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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살바도르 아옌데: 혁명적 민주주의자에 있는 내용으로 작성되었습니다.)

 

1973911일은 칠레에게 있어서 비극의 시작이었다. 1970년 민주적인 선거로 탄생한 살바도르 아옌데의 사회주의 정권은 시작 초기부터 미국으로부터 각종 경제제재와 억압 그리고 CIA가 주도한 노골적인 테러리즘에 휩싸였다. 그래도 아옌데 정권에 대한 민중들의 지지도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을 중심으로 압도적이었고, 2019년 베네수엘라에서 민중들이 마두로 정권을 지지했듯이 칠레에서도 민중들이 아옌데 정권을 수호하고자 했다. 그래서 닉슨이 선택한 것이 바로 군부 쿠데타였다.

(아우구스토 피노체트, 1973년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그는 칠레 역사상 최악의 민간인 학살과 인권 탄압을 저질렀다.)

 

닉슨 대통령은 당시 CIA 국장 리처드 헬름스를 통해 칠레 쿠데타에 1,000만 달러를 지원했다. 당시 화폐 가치로 약 900억 원이나 되는 막대한 자금이었다. 즉 피노체트 세력은 미국으로부터 지원을 받은 비용으로 각종 무기를 구입하여 무장했고, 궁극적으로 1973911일 쿠데타를 일으켰다. 피노체트 휘하의 쿠데타군은 수도 산티아고에 있던 아옌데의 대통령궁을 전투기로 폭격하고 탱크로 포위시킨 뒤, 진압군대를 보냈다. 아옌데와 그의 동지들은 쿠데타 군대에 맞서 총격전을 벌였지만, 결국 아옌데는 칠레 만세! 노동자 만세!”를 외치며 자결은 선택했다.

(쿠데타 군대에게 포위당안 아옌데의 대통령궁)

 

아옌데가 죽고 나서 칠레 역사는 먹구름을 향해 달려 나갔다. 쿠데타를 성공시킨 피노체트와 군부 일당은 점령군 행세를 했다. 칠레 전역에 있는 축구 경기장과 군의 막사, 운동장 및 각종 시설들이 민중을 구금하는 시설로 전락했다. 쿠데타 이후 불과 몇 달 만에 수십만 명의 칠레인이 체포 및 구금됐다. 쿠데타를 성공시킨 당일부터 피노체트 정권은 최소 3,200명에 달하는 민간인을 학살하고 시작했다. 물론 이 수치는 공식적인 것이고 비공식적인 수치는 이것보다 더 높다.

(운동장에 집결한 피노체트의 군대, 피노체트 휘하의 쿠데타군은 정권을 잡은 이후 당일에 3200명을 학살하고 시작했다.)

 

이런 체포, 구금, 처형 과정에서 외국인 색출 작업이 기승을 부렸다. 아옌데 정부가 조직한 게릴라 부대에 외국인이 가담했다는 게 이유였고, 상관의 명령에 불복종한 병사들도 총살됐다. 아옌데 정부와 긴밀한 관계를 맺었던 장교들도 줄줄이 체포돼 고문당했고, 일부는 사살됐다. 아옌데 정부 시기 인민연합 정치를 펼쳤던 칠레 좌파정당이나 좌파정당의 평당원 그리고 노동조합 조합원들도 피노체트 정권에서 탄압받았다. 많은 이들이 살해되거나, 하루아침에 실종됐다. 피노체트가 다스린 군사독재 17년 동안 최소 3만 명에서 6만 명이 이런 식으로 군부 정권에 의해 죽어나갔다. 칠레 전역이 민중들과 좌파들의 피바다로 물들어졌다.

(인민들을 체포하는 피노체트의 군대)

 

이렇게 죽거나 고문당했었던 이들 중에는 어린이 수십 명도 포함됐다. 고문당하거나 수감되는 과정에서 부모가 실종된 수천 명의 아이들이 고스란히 방치됐다. 지방에서는 지주들이 농민들에게 폭력적인 보복을 가했다. 칠레의 마푸체 원주민들도 유린당했다. 수십만 명의 칠레인이 강제 망명길에 올라야 했다. 칠레의 유명한 좌파 시인 파블로 네루다도 민중가수 빅토르 하라도 피노체트 정권 하에서 목숨을 잃었다. 수감당했던 이들은 엠마 왓슨이 출연한 영화 콜로니아에 나온 것처럼 친나치 인사들이 만들어낸 수용소에 수감되기도 했다.

(칠레의 역사 박물관에 있는 피노체트 정권 희생자들의 사진들, 사회운동을 거치며 투쟁해온 칠레는 피노체트 정권 시기 희생된 이들을 잊지 않고자 하고 있다.)

 

이처럼 피노체트 시대가 시작되면서 칠레의 역사는 암흑의 터널에 진입했다. 미국의 지원을 받아 정권을 잡은 피노체트는 서서히 권력을 공고히 해나갔다. 그는 칠레 사회에서 마르스크주의를 박명하기 위한 작업을 본격적으로 착수했다. 교육계에서 좌파 성향의 인사들이 줄줄히 축출됐다. 그리고 그 자리는 군부가 파견한 장교가 메웠다. 반군부 진영을 단합시킬 만한 인물들도 죄다 암살당했다. 노동조합 활동이 극도로 위축됐다. 또한 아옌데가 국유화한 구리산업을 민영화했고, 여타 광업 부문을 외국계 업체에 개방했으며, 칠레의 여러 지하자원을 개인이 소유할 수 있게 됐다. 수입 관세는 낮아졌고, 이로 인해 수입 상품이 물밀 듯이 밀려오면서 칠레의 공장 대부분이 문을 닫게 됐다. 이로 인해 실업과 빈곤율이 급등했고, 임금도 급락했다. 칠레 좌파들이 수십 년에 걸쳐 이뤄낸 사회적 성과가 고스란히 무너져 내렸다. 칠레 노동자의 평균임금이 인민 연합 집권기인 1970년 수준을 회복한 것은 지난 2000년이 되어서였을 정도다.

(사회주의 포스터, 라틴 아메리카 역사를 공부하면 반미주의를 자연스럽게 이해하게 된다. 워낙 미국이 저지른 만행과 폭력이 심하기 때문이다. 피델 카스트로, 아옌데, 체게바라, 차베스 등이 대중들의 지지를 받는 이유를 알기 위해선 미국의 제국주의 역사를 알 필요가 있다.)

 

박정희를 광신적으로 숭배하는 뉴라이트들은 신자유주의를 주장하며 칠레의 피노체트가 민생을 살렸다는 얘기를 종종 하고는 한다. 그러나 이것은 명백한 거짓말이며, 피노체트의 경제성장은 부익부 빈익빈에 입각한 경제 지표의 상승이었을 뿐이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기승을 부리던 202010월 칠레에선 피노체트 헌법이 민중의 힘으로 전면적으로 폐지됐다. 피노체트 또한 1990년에 물러나게 됐다. 이것은 칠레인들이 아옌데 사후 목숨 걸고 민주화 운동을 전개해 나간 투쟁의 결과였다. 2006년 피노체트가 사망했을 당시, 적잖은 칠레인들이 그의 죽음을 환영했다. 영국에서 2012년 마가렛 대처가 죽었을 대처럼 말이다. 칠레의 피노체트 정권은 칠레 역사에 있어서 앞으로도 암흑의 시대로 평가받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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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왜 미국 역사를 비판적으로 봐야 하는가?

 

1776년 독립선언을 통해 탄생하게 된 나라 미국은 19세기와 20세기를 거치면서 세계 최강의 군사, 경제, 정치체제를 소유한 국가로 부상했다. 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 그리고 냉전에서까지 승리를 장식한 미국은 현재 엄연히 전 세계의 국제정세를 이끌어가는 패권국가로 남아있다. 이러한 패권국가의 위치에 있는 미국의 입지를 잘 반영해주는 것처럼, 대부분의 미국인들이 배워온 미국의 역사란 위대한 건국의 아버지들의 정신에 따라 그러한 가치를 실현하고 전 세계에 전파한 자랑스러운 역사 즉 위대한 역사다. 이처럼 미국인들에게 널리 대중화되고 다소 신화화된 미국사는 책 저자의 말대로 미국의 초등학교와 중고등학교 교육에서 강조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역사는 책의 저자 올리버 스톤(Oliver Stone)과 피터 커즈닉(Peter Kuznick)이 주장하는 바와 같이 진실의 극히 일부만을 반영한 역사일 뿐이다. 저명한 역사학자 EH카는 역사란 역사가와 그의 사실들 사이의 지속적인 상호작용의 과정이며, 현재와 과거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이다라고 말했다. EH카가 주장하는 것과 같이 역사는 그러한 상호작용의 과정 속에서 과거와 현재를 끊임없이 이어지는 대화다. 따라서 미국을 제대로 이해하고 알기 위해선 미국의 흑역사인 제국주의의 역사, 인종차별의 역사 그리고 자본가 계급의 착취와 빈부격차의 역사를 알아야 한다는 결론을 도출할 수 있다.

