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과 일본의 과거사 문제 태도, 한국사회에선 이렇게 많이 비교되기도 한다.)
(욱일기와 하켄크로이츠, 그리고 이런식으로 비유되기도 한다.)
한국과 일본의 관계는 과거사 문제로 상당히 민감하다. 독도, 강제징용, 일본군 위안부 그리고 그 외의 여러 일본 제국주의가 저질렀던 전쟁범죄 문제 등은 한일관계를 냉각시키는 하나의 주요한 맥락으로 자리 잡고 있다. 물론 여기에는 과거 자신들이 저질렀던 전쟁 범죄에 대해 전혀 반성하지 않는 일본의 책임도 막중한 것도 명백한 사실이다. 반성하지 않는 일본에 대한 얘기가 나오다 보면, 꼭 빠지지 않고 나오는 얘기가 있다. 그것은 바로 독일의 과거사 청산 문제이다.
(아우슈비츠 수용소, 유대인들은 이런 절멸 수용소에서 집단 학살 당했다. 이런 학살로 인하여 총 600만이 희생되었다고 한다.)
(밴드 오브 브라더스 9화에 나오는 장면, 이 수용소를 해방시키 미군들은 큰 충격에 빠진다.)
현재 한국이 생각하는 독일의 모습은 ‘과거를 반성하는 독일’일 것이다. 즉 독일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히틀러와 나치즘이 저지른 전쟁범죄를 반성하고, 피해국들에게 배상을 했다는 관점이다. 필자 또한 몇 년 전 유럽 여행을 하면서 네덜란드의 안네 프랭크가 숨어살던 집(Anne Frank House)과 독일의 다하우 수용소(Dachau Prison Camp)를 들렸고, 유럽의 여러 나라에서 나치에 대한 청산이 있었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었다. 물론 독일이 과거사 청산에 나섰고, 피해국들에게 배상을 한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그러나 현재 우리가 생각하는 독일의 이미지, 즉 과거에 대해 반성하는 독일이 탄생한 것은 단순히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후에 갑자기 등장한 것이 아니었다. 따라서 오늘은 독일 과거사 청산의 과정을 얘기해보고자 한다.
(히틀러의 죽음을 보도한 미군 언론사인 성조지)
(독일 영화 '몰락'에 나온 장면, 한 SS 친위대 장교가 항복했음을 알리고 있다.)
1945년 4월 30일 독일의 독재자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가 베를린 지하 벙커에서 아내 에바 브라운(Eva Braun)과 자살했다. 며칠 후 나치 독일의 지도부는 연합군에게 항복을 선언했고, 1945년 5월 8일에서 9일 제2차 세계대전은 독일의 패전으로 끝났다. 제1차 세계대전에 이어 두 번에 이은 패전이었다. 유럽에서의 전쟁이 끝난 이후에도 영국과 미국은 태평양에서 일본을 상대로 전쟁을 치렀는데, 오키나와 전투 이후 미국의 원자탄 투하와 소련의 대일전 참전으로 1945년 8월 15일 일본 또한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면서, 제2차 세계대전은 완벽히 추축국의 패전으로 끝이 났다.
(독일 다하우 수용소 정문, 몇년 전 유럽여행 당시 직접찍은 사진이다.)
(구타하는 장면을 묘사한 그림)
(유대인 시체 소각로, 다하우 수용소에도 유대인 시체 소각로가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 말기 서부에서 진격하던 영미 연합군과 동부에서 진격하던 소련군은 전쟁이 끝나갈 때 쯤 돼서, 아주 충격적인 것들을 목격했다. 그것은 바로 나치 독일이 계획적으로 저질렀던, 홀로코스트(Holocaust)의 참상을 있는 그대로 목격했기 때문이다. 일반인들에게도 제법 알려진 폴란드의 아우슈비츠 수용소(Auschwitz concentration camp)의 경우 사망률이 85% 정도였는데, 트레블링카 절멸 수용소(Treblinka extermination camp)를 포함한 몇몇 절멸 수용소는 사망률 99%라는 기록이 있을 정도였다. 말 그대로 대량의 인종학살을 나치가 했던 것이다. 이에 따라 제2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 대략 600만에 달하는 유대인이 학살당했다.
(미국 워싱턴 DC에 있는 홀로코스트 박물관, 몇년 전 미국여행에서 직접 찍은 사진이다. 참고로 입장료는 없다. 무료다.)
(한국어 설명서, 미국에 있는 홀로코스트 박물관에는 한국어 설명서도 준다. 그만큼 한국 사람들도 많이 방문한듯 하다.)
