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대한민국 대학생들의 생각에 큰 전환과 충격을 갖다 준 책 한권이 있다그 책은 1950 6 25일에 일어났던 6.25전쟁 즉 한국전쟁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국내에 알려준 저작이었다바로 미국의 역사학자 브루스 커밍스(Bruce Cummings)가 쓴 한국전쟁의 기원(The Origins Of The Korean War)이다. 1960년대 당시 미국 평화봉사단일원으로 한국을 방문했던 그는 이후 한국 근현대사에 대한 연구에 집중했고특히 한국전쟁 관련 연구에 많은 노력을 했다또한 1970년대에는 북한을 방문했으며북한에 대해서도 많은 연구를 했다즉 이런 연구를 통해 그가 만든 작품이 바로 한국전쟁의 기원인 것이다.

(한국전쟁의 기원)

 

한국전쟁의 기원은 영문으로 대략 1,000페이지가 넘는 그의 방대한 연구서이며, 1권과 2권으로 나누어져 있다. 1권은 1945년부터 1947년까지의 해방정국을 분석했고, 2권은 1947년 해방정국부터 1950년 한국전쟁 발발까지를 분석했다한국전쟁의 기원은 1980년대 군사독재 정권에 저항했던 대학생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이들이 받은 충격은 리영희 교수가 쓴 전환시대의 논리』 못지않았다고 나는 믿고 있다한국전쟁에 관해 깊은 연구를 했던 그의 저서는 국내에서 이적표현물이 되었고이에 따라 한국전쟁의 기원』 2권은 국내에 출간되지 않았다.

 

전두환 군사독재 정권이 이 책을 탄압한 이유는 분명했다한국전쟁의 기원이 당시 정부가 제시하는 한국전쟁관과 전혀 다른 해석을 했었기 때문이다따라서 이는 반공주의에 위배되는 내용이었던 것이다브루스 커밍스는 한국전쟁에 대해 깊게 연구하며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했다그는 한국전쟁의 발발 시점을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이 기습 남침했다는 부분에 중심을 두지 않았다그는 한국전쟁을 일제시대부터 거슬러 올라가 그 기원을 찾았다그는 한국전쟁 당시 북한 지도부였던 김일성과 주류 인사들이 1930년대에는 만주에서 항일무장투쟁을 했던 반면남한 지도부들 특히 군부의 경우 독립운동가들을 토벌했던 친일파들이었다고 주장했다그리고 1945년 해방 이후 남한에 미군정이 들어오면서 이러한 대립구도(친일파vs독립운동가)가 지속적으로 이어졌고, 1950년 한국전쟁에서도 마찬가지였다는 것이다따라서 이러한 역사적 사실에 근거하여 보았을 때한국전쟁이 북한의 민족해방전쟁이었다는 것이 브루스 커밍스의 주장이다.

(브루스 커밍스)

 

그는 한국전쟁에 대해 누가 먼저 일으켰느냐는 프레임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했으며전쟁의 구도와 성격 그리고 맥락을 중심적으로 파악해야 한다 봤다물론 1990년대 동구권 붕괴 이후 박명림 교수나 국내의 몇몇 사학자들이 커밍스 교수의 자료를 반박하는 시도를 감행했고커밍스의 주장이 반박당하기도 했으나이것이 커밍스가 제시한 민족해방전쟁론에 대한 완벽한 반박이 된 것은 아니었다천안함 사건과 연평도 포격 사건이 있던 2010년 브루스 커밍스는 The Korean War: A History라는 한국전쟁 관련 신간을 출간했고그 신간은 2017년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이라는 이름으로 국내에 번역됐다물론 이 책에서도 브루스 커밍스는 한국전쟁을 김일성의 민족해방전쟁이라는 관점에서 해석했으며따라서 한국전쟁의 기원에서 가지고 있던 입장을 버리지 않았다.