 

앞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많은 미국인들은 대체로 미국의 자랑스러운 역사만 배워왔고, 현재도 배우고 있는 중이다. 그렇기에 네오콘과 같은 세력들이 힘을 얻을 수 있는 것이고, 이른바 우파적 역사 수정주의가 힘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관행은 미국 패권주의에 충실히 이행하는 대한민국 또한 비판 없이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다. 심지어 미국을 광신적으로 숭배하는 이들은 지금까지 미국은 단 한 번도 제국주의 국가인 적이 없다는 역사적 사실에 전혀 부합하지 않는 이야기를 기사로 내보내기 까지 했었다. 심지어 어떤 이들은 광화문에 나와 태극기 성조기를 같이 흔들며 미국 대통령을 향해 절을 하기도 하고, 북폭(北爆)을 강력하게 주장하기도 한다. 이것은 우리가 미국의 역사를 제대로 알지 못한다는 반증이다.

 

사실 이런 현상에 대해 엄밀히 들여다보면 이것은 미국 역사에 대한 총제적인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다. 즉 미국이 제국주의 국가로서 과거에 저질렀던 범죄와 현재 저지르고 있는 범죄행위를 전혀 모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런 무지에서 벗어나기 위해선 미국의 이면을 알아야 한다. 이번에 읽게 된 올리버 스톤의 다큐멘터리이자 저서인 <아무도 말하지 않는 미국 현대사(The Untold History of the United States)>는 지금껏 우리가 얘기하지 않았거나 보려고 하지 않았던 미국의 이면을 가르쳐준다. 아무도 말하지 않는 미국 현대사는 과연 무엇일까?

 

2. 21세기 헬게이트 이라크 전쟁과 오바마 제국

 

21세기는 시작부터 충격과 공포를 미국인들에게 맛보게 해주었다. 알카에다의 수장 오사마 빈라덴이 감행한 9.11 테러는 21세기를 시작하는 상징과도 같은 사건이다. 2001911일 극단적 이슬람주의를 추구했던 빈라덴과 알카에다는 비행기를 납치하여 뉴욕에 있는 세계무역센터 쌍둥이 빌딩과 미국 펜타곤에 테러 공격을 가했다. 특히나 비행기 자폭테러로 인해 당시 쌍둥이 빌딩이 무너졌고, 최소 3,000명 이상이 테러공격으로 희생됐다. 9.11테러가 일어나자 미국은 이에 분노했다. 당시 대통령이던 조지 부시는 곧바로 전쟁준비에 착수했고, 9.11테러로부터 한 달 뒤, 알카에다가 있다는 심증만 가지고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했다.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일으킨 미국은 전쟁 초기 항구적 자유 작전(Operation Enduring Freedom)’을 개시하며 아프가니스탄의 주요도시와 군사거점들을 접수했다. 물론 여기에는 최신식 무기가 동원되었고, 미군의 사상자를 최소화한 반면 아프가니스탄 민간인들의 사망률은 급증했다. 뉴햄프셔대학 마크 해롤드 교수에 따르면 아프가니스탄 전쟁 발발 두 달도 안 되는 기간에 아프가니스탄 민간인이 4,000명 가까이 사망했는데, 이것은 9.11테러로 인한 미국 민간인 사망자 숫자를 상회했다. 전쟁 발발기간 몇 개월 후까지 기간을 늘려 잡으면 질병과 기아 등으로 죽은 사람까지 포함해 아프간 민간인 사망자는 2만 명 정도로 추정될 정도로 민간인 피해가 극심했다. 물론 시작만 좋았을 뿐 미국은 아프가니스탄이라는 전쟁의 수렁 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아프가니스탄에서 전쟁이 계속되는 와중에 미국은 또 다른 희생양을 공략하고 있었다. 그 희생양이 바로 이라크였다. 당시 미국은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 정권이 포악한 독재정권이라는 비판과 주민들이 고통 받고 있다는 주장을 대대적으로 선전했다. 더 나아가 그들은 이라크의 후세인 정권이 신무기를 보유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조지 부시와 부통령 딕 체니, 국방장관 도널드 럼스펠드는 이런 조작극을 아주 치밀하게 계획했고, 결국 20033월 이라크 침공을 감행했다. 수많은 나라들이 미국의 이라크 침공을 반대했다. 많은 나라들이 이 전쟁을 규탄했고, 전쟁 전후로 해서 전 세계 800여 개 도시에서 시위대가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최소 수백만 명의 세계인이 이 전쟁을 반대하는 시위를 진행했다. 심지어 중동에서 문제를 일으키는 국가 이스라엘마저도 전쟁에 참가하지 않았을 정도였다.

 

아프가니스탄 전쟁처럼 이라크 전쟁도 초기에는 미군이 연전연승을 거두었다. 개전 3주 만에 수도 바그다드에 진입했고, 이라크의 지도자 사담 후세인을 체포했다. 마치 1991년 걸프전쟁에서 미국이 이라크군을 상대로 보여줬던 것처럼 미국은 육··공군에서 이라크군을 압도했다. 미군이 일방적으로 압도하는 이 전쟁은 전 세계 텔레비전을 통해 생중계되었다. 또한 미국이 독재자라고 규탄했던 사담 후세인의 동상이 무너지는 것도 생중계가 되었다. 물론 이것은 이라크 전쟁을 계획한 미국이 심리전팀을 동원하여 연출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당시 현장에 나와 있다가 무너진 동상을 짓밟으며 환호하는 이라크 주민들은 사전에 동원된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아프가니스탄 전쟁과 이라크 전쟁은 전쟁 초기에만 승기를 잡았을 뿐 전쟁을 일으킨 미국은 이 두 전쟁의 수렁 속에 빠져들었다. 이것은 전쟁을 일으킨 부시 정권이 끝나고 나서 등장한 오바마 정부에서도 끊임없이 지속되었다. 미국 역사최초로 흑인 대통령이 된 버락 오바마는 진보를 추구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현실은 이와 정반대되는 인물이었다. 그는 미국의 대기업들과 자본가들에게 많은 양보를 했고, 경제위기 상황에서도 부익부 빈익빈 구조를 더 극대화시켰다. 당시 미국 경제상황은 악화되고 있었는데, 이는 2011년 당시 독일 민간 비영리 기구에서 발표한 보고서를 보면 알 수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미국이 얼마나 추락했는지를 보여주는 놀라운 수치가 201110월 독일 최대의 민간 비영리기구 베르텔스만재단(Bertelsmann Stiftung)’이 발표한 보고서 “OECD 회원국의 사회정의 수준 비교(Social Justice in the OECD-How Do the Member States Compare)”에서 드러났다. 보고서는 미국을 31OECD 회원국 중 27위로 평가했다. 미국의 뒤를 잇는 나라는 그리스, 칠레, 터키 정도였다. 보고서는 빈곤 방지, 아동과 노인 빈곤율 소득 불평등, 영유아에 대한 교육비 지출, 건강보험 등을 포함한 여러 요인을 비교 고찰했다. 미국은 전반적인 빈곤율에서 29, 아동 빈곤과 소득 불평등 항목에서 28위를 기록했다. 컬럼비아대학교 아동빈곤연구센터는 아동의 42%가 저소득 가구에서 살고 있다고 보고했다. 이 중 절반은 빈곤선 이하였다 AP통신은 201112월 미국인의 거의 절반이 빈곤 상태이거나 저소득으로 근근이 살아가고 있다고 보도했다. 통계청은 20104,620만 명의 미국인이 빈곤선 이하라고 보고했다. 이는 52년 전 관련 통계를 집계한 이후로 최고치였다.”

 

출처 : 아무도 말하지 않는 미국 현대사 II p.369~370

 

그뿐만 아니라 오바마는 전쟁을 지속했다. 이라크에서는 철수하려는 모습을 보인 반면, 아프가니스탄에서는 오히려 병력을 증강했다. 이에 따라 2010년 아프가니스탄 주둔 미군 병력은 역대 최대치인 10만 명을 돌파했다. 또한 오바마는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에서 드론 공격의 횟수를 늘렸다. <워싱턴 포스트> 보도에 따르면 오바마 재임 첫 3년간 드론 공격으로 1,350~2,250명이 사망했을 정도다. 거기다 오바마 정권 시기 아프가니스탄에서는 이른바 킬팀(kill team) 사건이라 해서 젊은 미군 병사들이 민간인을 죽인 뒤 정당방위처럼 조작한 사건도 있었고, 특히나 드론 공격으로 인해 무수히 많은 민간인이 사망했다. 2011년 리비아 내전에 개입했을 때도 오바마가 보낸 NATO군의 공습으로 죽어나간 민간인들이 대량으로 속출했을 정도다.

