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마이클 매클리어의 책 <베트남 10000일의 전쟁>의 내용을 바탕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1941년 일본의 진주만 기습 공격 이후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게 됐다당시 미국은 이른바 전쟁에서 활약했던 미군들을 바탕으로 특수부대를 만들었으며이들은 유럽 전선과 태평양 전선에서 활약했으며많은 공로를 세웠다이 특수조직이 바로 OSS(Office of Strategic Service)이 OSS에는 이탈리아 이민자 집안의 출신인 아키메데스 패티(Archimedes Patti)라는 인물도 활동했었다아키메데스 패티는 1913년 뉴욕에서 태어나 1941년 미군에 입대한 인물이었다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군에 입대한 패티는 특수임무반 장교 신분이었고북아프리카와 이탈리아의 시칠리아와 살레르노에서 비밀작전을 수행했었다.

 

패티의 주된 임무는 반파시스트 비밀 단체와 연락한 다음 협력하는 것이었으며나치 독일과 이탈리아 제국에 대항하는 것이 목적이었다패티는 주로 북아프리카와 이탈리아 외에도 유고슬라비아에서도 활동했었다. 1944년 초 연합군이 이른바 안치오(Anzio) 상륙작전을 준비할 당시 패티의 근무지는 유럽에서 아시아로 변경됐다그로부터 5개월 뒤연합군은 노르망디에 상륙하여 제2전선을 구축했고이탈리아 전선에서도 전투가 치열해졌다그 시기 소령이었던 패티는 한밤의 추위를 느끼며 군 수송기에 올랐고, OSS 총책임자인 윌리엄 도노번(William J. Donovan) 장군과 이야기를 나누며 이탈리아 해안기지에 도착했다참고로 윌리엄 도노번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중경 임시정부의 주석이던 백범 김구와도 인연이 있는 사람이다.

(아키메데스 패티 소령의 사진)

 

OSS 총책임자였던 도노번 장군은 유럽에서 반파시스트 단체들과 연합전선을 구축했듯이아시아에서도 추축국 일본에 맞서 연합전선을 구축하고자 했다당시 중국의 국민당 정부는 일본에 맞서 전투를 치르고 있었고마오쩌둥의 공산당 또한 마찬가지였다도노번은 당시 일본이 점령하고 있던 인도차이나 반도에도 주목했고버마에서 연합전선을 구축했듯이 이 지역에서도 반일단체와 연합전선을 구축하고자 했다따라서 도노번은 당시 항불항일을 내세우며 이에 저항하고 있던 호치민 휘하의 베트민과 연합하고자 했던 것이다.

 

당시 미국 OSS는 인도차이나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 없었다따라서 도노번은 인도차이나 지역 같은 곳에 경험이 풍부한 사람이 필요하다고 판단했고패티 소령을 인도차이나에 보낸 것이다물론 패티 또한 인도차이나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었다패티가 아는 것은 그냥 그 지역이 아시아의 어느 한 곳에 자리잡고 있다는 것이 전부였다연합군이 이탈리아의 수도 로마를 해방시키고난 이후 패티는 인도차이나로 향했다패티 소령의 파견 목적은 인도차이나 전역에 걸친 효과적인 정보망을 구축하기 위함이었다패티는 인도차이나에 대한 사전 정보 수집을 위해 수개월 동안 백악관과 국무부 전문가들에게 상세한 브리핑을 받았으며인도차이나가 중국 본토와 남태평양에서부터 서쪽으로는 미얀마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전장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는 전략적 중심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하노이에 모인 베트민과 OSS)

 

1945년 4월 초 패티는 중국 남부에 있는 도시인 쿤밍에 도착했다당시 패티에게는 또 다른 임무가 주어졌는데그것은 바로 베트민의 지도자 호치민(Ho Chi Minh)을 만나 협력관계를 구축하는 것이었다이들의 만남은 1945년 4월 30일 바로 아돌프 히틀러가 베를린 지하 벙커에서 자살하는 날에 이루어졌다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어느 외진 시골의 허름한 찻집에 들어섰을 때패티는 한 노인을 만났다그 노인은 완벽한 영어로 어서 오시오친구!”라고 첫인사를 건냈으며그는 패티에게 자신이 호치민이라고 소개했다이들은 이렇게 만남을 가졌고서로가 다양한 공동의 관심사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호치민을 만나기 전 패티는 베트남의 역사가 중국에 대항해서 대략 2,000년간 맞서 싸운 역사인 것과 자신이 만나게 될 호치민이 전설적인 베트남의 독립운동가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심지어 OSS의 기록에서도 호치민을 베트남의 실질적인 지도자로 얘기했을 정도였다.