 

물론 브루스 커밍스가 제시한 민족해방전쟁론은 좌우 할거 없이 많은 사람들이 불편함을 느낄 것이다그러나 나는 이 민족해방전쟁론에 대해 완벽한 반박을 하는 반공주의자들을 본적이 없다그저 낡은사관이라는 말만 얼버무릴 뿐커밍스가 제시한 근거(친일파vs독립운동가 등등)를 완벽히 반박하는 사례는 못 봤다오히려 이승만 정부부터 반복된 침략자 김일성이 나쁜거니 한국전쟁은 다 김일성 책임이야와 같은 주장들만 반복될 따름이다이것은 개인적 입장부터 학계까지 광범위하게 퍼져있다.

 

사학 전공자로써 나는 브루스 커밍스의 민족해방전쟁론이 틀리지 않다고 생각한다그리고 커밍스의 민족해방전쟁론은 국제적인 시각에서도 해석이 가능하다고 본다당시 미국의 대아시아 정책을 보면 그 구도는 명확해진다. 1950년 한국전쟁 과정에서 미국의 대아시아 전략은 한반도에서는 북한과 중국을 상대하는 것이었고대만해협에서는 장제스를 지원하는 것이었으며인도차이나 반도에서 식민지 전쟁을 치르던 프랑스를 지원하여 호치민의 독립운동을 막는 것이었다따라서 이런 국제적인 구도에서 한국전쟁은 민족해방전쟁이라는 것이 내 생각이며한국전쟁을 김일성과 호치민 그리고 마오쩌둥의 사회주의 국제연대라는 시각에서 연구 성과물이 나와야 한다고 생각한다앞으로 역사학을 전공하면서 이쪽으로 깊은 연구를 하고 싶을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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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의 안개 (The Fog of War)
소니픽쳐스 / 2005년 1월
평점 :
품절


지난주 네이버 영화에서 맥나마라와의 인터뷰를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안개의 전쟁(The Fog of War)을 봤다. 다큐멘터리는 제2차 세계대전 참전용사이자, 포드 자동차 회사의 전 CEO, 하버드 대와 버클리대를 수석으로 나온 천재, 존 F. 케네디 행정부의 비서이자 베트남 전쟁 계획자, 세계은행 그룹 총재였던 맥나마라의 일생을 인터뷰 형식으로 다룬다.

(안개의 전쟁 포스터)

다큐멘터리는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하여 중동전쟁에 피를 뿌리던 시점에 제작됐다. 다큐멘터리는 맥나마라의 인생을 총체적으로 보여준다. 따라서 다큐멘터리는 그가 가지고 있던 첫 번째 기억부터 현재까지의 기억을 알려주며, 맥나마라의 관점은 어떠한 것인지를 알려준다.
맥나마라의 첫 번째 기억은 놀랍게도 1918년 11월 제1차 세계대전이 종결된 것이었고, 이후에 덮친 스페인 독감이었다. 그는 미국의 전형적인 인재였다. 명문대를 다니면서, 항상 특출난 두뇌로 많은 사람들에게 각광받았으며, 이것을 토대로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미공군 전략 사령부에서 장교로 근무했다.

당시 그는 독일과 일본을 폭격하는 전략을 커티스 르메이와 함께 세웠으며, 이 전략은 미 공군이 독일과 일본을 쑥대밭으로 만드는 데 기여했다. 특히 1945년 3월에 있던 도쿄폭격은 하루만에 일본 민간인 8만 명에서 10만 명을 가루로 만들어 버렸다. 그리고 비슷한 파괴가 일본의 도시 곳곳에서 발생했다. 미공군의 폭격에 의해서 말이다.


(케네디 행정부 시절 케네디와 맥나마라)
그는 포드 회사에 근무하면서 사장까지 올랐던 인물이다. 그 과정에서 돈도 많이 벌었다. 그러던 그에게 정치를 제안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바로 미국의 존 F. 케네디였다. 맥나마라는 그의 비서 및 국방장관으로 있으면서, 케네디의 대베트남 정책을 세웠다.

그는 천재적인 통계와 철저한 계산을 통한 데이터를 바탕으로 남베트남의 응오딘지엠 정권을 지원했다. 그에 따르면, 케네디는 베트남 전쟁을 확전할 의지가 없었다고 하며, 이는 디엠의 암살과 케네디의 암살 이후 존슨 대통령이 선택이었다고 주장한다. 그 결과 베트남인 340만 명이 일방적으로 학살당하는 베트남 전쟁이 일어난 것이다. 그에 따르면 케네디는 디엠 정권을 지원하다가 미군사고문단을 철수하려 했다.

