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번 PBS 베트남 전쟁 다큐 3부를 전반부와 후반부로 나누어 연재했다. 3부는 케네디 암살 이후, 미국의 대통령이 된 린든 B. 존슨이 어떻게 베트남 전쟁을 일으키게 되는지 깊숙이 파고들었다. 존슨과 맥나마라 그리고 맥스웰 테일러와 같은 이들은 자신들이 베트남 전쟁에서 승리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19653월 다낭에 미 해병대 3,500명을 상륙시킨 걸 시작으로 지속적으로 남베트남에 주둔하는 미군병력의 숫자를 늘렸다. 1966년에 들어서면서, 미국의 존슨 대통령은 북베트남의 하노이 당국과의 평화협상을 모색함과 동시에, 북베트남 정치 지도부에서 가장 강력한 인물이 바로 레주언(Le Duan)이라는 것을 인지했다. 존슨이 보기에, 레주언은 호치민을 포함한 북베트남 지도부에게 자신들이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고, 따라서 혁명전쟁을 지속해야한다고 압력을 놓는 인물이었다.

(PBS Vietnam War 4Resolve의 오프닝 장면)

 

(존슨 대통령과 프랑스의 샤를드골, 2차 세계대전 당시 자유 프랑스군을 이끌었던 샤를 드골은 전쟁 이후 프랑스의 식민지를 되찾으려는 제국주의 침략전쟁을 베트남에서 벌였었다. 그러나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로 베트남에서 물러가게 됐고, 이후에는 알제리에서도 물러났다. 결국, 이러한 교훈을 바탕으로 미국의 케네디와 존슨에게도 베트남 전쟁에 대해 의미심장한 충고를 했었다.)

 

(북베트남의 대공포 진지를 둘러보는 레주언, 1960년대부터 하노이 당국에서의 그의 권력은 호치민 보다 강해진 것으로 알려졌다.)

 

(총을 들고 훈련받는 북베트남군 여성 대원, 미군의 폭격으로 파괴된 곳에서 훈련받고 있다.)

 

존슨의 판단은 틀린 판단은 아니었다. 실제로 당시 하노이 당국은 더 많은 병력을 호치민 루트(Ho Chi Minh Trail)를 통해 증파했다. 또한 북베트남은 미국의 무차별 폭격에 맞서 항공 방어망을 강화했으며, 북베트남 정규군이 쉽게 들어가지 못하는 남베트남의 적잖은 농촌에서는 더 많은 병사를 모집할 수 있었다. 1966년 기준으로 남베트남의 영토 3/4(대략 75%)가 사실상 베트콩 수중에 떨어져 있는 상태였다. 존슨 정부는 베트남 전쟁을 확전함에 따라, 동맹국으로부터의 파병을 요청했다. 미국의 가장 중요한 동맹인 영국이나 프랑스 그리고 캐나다는 이 전쟁의 참여를 거부했고, 프랑스의 대통령이던 샤를 드골 또한, 이 전쟁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보였다. 따라서 존슨은 총 5개의 동맹국으로부터 증원 병력을 받을 수 있었는데, 바로 대한민국과,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태국 그리고 필리핀이었다.

(베트남 전쟁 참전 5개국, 이중 한국이 미국 다음으로 가장 많은 병력을 보냈다.)

 

(미군과 헬기 부대)

 

1966년 초반을 기준으로 베트남 전쟁에서 미군 2,344명이 전사했고, 20만 명이 넘는 미군 병력이 남베트남에 주둔하고 있었으며, 더 많은 미군 병력이 베트남에 파병될 준비를 하거나, 파병되고 있었다. 베트남 전쟁에 참전하던 10대 후반에서 20대 초중반의 병사들은 전쟁에 참전하며, 2차 세계대전 당시 자신들의 아버지 세대들과 같은 사고방식으로 이 전쟁을 판단했다. 그러나 베트남 전쟁은 제2차 세계대전이나 한국전쟁과는 또 다른 성격을 가진 전쟁이었고, 이들은 베트남의 밀림 속에서 자신들이 참전한 전쟁이 아버지 세대의 전쟁과는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다.

(응우옌반티에우 대통령과 응우옌까오끼 총리, 1965년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이들은 이후 10년간 남베트남을 통치한다.)

 

(끼와 그의 아내, 공군 사령관 출신인 끼는 헐리우드 패션을 따라하길 좋아했다고 한다.)

