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빅 쇼트(The Big Short)’로 유명한 감독 아담 맥케이(Adam McKay)는 2018년 딕 체니(Dick Cheney)의 생애를 다룬 영화 ‘바이스(Vice)’를 제작했다. 영화 바이스는 2001년 오사마 빈라덴의 9.11 테러부터 시작한다. 이슬람 극단주의자의 테러 공격을 받은 미국은 전역에 비상이 걸리고, 백악관의 지도부들 또한 우왕좌왕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러나 영화상에서 아주 침착하게, 이 사건을 대응하며 즐기고 있는 한 인물이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영화의 주인공 딕 체니였다. 영화에 따르면 많은 미국인들이 이 딕 체니라는 인물에 대해 잘 모르고 있고, 그가 어떠한 짓을 저질렀는지 자세히 모른다고 한다. 그렇다면 딕 체니는 어떠한 인생을 살아온 인물일까?
딕 체니는 1941 1월 30일 미국 네브래스카 주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날 당시는 제2차 세계대전이 유럽에서 전개되는 와중이었고, 그의 부모님은 열렬한 프랭클린 루스벨트(FDR)의 지지자였다. 어린 시절 그는 성적이 우수했으며, 정통적인 미국 교육을 받고 성장하였기에, 미국에 대한 애국심과 자부심이 투철했다. 그는 1950년대 미국 와이오밍주 캐스퍼에서 자랐는데, 고등학교 시절 앞으로 아내가 될 여자 린 빈센트 즉 린 체니를 만났다.
앞서 말한바와 같이 성적이 좋았기에 1960년대 초 그 둘은 예일 대학에 진학할 수 있었다. 그러나 대학에 진학하자 체니는 아주 방탕한 생활에 찌들어, 음주운전과 패싸움 등등을 하다가 학교에서 퇴학당하고, 결국 일용직 노동자로 노가다를 뛰게 되었다. 1962년 당시 체니는 아내 린 체니와 사실혼 관계였는데, 부인 린 체니가 그를 아주 강력학세 갱생시켰다. 린 체니의 도움으로 방탕하고 술에 찌들었던 생활에서 벗어난 딕 체니는 와이오밍 대학교에 입학했고, 1964년 미국 국회의사당을 뽑는 보좌관 시험에 합격했다. 여기서 만난인물이 이후에 이라크 전쟁을 같이 계획하게 되는 도널드 럼즈펠드(Donald Rumsfeld)다.
1960년대는 베트남 전쟁이 격해지면서, 적잖은 미국 젊은이들이 징병으로 동남아시아 밀림으로 끌려갔다. 그러나 딕 체니는 대학 진학생에 이미 1965년 정식 결혼까지 한 상태였기에, 징집을 보류 받을 수 있었고, 전쟁에 참가하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러나 당시 미국에서 유행하던 반전운동이나 기존 보수주의에 대항한 히피(Hippie)에 대해선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이들을 비난하는 입장에 서 있었다. 이후 위스콘신 대학교에 들어가 박사과정을 밟게 된 체니는 도널드 럼즈펠드 밑에 있으며, 닉슨 정부 측근들과 인맥을 맺기 시작했다. 또한 이 과정에서 1970년 미국의 캄보디아 침공을 지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공화당 측에 있으면서 활동한 딕 체니는 1976년 카터가 당선된 이후 잠시나마 정치인생에서 정체기를 맞게 되는데, 1978년 와이오밍주 선거에 도전했다. 다만 젊은 나이에 심근경색이 와서 병원 신세를 졌고, 연설력도 부족하여 밀리는 상황이었는데, 그의 와이프가 선거에 나가 유세를 적극적으로 하면서, 간신히 당선됐다. 이렇게 해사 1988년까지 체니는 무려 6선에 성공하였다. 물론 공화당으로써 보수층 지지자들을 끌어들이는 정책들을 얘기했고, 실행하고자 했다. 체니의 꿈은 1980년 레이건 행정부가 들어서면서부터 다시 꽃을 피게 된다. 1970년대는 베트남 전쟁 종결과 더불어 ‘로 vs 웨이드 사건’, 낙태 문제, 환경 문제 등이 사회적으로 급부상했다. 물론 딕 체니는 이른바 신보수주의자로서 이런 것들에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1980년 공화당의 로널드 레이건이 당선되면서, 딕 체니의 정치 일생은 다시한번 도약을 한다. 로널드 레이건 행정부 하에서 딕 체니는 레이건을 따라 무기 제한법을 막고, 카터 정부 시기의 친환경 정책들을 폐기 시켰으며, 로널드 레이건의 중남미 정책을 적극 옹호하고 지지했다. 당시는 니카라과에서 산디니스타 사회주의 정부가 들어섰는데, 당연히 딕 체니는 로널드 레이건처럼 잔학하고 무자비한 콘트라 반군을 지지했던 것이다. 그는 로널드 레이건 행정부에 있으면서 1987년연 공화당 하원 회의 의장이 되었고, 그의 아내 린 체니 또한 국립인문재단 이사장이 되었다.
