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아프가니스탄 전쟁이 20년 만에 끝나가고 있다현재 아프가니스탄에 있는 미군은 거의 다 철군을 한 상태다사실 미국의 오바마 행정부는 2014년까지 아프가니스탄에서 미군 병력을 철군시키는 것을 목표로 삼았었다그러나 2015 10월 오바마 대통령은 아프가니스탄에서 미군 병력을 철수시키는 것을 중단하겠다고 선언했고아프가니스탄 문제는 결국 트럼프 행정부로 넘어갔다트럼프 행정부 또한 아프가니스탄에서의 철수 및 병력 감축을 추진했으나임기까지 대략 수천 명의 미군병력을 아프가니스탄에 남겨두고이 문제는 다시 민주당의 조 바이든 행정부로 넘어갔다.

(아프가니스탄 칸다하르 위치)

 

이 아프가니스탄 전쟁은 예상보다 오래갔다. 2001년 9.11테러 이후 빈라덴의 알카에다 소탕을 외치며 아프가니스탄을 침략한 미국은 20년 동안 이 전쟁을 치렀다. 2,400명의 미군이 전사했고, 1만 9,000명 이상의 미군이 부상당했으며미국이 세운 아프가니스탄 정부군 또한 2~3만 명이 전사했다미군 다음으로 병력이 많던 영국군 또한 500명이 전사했다정확히 알려진 것은 없으나 게릴라전으로 미군에 맞서 전투를 치렀던 탈레반 또한 최소 4만에서 5만 많게는 10만 가까이가 전사한 것으로 알려졌다정확한 수치는 모르지만민간인 또한 15만 명이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미군 복장을 한 로버트 베일스 하사, 그는 2012년 3월 11일 16명의 아프가니스탄 민간인을 혼자서 학살했다.)

 

아프가니스탄 침공 초기 미군은 압도적인 화력과 병력을 토대로 탈레반의 주요 거점들을 점령하고 장악했다당시 국방부 장관이던 도널드 럼스펠드(올해 고인이 됨)는 아프간 동굴 속 테러리스트 수백 명을 찾아내겠다.”라고 큰소리를 쳤다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미군이 병력을 증강하던 2008이 전쟁은 현재 많은 인기를 끌고 있는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의 아이언맨(Iron Man)이 영웅으로 탄생하는 곳으로 영화에서 등장하기도 했다영화상에서 보면 아이언맨은 미국의 적인 탈레반을 최신식 무기를 장착한 로봇으로 괴멸시킨다심지어 이들이 가진 탱크까지 미사일 한방으로 격파한다. 2008년에 개봉한 영화 아이언맨을 본 이라면 이 장면을 모르지 않을 것이다미국 헐리우드사는 이런 장면을 통해 미국이 침략한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합리화 한 것이라 볼 수 있다.

(로버트 베일스의 사진, 이 사진은 군감옥에 수감중 찍은 사진이다.)

 

그렇다면 이 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가려진 이면은 무엇일까베트남 전쟁 당시 손미 지역과 미케 지역에서 504명의 민간인을 학살했던 미라이 학살(My Lai Massacre)과 비슷한 민간인 학살 사건이 미국-아프가니스탄 전쟁 일어났다미라이 학살에 비하면 학살 규모가 작은 편이지만미국의 폭격과 군사작전으로 죽은 민간인은 상당히 많은 편이다대표적인 민간인 학살 사건 중 하나가 바로 2012년 3월 11일 아프가니스탄에서 일어났던 칸다하르 학살(Kandahar massacre)이다.

(칸다하르 학살 증거인멸 시도 현장, 로버트 베일스 하사는 학살을 저지르고 나서 시신을 불태워 증거 인멸을 시도했다.)

 

당시 미 육군 제2보병사단 소속의 로버트 베일스(Robert Bales) 하사는 2012년 3월 11일 새벽 3시 경에 M203유탄 발사기를 장착한 M4 소총과 M9권총으로 무장했다야간투시경까지 착용한 로버트 하사는 중무장 상태로 부대를 빠져나와 부대에서 약 1.6km 떨어진 발란디와 알코자이 마을의 농가 세 곳을 습격하여민간인들을 학살했다새벽에 급습을 받은 마을 주민들은 로버트 하사에게 끌려나와 사살 당했으며총 16명의 민간인이 로버트 하사의 총탄에 살해됐다로버트 하사는 자신이 죽인 민간인들의 시체를 구석에 몰아넣고 불을 질러 증거인멸까지 시도했다한 마디로 학살을 저질러 놓고그 증거까지 없애려는 치밀함을 보여준 것이다.