 

오바마는 미국이라는 제국을 아주 굳건히 유지했고, 심지어 네오콘들한테 아낌없는 칭찬을 받기도 했다. 어떤 네오콘 학자는 오바마의 대외정책이 네오콘 정권 때하고 달라진 게 없다며 소위 미국의 보수주의자들을 안심시키려고 했었다. 아프가니스탄 전쟁과 이라크 전쟁을 일으킨 게 부시였다면, 그 전쟁을 지속적으로 유지했던 것은 오바마였던 것이다. 어쨌든 오바마가 철수하고자 했던 이라크 전쟁에서 미군 4,500명이 사망하고, 이라크 민간인 60만 명이 사망했다. 20115월 오바마는 9.11테러의 주범 오사마 빈라덴을 파키스탄에서 암살하는데 성공했지만, 이것은 파키스탄 정부의 주권을 무참히 짓밟는 행위였다. 이처럼 오바마 정부 또한 미국을 제국주의의 길로써 이끌었고 욕심 많은 자본가들과 결탁하는 길을 걸었으며, 결국 대외정책에서도 네오콘의 이익에 반대되지 않는 행보를 보였다. 따라서 오바마는 제국을 이끌었다고 할 수 있다.

 

3. 냉전사의 재인식

 

냉전(Cold War)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후부터 1990년 소련이 붕괴직전까지 대략 45년간 지속되었던 시대다. 2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한 미국과 소련은 파시즘에 맞서 형성했던 반파시즘 동맹에서 벗어나 서로가 모든 면에서 경쟁하는 체제에 돌입했고, 이것은 자칫하면 양측의 핵전쟁 위기로 까지 이어지기도 했다.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 때는 미국이 데프콘 2까지 발동하였고, 미국의 케네디와 소련의 흐루쇼프가 합의를 볼 때까지 전 세계는 핵전쟁의 공포에 휩싸였었다.

 

많은 사람들이 냉전시대에 대해 배울 때 보통의 경우 사회주의 국가 소련이 미국보다 더 호전적이고 공격적인 것으로 배웠고, 또 그렇게 아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러한 생각은 과연 역사적인 사실에 가까운 것일까? 이 것은 올리버 스톤의 책을 읽어보면 상당히 과장되고 왜곡된 절반의 역사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우선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갈 무렵 일본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했을 정도로 소련보다 핵무기를 먼저 개발했다. 19467월에는 태평양의 비키니 섬에서 핵실험을 하여 소련에 대한 위협의 강도를 높였다.

 

특히나 1947년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은 이른바 트루먼 독트린(Truman Doctrine)를 발표하면서 그리스 내전에 노골적으로 개입했다. 이들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적으로 인기를 얻는 사회주의를 뿌리 뽑기 위해 그리스에서 전 나치 협력자와 우익들에게 무기와 장비 그리고 고문단을 지원했다. 이탈리아에서 공산당이 승기를 잡자, 이들을 분쇄하기 위해 전 무솔리니 정권 협력자들을 동원하여 정권 전복에 착수했다. 중국 국공내전에서도 인기가 없고 부정부패가 극심한 중국 국민당 정권을 지원했으며, 1차 인도차이나 전쟁에서도 프랑스가 내세운 괴뢰 황제 바오다이를 위해 CIA1,000만 달러를 지원했다. 또한 일제로부터 35년 만에 독립한 한반도 이남에 분단정부를 수립했고, 민중에게 인기 없는 늙은 지도자 이승만을 지원했다.

 

소련의 경우 미국에 비하면 그런 노골적인 개입은 거의 하지 않은 편이었고, 오히려 미국이 소련을 위협했으며 실제로 커티스 르메이는 소련에 대한 핵폭격을 계획하기도 했었다. 미국과 소련의 핵전쟁으로 갈 뻔했던 한국전쟁의 경우, 북한의 김일성이 시작했다는 이유 한 가지 때문에 미군의 반인륜적 범죄는 매우 잊혀졌다. 특히나 미국이 남북한을 가릴 거 없이 투하한 폭탄과 네이팜탄은 최소 100만 이상의 민간인을 죽였다.

 

특히나 냉전에서 미국의 개입이 노골적이었던 것은 베트남 전쟁이었다. 이들은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부터 베트남 문제에 개입했고, 디엔비엔푸 전투 이후에는 남베트남에 응오딘지엠이라는 반공주의자를 내세워 괴뢰정권을 만들었다. 민중의 80%가 항일 항불의 독립운동가 호치민을 지지한다는 것을 알고 이를 막기 위해 벌인 일이었다. 그리고 미국은 1964년 통킹만 사건을 조작하여 베트남 전쟁을 일으켰다. 무차별 융단 폭격과 에이전트 오렌지(Agent Orange)와 같은 고엽제 투하를 함으로써 무수히 많은 민간인들을 죽였다. 로버트 맥나마라에 따르면 베트남 전쟁 기간 동안 미국이 죽인 베트남인은 380만 명이나 됐다. 즉 이들 대다수가 미군의 폭격과 고엽제 투하 그리고 미군의 군사작전에 의해 죽은 것이다. 심지어 1968년 미라이 마을에선 미군 30명이 504명이 민간인을 학살하기도 했다.

 

미국은 중남미에서 사회주의를 막기 위해 온갖 노력을 퍼부었다. 1959년 피델 카스트로와 체게바라가 혁명을 성공시키자 피그스만 침공을 개시했었고, 대규모 병력을 동원한 쿠바 정권 전복 훈련을 개시했으며, 지도자 피델 카스트로에 대한 암살을 끊임없이 시도했다. 미국이 이런 시도를 해서 피델 카스트로가 소련의 흐루쇼프와 협력하여 핵미사일을 배치했던 것이다. 이게 바로 쿠바 미사일 위기의 맥락이다. 또한 미국은 과테말라에 등장한 진보적인 아르벤스 정권을 CIA를 통해 전복시켰고, 1954년 아르벤스 정부가 사퇴하면서 성공했다.

 

미국이 중남미에서 제국주의적 정책을 매우 강력하게 추진했고, 민주주의적 법칙마저 지키지 않았다는 사실은 1970년대 칠레의 사례를 통해 알 수 있다. 1970년 민주적 선거를 통해 당선된 살바도르 아옌데는 사회주의적 정책을 칠레에 적용했다. 그러자 미국은 경제제재를 하는 것은 물론, 사보타주를 통한 테러행위도 서슴지 않았다. 그래도 아옌데 정권이 인기가 떨어지지 않자, 1973911일 쿠데타를 일으켜 아옌데를 사살했다. 쿠데타를 일으킨 피노체트는 미국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수천수만 명의 민간인들을 학살했다. 즉 미국의 지원으로 칠레는 피바다가 되었다.

 

미국에서 진보의 이상이라고 불리는 존F.케네디 대통령은 알려진 것과는 달리 상당히 제국주의적인 정책을 추구했었다. 그는 남베트남의 부패한 응오딘지엠 독재정권을 지원하는데 열정적이었고, 쿠바 사회주의 정권을 전복시키기 위해 엄청난 짓을 저질렀다. 또한 당시의 미국 흑인인권은 여전히 차별적이었으며, 민주주의와 개혁을 말하면서도 억압적인 독재자들을 지원하는데 망설임이 없었다. 책에서는 케네디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는데, 내용을 인용하고자 한다.

 

케네디는 생의 마지막 몇 달간 놀라운 면모를 보여주었다. 심지어 잘못된 판단을 고집해 상황이 심각해진 카스트로의 쿠바에 대해서도 노선 선회를 고려했다. 그러나 베트남에서 철군을 추진하면서도 승리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한 것처럼 쿠바 문제에서도 피델 카스트로에게 화해의 제스처를 보내면서도 CIA 주도의 사보타주 공작을 다시금 재가했다. 카스트로에 대한 케네디의 이중적 태도는 결국 라틴아메리카를 대하는 이중적 태도와 다를 바 없었다. 케네디는 민주주의와 개혁을 말하면서도 억압적인 독재자들을 계속 지원했다. 심지어 19633월에는 과테말라 군사 쿠데타를 지원했다.”

 

출처 : 아무도 말하지 않는 미국 현대사 I p.526

 

4. 로널드 레이건의 실체

 

냉전시기 미국과 경쟁했던 나라 소련은 1970년대 중후반이 되면서 경제 사정이 점차 나빠졌다. 특히나 1980년대 중반에 들어선 1947년에 폐지했던 배급제를 다시 실행하기도 했을 정도였다. 소련이 아프가니스탄 침공으로 고전하며 경제적으로 위태로울 시기 미국에는 헐리우드 영화배우 출신인 정치인이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그가 바로 로널드 레이건(Ronald Reagan)이었다. 미국이나 한국 사람들 중에는 로널드 레이건을 미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대통령 가운데 한 사람으로 치켜세우는 이들이 있다. 그렇다면 로널드 레이건은 과연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해 싸운 영웅적 전사였을까?