베트남 전쟁을 일으켰던 그는 나중에 자신이 실수했음을 인정했으며, 1995년 미국과 베트남의 외교관계 개선을 위해 하노이를 방문했다. 또한 그는 자서전에서 베트남 전쟁이 전적으로 미국의 오만한 착오와 실책이었음을 솔직하게 밝혔으며, 미국의 폭격과 고엽제 투하 및 군사작전으로 340만 명의 베트남인이 학살당했음을 인정했다.
(인터뷰 당시 맥나마라)

나는 맥나마라가 과거를 반성했다는 점에서 적어도 2003년 명분없는 이라크 전쟁을 일으키고도 반성따위는 전혀없는 부시나 딕 체니하고는 다르다고 생각한다. 비록 제국주의자였으나, 어쨌든 자신의 과오를 인정했다. 그리고 평화책을 더 강구하는 모습을 말년에 보이게 됐다.

따라서 이런 점에서 나는 맥나마라를 단순히 미워할 수만은 없다고 생각한다. 잘 만든 다큐멘터리다. 안본사람은 한번 감상하길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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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난 이래로 한반도에서 다시 전쟁의 위기가 극단적으로 치달은 적이 있었다바로 1968년의 한반도 위기가 그러했다. 1953 7 27일 휴전협정이 발효된 이후에도 남북한의 긴장관계는 한반도에서 지속적으로 존재해왔다아이러니 하게도 한국전쟁은 남북한의 지도자의 정치권력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흘렀다북한에서는 김일성의 입지가 예전보다 더 강해졌고남한에서는 이승만이 그러했다그러던 1960 4.19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무너지고 장면 정부가 들어섰지만, 1961 5 16일 박정희 중심의 군부 쿠데타로 제3공화국이 탄생했다.


이와 더불어 북한의 김일성은 남로당과 연안파 그리고 소련파 사이에서의 권력투쟁에서 승리를 얻음과 동시에미군 폭격으로 파괴된 나라를 재건하는 사업에 착수했다소위 전후복구와 천리마 운동은 북한을 빠르게 발전시켰다북한의 경제는 빠르게 발전했다당시 한국은 박정희 정부가 산업화를 가동하기 전까지 부정부패와 정치적 혼란 그리고 빈곤이 도사리고 있었지만이와 대조적으로 북한의 체제는 안정적이었다. 1960년 기준으로 북한의 세계 경제력 규모가 49위였던 반면 남한의 경제규모는 101위였다는 점에서 그 차이가 얼마나 현저했는지 알 수 있다사실 남한이 북한을 경제적으로 앞지른 것은 1980년대 중후반에 가서야 있던 일이었다.

(1968년 청와대 기습 공격 사건)

 

1960년대 당시 북한은 무상의료와 무상교육 등 사회주의 체제가 갖춘 기본적인 복지체계가 확고히 잡혀 있었으며적어도 이웃나라였던 사회주의 중국보다 더 경제사정이 좋았다이후 칠레의 대통령이 되는 살바도르 아옌데는 1960년대 당시 북한을 방문했었는데북한의 무상의료 체제와 무상교육 체제에 깊은 감명을 받았었다놀랍게도 당시 칠레의 실질적 소득 수준은 북한의 몇 배에 달하는 수준이었다즉 이러한 점에서 보았을 때당시 북한의 사회주의 체제가 얼만큼 발전했는지 알 수 있다이런 사정이었기에 실제로 북한은 냉전이라는 흐름에서 제3세계나 사회주의 진영의 투쟁을 돕고자 했다당시 북한이 쿠바베트남이집트인도네시아 등을 도왔던 것도 이러한 이유였다.