(아프가니스탄 하미드 카르자이 대통령과 통화중인 버락 오바마, 이 사건은 당시 미국 대통령이던 오바마가 직접 사과해야 하는 상황까지 갔었다.)

 

그러나 이 학살에서 살아남은 일부 주민들은 아프가니스탄 당국과 미군에게 알렸고로버트 하사 또한 복귀하여 자신이 저지른 학살을 자수했다이후 로버트는 쿠웨이트를 거쳐 본국으로 이송됐고영창에 수감당한 상태에서 군사재판을 받게 됐다당시 아프가니스탄 정부는 미국 정부와 미군에게 강력하게 항의했으며대통령인 오바마 또한 책임자에 대한 엄중 처벌을 요구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프가니스탄 내부에서는 시민들이 반미 시위를 벌이며 미군들에게 돌을 던질 정도로 사태가 심각해졌다이 소식을 들은 탈레반 또한 미군에게 보복 혹은 테러를 감행하겠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2012년 12월 재판에선 검찰은 사형을 구형했으나, 2013년 6월 로버트 하사 본인이 유죄를 인정하면서 사형은 불가능해졌다대신 그는 무기징역이 확정되어 남은 생애를 교도소에게 보내게 됐으며지금도 균교도소에서 복역 중이다현재 아프가니스탄 정부는 과거 남베트남의 절차를 밟고 있다미군은 사실상 거의 다 철수한 상태고탈레반이 현재 아프가니스탄 영토 70%를 접수한 상황이다뿐만 아니라 미국과 NATO에 협력했던 인사들을 대상으로 보복도 벌어지고 있다탈레반 세력의 잔혹함과는 별개로 현재 이들이 승기를 잡고 있는 것은 그만큼 아프가니스탄 내에 반미감정이 극심하다는 반증이다아프가니스탄인들의 반미감정이 심해진 이유에는 당연히 이런 민간인 학살 사건도 큰 영향을 주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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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이들이 1991년 소련이 해체된 이후 미국이 냉전에서 승리했다고 주장한다. 물론 소련의 해체를 생각해 보았을 때, 이는 틀린 말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미국이 냉전에서 승리했다.”라는 식의 논리는 사회주의는 실패했고 자본주의가 승리했다.”다는 미국 우익 중심적인 시각에 매몰되기 쉬운 듯하다. 공산주의 이론의 아버지인 칼 마르크스(Karl Marx)는 당시 산업혁명을 통해 확산된 자본주의에 대해 아주 강도 높은 비판을 했었다. 자본주의에 대한 마르크스의 비판은 제국주의에 대한 비판과도 연결이 된다.

 

당시 마르크스가 했던 주장을 쉽게 말하자면 바로 이렇다. 소수 자본가들의 이익을 위해 작동하는 것이 자본주의인데, 자본주의는 기본적으로 이윤을 창출하기 위해 존재한다. 무산자 계급인 프롤레타리아트들을 착취하고 학대해서라도 자본주의는 이윤이라는 가치를 만들고자 하는데, 여기서 이른바 과잉 생산이라는 현상이 나타난다. 쉽게 말하면 예를 들어 신발이나 양말이 100개만 필요한데 200개 그리고 300개가 생산되어 남아도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잉여생산을 팔아 치우기 위해서 19세기 당시 필요했던 것이 바로 제국주의 팽창을 통한 식민지였고, 영국과 프랑스를 중심으로 한 서구 제국주의 국가들은 이런 자본주의를 토대로 제국주의 팽창에 나섰다. 물론 여기에는 제국주의 국가들끼리의 세력다툼도 있었고, 미국 또한 뒤늦게나마 이 대열에 합류했었다.

 

19세기 말기 미국 또한 식민주의적인 제국주의 국가로 시작했다. 그러나 이러한 제국주의 국가들은 제2차 세계대전이 종결되면서 영향력을 상실한 구제국주의 국가로 전락했고, 이 과정에서 미국이 신제국주의로 급부상했다. 신제국주의 국가인 미국은 소련과의 경쟁을 핑계로 반공주의를 내세우며 자신들의 제국주의적 이익과 야욕아 아주 충실했다. 그리스, 한반도, 베트남, 그 외의 여러 중남미 국가들에서 이런 미국의 제국주의적 행보는 아주 극명하게 드러났었다. 따지고 보면, 냉전은 제국주의 대 사회주의의 대결이었으며, 그런 구도에서 냉전기 여러 분쟁들을 충분히 해석할 수 있다.

 

다시 이야기를 원점으로 돌려 얘기하자면, 마르크스가 지적한 제국주의는 현재 미국이 유지하고 있으며, 2차 세계대전 이후 시작된 미국의 신제국주의는 1991년 냉전이 종결된 이후에도 시퍼렇게 살아있다. 오늘은 21세기 미국의 신제국주의의 사례들을 얘기해볼까 한다.

