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 네오나치 정당인 스보보다의 지도자 올레크 타니복과 조 바이든)


(2014년 유로마이단 집회 당시 거리 행진을 하는 스보보다 지지자들)


(히틀러 유켄트 사진을 들고 사진을 찍은 아조프 대대 인사들)


(아조프 대대 깃발을 들고 있는 네오나치들)


(심지어 탱크까지 몰고 있는 우크라이나 네오 나치들)


(아조프 부대의 탱크 사진 2, 자세히 보면 나치 문양이 보임.)


(위에 있는 탱크 사진과 네오나치들이 든 깃발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SS 전차 부대인 다스 라이히의 상징을 따온 것.)


(나치 깃발과 우크라이나 깃발 그리고 성조기를 든 네오나치들)


(우크라이나화 시킨 나치 깃발을 걸고 있는 아조프 부대 대원)


이것만 보더라도 우크라이나에 네오나치가 없다는 주장은 말 그대로 헛소리다. 그리고 한가지 더 첨언하자면, 네오나치 조직을 정규군으로 편입시킨 나라는 우크라이나 밖에 없다. 그런 나라가 우크라이나인데, 민주주의라고? 웃기는 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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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dvs117 2023-06-29 21: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국과 서유럽(영국, 프랑스, 독일, 네덜란드 등)은 우크라이나 네오나치들과 한패군요....
 
중국인 이야기 4 김명호 중국인 이야기 4
김명호 지음 / 한길사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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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에 입학한 이후부터 현재까지 나는 시간이 날 때, 독서를 자주 즐기는 편이다. 내가 독서를 하게 된 이유에는 아마도 유전의 영향도 있을 것이다. 어린 시절 독서를 거의 안했지만, 집에는 무수히 많은 책들이 서재에 쌓여있었다. 정치, 역사, 철학, 과학, 인문학, 사진, 바둑, 논어 등 아버지는 다독가였고, 지금도 그러하다. 어디까지나 내 생각이지만, 아버지가 회사에 입사하지 않았다면, 아마 대학교 교수가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휴학생 시절 아버지가 나에게 제법 강력하게 추천했던 책이 있었다. 그 책 중 하나가 김명호 교수가 쓴 <중국인 이야기>.

 

김명호 교수의 <중국인 이야기>는 현재도 계속 신작이 출간이 되고 있는 책으로써, 중국 근현대사에 등장하는 인물이나 사건 등을 일반인들도 읽기 쉽게 정리한 책이다. 무엇보다 책이 현학적이지 않고, 재미있다. 마치 소설을 읽어나갈 때처럼, 문장이 정말 술술 읽히는 책이다. 김명호 교수가 이야기하는 형식처럼 구성된 책이기에, 책이 굳이 책이 출판된 순서대로 읽을 필요도 없다. 따라서 1권을 먼저 읽든 8권을 먼저 읽든 책의 내용을 이해하는 데 큰 문제가 없다.

 

집에는 7권까지 있는데, 내 눈에는 4권이 눈에 들어왔다. 그래서 이번에 4권을 읽었다. 생각했던 것 그 이상으로 내용이 흥미진진해서, 제법 몰두해서 읽었다. 즉 그만큼 재밌게 읽었다는 것이다. 4권의 이미지는 문혁(문화대혁명) 시절의 포스터로 추정되지만, 4권에서는 문혁 관련 내용을 다루지는 않는다. 4권의 시작은 1936년 시안사건으로 명성을 떨친 장학량의 아버지 장작림의 가정교육부터이며, 1949년 혁명으로 탄생한 신중국의 외교관 형성에서 책은 종결된다. 4권에 포함된 내용들 하나하나가 개인적으로 매우 흥미롭게 다가왔다. 그중에서 가장 재밌게 읽은 파트는 아마도 제2차 국공내전에서 혁명을 도왔던 북한에 대한 내용이다.

 

1950년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 이후 한국군과 유엔군이 북진하여 평양과 압록강까지 도달하자, 마오쩌둥은 북한을 위해 대규모의 병력을 보냈다. 최소 100만에서 150만 명 이상의 중공군 병력이 전쟁 당시 주둔했었으며, 이들의 사상자 또한 최소 수십만 명이었다. 많은 이들이 이승만의 북진통일이 실패한 이유의 원흉으로 중국의 존재를 지적한다. 그러나 이러한 지적은 한국전쟁을 이해하기 위한 시도하고는 아주 동떨어진 주장이다. 왜냐하면 중국이 한국전쟁 시기 북한을 지원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를 무시하는 관점이기 때문이다.