 

이에 대해 결론부터 말하자면 로널드 레이건은 전혀 그렇지 않은 인물이었다. 그의 전 정권인 지미 카터정부가 닉슨 정부에서 형성된 데탕트를 추구하며, 대외적인 지원을 제국주의적으로 했던 것에 반에 로널드 레이건은 보다 더 노골적이었다. 특히나 그의 극우 반공주의적 도그마는 중남미에서 잘 드러났다. 1979년 니카라과의 산디니스타 민족해방전선은 43년간 잔인하고 부패한 독재통치를 해온 아나스타시오 소모사를 타도하고, 사회주의 정권을 건설했다. 당연히 미국의 카터는 반공주의자들을 지원했고, 이런 지원은 로널드 레이건에 와서 더 심화되었다. 레이건이 이들을 타도하려 했던 이유는 산디니스타 정권은 토지, 교육, 의료 개혁 프로그램을 야심차게 준비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레이건이 지원한 니카라과의 콘트라 반군은 잔인무도한 학살을 저질렀다. 심지어 레이건은 이들을 지원하기 위해 이른바 이란-콘트라 스캔들까지 촉발했다. 즉 이란에 인질로 잡혀있는 사람들을 빌미로 무기 거래를 하고 그 자금을 니카라과 콘트라 반군에게 지원했던 것이다. 니카라과 콘트라 반군의 학살로 최소 3만 명이 희생됐다. 그 외에도 엘살바도르와 과테말라, 온두라스 등에서 극우세력들을 지원하여 이들이 무고한 민간인들을 학살할 수 있는 조건을 형성했다. 당시 레이건은 중남미에서 미국의 지원을 받는 이들을 이른바 자유투사로 칭찬했는데 그들의 실체는 민주주의와 정의하고는 거리가 멀었다. 이들의 실체는 책에 나온 다음과 같은 구절들을 통해 알 수 있다.

 

“CIA의 정보 사이드가 완전히 찌그러든 상황에서 공작 사이드는 물을 만난 고기였다. 엘살바도르 미국 군사고문단 책임자 존 왜겔스타인 대령은 진짜배기 게릴라 소탕작전 기술은 야만을 체득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런 표현은 미국의 지원과 훈련을 받은 엘살바도르 정부군과 과테말라 정부군, 그리고 미국이 주도한 니카라과 반정부 게릴라 활동에 딱 들어맞는다. 레이건 대통령은 이들을 자유의 전사라고 불렀다. 그러나 이들은 강간, 고문, 거세, 사지 절단, 참수, 시신 절단 같은 악행을 밥 먹듯이 저질렀다. 과테말라 정부군의 경우 1981~83년 마야문명의 후예인 아메리카 원주민 농민 약 10만 명을 살해했는데, 그런 잔학성을 키워주기 위해 훈련 단계부터 신병들을 구타하고 모욕하고 하수구에 처박는가 하면 똥통에 장시간 처넣기도 했다. 이런 훈련을 통해 인간성을 말살당한 정부군 병사들은 잔학 행위를 일삼았다.”

 

출처 : 아무도 말하지 않는 미국 현대사 II p.164~165

 

과테말라 정부 공식기관인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Histrorical Charification Commision)’1999년에 발표한 보고서에서 과테말라 정부군이 다수의 마야 원주민 마을에서 저지른 626건의 대량학살사건을 상세히 설명하고, 이를 제노사이드로 규정했다. 보고서는 CIA를 비롯한 미국 정부기관들이 정부군의 학살행위를 직간접적으로 지원했으며, 학살행위로 인한 전체 사망자는 20만 명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출처 : 아무도 말하지 않는 미국 현대사 II p.168~169

 

얼마 후 놀라운 학살행위가 또 벌어졌다. 미군에게 훈련받고 미군 장비로 무장한 살바도르 정부군이 1981년 말 엘 모소테 마을 주민 767명 전원을 학살한 것이다. 군은 13세 미만 어린이 358명을 포함한 희생자들을 칼로 찌르고 목을 자르고 기관총을 난사해 죽였다. 소녀와 성인 여성들은 강간당했다.”

 

출처 : 아무도 말하지 않는 미국 현대사 II p.173

 

로널드 레이건은 반공주의자로 베트남 전쟁을 열렬히 지지했던 인물이었다. 그는 베트남 전쟁에서 당한 굴욕적인 패배를 극복하기 위해 직접 타국 침략에 나서기도 했었다. 바로 그레나다 침공이었다. 대략 7,000명의 미군이 그레나다에 상륙하여 작전을 전개했다. 명분은 쿠바의 지원을 받는 그레나다의 사회주의 정권을 타도하기 위함이었다. 침공 작전은 시작부터 엉망이었다. 미군 29명이 사망하고 100여 명이 부상했으며 헬기 9대를 잃었다. 대부분의 병력은 작전 성공 후 바로 철수했지만 말이다. 어쨌든 레이건은 그레나다 침공을 통해 베트남 전쟁의 굴욕을 극복하고자 했고, 그 승리에 심취했었다.

 

또한 레이건은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소련에 맞서 싸우던 이른바 무자헤딘을 지원했다. 그리고 그 당시 레이건은 스팅어 미사일을 포함한 온갖 무기와 장비를 지원했고, 이런 지원을 받았던 이들 중에는 이후 9.11 테러를 일으키게 되는 오사마 빈라덴도 포함됐다. 미국은 과거 자신들이 베트남 전쟁에서 겪은 고통을 소련 또한 겪기를 바랬고, 이를 위해 온갖 노력을 쏟아 부었다. 레이건은 냉전 말기 반공주의 정신을 강화하며 국방비 예산을 늘렸던 반면, 민중의 빈부격차와 복지를 위해선 예산을 삭감하는데 열정을 쏟아 부었다. 이에따라 미국의 빈부격차는 더 극대화됐다. 왜냐하면 그가 독점기업들을 위해 세금을 삭감해주고, 민중의 복지혜택을 줄였기 때문이다. 올리버 스톤과 피터 커즈닉은 책에서 로널드 레이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다.

 

과연 레이건이 남긴 진정한 유산은 무엇일까? 그는 미국 역사상 가장 업무 관련 지식이 부족하고 구체적인 지시도 내리지 않는 행정부 수반이었지만 부활한 강경 반공 우파 인사들에게는 힘을 실어주었다. 이들은 미국의 대외정책을 군사화하면서 냉전에 다시금 불을 붙였다. 레이건은 입으로는 민주주의를 외쳤지만 억압적인 독재자들을 지원하고 무기를 대주었다. 또 중동과 라틴아메리카에서 벌어진 국지적, 지역적 분쟁을 냉전의 싸움터로 확대시키는 한편 공포정치가 민중의 운동을 억압하도록 방조했다. 그는 천문학적인 예산을 군사 부문에 투입한 반면 빈곤층을 위한 사회복지 프로그램은 삭감했다. 부자들에 대한 세금을 대폭 삭감했고, 국가채무를 3배로 늘려놓았으며, 미국을 세계 최대의 채권국(취임한 첫해인 1981)에서 세계 최대의 채무국(두 번째 임기가 시작된 1985)으로 바꿔놓았다. 198710월에는 대공황 이후 최악의 주식시장 붕괴를 맞아야 했다. 레이건은 전 세계적 차원에서 공격용 핵무기를 제거할 수 있는 기회를 어영부영하다가 날려버렸다. SDI라는 유치한 환상을 버리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특히 냉전 종식에서 레이건이 한 역할은 과대평가되고 있다.”

 

출처 : 아무도 말하지 않는 미국 현대사 II p.217~218

 

5. 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나라?

 

미국인들에게 있어 제2차 세계대전은 미국이 나치 독일과 일본 제국을 무찌르고 민주주의를 전파한 역사다. 미국인들의 이런 관점을 반영이라도 한 듯 서방에서는 라이언 일병 구하기밴드 오브 브라더스’, ‘씬 레드 라인’, ‘아버지의 깃발’, ‘핵소고지’, ‘퓨리등 미국과 서방 연합군의 중심이 된 작품들을 많이 만들어냈다. 그러나 <아무도 말하지 않는 미국 현대사>는 제2차 세계대전을 이끈 주체는 미국과 서방연합군이 아니라, 바로 독일에 맞서 엄청난 희생을 감당해야 했던 이오시프 스탈린과 소련이라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

 

2차 세계대전은 1939년 히틀러가 폴란드를 침공하면서 시작됐다. 나치 독일은 단기간에 유럽전역을 점령했고, 19416월 바르바로사 작전을 전개하여 소련을 침공했다. 개전 초기 소련은 독일군에게 막대한 피해를 받았고, 수도 모스크바 외각까지 독일군이 진격하는 상황에 놓였었다. 경제 대공황 당시 나치 독일과 기업분야에서 협력했던 미국은 공식적인 차원에선 나치독일에 대해 비판을 했었다. 따라서 1941년 소련이 독일의 침공을 받자 소련에 대한 미국과 영국의 태도는 예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긍정적으로 바뀌었다. 무엇보다 1941127일 일본의 진주만 기습 공격이후 전쟁에 참전하게 된 미국은 소련에 대한 물자지원도 보다 적극적으로 나서게 됐다.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면서 미국에선 소련을 칭찬하는 선전과 캠페인이 지속적으로 일어났다. 당시 대통령이었던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더글라스 맥아더 장군에게 나로서는 그건 참 부인하기 어려운, 분명한 사실이오. 러시아군은 유엔 25개 회원국 전부를 합친 것보다도 더 많이, 추축국 병력을 살상하고 그 물질적 토대를 파괴했소. 따라서 1942년에는 당연히 최대한 모든 무기와 탄약을 그들에게 공급해줌으로써 사투를 벌이고 있는 러시아를 지원해야 할 것이오.”라는 얘기를 했었다.

