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810월에 발발한 여순항쟁(YeosuSuncheon Uprising)은 미국과 이승만 정부의 민간인 대학살이었다. 여순사건의 원인은 1948년 제주 4.3항쟁이었으므로, 제주 4.3 항쟁을 진압하기 위해 보내질 예정이었던 병력이 진압을 거부하고 봉기를 단행하면서 시작됐다. 남로당을 중심으로 봉기했던 여순항쟁은 결과적으로 이승만과 미군정의 잔혹한 진압으로 종결됐고, 최소 1만 명 이상의 민간인이 이들에 의해 학살당했다. 2000년대 진실화해조사위원회의 조사를 통해, 발견된 희생자의 시신은 총 3,384구로 실제 희생자보다 일부만 발견되었을 뿐이다.

 

여순항쟁은 제주 4.3 항쟁과 더불어 한국 사회에서 하나의 반란사건이나 공산주의 폭동으로 규정되어 왔다. , 이 사건이 미국과 이승만 정부의 폭압적인 폭력과 억압적인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여 봉기한 항쟁이었다는 사실관계는 손쉽게 무시당해왔던 것이다. 여순항쟁을 잔혹하게 진압한 이승만은 당연히 이 사건을 공산주의의 폭동이나 반란으로 규정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여순사건에 대한 교과서의 정의는 이와같은 이승만식 관점을 벗어나지 못했다.

 

한국 사회에서 역사교육은 수십 년간 국정제도로 운영되어 왔다. 학살극의 당사자인 이승만은 당연히 국정교과서를 발행했으며, 비록 교과서에 이를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국가적으로 여순항쟁을 공산주의 반란으로 규정했다. 19604.19 혁명으로 이승만 정부가 물러서자, 당시 학살 피해자 유족들은 유족회를 결성하여, 조사에 나섰다. 그러나 1961516일 박정희가 주도한 쿠데타로 군부정권이 들어섰고, 이들 또한 국정 교육을 단행했다. 특히나 197210월 유신을 선포한 박정희는 1974년 신학기부터 주체적 민족사관에 투철한 국정교과서를 내놓았다고 말했으며, 역사교육은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강조한 역사교육의 내용으로 진행됐다.


여순항쟁이 교과서에 처음 언급된 것은 박정희 유신정권 체제하의 제3차 교육과정 때부터였다. 1976년에 발행된 국사 교과서에는 제주 폭동과 여순 반란을 북한 공산주의자들이 남한 공산주의자들을 사주하여 일으킨 사건으로 서술했다. 1979년 박정희가 암살당한 이후, 전두환이 12.12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았다. 1980년대 전두환 정권은 제4차 교육과정을 거치며 두 사건에 대한 서술의 양을 늘렸다. 당시 교과서에 나온 여순사건은 사회를 교란시키기 위하여 북한 공산주의자들의 사주 아래 남한 공산주의자들이 일으켰다.”고 나온 점에서 박정희 정부 당시 교과서 내용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나 박정희 정부 시절과는 달리, “공산주의자들이 관공서를 습격하고 경찰과 민간인을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는 식의 서술이 추가됐다.

 

박정희와 전두환 시기 이 두 사건은 폭동과 반란으로 표현됐지만, 노태우 정권 하에서 단행된 제5차 교육과정에서는 제주도의 경우 4.3 사건으로 표기되었지만, 여순은 이전과 똑같이 여수·순천 반란사건으로 표현됐다. 문민정부가 들어선 후 개정된 제6차 교육과정의 교과서에서는 제주도 4.3 사건을 공산주의자들이 남한의 5.10 총선거를 교란시키기 위하여 일으킨 무장폭동으로 보는 것은 여전했지만, “진압과정에서 무고한 주민들까지도 희생되었다고 하며 처음으로 민간인 희생을 언급했다. 하지만 여순의 경우 대한민국을 전복하려는 의도를 가진 반란으로 표기됐다.


김대중 정권 들어서 시행된 제7차 교육과정에서는 제주 4.3과 여순에 대해 사건이라 표기했으며, 제주 4.3의 경우 진압과정에서의 무고한 인명피해가 일어났다고 언급했다. 반면 여순사건에 대해선 제주도 4.3 사건의 진압 출동 명령을 거부한 군인들이 반란을 일으켜 여수·순천 일대를점령한 사건이라고 설명했다. 이 시점까지도 여순에 대해선 제주 4.3과는 달리 본질적인 문제를 교과서에서 꺼내지 않은 것이다. 2000년대 들어서 나온 교과서에서도 여순에 대해선 여수 주둔 부대 내 좌익세력이 일으킨 반란이나 봉기로 표현하는 교과서들이 제법 많았다.

 

지금도 여순사건의 본질적인 문제는 교과서에서 제대로 가르치지 않고 있다. 이 여순사건이 미군정의 폭압적 통치와 잔혹한 학살에 반대하여 자주적인 통일정부와 반외세 정부를 달성하고자 했다는 점은 항상 거세당해 있는 것이다. 한국 근현대사를 공부하다 보면, 이러한 교과서적 서술이 한 사건의 본질적인 부분을 얼마나 각색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은 국민의 땀 뿐만 아니라 수많은 민중의 피를 요구했다. 그 유혈의 역사를 외면한다면 우리는 부정적 역사를 미래를 위한 긍정적 지양분으로 바꿀 수 업을 것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앞으로의 교과서에서는 여순항쟁의 본질이 언급되야 할 것이다.

 

참고문헌

 

김득중, 빨갱이의 탄생, 여순사건과 반공국가의 형성, 선인,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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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오늘만 지나면 코로나 격리해제가 풀립니다. 격리가 끝날 생각을 하니 기쁘네요. 1주일 격리가 정말 기네요. 여러분들도 코로나 조심하시길 바랍니다. 어제 전반부를 리뷰를 다른 때보다 길게 했지만, 이어서 4부 후반부를 올리겠습니다.

(Resolve 전반부에 나오는 인트로 영상)

 

(오마하에서 베트남 전쟁에 대해 연설을 하는 존슨 대통령)

 

전반부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존슨 대통령은 베트남 전쟁을 지속하기 위해 무수히 많은 물자와 인력을 투입하고 있었다. 1966년 존슨 대통령은 네브래스카 주 오마하에서, “우리 모두가 전쟁을 끝나기를 바라고 있고, 군대가 집으로 귀국하기를 바라고 있다.”고 연설을 했다. 그러면서 평화가 오기를 바란다고 역설했다. 하지만, 이것은 사실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당시 미국의 지도부들은 더 많은 병력을 어떻게 하면, 베트남에 보낼지를 고민했기 때문이다. 만약 존슨이 평화를 원했다면, 호치민의 말대로 즉각적으로 군대를 철군시켜야 했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1966년까지 57,000명의 베트콩을 사살했다고 주장한 미 육군의 통계)

 

(존슨에게 라오스와 캄보디아의 침공을 주장하는 미군 장성)

 

(롤링썬더 작전으로 파괴되고 있는 북베트남의 시설들)

 

당시 미군 자체 추정으로는 1966년 중반까지 최소 57,000명 이상의 적군을 죽인 것으로 계산했다. 이 숫자는 베트남 전쟁을 통틀어 전사한 미군의 숫자와 거의 비슷하다. 군 사령부는 존슨에게 미군 부대가 남베트남에서 라오스와 캄보디아 국경지대를 넘어 공식적인 군사작전을 할 수 있도록 허용해달라고 권고했지만, 존슨은 그렇게 하고 싶어 하지는 않았다. 그 이유는 중국과 소련을 군사적으로 깊이 개입하게 만들 것이라는 우려 때문이었다. 대신 북베트남에 대한 폭격 작전의 목표를 더 확장했다. 이에 따라 수도 하노이와 항구도시인 하이퐁에 무수히 많은 폭탄이 투하됐다.

(참전용사 바오닌, 그는 1969년부터 북베트남군으로 참전하여, 1975년 베트남 전쟁이 끝난 이후 북베트남으로 돌아갔다.)

 

(참전용사 호후우란, 그 또한 베트남 전쟁에 참전했고, 구정 공세 당시 북베트남군으로 후에 전투에 참가했었다.)

 

이러한 폭격행위는 북베트남을 협상의 장으로 끌어내기 위함이라고 이들은 주장했지만, 이 과정에서 생기는 민간인 피해가 어떤 것인지는 깊이 고려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폭격을 하는 과정에서 무수히 많은 마을과 도시에 폭탄이 투하됐고, 그로 인한 민간인 피해가 급증했기 때문이다. 아래에 있는 <전쟁의 슬픔>의 저자인 바오닌(Bao Ninh)과 북베트남군 참전용사인 호후우란(Ho Huu Lan)의 다큐멘터리 인터뷰 내용을 보도록 하자.

