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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왜 지금도 호찌민인가 ㅣ 중국관행 연구총서 18
후루타 모토오 지음, 이정희 옮김, 인천대 중국학술원 중국·화교문화연구소 기획 / 학고방 / 2021년 6월
평점 :
베트남을 여행가면 어디에서든 쉽게 볼 수 있는 한 인물의 초상화와 동상, 사진, 공산당 측의 선전 포스터 등을 볼 수 있다. 그는 19세기 후반에 태어나 80노인이 되기까지 평생을 투쟁으로 살아온 인물이었으며, 베트남 인민들 대다수가 존경했던 인물이었다. 그가 바로 호치민(Ho Chi Minh)이다. 1969년 9월 2일에 79세의 나이로 서거한 그는 현재까지도 베트남의 남녀노소 어른, 아이 할 거 없이 깊은 존경의 대상이다. 대다수의 베트남인들은 그를 조국 베트남의 국부로 생각하고 있고, 깊은 존경을 표하고 있다. 비록 호치민의 유언과는 거리가 있는 부분이지만, 1945년 그가 베트남의 독립을 선포했던 바딘광장에는 호치민묘(Ho Chi Minh Mausoleum)가 자리 잡고 있으며, 그의 시신이 보존되어 있다.
일각에서는 이에 대해 우상숭배라고 비판하기도 한다. 물론 이런 비판을 피하기는 다소 힘들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것은 현재까지도 베트남인들이 호치민을 그만큼 잊고 싶지 않는다는 의미가 되기도 한다. 이런 비슷한 문제는 현재 러시아의 수도 모스크바에 있는 블라디미르 레닌(Vladimir Lenin) 문제와 다소 겹치는 부분이 있을 것이다. 레닌이나 호치민묘에 대한 찬반과는 별개로 나 또한 러시아와 베트남 여행을 갔을 당시 레닌묘와 호치민묘를 관람했었다. 사회주의자를 자처하는 나로서는 이들에 대한 존경심이 너무 강했던 나머지 고개 숙여 진심으로 인사드렸을 뿐이었다.
호치민은 20세기 세계사와 혁명사에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무엇보다 세계 최강의 제국주의 국가인 프랑스와 미국의 침략을 무찌르고 조국의 통일을 이룩한 인물이었다. 특히나 베트남 전쟁에서의 미국의 침략행위와 잔학성에 맞서 투쟁하는 투사로서의 이미지가 서방사회에 크게 각인된 인물이었다.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국과 서유럽 그리고 일본 등 자본주의 진영에서 반전운동이 일어났었는데, 당시 젊은이들은 호치민과 체게바라의 초상화를 들고 “호! 호! 호치민! 체! 체! 체게바라!”를 외치며 사회운동을 전개했다. 따라서 호치민은 이른바 68혁명(68 Revolution)의 상징이었다. 이런 점을 생각해보았을 때, 호치민은 세계사적으로도 중요한 인물이었다.
이 책은 베트남 역사를 전공한 학자이자, 베트남국가대학 하노이교 일월대학 총장인 후루타 모토오 교수가 1996년에 집필한 『호치민, 민족해방과 도이모이』를 번역한 책이다. 저자 후루타 모토오 교수는 소위 호치민 사후 그를 계승한 후계자들이 어떻게 해서 호치민의 사상을 계승했고, 이것을 도이모이라는 과정에서 해냈는지를 분석했다. 사실 이런 부분에서 개인적으로 많은 궁금증들이 존재했다. 무엇보다 호치민이라는 인물이 현재 도이모이 과정에서 태어난 베트남 세대들에게 어떻게 해서 좋게 인식되는지가 가장 궁금했다. 예를 들면 중국의 지도자 마오쩌둥의 경우 대체로 젊은이들에게 나쁜 평가를 받지는 않지만, 문화대혁명에 대한 비판은 중국 내부에서도 결코 약하지 않다.
그에 반해 호치민에 대한 국민적 비판은 사실상 없는 수준에 가깝다. 굳이 찾자면 호치민을 강력하게 비판(사실상 근거 없는 비난에 가까운)하는 존재는 베트남 전쟁 이후 배를 타고 미국이나 호주 등으로 망명한 이들밖에 없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이 망명자들이 하는 호치민에 대한 비판은 건전한 비판이 아닌 근거 없는 비난과 조롱에 가까운 수준이다. 그리고 목적이라는 부분에서도 상당히 불건전하다고 할 수 있는데, 이들이 호치민을 비난하는 이유는 패망한 남베트남에 대한 영혼 없는 옹호를 하기 위한 목적에 있기 때문이다. 즉 이들의 호치민 비난 및 조롱은 신념화된 뒤틀린 반공주의적 말로에서 비롯된 것이다. 마치 쿠바의 반카스트로주의자들이 쿠바에 대해 흑색선전을 하는 것과 똑같다고 볼 수 있다.