 

1942년에는 미국의 영화사 헐리우드도 소련 찬양에 열을 올렸다. 19427월이 되면 MGM, 컬럼비아, 유나이티드 아티스츠(United Artists), 20세기 폭스, 파라마운트 같은 주요 영화사들이 제작 중이거나 제작을 검토 중인 소련 관련 영화는 9편 이상이나 됐고, <모스크바 특명(Mission to Moscow)>, <북극성(North Stat)>, <러시아의 노래(Song of Russia)>, <러시아 소녀 삼총사(Three Russian Girls)>, <영광의 나날(Days of Glory)> 5편의 주요 작품이 나왔다.

 

미국내에서는 소련에 대한 지원과 칭찬을 아끼지 않는 행보가 이어졌지만, 1941년부터 소련의 지도자 이오시프 스탈린이 그토록 원했던 제2전선을 형성하기 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2전선은 19446월 영미 연합군이 프랑스의 노르망디 해안에 상륙하면서 형성됐다. 즉 이 말은 제2전선을 형성하기 거의 3년이나 되는 시간 동안 소련은 동부전선 전역에서 독일군에 맞서 싸웠다는 얘기가 된다. 책에서는 이들이 얼마나 열심히 싸웠는지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194466일 오랫동안 기다리던 제2전선이 마침내 열렸다. 원래 약속보다 1년 반이나 늦었지만 10만 명이 넘는 연합군 병력과 각종 차량 3만 대가 프랑스 노르망디 해변에 상륙한 것이다. 상륙 과정에서 9,000명이 전사했다. 그 시점에 소련은 재앙적인 손실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중부유럽 상당 부분을 점령해가고 있었다. 이제 연합군은 동부와 서부 양쪽에서 독일로 밀고 들어가게 된다. 승리가 코앞이었다.

 

그 시점까지 소련은 거의 단독으로 독일군과 싸워왔다. 노르망디상륙작전 개시까지 소련군은 대개 200개 사단 이상의 적과 전투를 한 반면 미군과 영국군은 둘 다 합쳐도 10개 사단 이상과 교전한 경우가 드물었다. 처칠은 독일 군사력의 내장을 뽑아낸 것은 러시아군이라고 인정했다. 독일은 동부전선에서 600만 이상, 서부전선과 지중해 일대에서는 100만 가까운 병력을 잃었다.”

 

출처 : 아무도 말하지 않는 미국 현대사 I p.209

 

1945년 나치독일이 패망하는 시점까지 2,600만 명 이상의 소련사람이 사망했다. 그 중 1,000만 명이 소련군인이었고, 나머지는 나치독일군의 무차별 학살로 죽은 민간인이었다. 소련군은 동부전선 전역에서 진격을 개시하면서 아우슈비츠(Auschwitz)나 트레블링카(Treblinka)같은 반인륜적 전쟁범죄를 저지르는 수용소도 같이 해방시켰다. 즉 나치 독일의 광적인 유대인 학살을 끝낸 주체는 바로 소련이었고, 그런 나치독일을 무찌른 것도 소련이었다. 따라서 제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주체가 바로 소련인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항복한 이유를 미국의 원자폭탄 투하로 생각할 것이다. 물론 원자폭탄 자체가 일본의 항복을 앞당긴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아무도 말하지 않는 미국 현대사>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이 항복한 이유는 원자폭탄 보단 소련군의 만주 진격이 가장 결정적이었다고 강력히 주장하고 있다. 우선 일본의 대본영은 미국이 원자폭탄 1,2발을 도시에 사용하는 것과 B-29 폭격기를 대량으로 동원한 융단폭격이 별 차이가 없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일본의 지도부는 미국의 상륙에 맞선 결전을 진행하고자 했다.

 

그러나 19458월 소련이 만주에서 진격을 개시하면서 그러한 일본 지도부의 계획은 무산 됐다. 거기다 4년간 유럽전선에서 단련된 소련군은 만주에 있던 일본군 주력부대인 관동군을 붕괴시켰다. 그 붕괴속도도 빨라서 소련군의 작전은 불과 1주일 만에 성공적으로 종결되었을 정도였다. 그 짧은 기간 동안 소련은 몽골과 만주, 중국, 한반도 이북 그리고 쿠릴열도와 사할린까지 진격했다. 소련군의 진격에 일본이 절망에 빠졌던 것은 바로 일본의 산업기반이 만주에 있었던 것이다. 즉 일본은 미국이 원자폭탄을 떨어뜨리더라도 식민지 조선과 만주로부터 지원받음으로써 미국에 맞설 수 있다고 생각했고, 그런 희망을 소련군이 말 그대로 붕괴시켰다. 따라서 일본은 항복을 선택하게 된 것이다. 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과 일본을 패배시키는 데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바로 소련이었다. 이것은 미국이 외면하고자 했던 제2차 세계대전의 진실이다.

 

6. 미국 민중사와 차이점

 

올리버 스톤과 피터 커즈닉의 공저 <아무도 말하지 않는 미국 현대사>는 미국의 제국주의를 비판한 책이다. 사실 이 책이 나오기 전에 출판된 비슷한 책이 있다. 그 책이 바로 하워드 진(Howard Zinn)이 쓴 <미국 민중사(A People’s History of the United States)>1980년대 출판되어 100만 권 이상이나 팔릴 정도로 인기를 끌었던 그의 베스트셀러다. 그 책은 국내에도 1980년대에 번역된 적이 있고, 2000년대 개정판이 다시 번역되기도 했었다. 필자 또한 그 책을 몇 년 전에 읽었고, 아주 감명 깊게 읽었다. 특히나 억압받던 계급이나 피지배계층의 시각에서 서술한 아래로부터 역사쓰기는 참으로 훌륭했다.

 

앞에서 밝힌 바와 같이 하워드 진의 <미국 민중사>는 아주 훌륭한 책이다. 그러나 <미국 민중사>1492년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이른바 신대륙을 발견하면서 시작하는 역사부터 2003년 이라크 전쟁 이전까지의 내용을 다루고 있고, 국내에 번역된 개정판의 경우 제1차 세계대전 이전과 이후를 두 권으로 나누어 출간했다. 따라서 현대관련 부분은 좀 미약한 측면이 있다.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이 책의 첫 판은 1980년대에 나온 것이고 개정판도 2000년대 초중반에 나온 것이라 상대적으로 미약할 수밖에 없다. 만약 콜럼버스 시대부터 시작한 미국의 추악한 범죄의 역사를 알고 싶다면 <미국 민중사>를 읽어야 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아무도 말하지 않는 미국 현대사><미국 민중사>에서 심도 있게 다루지 못한 미국의 추악한 역사를 보다 깊이 다루고 있다. 특히나 <미국 민중사>에서 짧게 언급하는 9.11 테러 이후의 역사를 이 책은 아주 깊이 다루고 있다. 적어도 오바마 재선 이전까지 말이다. 확실히 이 부분은 이 책이 가지고 있는 장점이라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책에 대해 좀 더 추천하는 차원에서 얘기하자면, 하워드 진의 <미국 민중사>를 읽고 난 다음에 이 책을 읽는 것을 추천한다. <미국 민중사>는 위에서 언급한 그런 한계가 있고, 또 소련에 대해 좀 부정적으로 접근한 측면이 있는 반면, 이 책은 소련에 대해 비판은 하더라도 적어도 소련의 업적에 대해 나름 균형 있게 평가하려는 모습을 곳곳에서 보이고 있다. 따라서 필자는 <미국 민중사>보다 <아무도 말하지 않는 미국 현대사>를 보다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미국 민중사>를 읽지 않았다면, <미국 민중사>를 먼저 읽고 이 책을 읽어도 나쁘지는 않을 것이다. 미국의 또 다른 이면을 알고 싶어 하는 이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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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이 베트남 전쟁(Vietnam War)에서 패배하게 된 이유는 많을 것이다대표적으로 들자면 남베트남의 독재정권에 맞서 봉기한 베트콩들과 이를 지원하는 북베트남군의 영웅적인 투쟁미군의 무차별 폭격에도 굴복하지 않는 베트남 인민들의 불굴의 정신이들을 정신적 그리고 정치적으로 이끄는 호치민을 포함한 북베트남과 베트콩의 지도부들의 탁월한 지휘능력그리고 추악한 미국의 전쟁범죄에 반대하던 미국과 서방세계에서 일어난 반전운동 등이 미국을 베트남 전쟁에서 패배하게 만든 요인이었다.