 

21세기는 20019.11 테러와 함께 시작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실 미국의 신제국주의는 1999년 유고슬라비아 내전 중 하나인 코소보 내전에 개입하여 대량 살상을 벌이며 20세기를 종결시켰지만, 21세기가 시작되기 무섭게 20019월 아프가니스탄을 침략하면서 지금까지도 그 전쟁을 치르고 있다. 또한 2003년에는 후세인 정부가 신무기가 있다는 거짓말을 빌미로 이라크 전쟁을 일으켰으며, 이라크인 60만을 대량 학살했다. 당연히 이라크에는 신무기는 없었으며, 이라크 침공의 진짜 목적은 중동의 석유를 독점하겠다는 제국주의적인 발상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실제로 이라크 전쟁을 일으킨 딕 체니(Dick Cheney)는 자신이 CEO로 있는 헬리버튼 회사를 통해 막대한 자본을 벌어들였다.

 

한반도 문제에서도 미국은 제국주의적인 위선을 보였었다. 북한이 핵무장을 한 이유에는 결정적으로 미국의 군사적 위협이 있었으며, 2003년 미국의 이라크 침공은 북한이 핵실험을 강행하게 되는 가장 큰 요인이었다. 트럼프가 북미회담을 하기 전까지 적어도 21세기 당시 미국 대통령이었던 조지 부시나 버락 오바마 등은 북한의 지도자와 진지하게 대화를 하려는 노력조차 보이지 않았으며, 오히려 군사적 도발만 앞세웠다. 특히 이런 군사적 도발은 민주당 정권이었던 오바마 정부에서 더 강력하게 표출됐다. 물론 도널드 트럼프 또한 화염과 분노라는 도발적인 언행을 하긴 했으나, 이유가 어찌됐건 북한의 김정은 위원장과 두 번씩이나 만나 최소한 대화하는 노력이라도 보였었다. 트럼프 이전까지의 미국 대통령들은 대화보다는 진지하게 대립과 압도적인 군사적 도발만을 추구했었다. 그리고 이러한 대결적 구도는 엄밀히 따지자면 친미제국주의자인 이승만부터 내려오는 대결주의적인 한반도관에 입각한 성질의 것이었다.

 

베네수엘라 문제 또한 미국은 아주 제국주의적으로 대처했다. 우선 베네수엘라에 우고 차베스를 중심으로 사회주의를 세우려 하자, 미국은 석유가지고 경제적인 장난질을 일삼았으며, 베네수엘라가 사회주의를 하지 못하도록 온갖 추잡한 악행들을 저질러왔다. 심지어 2019년에는 친미주의자 후안 과이도를 내세워 쿠데타를 일으켰으며, 차베스를 이은 마두로 정권을 붕괴시키려 했었다. 실제로 미국은 이런 제국주의적인 개입을 통해 이른바 레짐 체인지를 성공시키기도 했었다. 대표적으로 2011년 리비아의 반카다피 시위가 그러했다. 사실 이 리비아 폭동은 정부군의 힘이 강했지만, 미국은 NATO라는 자신의 제국주의적 군사동맹을 끌어들여, 친서방 폭도들에게 공중지원을 해줬다. 물론 리비아 내전 개입에도 역시 석유를 포함한 미국 기업의 이권이 주된 원인이었다.

 

미국은 현재는 자본주의가 되어버린 러시아와 맞서는 것에도 각을 세우고 있다. 폴란드나 발트삼국 그리고 루마니아 등에다 자신들의 무기들을 배치하는 것은 러시아를 군사적으로 압박하기 위함이다. 또한 미국은 러시아의 심기를 건드리기 위해 반러시아 시위에 개입하기도 했으며, 그 사례가 바로 우크라이나의 유로마이단 사태다. 미국은 의도적으로 친서방 반공주의적인 세력들을 도왔으며, 여기에는 아조프 부대와 같이 대놓고 나치즘을 찬양하는 이들도 있으며, 친나치 협력자인 스테판 반데라를 영웅으로 치켜세우는 이들도 상당수 포함하고 있다. 2019년 홍콩 사태때도 미국이 조슈아 웡과 같은 친서방 인사와 일종에 커넥션을 만든 것 또한 이런 레짐 체인지나 대중정책의 일환이라 봐야한다. 물론 홍콩 시위 자체의 성격은 친서방으로만 해석하긴 힘들다 하더라도 그 세력의 주류인 조슈아 웡과 같은 이들이 지원을 받는 이유에는 미국이 자주하는 레짐 체인지의 목적이 분명히 있다.