(폐허가 된 북베트남의 한 마을)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집은 파괴됐죠. 학교는 시골로 소개되었습니다. 생활은 뒤죽박죽이 되고요. 당시 전 14살이었어요. 겁이 나지는 않았지만, 무척 화가 났습니다.”

 

종종 폭탄이 시장과 학교에 터져서, 수많은 어린이와 아이들이 죽었죠. 북베트남 사람들이 정말 많이 죽었습니다. 우리 식구들을 포함해서요. 그러니까 뒤에서 평화와 안전을 유지하려면, 전선에서 싸워야만 했습니다.”

(대공포를 발사하는 북베트남군 병사들, 북베트남은 중국과 소련으로부터 지원받은 대공무기를 토대로 수많은 미군 항공기를 격추하기도 했다.)

 

(대공포에 격추당한 미군 전투기)

 

물론 북베트남의 대공 방어망은 중국과 소련의 지원으로 촘촘했고, 미군 항공기들도 많이 격추됐다. 바로 그랬기 때문에, 맥나마라를 포함한 미국 지도부는 중국과 소련의 물자지원을 막기위해, 중국 국경지대 근처까지 폭격을 하고자 했고, 북베트남 주변 해역에 기뢰를 설치하여, 중국과 소련의 수송선을 막고 싶어 했다. 그러나 중국과 소련은 북베트남에게 지속적으로 물자를 지원했다. 북베트남 대공포나 미사일에 의해 적잖은 미군 항공기들이 격추되었는데, 베트남 전쟁을 통틀어 최소 수천 대의 항공기가 격추됐다. 이에 따라서 북베트남군의 포로로 붙잡히는 조종사들도 늘어났는데, 포로로 잡힌 이들은 분노한 하노이 시민들을 보게 됐다.

(북베트남군의 호위를 받으며 하노이를 시가행진하는 미군 조종사들)

 

(미군 조종사에게 분노를 표출하는 베트남 민간인, 당시 미군의 폭격으로 수많은 베트남인들이 고통을 겪었다.)

 

물론 이들이 포로생활 도중 겪은 고통도 분명 적지 않을 것이다. 다큐멘터리에서는 이들의 고통에 대해 조명하는 모습을 보이는데, 인간적으로야 동정할 수 있지만, 우선 이들이 폭격으로 죽은 북베트남인들 입장도 같이 봐야할 것이다. 최소 수십만 명의 북베트남인이 미군의 폭격으로 학살당했고, 북베트남 민간인이 겪는 고통은 너무나도 컸다. 북베트남군은 미군 포로 51명을 대리고, 하노이에서 시가행진을 하게 했는데, 당국은 성난 주민들이 분노를 막는데 급급했다. 1964년 통킹만 사건 당시 포로로 붙잡힌 알버트 알버레즈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군중들이 흥분했었죠. 메가폰을 든 사람이, 절 쳐다보더니 군중에게 소리쳤죠. “알버레즈, 이 개같은 새끼!” 사람들이 몰려들어 병이나 신발 같은 걸 던졌습니다. 하자만 간수들이 분노한 사람들을 밀어내느라 정말 힘겨워했죠.”

(파괴된 곳을 다시 재건하는 북베트남 민간인)

 

(미군의 폭격으로 파괴된 북베트남의 건물)

 

알버레즈의 증언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적어도 북베트남 당국은 이들을 살려놓았다. 최소한의 인권을 지켰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폭격이 강화되자, 이를 복구하려는 북베트남인들의 의지 또한 굳건했다. 100만 명 이상의 민간인이 미군의 폭격으로 발생한 피해를 복구하고자, 밤낮 할 것 없이 일했고, 다리가 파괴되면 그 다리를 다시 복구했고, 폭탄으로 구멍이 생기면 그걸 메웠다. 아래에 있는 내용은 당시 북베트남의 슬로건이다.

 

적이 파괴하면 고치고, 적이 또 파괴하면 또 고친다.”

(로버트 맥나마라와 크레이그 맥나마라, 아들 크레이그 맥나마라는 베트남 전쟁을 적극적으로 반대하던 인물이었다.)

 

(PBS 베트남 전쟁 다큐멘터리에 출연한 크레이그 맥나마라)

 

로버트 맥나마라는 당시 전쟁을 지속했지만, 놀랍게도 맥나마라의 아들은 이 전쟁에 대해 회의적으로 접근하며 반대하는 입장을 취했다. 로버트 맥나마라의 아들인 크레이그 맥나마라(Craig McNamara)는 당시, 뉴햄프셔주 콩코드에 있는 세인트 폴 학교의 학생이었다. 이 학교에서도 전쟁에 대한 토론회가 열렸는데, 베트남 관련 자료를 물었다가 아버지로부터 받지 못했다고 한다. 맥나마라의 아들 크레이그 맥나마라는 이후 1969년 스탠포드 대학교에 진학하여, 반전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고 한다.

(미 해병대로 복무하던 당시 빌 에어하트의 사진)

 

(미군 탱크)

 

당시 맥나마라와 존슨 그리고 웨스트모어랜드는 하나같이, 베트남에서 상황이 진전되고 있다고 국민들에게 새빨간 거짓말을 했다. 따라서 미국인들 중에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의 논리로 베트남을 판단하는 이들이 많았던 것이다. 대학 시험에 합격했으나, 미 해병대에 자원입대한 빌 에어하트는 1966년에서 1967년에 베트남에 파병됐다. 아래는 빌 에어하트(Bill Ehrhart)가 다큐멘터리에 나와서 한 인터뷰인데, 당시 미국인들의 생각을 단편적으로나마 볼 수 있다.

 

전 베트남에 도착했을 때, 우리가 이기는 편에 있다고 생각했어요. 미국은지지 않으니까요. 1812년 미영전쟁을 몰랐죠. 그 전쟁이 무승부에 가까웠지만요. 또 남북전쟁에서는 미국의 절반이 패배했죠. 한국전쟁에서는 전반전은 이기고, 후반전은 졌죠. 하지만 전 미국이지지 않는다고 배웠거든요.”

 

물론 빌 에어하트가 베트남에 와서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를 자각하게 되기까지는 시간이 얼마 걸리지 않았다. 한편 미국 본토에서는 1966년부터 1967년 사이, 베트남 전쟁을 반대하는 여론이 점차 형성되고 있었다. 흑인인권운동을 주도했던 미국의 마틴 루터 킹(Martin Luther King Jr) 또한, 이 전쟁을 적극적으로 반대했고, 반전운동에 참가했다. 미국에서 사랑받던 유명한 소아과 의사인 벤저민 스포크(Benjamin Spock) 박사도 이 전쟁에 반대했다. 벤저민 스포크 박사의 저서 <아기와 어린이 보호>라는 책은 미국에서 수백만 명의 부모가 읽었을 정도였다.

(베트남 전쟁에 반대하는 벤저민 스포크 박사, 그는 1967년 미국 좌파잡지인 램파트에 미군이 투하한 네이팜탄으로 최소 25만 명 이상의 남베트남 어린이가 사망했다고 밝혔다.)

 

(벤저민 스포크 박사가 쓴 베트남 관련 글에 실린 네이팜탄 피해자의 사진)

 

(어린이 25만 명 사망 100만 명 부상이라는 팻말이 보이는 반전 시위)

 

(뉴욕 샌트럴 파크에서 베트남 전쟁 반전운동을 전개하며 연설을 하는 마틴 루터 킹)

 

그러나 그런 그가 1967년 초 미국 좌파 잡지인 램파트지에 네이팜탄이 남베트남의 어린이에게 끼치는 영향에 대해서 썼다. 벤저민 스포크에 따르면, 1967년 초 기준으로 남베트남에서 미군의 투하한 네이팜 폭탄으로 최소 100만 명 이상의 어린이들이 피해를 보았으며, 이 중 25만 명의 어린이가 사망하고, 75만 명 이상이 어린이가 부상당했다. 대략 50만 명이 모였던 뉴욕 샌트럴 파크에서의 반전시위에서 마틴 루터 킹 목사는 다음과 같은 연설을 했다.