 

그러던 1968년 한반도에서는 놀라운 일이 터졌다바로 청와대 기습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김신조를 포함하여 31명으로 편성된 북한의 특수부대인 124군 부대가 청와대 기습을 목표로 휴전선을 넘어 수도 서울에 침투한 것이었다이들이 공격 목표로 삼은 장소는 청와대와 주한 미대사관육군본부 등이었다이들의 침투는 결국 들통이 나서 김신조 1명을 생포하고 29명을 사살했다나머지 1명은 북한으로 도망친 걸로 추정된다생포된 김신조는 공개 인터뷰에서 자신의 목적이 대한민국 대통령 박정희를 암살하는 것이었다고 밝혔다.

(북한군에게 포로로 잡힌 푸에블로호 선원들)

 

청와대 기습 사건이 있은 지 2일 뒤인 1월 23일 북한에서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북한 영해에서 해군기지항만시설해안가 지형 등을 정탐하던 미 해군 정찰함 USS 푸에블로(USS Pueblo AGER-2)호가 해상 순찰 중이던 인민군 해군에게 나포된 것이었다당시 배를 포위한 인민군들은 푸에블로호에 사격을 가해 배에 탑승 중이던 미군 수 명을 사살하고 선언 80여 명을 포로로 붙잡았다또한 배에 있던 각종 무기와 탄약최신예 정탐장비(전파탐지기도청장치암호해독 장치 등)를 노획하기도 했다이렇게 되면서 미국의 존슨 행정부도 한반도 문제로 발칵 뒤집히게 됐다.

 

청와대 기습 사건과 푸에블로호 나포 사건으로 한반도는 다시 전쟁 위기가 고조됐다이 사건 이후 대한민국 사회에서는 반공관변집회가 연이어 일어났고곳곳에 타도하자 김일성!”, “때려잡자 김일성!”등과 같은 구호가 걸렸었다그리고 미국의 존슨 정부는 핵추진항모 USS 엔터프라이즈 호 등 함선 4척으로 구성된 기동부대를 원산만 인근 해역에 급파해 해상 무력시위를 벌였으며미국 본토에선 해군과 공군 예비역 1만 4,600여 명에게 소집령을 내리고 전투기 372대에 출동 대비태세를 명령했으며오산 주한미군 공군기지엔 전략폭격기인 B-52 2대와 F-105 전투기 수십 대를 배치했다그리고 남한의 국군 병력도 비상동원령이 내려졌다남한에서는 이 시점으로 주민등록증 발급교내 교련수업 필수화 등 실시하게 됐다.

(현재 평양 대동강에 있는 미국의 정탐선 푸에블로호)

 

이에 따라 북한에서도 맞대응에 나섰다. 1968년 2월 8일 김일성은 보복에는 보복으로전면전쟁에는 전면전쟁으로를 강조하면서 미국과 한국의 침략에 결사항전 하겠다는 의지를 보였다이에 따라 북한에서도 전국적으로 전투준비태세를 갖추었으며인민군과 로농적위대는 물론 일반민중들도 전투준비태세를 갖췄었다이처럼 한반도의 상황은 당장 전쟁이 일어나더라도 무리가 아닌 상황이었다.

(김일성과 호치민)

 

다행히도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다당시 사회주의의 한축이던 중국과 소련은 갈등을 보이고 있었고미국은 베트남 전쟁의 수렁에 빠져 있었다특히나 1968년 1월 31일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이 남베트남 전역에서 감행한 구정 공세(Tet Offensive)로 미국 내 베트남전 반전 여론은 급상승했다이에 따라 미국은 1968년 12월 판문점에서 푸에블로호의 영해 침범 사실과 정탐행위를 인정했고북한은 억류했던 80명의 선원들을 전부 석방했다. 1968년 당시 북한이 청와대를 기습하여 박정희를 죽이려 했던 사건에 미국은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지만푸에블로호 사건에는 격렬히 반응했다여기서 박정희가 미국에게 배신감을 느꼈던 것으로 보인다이것은 1970년대 박정희가 독자노선을 생각했다는 주장의 근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박정희와 응우옌반티에우)

 

