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난 이래로 한반도에서 다시 전쟁의 위기가 극단적으로 치달은 적이 있었다. 바로 1968년의 한반도 위기가 그러했다.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이 발효된 이후에도 남북한의 긴장관계는 한반도에서 지속적으로 존재해왔다. 아이러니 하게도 한국전쟁은 남북한의 지도자의 정치권력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흘렀다. 북한에서는 김일성의 입지가 예전보다 더 강해졌고, 남한에서는 이승만이 그러했다. 그러던 1960년 4.19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무너지고 장면 정부가 들어섰지만, 1961년 5월 16일 박정희 중심의 군부 쿠데타로 제3공화국이 탄생했다.
이와 더불어 북한의 김일성은 남로당과 연안파 그리고 소련파 사이에서의 권력투쟁에서 승리를 얻음과 동시에, 미군 폭격으로 파괴된 나라를 재건하는 사업에 착수했다. 소위 전후복구와 천리마 운동은 북한을 빠르게 발전시켰다. 북한의 경제는 빠르게 발전했다. 당시 한국은 박정희 정부가 산업화를 가동하기 전까지 부정부패와 정치적 혼란 그리고 빈곤이 도사리고 있었지만, 이와 대조적으로 북한의 체제는 안정적이었다. 1960년 기준으로 북한의 세계 경제력 규모가 49위였던 반면 남한의 경제규모는 101위였다는 점에서 그 차이가 얼마나 현저했는지 알 수 있다. 사실 남한이 북한을 경제적으로 앞지른 것은 1980년대 중후반에 가서야 있던 일이었다.

(1968년 청와대 기습 공격 사건)
1960년대 당시 북한은 무상의료와 무상교육 등 사회주의 체제가 갖춘 기본적인 복지체계가 확고히 잡혀 있었으며, 적어도 이웃나라였던 사회주의 중국보다 더 경제사정이 좋았다. 이후 칠레의 대통령이 되는 살바도르 아옌데는 1960년대 당시 북한을 방문했었는데, 북한의 무상의료 체제와 무상교육 체제에 깊은 감명을 받았었다. 놀랍게도 당시 칠레의 실질적 소득 수준은 북한의 몇 배에 달하는 수준이었다. 즉 이러한 점에서 보았을 때, 당시 북한의 사회주의 체제가 얼만큼 발전했는지 알 수 있다. 이런 사정이었기에 실제로 북한은 냉전이라는 흐름에서 제3세계나 사회주의 진영의 투쟁을 돕고자 했다. 당시 북한이 쿠바, 베트남, 이집트, 인도네시아 등을 도왔던 것도 이러한 이유였다.
그러던 1968년 한반도에서는 놀라운 일이 터졌다. 바로 청와대 기습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김신조를 포함하여 31명으로 편성된 북한의 특수부대인 124군 부대가 청와대 기습을 목표로 휴전선을 넘어 수도 서울에 침투한 것이었다. 이들이 공격 목표로 삼은 장소는 청와대와 주한 미대사관, 육군본부 등이었다. 이들의 침투는 결국 들통이 나서 김신조 1명을 생포하고 29명을 사살했다. 나머지 1명은 북한으로 도망친 걸로 추정된다. 생포된 김신조는 공개 인터뷰에서 자신의 목적이 대한민국 대통령 박정희를 암살하는 것이었다고 밝혔다.

(북한군에게 포로로 잡힌 푸에블로호 선원들)
청와대 기습 사건이 있은 지 2일 뒤인 1월 23일 북한에서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북한 영해에서 해군기지, 항만시설, 해안가 지형 등을 정탐하던 미 해군 정찰함 USS 푸에블로(USS Pueblo AGER-2)호가 해상 순찰 중이던 인민군 해군에게 나포된 것이었다. 당시 배를 포위한 인민군들은 푸에블로호에 사격을 가해 배에 탑승 중이던 미군 수 명을 사살하고 선언 80여 명을 포로로 붙잡았다. 또한 배에 있던 각종 무기와 탄약, 최신예 정탐장비(전파탐지기, 도청장치, 암호해독 장치 등)를 노획하기도 했다. 이렇게 되면서 미국의 존슨 행정부도 한반도 문제로 발칵 뒤집히게 됐다.
청와대 기습 사건과 푸에블로호 나포 사건으로 한반도는 다시 전쟁 위기가 고조됐다. 이 사건 이후 대한민국 사회에서는 반공관변집회가 연이어 일어났고, 곳곳에 “타도하자 김일성!”, “때려잡자 김일성!”등과 같은 구호가 걸렸었다. 그리고 미국의 존슨 정부는 핵추진항모 USS 엔터프라이즈 호 등 함선 4척으로 구성된 기동부대를 원산만 인근 해역에 급파해 해상 무력시위를 벌였으며, 미국 본토에선 해군과 공군 예비역 1만 4,600여 명에게 소집령을 내리고 전투기 372대에 출동 대비태세를 명령했으며, 오산 주한미군 공군기지엔 전략폭격기인 B-52 2대와 F-105 전투기 수십 대를 배치했다. 그리고 남한의 국군 병력도 비상동원령이 내려졌다. 남한에서는 이 시점으로 주민등록증 발급, 교내 교련수업 필수화 등 실시하게 됐다.

(현재 평양 대동강에 있는 미국의 정탐선 푸에블로호)
이에 따라 북한에서도 맞대응에 나섰다. 1968년 2월 8일 김일성은 ‘보복에는 보복으로, 전면전쟁에는 전면전쟁으로’를 강조하면서 미국과 한국의 침략에 결사항전 하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이에 따라 북한에서도 전국적으로 전투준비태세를 갖추었으며, 인민군과 로농적위대는 물론 일반민중들도 전투준비태세를 갖췄었다. 이처럼 한반도의 상황은 당장 전쟁이 일어나더라도 무리가 아닌 상황이었다.

(김일성과 호치민)
다행히도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다. 당시 사회주의의 한축이던 중국과 소련은 갈등을 보이고 있었고, 미국은 베트남 전쟁의 수렁에 빠져 있었다. 특히나 1968년 1월 31일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이 남베트남 전역에서 감행한 구정 공세(Tet Offensive)로 미국 내 베트남전 반전 여론은 급상승했다. 이에 따라 미국은 1968년 12월 판문점에서 푸에블로호의 영해 침범 사실과 정탐행위를 인정했고, 북한은 억류했던 80명의 선원들을 전부 석방했다. 1968년 당시 북한이 청와대를 기습하여 박정희를 죽이려 했던 사건에 미국은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지만, 푸에블로호 사건에는 격렬히 반응했다. 여기서 박정희가 미국에게 배신감을 느꼈던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1970년대 박정희가 독자노선을 생각했다는 주장의 근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박정희와 응우옌반티에우)
반면 북한의 청와대 기습 공격 사건은 국제연대라는 관점에서도 해석이 가능하다. 베트남 전쟁 당시 한국은 미국을 따라 친미정권인 남베트남에 지상병력을 파병했다. 그에 반해 국제주의 노선을 천명했던 북한은 북베트남에 공군 조종사를 보냈다. 즉 북한은 당시 호치민의 북베트남과 연대를 표명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북한에서 청와대 기습 공격을 감행할 때, 베트남에서는 북베트남 정규군이 미해병대 기지가 있는 케산을 포위 공격했다. 즉 1968년 1월 21일에 서울 인근 지역과 남베트남의 케산지역에서는 전투가 벌어진 것이다. 이런 사실을 비추어 양측의 국제연대라고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