 

김명호 교수의 <중국인 이야기 4>를 읽으면, 당시 중국이 북한을 위해 대규모의 병력을 파병할 수 밖에 없던 이유가 나온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중국의 동북 지방에선 토호에 맞선 계급투쟁이 있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국민당 공산당 간의 내전이 발발했다. 중국 공산당 휘하의 동북항일연군에 있던 조선인들은 토호에 맞선 계급투쟁을 성공적으로 지휘했으며, 소련 군정 하에 있던 북한은 어려운 상황에도 불구하고 무려 10만 정의 무기와 탄약 그리고 여러 보급품들을 중국 공산당에게 지원했다. 그 외에도 홍군은 북한 인근 지역의 야전병원에서 부상자들을 치료했으며, 이는 북한이 적극적으로 지원했기 때문이다. 아래의 내용은 책에 나오는 내용이다.

 

“1946826, 남양철도 경비 대장이 탑승한 특별열차가 압록강 철교를 건너 단둥에 진입했다. 김일성은 10만여 정의 총과 탄약 외에 교량과 철도 폭파에 쓰라며 일제 폭약도 보냈다. 일제가 나진 질소비료공장에서 생산하던 황색 폭약은 당대 최고의 성능을 자랑했다.”

 

출처: 중국인 이야기 4 p.289

 

위의 인용문에서 알 수 있듯이, 북한은 중국 혁명의 승리를 위해 헌신했다. 그 외에도 중국 공산당 휘하에서 무려 10만 명 이상의 조선인들이 일본 제국주의와 국민당 정권에 맞서 중국 혁명에 동참했었다. 이것이 바로 한국전쟁 당시 마오쩌둥이 무수히 많은 병력을 보내 김일성을 도왔던 이유이다. 물론 이러한 시각에 무조건적인 적대감을 가진 이들도 많을 것이다. 그러나 한국전쟁을 객관적으로 이해하고 앞으로 통일 세대를 준비하고 싶다면 이러한 역사도 인정해야 하지 않을까? 나는 적어도 그렇게 생각한다.

 

황포군관학교 관련한 내용도 재밌었다. 1920년대 손문의 지원을 받았던 장제스가 교장으로 있던 황포군관학교는 반제국주의 투사들을 길러낸 군사학교였다. 장제스 본인은 독재자로써 부정부패한 국민당 정권의 수장이었으며, 수많은 양민을 학살한 인물이었지만, 국민당군의 군사력 증강을 위해 광저우에 황포군관학교를 설립했고, 또 그 과정에서 본의 아니게 혁명가들을 길러냈다. 책에는 언급되지 않지만, 2015년 영화 암살로 대중들에게 유명해진 의열단 단장 약산 김원봉 또한 동지인 오성륜과 더불어 황포군관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다. 이후 김원봉은 1930년 레닌주의 정치학교를 세워 운영했다. 베트남 전쟁 당시 북베트남의 총리였던 팜반동(Phạm Văn Đồng) 또한 황포군관학교에서 교육을 받았으며, 적잖은 베트남의 독립운동가들과 혁명가들 또한 황포군관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다.

 

이러한 점에서 생각해보았을 때, 황포군관학교는 말 그대로 반제국주의 투사들의 교육기관이었으며, 중국 공산당 인사들 뿐만 아니라 일제 치하 불제 치하에 있던 식민지 조선과 베트남의 독립운동가들에게도 막대한 영향을 준 것이다. 굳이 황포군관학교게 중국 혁명에 크게 기여한 점을 따지자면, 아마도 린뱌오(임표)를 군사전문가로 거듭나게 만들어 줬다는 점일 것이다. 이 점은 국민당의 수장인 장제스 또한 인정하는 점이다. 당시 장제스는 린뱌오에 대해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린뱌오는 전장과 초연, 선혈과 생명이 오가는 곳을 갈망하는, 당대의 한신이다. 다시 군대를 이끌고 전공을 세울 날이 멀지 않았다. 청사에 남을 공을 세울 테니 두고 봐라.”