 

폭격을 멈추십시오! 국가의 명예를 지킵시다. 폭격을 멈추고, 전쟁을 멈추십시오!! 미국인과 베트남인의 생명을 구합시다! 평화협정을 위한 첫발을 바로 내디딥시다! 폭격을 멈추십시오!!”

 

물론 아직까지도 베트남 전쟁을 찬성하는 여론도 결코 작지 않았다. 찬성하는 이들은 반전운동을 하는 이들에게 빨갱이는 미국으로 꺼져라!”와 같은 태도를 보였다. 이들은 미국의 애국주의를 내세웠고, 전쟁을 지속하는 미국 정부는 이들과 비슷한 논리로 반전운동에 대해 친소·친공 딱지를 붙이고자 하였으며, 실제로 이들 사이에 스파이를 침투시키며, 도청 및 감시를 하기도 했다. 필요에 따라선 경찰력을 동원해 반전운동을 무력으로 진압했다. 베트남 전쟁 초기부터 반전운동을 했던 빌 지머맨(Bill Zimmerman) 교수는 다큐멘터리에서 다음과 같은 인터뷰를 남겼다.

(베트남 전쟁 반전운동가에게 분노를 보이는 전쟁 찬성집회자, 보면 퀴어와 게이, 징병 회피자 그리고 공산주의와 마오쩌둥 그리고 호치민에 대한 분노를 표출하고 있다.)

 

(착한 공산주의자는 죽은 공산주의자 밖에 없다는 한 반공주의자의 시위)

 

이 시기 전쟁을 지지하던 사람들은 이 말을 즐겨 했습니다. “우리나라가 무조건 옳다!”, “빨갱이가 되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낮다!”등이었죠. 이런 발언들이 우리에게는 비정상적이었어요. 우린 국가가 하는 일은 옳든 그르든 긍정해야 하는 국가에선 살고 싶지 않았거든요. 우리가 살고 싶은 나라는 옳은 행동은 하고, 그른 행동은 안하는 나라에요. 이 나라가 그렇게 안 한다면 당연히 바로 잡아야죠. 그러니까 애국이란 개념이 달랐던 거죠.”

(베트남 중부 고원지대에 위치한 닥토, 196710월에 미군과 북베트남군간의 큰 교전이 벌어진 곳이기도 하다.)

 

(북베트남군의 기습을 받은 미군)

 

1967년 남베트남에서는 미군과 베트콩 사이의 치열한 교전이 반복됐다. 그해 6월 베트남 중부 고원지대에 있는 닥토(Dak To) 근처에서 북베트남군과 미군 사이의 교전이 벌어졌는데, 미군이 패배했다. 당시 북베트남군과 교전을 벌였던 미군부대는 101 공수부대로 제2차 세계대전을 다룬 미국 드라마 밴드 오브 브라더스(Band Of Brothers)의 부대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들이, 북베트남군에게 참패를 당했다. 중대원 137명 중 76명이 전사했다. 중대 하나가 북베트남군에 의해 사실상 전멸했던 것이다. 그러나 놀랍게도 당시 미군들은 북베트남군의 시신을 찾지 못했다. 당시 전투에 참전했던 미군 참전용사는 북베트남군의 시체를 찾지 못한 이유가 시체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증언했다. 아래는 참전용사 멧 해리슨(Matt Harrison)의 인터뷰 내용이다.

(항공지원을 요청하며 북베트남군에 맞서 교전을 벌이는 미군)

 

(전투에서 부상당한 미군)

 

우린 북베트남군의 시체를 찾을 수 없었고, 우리가 못 찾은 건, 시체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지금도 믿고 있어요. 1967622일 피해는 참혹했죠. 우리 리더들은 173 공수 소총 중대 하나가 북베트남군에 의해 전멸됐음을 인정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어요. 그래서 우리는 자신과 대중을 속여야 했죠. 우리가 당한 것만큼, 혹독한 피해를 우리도 북베트남군에게 가했다고 말이죠.”

(전투에서 패배했지만 승리했다고 주장하는 윌리엄 웨스트모어랜드)

 

실제로 당시 미군은 622일 닥토 근처에서 벌어진 전투의 패배를 가리기 위해, 북베트남군 475명을 죽였다는 지극히 과장된 보고를 했었다. 이와 같은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군은 전과보고를 적잖게 과장했고, 민간인 피해를 지극히 축소했으며, 숫자 조작을 빈번히 했다. 이러한 가정은 바디 카운트라는 비상식적인 방식과 거짓말을 전제로 한 보고에서 비롯됐다. 이러한 조작된 자료와 숫자를 가지고 미국은 전쟁을 벌였지만, 궁극적으로 전쟁에서 지고 있다는 사실을 가리기 어려워지고 있었다. 이번 시리즈에서 이러한 거짓과 위선을 제법 낱낱이 보여준 것이 좋았다. 1967년에 들어서면서 미국은 자신들이 하고 있는 거짓을 숨기려 했지만, 현실 도피였을 뿐이었다. 1968년 원숭이의 해(Years of Monkey)가 다가오고 있었다.

 

4화 후반부 리뷰는 여기까지입니다. 다음에는 5화를 리뷰 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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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마요정 2022-09-10 20: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쟁을 계속하기 위해 거짓말을 하고, 패배를 인정할 수 없어 또 거짓말을 하고… 도대체 누구를 위해서일까요. 네이팜탄은 너무 참혹해서 가슴이 아픕니다.

추석 연휴 행복하고 즐겁게 보내세요!!

NamGiKim 2022-09-10 21:13   좋아요 1 | URL
네이팜탄과 무차별 폭격. 이런 학살적인 만행이 얼마나 많은 민간인에게 피해를 줬는지 미국이 진지하게 반성해야 한다고 봅니다. 네 꼬마요정님도 즐거운 추석 연휴 잘 보내시길.^-^
 

지난번 PBS 베트남 전쟁 다큐 3부를 전반부와 후반부로 나누어 연재했다. 3부는 케네디 암살 이후, 미국의 대통령이 된 린든 B. 존슨이 어떻게 베트남 전쟁을 일으키게 되는지 깊숙이 파고들었다. 존슨과 맥나마라 그리고 맥스웰 테일러와 같은 이들은 자신들이 베트남 전쟁에서 승리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19653월 다낭에 미 해병대 3,500명을 상륙시킨 걸 시작으로 지속적으로 남베트남에 주둔하는 미군병력의 숫자를 늘렸다. 1966년에 들어서면서, 미국의 존슨 대통령은 북베트남의 하노이 당국과의 평화협상을 모색함과 동시에, 북베트남 정치 지도부에서 가장 강력한 인물이 바로 레주언(Le Duan)이라는 것을 인지했다. 존슨이 보기에, 레주언은 호치민을 포함한 북베트남 지도부에게 자신들이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고, 따라서 혁명전쟁을 지속해야한다고 압력을 놓는 인물이었다.

(PBS Vietnam War 4Resolve의 오프닝 장면)

 

(존슨 대통령과 프랑스의 샤를드골, 2차 세계대전 당시 자유 프랑스군을 이끌었던 샤를 드골은 전쟁 이후 프랑스의 식민지를 되찾으려는 제국주의 침략전쟁을 베트남에서 벌였었다. 그러나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로 베트남에서 물러가게 됐고, 이후에는 알제리에서도 물러났다. 결국, 이러한 교훈을 바탕으로 미국의 케네디와 존슨에게도 베트남 전쟁에 대해 의미심장한 충고를 했었다.)

 

(북베트남의 대공포 진지를 둘러보는 레주언, 1960년대부터 하노이 당국에서의 그의 권력은 호치민 보다 강해진 것으로 알려졌다.)

 

(총을 들고 훈련받는 북베트남군 여성 대원, 미군의 폭격으로 파괴된 곳에서 훈련받고 있다.)

 

존슨의 판단은 틀린 판단은 아니었다. 실제로 당시 하노이 당국은 더 많은 병력을 호치민 루트(Ho Chi Minh Trail)를 통해 증파했다. 또한 북베트남은 미국의 무차별 폭격에 맞서 항공 방어망을 강화했으며, 북베트남 정규군이 쉽게 들어가지 못하는 남베트남의 적잖은 농촌에서는 더 많은 병사를 모집할 수 있었다. 1966년 기준으로 남베트남의 영토 3/4(대략 75%)가 사실상 베트콩 수중에 떨어져 있는 상태였다. 존슨 정부는 베트남 전쟁을 확전함에 따라, 동맹국으로부터의 파병을 요청했다. 미국의 가장 중요한 동맹인 영국이나 프랑스 그리고 캐나다는 이 전쟁의 참여를 거부했고, 프랑스의 대통령이던 샤를 드골 또한, 이 전쟁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보였다. 따라서 존슨은 총 5개의 동맹국으로부터 증원 병력을 받을 수 있었는데, 바로 대한민국과,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태국 그리고 필리핀이었다.

