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 동안 코로나에 걸린 적이 없어서, 나는 항체가 생겼었나를 의심을 했지만, 오미크론과 같은 신종 변이 바이러스에는 아니었나 봅니다. 확진자와 접촉하여 23일 보건진료소에서 PCR 검사를 받았는데, 오늘 아침 결과를 보니 양성이 나와버렸네요. 앞으로 1주일간 집에서 꼼짝 못한채로 격리신세가 되버렸습니다. 오늘 아침에 집안에서 놀다가, 엊그제 1시간 정도 보다가 중단한 PBS The Vietnam War 3화 나머지 부분을 봤습니다. 아무것도 안하며 노는 것 보다야 이렇게 중간중간 리뷰를 남기는 것도 나쁜 생각은 아닌 것 같습니다. 아무튼 The River Styx 리뷰 후반부를 이제 얘기하도록 하겠습니다.

(The River Styx 전반부에 나오는 인트로 영상)


1965년 3월 미 해병대 3,500명이 다낭에 상륙했을 당시, 문제가 있었다. 누가 적이고 누가 아군인지 전혀 구분이 되지 않는 상황이 펼쳐졌기 때문이다. 이는 민간인과 게릴라가 구분이 되지 않는 베트남 전쟁의 특수한 형태였다. 거기다 제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쟁 때도 미군 내에 존재했던 인종주의는 베트남 전쟁 당시에도 존재했고, 대다수 미국인들은 여전히 베트남에서도 아시아인들을 인종적으로 열등하다고 보거나 비하했다. 반면 베트남인들은 마음속 깊숙이, 외세에 대한 저항의식을 가지고 있었고, 미국도 과거 프랑스와 같은 적으로 인식했다. 당시 남베트남군 장교였던 트란녹토안(Tran Ngoc Toan)은 다큐멘터리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베트남인들 마음속 깊은 곳에는 외세는 모두 침략자에요. 미군이 베트남에 들어오니, 베트콩은 침략자에 맞서 싸울 사람들을 더 결집할 수 있었죠.”


대다수 미국인들은 1965년 시점까지도 베트남과 인도차이나라는 나라가 어디 있는지도, 그리고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도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앞으로 베트남 전쟁에서 미국의 패전을 앞당길 반전운동은 1965년부터 생기기 시작했다. 베트남 전쟁 관련 첫 번째 반전시위는 민간인을 대량학살하는 무기 네이팜탄을 만드는 미국의 다우케미컬 공장에서 있었다. 놀랍게도 첫 번째 시위는 겨우 40명이 결집한 수준에 불과했다. 이걸 보니, 국민들의 무관심 속에서 반미시위를 하는 글쓴이의 처지가 다소 오버랩 되기도 했다.

(1965년 반전운동을 하는 학생들을 인터뷰하는 미국인 기자)


(반전 연설을 하고 있는 미국 대학의 어느 교수)


(1965년 수도 워싱턴 D.C에 모인 반전 시위대)


미 해병대 다낭 상륙 2주 후 미국 미시간 대학의 교수들은 베트남 전쟁 확전에 대해 교수와 학생 3,000명간의 밤샘 토론을 조직했고, 이어서 맨해튼에 있는 뉴욕 대학교와, 위스콘신 대학교, 캘리포니아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U.C 버클리 대학교에서도 베트남 전쟁관련 반전토론 및 운동이 전개됐다. 다큐멘터리에서는 전혀 언급되지 않았지만, <미국 민중사>로 유명한 저자이자 학자인 하워드 진(Howard Zinn) 또한, 이 시점부터 베트남 전쟁에 반대하는 실천행동에 착수했다. 아무튼 이러한 행동에 고무되어 1965년 봄 워싱턴 D.C에서는 민주 사회를 위한 학생 모임 줄여서 SDS(Students for a Democratic Society)에서 조직한 대략 25,000명에서 30,000명이 모여 반전운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롤링썬더 작전 당시 북베트남을 폭격하는 미군 전투기, 미국은 북베트남을 폭격하여 초토화시켰다.)


(다큐멘터리에 나와 증언한 참전용사 레민쿠에, 레민쿠에는 1950년대 당시 토지개혁으로 부모를 잃어 이모네 집에서 자랐다. 그러던 1960년대 미국이 베트남을 침공하자, 북베트남군으로 참전하여 호치민 루트에서 복구작업에 투입됐다. 놀랍게도 이때 쿠에가 즐겨읽던 책은 해밍웨이의 미국 문학이다.)


(상공에서 촬영된 폭격 장면)


(폭탄을 피해 도망치는 북베트남의 민간인들, 북폭 당시 미군의 폭격은 군인과 민간인을 가리지 않았다.)