 

최근에 쿠바에서 일어난 반정부 시위 또한 미국의 제국주의적 레짐 체인지의 일환이며, 이것은 두말 할 것도 없이 반정부 폭동일 뿐이다. 사회주의 쿠바는 체제 전복의 목적이 아닌 이상 정부 정책에 반대하는 목소리 그 자체를 탄압하지 않는 사회다. 실제로 동성애의 권리가 인정받은 것이나, 쿠바사회에서 동물권 투쟁이 일어났다는 사실에서 사회주의 쿠바 또한 소위 다양성이 나름 보장되는 사회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번에 일어난 반정부 시위는 말 그대로 미국 정부와 플로리다 쪽에 거주하는 친미 반공주의적인 쿠바계 미국인들의 지원을 받아 일어났으며, 쿠바 정부의 훌륭하고 신속한 대처로 사상자 거의 없이 진압됐다. 오히려 쿠바 사회주의를 수호하려는 친정부 시위는 반정부 시위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대규모로 일어나고 있다.

 

미국의 제국주의는 21세기에도 반복되고 있다. 내가 미국을 강력하게 비판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따라서 현재 나는 전적으로 쿠바 정부편이며, 반혁명 폭동의 뿌리를 뽑아야 한다 생각한다. 미국의 제국주의가 무너지기를 바라며, 졸문의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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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빅 쇼트(The Big Short)’로 유명한 감독 아담 맥케이(Adam McKay) 2018년 딕 체니(Dick Cheney)의 생애를 다룬 영화 바이스(Vice)’를 제작했다영화 바이스는 2001년 오사마 빈라덴의 9.11 테러부터 시작한다이슬람 극단주의자의 테러 공격을 받은 미국은 전역에 비상이 걸리고백악관의 지도부들 또한 우왕좌왕하는 모습을 보인다그러나 영화상에서 아주 침착하게이 사건을 대응하며 즐기고 있는 한 인물이 있었는데그것이 바로 영화의 주인공 딕 체니였다영화에 따르면 많은 미국인들이 이 딕 체니라는 인물에 대해 잘 모르고 있고그가 어떠한 짓을 저질렀는지 자세히 모른다고 한다그렇다면 딕 체니는 어떠한 인생을 살아온 인물일까?

 

딕 체니는 1941 1월 30일 미국 네브래스카 주에서 태어났다그가 태어날 당시는 제2차 세계대전이 유럽에서 전개되는 와중이었고그의 부모님은 열렬한 프랭클린 루스벨트(FDR)의 지지자였다어린 시절 그는 성적이 우수했으며정통적인 미국 교육을 받고 성장하였기에미국에 대한 애국심과 자부심이 투철했다그는 1950년대 미국 와이오밍주 캐스퍼에서 자랐는데고등학교 시절 앞으로 아내가 될 여자 린 빈센트 즉 린 체니를 만났다.

 

앞서 말한바와 같이 성적이 좋았기에 1960년대 초 그 둘은 예일 대학에 진학할 수 있었다그러나 대학에 진학하자 체니는 아주 방탕한 생활에 찌들어음주운전과 패싸움 등등을 하다가 학교에서 퇴학당하고결국 일용직 노동자로 노가다를 뛰게 되었다. 1962년 당시 체니는 아내 린 체니와 사실혼 관계였는데부인 린 체니가 그를 아주 강력학세 갱생시켰다린 체니의 도움으로 방탕하고 술에 찌들었던 생활에서 벗어난 딕 체니는 와이오밍 대학교에 입학했고, 1964년 미국 국회의사당을 뽑는 보좌관 시험에 합격했다여기서 만난인물이 이후에 이라크 전쟁을 같이 계획하게 되는 도널드 럼즈펠드(Donald Rumsfeld).

 