(베트남 전쟁 참전 5개국, 이중 한국이 미국 다음으로 가장 많은 병력을 보냈다.)

 

(미군과 헬기 부대)

 

1966년 초반을 기준으로 베트남 전쟁에서 미군 2,344명이 전사했고, 20만 명이 넘는 미군 병력이 남베트남에 주둔하고 있었으며, 더 많은 미군 병력이 베트남에 파병될 준비를 하거나, 파병되고 있었다. 베트남 전쟁에 참전하던 10대 후반에서 20대 초중반의 병사들은 전쟁에 참전하며, 2차 세계대전 당시 자신들의 아버지 세대들과 같은 사고방식으로 이 전쟁을 판단했다. 그러나 베트남 전쟁은 제2차 세계대전이나 한국전쟁과는 또 다른 성격을 가진 전쟁이었고, 이들은 베트남의 밀림 속에서 자신들이 참전한 전쟁이 아버지 세대의 전쟁과는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다.

(응우옌반티에우 대통령과 응우옌까오끼 총리, 1965년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이들은 이후 10년간 남베트남을 통치한다.)

 

(끼와 그의 아내, 공군 사령관 출신인 끼는 헐리우드 패션을 따라하길 좋아했다고 한다.)

 

1966년 남베트남에서는 젊은 군부출신의 인물이 정권을 잡고 있었다. 한때 베트민에 가담했다가, 프랑스군에 입대하여 프랑스군 장교로 복무했던 응우옌반티우(Nguyen Van Thieu)와 프랑스군 공군 출신으로 남베트남군에서도 공군 사령관을 했던 응우옌까오끼(Nguyen Cao Ky)가 남베트남의 지도부로써 자리를 잡고 있었던 것이다. 70노인이던 호치민의 적은 60대의 중년 가톨릭교도인 응오딘지엠이 아닌, 40대 초반의 남베트남 대통령 티우와 30대 중반의 총리인 끼였다. 총리인 끼는 존슨 대통령이 좋아하는 스타일을 가진 남자였다. 사교적인 부유층 미국인들처럼 행동할 줄 알았고, 술도 잘 마셨으며, 복장 또한 헐리우드 배우처럼 화려하게 입고 다녔으며, 여자랑 노는 법도 잘 아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응우옌까오끼에게는 민주주의라는 개념이 없었다. 아래에 나온 끼의 발언을 통해, 그가 어떠한 생각을 가진 인물인지 알 수 있다.

 

현재 베트남 공화국에 필요한 것은 아돌프 히틀러 다섯 명이다.”

 

, 존슨 대통령은 이런 마인드를 가진 인물을 미국인과 같다.’며 지지하고 좋아했던 것이다. 1966년에도 북베트남을 대상으로 한 존슨 대통령의 무차별 폭격은 지속됐다. 1965년 크리스마스 이브 시점부터 대략 37일 동안은 폭격을 멈췄는데, 1966년 초부터 미 공군은 북베트남 민간인을 대상으로 폭격이라는 테러리즘을 재개한 것이다. 하지만, 티우나 끼가 통치하는 남베트남의 상황은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남베트남 영토 75%가 베트콩 수중에 있는 상황이었다. 이 상황에서 주월미군총사령관인 윌리엄 웨스트모어랜드는 베트콩과 북베트남군을 회복 불가능 수준까지 살상하여, 남베트남을 지키고 싶어했다. 물론 그 방법은 바로 미군 병력의 규모와 폭격을 더 확장하는 방식이었다.

(폭탄을 투하하는 미군 폭격기)

 

(파괴되는 북베트남의 도시)

 

(북폭관련 미국측 신문 기사)

 

(윌리엄 웨스트모어랜드와 미군 부대, 웨스트모어랜드는 존슨에게 더 많은 병력을 요구했다.)

 

(M-60 기관총을 쏘는 미군)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국 남성들은 현재 한국의 남성들처럼, 병역의무를 해야 했다. 물론 한국과 비교했을 때, 인구 비율적으로 낮은 징집률을 보였지만, 징병 문제는 미국 사회에 큰 문제를 야기했다. 스텐리 큐브릭 감독의 영화 풀 메탈 자켓(Full Metal Jacket)’에 나온 것처럼, 당시 미군 교관들은 신병들에게 지옥훈련을 시켰다. 특히나 해병대 병사들은 살인병기로 자라나기 위해 존재한 것처럼, 고된 훈련과 기합을 받았다. 미국 정부는 베트남에서 전쟁을 치르며, 징집된 미군 병사를 살인병기로 개조시킨 것이다.

(사우스 캐롤라이나에 있는 미 해병대 신병 캠프, 풀 메탈 자켓의 초반 배경이 되는 곳이기도 하다.)

 

(삭발 당하는 미군 신병)

 

(신병을 갈구는 미군 교관)

 

(취짐하기 전의 신병들 모습)

 

(웨스트포인트를 나온 이후 행진하는 미군 장교들)

 

(M-14 소총 사격 연습을 하는 신병)

 

남베트남 지역에서 베트콩 및 북베트남군의 활동이 활발했던 곳들은 많았다. 중부 고원지대와 붙어있는 빈딘 성(Binh Dinh Province)도 과거 항불전쟁 시기부터 게릴라 활동이 활발했던 곳으로, 베트남 전쟁 당시도 마찬가지였다. 이 지역에는 50만 명이 거주하고 있었고, 1966년 초 이 지역의 베트콩 규모는 8천 명 정도로 1개 사단 정도의 규모가 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웨스트모어랜드 장군은 이들을 소탕하기 위해 미군과 남베트남군 그리고 한국군으로 구성된 2만 명의 병력을 빈딘 성에 보내, 6주 동안 군사작전을 전개했다. 이 지역을 적성지대로 설정해놓고, 의심이 되는 마을과 촌락을 습격하고, 네이팜탄으로 폭격했다.

(빈딘성, 1966년 수색과 섬멸 작전이 있던 지역이다.)

 

(빈딘성에 주둔했던 베트콩 부대)

 

(수색과 섬멸 작전을 전개하는 미군 부대)

 

(폭격으로 파괴되고 있는 빈딘성의 어느 마을)

 

(불타는 가옥 사이로 진군하는 미군 병사)

 

당시 육군 보고에 따르면, 베트콩 2,400명을 사살한 것으로 나오지만, 제주 4.3 사건 당시 우익 진압군이 사용하던 방식이 적용된 전쟁터였기에, 당연히 민간인 사망자도 나올 수 밖에 없는 구조였다. 다큐멘터리에서는 언급되지 않지만. 한국군이 자행한 빈안 학살도 이 시점에서 있었으며, 웨스트모어랜드가 전개한 작전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작전으로 빈딘 지역 민간인 10만 명이 고향에서 강제 이주 당했고, 1966년을 통틀어 이러한 대규모 수색과 섬멸작전을 17번 이상 실시하여, 남베트남 전역에서 300만 명 이상의 노숙자가 발생했다.

(교전을 벌이는 미군 병사들)

 

(지원 병력을 보내는 미군 헬기들)

 

(미군이 사살한 베트콩 시신들)

 

(바디 카운트의 허구성을 밝히는 기록들)

 

(시신을 옮기는 미군 치누크 헬기)

 

1차 세계대전이나 제2차 세계대전 그리고 한국전쟁과 달리, 베트남 전쟁은 명확한 전선의 개념이 존재하지 않았기에, 미군 사령부은 MAC-V는 지표 하나에 의존하는 전과보고를 통해 군사적 업적을 판단했다. 그것이 바로 바디 카운트(Body Count)였다. 이 바디 카운트의 문제는 전과조작과 숫자조작에 있다. 미군이 전개한 테일러 II 작전(1,757명 사살), 애틀버로 작전(1,106명 사살), 헤이스팅스 작전(882명 사살), 화이트윙 작전(2,398명 사살)을 보면, 믿기 힘든 전과보고인데, 이러한 숫자가 나오는 이유는 모든 사람을 적군으로 계산하려는 경향때문이었다. 이 때문에, 미군의 전과보고로 죽은 베트콩 중 절반 이상이 민간인으로 추정하는 이들도 있다.