(OSS 사슴팀 대원들과 호치민, 반바지를 입고 있는 이가 호치민이고 양복을 입은 이가 보 응우옌 잡이다.)

 

패티는 베트남 인민들이 프랑스 식민주의에 대항해서 격렬하고 끊임없이 항거해 온 역사적 사실 뿐만 아니라미국의 전시 동맹국인 프랑스에 대항해 싸우는 호치민의 독특한 투쟁 방식까지도 잘 파악하고 있었다패티는 호치민에 대해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나는 호치민이 공산주의자이며 소련에 체류할 당시 공산주의 학습을 받았고그가 창설한 베트민은 공산당의 한 지류하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그러나 베트민은 정보 활동에 큰 도움이 될 수 있었기 때문에 나는 베트민에 대해 지속적인 관심을 보였다.”

 

패티는 베트남 전쟁이 끝난 이후 쓴 저서 <왜 베트남인가?(Why Vietnam?)>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호치민과 역사적인 만남 이후 실질적인 면에서 호치민과 베트민은 내가 인도차이나에 정보망을 구축하는 데 구체적인 해답이 되었다그는 나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의 생각을 이렇게 피력했다. ‘진부한 강령이나 외치는 망상적인 혁명주의자나 과격한 행동을 일삼는 과격분자로 생각하지 않기 바란다나의 궁극적인 목적은 베트남 독립을 위해 미국의 지원을 받는 것이다나의 이런 열망은 미국과 어떠한 충돌도 일으키지 않을 것이다.’”

 

당시 호치민은 미국의 대통령이던 프랭클린 루스벨트가 구식민주의에 반대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그리고 이러한 입장은 패티와 호치민이 공유하고 있던 공통적인 입장이었다호치민과의 만남을 통해 입장을 확인한 패티는 워싱턴에 호치민과의 관계 개선을 추진하겠다는 계획을 전달했다그는 이와 관련된 모든 정보를 중경에 있는 미국 대사관을 통해 공식 보고했다패티가 보낸 보고서 내용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었다.

 

호치민은 무례한 공산주의자가 아니며베트남 독립을 최우선 당면 과제로 삼고 싸우는 민족주의자일 뿐이다.”

 

미국의 OSS와 베트민은 1945년 초부터 협력관계를 구축해 나가는 방향이었다특히나 1944년 베트남에 불시착한 미군 조종사를 호치민이 구출해주면서 미국 OSS는 호치민과의 협력하고자 했다. 1945년 5월이 되자 호치민의 베트민 게릴라 부대는 일본군 진지를 공격하기 시작했고, 6월에는 호치민이 패티에게 미국이 필요하다면 인도차이나에서 언제든지 약 1,000명의 베트민 게릴라 부대를 지원할 수 있다.”고 제안까지 했었다실제로 패티는 인도차이나에서 최초의 미군 군사작전을 계획했었다패티는 이른바 사슴팀(Dear Team)을 만들어 베트민을 미국 무기로 무장시키고 군사훈련까지 제공했다. 7월 16일에는 패티 소령의 후배 장교인 앨리슨 토마스(Allison Thomas) 소령이 이끄는 OSS 게릴라 부대가 하노이 인근 산악 지대에 낙하산으로 투하되었으며보 응우옌 잡(Vo Nguyen Giap)이 지휘하는 게릴라 부대와 함께 작전을 수행했다.

(미국의 어느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에 나온 패티)


(패티의 저서 <왜 베트님인가?> 베트남어로도 번역됐다.)

