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의 정책은 소련에 맞선 반공주의(Anti-Communism) 정책이었다. 이런 미국의 반공주의적 정책에 가장 잘 맞아떨어졌던 아시아의 두 인물이 있었는데, 하나는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Syng Man Rhee)이고, 다른 하나는 남베트남의 초대 대통령인 응오딘지엠(Ngo Dinh Diem)이다. 이 둘은 강경한 반공주의자로써 공산주의자들을 극도로 혐오했고, 국제정치 속에서 미국에 지나치게 의존하고 있었으며, 미국의 영향력에 의해 정권이 무너졌다.
이들은 미국의 신제국주의적인 정책에 아주 강력한 협력자였으며, 미국의 제국주의적인 방식으로 한 나라의 지도자가 된 사례이기도 했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생각해 보았을 때, 대한민국의 우남 이승만과 남베트남의 응오딘지엠은 상당히 유사한 점을 많이 가지고 있는 인물이다. 이처럼 이승만과 응오딘지엠은 정치적인 측면이나 개인 성향 그리고 살아온 생애 또한 상당히 비슷한 부분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다른 점도 있는데, 대표적으로 종교탄압 부분일 것이다. 따라서 오늘은 이승만과 응오딘지엠 아시아의 극단적 반공주의자이자 독재자였던 이들을 한번 비교해볼까 한다.
이승만은 1875년 황해도에서 태어나 동학농민운동과 을미사변 이후 이른바 서재필이 만든 독립협회에서 초기 개화운동을 시작했고, 기독교를 받아들였으며 거기서 의형제를 맺은 박용만의 도움으로 미국에 정착한 인물이었다. 이승만은 평생을 기독교 신자로서 살았다. 그는 하버드와 프린스턴 대학에서 석사와 박사학위를 취득한 인물이었지만, 독립운동 부분에 있어서 사적인 권력욕을 위해 독립운동을 했던 인물이기도 했다. 따라서 1919년 미국에서의 명성을 토대로 대한민국임시정부 초대 대통령 자리에 있었지만, 본인이 일으킨 분열과 공금횡령 등의 문제로 결국 1925년에 임시정부에서 탄핵된 인물이었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던 1945년까지 미국에 있었고, 더글라스 맥아더와 존 리드 하지 미군정 사령관의 지원으로 대대적인 환영속에서 귀국했다. 미국의 지원을 토대로 여운형과 같은 중도좌파적 통일 세력을 짓밟았으며, 좌파세력들을 탄압했고, 1948년 유엔의 주도로 이어진 투표로 대통령이 됐다. 그러나 친일청산에 있어서 매우 소극적이었기에, 그는 단 한명의 친일파도 처벌하지 않았으며, 1950년 한국전쟁 시기에도 지도자로서 보이지 말아야할 행위를 했다. 철저한 반공주의자였던 그는 이른바 북진통일을 입에 달고 살았으며, 북진통일론은 1960년 4.19 혁명으로 하야할 때까지 그가 가지고 있던 정치 구호였다. 대통령 하야 이후에는 미국 하와이에서 살다가 1965년에 90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남베트남의 초대 대통령이던 응오딘지엠은 1901년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꽝빈성에서 태어나 가톨릭 신자의 삶을 살다가 식민지 관료의 삶을 걸었다. 1930년 반불봉기가 일어나자 이를 프랑스와 함께 진압하는 짓을 했기에, 민족반역자라는 비판을 피하기도 힘드나, 그 이후에는 바오다이 내각에 반발하여 결국 이승만식의 약식 독립운동을 진행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이 들어오자, 그 또한 일본을 해방군으로 받아들이는 실책을 범했고, 결국 나중에는 일본에 협력하다 반발하여 쫓기는 신세가 되었었다. 1945년 호치민이 주도한 8월 혁명 이후에는 인민전선 원리에 따라 베트민 정부의 협력을 호치민으로부터 제안받기도 했으나, 이를 거부했다.