미국에서 만든 드라마 <밴드 오브 브라더스 2001(Band of Brothers 2001)>를 보면, 노르망디 상륙작전부터 온갖 전투를 치렀던 병사들이 유대인 수용소를 해방시키는 장면이 나온다. 거기서 나온 주인공 중 한 명은 한 독일측 장교 혹은 장군의 저택에 들려, 아주 떳떳하게 행동하는 부인을 만났지만, 유대인 학살의 참상을 알리고자 떳떳하게 행동하는 독일시민들에게 유대인 수용소를 직접 눈으로 확인하게 만들었다. 드라마 밴드 오브 브라더스가 묘사한 것과 같이 실제로 연합군은 독일인들에게 이 끔찍한 현장을 직접 목격하게 하는 역할을 하기도 했었다.
(뉘른베르크 전범재판, 앞줄 왼쪽부터 오른쪽으로 헤르만 괴링, 루돌프 헤스,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 빌헬름 카이텔이고, 뒷줄 왼쪽부터 오른쪽으로 카를 되니츠, 에리히 레더, 발두어 폰 시라흐, 프리츠 자우켈이다.)
(만화로 묘사된 뉘른베르크 전범재판, 미국, 영국, 소련이 주도적으로 재판을 담당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종결된 이후 연합국들은 전쟁범죄를 일으켰던 나치 독일의 인사들을 처벌하기 위한 재판을 열었다. 그것이 바로 뉘른베르크 전범재판(Nuremberg International Military Tribunal)이었다. 1945년 11월 20일부터 1946년 8월 31일까지 연합국은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을 주도했다. 당시 뉘른베르크 재판에는 이른바 죄형법정주의 문제, 즉 “어떤 죄를 법적으로 처벌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 죄에 관한 법이 존재해야 한다.”는 식의 문제가 있기도 했는데, 우선 나치가 저지른 홀로코스트라는 것이 세계적으로 유례없는 반인륜적인 전쟁범죄였기에, 당연히 재판이 진행될 수밖에 없었다.
앞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뉘른베르크 재판은 대략 9개월에 걸쳐서 진행됐고, 제2차 세계대전 승전국은 미국과 영국 그리고 소련이 나치전범 재판을 단행한 사례였다. 이 전범재판에서 총 24명을 재판했고, 12명에게 사형이 선고되었다. 그 이후에도 나치 독일측 인물들이 기소되기도 했지만, 사실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은 역으로 독일 스스로 과거를 반성하게 하는 계기를 시간적으로 늦추게 된 원인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앞서 설명한 것과 같이 재판 자체가 승전국들이 진행한 재판이라는 점에서 독일인들에게 안 좋게 다가온 점이 있었다. 따라서 전후 독일 사회에서 이에 대한 인식이 좋지 않았다는 주장이다.
(전후 분단된 독일, 이 분단은 1949년 동독과 서독의 분단으로 이어진다.)
이후에도 연합군 점령 지역에서 이른바 탈나치화 정책이 추진됐다. 미군정 휘하의 독일에서는 법령 104호에 의거해 탈나치화를 실시했다. 18세 이상의 독일인에게 1,300만 부의 설문지를 작성하게 하여, 340만 정도를 입건했으며, 100만 정도를 구술 재판했다. 여기서 재판의 부당성을 주장하며 수많은 이들이 탄원서를 제출하기도 했다. 이런 움직임의 문제점은 대규모 추방으로 행정 기능 마비와 더불어, 4개국 점령지역 마다 평가 및 처벌 기준이 상이했다. 이런 탈나치화 수사 결과로 총 5,205명이 구속됐고, 806명에게 사형선고가 내려졌으며, 486명에게 사형이 집행됐다.
(1914년 완공된 총길이 45.6킬로미터의 라인-헤른 운하가 지나고 있는 독일의 오버하우젠 지역
그러나 초기에 있었던 서방 연합군 지역의 탈나치화의 움직임은 이후 미소간의 냉전이 심해지면서 흐지부지 되어갔다. 애초에 미국측은 독일 과거사 문제를 철저하게 할 생각이 없었다. 따라서 전후 철저한 청산이 서독에서 이뤄지지 않았으며, 나치 경력이 있는 이들이 상당수 남게 되었다. 당시 탈나치화에 의한 점령지역별 구속자 수를 보면, 영국이 64,500명, 미국 95,250명, 프랑스 18,963명, 소련 67,179명이었다. 석방자 수는 순서대로 영국 34,000명으로 전체 비율에서 53%, 미국 44,244명 전체비율에서 46%, 프랑스 8,040명 전체비율에서 42% 그리고 소련 8,214명으로 전체비율에서 12%였다. 따라서 나치경력 인적 청산 부분에서 만큼은 소련이나 동구권 사회주의 국가가 보다 확실했다.