(참전용사 메릴 맥피크, 베트남 전쟁 참전 이후 걸프전에도 참전했다.)

 

(베트남 전쟁 초기 북베트남의 해상 운송로)

 

(베트남 전쟁 당시 호치민 루트)

 

(호치민 루트에서 보수공사를 하는 자원병들)

 

(호치민 루트를 통해 남베트남에 물자와 인력을 보급한 소련제 트럭)

 

한편 하노이 당국은 남베트남의 혁명활동을 지원하기 위해, 병력과 물자를 호치민 루트를 통해 보내고 있었다. 호치민 루트는 북베트남에서는 559번 루트로 불렸는데, 이 루트는 1950년대 후반부터 생겼지만, 베트남 전쟁이 격화되며 미국이 해로를 봉쇄하자, 북베트남은 이 루트를 더욱더 확장하고 또 이용했다. 이들 중 25만 명의 자원병이 보수작업에 나섰고, 이들 중 절반은 여성대원이었다. 이 대원들은 사람과 물자가 지나갈 수 있도록, 북베트남과 남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에 대략 19,200km의 복잡한 밀림 속 도로를 만들었다. 물론 이들의 장비도 예전에 비해서 현대화를 거쳤다. 1차 인도차이나 전쟁 당시 프랑스군에 맞서 싸울 당시 베트민은 수만 명의 짐꾼에서 자전거 부대를 이용하여 보급을 했다. 그러나 미국과의 전쟁에서는 기계화된 운송 방법을 북베트남이 이용했다. 북베트남은 소련으로부터 지원받은 소련제 6륜 트럭을 통해 물자와 병력을 이송했다. 당시 미공군으로 참전했던 메릴 맥피크(Merrill McPeak)의 얘기를 들어보자.

 

한번 북베트남의 관점에서 이 문제를 생각해봅시다. 그들은 남쪽으로 보급품을 전달해야 합니다. 인력, 장비, 소모품 같은 걸 말이죠. 이들은 무에서부터 시작해, 미국 매사추세츠 크기의 지역에 큰 길을 만들었어요. 상당한 양의 땅을 몰수하고 길을 내며 또 그걸 유지했습니다.”

(호치민 루트를 폭격하는 미군의 B-52 폭격기)

 

(파괴되고 있는 밀림)

 

(폭발하고 있는 네이팜탄)

 

(호치민 루트에 살포되는 맹독성 고엽제 에이전트 오렌지)

 

(고엽제로 말라버린 나무들)

 

미국은 이들을 가로막기 위해 대략 300만 톤의 폭탄을 이 호치민 루트 지역에 투하했고, 이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이 독일과 일본에 투하한 폭탄보다 더 많은 양이다. 미국은 북베트남의 보급로를 차단하기 위해, 에이전트 오렌지를 비롯한 대량의 고엽제를 살포했으며, 정글의 수천 헥타르를 파괴했다. 이걸 본 한 미군 조종사는 앙상한 달의 표면이라 부를 정도였다. 그러나 미국은 베트남인들의 저항의지를 꺾지 못했다. 북베트남군 참전용사인 동시응우옌(Dong Si Nguyen)의 얘기를 들어보자.

(베트민 참전용사이자 북베트남군 참전용사인 동시응우옌, 호치민하고도 가까운 인물이었다고 한다.)

 

미국인 친구 하나가, 물어본 적이 있어요. 이 맹공격에 어떻게 저항할 수 있었지? 맹공격은 맞지만, 땅은 우리(북베트남군)이 지배했거든요. 공군은 하늘에 있었을 뿐이지요.”

(밀림을 수색하는 미군)

 

(M-16 소총을 발사하는 미군)

 

전쟁이 격화되면서, 미군들 또한 베트남이라는 수렁에 점차 깊숙이 들어가고 있었다. 미군은 베트콩을 소탕하기 위해, 밀림 깊숙이 들어갔지만, 미군을 기다리는 건, 말라리아와 같은 질병과 독사, 독거미, 거머리, 모기 등 온갖 생물들과, 베트콩이 설치한 함정 그리고 적의 공격을 대비한 베트콩의 기습 공격이었다. 미군은 베트콩이 나타나는 곳이 있으면, 항상 포격과 항공폭격에 의존했다. 이런 전투가 반복되면서, 미군들 또한 전쟁에 회의감을 가지게 됐다.

(반전 시위대, 베트남 전쟁을 반대하고 있다)

 

(전쟁의 종결을 요구하는 반전시위대)

 

(전쟁 반대 시위를 하는 한 흑인인사)

 

한편 본토에서는 1965년부터 전개된 반전운동의 규모가 조금씩 커져가고 있었다. 베트남 전쟁은 미국 자본주의 사회의 계급적 모순을 드러낸 전쟁이기도 하다. 잘살고 대학에 갈 수 있던 젊은이들은 군대를 회피할 수 있었지만, 시골에 살던 가난한 백인들이나 기본적으로 빈민계급인 흑인과 히스패닉 등은 징집되어 베트남이라는 전장터로 끌려갔다. 따라서 전쟁을 반대하는 흑인들의 목소리도 커졌다. 베트남 전쟁에 반대했던 인물 중에는 복싱 선수로 유명한 무하마드 알리(Muhammad Ali)도 있었다. 베트남 전쟁 당시 알리가 했던 얘기를 들어보자.

(베트남 전쟁에 대해 반대하고 있는 무하마드 알리)

 

우리 흑인도 살기 힘든데, 다른 자를 돕지 않을 겁니다. 내가 죽어야한다면, 당신(백인)들과 싸우면서 죽을 겁니다. 당신네 백인들이 바로 내 적입니다. 베트남인, 중국인, 일본인은 제 적이 아닙니다. 자유를 원하는 나를 반대하는 자들과 정의와 평등을 원하는 나를 반대하는 자들이, 내 고향인 이곳에서 조차 날 지켜주지 않는데, 어딜 가서 싸우라고요?”

 

물론 이 당시까지만 해도 전쟁을 반대하는 목소리보다 찬성하는 목소리가 더 컸다. 한편 남베트남에서는 미군의 잔혹한 군사작전으로 인해, 많은 이들이 혁명 세력에 가담하고 있었다. 베트콩 참전용사 레콴콩의 발언을 들어보자.

 

우리 집의 일곱째인 동생은 지역 반군에 들어갔는데, 미군이 소탕하러 와서 죽였습니다. 다른 동생은 자다가 습격당해서, 심장에 총을 맞고 죽었죠. 처남은 남베트남 첩자에게 배신당해서 목이 꺾인 채로 죽었고, 미군들이 우리 집에 총을 쏴서 여동생도 죽었습니다. 제 어머니는 항상 울면서도 막내에게 혁명에 가담하라고 하셨죠.”

(젊은 시절 당시 즈엉반마이 앨리엇, <The Sacred Willow(거룩한 버드나무)>라는 책 저자이기도 하다.)

 

이러한 대사를 보면 알 수 있듯이, 대다수 남베트남인이 베트콩에 가담한 이유는 남베트남군과 미군의 테러리즘적 행위 때문이었다. 그러한 행위들로 인해, 베트콩은 더 많은 농민의 지지를 받을 수 있었고, 병사들을 규합할 수 있었다. 남베트남 관료의 딸인 즈엉반마이 앨리엇은 베트남 전쟁 당시 로버트 맥나마라가 만든 RAND 연구소에서 일했다. 아버지가 프랑스 식민지 시절 관료였던 그녀는 1964년 그 회사에 들어가 베트콩에 대해 연구하기 시작했고, 연구를 하는 과정에서 베트콩이 왜 혁명투쟁을 하게 되었는지를 알게 되면서 그들에게 상당한 감명을 받기도 했다. 즈엉반마이 앨리엇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첫 인터뷰가 기억납니다. 저 혼자였고, 당시 저는 아주 어렸는데 암울한 교도소로 가서, 포로로 잡힌 베트콩 고위 간부를 인터뷰했습니다. 들어가기 전, 저는 야수를 만난다고 생각했습니다. 물소 머리에 말의 얼굴을 한 사람말입니다. 그가 들어오더니 저를 보고 깜짝 놀라더군요. 저도 그만큼 놀랐어요. 그 사람은 자신의 대의라고 믿는 것을 위해, 한 편생을 바쳐 싸워 온 사람이었습니다. 외세의 압박에서 조국을 해방하고, 나라를 하나의 정부 밑에 통일시키기 위해서 말이죠. 그는 정말 그것을 신봉하고 있었어요. 그 대의를 위해 평생을 바칠 정도로 말이죠. 그래서 저는 이 사람에게 아주 감명을 받으며 돌아왔죠.”