다만 1945년 8월 혁명에서 민족반역자였던 친형이 베트민에게 살해당했기에, 이미 뼈속까지 반공주의자가 되어 있었으며, 프랑스가 일으킨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시기에는 베트남을 떠나 벨기에와 미국에 거주했으며, 거기서 반공주의적이며 메시아적이고 망상적인 의무감 즉 “동포를 무신론적인 공산주의의 위협으로부터 구원해야 한다.” 허무맹랑한 생각에 빠져 있었다. 그러나 미국 생활을 통해 지원자를 확보했으며,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 이후 제네바 회담에 따라 베트남이 분단되자 바오다이 내각의 총리로 임명됐다. 여기서 미국의 지원을 토대로 바오다이와 빈쑤옌, 호아하오, 까오다이 그리고 베트남국민당 등과 같은 세력들을 박살내고, 1955년 부정투표를 통해 남베트남의 초대 대통령이 됐다. 대통령이 된 이후에는 반공정책을 통해 총선을 파기하고, 자신의 적인 베트민에 대한 강도 높은 살인적인 탄압과 테러를 저질렀으며, 대중적인 종교인 불교를 탄압했다. 1960년 베트콩이 만들어진 이후에도 이러한 폭력적 행위를 일삼았으며, 1963년 6월 11일 틱광둑 승려의 분신자살을 시작으로 미국의 신뢰까지 떨어져 결국 CIA에게 암살당하는 운명을 맞게 된다.
이런 삶을 살았던 이승만과 응오딘지엠은 미국이 추구하는 반공주의적 이데올로기와 아주 잘 맞는 인물이었고, 그랬기에 미국은 이들을 자신들의 꼭두각시로서 이용하고자 했다. 1950년에 일어난 한국전쟁에서 이승만이 미군 병력에 의존하여 전쟁을 치렀듯이, 응오딘지엠 정권 또한 남베트남에서 일어나는 게릴라전에서 미국의 지원과 고문단 병력에 전적으로 의존하여 전투를 치렀다. 그러나 이승만 정권과 응오딘지엠 정권의 결정적인 군사적 차이가 존재했는데, 이승만 정부는 제주 4.3 항쟁과 여순항쟁 그 외의 지리산 빨치산 게릴라전을 진압했고, 한국전쟁 이전까지 좌익의 씨를 말린 상태였기에, 한국전쟁 이후에는 더 이상 남한 내부의 게릴라전이 없었다.
반면 응오딘지엠 정권은 프랑스-베트민 전쟁(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당시 프랑스에 맞서 싸우다 제네바 회담 이후 남베트남에 잔존한 베트민 병력과 봉기한 베트콩과 민중의 군대를 제대로 뿌리 뽑지 못했다. 오히려 이 게릴라들 즉 혁명세력은 허약한 무장력에도 불구하고 남베트남군을 압도했으며, 1963년 압박 전투(Battle of Ap Bac)는 이런 현실을 아주 극명하게 보여줬다. 물론 그 뿌리는 그의 암살 이후 미국이 베트남 전쟁이라는 수렁에 빠질 정도로 아주 강력한 존재였으며, 역사적으로 너무나 당연한 결과이기는 했지만 말이다.
이승만 정권과 응오딘지엠 정권 모두 양민에 대한 학살을 동반했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이승만은 한국전쟁 이전까지 미군정의 도움으로 제주4.3항쟁이나 여순항쟁 그리고 그 외의 여러 민중항쟁들을 진압하면서 대략 10만에 달하는 민간인을 학살한 상태였다. 그리고 1950년 한국전쟁이 시작되었을 때는 국민보도연맹 학살로 2~3달이라는 기간 동안 최소 30만에서 50만에 달하는 학살을 벌였으며, 인천상륙작전 이후 서울 수복과 북한으로의 북진 과정 및 점령과정에서 또 다른 수십만(북한지역에서는 20만이 이들에게 학살당한 것으로 알려짐)이 학살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런 학살로 이승만은 대량 100만 이상의 양민을 학살했으며, 그 수법도 아주 잔인했다.
응오딘지엠 정권도 1954년부터 1963년까지 양민학살을 저질렀다. 이런 학살의 규모는 북베트남 호치민 정부가 1954년에서 1956년 당시 토지개혁을 하는 과정에서 억울하게 처형한 2,500명에서 1만 5,000명에 달하는 규모를 압도적으로 우회하는 수치였으며(애초에 이런 비교 자체가 무의미하고 두 사건의 성격은 너무나도 다른 것이지만), 이 시기 적잖은 민간인이 응오딘지엠 정권에 의해 학살당했다. 응오딘지엠은 일부 토착 세력 및 친프랑스 세력 들을 토벌하거나 흡수하는 방식으로 세력을 키웠는데, 응오딘지엠에게 있어 가장 큰 적은 바로 항불전쟁 시기 프랑스에 맞서 싸웠던 베트민 혁명가들이었다.
