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소병국 교수의 저서 동남아시아사에 있는 내용을 바탕으로 작성되었습니다.)
전 세계에서 4번째로 인구가 가장 많은 나라 인도네시아는 20세기 당시 네덜란드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인도네시아를 통치했던 네덜란드는 영국, 프랑스, 미국, 스페인이 다른 동남아시아 국가들에서 그랬듯이 폭압적인 통치를 자행했다. 20세기 초 인도네시아에선 이슬람 개혁주의자 집단과 이로 인한 개혁운동이 벌어졌고,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던 1914년에는 스네블리트(마링으로 중국에서 제1차 국공합작을 성사시켰던 인물이다.)의 주도로 사회주의 단체가 창설되었다. 러시아 혁명 이후 인도네시아에선 1920년에 인도네시아 공산당이 창당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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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카로노, 수카르노는 현대 인도네시아의 건국의 아버지다. 지금도 국부로써 인정받고 있는 인물이다. 이후 제3세계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네덜란드의 식민 지배에 맞서 인도네시아에선 독립운동과 각종 사회혁명이 일어났는데, 여기서 큰 두각을 나타낸 인물이 있었다. 그가 바로 인도네시아 건국의 아버지 수카르노(Sukarno)다. 1920년대부터 독립운동을 전개한 수카르노는 이슬람과 마르크스주의 그리고 민족주의적인 요소를 결합하고자 했다. 1930년대에는 네덜란드 당국의 탄압을 받아 감옥을 왔다 갔다 했다. 1930년대 인도네시아는 네덜란드 당국의 탄압으로 독립운동 단체 활동이 크게 타격을 받았는데,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 네덜란드가 나치 독일의 지배에 들어가면서 점차 바뀌기 시작했다.
대동아공영권이라는 망상에 사로잡혔던 일본은 1941년 진주만을 기습 공격하여 태평양 전쟁을 일으켰고, 동남아시아 국가들을 차례대로 점령했다. 1942년 일본은 인도네시아를 침략했고, 3월 8일 네덜란드 총독의 항복을 받아 점령을 마쳤다. 태평양 전쟁 초기 일본군이 대승을 거두었던 자바 해전이 있었던 것도 1942년 초였다. 자바해전 승리 이후 인도네시아의 점령을 마무리한 일본은 보르네오를 포함한 동부 인도네시아 지역을 제2함대의 병참기지로 만들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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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카르노와 인도네시아 현대사, 2018년 국내에 출판된 인도네시아사 관련 서적이다. 비교적 최근에 출판됐다.)
일본이 인도네시아에 입성하자 수카르노를 포함한 인도네시아 독립운동 세력들은 일본군을 환영하기에 이르렀다. 수카르노 또한 일본에 협력하는 방향으로 나갔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일본 군정 알 인도네시아 사람들은 고통에 시달리게 되었다. 수많은 인도네시아인들이 강제로 징용되어 버마나 태국 등지로 끌려갔고, 이들의 숫자는 최소 15만 명에 달한다. 그 외에도 일본 군정의 화폐 남발로 1943년엔 미드웨이 해전 이후 불리해진 전황과 더불어 인도네시아에는 인플레이션이 발생했다.
1943년 초 전황이 불리해지자 군정은 준 군사 조직을 만들어 대중 동원에 힘을 쏟았는데, ‘뻬따’로 불리는 조국방위군이 창설되었다. 전쟁이 끝날 무렵엔 각종 준군사조직을 총칭해서 의용군의 수가 자바에서는 3만 7,000명, 발리에서는 1,600명 그리고 수마트라에서는 2만 명에 달했다. 이 군대는 전후 인도네시아 국군의 근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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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네덜란드에 맞서 독립전쟁을 벌였던 인도네시아 독립군)
1945년 초 인도네시아에서는 반일감정이 극에 달하게 됐다. 특히나 일본군의 폭압적이고 식민주의적인 통치가 불러온 결과였다. 초기에 일본군정 아래 성장했던 청년들과 군사조직들은 전국적으로 흩어져 있었다. 이를 계기로 1945년 3월 인도네시아 지도자들은 인도네시아독립준비위원회(BPUPKI)를 설립하고, 독립을 향한 활동을 전개하기에 이르렀다. 당연히 여기에는 수카르노도 참가했으며, 대통령 중심제와 단일 공화국을 근간으로 하는 인도네시아 최초의 헌법인 45년 헌법을 입안했다. 이들은 독립 실무준비위원회를 자카르타에서 발족하고 일본으로부터 독립을 얻고자 했다.