(반전 반정부 시위를 하는 남베트남 시민)

 

(시위를 진압하러 온 남베트남군)

 

(티우와 끼)

 

(시위를 진행하는 남베트남의 불교도들)

 

(시위와 봉기군 진압을 위해 투입된 남베트남군 탱크)

 

1963년 응오딘지엠 정부가 심화시켜 놓은 불교도와의 갈등은 이후 들어선 남베트남 정부에서도 해결하지 못했다. 1966년 베트남 다낭에서는 불교도들의 시위와 이에 동조하는 남베트남군의 저항이 있었다. 상황은 존슨과 딘 러스크가 남베트남의 멸망을 걱정할 정도로 심각해졌다. 19665월 티우 대통령과 끼 총리는 이들을 진압하기 위해 병력을 후에와 다낭에 보냈다. 봉기한 반체제 성향의 남베트남군은 남베트남군에 의해 진압됐다. 반란은 종결되고, 응우옌반티우와 응우옌까오끼가 다시 권력을 굳건히 했다.

(같은 편끼리 총격전을 벌이고 있는 남베트남군 병사)

 

(M1919 기관총을 발사하는 남베트남군)

 

(봉기군 거점을 선회하는 남베트남군 전투기)

 

(다낭 도시 외곽 언덕에서 상황을 지켜보는 미 해병대)

 

(외곽 언덕에 있는 장갑차 기관총 사수)

 

(동시에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모습, 이처럼 동쪽에서는 미군과 베트콩이 교전을 벌이고, 서쪽에서는 남베트남군들 끼리 내부총질을 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정말 놀라운 일이 발생했다. 다낭 도시 외곽 언덕에 있는 미군 전투 사령부에서 한 미 해병대 중위는 두 개의 전투가 동시에 펼쳐지는 것을 목격했다. 서쪽 방향에서는 미 해병대가 베트콩과 전투 중이었던데 반해, 동쪽에서는 남베트남군이 자신들끼리 총격전을 벌이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 있던 게 1966년 남베트남의 상황이었고, 이걸 지켜보던 미군 또한 어리둥절했다.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일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미국은 이러한 남베트남을 지원하기 위해, 전력을 증강하고, 화력을 강화하고 있었다. 또한 수많은 미군이 수렁 속에서 전사했다. 아래는 17살에 자원입대한 미군 병사 모기가 고등학교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 쓴 내용이다.

(마을을 수색하는 미군)

 

(M-16 소총을 들고 밀림을 수색하는 미군)

 

더프에게, 몇 달 전에 네게 편지를 쓰고, 몇 가지 흥미진진하지만 아주 기분 나쁜 일이 있었어. 1분에 900발을 쏘는 중국제 경기관총에 꼼짝 못 하고 있다가, 친한 친구 하나가 내 옆에서 죽은 게 최악이야. 나중에 자세한 얘기를 할 수 있겠지. 만약 그때까지 내가 완전히 정신이 나가지 않으면. 그건 사실 내 희망사항이야. 나를 전선에서 빼줄 거란 잘못된 희망인 거지. 난 한동안 아주 종교적으로 변해서, 여러 가지 기도를 했는데, 주로 살아 있으려고 하는 기도였어. 하지만 다시 무신론자가 되었지. 사격이 시작될 때까지 말이야.”

(모기가 살던 집)

 

(모기의 사망을 알리는 미국 언론)

 

(모기와 그의 가족들의 화기애애한 모습)

 

모기(덴턴 윈슬로우 크록커)1966년 남베트남의 밀림에서 야간작전을 수행하던 중, 베트콩 진영에서 발사한 기관총에 맞아 언덕을 오르던 중 전사했다. 그의 시신은 이후 본국으로 이송됐고, 장례식을 치른 뒤, 수도 워싱턴 D.C에 있는 알링턴 국립묘지에 묻혔다. 이처럼 모기와 같은 젊은이들은 베트남의 수렁 속에서 죽어나가고 있었다. 누군가에게 소중한 가족이고, 이웃인 사람들이 이렇게 하나 둘씩 죽어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관에 담겨 본국으로 돌아온 미군들)

 

(워싱턴 D.C에 있는 알링턴 국립묘지, 4년 전 글쓴이도 이 곳을 방문한 적이 있다.)

 

(현재도 있는 모기의 묘비)

 

그러나, 이런 무모한 전쟁을 벌이는 미국 정치인들은 자신들이 질 것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전쟁을 멈추지 않았다. 결국 이들이 앞으로 치를 대가는 훨씬 더 큰 것이었고, 실제로 이들은 큰 대가를 치르게 된다.

 

4화 전반부 리뷰는 여기까지입니다. 다음에 4화 후반부 리뷰 올리겠습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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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마요정 2022-08-28 22: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같은 사람인데 이념이 다르다고 소머리 괴물인 줄 알았다는 건 남의 나라 일이 아니겠죠ㅠㅠ 전쟁은 너무 참혹합니다. 즈엉반마이 앨리엇의 가족들이나 17살 모기도 너무 슬프네요. 잘 읽었습니다. 지금도 전쟁 중이라는 사실이 너무 안타깝고 슬프네요ㅠㅠ

NamGiKim 2022-08-28 22:43   좋아요 1 | URL
반공주의자들이 베트민과 베트콩을 그런식으로 악마화했죠. 다른 한펀으로 마이 앨리엇의 언니와 형부는 베트민에 들어가 프랑스에 맞서 싸웠고, 미국과의 전쟁에서도 북베트남군 편이었죠. 반면 아버지는 프랑스 식민지 시절부터 고위관리였고요.

NamGiKim 2022-08-29 20:49   좋아요 1 | URL
워낭 양질의 다큐멘터리라 이렇게 공들여 리뷰를 올리는 거죠. 10화까지 쭉 가봅시다. 아무튼 잘 읽어주셨다니 고마울 따름입니다.

꼬마요정 2022-08-29 21:36   좋아요 1 | URL
넵 많이 배웁니다. 10화까지 잘 부탁드립니다. 이념이 무섭습니다. 가족도 저렇게 찢어놓고 말이죠.
 

내가 아는 페친이 있는데, 이 친구가 개인적으로 SNS로 연락하는 러시아 친구가 있음. 이 친구 할아버지가 고려인이고, 우크라이나 돈바스 출신임. 그 친구는 현재 러시아에서 살고 있고, 돈바스 내전때 러시아로 피난옴. 07년생인 그 친구는 7살때 우크라이나 돈바스에서 살았는데, 본인 고모가 우크라이나 네오나치들에게 죽임을 당하고 시신 토막내는걸 직접 봤다고 한다. 그런 테러와 학살을 피해서 러시아로 왔다고. 이런 얘기 들으니 우크라이나 지지한다는 우뽕들에게 분노를 느낀다.

https://matomehub.jp/ukraine/page/2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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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dvs117 2023-07-16 22: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러니까요. 우크라이나 네오나치들이 온갖 반인륜적이고 악랄한 만행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저지르고 있는데, 언론은 침묵하고 있어요!
 

2년 동안 코로나에 걸린 적이 없어서, 나는 항체가 생겼었나를 의심을 했지만, 오미크론과 같은 신종 변이 바이러스에는 아니었나 봅니다. 확진자와 접촉하여 23일 보건진료소에서 PCR 검사를 받았는데, 오늘 아침 결과를 보니 양성이 나와버렸네요. 앞으로 1주일간 집에서 꼼짝 못한채로 격리신세가 되버렸습니다. 오늘 아침에 집안에서 놀다가, 엊그제 1시간 정도 보다가 중단한 PBS The Vietnam War 3화 나머지 부분을 봤습니다. 아무것도 안하며 노는 것 보다야 이렇게 중간중간 리뷰를 남기는 것도 나쁜 생각은 아닌 것 같습니다. 아무튼 The River Styx 리뷰 후반부를 이제 얘기하도록 하겠습니다.

