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바에서 친미주의자들이 반정부집회 열었다. 그리고 미제는 이를 지원하고 있다. 1차 시위는 쿠바 정부가 진압했다. 앞으로 2차 3차 4차 시위가 일어날 수 있는데, 이에 대한 맞불로 친정부 집회를 강화하고 반동들을 하루속히 체포해야 하며, 미제의 악랄한 개입에 맞서 카스트로 동지가 이룩한 사회주의를 수호해야 한다.

난 전적으로 쿠바 정부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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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과 일본의 과거사 문제 태도, 한국사회에선 이렇게 많이 비교되기도 한다.)


(욱일기와 하켄크로이츠, 그리고 이런식으로 비유되기도 한다.)

 

한국과 일본의 관계는 과거사 문제로 상당히 민감하다독도강제징용일본군 위안부 그리고 그 외의 여러 일본 제국주의가 저질렀던 전쟁범죄 문제 등은 한일관계를 냉각시키는 하나의 주요한 맥락으로 자리 잡고 있다물론 여기에는 과거 자신들이 저질렀던 전쟁 범죄에 대해 전혀 반성하지 않는 일본의 책임도 막중한 것도 명백한 사실이다반성하지 않는 일본에 대한 얘기가 나오다 보면꼭 빠지지 않고 나오는 얘기가 있다그것은 바로 독일의 과거사 청산 문제이다.

(아우슈비츠 수용소, 유대인들은 이런 절멸 수용소에서 집단 학살 당했다. 이런 학살로 인하여 총 600만이 희생되었다고 한다.)


(밴드 오브 브라더스 9화에 나오는 장면, 이 수용소를 해방시키 미군들은 큰 충격에 빠진다.)

 

현재 한국이 생각하는 독일의 모습은 과거를 반성하는 독일일 것이다즉 독일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히틀러와 나치즘이 저지른 전쟁범죄를 반성하고피해국들에게 배상을 했다는 관점이다필자 또한 몇 년 전 유럽 여행을 하면서 네덜란드의 안네 프랭크가 숨어살던 집(Anne Frank House)과 독일의 다하우 수용소(Dachau Prison Camp)를 들렸고유럽의 여러 나라에서 나치에 대한 청산이 있었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었다물론 독일이 과거사 청산에 나섰고피해국들에게 배상을 한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그러나 현재 우리가 생각하는 독일의 이미지즉 과거에 대해 반성하는 독일이 탄생한 것은 단순히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후에 갑자기 등장한 것이 아니었다따라서 오늘은 독일 과거사 청산의 과정을 얘기해보고자 한다.

(히틀러의 죽음을 보도한 미군 언론사인 성조지)


(독일 영화 '몰락'에 나온 장면, 한 SS 친위대 장교가 항복했음을 알리고 있다.)

 

1945년 4월 30일 독일의 독재자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가 베를린 지하 벙커에서 아내 에바 브라운(Eva Braun)과 자살했다며칠 후 나치 독일의 지도부는 연합군에게 항복을 선언했고, 1945년 5월 8일에서 9일 제2차 세계대전은 독일의 패전으로 끝났다1차 세계대전에 이어 두 번에 이은 패전이었다유럽에서의 전쟁이 끝난 이후에도 영국과 미국은 태평양에서 일본을 상대로 전쟁을 치렀는데오키나와 전투 이후 미국의 원자탄 투하와 소련의 대일전 참전으로 1945년 8월 15일 일본 또한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면서2차 세계대전은 완벽히 추축국의 패전으로 끝이 났다.

(독일 다하우 수용소 정문, 몇년 전 유럽여행 당시 직접찍은 사진이다.)


(구타하는 장면을 묘사한 그림)


(유대인 시체 소각로, 다하우 수용소에도 유대인 시체 소각로가 있었다.)

 

2차 세계대전 말기 서부에서 진격하던 영미 연합군과 동부에서 진격하던 소련군은 전쟁이 끝나갈 때 쯤 돼서아주 충격적인 것들을 목격했다그것은 바로 나치 독일이 계획적으로 저질렀던홀로코스트(Holocaust)의 참상을 있는 그대로 목격했기 때문이다일반인들에게도 제법 알려진 폴란드의 아우슈비츠 수용소(Auschwitz concentration camp)의 경우 사망률이 85% 정도였는데트레블링카 절멸 수용소(Treblinka extermination camp)를 포함한 몇몇 절멸 수용소는 사망률 99%라는 기록이 있을 정도였다말 그대로 대량의 인종학살을 나치가 했던 것이다이에 따라 제2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 대략 600만에 달하는 유대인이 학살당했다.

(미국 워싱턴 DC에 있는 홀로코스트 박물관, 몇년 전 미국여행에서 직접 찍은 사진이다. 참고로 입장료는 없다. 무료다.)


(한국어 설명서, 미국에 있는 홀로코스트 박물관에는 한국어 설명서도 준다. 그만큼 한국 사람들도 많이 방문한듯 하다.)

