라 부대를 활용해 인도네시아 전역에서 게릴라 전을 감행했다양측의 전투가 계속되는 사이 네덜란드가 세운 연방 소속 국가들이 하나둘 이탈하기 시작했고, 1949년 7월 1일 공화국 정부는 인도네시아가 독립할 수 있도록 보장할 것을 네덜란드에 요구했다당시 마셜 플랜으로 미국의 경제 원조를 받던 네덜란드는 미국의 압박에 시달렸고결국 네덜란드는 12월 28일에 인도네시아를 독립국가로 인정했다이렇게 해서 인도네시아 독립 전쟁은 수카르노와 이슬람 그리고 민족주의 계열 독립운동 세력의 승리로 끝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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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월 중국 우한에서 시작된 코로나 바이러스는 전 세계적으로 확장되어 지금도 우리 인류를 괴롭히고 있다.(물론 이제는 바이러스가 어디서 시작했는가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 이 전대미문의 질병으로 인하여 인류가 받고 있는 고통은 너무나도 크다. 20214월까지 코로나 바이러스 확진자가 단 한 명도 보도가 되지 않은 두 나라가 있다. 현재 코로나 바이러스 전 세계 현황을 확인할 수 있는 웹사이트인 코로나19(COVID-19) 실시간 상황판을 보면 두 나라만 회색으로 색칠되어 있다. 그 나라가 바로 투르크메니스탄과 북한이다.

 

투르크메니스탄과 북한은 공식적인 통계에서 지금까지 코로나바이러스 확진자가 단 한 명도 보도되지 않았다. 물론 이 부분에 있어 충분히 그러한 보도를 의심할 가치는 매우 높다. 왜냐하면 코로나 바이러스라는 것이 눈에 보이는 것도 아니고 인간과 인간사이의 접촉을 통해 전파되는 질병이기에 아무리 힘을 쓰고 막는다 하더라도 원천적으로 봉쇄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 반증으로 현재 그린란드나 아이슬란드 그리고 포클랜드 제도, 뉴칼레도니아 등과 같은 나라에서도 확진자가 적게나마 있다는 사실에서 확인이 가능하다. 그 외의 다른 아프리카 국가들 전역에서도 코로나 바이러스가 확장되고 있는 중이다.

 

물론 초기 방역을 철저하게 하거나 국경 및 항로봉쇄와 같은 조치로 코로나 바이러스를 아주 효율적으로 방어한 나라들도 있다. 대표적으로 뉴질랜드나 대만, 베트남, 라오스 그리고 캄보디아가 그러하다. 하지만 이 나라들 또한 코로나 바이러스 확진자는 분명 보고가 되었고, 지금도 적게나마 존재한다. 사회주의 국가들 중에서 의료강국으로 전 세계에 의사들을 보내 이론적 실천을 하는 쿠바 또한 확진자가 나오고 있다. 물론 엄청나게 창궐하는 미국과 가까이 있으면서 코로나 바이러스와 싸우고 있는 쿠바는 매우 모범적인 방역을 선보이고 있는 중이다.

 

아무튼 이러한 다른 나라들의 사례를 보았을 때, 북한에 공식적으로 코로나 바이러스 확진자가 0명이라는 것은 상식적으로 믿기 힘들다. 그것은 북한을 보다 객관적인 시각에서 보려고 하는 나 또한 그러하다. 이것은 분명히 숫자를 아무런 비판 없이 받아들이기 힘들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보았을 때 그러하다는 것이다. 만약에 북한이 최소한 현재 라오스 정도의 확진자(49명이다.)가 나왔다고 본인들 스스로 보도했다면, 개인적으로 믿어주기라도 하겠지만 공식 확진자 0명은 그 수치에 문제와 의구심을 제기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러한 개인적인 의구심과 문제제기와는 별개로 북한에 코로나 바이러스가 창궐했는가?”하는 문제는 개별적인 문제이다. 이러한 의심과 보도들은 코로나 바이러스 1차 유행부터 퍼졌기 때문이다. 국내 어용언론이나 서방언론들은 극우들에 의해 혹은 극우적 편견에 의해 재생산된 근거 없는 억측과 루머들을 사실인 것처럼 보도한다는 사실에서 충분히 비판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북한과 코로나 바이러스에 대해 얘기해볼까 한다.

 

(대표적인 자료로 이런 것이 있다.)

https://blog.naver.com/blueload487/222132355664

https://www.dailynk.com/20201013-3/

 

북한이 자신들의 국경을 차단한 것은 20201월부터였다. 이 시기 코로나 바이러스는 중국 우한에서 창궐하여 전 세계를 긴장하게 만들었는데, 그러한 과정 속에서 북한은 우선적으로 122일에 중국인 관광객들은 원천적으로 입국 금지 조치 시켰는데, 당시 북한이 통보한 내용은 우한 폐렴 때문에 북한은 관련 백신이 개발될 때까지 중국인 관광객의 입국을 무기한 중단하기로 했다.”였다. 그리고 이것은 국경 폐쇄를 겸하는 조치였다. 또한 초기 해외 입국하는 사람 거의 4주 가까이 격리하는 조치에 들어갔다.