 

패티는 베트민과의 공동작전 수행을 위해 그들을 훈련시키는 한편베트민을 현대식 무기로 무장시킬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패티는 이들에게 기관총과 자동소총 그리고 수류탄 등을 낙하산을 통해 제공했다미군 무기로 무장한 잡 장군의 게릴라 부대는 몇 개의 일본군 외곽 초소를 공격하기도 했으며, OSS 사슴팀은 베트민과 공동작전을 펼쳤다이것이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가는 와중에 미국 OSS와 베트민이 치렀던 대일전이었다이러한 공동협력은 제2차 세계대전이 일본의 조기 항복으로 끝나면서 종결됐다분명한 건미국과 베트민이 협력했고당시 그 누구도 불과 20년 만에 미국과 베트남이 참혹한 전쟁을 치를 것이라는 사실을 몰랐다는 것이다패티는 자신의 저서에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우리들 중 몇 사람은 우리가 제공한 무기와 훈련이 언젠가는 프랑스 사람들과 싸울 때 사용될 것이라고 생각했다그러나 아무도 그들의 상대가 미국이 될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OSS 사슴팀 교관과 수류탄 투척 훈련을 받고 있는 베트민 대원)

 

패티는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하기도 했다.

 

우리 둘(패티와 호치민)이 처음 만난 것은 1945년 4월 30일이었습니다그리고 마지막 미군이 베트남을 떠난 날짜가 30년이 지난 1975년 4월 30일이었고요그 동안에 나를 따라서 280만 명의 미군이 베트남 땅을 밟았는데그 중에서 약 5만 7,000명은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습니다. 30년이 넘도록 이 조용한 나라에서 벌어진 의문투성이의 전쟁에서 200만 명이 넘는 베트남인들도 희생되었습니다.”

 

<베트남 10000일의 전쟁> 저자인 마이클 매클리어는 당시 호치민과 미국의 관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책에 썼다.

(1945년 9월 2일 하노이 바딘광장에서 독립을 선포하는 호치민) 


돌이켜보면, OSS는 불과 1개월 동안 약 200여 명을 선발하여 미래의 베트민 지도자로 양성한 셈이었다얼마 후 베트민군 사령관이 된 잡은 사슴팀이 자신들을 도와 점령한 마을을 탄짜오라고 명명했다그 뒤 호치민이 이 마을에 임시정부를 설립함에 따라 탄짜오는 베트남의 역사적인 명소가 되었다. OSS는 이후에도 계속 호치민의 군대를 훈련무장시킨 다음 함께 전투를 펼쳤다이와 같은 일은 훗날 베트남과 미국의 관계를 살펴볼 때아리러니컬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출처베트남 10000일의 전쟁 p.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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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1 테러를 연상시키는 다큐멘터리 이미지)


드디어 넷플릭스에서 만든 중동분쟁 시리즈인 터닝 포인트(Turning Point)의 마지막화를 봤다. 9.11테러부터 시작했던 다큐가 작년에 종결된 미국-아프가니스탄 전쟁의 중반부와 막바지를 다루게 되니, 다큐멘터리가 끝나가는 것을 느꼈다.

 

다큐멘터리의 초반부는 4화에서 보여줬던 명분없는 전쟁의 모습을 역설한 뒤, 2011년 오바마 행정부가 주도한 오사마 빈라덴 암살작전 즉 '넵튠 스피어 작전'을 다룬다. 이 사건은 당시 10대였던 나도 인상깊게 들었던 사건이기도 하다. 당시 나는 고등학교 1학년이었다. 어느날 뉴스에서 빈라덴이 죽었다는 소식과 함께, 오바마 전 대통령의 연설과 성조기를 들며 이를 열렬히 환영하는 미국인들의 모습이 TV를 통해 비추어졌던 것이 기억난다.

 

오바마 행정부는 2014년까지 아프가니스탄에서 미군 병력을 철수시키는 계획을 세웠었다. 그러나 오바마 행정부의 아프가니스탄 철군 계획은 실행되지 않았다. 2011년 당시 오바마는 철군을 약속했지만, 아프가니스탄 문제는 결국 트럼프 행정부로 이어졌다.