반면 북한의 청와대 기습 공격 사건은 국제연대라는 관점에서도 해석이 가능하다베트남 전쟁 당시 한국은 미국을 따라 친미정권인 남베트남에 지상병력을 파병했다그에 반해 국제주의 노선을 천명했던 북한은 북베트남에 공군 조종사를 보냈다즉 북한은 당시 호치민의 북베트남과 연대를 표명하고 있었던 것이다그리고 북한에서 청와대 기습 공격을 감행할 때베트남에서는 북베트남 정규군이 미해병대 기지가 있는 케산을 포위 공격했다즉 1968년 1월 21일에 서울 인근 지역과 남베트남의 케산지역에서는 전투가 벌어진 것이다이런 사실을 비추어 양측의 국제연대라고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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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에 시작된 산업혁명은 유럽의 열강들을 이른바 제국주의 국가로 발전시켰다영국프랑스독일미국벨기에네덜란드이탈리아러시아 등이 이러한 반열에 있었으며이들의 식민 지배는 전 세계로 확장됐다또한 동양에서는 이들의 영향을 받아 에도막부를 거쳤던 일본이 탈아입구를 외치며 서구 열강 대열에 오르고자 했다이러한 열강들의 식민지 및 시장경쟁이 결국 전쟁으로 일어났는데그것이 바로 1914년에 일어난 제1차 세계대전(World War I)이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제1차 세계대전 이전 서구 열강들의 팽창은 필연적으로 각국의 분쟁과 갈등을 불러일으켰다특히나 1871년 제2제국을 선포한 독일이 빌헬름 2세 시대에 들면서 식민지 팽창에 나섰는데이것은 기존의 제국주의 세력이던 영국과 프랑스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영토만 거대했던 사실상 후진 국가였던 러시아 제국도 점차 자본주의화를 거치기 시작했다당시 영국과 프랑스는 러시아의 세력 확장을 경계했는데, 1904년 러일전쟁에서 아시아 일본을 도운 것도 그러한 이유였다그러나 이런 상황속에서 독일 세력이 확장하고 특히나 발칸반도 지역에서 각국의 대립이 1900년대 들어서 극심해졌다이것은 결국 1910년대 발칸 반도에서 민족주의 의식을 자극했으며, 1914년 사라예보 사건으로 이어졌다.

(사라예보 사건, 이 사건은 제1차 세계대전의 불씨를 터뜨렸다.)

 

1914년 6월 28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태자 페르디난트(Franz Ferdinand)와 황태자비 소피(Sophie)가 현재 세르비아의 사라예보를 방문했다가 세르비아의 민족주의 청년인 가브릴로 프린치프(Garvrilo Princip)가 쏜 총에 맞아 사망했다이것이 사라예보 사건이었다사라예보 사건 이후 영국과 프랑스독일오스트리아와 러시아의 야심은 더 노골적으로 드러났고이들의 야심이 전쟁으로 폭발했다당시 독일은 프랑스와의 영토분쟁이 있던 알사스 로렌 지역을 차지하고 싶어했고영국은 독일을 견제하여 대영제국의 패권을 지키고 싶어 했으며오스트리아와 러시아는 발칸반도를 차지하고 싶어 했다.

 

이에 따라 1914년 7월 23일 오스트리아는 세르비아에 최후통첩을 보내고 세르비아 측으로부터 양보를 의미하는 응답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28일에는 선전포고했다이어서 슬라브계 민족의 후원자인 러시아가 오스트리아에 대항해 군을 동원하고그 후 독일 · 영국 · 프랑스 · 터키 등이 각국의 동맹조약에 따라 차례로 전쟁에 뛰어들었으며타이완과 조선을 합병한 일본도 영일동맹에 따라 전쟁에 참전했다이렇게 해서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났다.

 

1차 세계대전은 영국프랑스러시아를 중심으로 하는 세력과 독일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오스만 제국을 중심으로 하는 세력의 격돌이었다통일된 독일은 군사력 증강에 힘을 많이 썼었다특히나 군함과 잠수함 생산을 늘렸으며병력도 확장했다당시 독일은 슐리펜 계획이라 하여 단기간에 프랑스와 영국 그리고 러시아를 무찌를 군사작전을 계획했다물론 이들의 전략은 프랑스를 무찌르고 러시아의 군대를 무찌른 뒤 영국을 굴복시킨다는 것이 핵심이었다.