(미군의 폭격으로 파괴되고 있는 북베트남의 어느 마을)


1965년 3월 2일부터 미국이 전개한 롤링썬더 작전(Operation Rolling Thunder) 즉 북폭은 북베트남의 농촌과 도시를 무차별적으로 파괴하고 있었다. 얼마나 많은 폭탄을 투하했는지, 그리고 그 폭격으로 인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는지 아직도 제대로 파악하기 힘든 수준이다. 폭격 기간 3년 동안 대략 20만 명의 민간인이 폭격으로 죽었다고 추정하지만, 이 숫자는 상식적으로 믿기 힘든 숫자다. 한국전쟁 당시 미공군의 북한 폭격을 조사했던 소련 측은 28만 명의 민간인이 죽었다고 하는데, 현재 학계에서는 북한에서 대략 군인 민간인 할 거 없이 100만 명이 죽은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1995년 베트남 노동 사회부의 추정치에 따르면, 전쟁을 통틀어 민간인 400만 명이 죽었는데, 이 중 200만 명의 북베트남 민간인이 죽었다고 추정했다. 당시 미국이 북베트남에 투하한 폭탄의 양이 한국전쟁때 북한에 투하한 폭탄의 양보다 훨씬 더 많다. 대략 100만 톤의 폭탄이 북베트남에 투하되었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1995년 노동 사회부의 추정치는 단순히 과장으로만 치부할 수 없는 수치다.

(미군의 폭격으로 불타오르고 있는 마을)


(폭격의 잔해 속에서 사망자와 부상자를 옮기고 있는 북베트남의 여성)


(폭격으로 잿더미가 된 민간시설, 미군이 투하한 폭탄으로 마을과 학교 그리고 병원이 파괴됐다.)


1965년부터 존슨 정부가 북베트남을 폭격하자, 북베트남의 농촌과 마을 그리고 도시는 무차별적으로 파괴됐다. 미군은 폭격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을지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래서 네이팜 폭탄을 포함한 무수히 많은 폭탄을 남베트남 뿐만 아니라 북베트남에 무차별적으로 투하했다. 당시 16살이던 소녀 레민쿠에(Le Minh Kue)는 북폭을 경험하면서, 북베트남군을 돕기 위해 군에 입대했다. 아래의 증언은 레민쿠에가 다큐멘터리에서 증언한 내용으로 당시 미군의 폭격이 민간인을 가리지 않았다는 걸 알 수 있다.


“처음에는 크게 겁먹지 않았는데, 시체를 보게 되니 겁이 나더군요. 미군이 한 마을을 몇 시간 동안 폭격했습니다. 저는 상황이 어떻게 됐는지 보려고 뛰어다녔습니다. 마을이 말 그대로 형체도 없이 사라졌죠. 그때부터 진짜 전쟁이 시작되었다는 걸 알았습니다. 우리 집은 노인 요양 시설 옆에 있었는데, 완전히 파괴되었습니다. 미군이 투하한 폭탄이 시장과 학교에 떨어졌죠.”

(폭격의 잔해속에서 발견된 어린이들의 시신.)


(호치민 루트에서 수송로 복구잡업에 투입됐던 북베트남 여군, 베트남 전쟁 당시 북베트남군이나 베트콩 여군들의 활약은 무수히 많다.)


북베트남군에 입대한 레민쿠에는 호치민 루트에 투입되어, 수송로를 복구하는 작업을 했다. 당시 레민쿠에가 정말 감명깊게 읽었던 책은 놀랍게도 어네스트 해밍웨이(Ernest Hemingway)의 소설이었다고 한다. 특히나 해밍웨이가 스페인 내전에 참전하여 자신이 겪은 경험을 바탕으로 쓴 소설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를 통해 전쟁에 대처하는 방법을 배웠고, 실제로 레민쿠에는 전쟁 기간 동안 미국 문학을 읽으며, 전쟁터에서 살았다.


한편 1965년 5월 남베트남의 상황은 소규모 5천명의 지원을 받는 베트콩 연대가 매주 남베트남군 1개 대대를 궤멸시키고 있는 상황이었다. 남베트남 정부는 몰락해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되자, 주월미군총사령관인 웨스트모어랜드는 미군 수만 명을 증파하라고 존슨 대통령에게 요구했고, 이에 따라 미군 병력은 급증했다. 미군의 무차별 북폭은 계속됐지만, 북베트남의 지도부는 이에 굴복하지 않았다. 반면 중국과 소련은 북베트남에게 상당한 전쟁 물자를 지원했고, 특히나 북베트남의 대공 방어망은 소련제 대공포와 샘 미사일로 채워졌다. 또한 중국에서는 북베트남을 지키기 위한 적잖은 병력을 보냈다.