 

1966년 남베트남에서는 젊은 군부출신의 인물이 정권을 잡고 있었다. 한때 베트민에 가담했다가, 프랑스군에 입대하여 프랑스군 장교로 복무했던 응우옌반티우(Nguyen Van Thieu)와 프랑스군 공군 출신으로 남베트남군에서도 공군 사령관을 했던 응우옌까오끼(Nguyen Cao Ky)가 남베트남의 지도부로써 자리를 잡고 있었던 것이다. 70노인이던 호치민의 적은 60대의 중년 가톨릭교도인 응오딘지엠이 아닌, 40대 초반의 남베트남 대통령 티우와 30대 중반의 총리인 끼였다. 총리인 끼는 존슨 대통령이 좋아하는 스타일을 가진 남자였다. 사교적인 부유층 미국인들처럼 행동할 줄 알았고, 술도 잘 마셨으며, 복장 또한 헐리우드 배우처럼 화려하게 입고 다녔으며, 여자랑 노는 법도 잘 아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응우옌까오끼에게는 민주주의라는 개념이 없었다. 아래에 나온 끼의 발언을 통해, 그가 어떠한 생각을 가진 인물인지 알 수 있다.

 

현재 베트남 공화국에 필요한 것은 아돌프 히틀러 다섯 명이다.”

 

, 존슨 대통령은 이런 마인드를 가진 인물을 미국인과 같다.’며 지지하고 좋아했던 것이다. 1966년에도 북베트남을 대상으로 한 존슨 대통령의 무차별 폭격은 지속됐다. 1965년 크리스마스 이브 시점부터 대략 37일 동안은 폭격을 멈췄는데, 1966년 초부터 미 공군은 북베트남 민간인을 대상으로 폭격이라는 테러리즘을 재개한 것이다. 하지만, 티우나 끼가 통치하는 남베트남의 상황은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남베트남 영토 75%가 베트콩 수중에 있는 상황이었다. 이 상황에서 주월미군총사령관인 윌리엄 웨스트모어랜드는 베트콩과 북베트남군을 회복 불가능 수준까지 살상하여, 남베트남을 지키고 싶어했다. 물론 그 방법은 바로 미군 병력의 규모와 폭격을 더 확장하는 방식이었다.

(폭탄을 투하하는 미군 폭격기)

 

(파괴되는 북베트남의 도시)

 

(북폭관련 미국측 신문 기사)

 

(윌리엄 웨스트모어랜드와 미군 부대, 웨스트모어랜드는 존슨에게 더 많은 병력을 요구했다.)

 

(M-60 기관총을 쏘는 미군)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국 남성들은 현재 한국의 남성들처럼, 병역의무를 해야 했다. 물론 한국과 비교했을 때, 인구 비율적으로 낮은 징집률을 보였지만, 징병 문제는 미국 사회에 큰 문제를 야기했다. 스텐리 큐브릭 감독의 영화 풀 메탈 자켓(Full Metal Jacket)’에 나온 것처럼, 당시 미군 교관들은 신병들에게 지옥훈련을 시켰다. 특히나 해병대 병사들은 살인병기로 자라나기 위해 존재한 것처럼, 고된 훈련과 기합을 받았다. 미국 정부는 베트남에서 전쟁을 치르며, 징집된 미군 병사를 살인병기로 개조시킨 것이다.

(사우스 캐롤라이나에 있는 미 해병대 신병 캠프, 풀 메탈 자켓의 초반 배경이 되는 곳이기도 하다.)

 

(삭발 당하는 미군 신병)

 

(신병을 갈구는 미군 교관)

 

(취짐하기 전의 신병들 모습)

 

(웨스트포인트를 나온 이후 행진하는 미군 장교들)

 

(M-14 소총 사격 연습을 하는 신병)

 

남베트남 지역에서 베트콩 및 북베트남군의 활동이 활발했던 곳들은 많았다. 중부 고원지대와 붙어있는 빈딘 성(Binh Dinh Province)도 과거 항불전쟁 시기부터 게릴라 활동이 활발했던 곳으로, 베트남 전쟁 당시도 마찬가지였다. 이 지역에는 50만 명이 거주하고 있었고, 1966년 초 이 지역의 베트콩 규모는 8천 명 정도로 1개 사단 정도의 규모가 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웨스트모어랜드 장군은 이들을 소탕하기 위해 미군과 남베트남군 그리고 한국군으로 구성된 2만 명의 병력을 빈딘 성에 보내, 6주 동안 군사작전을 전개했다. 이 지역을 적성지대로 설정해놓고, 의심이 되는 마을과 촌락을 습격하고, 네이팜탄으로 폭격했다.