 

출처: 중국인 이야기 4 p.163

 

반면에 황포군관학교 시절 장제스를 싫어했던 린뱌오는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황푸 시절에 본 장제스는 군벌에 불과했다. 항상 군림하려고만 했지 교관과 학생들을 존중하지 않았다. 화도 잘 내고 변덕도 심했다. 기분 내키면 잔정을 베풀었지만, 가끔 말 같지 않은 소리로 우리를 조롱했다. 그런 사람은 특징이 있다. 큰 일은 이룬 듯하지만 결국은 마지막 문턱을 넘지 못한다.”

 

출처: 중국인 이야기 4 p.156

 

책에 있는 내용들이 전반적으로 감명 깊었지만, 마지막에 나오는 신중국의 외교관 이야기도 정말 흥미로웠다. 1949년 혁명으로 탄생한 중화인민공화국은 이후 외교관들을 해외에 보냈다. 외교관으로 간 이들은 과거 중국 혁명에 동참하여 싸웠던 혁명가들이었다. 이들 중에는 혁명가의 부인들도 포함이 된다. 과거 혁명에 참가하여 남성들과 동등한 위치에서 활동했던 여성들은 외교관의 부인이 되자 분개했다. 그 이유는 서구 사회가 강조하는 여성의 이미지를 강요받았기 때문이다. 심지어 이들이 지켜야할 규칙 중에는 다른 해외 외교관들이 보는 앞에서 남편에게 소리지르며 지적을 하면 안된다.”는 것이 포함됐다. 그것 때문에 외교관의 부인이 되길 거부하고자 했던 여성들도 많았다. 나는 이 내용에서 혁명 시절 중국의 여성인권이 서구 사회보다 선진적이었다고 생각한다. 아래는 책에 나오는 내용이다.

 

부인들은 더 힘들어했다. 포성 속에서 성장한 전사들에게 파마와 얼굴 화장, 치파오와 굽 높은 신발은 애초부터 무리였다. 예절교육 담당자가 남편은 국가를 대표하는 사람들이다. 외교관 부인은 복장·행동·말투가 남달라야 한다. 남편이나 과거의 동지들이 좀 모자란 행동을 했다고 소리부터 버럭 지르는 교양 없는 행동은 정말 고쳐야 한다는 말을 하자 분노가 폭발했다.”

 

출처: 중국인 이야기 4 p.354

 

당시 현존하는 자본주의 국가들 중에서 외교관의 부인이 이 만큼의 권위가 있던 나라가 과연 존재했는가? 나는 이점을 지적하고 싶다. 따라서 이러한 사실에서 사회주의 국가의 여성권리가 자본주의 보다 더 나은 점을 제공한 것은 주지의 사실인 것이다. 물론 여기에서 언급한 내용의 옳고 그름을 떠나 그러한 사실을 얘기하고 싶었을 뿐이다.

 

이번에 <중국인 이야기 4>를 읽으며 제법 많은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앞으로도 시간이 날 때, 이 시리즈를 차근차근 읽어나갈 예정이다. 중국을 알고 싶어하는 이들에게 이 책의 일독을 적극 권하는 바이며, 이러한 내용을 통해 현재 중국을 혐오가 아닌 보다 객관적인 시각에서 이해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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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2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국내 언론들과 서방 언론들은 러시아라는 존재를 비난하기 바쁘다. 사실 대한민국 입장에서 국익을 고려하더라도 러시아의 존재는 분명 중요하다. 그러나 우리와 전혀 관계도 없는 극우 국가 우크라이나가 지나치게 미화되고 피해자화 되고 있다.

우크라이나는 현재 대한민국의 일부 좌파들과 우파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결코 무고하지 않음에도 상당히 미화되고 있다. 우크라이나 정부는 대한민국 따위는 전혀 고려하지 않으며 독도를 사실상 일본땅이라 표기하는데, 멍청한 한국은 멀쩡한 이름 키예프를 나두고 키이우라는 이름을 남발한다. 정말 한심할 따름이다.

러시아의 폭격과 일부 학살로 인한 죽음. 부정하기는 힘들다. 그러나 과거 아조프 대대 네오나치들이 돈바스 내전에서 15,000명의 민간인을 학살한 것과 현재 전쟁과정에서 우크라이나군이 벌인 심각한 학살들은 축소되어 보도되며, 언급도 거의 안되고 있다.