 

미국에서 만든 드라마 <밴드 오브 브라더스 2001(Band of Brothers 2001)>를 보면노르망디 상륙작전부터 온갖 전투를 치렀던 병사들이 유대인 수용소를 해방시키는 장면이 나온다거기서 나온 주인공 중 한 명은 한 독일측 장교 혹은 장군의 저택에 들려아주 떳떳하게 행동하는 부인을 만났지만유대인 학살의 참상을 알리고자 떳떳하게 행동하는 독일시민들에게 유대인 수용소를 직접 눈으로 확인하게 만들었다드라마 밴드 오브 브라더스가 묘사한 것과 같이 실제로 연합군은 독일인들에게 이 끔찍한 현장을 직접 목격하게 하는 역할을 하기도 했었다.

(뉘른베르크 전범재판, 앞줄 왼쪽부터 오른쪽으로 헤르만 괴링루돌프 헤스요아힘 폰 리벤트로프빌헬름 카이텔이고뒷줄 왼쪽부터 오른쪽으로 카를 되니츠에리히 레더발두어 폰 시라흐프리츠 자우켈이다.)


(만화로 묘사된 뉘른베르크 전범재판, 미국, 영국, 소련이 주도적으로 재판을 담당했다.)

 

2차 세계대전이 종결된 이후 연합국들은 전쟁범죄를 일으켰던 나치 독일의 인사들을 처벌하기 위한 재판을 열었다그것이 바로 뉘른베르크 전범재판(Nuremberg International Military Tribunal)이었다. 1945년 11월 20일부터 1946년 8월 31일까지 연합국은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을 주도했다당시 뉘른베르크 재판에는 이른바 죄형법정주의 문제즉 어떤 죄를 법적으로 처벌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 죄에 관한 법이 존재해야 한다.”는 식의 문제가 있기도 했는데우선 나치가 저지른 홀로코스트라는 것이 세계적으로 유례없는 반인륜적인 전쟁범죄였기에당연히 재판이 진행될 수밖에 없었다.

 

앞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뉘른베르크 재판은 대략 9개월에 걸쳐서 진행됐고2차 세계대전 승전국은 미국과 영국 그리고 소련이 나치전범 재판을 단행한 사례였다이 전범재판에서 총 24명을 재판했고, 12명에게 사형이 선고되었다그 이후에도 나치 독일측 인물들이 기소되기도 했지만사실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은 역으로 독일 스스로 과거를 반성하게 하는 계기를 시간적으로 늦추게 된 원인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앞서 설명한 것과 같이 재판 자체가 승전국들이 진행한 재판이라는 점에서 독일인들에게 안 좋게 다가온 점이 있었다따라서 전후 독일 사회에서 이에 대한 인식이 좋지 않았다는 주장이다.

(전후 분단된 독일, 이 분단은 1949년 동독과 서독의 분단으로 이어진다.)

 

이후에도 연합군 점령 지역에서 이른바 탈나치화 정책이 추진됐다미군정 휘하의 독일에서는 법령 104호에 의거해 탈나치화를 실시했다. 18세 이상의 독일인에게 1,300만 부의 설문지를 작성하게 하여, 340만 정도를 입건했으며, 100만 정도를 구술 재판했다여기서 재판의 부당성을 주장하며 수많은 이들이 탄원서를 제출하기도 했다이런 움직임의 문제점은 대규모 추방으로 행정 기능 마비와 더불어, 4개국 점령지역 마다 평가 및 처벌 기준이 상이했다이런 탈나치화 수사 결과로 총 5,205명이 구속됐고, 806명에게 사형선고가 내려졌으며, 486명에게 사형이 집행됐다.

(1914년 완공된 총길이 45.6킬로미터의 라인-헤른 운하가 지나고 있는 독일의 오버하우젠 지역

 

그러나 초기에 있었던 서방 연합군 지역의 탈나치화의 움직임은 이후 미소간의 냉전이 심해지면서 흐지부지 되어갔다애초에 미국측은 독일 과거사 문제를 철저하게 할 생각이 없었다따라서 전후 철저한 청산이 서독에서 이뤄지지 않았으며나치 경력이 있는 이들이 상당수 남게 되었다당시 탈나치화에 의한 점령지역별 구속자 수를 보면영국이 64,500미국 95,250프랑스 18,963소련 67,179명이었다석방자 수는 순서대로 영국 34,000명으로 전체 비율에서 53%, 미국 44,244명 전체비율에서 46%, 프랑스 8,040명 전체비율에서 42% 그리고 소련 8,214명으로 전체비율에서 12%였다따라서 나치경력 인적 청산 부분에서 만큼은 소련이나 동구권 사회주의 국가가 보다 확실했다.

(라인강의 기적을 나타내는 GDP 자료, 이 시기 서독은 이른바 라인강의 기적을 통해 경제재건에 나섰다.)