 

베트남 전쟁 당시 일어났던 반전운동은 1968년 구정공세(Tet Offensive)를 기점으로 그 규모가 확장되었고, 1973년 미국이 남베트남에서 완벽히 철수할 때까지 계속됐다베트남 전쟁 당시 미국과 서방세계에서 벌어진 반전운동을 더 격화시킨 사건이 있었다반전운동을 격화시킨 이 사건으로 인해 베트남 전쟁에 개입했던 미국의 이미지는 완전히 나락으로 떨어졌으며본국으로 돌아온 미군들은 반전운동에 참가한 시민들로부터 베이비 킬러(Baby Killer)라고 욕먹게 됐다그 사건이 바로 미라이 학살(My Lai Massacre)이다.

(미라이 지역에 도착한 미군 헬기)

 

원숭이의 해인 1968년은 베트남 전쟁에 있어서 전환점이었다. 1968년 1월 31일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이 남베트남의 주요 도시성과 부의 중심지농촌 마을에서 감행했던 구정공세로 인해 미국은 잠시나마 혼란에 빠졌었다남베트남의 수도 사이공에선 미대사관 1층이 잠시나마 베트콩에게 점령당했었고옛 황궁 도시인 후에(Hue)는 1달 동안 양측 군대가 교전을 벌이는 전쟁터로 변모했었다구정 공세 초기 미군과 남베트남 연합군은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의 기습공격으로 밀렸지만우수한 화력으로 반격에 나서기 시작했다반격에 나선 미군들은 남베트남 전역에서 베트콩들을 섬멸했으며베트콩들의 저항은 조금씩 미미해지는 것 같았다.

(M-16 소총을 들고 미라이 지역을 정찰하는 찰리 중대 병사들)

 

다낭에서 그리 멀리 떨어져있지 않은 손미(Son My)지역도 상황은 비슷했다그러던 2월 25일 인근 동네를 순찰하던 미군 찰리 중대원(Charlie Company)들이 지뢰를 밟아 6명이 죽고 12명이 중상을 입는 사건이 발생했다. 2일 뒤 프랭크 베이커(Frank A. Barker) 중령은 찰리 중대의 중대장 어니스트 메디나(Ernest Medina) 대위를 불러 정보에 의하면 250여 명의 베트콩 게릴라가 미라이에 진을 치고 작전을 하고 있다.”는 내용을 얘기했고이후 찰리 중대는 이 동네에 들어가 모든 것을 파괴하기로 결심하게 됐다이렇게 해서 미라이 학살의 서막이 열린 것이다.

 

1968년 3월 16일 새벽찰리 중대원을 태운 헬리콥터가 착륙지점에 병사들을 내려놓았다윌리엄 캘리(William Calley) 중위가 이끄는 찰리 중대 소대원 30명은 이른바 미라이-4(My Lai Four) 지역으로 진입했고광적인 학살극을 벌이기 시작했다켈리 중위가 이끄는 소대원 30명이 미라이-4 지역에 진입했을 때 어떠한 반격도 없었지만이미 켈리 중위는 사격 명령과 함께 수류탄을 주민들이 살고 있는 지점에 투척했으며마을을 불태우고 밖으로 뛰어나오는 민간인들을 M-16 소총과 M-60 기관총으로 무차별 학살했다여기서 즉시 사살하지 못했던 민간인들은 손을 머리 위에 올리게 하고 큰 도랑으로 내려가도록 했으며밑에서 기다리고 있던 부대원들이 이들을 집단으로 학살했다또한 그날 같이 출동했던 다른 2개 소대는 미라이-4 마을의 외곽을 포위하고도망쳐 나오는 사람들을 사격으로 차단했다학살을 벌였던 미군들은 이런 천인공노할 만행도 모자라 부녀자들을 집단으로 강간한 뒤 사살하기도 했으며이 학살극으로 희생된 이들 대다수가 여자노인아이들이었다.

(미군의 총에 맞고 죽은 어린아이, 미라이 지역에 들어간 미군들은 애, 어른, 여자, 노인 할 거 없이 보이는 대로 총으로 쏴죽였다.)


(학살당한 마을사람들, 미라이 지역에 들어간 미군들은 마을사람들을 이렇게 집단으로 학살했다.)

 

물론 모든 미군이 이런 학살에 참여했던 것은 아니다당시 헬리콥터를 통해 작전지역을 정찰중이었던 휴 톰슨(Hugh Thompson) 준위는 학살을 목격하자 곧바로 미라이-4 촌락으로 내려가 캘리 소대원들을 총으로 위협해서 주민 16명의 목숨을 구하기도 했다당시 학살에 참여했던 한 흑인병사는 자신의 발에 총을 쏴서 학살을 회피하기도 했었다하지만 이런 양심적인 행동을 했던 병사들 보다 현장에서 학살에 참가한 병사들이 더 많았다미라이 학살은 총 4시간에 걸쳐서 일어났다이 학살의 피해자의 대다수는 여자와 노인어린이 그리고 갓난아기였다이 학살에서 총 504명의 민간인이 30명의 미군에게 학살당했다학살당한 504명 중 17명이 임산부, 173명이 어린이 그리고 56명이 5개월 미만의 유아였으며미군은 총 274채의 모든 가옥에 불을 지르고 수천 마리의 가축을 죽였다쉽게 말해 살아 숨 쉬고 땅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는 없애버렸다고 할 수 있으며이러한 학살의 증거를 막기 위해 이 지역을 비행기로 폭격하기 까지 했다.

(마을을 불태우고 있는 미군, 미라이 지역에 들어간 미군은 마을을 불태웠다.)


(공포에 떨고있는 마을주민들)

 

이처럼 미군은 이 사건을 그냥 덮어버리려고 온 힘을 다했다당시 미군의 기록한 보고에 따르면 미라이 학살은 베트콩 사살이었다즉 미군은 미라이 지역에서 수백 명을 학살해 놓고바디 카운트(Body Count) 계산법을 적용해 학살의 존재를 숨겼다그러나 이 추악하고도 잔혹한 학살극은 미군이 원하는 바하고는 달리 은폐되지 못했다미라이 학살을 목격했던 육군 사진사 로널드 해벌리(Ronald Haeberle)는 이 학살의 현장을 사진으로 남겼고당시 급보통신(Dispatch New Service)이라는 동남아시아의 반전 통신사에서 일하고 있던 시모어 허시(Seymour Hersh)는 이를 기사화했다또한 미라이 학살에 관해들은 론 라이더나워(Ron Ridenhour)라는 사병 기자가 보낸 편지가 돌아다니기도 했다.

(휴 톰슨 준위, 인근지역에서 헬리콥터로 정찰을 하던 휴 톰슨은 학살의 현장을 목격하자 그 현장으로 달려가 마을주민 16명을 구출해냈다.)

 

미라이 학살이 미국내에서 큰 이슈가 되었던 것은 학살이 일어난 지 1년 뒤인 1969년이었다. 1969년 11월 12일 시모어 허시는 미라이 학살에 대해 특종 보도를 하였고이로 인해 미라이 학살은 베트남 전쟁을 일으킨 미국의 이미지는 더욱 안 좋아졌다이렇게 되자 미국 정부는 미라이 학살에 대한 진상규명에 나섰고이 학살에 가담했던 이들이 재판에 회부됐다재판에서 총 26명의 군인이 이 학살에 관여한 것으로 판명됐다그러나 법적으로 유죄 판결을 받은 이는 캘리 중위뿐이었다상급 명령권자인 영관급 장교들은 어떠한 처벌도 받지 않았다또한 재판에서 종신형을 선고받은 캘리 중위도 두 차례의 감형을 받았으며, 3년 반 동안 가택연금 상태로 지낸 이후 사면됐다더 놀랍고 기가 막힌 사실은 수천 명의 미국인들이 캘리 중위를 옹호했으며어떤 이들은 공산주의자들에 맞서기 위해 필요했던 그의 행동을 애국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하기도 했다.

(윌리엄 캘리 중위, 미라이 학살 현장에서 병사들을 지휘했던 장교인 그는 이후 학살이 공론화되면서 재판에서 유죄판결을 받았다. 그러나 결국 그도 나중에 닉슨정부에 의해 사면됐다.)