(참호를 나와 돌격하는 병사들)

 

그러나 전쟁은 예상외로 길어졌다특히나 19세기 산업발전을 통해 과학기술이 발전함에 따라 군사기술도 발달했기 때문이다거기다 1870년 보불전쟁 당시 굴욕의 패배를 당했던 프랑스는 예상외로 독일군의 공세를 잘 막았고동부전선에서의 독일군은 러시아군의 물량공세를 견뎌야 했다거기다 대영제국이라 불리던 영국은 프랑스와 러시아를 지원하여 독일을 압박했다이렇게 되면서 전쟁은 참호전을 중심으로 하는 공방전이 됐다과학기술이 발전함에 따라 전쟁은 학살극으로 변모했다특히나 기관총의 등장과 폭격탱크 그리고 가스전은 수많은 병사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대표적으로 솜 전투만 하더라도 사상자 단위가 수만 명에서 수십만 명을 초과했을 정도였다과거에 후퇴하는 병사들을 추격하는 용도로 사용된 기병들은 기관총 공격에 속수무책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투입된 항공기, 전투기가 첫 등장한 것은 제1차 세계대전 때부터 였다.)

 

거기다 지뢰의 발달과 장갑으로 둘러싸인 탱크의 등장 그리고 공중에서 적군을 공격하는 항공기의 등장도 인명피해를 늘리는 원인 중 하나였다특히나 가스전은 치명적이었다1차 세계대전 당시 양측은 독가스를 사용했는데가스를 사용할 때마다 병사들은 방독면을 써야했으며방독면을 쓰지 않는 병사들은 그 자리에서 질식해서 죽거나 부상당했다이처럼 제1차 세계대전은 현대전의 잔혹함을 제대로 보여줬고과학기술의 파괴력을 인류에게 알려줬다1차 세계대전에서 양측의 사상자가 극심하게 속출한 이유에는 전략전술에도 있었다당시 병사들은 적국의 기지를 점령하기 위해 소총을 들고 돌격하는 전략을 사용했는데방어하는 측에선 참호를 파놓고기관총을 난사했다따라서 수많은 인명피해가 발생할 수밖에 없는 구조였던 것이다.

 

슐리펜 작전이 실패한 이후 전쟁은 장기전으로 가면서 양측 공방전의 반복이었다그러나 1917년 영국 프랑스 연합국 측에서 문제가 생겼다그것은 바로 러시아에서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1914년 전쟁에 참전한 러시아 제국은 전쟁을 수행하면서 경제적으로 위기에 직면했었고구식전술에 의존했기에 사상자가 급증했었다이에 따라 민중들은 러시아 제국에 불만을 품게 됐고혁명을 주도하여 300년간 지속되던 차르 체제를 전복시켰다여기서 더 나아가 스위스에서 망명 중이던 사회주의자 레닌이 페트로그라드에 귀국하여 10월 혁명을 일으켰고궁극적으로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했다그러고 난 이후 레닌은 1918년 3월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을 체결함으로써1차 세계대전에서 빠졌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탱크, 탱크가 전쟁에 처음 등장한 것은 제1차 세계대전 때부터 였다.)

 

1917년부터 러시아가 힘을 못 쓰게 됨에 따라 독일은 서부전선에서의 공세를 강화했다특히나 러시아 혁명으로 러시아가 전선에서 이탈하고 난 이후에는 대부분의 전력을 서부전선에 투입하여 영국과 프랑스군을 상대로 연전연승을 거뒀다그러나 영국과 프랑스에게는 또 다른 보험이 있었다그것은 바로 미국이었다1차 세계대전 당시 유럽과의 무역을 통해 경제적 이득을 보던 미국은 중립주의를 표방했었다그러나 1915년 독일 잠수함이 미국의 상선을 공격하는 사례가 발생했고독일 잠수함 공격으로 인한 미국 상선의 침몰 횟수는 1917년이 돼서 더 증가했다.