 

냉전 초기인 1950년대 독일에서는 사회적으로 정치 안정과 경제재건에 주력했다이는 과거사 보단 냉전이라는 시대사적인 현실에 맞춘 흐름이었다이에 따라 과거사 청산이 독일에서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심지어 나치를 추종하는 극우정당이 부활하는 움직임도 있었다물론 이들이 대중적으로 크게 지지받지는 않았고홀로코스트 보상법이 제정되기도 했으나어디까지나 나치나 개인의 책임으로 축소하는 경향이 있었다이에 따라 집단 책임에 대한 부정과 피해자 의식이 확산되는 역효과도 있었다.

(모사드 관련 서적, 이스라엘이 만든 이 조직은 나치 잔당들을 추적했고, 실제로 재판에 세웠었다.)


(아돌프 아이히만, 유대인 학살의 책임자다. 1942년 유대인 절멸을 결정한 반제회의에서 그는 학살 대상자를 분류했다.)

 

물론 1950년대와 1960년대 초의 경우 유대인 학살에 가담한 개인을 재판에 세우는 일은 있었다그리고 1948년 제1차 중동전쟁으로 탄생한 이스라엘에서 모사드(Mossad)라는 단체가 유대인 학살 가담자를 추적하여 체포하고 처형하는 경우도 있었다대표적으로 1960년에 있던 유대인 학살자 아돌프 아이히만(Adolf Eichmann)의 재판이 그러했다그러나 이러한 일들이 독일 사회 전체에 과거사에 대한 반성을 이끌고 오지는 못했다쉽게 말하자면 나와는 상관없는 일로 치부됐다.

(68혁명, 1968년 베트남 전쟁 반전운동과 더불어 독일도 이 시대적 흐름에 휩싸였다. 서독의 젊은 이들은 새로운 시대에 대한 희망과 더불어, 베트남 전쟁 반대 그리고 과거사 청산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사진에서처럼 젊은이들은 호치민이나 체게바라와 같은 사회주의 인물의 사진을 들고 거리로 나왔었다. 사진은 1968년 2월 서독 서베를린에서 있던 시위다.)


(빌리 브란트 스탬프)

 

그러나 서독일 사회가 전반적으로 나치 과거사 문제가 큰 화제가 되었는데이는 베트남 전쟁 반전운동으로 인한 68혁명의 움직임에 의한 것이었다. 1960년대 미국이 베트남 전쟁에 대규모 군대를 보내면서미국을 포함한 여러 나라에서 반전운동이 확산되었는데이는 서독일 또한 마찬가지였다즉 이런 움직임에서 독일 과거사 문제가 다시 대두된 것이다당시 젊은 세대들이 자신들의 아버지나 할아버지가 관여한 나치 문제에 눈을 뜬 것이고이것이 사회적으로 큰 이슈가 됐다이와 더불어 서독의 빌리 브란트(Willy Brandt) 총리가 이른바 동구정책을 피게 되면서서독 사회가 과거사에 대한 반성과 청산의 길로 나가기 시작했다.

(1970년 폴란드 바르샤바에 있던 게토를 방문한 빌리 브란트, 그는 독일의 과거문제를 반성하는 모습을 동구권에도 각인시켰다. 아이러니 하게도 빌리 브란트 뒤에서 바른자세로 서있는 인물은 동독의 간첩이었다.)


(미국에서 만든 드라마 홀로코스트, 이 드라마 또한 독일인들을 반성하게 만드는 계기를 제공했다.)


(현재도 매스미디어를 통해 보도되는 독일 과거사 문제)

 

68혁명의 움직임과 빌리 브란트 총리의 동구정책을 통해 독일 사회는 과거사 문제를 사회적으로 보다 크게 대면하게 되었다여기서 더 나아가 독일 사회가 홀로코스트 문제를 다시 생각하게 되는 계기가 만들어졌는데아이러니 하게도 1979년 미국에서 만든 드라마 홀로코스트(Holocaust (miniseries) 1979)의 방영이었다이 드라마은 시청률이 각회당 1,000~1,500만에 달했을 정도였다독일 정치학자 피터 리치(peter reiche)는 이 드라마의 방영이 독일 대중이 나치과거와 진정한 대면을 시작한 계기라고 평가했을 정도다그리고 이 드라마를 통해 소위 홀로코스트라는 단어가 유대인 학살의 동의어가 됐다이에 따라 1970년대 후반과 1980년대 초에 현재 우리 사회가 아는 소위 과거사를 반성하는 독일의 모습이 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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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에서 3번째로 큰 영토와 세계 최강의 군사력 그리고 경제력을 가지고 있는 나라 미국은 말 그대로 여러 민족과 인종들이 살고 있는 사회다. 33천만 미국 인구 중 사회의 주류를 차지하는 것은 16~17세기에 건너간 유럽계 백인들 특히 앵글로 색슨 족이지만, 앞서 언급한 것처럼, 상당히 많은 인종과 민족들이 미국 사회를 살아가고 있다. 현재 미국에는 소위 재미교포라고 불리는 이들이 살고 있으며, 대략 240만 명 이상으로 상당히 그 규모가 크다. 이러한 사실을 생각해 보았을 때, 재미교포의 숫자는 결코 적지 않다. 오늘은 한국계 미국인의 역사와 이들의 독립운동사에 대해 얘기해볼까 한다.