 

또한 미라이 학살이 미국 내에서 이슈가 되면서 당시 학살에 가담했던 이들이 텔레비전에 나와 자신이 저지른 학살을 있는 그대로 증언하기 까지 했으며이러한 활동을 통해 학살의 진상은 확실히 규명됐다미라이 학살에 참가하여 최소 25명을 죽였던 소총수 버나도 심슨은 다음과 같이 증언하기도 했다.

 

몇 시간 만에 500명을 죽이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아는가그것은 꼭 가스실 같다히틀러가 했던 것 말이다여자노인아이 할 것 없이 50명씩 세워놓고그냥 쓸어 버리면 된다그렇게 했다. 25, 50, 100명씩 말이다그냥 죽였다그들을 모아놓고나와 동료 몇 명이 M-16 소총을 자동으로 한 다음 다 쏴 죽여 버렸다.”

 

당시 캘리 중위의 명령을 받고 미라이 학살에 가담했던 육군 병사 폴 메들로는 방송에 출연하여 다음과 같은 발언을 했다.

 

방송 진행자어떤 사람들이었죠양민여자아이들이었나요?

 

폴 메들로양민여자아이들요.

 

방송 진행자아기도요?

 

폴 메들로아기도요.

 

폴 메들로캘리 소위가 와서 그랬어요저들을 어째야 하는지 알지그래서 전 '라고 했죠당연히 전 감시하라는 말인 줄 알았어요갔다가 10분에서 15분 후에 다시 돌아오더니 켈리 소위가 여태 안 죽이고 뭐 했어라고 그랬어요.

 

방송 진행자당신은 그때 몇 명이나 죽였나요?

 

폴 메들로전 자동화기를 쐈는데그냥 마구 갈겼습니다너무나도 빨리 지나가서 몇 명이나 죽였는지는 모르겠어요아마 10명에서 15명 정도 죽였을 겁니다.

 

방송 진행자양민여자아이들을요?

 

폴 메들로양민여자아이들요.

 

방송 진행자아기도요?

 

폴 메들로아기도요.

 

폴 메들로내가 왜 그랬냐고요전 명령을 받았기 때문이었습니다그건 마치 그땐 정당한 일을 한다고 생각했어요정말로요전우를 잃었거든요정말정말 친했던 친구 바비 윌슨요그게 마음에 걸렸어요그게 마음에 걸려서요그러고 나니 속이 후련했어요하지만 그날 이후로 그 사건이 나를 괴롭혔어요.

 

방송 진행자젊고 능력 있고 용감한 미군이 노인과 여자어린이아기들을 한 줄로 세우고냉혈한처럼 쏴 죽인다는 걸 많은 선량한 미국인은 받아들이기 힘들 것 같은데어떻게 설명하시겠어요?

 

폴 메들로모르겠습니다.

 

미라이 학살이 아니더라도 사실 베트남 전쟁은 미국의 일방적인 학살극에 가까웠다미군은 베트콩을 잡는다는 이유로 무차별 폭격을 감행했고남베트남과 호치민루트에 고엽제를 무차별적으로 살포했으며소위 자유사격지대(Free Fire Zone)를 설정해놓고수색과 섬멸 작전을 이어갔다미라이 학살이 베트남 전쟁에서 공론화 된 이유는 그 학살 자체가 우발적인 것이 아닌 계획적인 학살이었다는 점에 있었다그리고 무엇보다 확실한 사진자료가 남아있었고증언을 한 병사들이 있었기에 학살이 진상규명될 수 있었다.

(시모어 허시가 보도한 미라이 학살 기사, 1969년 11월 시모어 허시는 미라이 학살을 보도하면서 학살의 진상을 규명하고자 했다. 아이러니한 일이지만, 미라이 학살이 미국에서 공론화 되던 시점인 1969년은 베트남의 독립운동가이자 혁명가인 호치민이 사망한 해이기도 했다.)

 

그러나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미군이 저지른 학살은 미라이 학살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애초에 베트남 전쟁에서 비정규전을 치르던 미군은 전략 전술적으로 학살을 벌일 수 있는 가능성이 언제든지 열려있었고또 그러한 위험성이 높은 작전들을 수행했다따라서 미라이 학살은 진상규명이 된 학살일 뿐미군이 베트남 전쟁에서 저지른 유일한 전쟁범죄라고 말할 수는 없다.

 

미라이 학살이 정말 추악하고 잔인한 학살일 수밖에 없는 이유에는 학살의 희생자 대다수가 여자노인어린이 그리고 갓난아기와 같은 민간인들이었다는 점에 있다이것은 비정규전에서 이성을 잃은 미군이 민간인을 대상으로 어떠한 범죄를 저질렀는지를 보여준다민중의 지지를 받지 못하는 남베트남을 구하기 위해 전쟁을 일으켰던 미국이 베트남 전쟁에서 저지른 짓은 미라이 학살과 같은 잔혹한 전쟁범죄였다따라서 미국이 베트남 전쟁에서 패배했던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결과였다.

 

참고자료

 

베트남 10000일의 전쟁마이클 매클리어을유문화사, 2002

 

미국의 베트남 전쟁조너선 닐책갈피, 2004

 

미국민중사 2하워드 진이후, 2008

 

미안해요베트남이규봉푸른역사, 2011

 

베트남 전쟁잊혀진 전쟁 반쪽의 기억박태균한겨례출판,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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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2003년 미국의 이라크 침공 당시 반전운동에 나섰던 리영희 교수의 연설문입니다.)

 

평화 국가의 위상이 위기에 처해 있는 이 시각, 며칠 동안 계속 민주주의의 승리를 위해 싸우고 있는 여러분에게 경의를 표합니다.

 

나는 모처럼 갖지 못했던 귀중한 이 기회에 노무현 대통령과 박관용 국회의장과 여야 국회의원들에게 경고하고 아울러 간곡히 부탁하겠습니다. 대한민국 군대를 이라크에 절대 보내지 말아야 할 이유를 분명하게 알아야 하겠습니다. 대통령과 정치인들은 분명히 다음과 같은 사실을 인식하고 행동해야 합니다.


 

첫째, 그 동안 미국이 이라크 공격을 정당화·합법화하려고 선전한 사항이 모두 거짓임이 드러났습니다. 이라크에서는 대량살상무기도 발견되지 않았고, 화학무기와 그밖에 유엔 안보리가 결정하고 제재를 가할 만한, 미국의 주장을 뒷받침할 만한 아무런 근거도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둘째, 따라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서 미국의 거짓된 주장과 요구를 몇 달에 걸쳐 심의한 결과도, 그리고 현지에 파견된 조사단의 철저한 조사 결과도 아무런 증거를 발견하지 못한 이번 전쟁은 침략전쟁을 구성하게 되는 것입니다. 2차 세계대전 이후에 세계 국가들의 행동 규정을 결정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유엔 헌장, 이 모든 것을 미국은 위반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미국의 이라크 군사 공격은 명백한 침략 전쟁입니다.

 

, 파병은 대한민국 헌법의 근간이 되는 유엔 헌장 정신에 위배되는 것입니다. 우리 헌법은 국제 관계에서 국제 행동은 유엔 헌장 정신에 입각해야 한다는 것을 분명하게 밝혔습니다. 또 우리 헌법에는 침략 전쟁을 부정하는 명백한 조항이 있습니다. 파병은 이것에 대한 위반입니다. 대한민국이 유엔의 결정에 의해 탄생한 국가인 만큼 유엔 정신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행동 결의가 없는 미국의 불법적 전쟁 행위에 군대를 파병하는 것은 유엔 헌장 위반이며 대한민국의 법적 뒷받침이 되고 있는 기반을 파괴하는 겁니다. 따라서 노대통령과 국회의장과, 여야 국회의원들은 분명히 대한민국의 헌법이 정한 바에 따라서 행동해야 할 것이며, 대한민국 헌법을 위반하는 것은 국가와 국민의 대표임을 스스로 부정하는 것으로 간주해야 합니다.


 

넷째, 우리 대통령과 국회의원들과 파병 지지 세력들은 파병이 한-미 동맹 관계에 바탕하는 것이라 말합니다. ‘대한민국과 미합중국 간의 상호방위조약1954년 발효된 것으로, 이 방위조약에는 분명하게 군사행동에 대한 제한이 있습니다. 단순하게 동맹이라 해서 모든 군사행동이 허용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대학생이나 그 연배 분들인 거 같아서 대한민국의 군사 행동에 관한 한미방위조약에 관한 강의를 할까 합니다.

 

대한민국과 미합중국 간의 상호방위조약은 그 전문에서 상호 군사 행동을 분명하게 제한하고 있습니다.

 

1.파병은 오히려 한미 방위 조약 위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두 가지입니다. 한국이 미국을 도와도, 미국이 한국을 도와도 그것은 외부의 무력 공격이 있어야만 정당화됩니다. , 그 지역은 태평양 지역에만 해당하는 것입니다.