 

쿠바 근처에 있는 미국의 관타나모 수용소에서는 여전히 인권 유린 및 국제법 위반이 자행됐다. 2000년대 당시 미국 CIA에 의해 고문받았던 이들 중에는 이후 탈레반의 핵심 지도층이 된 이들도 있었다. 아무리 테러리스트들을 상대한다고 하지만, 관타나모 수용소에서 일어난 일들은 법적으로 보호받지 못했던 인권유린의 현장이었다.

 

오사마 빈라덴 암살 작전의 목표는 성공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파키스탄의 주권을 철저히 무시하는 일이었다. 넵튠 스피어 작전 이후 파키스탄에서 반미정서가 급증했지만, 다큐멘터리는 이를 의도적으로 얘기치 않는다. 아프가니스탄 문제도 다큐멘터리의 허점이 존재한다. 2020년 도하합의 이후 미국은 철군의 길을 걸었고, 2021년에 철군을 완료했으며 20년 전 미국이 무너뜨렸던 탈레반이 다시 집권했다. 미국의 힘으로 유지됐던 친미정부가 무너진 것이다.

 

다큐멘터리는 탈레반의 폭력성을 부각시킨다. 물론 탈레반의 폭력성과 비인간성 그리고 전근대적인 여성관은 매우 심각하다. 그러나 몇몇 부분에선 아프가니스탄 친미 정부의 합리화로 이어지는 느낌을 받았고, 개인적으로 불편했다. 아프가니스탄 친미 정부 시절, 여성 인권이 발전했고 민주주의적 기회가 주어졌다는 다큐의 주장은 "결과적으로 미국 점령의 정당성"을 부여하는 것 같았다.

 

미국 정부 인사의 아프가니스탄 여성에 관점과 대다수 페미니즘 진영의 아프가니스탄 여성에 대한 관점이 "미국 점령 정당성 부여"라는 점에서 소름끼치게 닮은 사실을 다큐멘터리를 통해 다시한번 확인했다. 나는 과거 리비아때 페미니스트라고 하는 이들이 서방의 흑색선전을 그대로 앵무새처럼 반복하며, 카다피 선생을 모함했던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이러한 한계점도 있지만, 마지막화도 제법 볼만했다. 여전히 친미주의적 관점에 지나치게 편중되어 있지만, 이 다큐멘터리가 잘 만든 다큐멘터리임을 부정하기는 힘들 것이다. 그런 점에서 나는 이 다큐멘터리를 되도록 추천하는 쪽이며, 중동 사태를 이해하기 위해선 한번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제 마지막화까지 리뷰했으니 조만간 다큐멘터리에 대한 총평도 올리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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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년 러시아에서 시작된 볼셰비키의 사회주의 혁명은 전 세계를 강타했다. 10월 혁명을 통해 세계 최초로 사회주의 국가를 탄생시킨 블라디미르 레닌(Vladimir Lenin) 1919년부터 이른바 제3인터내셔널(The Third International)을 창설하여제국주의로부터 억압받는 국가들에게 사회주의를 전파하고자 했다이에 따라 일제 치하 조선과 군벌전쟁을 겪던 중국 그리고 프랑스의 식민 지배를 받던 베트남을 포함하여무수히 많은 아시아와 아프리카 그리고 라틴 아메리카 등에서 사회주의 이데올로기가 독립운동 세력들에게 큰 영향을 줬다.

(1930년 베트남 공산당 창당 상상화, 호치민과 혁명 동지들은 영국령 홍콩에서 베트남 공산당을 창당했다.)

 

이 중에서 베트남의 근현대사는 매우 혁명적이다이들은 19세기부터 대략 100년간의 프랑스의 식민 지배를 받았다2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일본의 지배를 받았으며베트남의 독립운동 세력은 일본에 맞서 항일투쟁을 전개했다2차 세계대전 이후 프랑스가 다시 식민지 지배를 하러 들어오자프랑스에 맞서 8년간 전쟁을 치렀으며,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를 통해 100년간의 프랑스 식민지 통치를 종결시켰다프랑스가 물러난 이후 미국이 들어오자이들의 침략에 맞서 저항했고, 1975년에 미국과의 전쟁에서 승리를 이룩했다이것이 바로 현재 베트남 공산당이 가진 자랑스러운 역사다따라서 오늘은 베트남 공산당의 창당과정에 대해 얘기해보고자 한다.