 

한국인의 미국 이주 혹은 방문이 정확히 언제부터 시작했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역사적인 기록에서 찾아보면, 1883년 보빙사 자격으로 미국에 건너갔던 근대사상주의자인 유길준이나, 갑신정변 이후 미국으로 건너갔던 서재필 등이 있었다. 서재필의 경우 1894년 미국 시민권을 얻어 자신의 이름을 필립 제이슨(Philip Jaisohn)으로 개명했는데, 그 이후의 행적에서 이승만 못지 않게 상당히 많은 비판을 받기도 한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유길준이나 서재필 등과 같은 사례는 집단 이주는 아니었다.

 

미주지역으로의 한인 이주는 을사조약 체결 3년 전인 1902년에 시작됐다. 즉 대한제국 시절의 일이었다. 19021222일 한인 121명이 인천의 제물포항을 떠나 당시 미국의 식민지이던 하와이로 이주하면서 시작됐다. 을사조약이 체결되던 19057월 미국 정부에 의해 한인의 미주 이민이 금지될 때까지 65회에 걸쳐 7,226명이 이주했는데, 이후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이 되는 이승만 또한 이중 한 사람이었다. 당시 이승만은 초기 개화운동 시기 한성감옥에서 의형제를 맺었던 박용만의 도움을 받아서 하와이에 정착할 수 있었다. 아이러니 하게도 박용만은 이후 이승만에게 제대로 배신당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참으로 씁슬한 일이다.

 

미주지역의 이주가 시작되면서 1903년 하와이 홀놀룰루에서 홍승하 등에 의해 신민회라는 최초의 독립운동 단체가 설립됐다. 이에 따라 혈성단, 자강화, 공진회, 의성회, 부흥회 등 20여 개의 단체들이 조직되기도 했다. 4년 뒤인 19079월 하와이 한인들은 한인합성협회를 창립했으며, 한인합성신보를 발행했다. 1904년 러일전쟁 이후 미주 한인들은 한인 자치기구의 필요성을 절감하여, 안창호 송석준 등과 같은 49인은 1905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이른바 공립협회를 창립하기도 했다. 을사조약 전후로 해서 미주지역 한인들은 하와이에서 미국 본토로도 많이 넘어갔고, 그 이후에는 당시 미국 식민지나 다름없던 쿠바에 정착하는 사람도 있었다.

 

안창호를 중심으로 설립된 공립협회는 미주지역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했고, 조직의 범위를 만주와 연해주 지역으로까지 확장하고자 했다. 이들 중에는 1907년 당시 미국과 일본이 전쟁을 치를거라 생각하고, “이를 기회로 삼아 독립전쟁을 준비해야 한다.”고 주장한 이들도 있었지만, 미국과 일본의 전쟁은 그로부터 34년 뒤인 1941년에 발생했다. 그런 가운데 19083월 샌프란시스코에서 장인환과 전명운 열사가 친일파이자 친미제국주의자인 스티븐스를 처단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들은 결국 재판을 받았다. 스티븐스 처단 사건 이후 공립협회는 합성협회와 통합을 추진하여 19092월 회원 4천 명을 거느린 국민회를 창립했다. 이 국민회는 19102월 대동보국회를 통합하여 19105대한인국민회로 개칭하면서 스스로 해외 한인의 최고기관임을 선포했다.

 

1910829일 일본은 드디어 조선을 합병함으로써 식민지 지배를 본격화 했다. 일본이 조선을 합병한 이후 신한민보는 논설에서 “2천만 국민은 결단코 왜황, 왜노, 왜종에 굴복하는 노예가 되어서는 안된다.”고 밝히면서 독립의 의지를 밝혔다. 그리고 여기엔 박용만이라는 인물이 1911년에 주필로 부임했는데, 그는 무장투쟁을 위한 병력 양성에 힘을 썼다. 무장투쟁론자였던 박용만은 1909년 미국 네브래스카주에 한인 소년병학교를 세워 군인을 양성하고자 했으며, 이 소년병학교는 191213명의 졸업생을 배출한 것을 시작으로 1914년까지 100여 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박용만은 19146월 하와이 오아후에서 대조선국민군단과 사관학교를 창설하여 일본과의 무장투쟁을 준비했었다. 최대 300명이 여기에 참가했다. 하지만 재정 문제와 미일관계 문제로 인해 1917년 박용만의 군단은 문을 닫았다.

 

미국에 정착하여 프린스턴 대학교와 하버드 대학교에서 학위를 수여한 이승만 또한 독립운동을 했다. 그러나 이 독립운동이 이승만 개인의 사욕을 채우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어 많은 이들의 불만을 가지기도 했다. 일단 이승만을 좋아하는 측의 얘기에 따르면 당시 이승만은 교육 사업을 전개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도 상당히 문제가 많았으며, 자세한 내막은 민족문제연구소가 제작한 두 얼굴의 이승만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이 종결된 이후 여운형을 중심으로 세워진 신한청년당은 강대국들의 회의에 맞춰 김규식을 파리에 파견했는데, 이는 3.1 운동의 불씨를 제공했다. 이후 19194월 중국 상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세워졌는데, 임시정부의 초대 총령으로 이승만이 선출됐다.