1960년대는 베트남 전쟁이 격해지면서적잖은 미국 젊은이들이 징병으로 동남아시아 밀림으로 끌려갔다그러나 딕 체니는 대학 진학생에 이미 1965년 정식 결혼까지 한 상태였기에징집을 보류 받을 수 있었고전쟁에 참가하지 않을 수 있었다그러나 당시 미국에서 유행하던 반전운동이나 기존 보수주의에 대항한 히피(Hippie)에 대해선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이들을 비난하는 입장에 서 있었다이후 위스콘신 대학교에 들어가 박사과정을 밟게 된 체니는 도널드 럼즈펠드 밑에 있으며닉슨 정부 측근들과 인맥을 맺기 시작했다또한 이 과정에서 1970년 미국의 캄보디아 침공을 지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공화당 측에 있으면서 활동한 딕 체니는 1976년 카터가 당선된 이후 잠시나마 정치인생에서 정체기를 맞게 되는데, 1978년 와이오밍주 선거에 도전했다다만 젊은 나이에 심근경색이 와서 병원 신세를 졌고연설력도 부족하여 밀리는 상황이었는데그의 와이프가 선거에 나가 유세를 적극적으로 하면서간신히 당선됐다이렇게 해사 1988년까지 체니는 무려 6선에 성공하였다물론 공화당으로써 보수층 지지자들을 끌어들이는 정책들을 얘기했고실행하고자 했다체니의 꿈은 1980년 레이건 행정부가 들어서면서부터 다시 꽃을 피게 된다. 1970년대는 베트남 전쟁 종결과 더불어 로 vs 웨이드 사건’, 낙태 문제환경 문제 등이 사회적으로 급부상했다물론 딕 체니는 이른바 신보수주의자로서 이런 것들에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1980년 공화당의 로널드 레이건이 당선되면서딕 체니의 정치 일생은 다시한번 도약을 한다로널드 레이건 행정부 하에서 딕 체니는 레이건을 따라 무기 제한법을 막고카터 정부 시기의 친환경 정책들을 폐기 시켰으며로널드 레이건의 중남미 정책을 적극 옹호하고 지지했다당시는 니카라과에서 산디니스타 사회주의 정부가 들어섰는데당연히 딕 체니는 로널드 레이건처럼 잔학하고 무자비한 콘트라 반군을 지지했던 것이다그는 로널드 레이건 행정부에 있으면서 1987년연 공화당 하원 회의 의장이 되었고그의 아내 린 체니 또한 국립인문재단 이사장이 되었다.

 

조지 부시(아버지 부시)가 대통령이 된 이후에도 국방장관을 하기도 했지만, 1992년 공화당의 빌 클린턴이 당선되자 레즈비언인 딸 메리 체니를 위해서 잠시마나 정치에서 물러나 있기도 했었다즉 정계 은퇴를 선언했던 것이다물론 그는 기업 하나를 운영하기도 했는데석유 대기업인 핼리버튼의 사장이 된 것이다이후 그는 이 핼리버튼 CEO로 있으면서 이라크 전쟁에서 엄청난 부를 얻었다.

 

1990년대 후반 들어 딕 체니를 다시 찾게 된 인물이 하나 있었는데그가 바로 아들 부시였다아들 부시 또한 딕 체니의 젊은 시절과 상당히 비슷한 막무가내 생활을 했었다아들 부시의 러닝메이트 제의를 수락받은 그는 2000년 조지 부시가 당선됨에 따라 부통령이 되었다. 1991년 걸프전쟁 당시 국방장관이었던 그는 2001년 9.11 테러가 일어나자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고이후 이라크를 침공하기 위한 계획을 세운다이런 과정에서 국제법과 여러 비윤리 비상식적인 행위들을 벌였으며, 2003년 이라크 전쟁을 일으키게 된다.

 

당시 딕 체니와 그 일당들이 일으킨 이라크 전쟁의 명분은 이른바 후세인 정부의 신무기였으나사실 이것은 거짓말이었고 진정한 목적은 미국의 패권 정립과 석유강탈에 있었다. 2003년 이라크 전쟁 초기는 미국이 수도 바그다드를 함락시키고 후세인을 체포하면서빠르게 전게 되었으나결국 명분 없는 전쟁이라는 사실과 거짓말이 드러나면서 비판에 직면하게 된다이라크 전쟁의 책임으로 부시 임기 말기 민주당 하원의원이 탄핵안까지 내놓는 등 엄청나게 비난받으며 역사상 가장 많이 욕먹은 부통령 중 하나로 남게 되었지만탄핵은 부결되었고부시정부가 임기를 마칠 때까지 부통령의 자리에 있었다.

 

2003년 이라크 전쟁을 일으킨 장본인이었던 딕 체니는 2008년 남오세아티아 전쟁(러시아와 그루지아 사이의 전쟁)에서 러시아와의 전쟁을 일으키자고 주장했었다거기다 2015년 CNN과의 인터뷰에서 이라크 전쟁을 일으킨 것과 그것이 명분 없는 전쟁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반성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 많은 이들에게 비판받았다사실 딕 체니는 남에게 총을 쏘아놓고도 사과하지 않은 인성을 보유한 인물이었는데그런 인성을 가진 그가 이라크 전쟁에 대해 진실이 드러났음에도 반성을 하지 않는 것은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그러나 그가 일으킨 이라크 전쟁으로 60~100만 이상의 민간인이 미군의 폭격으로 학살당했다는 점을 생각해보았을 때당연히 비판을 받아야 할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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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처드 닉슨, 1970년대 초 데탕트 시대를 열었던 그는 베트남 전쟁을 확전했고, 칠레에서 군부 쿠데타를 일으켰다.)