학계에서 호치민에 대한 비판으로 가장 많이 드는 사례를 굳이 뽑자면 토지개혁(Land Reform)의 문제일 것이다. 사실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시기였던 1953년부터 베트민은 토지개혁을 단행하기 위한 준비를 했고, 1954년부터 1956년까지 토지개혁을 실시했다. 근데 문제는 이 과정에서 다소 억울한 희생자가 나왔다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대략 2,500명에서 15,000명이나 되는 사람이 처형당했는데, 이들 중에는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시기 베트민에 협력했던 지주들이나, 혁명투쟁 가담자들도 있었다. 즉 이런 부분에 대해 호치민의 실책을 묻기도 한다.
그러나 이 부분에 있어 호치민에 대해 비판만 하는 것은 정당한 평가가 아니라 생각한다. 왜냐하면 당시 호치민은 당 내에서 강도 높은 자아비판과 피해자들에 대한 보상을 실행했다. 또한 토지개혁 책임자였던 쯔엉찐(Trường Chinh) 해임함으로써 민심을 수습했고, 억울한 피해자들의 재산도 일정부분 돌려받는 조치가 베트남에서 실행됐다. 또한 호치민과 공산당이 실행한 토지개혁은 성공적이었다. 이 토지개혁을 통해 새로운 계층들이 혜택을 보았고, 더 이상의 토지문제가 최소한 북부지역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이를 통해 식량문제도 해결되어 적어도 미국의 살인적인 폭격이전까지 먹고사는 문제가 상당히 해결됐다. 따라서 이러한 부분을 생각해 보았을 때, 오히려 토지개혁을 통해 호치민이라는 인물이 인격적인 측면에서 지도자적인 측면에서 훌륭한 자질은 갖춘 인물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고 생각한다. 토지개혁 당시 호치민이 했던 발언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우리에게는 민주가 빠져 있어서 타인의 의견을 듣는 것이 적고, 현실을 보는 것이 적었다. 이렇게 폭풍이 불고 있는 때 나는 책임 질 각오가 되어 있다. 모든 중앙위원은 이처럼 타인의 의견을 듣고 현실을 직시하여 책임을 져야만 한다.”
출처: 베트남, 왜 지금도 호찌민인가 p.159
전반적인 그의 인생사를 따져 보았을 때, 호치민이라는 인물은 상당히 호감이 생기는 인물이다. 그의 인품이나 부패하지 않은 청렴함 그리고 혁명투사로서의 이미지는 충분히 존경받을 만하고, 나 또한 그런 점을 잘 알고 있기에 호치민을 존경한다. 이번에도 이 책을 읽으며, 호치민의 인생을 통해 그의 감동적인 삶이 다시 한 번 깊게 다가왔다. 젊은 시절부터 독립운동의 길을 걸었던 그의 생애는 한국 근현대사에 자주 등장하는 독립운동가들의 길과 상당히 비슷하다. 하지만 가장 다른 점은 호치민이 성취한 것에 있다.
호치민은 1945년 일제가 패망하는 시점에서 총봉기를 일으켜 베트남 전국을 단기간에 장악하고 베트남민주공화국을 선포했다. 또한 프랑스의 침략에 맞서 독립투쟁을 벌였으며,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영광스러운 승리를 쟁취했다. 비록 그는 1969년에 사망했지만 그의 후계자들은 미제국주의와의 전쟁에서 침략자들을 축출하고 통일을 이룩했다. 나는 이러한 점에서 호치민이라는 혁명가의 위대함을 느끼게 되는 한편, 우리 역사에는 그 정도로 승리한 독립운동사가 없다는 점이 매우 안타깝게 느껴진다.
호치민의 또 다른 매력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의 그의 행보에도 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수많은 동남아시아의 독립운동가들이 일본이 태평양 전쟁을 일으키자, 일본에 협력하는 길을 선택했었다. 버마의 아웅산 인도네시아의 수카르노 등이 대표적인 예시다. 물론 이들도 나중에 일본 제국주의의 잔학성을 알고 이에 저항하여 독립을 쟁취하지만, 베트남의 호치민은 일본이 베트남을 점령한 시점부터 항불항일투쟁을 외치며 전개했다. 1941년 5월에 그가 창설한 베트남독립동맹 즉 베트민도 항불항일투쟁을 목적으로 창설됐다. 1955년 남베트남의 대통령이 되는 응오딘지엠이 당시 일본 제국주의에 협력하는 길을 걸었다는 점에서 호치민은 상당히 현명한 지도자였다.