(북베트남군에 배치된 소련의 신무기인 샘 미사일, 소련은 베트남 전쟁 당시 북베트남에게 막대한 물자를 지원했다.)


(마오쩌둥과 호치민의 초상화, 중국 또한 북베트남에 막대한 물자를 지원했다.)


(마오쩌둥의 초상화를 건 중국군 트럭, 중국군 또한 북베트남에 배치됐다.)


미군 정규부대 인원이 증파되자, 미군은 군사작전을 전개하는 과정 속에서 남베트남 민중에게 반발을 살 만한 행위를 했다. 미군은 베트콩이 있는 곳으로 의심되는 마을을 불태우고, 주민들은 강제이주 시키며, 이에 복종하지 않을 시 베트콩으로 간주하고 사살했다. CBS의 종군기자인 세이퍼는 작전에 참가한 미군과 함께하며, 전쟁의 참상을 보고했다. 당시 세이퍼가 TV에 나와 보도한 내용을 보도록 하자.


“이것이 바로 베트남 전쟁의 실상입니다. 마을에는 노인들과 어린이들뿐입니다. 미 해병대가 노부부의 집을 불태웠습니다. 여기서 불이 났기 때문입니다. 이 마을에 들어가보면 베트콩으로 의심되는 젊은이는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이 날 작전으로 150채가 불에 탔고, 비무장 여성 3명이 부상당하고, 갓난아기 한 명이 죽었으며, 해병대 1명이 부상당하고, 포로 넷이 남았습니다. 오늘의 군사작전은 베트남의 절망이 축소된 것입니다.”

(다낭에서 군사작전을 전개하고 있는 미군들)


(밀림을 수색하는 미군)


(농촌에 있는 집에 불을 붙이는 미군)


(화염 방사기로 집을 불태우는 미군들)


(이러한 전쟁의 참상을 텔레비전을 통해 보도하고 있는 CBS의 세이퍼 기자)


(미군이 마을을 불태우는 것에 대해 울고 있는 한 여성)


(미군이 군사작전을 전개하자 공포에 떨고 있는 베트남 민간인들)


미국 방송사인 CBS가 이러한 방송을 하자, 대통령인 존슨은 CBS 사장에게 전화를 걸어. “나를 엿먹일 생각이냐? 저 세이퍼라는 놈은 소련의 첩자로 의심되니 해고하라”라고 말했다. 그러나 세이퍼는 이런 잔혹한 참상을 보고하면서도, 미군의 승리를 확신했던 인물이었다. 즉, 이러한 점에서 미국은 자신들에게 불리한 사실이나 현장의 목소리를 외면하고자 했다. 그러면서, 존슨이나 웨스트모어랜드는 자신들이 이러한 행위를 하는 것을 마치 “베트콩의 테러 때문이다.”라고 변명을 해댔다.

(위 워 솔져스, 2002년에 개봉한 이 영화는 1965년 미군과 북베트남군이 첫 교전을 벌인 이아드랑 전투를 다루고 있다. 그러나 이 영화의 문제는 지나치게 미국을 미화했다는 점이다.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이아드랑 전투에 투입된 미군은 1876년 리틀 빅혼 전투에서 원주민을 학살했고, 1950년 한국전쟁 당시 노근리에서 민간인을 학살했던 부대다.)


(착륙한 헬기에서 내리는 미군들)


(무전기를 통해 항공폭격을 요청하는 할 무어 중령)


(이아드랑 전투 당시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이 주둔했던 지역)


(할 무어 중령이 이끄는 미군이 투입된 LZ 액스레이 지역)


대규모의 미군 병력이 남베트남에 도착한 이후 북베트남 정규군 또한 호치민 루트를 통해 남베트남에 증원됐다. 이에 따라 미군과 북베트남군 간의 교전은 시간문제였다. 1965년 9월 베트남 중부고원지대에 있는 안케 기지에 미군 최정예 부대라 할 수 있는 제1 기병사단이 증원됐고, 이들은 미군 특수부대 그린베레와 남베트남 특수부대인 레인저 부대 그리고 현지 소수민족으로 구성된 부대와 함께 베트콩을 상대했다.