 

19세기부터 프랑스의 식민지 지배를 받고 있던 베트남에서도 적잖은 독립운동가들이 사회주의 사상을 받아들였다현재 베트남에서 국부로 평가받고 있는 호치민(Ho Chi Minh)은 1919년 프랑스 파리에서 서구 제국주의의 위선에 크게 실망했었다그는 응우옌아이꾸옥(Nguyen Ai Quoc)이라는 가명으로 파리의 베르사유에 찾아가 안남 민족의 요구(Peuple Annamite)’를 미국의 대통령인 우드로 윌슨(Woodro Wilson)에게 전달하고자 했으나강대국들에 의해 철저하게 외면 받았다이에 실망한 호치민은 레닌과 소비에트의 노선을 따르고자 했다. 1920년 프랑스 파리에 있던 호치민은 제2차 코민테른 대회에서 러시아의 레닌이 발표한 민족과 식민지 문제에 대한 태제를 보고 프랑스 공산당에 입당했으며, 1923년에는 모스크바에 가서 유학을 하며 코민테른(Commintern) 극동국에서 활동했다그는 레닌을 만나고 싶어 했지만아쉽게도 생전의 레닌을 만나지 못했다.

(쩐푸, 모스크바 유학파인 그는 1930년 베트남 공산당 창당 이후 호치민과 대립하기도 했었다.)


(레홍퐁, 쩐푸와 마찬가지로 모스크바에서 유학했으며, 황포군관학교도 다녔었다. 베트남 공산당 초대 총서기를 지냈으며, 1938년 프랑스 당국에 체포되어 1942년에 생을 마감했다.)

 

그러던 1924년 11월 중국 광저우로 가서 활동했으며, 1925년에 새로운 혁명 조직인 베트남 혁명 청년회를 결성했다여기서 호치민은 교사로도 활동했으며잡지 탄니엔(청년)’을 발행하기도 했다여기서 활동했던 이들 중에는 레홍퐁(Le Hong Phong)이나 호뚱머우(Ho Tung Mau)도 있었다이 단체의 활동은 베트남 독립운동사에 있어서 새로운 세대를 의미했다당시 베트남 독립운동의 민족주의 노선은 과거 근왕운동을 벌이기도 했던 판보이쩌우(반패주, Phan Boi Chau)와 판쭈찐(Phan Chu Trinh)으로 대표되었다그러나 호치민이 주도한 베트남 혁명 청년회와 1927년에 탄생한 베트남국민당(VNQDD, Vietnam Nationalist Party)의 등장으로 독립운동의 주도세력이 교체됐다.

 

청년을 만든 호치민은 당시 마르크스-레닌주의자들을 양성하는 데 집중했다호치민의 추천에 따라 장제스가 교장으로 있던 황포군관학교에 적잖은 베트남 독립운동가들이 입학했다참고로 황포군관학교는 우리나라 독립운동가 약산 김원봉이 다녔던 곳이기도 하다그 외에도 쩐푸(Tran Phu)나 레홍퐁 같은 이들이 모스크바 동방노동자대학에 유학을 갔으며이들을 통해 혁명 요원들을 양성했다. 1927년에 와서 그 수가 대략 200명에 달했고, 1929년에는 청년의 당원 수가 많게는 1,000명에 이르렀다당시 호치민은 <혁명의 길>이라는 책자도 썼으며이는 베트남의 <공산당 선언>과 같은 역할을 했다.

(냔단을 읽고 있는 호주석 포스터, 신문에 마르크스와 레닌의 얼굴이 들어가 있는게 인상적이다.)