(기관총, 제1차 세계대전에서 극심한 병력 손실을 야기시킨 무기다.)

 

당시 미국은 멕시코와 영토분쟁 중이었는데여기서 독일은 멕시코에게 달콤한 조건을 내걸었다그 내용은 멕시코가 독일을 도울시 19세기 당시 미국이 침략으로 빼앗은 멕시코 땅을 돌려주겠다는 내용이었다근데 이 전보를 영국 측에서 가로채서 미국에게 알렸고이에 분노한 미국은 1917년 독일에게 선전포고하며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물론 미국은 병력이 부족해서 병사들을 훈련시키고 모집하는 기간이 필요했다이에 따라 실질적인 대규모 병력 투입은 1918년에 이루어졌다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 이후 서부전선에 총 공세를 가하던 독일은 얼마 지나지 않아 서부전선에 도착한 대규모의 미군을 상대하게 됐다전쟁을 오랜 기간 치른 독일은 미국을 상대할 힘이 부족했고결국 1918년 11월 11일 연합국에게 무조건 항복했다이로써 4년간 유럽에서 전개됐던 제1차 세계대전은 막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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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마요정 2021-09-21 14: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 때 페르디난트와 소피가 참 안타까웠어요. 이 사건이 없었으면 소피는 인정받을 수 있었을텐데요. 끔찍한 사건들은 많은 이들의 슬픔과 절망 속에서 또 다른 이들의 욕망을 채우면서 생기는 것 같아요ㅠㅠ

NamGiKim 2021-09-21 14:25   좋아요 1 | URL
일개인으로 보면 안타까운 사건은 분명하죠.
 

중일전쟁이 발발하던 1937년 마오쩌둥(Mao ZeDong)은 중국 연안에 있으면서 실천론 모순론이라는 철학 서적을 집필한 적이 있었다마오쩌둥의 이런 철학적 해석 및 시도는 엄밀히 따졌을 때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이라는 상황에서 항일민족통일전선의 결성과 그 과정에서의 마르크스-레닌주의 이론의 중국화에 대한 시도이기도 했다실제로 마오쩌둥은 중일전쟁 전후로 해서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중국화를 강조하기도 했는데, 1940년 그가 쓴 신민주주의론은 그러한 중국화의 시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마오쩌둥은 신민주주의론에서 기본적으로 구민주주의혁명단계와 신민주주의혁명단계로 중국혁명을 구분했는데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 이행하는 단계에서 장기간의 신민주주의혁명단계를 설정해놓고이에 따를 사회개혁 정책과 사회문화의 개조 등 신중국의 새로운 발전 및 비전을 제시했다여기에는 제2차 국공합작이라는 현실정치의 영역도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물론 마오쩌둥은 기본적으로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보편적 이론으로 인정했다다만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이 이론을 기계적으로 중국에 적용하지 말고중국의 현실 상황에 맞게 적용하자는 것이 마오쩌둥이 철학적으로 강조하고 싶었던 것으로 보인다마오쩌둥은 1941년 연안 간부회의에서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중국화와 관련해서 다음과 같은 3가지 문제점을 지적하기도 했었다.

 

첫째중국의 객관적인 현실조건에 대한 조사와 연구를 철저하고 체계적으로 진행하지 않으면 안 된다조사와 연구를 소홀히 하는 것은 마르크스주의의 기본정신과 위배되는 것이다.

 

둘째중국의 역사에 대한 학습을 강화하지 않으면 안 된다많은 마르크스-레닌주의자들은 입만 열면 고대 희랍의 역사를 운위하면서도 자신들의 조상과 자신들의 역사를 망각하는 경우가 많다.

 

셋째마르크스-레닌주의의 입장관점방법에 의거하여 중국의 현실조건중국의 역사그리고 중국혁명과정에서 발생하는 문제에 대한 구체적인 분석과 해결을 모색하지 않으면 안 된다.”