(M-16 소총을 발사하는 미군)


(미군 포격을 받은 이아드랑 지역의 밀림)


(기관총과 로켓 미사일을 발사하는 미군 휴이 헬기)


1965년 11월 14일부터 18일까지 대략 4일간 이아드랑에서 미군과 북베트남군 사이의 전투가 벌어졌다.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할무어 중령이 이끄는 병력은 LZ 액스레이 지역에서 10:1 수준으로 북베트남군을 궤멸시켰지만, 17일 날 LZ 올버니에 들어갔던 미군 병력은 북베트남 정규군에게 매복기습을 당하여 수백 명이 전사했다. 이아드랑 전투에서 미군은 300명 이상의 전사자와 500명 이상의 부상자가 속출했고, 전사한 남베트남군까지 합쳐서 1,200명의 사상자가 나왔다. 북베트남군과 베트콩 또한 미군의 헬기사격 및 건쉽(Gun Ship) 공격과 B-52 폭격기와 각종 전투기의 항공 공습 그리고 포격과 같은 막강한 화력 공세를 당해서, 최소 1,800명 이상이 사망했다. 이아드랑 전투 이전에 인근 지역에서 북베트남군과 교전을 치렀던 찰스 베크위스 소령은 인터뷰에서 베트콩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 중 200명 만 내 밑에 둘 수만 있다면 모든 걸 주겠습니다. 내가 본 군인들 중에 가장 최고였습니다. 베트콩은 헌신적이고 좋은 군인들입니다. 내가 본 가운데 단연 최고지요.”

(이아드랑을 폭격하는 미군 B-52 폭격기)


(네이팜 폭탄으로 파괴되고 있는 이아드랑 밀림)


(미군이 북베트남군에게 패배했던 LZ 올버니 지역)


(올버니 지역에서 북베트남군의 기습 공격을 받아 패배한 미군들)


(부상당한 미군)


이아드랑 전투 이후 웨스트모어랜드는 존슨 대통령에게 남베트남에 주둔하는 미군 병력을 20만 명으로 늘릴 것을 요청했다. 놀랍게도, 당시 베트남 전쟁을 구상했던 로버트 맥나마라는 이 전쟁이 미국의 승리로 끝나지 않을 것을 알고 있었다. 당시 국방장관이던 맥나마라는 존슨에게 미국이 승리할 가능성은 1/3 이상이 되기 힘들다고 언급했다. 아래는 다큐멘터리에 나온 미군 참전용사 칼 말렌테스의 인터뷰 내용이다.


“당시 정권에 대해 제가 싫어한 것은 첫 번째로는 거짓말이었어요. 정책의 오류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아주 고통스럽고, 실수로 많은 사람이 죽더라도 훌륭한 마음으로 그랬다면 말이죠. 아이젠하워와 케네디는 답을 얻으려 할 때 그랬습니다. 하지만 맥나마라는 1965년에 알고 있었다잖아요. 제가 베트남으로 가기 3년 전에 말이죠. 이 전쟁에서 이길 수 없다는 걸요. 그게 바로 제가 화나는 지점입니다. 사람이 실수 할 수 있지만, 실수를 덮으려 하면 자신의 자존심 때문에 남들을 죽이는 거니까요. 그게 화가 납니다.”

(윌리엄 웨스트모어랜드)


(로버트 맥나마라)


이렇게 해서 존슨 대통령은 1966년 새해에 이르러 베트남 주둔 미군 병력을 20만 명으로 증강했다. 20만 명이나 넘는 미군이 남베트남에 들어왔지만, 미국 정부는 자신들이 이 전쟁에서 승리하지 못할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 점에서 미국이 일으킨 베트남 전쟁은 거짓말과 기만 속에서 진행됐다. 심지어 미국이 지키려 했던 남베트남 정부는 1965년 6월 중반까지 군벌들의 쿠데타가 끊이질 않았다. 한편 베트콩은 농촌에 해방구를 만들었고, 그 해방구는 대규모 미군 병력이 와도 굴복하지 않을 수준의 것이었다. 다큐멘터리 3부 The River Styx는 존슨 대통령의 베트남 전쟁을 본격적으로 다룬 에피소드였다. 물론 그 과정에서 나타나는 미국식 편향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북베트남측과 남베트남측 그리고 베트콩의 입장도 같이 보여준다는 점에서 균형을 잡으려는 점도 보인다.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느끼는 거지만, 세계 최강대국인 미국이 자신들이 저지른 실책에 발목이 잡혀 베트남이라는 깊은 수렁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 그 과정이 참으로 비참하다. 결국 미국식 우월주의와 군사력에 대한 맹신이 베트남 전쟁이라는 미국의 대학살극을 만들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기 때문에 질 것을 알면서도 수십만 명의 전투 병력을 남베트남에 보낸 것이다.


이로써 3화 후반부 얘기를 마칩니다. 다음에 4부 리뷰도 전반부와 후반부에 걸쳐서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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