(The River Styx 전반부에 나오는 인트로 영상)


1965년 3월 미 해병대 3,500명이 다낭에 상륙했을 당시, 문제가 있었다. 누가 적이고 누가 아군인지 전혀 구분이 되지 않는 상황이 펼쳐졌기 때문이다. 이는 민간인과 게릴라가 구분이 되지 않는 베트남 전쟁의 특수한 형태였다. 거기다 제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쟁 때도 미군 내에 존재했던 인종주의는 베트남 전쟁 당시에도 존재했고, 대다수 미국인들은 여전히 베트남에서도 아시아인들을 인종적으로 열등하다고 보거나 비하했다. 반면 베트남인들은 마음속 깊숙이, 외세에 대한 저항의식을 가지고 있었고, 미국도 과거 프랑스와 같은 적으로 인식했다. 당시 남베트남군 장교였던 트란녹토안(Tran Ngoc Toan)은 다큐멘터리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베트남인들 마음속 깊은 곳에는 외세는 모두 침략자에요. 미군이 베트남에 들어오니, 베트콩은 침략자에 맞서 싸울 사람들을 더 결집할 수 있었죠.”


대다수 미국인들은 1965년 시점까지도 베트남과 인도차이나라는 나라가 어디 있는지도, 그리고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도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앞으로 베트남 전쟁에서 미국의 패전을 앞당길 반전운동은 1965년부터 생기기 시작했다. 베트남 전쟁 관련 첫 번째 반전시위는 민간인을 대량학살하는 무기 네이팜탄을 만드는 미국의 다우케미컬 공장에서 있었다. 놀랍게도 첫 번째 시위는 겨우 40명이 결집한 수준에 불과했다. 이걸 보니, 국민들의 무관심 속에서 반미시위를 하는 글쓴이의 처지가 다소 오버랩 되기도 했다.

(1965년 반전운동을 하는 학생들을 인터뷰하는 미국인 기자)


(반전 연설을 하고 있는 미국 대학의 어느 교수)


(1965년 수도 워싱턴 D.C에 모인 반전 시위대)


미 해병대 다낭 상륙 2주 후 미국 미시간 대학의 교수들은 베트남 전쟁 확전에 대해 교수와 학생 3,000명간의 밤샘 토론을 조직했고, 이어서 맨해튼에 있는 뉴욕 대학교와, 위스콘신 대학교, 캘리포니아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U.C 버클리 대학교에서도 베트남 전쟁관련 반전토론 및 운동이 전개됐다. 다큐멘터리에서는 전혀 언급되지 않았지만, <미국 민중사>로 유명한 저자이자 학자인 하워드 진(Howard Zinn) 또한, 이 시점부터 베트남 전쟁에 반대하는 실천행동에 착수했다. 아무튼 이러한 행동에 고무되어 1965년 봄 워싱턴 D.C에서는 민주 사회를 위한 학생 모임 줄여서 SDS(Students for a Democratic Society)에서 조직한 대략 25,000명에서 30,000명이 모여 반전운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롤링썬더 작전 당시 북베트남을 폭격하는 미군 전투기, 미국은 북베트남을 폭격하여 초토화시켰다.)


(다큐멘터리에 나와 증언한 참전용사 레민쿠에, 레민쿠에는 1950년대 당시 토지개혁으로 부모를 잃어 이모네 집에서 자랐다. 그러던 1960년대 미국이 베트남을 침공하자, 북베트남군으로 참전하여 호치민 루트에서 복구작업에 투입됐다. 놀랍게도 이때 쿠에가 즐겨읽던 책은 해밍웨이의 미국 문학이다.)


(상공에서 촬영된 폭격 장면)


(폭탄을 피해 도망치는 북베트남의 민간인들, 북폭 당시 미군의 폭격은 군인과 민간인을 가리지 않았다.)


(미군의 폭격으로 파괴되고 있는 북베트남의 어느 마을)


1965년 3월 2일부터 미국이 전개한 롤링썬더 작전(Operation Rolling Thunder) 즉 북폭은 북베트남의 농촌과 도시를 무차별적으로 파괴하고 있었다. 얼마나 많은 폭탄을 투하했는지, 그리고 그 폭격으로 인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는지 아직도 제대로 파악하기 힘든 수준이다. 폭격 기간 3년 동안 대략 20만 명의 민간인이 폭격으로 죽었다고 추정하지만, 이 숫자는 상식적으로 믿기 힘든 숫자다. 한국전쟁 당시 미공군의 북한 폭격을 조사했던 소련 측은 28만 명의 민간인이 죽었다고 하는데, 현재 학계에서는 북한에서 대략 군인 민간인 할 거 없이 100만 명이 죽은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1995년 베트남 노동 사회부의 추정치에 따르면, 전쟁을 통틀어 민간인 400만 명이 죽었는데, 이 중 200만 명의 북베트남 민간인이 죽었다고 추정했다. 당시 미국이 북베트남에 투하한 폭탄의 양이 한국전쟁때 북한에 투하한 폭탄의 양보다 훨씬 더 많다. 대략 100만 톤의 폭탄이 북베트남에 투하되었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1995년 노동 사회부의 추정치는 단순히 과장으로만 치부할 수 없는 수치다.

(미군의 폭격으로 불타오르고 있는 마을)


(폭격의 잔해 속에서 사망자와 부상자를 옮기고 있는 북베트남의 여성)


(폭격으로 잿더미가 된 민간시설, 미군이 투하한 폭탄으로 마을과 학교 그리고 병원이 파괴됐다.)


1965년부터 존슨 정부가 북베트남을 폭격하자, 북베트남의 농촌과 마을 그리고 도시는 무차별적으로 파괴됐다. 미군은 폭격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을지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래서 네이팜 폭탄을 포함한 무수히 많은 폭탄을 남베트남 뿐만 아니라 북베트남에 무차별적으로 투하했다. 당시 16살이던 소녀 레민쿠에(Le Minh Kue)는 북폭을 경험하면서, 북베트남군을 돕기 위해 군에 입대했다. 아래의 증언은 레민쿠에가 다큐멘터리에서 증언한 내용으로 당시 미군의 폭격이 민간인을 가리지 않았다는 걸 알 수 있다.


“처음에는 크게 겁먹지 않았는데, 시체를 보게 되니 겁이 나더군요. 미군이 한 마을을 몇 시간 동안 폭격했습니다. 저는 상황이 어떻게 됐는지 보려고 뛰어다녔습니다. 마을이 말 그대로 형체도 없이 사라졌죠. 그때부터 진짜 전쟁이 시작되었다는 걸 알았습니다. 우리 집은 노인 요양 시설 옆에 있었는데, 완전히 파괴되었습니다. 미군이 투하한 폭탄이 시장과 학교에 떨어졌죠.”

(폭격의 잔해속에서 발견된 어린이들의 시신.)


(호치민 루트에서 수송로 복구잡업에 투입됐던 북베트남 여군, 베트남 전쟁 당시 북베트남군이나 베트콩 여군들의 활약은 무수히 많다.)


북베트남군에 입대한 레민쿠에는 호치민 루트에 투입되어, 수송로를 복구하는 작업을 했다. 당시 레민쿠에가 정말 감명깊게 읽었던 책은 놀랍게도 어네스트 해밍웨이(Ernest Hemingway)의 소설이었다고 한다. 특히나 해밍웨이가 스페인 내전에 참전하여 자신이 겪은 경험을 바탕으로 쓴 소설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를 통해 전쟁에 대처하는 방법을 배웠고, 실제로 레민쿠에는 전쟁 기간 동안 미국 문학을 읽으며, 전쟁터에서 살았다.


한편 1965년 5월 남베트남의 상황은 소규모 5천명의 지원을 받는 베트콩 연대가 매주 남베트남군 1개 대대를 궤멸시키고 있는 상황이었다. 남베트남 정부는 몰락해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되자, 주월미군총사령관인 웨스트모어랜드는 미군 수만 명을 증파하라고 존슨 대통령에게 요구했고, 이에 따라 미군 병력은 급증했다. 미군의 무차별 북폭은 계속됐지만, 북베트남의 지도부는 이에 굴복하지 않았다. 반면 중국과 소련은 북베트남에게 상당한 전쟁 물자를 지원했고, 특히나 북베트남의 대공 방어망은 소련제 대공포와 샘 미사일로 채워졌다. 또한 중국에서는 북베트남을 지키기 위한 적잖은 병력을 보냈다.

(북베트남군에 배치된 소련의 신무기인 샘 미사일, 소련은 베트남 전쟁 당시 북베트남에게 막대한 물자를 지원했다.)


(마오쩌둥과 호치민의 초상화, 중국 또한 북베트남에 막대한 물자를 지원했다.)


(마오쩌둥의 초상화를 건 중국군 트럭, 중국군 또한 북베트남에 배치됐다.)