(빈딘성, 1966년 수색과 섬멸 작전이 있던 지역이다.)

 

(빈딘성에 주둔했던 베트콩 부대)

 

(수색과 섬멸 작전을 전개하는 미군 부대)

 

(폭격으로 파괴되고 있는 빈딘성의 어느 마을)

 

(불타는 가옥 사이로 진군하는 미군 병사)

 

당시 육군 보고에 따르면, 베트콩 2,400명을 사살한 것으로 나오지만, 제주 4.3 사건 당시 우익 진압군이 사용하던 방식이 적용된 전쟁터였기에, 당연히 민간인 사망자도 나올 수 밖에 없는 구조였다. 다큐멘터리에서는 언급되지 않지만. 한국군이 자행한 빈안 학살도 이 시점에서 있었으며, 웨스트모어랜드가 전개한 작전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작전으로 빈딘 지역 민간인 10만 명이 고향에서 강제 이주 당했고, 1966년을 통틀어 이러한 대규모 수색과 섬멸작전을 17번 이상 실시하여, 남베트남 전역에서 300만 명 이상의 노숙자가 발생했다.

(교전을 벌이는 미군 병사들)

 

(지원 병력을 보내는 미군 헬기들)

 

(미군이 사살한 베트콩 시신들)

 

(바디 카운트의 허구성을 밝히는 기록들)

 

(시신을 옮기는 미군 치누크 헬기)

 

1차 세계대전이나 제2차 세계대전 그리고 한국전쟁과 달리, 베트남 전쟁은 명확한 전선의 개념이 존재하지 않았기에, 미군 사령부은 MAC-V는 지표 하나에 의존하는 전과보고를 통해 군사적 업적을 판단했다. 그것이 바로 바디 카운트(Body Count)였다. 이 바디 카운트의 문제는 전과조작과 숫자조작에 있다. 미군이 전개한 테일러 II 작전(1,757명 사살), 애틀버로 작전(1,106명 사살), 헤이스팅스 작전(882명 사살), 화이트윙 작전(2,398명 사살)을 보면, 믿기 힘든 전과보고인데, 이러한 숫자가 나오는 이유는 모든 사람을 적군으로 계산하려는 경향때문이었다. 이 때문에, 미군의 전과보고로 죽은 베트콩 중 절반 이상이 민간인으로 추정하는 이들도 있다.

(참전용사 메릴 맥피크, 베트남 전쟁 참전 이후 걸프전에도 참전했다.)

 

(베트남 전쟁 초기 북베트남의 해상 운송로)

 

(베트남 전쟁 당시 호치민 루트)

 

(호치민 루트에서 보수공사를 하는 자원병들)

 

(호치민 루트를 통해 남베트남에 물자와 인력을 보급한 소련제 트럭)

 

한편 하노이 당국은 남베트남의 혁명활동을 지원하기 위해, 병력과 물자를 호치민 루트를 통해 보내고 있었다. 호치민 루트는 북베트남에서는 559번 루트로 불렸는데, 이 루트는 1950년대 후반부터 생겼지만, 베트남 전쟁이 격화되며 미국이 해로를 봉쇄하자, 북베트남은 이 루트를 더욱더 확장하고 또 이용했다. 이들 중 25만 명의 자원병이 보수작업에 나섰고, 이들 중 절반은 여성대원이었다. 이 대원들은 사람과 물자가 지나갈 수 있도록, 북베트남과 남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에 대략 19,200km의 복잡한 밀림 속 도로를 만들었다. 물론 이들의 장비도 예전에 비해서 현대화를 거쳤다. 1차 인도차이나 전쟁 당시 프랑스군에 맞서 싸울 당시 베트민은 수만 명의 짐꾼에서 자전거 부대를 이용하여 보급을 했다. 그러나 미국과의 전쟁에서는 기계화된 운송 방법을 북베트남이 이용했다. 북베트남은 소련으로부터 지원받은 소련제 6륜 트럭을 통해 물자와 병력을 이송했다. 당시 미공군으로 참전했던 메릴 맥피크(Merrill McPeak)의 얘기를 들어보자.