 

1972년 미국 대통령 최초로 중국의 수도 베이징을 방문하여 마오쩌둥 주석과 저우언라이 총리와 회담을 가졌던 리처드 닉슨(Richard Nixon)은 소련의 브레즈네프 총리와도 회담을 가지며 이른바 데탕트 시대를 열어갔다그러나 그의 전임자 린든 B. 존슨(Lindon B. Johnson)이 매듭짓지 못한 동남아시아의 전쟁은 지속되고 있었다물론 그는 전임자와는 다르게 이른바 닉슨 독트린(Nixon Doctrine)이라 하여베트남에서 단계적인 철수를 게시했다그러나 그 과정에서 베트콩을 소탕한다는 목적으로 캄보디아와 라오스를 폭격하고 침략하여 베트남 전쟁(Vietnam War)을 확전하고수십만에 달하는 동남아시아 민간인을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1972년 닉슨은 이른바 데탕트(Détente)를 진행했지만그런 한편 북베트남에 대한 역대급 대규모 폭격을 감행했다이것이 바로 라인배커 작전이었다하노이와 하이퐁을 포함하여 북베트남 전역이 미국 B-52 폭격기의 폭탄세례를 받았다물론 이 최신식 기계가 공격한 곳 대부분은 군사시설과는 전혀 상관없는 곳들이 대다수였다결국 이러한 폭격은 제2의 게르니카 폭격이라는 국제적인 비난에 시달리게 되었고미국에 대한 이미지가 악화되는 영향을 불러왔다특히나 미국의 침략에 맞서 저항하던 북베트남측은 이에대해 강도 높은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다닉슨은 결국 1973년 1월 프랑스의 수도 파리에서 북베트남과 평화협정을 맺고미군을 베트남에서 철수했다. 280만이 참전하고 최대 54만 9,000명이 주둔했던 미국의 베트남 전쟁이 끝나는 순간이었다.

(닉슨의 제국주의 정책을 비판하는 프랑스 좌익성향 단체가 만든 포스터)

 

닉슨이 베트남에서 대량의 학살극을 벌이고 있을 시기 남아메리카 국가중 하나인 칠레에선 세계최초로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그것은 바로 민주적인 선거 절차를 통해 칠레에 사회주의 정권이 수립된 것이다그 정권이 바로 좌파들이 이끄는 살바도르 아옌데 정부였다. 1970년 9월 국민투표를 통해 대통령에 당선된 아옌데는 곧바로 칠레를 변혁시키기 위한 정책을 수립하고실행했다과거 연합과일 회사(United Fruit Company)와 같은 미국의 제국주의적 착취 기업들에 대한 국유화와 각종 생산수단의 국유화가 칠레에서 실행됐다미국 기업이 독점하다시피 한 구리광산 또한 국유화했다.

 

베트남 전쟁에서 패배하가고 있던 닉슨 정부는 곧바로 아옌데 정부에 대한 정치공작을 게시했다사실 미국은 1959년 피델 카스트로와 체게바라가 쿠바에 사회주의 정권을 세웠을 때곧바로 극우파 망명자들을 모아 사회주의 정권을 전복시키려 했다여기에 기본적으로 경제제재도 당연히 단행했다마찬가지로 1970년 아옌데가 정권을 잡자 미국은 경제제재부터 단행했다그리고 CIA를 통해 칠레의 극우파들에게 막대한 정치자금과 흑색선전도 게시했다미국의 이러한 제국주의적 행위는 이들이 최소한의 도덕성도 무참히 어기면서 시행됐다칠레의 어린이들이 먹는 분유에 대한 경제제재를 시행하여칠레 아동들을 영양실조에 실리게 만들었으며이를 통해 아옌데 정권을 몰아내려했다.

(살바도르 아옌데, 1970년 선거를 통해 집권한 그는 칠레 민중을 위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 사회주의를 실현하고자 했다. 그러나 군부 쿠데타로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더 나아가 아옌데를 암살하기 위해 온갖 정치공작을 일삼았고칠레의 기득권 세력을 이용하여 사회주의 정권을 내부에서부터 붕괴시키려 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옌데 정권은 좌파 포퓰리즘적 정책으로 대대적인 지지를 받았고민중들은 우익들의 공작에 맞서 자발적으로 공장의 생산을 증가하고생필품의 사재기를 차단하며우익들의 공작에 맞선 집회와 시위를 주도했다즉 미국의 경제제재와 정치공작에도 아옌데 정권의 지지율이 상승한 것이다.