 

한성정부의 집정관 총재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 초대 총령까지 오른 이승만은 그해 8월 미국의 수도 워싱턴 DC에 구미위원부를 설립했다. 이 구미위원부는 북미주와 하와이, 멕시코 그리고 쿠바 등지의 교민 사회에도 지부가 생겼다. 당시 이승만의 구미위원부는 대한제국 시기 한국과 외교관계를 맺었더 나라들에게 서한을 보내 한국에 새 임시정부가 탄생했다는 사실을 알렸다. 그러나 중국에 있던 임시정부 인사들은 이승만에게 상당히 많은 불만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것은 이승만이 독립운동 자금을 횡령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1921년 이승만이 상해에 왔을 때도 결국 갈등만 심해진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이에 따라 1925년 이승만은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탄핵당했다.

 

1917년 레닌의 러시아 혁명은 전 세계 식민지 해방 운동에 영향을 줬는데, 미주지역 또한 이런 영향을 받았다. 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김영옥의 경우, 친누나 김월나가 사회주의 사상에 상당히 호감과 흥미를 느꼈다고 한다. 이 내용은 아름다운 영웅 김영옥이라는 책에서 확인이 가능하다. 192111월에는 워싱턴D.C에서 태평양회의가 열렸는데 상해 임시정부는 그해 8월 이 회의에 한국의 독립문제를 상정시키기 위한 운동을 전개하기로 하고, 태평양회의 외교후원회를 조직했었다. 이승만, 서재필, 김규식 등을 대표로 파견해 청원서를 전달하고 회의에 직접 참석해 발언하려 했으나, 이 회의는 강대국들의 이권 재조정이 목적이었기에 무시당했다. 1920년대에는 미주 지역 내에서 도산 안창호 세력과 이승만 세력의 갈등이 존재했다. 독립운동 세력 내부에서의 피튀기는 싸움이 있었고, 당연히 여기엔 이승만의 책임이 크다.

 

1930년대 만주사변일 일어나고 유럽에서 파시즘이 급부상하면서 전 세계는 제2차 세계대전을 예고하는 것 같았다. 1937년 중일전쟁 이후 미주 한인들은 다시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대한 지지를 보였다. 여기에는 1932년 이봉창이나 윤봉길이 거둔 독립운동적 성과도 한 몫 했다. 하와이에 있던 국민회와 동지화는 194010연합한인위원회를 조직했다. 이 조직이 1941년 재미한족연합위원회로 바뀐다. 재미한족연합위원회는 이승만을 대표로 선출했는데, 당시 그는 적극적인 반일주의자적인 모습을 보였다. 심지어 일본 내막기라는 책까지 집필했는데, 이런 사실을 보면 정세를 읽는 눈이 띄어났던 것으로 보인다.

 

194112월 일본의 진주만 기습 공격으로 미국이 일본과 전면적인 전쟁을 치르게 되자, 미주지역 내의 독립운동 세력들은 여러 활동을 했다. 우선 친미주의 성향의 이승만과 그 세력들은 미국의 소리라는 단파 방송을 통해 해외 독립운동 세력에게 제2차 세계대전의 전황을 알렸다. 재미한족연합위원회는 로스엔젤레스에서 이른바 맹호대라는 민병대를 설립했고, 병력 규모는 800명 정도였다. 이후 미주지역 독립세력들은 중경 임시정부와 협력하여 미국 OSS 휘하에서 대략 50명 정도를 훈련시켰고, 이들은 캘리포니아 산타 카탈리나 섬에서 군사훈련을 받았다. 미주지역 독립운동을 이런 활동을 하다가 1945815일 해방을 맞이했다.

 

추가적으로 더 첨언하자면, 미국의 식민지였던 쿠바에도 한인 독립운동가들이 있었다. 대표적으로 임천택이 그러했다. 임천택은 쿠바의 3개 지방에 흩어진 한인지방회를 규합해 수도 아바나에 재쿠바 한족단을 만들었고, 1934년부터는 상해 임시정부와도 직접 연락을 주고받으며 독립자금 모금 등 광복운동 후원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그의 독립자금 송금기록은 김구의 백범일지에도 기록돼 있을 정도로 열혈 독립운동가였다. 이후 그는 쿠바에 계속 남았고, 1950년대 피델 카스트로와 체게바라가 주도한 쿠바 혁명에도 참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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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이 베트남 전쟁에 정규군을 파병하던 1965년 쿠데타를 일으켜 남베트남에서 정권을 잡은 인물이 있다그 쿠데타를 일으킨 인물은 남베트남에서 10년간 대통령을 했던응우옌반티에우(Nguyễn Văn Thiệu)였다응우옌반티에우는 1963년 즈엉반민(Dương Văn Minh)주도했던 응오딘지엠(Ngô Ðình Diệm) 암살 쿠데타에 가담했던 인물로 한국의 박정희와 같은 인물이라 할 수 있다박정희가 1950년대 이승만 제거 계획에 참가했던 인물이라는 점과 이후 5.16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인물이라는 점에서 티우랑 매우 흡사하다고 할 수 있다이 시기 티우와 더불어 같이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인물이 있었다그가 바로 남베트남의 수상이자 공군 사령관이었던 응우옌 까오 끼( Nguyễn Cao Kỳ).