응오딘지엠 정권의 인적구성은 말 그대로 바오다이를 계승한 것이었기에, 인물들 대다수가 프랑스에 협력한 한국으로 치면 친일파 같은 인물들이었다. 특히 남베트남 군부는 어떤 육군 중령 1명을 제외하고는 프랑스에 부역했던 반역자들이었으며, 이들이 바로 베트민과 이후 베트민을 대체하는 베트콩 그리고 그들을 지지하는 양민들을 토벌하고 학살했던 주체들이었다. 한 마디로 민족반역자들의 집합체가 바로 응오딘지엠 정권이었고, 당연히 국가 정통성이 북베트남의 호치민 정부에게 압도적으로 밀릴 수 밖에 없었다.
1955년부터 1960년까지 응오딘지엠은 베트민을 포함한 공산주의자들을 제거하기 위해 멸공, 반공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하려 했으며, 이 과정에서 죽은 사람이 5만에서 8만 명에 달한다. 미국의 역사학자 버나드 폴에 따르면 1957년부터 1965년까지 대략 15만 명에 달하는 베트민과 베트콩이 죽었으며, 여기에는 당연히 학살당한 양민들을 포함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런 수치까지 합친다면 응오딘지엠 정권은 대략 10만에서 15만에 달하는 양민을 학살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못해도 5만에서 많으면 10만 이상의 민간인이 응오딘지엠 정권에 의해 학살당한 것이다. 물론 이 학살의 규모에 있어서 이승만보다는 작은 편이다.
이승만과 응오딘지엠 정권의 결정적인 차이는 아마도 종교에 있을 것이다. 이승만은 본인이 기독교 신자였지만, 대한민국 초대 내각을 기독교인들로만 구성하지는 않았었다. 그러나 응오딘지엠은 자신이 가톨릭 신자라는 이유만으로 남베트남 초대 내각을 가톨릭으로만 구성했다. 응오딘지엠의 동생 응오딘누는 남베트남의 수석 보좌관으로, 응오딘누의 부인 마담누는 공식적인 행사가 있을 때 퍼스트 레이디로, 마담누의 아버지는 미국 대사로, 어머니는 유엔 옵서버로, 디엠의 친형은 후에의 추기경으로 그리고 다른 2명의 형제들은 지방의 권력자로 임명하였으며, 사촌들과 일가친척들에게는 내각의 주요 직책과 지방 관공서의 요직을 내주었다. 따라서 이승만 정권과는 달리 남베트남의 응오딘지엠 정권은 불교도들의 극심한 반대투쟁에 직면해야 했고, 그 결과 응오딘지엠 암살로 이어졌다. 따라서 이 종교정책에 있어서만큼은 이승만이 응오딘지엠 정권보다 관용적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승만과 응오딘지엠을 쉽게 정리하자면, ‘미제국주의 압잡이’라는 단어로 요약할 수 있다. 이들은 정말 미제국주의의 하수인이었다. 이들은 자신의 정권 유지를 위해 미국의 반공주의와 매카시즘을 전적으로 수용했으며, 그 반공이데올로기를 자신들 사회에 적용시키려 했다. 그 결과 한국과 남베트남은 냉전에 있어서 미제국주의의 반공기지로 태어났으며, 사회의 진보적 가치들은 철저하게 탄압받고 짓밟혔다. 이승만의 국가는 5.16 쿠데타로 등장한 박정희가 한층 더 강화하며, 경제를 발전시켜 유지한 반면, 응오딘지엠의 국가는 쿠데타 이후 등장한 티우 또한 부정부패로 인해 결국 나라가 혁명 세력에 의해 사라져 버리는 결과를 맞게 됐다. 물론 남베트남의 패망은 제국주의에 맞선 민중들의 투쟁이었다는 점에서 평가해야할 사건이지만, 동시에 결과적으로 남베트남은 미국 없이는 유지가 불가능했다는 역사적 사실을 알려주는 사례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