 

이러고 있는 사이 미국은 1973년 1월 베트남에서 철군하면서 베트남 전쟁에서 완벽히 패배했다뿐만 아니라 대니얼 엘스버그의 펜타곤 페이퍼 유출과 워터게이트 사건도 터져서 닉슨 정부는 국내외적으로 비난에 시달렸다. 1949년 중국이 공산화되었을 당시 우리는 중국을 잃었다.”라는 주장을 하며트루먼 정부를 맹비난했던 그는트루먼 못지않은 혹은 그 이상의 반공주의자였다따라서 그는 아옌데 정부를 전복시킬 계획에 착수했는데그것이 바로 군부 쿠데타였다닉슨 정부는 칠레의 군부 인사인 아우구스토 피노체트(Augusto Pinochet)에게 막대한 자금을 풀어쿠데타를 일으켰다그것이 1973년 9월 11일이었다.

(쿠데타군에게 포위당한 아옌데의 대통령궁)

 

닉슨이 주도한 칠레의 쿠데타는 성공적이었다아옌데는 수도 산티아고의 대통령궁에서 AK-47 소총을 들고 저항하다가 자결했다이렇게 해서 미국의 지원을 받은 피노체트 정권이 칠레에 등장했다이에 따라 좌파 인사들이 무차별적으로 대규모 학살당했고수십만에 달하는 사람들이 고문과 감금 그리고 감옥생활을 해야 했다피노체트 정권은 집권 당일에 3,200명의 민간인을 학살하며 시작했고그의 집권 기간 동안 최소 3만 5,000에서 6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결국 닉슨 정부는 쿠데타라는 아주 부도덕하고 반인륜적인 방법을 통해 칠레에서 사회주의 정권을 전복시켰다그렇다면 왜 닉슨은 이런 짓까지 하며 칠레의 사회주의 정권을 전복시킨 것일까이것은 필자의 개인적인 생각이자 해석이지만얘기하자면 베트남 전쟁에서의 굴욕적인 패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이미 1959년 미국 아래에 있는 식민지 쿠바에서 사회주의 정권이 수립됐고, 1960년대 중남미 국가들에서 좌파 정권이 들어섰다. 1970년 칠레도 마찬가지였다다른 중남미의 좌파정권들은 CIA의 가벼운 정치공작에 제법 손쉽게 전복시킬 수 있었지만칠레는 아니었다즉 칠레가 제2의 쿠바가 될 것이라는 판단이 닉슨에게 있었던 것이다거기다 국내외적으로 비난받고 규탄 받던 베트남 전쟁은 구정 공세를 기점으로 미국의 패배로 이어지고 있었다따라서 이러한 국제적인 맥락 속에서 닉슨은 칠레의 아옌데 정권을 쿠데타로 없애고우익 독재정권을 세운 것이다.

(쿠데타쿤과 교전 중이었던 아옌데 대통령)

 

이런 점에서 자칭 데탕트를 주도했던 미국의 닉슨 정부는 매우 폭력적이고 파시스트적인 수법으로 사회주의 정권을 짓밟았다또한 전임자가 일으킨 베트남 전쟁에서 B-52 폭격기와 같은 최신식 전쟁기계들을 이용하여 무수히 많은 민간인을 대량 학살했다이것이 바로 미국 닉슨 정부가 저지른 또 다른 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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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두라스와 코스타리카 사이에 존재하는 나라 니카라과(Nicaragua)20세기 초 제국주의 국가 미국의 지배를 받았다. 1910년대부터 1933년까지 니카라과에는 미 해병대가 장기주둔했고, 미국의 직간접적인 통치를 받았다. 미국이 니카라과를 통치한 것은 당연히 이 나라의 자원과 노동력을 착취함으로써 기업들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함이었다. 니카라과에서의 미국 폭압적이고 착취에 기반을 둔 통치가 지속되자 당연히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세력들이 생겼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아우구스토 산디노(Augusto Sandino)였다.

 

산디노는 1920년대 미군과 정부군을 상대로 무장투쟁을 벌였다. 1927년에는 이들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으며, 미군 철수를 목표로 투쟁했다. 당연히 미국은 산디노가 이끄는 게릴라군을 토벌하기 위해 전투기까지 동원했으며, 무차별적인 토벌 작전을 벌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산디노는 투쟁을 포기하지 않았다. 1929년 미국에서 경제 대공황이 시작되자, 산디노의 게릴라 조직은 군대에 자원한 농민들 덕분에 세력을 넓힐 수 있었다. 1931년에는 이들의 군대가 6,000명에 이르렀다. 결국 미국은 1933년 니카라과에서 철수했다.