 

응우옌 까오 끼는 1930년 9월 8일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지역이었던 하노이에서 태어났다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 한참이던 1949년 응우옌 까오 끼는 18세의 나이로 베트남국(States of Vietnam)에 있는 프랑스측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했다즉 이 기간 동안 프랑스 식민지군으로 복무했고여기서 만난 인물들 중에는 구정 공세 시기 베트콩 용의자를 즉결처분한 응우옌응옥로안(Nguyễn Ngọc Loan)이나 같이 쿠데타에 참여하게 되는 응우옌반티에우 등이 있었다. 1952년부터 디엔비엔푸 전투가 한참이던 1954년까지 끼는 프랑스령 모로코에서 조종사로 훈련받았으며거기서 중위 계급까지 올랐다마이클 매클리어에 따르면 베트남인으로는 최초로 프랑스 조종사가 되었다고 한다아무튼 그 또한 대다수의 남베트남군 군인집단이 그렇듯이 프랑스 식민지 군대에서 복무했었다제네바 회담 이후 베트남으로 귀국하여 즈엉반민 휘하의 남베트남군 공군에서 복무했다.

 

1961년부터는 탄손누트 공항에 있는 공군부대에서 복무했으며소령자리까지 올랐고, CIA와 협력하여 북베트남에 침투시키는 비밀공작을 계획하기도 했었다. 1963년 응우옌반티에우와 더불어 응오딘지엠을 제거하는 쿠데타에도 참가했으며, 1964년에도 즈엉반민 휘하에 놓여 있었다. 1963년 당시 끼는 미국이 가장 신뢰하는 전투기 조종사였다고 마이클 매클리어는 <베트남 10000일의 전쟁>에 언급하기도 했다응오딘지엠 암살 이후 남베트남에서는 군벌들의 쿠데타가 일어났는데, 1965년 끼는 티우와 함께 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장악함으로써 내부 쿠데타를 종결시켰다당시 미국은 1964년 통킹만 사건을 빌미로 남베트남에 지상 병력을 파병했는데끼는 친미파로서 이를 적극지지했다.

 

1965년 6월 19일 티우와 끼는 새로운 정부를 출범시키는 것과 동시에 미국의 맥 조지 번디(McGeorge Bundy)와 맥스웰 테일러(Maxwell D. Taylor) 대사에게 전문을 보냈는데주요 내용은 남베트남 사령관이 타당한 이유로 미군의 지원을 요청할 경우필요하다고 판단되면 어떠한 상황에서도 전투에 투입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마이클 매클리어의 <베트남 10000일의 전쟁>에 따르면 당시 수상이었던 응우옌 까오 끼는 수상임에도 여전히 편대장 시절의 공군 제복을 자랑삼아 입고 다녔으며장식이 하나도 없는 검은색 제복이나 선홍색 작업복에 보라색 스카프를 두른 차림으로 다녔다고 한다당시 남베트남 주둔 미군 총사령관이었던 윌리엄 웨스트모어랜드(William Westmoreland)하고도 성향이 비슷하여 아주 친밀한 관계를 맺었다고 한다그 둘은 사이가 좋았는데 당시 수석 보좌관이던 부이 디엠(Bùi Diễm)은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 했다.

 

한쪽에는 끼 수상과 나(부이 디엠), 그리고 장관 몇 명이 앉았고 반대편에는 테일러 대사웨스트모어랜드 장군이 앉았다매주 이렇게 만나 토의하는 내용은 주로 사이공이나 다낭 항에 도착하는 미군들의 환영 방법이었다.”

 

수상이었던 끼는 아주 반민주주의적인 면모도 아주 강하게 보였다그는 대놓고 사람들이 누구를 영웅으로 생각하느냐고 묻는데나한테 영웅은 딱 하나밖에 없다바로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라고 할 정도로 형편없었다또한 그는 남베트남에서 민주화 시위를 전개하던 불교도들을 탄압하는 데도 거침이 없었다. 1966년 4월 그는 다낭 지역에서 집회를 하는 불교도와 시민들을 진압하기 위해서 4,000명의 남베트남 해병을 파견했고직접 현장에 나가서 진압작전을 지휘했었다이런 과정을 통해서 수천명의 불교도와 시민들을 반정부 시위자 혹은 공산주의자로 몰아 투옥시켰다.