 

물론 이것이 소련과 코민테른 노선에 반대한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엄밀히 따졌을 때마오쩌둥이 얘기한 중국화의 방침은 1935년 코민테른 제7차 대회의 노선에 입각한 것이었다즉 아시아를 포함한 식민지 지역의 공산주의 운동의 민족적 특수성을 반영하고 민족적 이익을 대변하는 민족적 공산주의로 전환되어야 한다는 결의에 입각하고 있었다또한 당시 마오쩌둥이 소련의 최고 지도자인 이오시프 스탈린과 입장을 대립한 것도 아니었다마오쩌둥과 스탈린 사이의 심각한 견해차이도 없었다.

 

1940년대 초 제2차 세계대전이 격해지면서 중국의 상황이 바뀌었다. 1937년 제2차 국공합작을 맺은 국민당과 공산당은 1941년 신사군 사건으로 중국 국민당군이 공산당 휘하의 신사군 9,000명을 몰살시키면서다시 대립적인 분위기로 갔다또한 일본군은 중국 공산당 휘하의 팔로군과 신사군을 상대로 아주 잔혹하기 짝이 없는 삼광작전(모든 것을 불태우고죽이고약탈한다는 의미)’을 전개했다중일전쟁 과정에서 해방구를 넓혀나갔던 마오쩌둥은 위기국면에 봉착했다따라서 마오쩌둥은 당내의 분열과 동요 그리고 이에 맞선 정치투쟁을 전개하게 되었는데그것이 바로 1942년에 전개된 정풍운동이다.

 

정풍운동은 1942년 2월 1일 연안의 당교 개교식에서 1,000여 명의 당 간부가 모인 가운데마오쩌둥이 당의 작풍을 정돈하자라는 연설을 하면서 공식적으로 전개됐다정풍운동은 학풍당풍문풍이라는 3풍 정돈을 목표로 추진되었다마오쩌둥에 의하면 학풍의 정돈이란 중국의 현실을 무시하는 주관주의에 대한 비판을 통하여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중국화를 추진한다는 것이었다당풍의 정돈은 종파주의와 관료주의에 대한 투쟁을 의미한다즉 이런 관료주의에 대한 투쟁을 통해 당내의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통일과 기율을 수립하는 것이다마지막으로 문풍의 정돈은 무의미하고 무책임하며 공허한 표현을 일삼는 형식주의적 경향을 비판하는 것이다.

 

이에 따라 1942년부터 1944년까지 전체 당원을 대상으로 대대적인 정풍운동이 전개됐다. 1942년에서 1943년 사이에 당의 고급 및 중급단위의 실무책임자들약 3만 명 이상의 당간부들을 대상으로 하여 학풍당풍문풍에 대한 마오쩌둥의 저작물을 비롯하여 당중앙이 선정한 문건을 중심으로 학습과 훈련을 실시했다당원과 당간부를 소조별로 나누어 자신의 사상적정치적 관점과 입장에 대하여 비판과 자아비판을 반복하는 형식으로 진행됐다따라서 정풍은동은 당내에 존재하는 잘못된 사상과 행동을 바로잡고당원들로 하여금 올바른 사상과 행동양식을 가지게 하는 사상혁명적 성격이 강했다때문에 공개적인 숙청이나 또는 폭력적인 방식은 거의 사용되지 않았으며이는 1930년 AB단 사건(Anti-Bolshevik의 약자로 푸난사변으로도 불린다.) 때의 적잖은 유혈이 있었던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이러한 이데올로기적정치적 투쟁을 통해 중국 공산당에서는 이른바 모택동 사상이 강조되는 방향으로 진행됐다. ‘모택동 사상이 당의 지도이념으로 부상했고이에 따라 중국 공산당의 역사를 마오쩌둥과 모택동 사상의 관점에서 재해석하는 방향으로 전개됐다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던 1945년 4월에 개최된 제6기 6중전회에서 역사문제에 대한 결의를 채택했다이것은 천두슈와 이립삼과 구추백 그리고 강서시대의 소련유학파 노선을 비판하면서 그 대안으로 모택동 노선을 강조했다역사문제에 대한 결의는 1945년 4월 개최된 중국 공산당 제7차 당대회에서 통과됐으며이로써 중국 공산당의 지도이념은 마르크스-레닌주의와 더불어 모택동 사상으로 재정립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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