호치민의 후계자들이 그를 얼만큼 잘 계승했는지는 많은 논쟁과 논란거리가 있다고 할 수 있다. 1975년 미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이후 베트남은 많이 어려웠다. 이들의 반미투쟁은 혁명사적인 입장에서 위대한 업적을 남겼지만, 그 이후의 대안을 제시하는 데는 성과가 별로 없었다. 거기다 1978년 캄보디아 폴포트의 선제공격으로 시작된 베트남-캄보디아 전쟁은 제3차 인도차이나 전쟁으로 확산되어 베트남은 미국과 손을잡은 캄보디아와 중국에 맞서 전쟁을 치러야 했다. 캄보디아에 대다수의 병력을 진격시켜 폴포트 정권을 전복시킨 것은 분명히 올바른 명분이 있었다. 그러나 이는 국제적인 고립을 자초하기도 했다. 거기다 통일 이후 공산당 정책에 대한 남부인민의 반발도 심했다. 이에 따라 베트남은 1986년 ‘쇄신’이라고 하는 정책을 발표했고, 그것이 바로 도이모이(Đổi mới)였다.
도이모이 정책은 경제적으로 많은 부를 축적하고, 국제적인 고립을 타개하며, 지금까지 경제성장의 원천이 되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 과거 소련 사회와 비슷한 문제를 앉게 되기도 했다. 빈부격차와 부정부패 문제는 과거보다 더 증가했고, 과거에 미약하지만 유지했던 무상의료나 무상교육 시스템이 붕괴됐다. 쉽게 말해 자본주의가 들어오면서 이러한 문제점들이 사회 내부로 표출되었다는 점이다. 물론 이 과정을 통해 베트남은 호치민 사상이라는 하나의 이데올로기적인 측면을 강조할 수 있게 되기도 했다. 현명하게도 베트남 공산당은 현재도 자아비판과 당내의 민주주의만큼은 아주 잘 유지하고 있다. 오히려 이런 점은 1970,80년대 한국보다 더 민주주의적이라 할 수 있다. 이 점만큼은 나는 베트남이 호치민의 유지를 잘 받들었다고 생각한다.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이 책은 25년 전 후루타 모토오 교수가 쓴 『호치민, 민족해방과 도이모이』를 번역한 책이다. 현재 베트남 사회에서 호치민 정신이 강조되고 있는 한편, 이 책에 대한 인기도 결코 적지 않은 것 같다. 물론 저자의 서문에 나온 설명과 같이, 역사학계는 호치민에 대한 또 다른 사실을 밝혀내기도 했다. 책에서는 언급되지 않지만, 대표적으로 2018년에 공개된, 프랑스 경찰 당국의 문서다. 이 문서를 통해 호치민이 프랑스 파리에 있을 당시 대한민국임시정부와 깊게 교류한 사실이 밝혀졌다. 따라서 이런 최신의 연구를 담지 못했지만, 저자의 표현대로 이 책을 통해 호치민 사상이 어떻게 베트남에서 수용되었는지를 알기에는 부족하지 않을 것이다. 호치민의 사상과 정신을 통해 앞으로 베트남이 어떻게 나아갈지는 베트남에게 달렸을 것이다. 나 또한 베트남의 국부 호치민을 존경하는 한 사람으로서 좋은 방향으로 갈거라 믿고 있다. 마지막으로 내 생각과 거의 비슷한 저자 후루타 모토오 교수의 발언을 인용하며 마치겠다.
“필자는 호찌민을 인류사적 시점에서 볼 때 20세기의 위인이라고 단언하는 데 조금도 주저하지 않지만, 호가 20세기의 대표적인 대중운동인 민족해방운동의 기수였다는 것은 호가 베트남을 탄생하게 한 민족과 끊으려야 끊을 수 없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호찌민 주석은 영원히 우리들의 사업 속에 살아있다.’ 이 말은‘베트남 공산당 만세’나 ‘베트남사회주의공화국 만세’라는 말보다도 베트남인들의 심금을 울리는 표현이다. 호찌민의 평가가 베트남의 발자취와 한 몸이라고 한다면, 필자는 이 말이 베트남인들의 사상을 제약하는 것이 아니라 21세기의 인류적 과제를 향해 확대되는 방향으로 작용하는 것, 바꿔 말하면 호찌민의 이름에 의해 호찌민을 넘어서려는 시도를 정당화하는 방향이 생성되기를 염원한다.”
출처: 베트남, 왜 지금도 호찌민인가 p.206~2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