 

그러나 미국은 소모사라는 앞잡이를 이용하여 니카라과를 통치하고자 했고, 1934년 이들은 산디노를 체포하여 처형했다. 그로부터 2년 뒤인 1936년 소모사가 정권을 잡았다. 정권을 잡은 소모사는 3대에 걸쳐 권력을 세습했고 대략 43년간 미국의 지원을 받으며 독재정권을 유지했다. 독재정권 하에서 좌파들은 1961년에 산디노의 정신을 계승하여 이른바 산디니스타 민족해방전선(FSLN)을 조직했다. 산디니스타 민족해방전선은 반정부 무장투쟁을 전개해 나갔으며, 이들의 투쟁은 1970년대에 더 확대되는 양상을 보였다.

 

거기다 1970년대 들어서 교회, 군부, 지주 등 체제 내의 분열과 마나구아 지진으로 인한 산업시설의 파괴, 인명 손실 등으로 인하여 3대를 세습하던 아나스타시오 소모사 데바일레 체제는 위기를 맞이했다. 혁명적 무장투쟁을 해오던 산디니스타 민족해방전선은 1979년 소모사 정권을 몰아내는데 성공했다. 18년간 지속되오던 이들의 투쟁이 성공한 것이다. 니카라과에서 정권을 잡은 산디니스타 민족해방전선은 소모사 정권시기 미국이나 외국 기업들에게 착취받던 기업들과 재산을 모두 국유화했다. 또한 토지개혁을 실행하여 농민들에게 땅을 분배했으며, 은행이나 광산 그리고 니카라과의 천연자원 등도 모두 국유화했다. 또한 문맹퇴치 운동을 벌여 불과 1년 만에 니카라과의 문맹률을 12%까지 감소시켰다.

 

1979년부터 1983년까지 단행된 토지개혁은 대략 7만 명의 농부들과 4,000개의 협동농장에 토지를 분배했다. 산디니스다 정권은 소모사 시절 부족하고 불평등 했던 의료복지를 늘리고자 의료시설을 설립했고, 무상의료 제도를 도입했다. 또한 소모사 독재 정권 하에서 자행된 고문과 학살을 확인하고 이들의 명예를 회복하고, 상처를 치유하고자 했다. 이처럼 1979년에 정권을 잡은 산디니스타 민족해방전선은 미제국주의와 소모사 독재 정권에 억압받고 착취 받던 민중들에게 대대적인 지지를 받았다. 그러나 산디니스타는 곧바로 장벽에 부딪쳤다. 바로 미국의 제국주의적 간섭과 방해공작이었다.

 

1979년 니카라과에 좌파정권이 세워지자 미국은 이 정권을 전복시키기 위해 온갖 자금과 노력을 퍼부었다. 1980년에 탄생한 미국의 로널드 레이건 정권은 이른바 반소·반공의 기치를 내세우며, 중남미에 마르크스-레닌주의가 확산 되는걸 막겠다며, 고문과 암살·방화·학살 등을 포함한 테러행위를 일삼았다. 당연히 미국은 니카라과에서 이른바 반혁명 반동세력인 콘트라(Contra) 반군을 지원했다. 1980년대 이란-콘트라 스캔들에서의 콘트라가 바로 이들이다. 미국의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은 이들을 선발하고 훈련시키기 위한 자금으로 약 2,000만 달러를 지원했다. 미국의 지원을 받은 콘트라 반군의 숫자는 15,000명까지 증강되었으며, 이들은 좌파 정부를 대상으로 테러리즘을 일삼았다.

 

니카라과 콘트라 반군은 최소 3만 명 이상의 민간인을 학살했다. 당시 로널드 레이건이 도덕적으로 동급이라는 찬사를 받았던 콘트라 반군은 고문, 사지 절단, 민간인 학살을 저질렀다. 이들은 테러 전술을 동원해 학교와 병원, 협동조합, 교량, 발전소를 파괴했다. 콘트라 반군은 콘트라에 가담하기를 거부하는 민간인은 총으로 쏘아 죽이거나 칼로 찔러 죽였으며, 용광로에 넣어 끓여 죽이는 만행을 저질렀다. 또한 어린 소녀들을 납치하여 밤낮으로 강간하는 범죄를 저질렀다. 이것이 바로 로널드 레이건이 찬양하던 자유투사 콘트라 반군의 실체였다.

 

콘트라 반군을 통한 테러행위와 미국의 경제제재에 시달리자 니카라과의 경제 상황은 악화되었다. 인플레이션이 치솟고, 국민소득은 1960년대 수준으로 떨어졌다. 거기다 소련의 원조도 줄어들면서 사회주의적인 정책들에 제동이 걸렸다. 결국 사회복지 예산이 축소되고 혁명공약 일부가 폐기되면서 국민들의 지지도도 떨어졌다. 결국 1990년 국제연합과 미주기구 등에서 파견한 선거감시단의 입화하에 실시된 선거에서 패배하여 산디니스타 좌파 정부는 12년 만에 물러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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