 

한번 북베트남의 관점에서 이 문제를 생각해봅시다. 그들은 남쪽으로 보급품을 전달해야 합니다. 인력, 장비, 소모품 같은 걸 말이죠. 이들은 무에서부터 시작해, 미국 매사추세츠 크기의 지역에 큰 길을 만들었어요. 상당한 양의 땅을 몰수하고 길을 내며 또 그걸 유지했습니다.”

(호치민 루트를 폭격하는 미군의 B-52 폭격기)

 

(파괴되고 있는 밀림)

 

(폭발하고 있는 네이팜탄)

 

(호치민 루트에 살포되는 맹독성 고엽제 에이전트 오렌지)

 

(고엽제로 말라버린 나무들)

 

미국은 이들을 가로막기 위해 대략 300만 톤의 폭탄을 이 호치민 루트 지역에 투하했고, 이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이 독일과 일본에 투하한 폭탄보다 더 많은 양이다. 미국은 북베트남의 보급로를 차단하기 위해, 에이전트 오렌지를 비롯한 대량의 고엽제를 살포했으며, 정글의 수천 헥타르를 파괴했다. 이걸 본 한 미군 조종사는 앙상한 달의 표면이라 부를 정도였다. 그러나 미국은 베트남인들의 저항의지를 꺾지 못했다. 북베트남군 참전용사인 동시응우옌(Dong Si Nguyen)의 얘기를 들어보자.

(베트민 참전용사이자 북베트남군 참전용사인 동시응우옌, 호치민하고도 가까운 인물이었다고 한다.)

 

미국인 친구 하나가, 물어본 적이 있어요. 이 맹공격에 어떻게 저항할 수 있었지? 맹공격은 맞지만, 땅은 우리(북베트남군)이 지배했거든요. 공군은 하늘에 있었을 뿐이지요.”

(밀림을 수색하는 미군)

 

(M-16 소총을 발사하는 미군)

 

전쟁이 격화되면서, 미군들 또한 베트남이라는 수렁에 점차 깊숙이 들어가고 있었다. 미군은 베트콩을 소탕하기 위해, 밀림 깊숙이 들어갔지만, 미군을 기다리는 건, 말라리아와 같은 질병과 독사, 독거미, 거머리, 모기 등 온갖 생물들과, 베트콩이 설치한 함정 그리고 적의 공격을 대비한 베트콩의 기습 공격이었다. 미군은 베트콩이 나타나는 곳이 있으면, 항상 포격과 항공폭격에 의존했다. 이런 전투가 반복되면서, 미군들 또한 전쟁에 회의감을 가지게 됐다.

(반전 시위대, 베트남 전쟁을 반대하고 있다)

 

(전쟁의 종결을 요구하는 반전시위대)

 

(전쟁 반대 시위를 하는 한 흑인인사)

 

한편 본토에서는 1965년부터 전개된 반전운동의 규모가 조금씩 커져가고 있었다. 베트남 전쟁은 미국 자본주의 사회의 계급적 모순을 드러낸 전쟁이기도 하다. 잘살고 대학에 갈 수 있던 젊은이들은 군대를 회피할 수 있었지만, 시골에 살던 가난한 백인들이나 기본적으로 빈민계급인 흑인과 히스패닉 등은 징집되어 베트남이라는 전장터로 끌려갔다. 따라서 전쟁을 반대하는 흑인들의 목소리도 커졌다. 베트남 전쟁에 반대했던 인물 중에는 복싱 선수로 유명한 무하마드 알리(Muhammad Ali)도 있었다. 베트남 전쟁 당시 알리가 했던 얘기를 들어보자.

(베트남 전쟁에 대해 반대하고 있는 무하마드 알리)

 

우리 흑인도 살기 힘든데, 다른 자를 돕지 않을 겁니다. 내가 죽어야한다면, 당신(백인)들과 싸우면서 죽을 겁니다. 당신네 백인들이 바로 내 적입니다. 베트남인, 중국인, 일본인은 제 적이 아닙니다. 자유를 원하는 나를 반대하는 자들과 정의와 평등을 원하는 나를 반대하는 자들이, 내 고향인 이곳에서 조차 날 지켜주지 않는데, 어딜 가서 싸우라고요?”