그러는 사이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항복을 선언했다. 수카르노와 하타가 독립 선포를 주저했었는데, 청년 집단들이 그 둘을 납치해 독립 선포를 강요했다. 이러한 우여곡절 끝에 수카르노는 결국 8월 17일 자신의 집 앞에서 “우리 인도네시아 국민은 이 선언서로써 인도네시아 독립을 선언한다”는 독립선언문을 낭독했다. 이렇게 해서 한국의 광복절보다 2일 늦은 8월 17일을 인도네시아의 독립기념일로 국가에서 기리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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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네시아 독립전쟁에 참가했던 조선인 양칠성, 일본군에 강제징용되었던 그는 1945년 일본이 패망한 이후 인도네시아 독립군에 합류해서 싸우다 1949년에 전사했다. 이는 신비한 티비 서프라이즈에서도 다룬적 있다.)
수카르노의 독립선포 이후 청년집단을 무장투쟁 단체를 결성해 일본군 기지를 습격하여 하나하나 접수해 나갔다. 그러던 과정에서 그해 9월 말부터 10월 중순까지 영국 동남아시아 사령부 예하의 호주군이 인도네시아 대부분을 점령했다. 10월 25일 이후 인도네시아 무장세력과 영국군 간에 치열한 전투가 벌어져 영국군 사령관인 말라비 장군이 사망했는데, 교전이 있었던 수라바야 같은 경우 3주 동안 평정작업이 이루어졌다. 여기서 인도네시아인 6,000명이 사망했다.
그 이후 영국군과 호주군은 철수하고 네덜란드 세력의 복귀가 임박해졌다. 인도네시아에 다시 복귀한 네덜란드는 이른바 연방을 수립하려는 시도를 반복했다. 그러면서 1946년 7월부터 자보와 수마트라 외의 인도네시아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강화하기 시작했으며, 이로 인한 인도네시아인 들의 불만도 커져갔다. 1947년 7월 20일 네덜란드는 15만 명 규모의 군대를 동원해 대대적인 공세를 취하기 시작했다. 네덜란드에 맞선 인도네시아 독립전쟁이 발발한 것이다.
초기 전세는 네덜란드군이 삽시간에 자바의 주요 항구와 마두라, 동부 자바의 설탕 산지 등고같은 시설들을 점령하면서 공화국의 군대가 후퇴하게 됐다. 이후 독자적인 사회주의 세력이 이른바 마디운 쿠데타를 일으켰는데, 여기서 수카르노는 이들을 진압했다. 이로 인하여 공화국에서 좌파 세력이 제거되고, 미소냉전 쪽에서 서방의 지지를 얻을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그 결과 미국을 포함한 서방 진영이 인도네시아 독립투쟁을 적극적으로 지지하게 됐다. 물론 이 과정에서도 인도네시아 공화국군과 네덜란드 사이의 전투와 교전은 지속되었으며, 네덜란드는 공화국 정부를 전복하려고 안간힘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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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네시아 독립전쟁 표현한 상상화)
1948년 12월 8일 네덜란드는 이른바 렌빌 휴전협정을 파기하고, 군사행동을 통해 공화국의 임시 수도인 족자카르타를 점령했다. 그러나 이것은 국제 사회에서 네덜란드가 비난에 휩싸이기 충분했다. 더 나아가 공화국 군부는 게릴라 부대를 활용해 인도네시아 전역에서 게릴라 전을 감행했다. 양측의 전투가 계속되는 사이 네덜란드가 세운 연방 소속 국가들이 하나둘 이탈하기 시작했고, 1949년 7월 1일 공화국 정부는 인도네시아가 독립할 수 있도록 보장할 것을 네덜란드에 요구했다. 당시 마셜 플랜으로 미국의 경제 원조를 받던 네덜란드는 미국의 압박에 시달렸고, 결국 네덜란드는 12월 28일에 인도네시아를 독립국가로 인정했다. 이렇게 해서 인도네시아 독립 전쟁은 수카르노와 이슬람 그리고 민족주의 계열 독립운동 세력의 승리로 끝이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