반면에 러시아군이 떨어뜨린 정밀 포격은 하나 같이 극대화되어 보도된다. 사실 러시아군의 포격이나 폭격은 물론 적잖은 양민 피해가 나온다는 점에서 비판을 피하기는 힘들다. 그러나 그 상황이 바이든 정부가 비난의 화살을 퍼부을 이유가 될까? 과거 이라크 전때 미국은 수도 바그다드에 융단 폭격을 퍼부었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수도 키예프에 그만큼의 폭탄을 퍼부었는가? 현재 키예프는 폭격의 피해가 거의 없다.

우크라이나에서 자주 외치는 ‘슬라바 우크라이니‘는 과거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에 협력한 반데라와 OUN 일당들이 외치던 구호였으며, 이게 현재까지 온 것이다. 이들은 당시 유대인과 폴란드인 그외의 수많은 양민을 포함하여 100만 이상을 학살한 이들이었다. 물론 젤렌스키는 유대인이라고 하지만, 현재 수천 명 규모로 있는 아조프 부대는 ˝우리가 필요하다면 젤렌스키도 유대인이니 제거할 것이다.˝라고 외치고 있다.

우크라이나 보도에 대한 사진조작과 날짜조작이 판을 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점을 보도하는 국내 언론은 거의 없다. 이건 조선일보나 경향 한겨레 할거 없이 공통된 모습이다. 참으로 문제가 많다. 지나치게 서방 중심의 보도만 다루니, 바이든 행정부가 하는 프로파간다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 대해, 어느 편을 들든 간에 최소한 이러한 사실관계는 알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 나는 이 점에 있어서 지나치게 미국 및 우크라이나 중심으로 돌아가는 여론이 그저 우려스럽기만 하다. 이제는 다른 시각에서 봐야 한다고 굳게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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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dvs117 2023-06-29 21:2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국내 언론은 우크라이나 정부가 사회주의 정당을 탄압하고 있다는 것과 노동법을 19세기 노예노동 수준으로 개악 내지는 퇴보(노동조합 권리축소 & 노동자 임금 및 해고 회사가 맘대로 결정)시킨 것도 보도하지 않고 있다죠!
 

붉은 혈맹. 평양, 하노이 그리고 베트남전쟁

베트남전쟁기 북한은 북베트남을 경제적으로 지원했을 뿐만 아니라 지원군도 파견할 정도로 긴밀한 관계였다. 따라서 베트남전쟁기 북한·북베트남 관계는 주목할 만한 중요한 주제다. 그러나 북한·북베트남과 관련된 자료에 접근하기가 쉽지 않기에 양국 관계의 많은 부분이 아직도 베일에 가려 있으며, 이에 대한 충분한 해석과 연구가 부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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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역사의 기원은 역사학자들에 따르면 B.C 1400~1000년에 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고대 로마는 현재 이탈리아 반도에서 발생했고, 고대 로마 주민 대다수는 인도유럽인으로 가장 중요한부류는 이탈리아 중부의 라틴인이다. 이 라틴인들이 세운 국가가 바로 로마다. 기원전 8세기부터 로마에는 새로운 이민의 물결이 이탈리아를 향해 들어왔고, 이민을 오게된 이들은 문명을 발전시켰으며, 기원전 7세기쯤 이들은 도시 국가를 세웠다. 당시에는 왕권이 약해서 도시 국가들로 분열되었다가 이후 로마가 일어나면서 도시국가들이 차례대로 정복당한다.

 

기원전 753년에 로마가 건립되었으며, 왕정 시대를 열었다. 왕정시대를 연 이들은 에트루리아인들이었으며, 기원전 510년에 귀족들의 봉기로 에트루리아 왕조가 명말했다. 그 후 두 세기 동안 로마는 내부의 계급투쟁과 외부로의 영토 확장에 몰두 했다. 에트루리아 왕정 시대가 끝나면서 로마에서는 이른바 공화국 시대에 접어들었다. 이 시기 로마에는 왕이 존재하지 않았고, 대신 두 명의 집정관이 임기 1년간 국정을 살피는 식이었다. 하지만 계급적으로 정치적 권한을 가진 원로원의 구성원은 모두 귀족이었고, 이에 따른 내부의 계급적 갈등이 심각했다. 즉 로마의 공화정은 실질적으로 귀족 공화정이었다.