 

물론 이 당시까지만 해도 전쟁을 반대하는 목소리보다 찬성하는 목소리가 더 컸다. 한편 남베트남에서는 미군의 잔혹한 군사작전으로 인해, 많은 이들이 혁명 세력에 가담하고 있었다. 베트콩 참전용사 레콴콩의 발언을 들어보자.

 

우리 집의 일곱째인 동생은 지역 반군에 들어갔는데, 미군이 소탕하러 와서 죽였습니다. 다른 동생은 자다가 습격당해서, 심장에 총을 맞고 죽었죠. 처남은 남베트남 첩자에게 배신당해서 목이 꺾인 채로 죽었고, 미군들이 우리 집에 총을 쏴서 여동생도 죽었습니다. 제 어머니는 항상 울면서도 막내에게 혁명에 가담하라고 하셨죠.”

(젊은 시절 당시 즈엉반마이 앨리엇, <The Sacred Willow(거룩한 버드나무)>라는 책 저자이기도 하다.)

 

이러한 대사를 보면 알 수 있듯이, 대다수 남베트남인이 베트콩에 가담한 이유는 남베트남군과 미군의 테러리즘적 행위 때문이었다. 그러한 행위들로 인해, 베트콩은 더 많은 농민의 지지를 받을 수 있었고, 병사들을 규합할 수 있었다. 남베트남 관료의 딸인 즈엉반마이 앨리엇은 베트남 전쟁 당시 로버트 맥나마라가 만든 RAND 연구소에서 일했다. 아버지가 프랑스 식민지 시절 관료였던 그녀는 1964년 그 회사에 들어가 베트콩에 대해 연구하기 시작했고, 연구를 하는 과정에서 베트콩이 왜 혁명투쟁을 하게 되었는지를 알게 되면서 그들에게 상당한 감명을 받기도 했다. 즈엉반마이 앨리엇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첫 인터뷰가 기억납니다. 저 혼자였고, 당시 저는 아주 어렸는데 암울한 교도소로 가서, 포로로 잡힌 베트콩 고위 간부를 인터뷰했습니다. 들어가기 전, 저는 야수를 만난다고 생각했습니다. 물소 머리에 말의 얼굴을 한 사람말입니다. 그가 들어오더니 저를 보고 깜짝 놀라더군요. 저도 그만큼 놀랐어요. 그 사람은 자신의 대의라고 믿는 것을 위해, 한 편생을 바쳐 싸워 온 사람이었습니다. 외세의 압박에서 조국을 해방하고, 나라를 하나의 정부 밑에 통일시키기 위해서 말이죠. 그는 정말 그것을 신봉하고 있었어요. 그 대의를 위해 평생을 바칠 정도로 말이죠. 그래서 저는 이 사람에게 아주 감명을 받으며 돌아왔죠.”

(반전 반정부 시위를 하는 남베트남 시민)

 

(시위를 진압하러 온 남베트남군)

 

(티우와 끼)

 

(시위를 진행하는 남베트남의 불교도들)

 

(시위와 봉기군 진압을 위해 투입된 남베트남군 탱크)

 

1963년 응오딘지엠 정부가 심화시켜 놓은 불교도와의 갈등은 이후 들어선 남베트남 정부에서도 해결하지 못했다. 1966년 베트남 다낭에서는 불교도들의 시위와 이에 동조하는 남베트남군의 저항이 있었다. 상황은 존슨과 딘 러스크가 남베트남의 멸망을 걱정할 정도로 심각해졌다. 19665월 티우 대통령과 끼 총리는 이들을 진압하기 위해 병력을 후에와 다낭에 보냈다. 봉기한 반체제 성향의 남베트남군은 남베트남군에 의해 진압됐다. 반란은 종결되고, 응우옌반티우와 응우옌까오끼가 다시 권력을 굳건히 했다.

(같은 편끼리 총격전을 벌이고 있는 남베트남군 병사)

 

(M1919 기관총을 발사하는 남베트남군)

 

(봉기군 거점을 선회하는 남베트남군 전투기)

 

(다낭 도시 외곽 언덕에서 상황을 지켜보는 미 해병대)

 

(외곽 언덕에 있는 장갑차 기관총 사수)

 

(동시에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모습, 이처럼 동쪽에서는 미군과 베트콩이 교전을 벌이고, 서쪽에서는 남베트남군들 끼리 내부총질을 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정말 놀라운 일이 발생했다. 다낭 도시 외곽 언덕에 있는 미군 전투 사령부에서 한 미 해병대 중위는 두 개의 전투가 동시에 펼쳐지는 것을 목격했다. 서쪽 방향에서는 미 해병대가 베트콩과 전투 중이었던데 반해, 동쪽에서는 남베트남군이 자신들끼리 총격전을 벌이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 있던 게 1966년 남베트남의 상황이었고, 이걸 지켜보던 미군 또한 어리둥절했다.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일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미국은 이러한 남베트남을 지원하기 위해, 전력을 증강하고, 화력을 강화하고 있었다. 또한 수많은 미군이 수렁 속에서 전사했다. 아래는 17살에 자원입대한 미군 병사 모기가 고등학교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 쓴 내용이다.