 

또한 그가 집권하던 시기 남베트남의 부정부패는 심하면 더 심해졌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그리고 군대의 무능력도 사라지지 않았다. 1966년만 하더라도 12만 4,000명이아 되는 남베트남 병사들이 탈영했으며사실상 미군의 지상병력으로 남베트남을 유지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그러나 의외로 끼는 현실적인 시각을 가지기도 했었다대표적으로 북베트남과 공산당 그리고 호치민에 대한 입장이 그러했다그는 1965년 <뉴욕 타임스>의 제임스 레스턴과의 인터뷰에서 공산주의자들이 남베트남 정권보다 사회정의와 자주독립에 대한 국민의 열망에 더 가까이 다가서 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베트남 전쟁이 끝난 이후 응우옌 까오 끼는 호치민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했었다.

 

그는 베트남 인민들에게 존경 그 자체였다그는 프랑스는 물론 다른 외침에 대항하는 투쟁에 언제나 앞장섰다내가 어려서 철이 없었을 때대부분의 베트남 사람들은 호치민을 대단한 애국자로 생각했다나도 그를 대단히 칭송했었다.”

 

끼는 1967년 남베트남에서 치러진 대통령 선거에도 참여했었고대통령이 되진 않았으나 남베트남 정권의 부통령으로 복무하며 티우 정권의 핵심으로 남았었다그러던 1971년 대선에 도전하고자 입후보하려 했지만후보사퇴 압력을 받고 물러났다. 1975년 4월 남베트남이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의 공세로 함락될 위기에 놓이자티우와 더불어 미국으로 망명했다혁명군의 탱크가 사이공 대통령궁을 통과하던 4월 30일에 USS 블루리지 호에 올라 미국으로 갔다고 한다미국에 가서는 캘리포니아 웨스트민스터에 정착했고 거기서 대략 28년 동안 술집을 운영했다.

 

그러던 2004년 남베트남 지도부로서는 최초로 통일된 베트남으로 귀환하여 현 베트남 정부와 협력하는 방향을 선택했다이에 따라 그의 부인과 자녀들 또한 귀환했다마지막 여생을 현재 베트남 정부와의 협력 및 화해의 길을 선택했기에적잖은 베트남계 미국인들에게 비난의 대상이 되기도 했었다특히 현 베트남 정부에 대한 미국측의 투자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고 한다그리고 그는 2005년 베트남 전쟁 30주년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하기도 했다.

 

그들(반공주의 성향의 베트남계 미국인들)은 지식도 없고 자존심도 없다

 

여생을 베트남에서 다가 2011년 7월 23일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프 병원에서 호흡 곤란으로 사망했고이후 그의 유해는 캘리포니아주 휘티어에 있는 로즈힐스 불교 묘지에 안치되었다향년 80이었다.

 

응우옌 까오 끼는 분명 프랑스군에 복무한 민족반역자였고존경하는 인물이 히틀러라 할 정도로 몰지각한 인물이었다또한 불교도들을 무자비하게 진압하기도 했다그러나 다른 한편 그는 베트남 전쟁에서 민중이 공산당을 지지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며마음속으로는 현재 베트남의 국부인 호치민을 존경했다또한 남베트남 지도자로선 최초로 통일 베트남에 귀국하여 투자에 힘썼다즉 과거에 대한 청산을 본인 스스로 했다는 점에서 나름 개과천선한 인물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따라서 그런 점에서 상당히 흥미로운 인물이기도 하다.

 

참고문헌

 

베트남 10000일의 전쟁마이클 매클리어유경찬(), 을유문화사, 2002

 

아무도 말하지 않는 미국 현대사 II올리버 스톤 피터 커즈닉(공저), 이광일들녘, 2015

 

https://en.wikipedia.org/wiki/Nguyễn_Cao_K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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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의 역사는 2천년에 걸쳐 중국에 저항한 역사다베트남의 역사를 보면 쯩 자매의 저항부터 1979년 중월전쟁까지 아주 긴 세월에 걸쳐 중국의 침략을 받았는데놀랍게도 중국은 결과적으로 베트남을 완벽히 정복하지 못했었다이는 몽고 제국도 그러했고명나라도 그러했으며청나라 또한 그러했다몽고 제국의 침공이나 명나라의 지배는 수십년에 걸쳐 이루어 졌지만청나라의 침략은 제법 짧았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그러나 중요한건 베트남 민족이 청나라의 침공을 막아냈다는 사실이다.

(응우옌 후에 동상, 현재 베트남에서 청나라의 침략을 무찌른 명장으로 평가받고 있다.)

 

청나라가 베트남과 전쟁을 치른 것은 프랑스에서 프랑스 혁명(French Revolution)이 일어나던 시점이었다당시 베트남에서는 떠이선(Tây Sơn)의 반란이 일어나서 내부에서의 세력 다툼이 있었다이 과정에서 베트남 역사에 명성을 떨치는 한 인물이 등장하는데 그가 바로 응우옌후에(Nguyễn Huệ)였다응우옌후에는 자신의 형제인 응우옌반냑과 응우옌반루와 함께 이 반란을 주도했었고베트남 내에서 세력을 확장했다.