미군 정규부대 인원이 증파되자, 미군은 군사작전을 전개하는 과정 속에서 남베트남 민중에게 반발을 살 만한 행위를 했다. 미군은 베트콩이 있는 곳으로 의심되는 마을을 불태우고, 주민들은 강제이주 시키며, 이에 복종하지 않을 시 베트콩으로 간주하고 사살했다. CBS의 종군기자인 세이퍼는 작전에 참가한 미군과 함께하며, 전쟁의 참상을 보고했다. 당시 세이퍼가 TV에 나와 보도한 내용을 보도록 하자.


“이것이 바로 베트남 전쟁의 실상입니다. 마을에는 노인들과 어린이들뿐입니다. 미 해병대가 노부부의 집을 불태웠습니다. 여기서 불이 났기 때문입니다. 이 마을에 들어가보면 베트콩으로 의심되는 젊은이는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이 날 작전으로 150채가 불에 탔고, 비무장 여성 3명이 부상당하고, 갓난아기 한 명이 죽었으며, 해병대 1명이 부상당하고, 포로 넷이 남았습니다. 오늘의 군사작전은 베트남의 절망이 축소된 것입니다.”

(다낭에서 군사작전을 전개하고 있는 미군들)


(밀림을 수색하는 미군)


(농촌에 있는 집에 불을 붙이는 미군)


(화염 방사기로 집을 불태우는 미군들)


(이러한 전쟁의 참상을 텔레비전을 통해 보도하고 있는 CBS의 세이퍼 기자)


(미군이 마을을 불태우는 것에 대해 울고 있는 한 여성)


(미군이 군사작전을 전개하자 공포에 떨고 있는 베트남 민간인들)


미국 방송사인 CBS가 이러한 방송을 하자, 대통령인 존슨은 CBS 사장에게 전화를 걸어. “나를 엿먹일 생각이냐? 저 세이퍼라는 놈은 소련의 첩자로 의심되니 해고하라”라고 말했다. 그러나 세이퍼는 이런 잔혹한 참상을 보고하면서도, 미군의 승리를 확신했던 인물이었다. 즉, 이러한 점에서 미국은 자신들에게 불리한 사실이나 현장의 목소리를 외면하고자 했다. 그러면서, 존슨이나 웨스트모어랜드는 자신들이 이러한 행위를 하는 것을 마치 “베트콩의 테러 때문이다.”라고 변명을 해댔다.

(위 워 솔져스, 2002년에 개봉한 이 영화는 1965년 미군과 북베트남군이 첫 교전을 벌인 이아드랑 전투를 다루고 있다. 그러나 이 영화의 문제는 지나치게 미국을 미화했다는 점이다.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이아드랑 전투에 투입된 미군은 1876년 리틀 빅혼 전투에서 원주민을 학살했고, 1950년 한국전쟁 당시 노근리에서 민간인을 학살했던 부대다.)


(착륙한 헬기에서 내리는 미군들)


(무전기를 통해 항공폭격을 요청하는 할 무어 중령)


(이아드랑 전투 당시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이 주둔했던 지역)


(할 무어 중령이 이끄는 미군이 투입된 LZ 액스레이 지역)


대규모의 미군 병력이 남베트남에 도착한 이후 북베트남 정규군 또한 호치민 루트를 통해 남베트남에 증원됐다. 이에 따라 미군과 북베트남군 간의 교전은 시간문제였다. 1965년 9월 베트남 중부고원지대에 있는 안케 기지에 미군 최정예 부대라 할 수 있는 제1 기병사단이 증원됐고, 이들은 미군 특수부대 그린베레와 남베트남 특수부대인 레인저 부대 그리고 현지 소수민족으로 구성된 부대와 함께 베트콩을 상대했다.

(M-16 소총을 발사하는 미군)


(미군 포격을 받은 이아드랑 지역의 밀림)


(기관총과 로켓 미사일을 발사하는 미군 휴이 헬기)


1965년 11월 14일부터 18일까지 대략 4일간 이아드랑에서 미군과 북베트남군 사이의 전투가 벌어졌다.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할무어 중령이 이끄는 병력은 LZ 액스레이 지역에서 10:1 수준으로 북베트남군을 궤멸시켰지만, 17일 날 LZ 올버니에 들어갔던 미군 병력은 북베트남 정규군에게 매복기습을 당하여 수백 명이 전사했다. 이아드랑 전투에서 미군은 300명 이상의 전사자와 500명 이상의 부상자가 속출했고, 전사한 남베트남군까지 합쳐서 1,200명의 사상자가 나왔다. 북베트남군과 베트콩 또한 미군의 헬기사격 및 건쉽(Gun Ship) 공격과 B-52 폭격기와 각종 전투기의 항공 공습 그리고 포격과 같은 막강한 화력 공세를 당해서, 최소 1,800명 이상이 사망했다. 이아드랑 전투 이전에 인근 지역에서 북베트남군과 교전을 치렀던 찰스 베크위스 소령은 인터뷰에서 베트콩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 중 200명 만 내 밑에 둘 수만 있다면 모든 걸 주겠습니다. 내가 본 군인들 중에 가장 최고였습니다. 베트콩은 헌신적이고 좋은 군인들입니다. 내가 본 가운데 단연 최고지요.”

(이아드랑을 폭격하는 미군 B-52 폭격기)


(네이팜 폭탄으로 파괴되고 있는 이아드랑 밀림)


(미군이 북베트남군에게 패배했던 LZ 올버니 지역)


(올버니 지역에서 북베트남군의 기습 공격을 받아 패배한 미군들)


(부상당한 미군)


이아드랑 전투 이후 웨스트모어랜드는 존슨 대통령에게 남베트남에 주둔하는 미군 병력을 20만 명으로 늘릴 것을 요청했다. 놀랍게도, 당시 베트남 전쟁을 구상했던 로버트 맥나마라는 이 전쟁이 미국의 승리로 끝나지 않을 것을 알고 있었다. 당시 국방장관이던 맥나마라는 존슨에게 미국이 승리할 가능성은 1/3 이상이 되기 힘들다고 언급했다. 아래는 다큐멘터리에 나온 미군 참전용사 칼 말렌테스의 인터뷰 내용이다.


“당시 정권에 대해 제가 싫어한 것은 첫 번째로는 거짓말이었어요. 정책의 오류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아주 고통스럽고, 실수로 많은 사람이 죽더라도 훌륭한 마음으로 그랬다면 말이죠. 아이젠하워와 케네디는 답을 얻으려 할 때 그랬습니다. 하지만 맥나마라는 1965년에 알고 있었다잖아요. 제가 베트남으로 가기 3년 전에 말이죠. 이 전쟁에서 이길 수 없다는 걸요. 그게 바로 제가 화나는 지점입니다. 사람이 실수 할 수 있지만, 실수를 덮으려 하면 자신의 자존심 때문에 남들을 죽이는 거니까요. 그게 화가 납니다.”

(윌리엄 웨스트모어랜드)


(로버트 맥나마라)


이렇게 해서 존슨 대통령은 1966년 새해에 이르러 베트남 주둔 미군 병력을 20만 명으로 증강했다. 20만 명이나 넘는 미군이 남베트남에 들어왔지만, 미국 정부는 자신들이 이 전쟁에서 승리하지 못할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 점에서 미국이 일으킨 베트남 전쟁은 거짓말과 기만 속에서 진행됐다. 심지어 미국이 지키려 했던 남베트남 정부는 1965년 6월 중반까지 군벌들의 쿠데타가 끊이질 않았다. 한편 베트콩은 농촌에 해방구를 만들었고, 그 해방구는 대규모 미군 병력이 와도 굴복하지 않을 수준의 것이었다. 다큐멘터리 3부 The River Styx는 존슨 대통령의 베트남 전쟁을 본격적으로 다룬 에피소드였다. 물론 그 과정에서 나타나는 미국식 편향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북베트남측과 남베트남측 그리고 베트콩의 입장도 같이 보여준다는 점에서 균형을 잡으려는 점도 보인다.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느끼는 거지만, 세계 최강대국인 미국이 자신들이 저지른 실책에 발목이 잡혀 베트남이라는 깊은 수렁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 그 과정이 참으로 비참하다. 결국 미국식 우월주의와 군사력에 대한 맹신이 베트남 전쟁이라는 미국의 대학살극을 만들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기 때문에 질 것을 알면서도 수십만 명의 전투 병력을 남베트남에 보낸 것이다.


이로써 3화 후반부 얘기를 마칩니다. 다음에 4부 리뷰도 전반부와 후반부에 걸쳐서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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