(마을을 수색하는 미군)

 

(M-16 소총을 들고 밀림을 수색하는 미군)

 

더프에게, 몇 달 전에 네게 편지를 쓰고, 몇 가지 흥미진진하지만 아주 기분 나쁜 일이 있었어. 1분에 900발을 쏘는 중국제 경기관총에 꼼짝 못 하고 있다가, 친한 친구 하나가 내 옆에서 죽은 게 최악이야. 나중에 자세한 얘기를 할 수 있겠지. 만약 그때까지 내가 완전히 정신이 나가지 않으면. 그건 사실 내 희망사항이야. 나를 전선에서 빼줄 거란 잘못된 희망인 거지. 난 한동안 아주 종교적으로 변해서, 여러 가지 기도를 했는데, 주로 살아 있으려고 하는 기도였어. 하지만 다시 무신론자가 되었지. 사격이 시작될 때까지 말이야.”

(모기가 살던 집)

 

(모기의 사망을 알리는 미국 언론)

 

(모기와 그의 가족들의 화기애애한 모습)

 

모기(덴턴 윈슬로우 크록커)1966년 남베트남의 밀림에서 야간작전을 수행하던 중, 베트콩 진영에서 발사한 기관총에 맞아 언덕을 오르던 중 전사했다. 그의 시신은 이후 본국으로 이송됐고, 장례식을 치른 뒤, 수도 워싱턴 D.C에 있는 알링턴 국립묘지에 묻혔다. 이처럼 모기와 같은 젊은이들은 베트남의 수렁 속에서 죽어나가고 있었다. 누군가에게 소중한 가족이고, 이웃인 사람들이 이렇게 하나 둘씩 죽어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관에 담겨 본국으로 돌아온 미군들)

 

(워싱턴 D.C에 있는 알링턴 국립묘지, 4년 전 글쓴이도 이 곳을 방문한 적이 있다.)

 

(현재도 있는 모기의 묘비)

 

그러나, 이런 무모한 전쟁을 벌이는 미국 정치인들은 자신들이 질 것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전쟁을 멈추지 않았다. 결국 이들이 앞으로 치를 대가는 훨씬 더 큰 것이었고, 실제로 이들은 큰 대가를 치르게 된다.

 

4화 전반부 리뷰는 여기까지입니다. 다음에 4화 후반부 리뷰 올리겠습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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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마요정 2022-08-28 22: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같은 사람인데 이념이 다르다고 소머리 괴물인 줄 알았다는 건 남의 나라 일이 아니겠죠ㅠㅠ 전쟁은 너무 참혹합니다. 즈엉반마이 앨리엇의 가족들이나 17살 모기도 너무 슬프네요. 잘 읽었습니다. 지금도 전쟁 중이라는 사실이 너무 안타깝고 슬프네요ㅠㅠ

NamGiKim 2022-08-28 22:43   좋아요 1 | URL
반공주의자들이 베트민과 베트콩을 그런식으로 악마화했죠. 다른 한펀으로 마이 앨리엇의 언니와 형부는 베트민에 들어가 프랑스에 맞서 싸웠고, 미국과의 전쟁에서도 북베트남군 편이었죠. 반면 아버지는 프랑스 식민지 시절부터 고위관리였고요.

NamGiKim 2022-08-29 20:49   좋아요 1 | URL
워낭 양질의 다큐멘터리라 이렇게 공들여 리뷰를 올리는 거죠. 10화까지 쭉 가봅시다. 아무튼 잘 읽어주셨다니 고마울 따름입니다.

꼬마요정 2022-08-29 21:36   좋아요 1 | URL
넵 많이 배웁니다. 10화까지 잘 부탁드립니다. 이념이 무섭습니다. 가족도 저렇게 찢어놓고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