조지 부시(아버지 부시)가 대통령이 된 이후에도 국방장관을 하기도 했지만, 1992년 공화당의 빌 클린턴이 당선되자 레즈비언인 딸 메리 체니를 위해서 잠시마나 정치에서 물러나 있기도 했었다. 즉 정계 은퇴를 선언했던 것이다. 물론 그는 기업 하나를 운영하기도 했는데, 석유 대기업인 핼리버튼의 사장이 된 것이다. 이후 그는 이 핼리버튼 CEO로 있으면서 이라크 전쟁에서 엄청난 부를 얻었다.
1990년대 후반 들어 딕 체니를 다시 찾게 된 인물이 하나 있었는데, 그가 바로 아들 부시였다. 아들 부시 또한 딕 체니의 젊은 시절과 상당히 비슷한 막무가내 생활을 했었다. 아들 부시의 러닝메이트 제의를 수락받은 그는 2000년 조지 부시가 당선됨에 따라 부통령이 되었다. 1991년 걸프전쟁 당시 국방장관이었던 그는 2001년 9.11 테러가 일어나자,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고, 이후 이라크를 침공하기 위한 계획을 세운다. 이런 과정에서 국제법과 여러 비윤리 비상식적인 행위들을 벌였으며, 2003년 이라크 전쟁을 일으키게 된다.
당시 딕 체니와 그 일당들이 일으킨 이라크 전쟁의 명분은 이른바 후세인 정부의 신무기였으나, 사실 이것은 거짓말이었고 진정한 목적은 미국의 패권 정립과 석유강탈에 있었다. 2003년 이라크 전쟁 초기는 미국이 수도 바그다드를 함락시키고 후세인을 체포하면서, 빠르게 전게 되었으나, 결국 명분 없는 전쟁이라는 사실과 거짓말이 드러나면서 비판에 직면하게 된다. 이라크 전쟁의 책임으로 부시 임기 말기 민주당 하원의원이 탄핵안까지 내놓는 등 엄청나게 비난받으며 역사상 가장 많이 욕먹은 부통령 중 하나로 남게 되었지만, 탄핵은 부결되었고, 부시정부가 임기를 마칠 때까지 부통령의 자리에 있었다.
2003년 이라크 전쟁을 일으킨 장본인이었던 딕 체니는 2008년 남오세아티아 전쟁(러시아와 그루지아 사이의 전쟁)에서 러시아와의 전쟁을 일으키자고 주장했었다. 거기다 2015년 CNN과의 인터뷰에서 이라크 전쟁을 일으킨 것과 그것이 명분 없는 전쟁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반성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 많은 이들에게 비판받았다. 사실 딕 체니는 남에게 총을 쏘아놓고도 사과하지 않은 인성을 보유한 인물이었는데, 그런 인성을 가진 그가 이라크 전쟁에 대해 진실이 드러났음에도 반성을 하지 않는 것은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가 일으킨 이라크 전쟁으로 60~100만 이상의 민간인이 미군의 폭격으로 학살당했다는 점을 생각해보았을 때, 당연히 비판을 받아야 할 인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