(라인강의 기적을 나타내는 GDP 자료, 이 시기 서독은 이른바 라인강의 기적을 통해 경제재건에 나섰다.)
냉전 초기인 1950년대 독일에서는 사회적으로 정치 안정과 경제재건에 주력했다. 이는 과거사 보단 냉전이라는 시대사적인 현실에 맞춘 흐름이었다. 이에 따라 과거사 청산이 독일에서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심지어 나치를 추종하는 극우정당이 부활하는 움직임도 있었다. 물론 이들이 대중적으로 크게 지지받지는 않았고, 홀로코스트 보상법이 제정되기도 했으나, 어디까지나 나치나 개인의 책임으로 축소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에 따라 집단 책임에 대한 부정과 피해자 의식이 확산되는 역효과도 있었다.
(모사드 관련 서적, 이스라엘이 만든 이 조직은 나치 잔당들을 추적했고, 실제로 재판에 세웠었다.)
(아돌프 아이히만, 유대인 학살의 책임자다. 1942년 유대인 절멸을 결정한 반제회의에서 그는 학살 대상자를 분류했다.)
물론 1950년대와 1960년대 초의 경우 유대인 학살에 가담한 개인을 재판에 세우는 일은 있었다. 그리고 1948년 제1차 중동전쟁으로 탄생한 이스라엘에서 모사드(Mossad)라는 단체가 유대인 학살 가담자를 추적하여 체포하고 처형하는 경우도 있었다. 대표적으로 1960년에 있던 유대인 학살자 아돌프 아이히만(Adolf Eichmann)의 재판이 그러했다. 그러나 이러한 일들이 독일 사회 전체에 과거사에 대한 반성을 이끌고 오지는 못했다. 쉽게 말하자면 나와는 상관없는 일로 치부됐다.
(68혁명, 1968년 베트남 전쟁 반전운동과 더불어 독일도 이 시대적 흐름에 휩싸였다. 서독의 젊은 이들은 새로운 시대에 대한 희망과 더불어, 베트남 전쟁 반대 그리고 과거사 청산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사진에서처럼 젊은이들은 호치민이나 체게바라와 같은 사회주의 인물의 사진을 들고 거리로 나왔었다. 사진은 1968년 2월 서독 서베를린에서 있던 시위다.)
(빌리 브란트 스탬프)
그러나 서독일 사회가 전반적으로 나치 과거사 문제가 큰 화제가 되었는데, 이는 베트남 전쟁 반전운동으로 인한 68혁명의 움직임에 의한 것이었다. 1960년대 미국이 베트남 전쟁에 대규모 군대를 보내면서, 미국을 포함한 여러 나라에서 반전운동이 확산되었는데, 이는 서독일 또한 마찬가지였다. 즉 이런 움직임에서 독일 과거사 문제가 다시 대두된 것이다. 당시 젊은 세대들이 자신들의 아버지나 할아버지가 관여한 나치 문제에 눈을 뜬 것이고, 이것이 사회적으로 큰 이슈가 됐다. 이와 더불어 서독의 빌리 브란트(Willy Brandt) 총리가 이른바 동구정책을 피게 되면서, 서독 사회가 과거사에 대한 반성과 청산의 길로 나가기 시작했다.
(1970년 폴란드 바르샤바에 있던 게토를 방문한 빌리 브란트, 그는 독일의 과거문제를 반성하는 모습을 동구권에도 각인시켰다. 아이러니 하게도 빌리 브란트 뒤에서 바른자세로 서있는 인물은 동독의 간첩이었다.)
(미국에서 만든 드라마 홀로코스트, 이 드라마 또한 독일인들을 반성하게 만드는 계기를 제공했다.)
(현재도 매스미디어를 통해 보도되는 독일 과거사 문제)
68혁명의 움직임과 빌리 브란트 총리의 동구정책을 통해 독일 사회는 과거사 문제를 사회적으로 보다 크게 대면하게 되었다. 여기서 더 나아가 독일 사회가 홀로코스트 문제를 다시 생각하게 되는 계기가 만들어졌는데, 아이러니 하게도 1979년 미국에서 만든 드라마 홀로코스트(Holocaust (miniseries) 1979)의 방영이었다. 이 드라마은 시청률이 각회당 1,000~1,500만에 달했을 정도였다. 독일 정치학자 피터 리치(peter reiche)는 이 드라마의 방영이 “독일 대중이 나치과거와 진정한 대면을 시작한 계기”라고 평가했을 정도다. 그리고 이 드라마를 통해 소위 홀로코스트라는 단어가 유대인 학살의 동의어가 됐다. 이에 따라 1970년대 후반과 1980년대 초에 현재 우리 사회가 아는 소위 ‘과거사를 반성하는 독일’의 모습이 등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