 

이 시기 로마는 정복 전쟁을 벌였으며 영토를 확장했다. 기원전 5세기와 4세기 동안 로마는 현재의 이탈리아 반도를 정복했고, 과거 자신들의 뿌리였던 그리스도 정복했다. 기원전 3세기에는 지중해 서부의 통제권을 놓고 카르타고 제국과 두 번의 큰 전쟁을 치렀다. 카르타고와의 전쟁은 바로 포에니 전쟁인데 100년에 걸쳐 모두 세 차례 일어났으며, 이 전쟁에서 우리가 아는 카르타고의 장수 한니발이 코끼리를 타고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로 진군하기 까지 했다. 한니발에게 많은 영토를 정벌 당하자 로마인들은 명장 스키피오를 지도자로 선출했다.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는 기원전 202년 자마 전투에서 한니발 군대에 맞서 승리했다. 이후 한니발은 패배의 굴욕을 참지 못하고, 1년 뒤에 자살한다.

 

100년간 전개된 포에니 전쟁은 기원전 146년 로마가 카르타고를 멸망시키며, 로마의 승리로 끝났다. 이로써 로마는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 세 대륙을 장악한 지중해의 맹주로 성장했으며, 이에 따라 로마 제국의 시대가 시작됐다. 그러나 이 로마제국 시대에는 반란이 끊이질 않았다. 노예들의 반란이 자주 일어났으며, 계층들의 갈등도 극심했고, 대표적으로 스파르타쿠스의 반란은 이를 잘 보여준다. 스파르타쿠스의 반란은 자유를 위한 투쟁으로 이후 후세대들에게 많이 알려진 바 있다. 이 반란은 실패했지만, 귀족 중심의 로마 지도층에게 막대한 충격을 주기엔 충분했다.


 

스파르타쿠스의 반란을 진압한 로마는 정계에 세 명의 인물을 등장시켰다. 스파르타쿠스 반란 진압에 공을 세운 크라수스, 해적 소탕에서 공을 세운 폼페이우스, 몰락 귀족 가문 출신의 율리우스 카이사르다. 이들이 바로 로마 제국의 3두 정치체제를 구축했다. 당시 로마는 내전이 있었는데 카이사르는 내전에서 갈리아를 정복했고, 이후 자신의 경쟁자인 폼페이우스의 군대를 무찌르고 수도 로마로 진군하여 기원전 48년에 종신호민관에 선출됐다. 그러나 그는 4년뒤에 자신의 심복인 브루투스에게 암살당함으로써 생을 마감했다.

 

카이사르 사망 이후 옥타비아누스가 로마 최초의 황제로 등극했고, 동시에 공화정에서 제정으로 넘어갔다. 로마는 형식적으로 공화정을 유지했지만, 실질적으로는 전제군주정을 실시했다.다만 옥타비아누스가 선포한 원수라는 칭호는 세습이 되지는 않았다. 이 원수제는 기원전 27년 옥타비아누스가 아우구스투스라는 칭호를 받은 시점부터 시작되어 기원후 284년에 끝났다. 그러나 옥타비아누스의 이런 체제는 스스로 부패와 궁극적인 붕괴의 씨앗을 내포했으며, 경제나 사회 체제도 점차 흔들리기 시작했다.

 

로마 제국의 확장은 기원후 1세기부터 급격히 둔화됐고, 2세기에는 완전히 정지됐다. 영토가 너무 넓어져서 지도층의 단합과 이들에게 바쳐지는 피호민들의 충성은 군대에서의 일반 사병의 희생이 있어야만 가능했고, 이런 시스템은 사치스런 소비와 국가의 후한 보조금이 있어야만 지속될 수 있었다. 당시 로마에는 콜로세움이나 대중 목욕탕, 경기장 등 온갖 오락 시설 및 유흥시설들이 로마 제국에 건설됐지만, 그에 따른 재정 부담이 경제적으로 위태로울 정도로 심각했다.

 

로마 제국의 군사적 하락은 378년 현 불가리아의 아드리아노플에서 동로마제국의 전체 야전군이 고트족에게 패배하면서 확실히 나타났다. 당시 로마는 동부는 비잔틴 제국이라 불렸고, 서부는 서로마 제국이라고 불렸는데, 로마는 이민족들의 끊임없는 침입 하에 있었다. 410년 서고트인들이 로마를 함락시켰고, 455년에는 반달족이 다시 로마를 함락시켰다. 이어서 476년 게르만족 오도아케르가 로마의 마지막 황제 로물루스를 내쫓으면서 서로마 제국이 몰락했다. 이렇게 해서 로마 제국은 역사 속에서 사라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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