 

1929년 5월 1일 베트남 혁명 청년회의 전국 대회가 영국령 홍콩에서 개최됐다이것을 시작으로공산당 창당 논의가 베트남 내 독립운동가들 사이에서 활발해졌다이 과정에서 베트남 좌파 독립운동 세력은 크게 세 분파로 나뉘어 대립했다이중 공산당 결성파의 경우 1929년 6월 하노이에서 인도차이나 공산당의 수립을 선언했다청년회 내의 일부는 비밀 공산당 조직인 안남공산당을 만들었으며마지막으로 신월혁명당쪽의 급진적 당원들이 가세한 인도차이나공산주의연맹이 만들어졌다즉 이렇게 세 조직이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서 경쟁했다세 분파는 1929년 말까지 대립했다이러자 코민테른은 이들의 통일을 요청하는 서신을 베트남으로 보냈으며그 이후부터 이들은 하나의 정당으로 통합하고자 했다.

(베트남 공산당 초기 마크)

 

코민테른은 서신에서 마르크스-레닌주의 정당 설립의 근본 교리들을 강조하면서세 개의 공산주의 정당이 통일되어야만 하는 당위성을 제시했다이에 따라 호치민(당시 응우옌 아이 꾸옥)은 제3인터내셔널의 지침이라는 명분으로 베트남의 공산주의 조직을 통합하기 위한 회합을 소집했다. 1930년 1월 말 호치민은 홍콩에 도착했으며다른 공산당 조직들도 홍콩에 도착했다. 1930년 2월 3일 홍콩의 구룡에서 회의가 열렸으며놀랄 정도로 쉽게 합의가 이루어졌다고 한다회의는 2월 3일부터 7일까지 대략 5일간 비밀리에 행해졌으며이 회의에서 베트남 내의 공산주의 조직을 통합해서 하나의 공산당을 창설한다는 안건을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그리고 통일된 당의 명칭을 베트남 공산당으로 정했으며당의 정강과 책략 및 당헌의 초안과 대중 조직에 관한 원리의 초안 등을 새로이 채택하는 것도 합의했다.

 

당의 정강과 책략에서는 베트남 혁명은 제국주의와 봉건주의를 타도한다는 목적 아래조국의 독립을 되찾고 토지개혁을 실시하며 프롤레타리아의 지도하에 공산주의 사회로 도약해가는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임이 천명됐다당의 노선은 농민 대다수와 뚜렷한 반혁명세력이 아닌 부농 및 중·소지주들을 규합하고프티 브루주아지와 인텔리겐치아 및 중농과 제휴하는 것이었다당은 프롤레타리아트의 전위대였으며프롤레타리아트로 하여금 인민을 지도할 수 있게끔 하는 수단이었다이러한 목적을 가지고 홍콩에서 베트남 공산당이 창당된 것이다새로 창당된 정당은 통킹과 안남에 204코친차이나에 51중국에 15태국에 40명의 당원을 거느리고 있었다. <호치민 평전>의 저자 윌리엄 J. 듀이커는 베트남 공산당 창당에 대해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1930년 2월 새로운 정당의 결성과 더불어 응우옌 아이 꾸옥은 베트남 혁명의 다음 단계로 이행할 준비가 되었다그가 눌랑에게 보낸 편지에서 말했듯이이 정당은 입헌당인도차이나 공산주의자 연맹(곧 해체되어 그 조직원들 대부분은 베트남공산당에 입당한다.), 하노이에 기반을 둔 베트남국민당이제 기능이 정지된 혁명청년회 등을 포함하는 몇 개의 정당과 분파들 가운데 하나일 뿐이었다그러나 꾸옥은 공산당이 비록 아직 어리고 작았지만, “그 모든 조직들 가운데 가장 잘 조직되고 가장 활동적이라고 단언했다이제 두 개의 주요한 공산주의 분파 사이의 싸움이 끝났기 때문에베트남 공산당은 정확한 정책과 새로운 내적 통일로 무장하고 급속하게 성장할 터였다마침내 응우옌 아이 꾸옥은 15세기의 애국자 레 로이가 외적으로부터 동포를 해방하기 위해 사용했던 무기인 마법의 검을 손에 쥐게 된 것이다.”