(떠이선 3형제)

 

1784년에는 300척의 함선을 동원한 태국군 3만 명이 캄보디아 땅을 거쳐 베트남 남서부 해안지대에 상륙했었는데소아이뭇 전투(Battle of Rạch Gầm-Xoài Mút)에서 태국군을 섬멸하는 활약을 펼쳤다. 1785년 1월 20일 태국군에게 휴전을 요청하였으나이에 응하지 않았던 태국군은 떠이산군을 섬멸하려 했으나도리어 자신들이 떠이선군에게 패전했다베트남측 기록에 따르면 여기서 태국으로 돌아간 병사는 3천 명도 안된다고 한다.

 

그 이후 기세를 몰아 응우옌후에는 응우옌쭈어을 멸하고 북진하여 1786년 7월에는 수도 탕롱(Thăng Long, 현재의 하노이)를 접수했다이로써 응우옌후에는 베트남의 왕이 되었다당시 베트남은 후레 왕조였는데그 후레 왕조의 마지막 왕은 청나라로 달아나 구원을 요청했다이에 따라 청나라의 양광즉 광동성과 광서성 총독이었던 손사의는 황제에게 본래 안남은 우리의 옛 영토이니 레 왕조의 권위를 회복시켜 주고 나중에 병력을 보내 이를 지킨다면 안남을 또다시 취할 수 있을 것입니다.”라는 상소문을 올렸고청나라는 29만 명이나 되는 대군을 손사의의 지휘 아래 베트남을 침략했다.

(청나라의 베트남 침공, 1788년 청나라는 베트남을 점령하기 위해 20만이 넘는 대군을 동원했다.)

 

베트남을 침공한 청나라군은 광서성과 운남성에서 두 갈래로 출발했고, 1788년 11월에 수도 탕롱에 입성했다청나라군이 탕롱에 입성할 때까지의 군사적 저항은 거의 없었다당시 탕롱을 지키던 떠이선군은 급히 철수해 타잉화(Thanh Hóa)에 진을 치고 퀴논에 상황을 알렸다이 소식을 들은 웅우옌후에는 청나라의 출병이 레 황제 복위가 아닌 베트남 지배에 있다 생각했다따라서 그는 청나라와 일전을 벌이기 위해그해 11월 황제의 자리에 오르고 연호를 꽝쭝으로 정했으며직접 10만의 수륙 양군과 200마리의 코끼리 부대를 이끌고 북진했다아이러니 하게도 응우옌후에는 청나라군에 맞서 전격전을 시도했다. 1789년 1월 양국의 대명절인 구정을 이용했다.

(응우옌 후에가 지휘한 전격전을 표현한 인형)

 

1789년 1월 5일 새벽에 떠이선군이 기습을 가하자 청나라군은 대혼란에 빠졌고지휘관 손사의는 말을 타고 간신히 북쪽으로 도망쳤다응우옌후에는 먼저 탕롱으로부터 남쪽으로 90km 떨어진 닌빈에서 후레 왕조의 급조된 군대를 일거에 격파했고청의 주력군이 주둔 중이던 탕롱으로 신속히 이동했다그리고 1월 5일 밤에 탕롱의 외곽 방어거점이던 하호이와 응옥호이 요새를 점형하고다음날 정오 탕롱에 입성했다즉 여기서 청나라군이 대패한 것이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손사의가 도망을 치자 운남성 일대에서 주둔 중이던 청나라 군대는 이 소식을 듣고 본국으로 철수했다이렇게 해서 응우옌후에는 불과 12일 만에 청나라를 상대로 대승을 거두었다이렇게 끝난 것이 바로 베트남의 대청항쟁이었다이후 응우옌후에는 청나라에게 낮은 자세를 보였지만청나라는 패배했다는 사실에 굴욕을 느끼고 있었다청 조정은 “50만 대군을 동원해 베트남을 평정하겠다고 엄포를 놓았지만 막상 실현하지는 않았다.” 결국 청나라는 웅우옌후에를 안남국왕으로 책봉하고 더 이상의 침략을 단념하기에 이르렀다.

(베트남 하노이에 있는 동다 공원)

 

이렇게 해서 응우옌후에의 대청항쟁은 베트남 저항의 역사에 자리매김했다. 1964년 베트남 전쟁이 격화되던 시점에 보 응우옌 잡 장군은 디엔비엔푸 전투 승전 10주년 즈음하여 디엔비엔푸 대첩과 동춘 승리의 궁극적 의의에서 다음과 같은 말로 끝을 맺는다그 글을 인용하며 마치겠다.

 

바익당

 

치랑(Chi Lang)

 

동다(Dong Da, Battle of Ngọc Hồi-Đống Đa)

 

디엔비엔푸(Dien Bien Phu)

 

우리는 이제 위대한 시대에 살고 있다네.

 

미래는 우리의 것일세.”

 

참고문헌

 

새로 쓴 베트남의 역사유인선이산, 2002

 

천년전쟁오정환종문화사, 2017


베트남의 역사유인선이산,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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