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8년 10월에 발발한 여순항쟁(Yeosu–Suncheon Uprising)은 미국과 이승만 정부의 민간인 대학살이었다. 여순사건의 원인은 1948년 제주 4.3항쟁이었으므로, 제주 4.3 항쟁을 진압하기 위해 보내질 예정이었던 병력이 진압을 거부하고 봉기를 단행하면서 시작됐다. 남로당을 중심으로 봉기했던 여순항쟁은 결과적으로 이승만과 미군정의 잔혹한 진압으로 종결됐고, 최소 1만 명 이상의 민간인이 이들에 의해 학살당했다. 2000년대 진실화해조사위원회의 조사를 통해, 발견된 희생자의 시신은 총 3,384구로 실제 희생자보다 일부만 발견되었을 뿐이다.
여순항쟁은 제주 4.3 항쟁과 더불어 한국 사회에서 하나의 반란사건이나 공산주의 폭동으로 규정되어 왔다. 즉, 이 사건이 미국과 이승만 정부의 폭압적인 폭력과 억압적인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여 봉기한 항쟁이었다는 사실관계는 손쉽게 무시당해왔던 것이다. 여순항쟁을 잔혹하게 진압한 이승만은 당연히 이 사건을 공산주의의 폭동이나 반란으로 규정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여순사건에 대한 교과서의 정의는 이와같은 이승만식 관점을 벗어나지 못했다.
한국 사회에서 역사교육은 수십 년간 국정제도로 운영되어 왔다. 학살극의 당사자인 이승만은 당연히 국정교과서를 발행했으며, 비록 교과서에 이를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국가적으로 여순항쟁을 공산주의 반란으로 규정했다. 1960년 4.19 혁명으로 이승만 정부가 물러서자, 당시 학살 피해자 유족들은 유족회를 결성하여, 조사에 나섰다. 그러나 1961년 5월 16일 박정희가 주도한 쿠데타로 군부정권이 들어섰고, 이들 또한 국정 교육을 단행했다. 특히나 1972년 10월 유신을 선포한 박정희는 1974년 신학기부터 주체적 민족사관에 투철한 국정교과서를 내놓았다고 말했으며, 역사교육은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강조한 역사교육의 내용으로 진행됐다.
여순항쟁이 교과서에 처음 언급된 것은 박정희 유신정권 체제하의 제3차 교육과정 때부터였다. 1976년에 발행된 국사 교과서에는 제주 폭동과 여순 반란을 북한 공산주의자들이 남한 공산주의자들을 사주하여 일으킨 사건으로 서술했다. 1979년 박정희가 암살당한 이후, 전두환이 12.12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았다. 1980년대 전두환 정권은 제4차 교육과정을 거치며 두 사건에 대한 서술의 양을 늘렸다. 당시 교과서에 나온 여순사건은 “사회를 교란시키기 위하여 북한 공산주의자들의 사주 아래 남한 공산주의자들이 일으켰다.”고 나온 점에서 박정희 정부 당시 교과서 내용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나 박정희 정부 시절과는 달리, “공산주의자들이 관공서를 습격하고 경찰과 민간인을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는 식의 서술이 추가됐다.
박정희와 전두환 시기 이 두 사건은 폭동과 반란으로 표현됐지만, 노태우 정권 하에서 단행된 제5차 교육과정에서는 제주도의 경우 4.3 사건으로 표기되었지만, 여순은 이전과 똑같이 여수·순천 반란사건으로 표현됐다. 문민정부가 들어선 후 개정된 제6차 교육과정의 교과서에서는 제주도 4.3 사건을 “공산주의자들이 남한의 5.10 총선거를 교란시키기 위하여 일으킨 무장폭동”으로 보는 것은 여전했지만, “진압과정에서 무고한 주민들까지도 희생되었다”고 하며 처음으로 민간인 희생을 언급했다. 하지만 여순의 경우 “대한민국을 전복하려는 의도를 가진 반란”으로 표기됐다.
김대중 정권 들어서 시행된 제7차 교육과정에서는 제주 4.3과 여순에 대해 사건이라 표기했으며, 제주 4.3의 경우 진압과정에서의 무고한 인명피해가 일어났다고 언급했다. 반면 여순사건에 대해선 “제주도 4.3 사건의 진압 출동 명령을 거부한 군인들이 반란을 일으켜 여수·순천 일대를점령한 사건”이라고 설명했다. 이 시점까지도 여순에 대해선 제주 4.3과는 달리 본질적인 문제를 교과서에서 꺼내지 않은 것이다. 2000년대 들어서 나온 교과서에서도 여순에 대해선 여수 주둔 부대 내 좌익세력이 일으킨 반란이나 봉기로 표현하는 교과서들이 제법 많았다.
지금도 여순사건의 본질적인 문제는 교과서에서 제대로 가르치지 않고 있다. 이 여순사건이 미군정의 폭압적 통치와 잔혹한 학살에 반대하여 자주적인 통일정부와 반외세 정부를 달성하고자 했다는 점은 항상 거세당해 있는 것이다. 한국 근현대사를 공부하다 보면, 이러한 교과서적 서술이 한 사건의 본질적인 부분을 얼마나 각색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은 국민의 땀 뿐만 아니라 수많은 민중의 피를 요구했다. 그 유혈의 역사를 외면한다면 우리는 부정적 역사를 미래를 위한 긍정적 지양분으로 바꿀 수 업을 것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앞으로의 교과서에서는 여순항쟁의 본질이 언급되야 할 것이다.
참고문헌
김득중, 『빨갱이의 탄생, 여순사건과 반공국가의 형성』, 선인, 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