 

출처호치민 평전 p.268

 

1930년 2월 베트남 공산당은 영국령 홍콩에서 창당됐다베트남 공산당 창당은 세 개의 분파를 통합하고 새로운 혁명적 단계의 규정 및 노선 설정에 있어서 의미있는 일이었다그러나 그들 중 일부는 이에 반대하기도 했다대표적으로 모스크바 유학파인 쩐푸가 그러했다쩐푸는 베트남 공산당 결성이 당시 코민테른의 노선을 크게 일탈했다고 판단했으며실제로 호치민에 대해 이론이 빈약하다는 비판을 하기도 했다그는 베트남 공산당을 코민테른의 노선에 충실한 당으올 변혁시키려고 했었다. 1930년 10월 제1차 중앙위원회에서 쩐푸가 서기장으로 선출되어 당의 지도권을 장악했으며쩐푸는 당명을 베트남 공산당에서 인도차이나 공산당으로 변경했다그렇게 해서 오랜 기간 동안 베트남 공산당의 당명은 인도차이나 공산당이기도 했다.

(2020년 베트남 공산당 창당 90주년 포스터 1, 2020년 베트남 하노이에서 직접 찍은 사진이다.)

 

베트남 공산당이 창당되던 1930년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서는 베트남 국민당이 주도한 봉기가 통킹과 안남 일대에서 일어났다시작은 베트남 국민당이 주도했다물론 베트남 공산당 또한이 봉기에 가담했으며대표적으로 응에안 성 하틴 소비에트 봉기(Nghe-Tinh Soviet)가 그러했다공산당은 세포조직을 이용하여 곳곳에 소비에트를 수립했으며토지의 재분배를 비롯한 소작료 인하와 세금의 경감 등을 실행했다진보적인 정책들을 직접적으로 실행했던 것이다결과적으로 이 봉기는 1931년 프랑스 제국주의자들에 의해 무자비하게 진압됐다프랑스 당국은 전투기까지 동원하여 이 봉기를 진압했다인도차이나 공산당은 그 이후 조직 재건에 힘썼으며이는 성공적이었다.

(2020년 베트남 공산당 창당 90주년 포스터 2, 2020년 베트남 다낭에서 직접 찍은 사진이다.)

 

1930년 봉기 이후 베트남의 독립운동은 완벽히 사회주의 세력들이 주도하게 됐다베트남 공산당을 창당한 호치민은 1941년 30년 만에 베트남에 귀국했다호치민은 1911년 21살의 나이에 베트남을 떠나 1941년 51살의 나이에 조국 땅을 다시 밟을 수 있었다예리하고 선견지명을 가진 그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제의 침략이 있자이들의 실체를 명확히 파악하고 일본 제국주의와 프랑스 제국주의에 맞선 독립운동 단체를 조직했다그것이 바로 베트남독립동맹 즉 베트민(Viet Minh)이다베트민은 당연히 공산당에서 활동했던 이들이 주를 이루었으며일본과 프랑스 그리고 미국의 침략까지 무찌를 수 있는 역량을 창조하고또 지휘했으며 궁극적으로 제국주의를 무찔렀다.

 

참고문헌

 

쟝 라꾸뛰르안혜련(), 베트남의 별소나무, 1988

 

베트남공산당사연구회김종욱(), 베트남공산당사소나무, 1989

 

윌리엄 J. 듀이커정영목(), 호치민 평전푸른숲, 2003

 

송필경왜 호찌민인가?에녹스, 2013

 

후루타 모토오이정희(), 베트남왜 지금도 호찌민인가학고방,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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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480년 페르시아의 왕 크세르크세스는 수십만 명의 병력과 수백 척의 함대를 동원하여 그리스를 침공했다. 당시 스파르타와 아테네를 포함한 그리스의 연합은 페르시아군에 맞서 싸웠다. 스파르타의 왕 레오니다스는 300명의 최정예부대와 함께 천연의 요새 테르모필레에서 페르시아군과 맞서 싸웠다. 최정예부대 300명은 왕 레오니다스를 포함하여 모두 전사했고, 페르시아군은 아테네에 진입했다. 그러나 아테네의 제독 테미스토클레스가 이끄는 그리스 해군은 살라미스 해협에서 페르시아 대함대에 반격하여 승리했다. 다음해인 기원전 479년 스파르타와 아테네 연합군은 페르시아군을 플라타이아이에서 격파함으로써, 페르시아 전쟁은 그리스군의 승리로 끝났다.