 

(관련기사)

https://www.nocutnews.co.kr/news/5276984

https://www.news1.kr/articles/?3822722

 

따라서 북한은 2020122일부터 국경을 폐쇄하는 조치에 들어갔다. 이후 코로나 바이러스가 점차 다른 나라로 퍼지던 213일 동아일보에 새로운 기사가 올라왔다. 그것은 탈북자 출신의 기자 주성하가 쓴 코로나 예방차원 격리된 관료, 몰래 대중목욕탕 갔다가 총살이었다. 이러한 기사가 나오자 국내에선 북한의 코로나 예방법이 총살이라는 관점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특히나 북한에 대한 그 어떠한 거짓기사도 아무런 비판 없이 받아들이는 한국시민들에게 이러한 기사는 그 임팩트가 정치성향을 가리지 않고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되기에 이르렀다.

 

그 이후에도 북한 관련 코로나 루머들이 있었고, 20206월에서 7월 사이 한 탈북자 출신이 월북을 하면서 북한의 코로나 바이러스 최초 확진자라 얘기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당시 북한 측에서 모두 검사해본 결과 공식적인 측면에서 다 음성이 나왔다. 2020년 봄에서 여름 사이 일부 양심 없는 탈북자 단체에서 대북전단 살포와 같은 유치찬란한 짓거리를 벌였는데, 이들이 보낸 대북삐라에는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환자의 채액이 들어있기도 했었다. 이러한 점에서 생각해보았을 때, 극우세력들이 이런 짓을 했다는 사실에서 북한이 코로나 바이러스가 창궐하지 않았기에 일부러 창궐시키고자 이러한 부도덕한 행위를 저지른 것으로 판단된다. 그 외에도 2020101WHO 평양사무소장이 북한 사람 3,374명을 대상으로 검사한 결과 모두 음성이 나왔다는 보도가 있긴 했다.

 

(관련기사)

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2D&mid=shm&sid1=100&sid2=268&oid=001&aid=0011916756&fbclid=IwAR2dupq-lpPPhEYr4ZTGe_bjZcgMfEx3sF9Ag3TmZXwz4eOUMcyvyy4D2Fs

 

그러는 사이 20201010일 북한에선 당창건 75주년 열병식을 평양에서 가졌는데, 이 열병식에선 북한의 지도자 김정은이 우리는 코로나 바이러스를 국경을 봉쇄하여 원천차단했다.”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물론 이 퍼레이드는 북한군의 업그레이드된 탱크나 각종 군 장비 그리고 신형 대륙간탄도미사일이 등장하면서 세계의 주목을 군사적인 측면에서 가지게 했지만 말이다. 이 열병식을 통해 알 수 있는 사실은 적어도 북한이 이런 전 세계적 질병사태에서 수도에서 열병식을 가질 정도로 자신들 나름의 방역을 했다는 것을 보여준 사례일수도 있다. 그 이후에도 2021년 신년 행사와 114일 조선로동당 8차 당대회 기념 열병식도 거행되었다.

 

이러한 사례를 놓고 보았을 때, 북한에서 코로나 확진자가 창궐했을 것 같지는 않다. 왜냐하면 이러한 큰 행사들은 기본적으로 코로나 바이러스가 창궐하면 할 수 없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2021114일 북한의 열병식은 2020110일의 열병식과는 조금 다른 모습도 있었다. 이것은 열병식 행사에 참가한 북한 시민들의 마스크 착용률이 생중계되는 텔레비전에서 육안으로 확인될 정도로 높아진 것이었다. 그리고 2021년 이후 보도되는 북한의 거리의 모습에서도 2020년 보다 마스크를 착용하고 다니는 시민들의 모습이 자주 포착된다. 즉 이러한 점에서 코로나 바이러스 공식 확진자가 0명이라는 보도는 분명히 의심해야한다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북한에서 코로나가 창궐하지 않았을 가능성을 높게 입증하는 또 다른 증거가 있다. 인도적 지원단체가 보낸 방역물자를 상당량 수령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202091,888만 달러였던 대중국 수입량이 10월 들어 26만 달러로 98%이상이나 감소했다. 이것은 북한이 자력갱생하고자 했다는 것을 뜻한다. 그해 여름에 북한은 수해로 무너진 집 수천 세대를 새로 짓고, 복구 작업을 한 것인데 이것은 북한 스스로 밝혔듯이 유사시 비축해둔 물자를 털어서 진행한 복구 잡업이었다.

 

(임종금 기자의 페이스북 글)

https://www.facebook.com/rosua.kr/posts/3699109793478653

 

(참고한 기사)

https://www.news1.kr/articles/?4263144

 

만약에 일각에서 얘기하는 것과 같이 북한에서 엄청나게 확진자가 대량으로 창궐했다면, 적어도 그 구호물자를 받았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는 것은 자신들 내부에서 어느 정도의 통제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반증이다. 그러나 앞에서 누누이 설명한 바와 같이, 전 세계적으로 그것도 그린란드나 아이슬란드, 그 외의 아프리카와 태평양 사모아를 포함한 미크로네시아 지역까지 창궐하는 전대미문의 질병속에서 공식적인 확진자 0명이라는 주장은 신뢰가 매우 떨어진다. 물론 주성하 기자가 주장한 코로나 확진자를 총살해서 없앴다는 식의 주장도 너무나 신빙성이 떨어지는 주장으로 현송월 포르노물 총살 기사처럼 아무런 근거가 없다. 아무튼 북한도 코로나 바이러스를 잘 이겨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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