 

페르시아 전쟁 당시 많은 지역 세력들이 그리스군에 합류했었다. 여기서 가장 큰 역할을 한 것은 아테네와 스파르타였다. 당시 그리스는 동지중해 지역을 완전히 지배했는데, 이 과정에서 페르시아 전쟁을 통해 가장 부강한 세력이 된 아테네와 스파르타를 중심으로 두 동맹이 탄생함에 따라 서로 대결하는 체제로 돌입했다. 아테네를 중심으로 델로스 동맹이 만들어졌고, 스파르타를 중심으로는 펠로포네소스 동맹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아테네와 스파르타는 정치적으로도 달랐으며, 군사적으로도 달랐다. 아테네는 해군을 스파르타는 육군에 주로 의존했다. 이들이 충돌하며 결국 일어난 전쟁이 바로 펠로폰네소스 전쟁이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크게 3단계로 나뉘는데, 1단계(기원전 431~421)는 스파르타의 왕 아르키다모스의 아테네 침공으로 시작되었고, 양측은 10년 동안이나 소모전을 치르고도 아무런 결과가 없이 종결됐다. 2단계(기원전 421~415)는 양측이 휴전을 맺고 전쟁 이전 상태로 돌아갔다. 그러나 제3단계(기원전 415~404)에서 아테네가 시칠리아의 내전에 개입하고 원정군을 보냄으로써 다시 큰 전쟁으로 확대됐다. 시칠리아 원정에서 아테네의 해군은 큰 타격을 입고 원정에 실패했다. 그 이후 스파르타는 수 차례에 걸쳐 아테네를 침공했는데, 기원전 405년 아이고스포타미 해전에서 아테네 해군을 전멸시키는 성과를 올렸다. 사실 스파르타는 페르시아의 도움을 받아 함대를 강화하고, 육전뿐만 아니라 해전에서도 곳곳에서 아테네 군을 제압했 이에 따라 아테네는 스파르타에게 패배했다.

 

결국 기원전 404년 아테네는 스파르타에게 항복했고, 도시를 둘러싸고 있는 성을 파괴하도록 강요당했으며, 함대를 스파르타에 인도함으로써 전쟁은 완전히 끝이 났다. 아테네는 수비를 위한 12척의 배만 남기고 펠로폰네소스 동맹에 가입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 이후 그리스에서는 스파르타가 중심적 역할을 했으나 그 체제는 오래가지 못했다. 스파르타에 패한 아테네 해상 동맹은 스파르타의 독단에 불만을 품게 되었고, 페르시아가 중간에 끼어 이들을 더욱 이간질시켰다. 그렇게 해서 그리스의 각 도시국가들은 수십 년에 걸친 혼전을 시작하게 됐으며, 동시에 엄청난 국력의 소모를 겪었다. 그 대신 북쪽에서 마케도니아가 새로운 강자로 등장했으며, 마케도니아는 전 그리스를 통일했다.

 

사실 북쪽의 마케도니아는 과거 그리스 전성기 시절 야만인으로 취급받았었지만, 이후 그리스 전역을 장악했다. 이 마케도니아가 바로 우리가 한번쯤은 들어본 인물인, 알렉산더 대왕을 탄생시킨 나라였고, 이후 마케도니아는 알렉산더가 정복전쟁을 하게 됨에 따라 영토를 팽창하기에 이른다.

 

참고문헌

 

<단숨에 읽는 세계사>, 역사연구모임, 2009

 

<세계사 다이제스트 100>, 김희보, 2010

 

<세계전쟁사 다이제스트 100>, 정토웅,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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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릭 홉스봄 평전 - 역사 속의 삶, 역사가 된 삶
리처드 J. 에번스 지음, 박원용.이재만 옮김 / 책과함께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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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꼭 읽어야할 필독서가 한권 더 생겼네요. 홉스봄 선생의 <극단의 시대> 여러모로 감명깊게 읽었었는데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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