 

노대통령과 국회의원들은 분명하게 외쳐야 합니다. 외부로부터의 명백한 군사 행동이 없었는데도 대한민국이 한미방위조약에 입각했다고 착각하고 미국의 군사공격에 지지를 보낸다면 한미방위조약에 위배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미방위조약은 평화적 수단에 의해서 해결하게끔 돼 있습니다. 우리가 무슨 평화적 수단을 다했습니까?

 

, 국제 관계에서 유엔에 배치되는 방법으로 무력 위협이나 무력 공격을 삼간다고 돼 있습니다. 따라서 유엔에 위배되는 이라크 공격은 한미방위조약에도 위배되는 것입니다.


 

지금 이라크가 무력 공격을 해 왔습니까? 이라크 국민들이 한국 국민들에게 손가락질 하나 한 일이 있습니까?

 

이라크가 아시아에 있습니까? 극동 지역에 있습니까?

 

이라크가 선제 공격을 했습니까? (청중들:아니오!)

 

그렇다면 우리 대한민국은 미국의 군사 공격을 지지할 이유가 하등 없습니다. 노무현 대통령과 박관용 국회의장과 여야 국회의원들은 이제 미국과의 동맹 관계라는 허황된 논리로 파병을 결정하려 하는 이유를 국민들에게 설명해야 합니다.

 

다섯째, 여러분은 젊어서 베트남 전쟁 당시 상황을 잘 모를 겁니다. 대한민국 군대 35만 명이 베트남에 갔고 상시적으로 5만 명이 주둔해 있었습니다. 대한민국 군대가 미국을 지원하기 위해 베트남에 갈 때도 한미방위조약에 근거해 간 것이 아니에요. 미국은 이 조약에 근거해 대한민국 군대를 베트남까지 끌고 갈 근거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형식을 취했냐 하면 남베트남 정부로 하여금 대한민국에 독자적으로 군대 파병을 요청하게 하는 군색한 방식을 썼습니다.

 

미국의 요청으로 베트남에 간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멍청한 한국 사람들이 많은데, 한국이 미국 요청 없이 자발적으로 갔다고 하는 엉터리들이 있는데, 미국은 한미방위조약에 근거가 없으니까 남베트남 정부가 한국에 요청하도록 한 것일 뿐입니다. 아주 교활하고 못된 방법을 쓴 것입니다.

 

여섯째, 그렇다면 동맹 국가는 다른 동맹 국가의 전쟁에 무조건 참전해야 하는가? 베트남 전쟁 때 영국은 군대를 포함해 아무것도 보내지 않았어요. 그런데 미국이 하도 요청하니까 급기야 의장대 6명을 보냈습니다. 사이공 공항에 의장대를 세워 놓고 마치 영국이 미국을 돕기 위해 참전한 것인 양 쇼를 한 겁니다. 영국이야말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멸망할 것을 마셜 플랜을 비롯한 미국의 원조로 살아난 나라입니다. 미국과 같은 앵글로 색슨 핏줄인 영국은 우리 나라보다도 더욱 대대적으로 미국의 베트남전을 지원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의장대 6명만을 보냈다는 사실은 굉장히 인상적이지 않습니까?

 

일곱째, 국가 이익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국가 이익을 획득하는 방법은 도덕적이어야 합니다. 살인·강도의 방법으로, 남의 나라를 침범하고 남의 선량한 국민들을 해치면서 돈을 벌고, 시장을 개척하고, 석유 이권을 챙기는 것을 원하는 극우 반공주의 세력이 있습니다. 그러나 돈을 벌더라도 남을 해치지 않고 도덕적으로 해야 합니다. 강도·살인, 절도·강간·파괴·방화 이런 방법으로 번 돈이 얼마나 유익하고 국가 이익에 도움이 된단 말입니까?

 

여덟째, 노무현 대통령은 북한 핵 문제를 평화적으로 풀기 위해 전략적으로 미국을 지지했다고 고통스럽게 말했습니다. 그러나 한반도 전쟁 위기를 해결하고 북한에 대한 미국의 군사 위협을 해소하기 위해 전쟁을 지지했다면 이것이야말로 한심한 작태입니다.

 

미국이라는 나라, 특히 부시를 비롯한 공화당 세력에게는 미국의 이익이 행동 규범입니다. ‘동맹 국가의 희망이 무엇인가하는 것은 부시 정권의 고려사항에 들어가지 않습니다.

 

한국 정부가 아양과 아첨을 떤다고 부시 정부가 전쟁을 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면 착각도 이만저만한 착각이 아닙니다. 미국은 오로지 미국의, 부시 정권의 철학과 정책과 이익만을 위해 행동하는 집단입니다.


 

아홉째, 한국 국민들은 민주화 운동 과정을 거쳐 높은 민주 의식과 도덕성을 갖췄습니다. 세계인들의 존경을 얻기 위해서는 파병하지 말아야 합니다. 한국은 이제 자주적이어야 합니다.

 

열번째, 대한민국의 전투병을 이라크 포로수용소 경비병으로 보내 달라는 요구가 있었습니다. 이 포로 수용소 경비병이야말로 훗날 전범 재판에 회부될 가장 위험한 직책입니다. 2차 세계대전 때 일본이 연합군 병사들을 포로 수용소에 가두었고 조선인들이 경비병 노릇을 했습니다. 전쟁이 끝난 뒤 이 가련한 조선인들이 일본의 앞잡이로 몰려서 전범 재판에 회부되어 사형당했습니다. 포로 수용소 경비는 1급 전범입니다. 아무런 죄가 없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2. 미국의 행동 규범

 

열 한번째, 우리가 왜 12억 아랍 인구를 적으로 만들어야 합니까? 그럴 이유가 무엇이 있습니까? 나라의 적을 새로 만들어서 국제 외교에 지장을 입을 이유가 없습니다.

 

열 두번째, 국내 반공 수구 세력, 미국의 말이라면 뭐든지 무조건 따르는 일부 수구 세력을 그대로 두어서는 안 됩니다.

 

열 세번째, 노 대통령 자신이 취임 전과 취임 후에 미국에 대해서 할 말은 한다, 대한민국은 앞으로 미국과의 관계에서 자주적인 태도를 가지겠다 해서 여러분들은 아마 이 정권에게 표를 찍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게 미국에 대해서 할 말을 하는 노 대통령의 모습입니까? 이것은 자기 자신을 배신하고 자기 자신을 배신함으로 해서 대한민국 국민을 배신하고 국가 위신을 떨어뜨리는 일입니다.

 

열 네번째, 이번에 파병하고 미국이 하라는 대로 하게 되면, 우리 국민은 미국에 더욱 예속될 겁니다. 그렇지 않아도 대한민국은 미국의 보호국처럼 취급받아 왔는데, 이번 파병은 이런 상황을 심화시킬 겁니다.

 

끝으로, 미국의 이라크 침공을 지지해 놓고 미국의 한반도 정책과 대북 적대 정책에 무슨 근거로 대항할 수 있습니까? 미국은 우리의 요구와는 반대로 행동할 겁니다.

 

노무현 대통령에게 묻겠습니다. 이러한 상황에도 미국의 이라크 침략 전쟁을 지지하고 군대를 파병해야 할 비밀 협약이 있는가? 한미방위조약 이외에 그것을 백지화하는 미국과의 비밀 조약이 있는가? 그렇다면 우리 헌법과 한미방위조약에 근거해 마땅히 그것을 무효화해야 합니다. 그리고 국민들에게 그 사실을 밝혀야 합니다. 국민은 알 권리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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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원 2020-09-25 15: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공유합니다

NamGiKim 2020-09-25 15:12   좋아요 1 | URL
네 감사합니다.^-^

쿠자누스 2020-09-25 18: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리영희 교수님 연설보다 몇 달 전이 되겠네요.
시사저널에 제가 기고한 글입니다.
http://www.sisajournal.com/news/articleView.html?idxno=88686

NamGiKim 2020-09-25 18:50   좋아요 0 | URL
좋은 글 감사합니댜.^-^
 
전쟁 국가의 탄생 - 베트남 전쟁부터 아프가니스탄 전쟁까지, 고삐 풀린 미국의 전쟁사
레이첼 매도 지음, 박중서 옮김 / 갈라파고스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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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정치 평론가인 레이첼 매도(Rachel Maddow)가 쓴 전쟁 국가의 탄생(Drift The Unmooring Of American Military Power)’을 읽었다. “베트남 전쟁부터 아프가니스탄 전쟁까지, 고삐 풀린 미국의 전쟁사라고 책에 붙은 부제목은 필자로 하여금 흥미를 유발했고, 결과적으로 책을 읽도록 만들었다. 책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책의 주된 내용은 제국주의 국가 미국이 현대적인 전쟁 국가로 가는 과정을 다뤘다.

 

책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승승장구하던 미국에게 쓰라린 패배를 안겨주었던 베트남 전쟁부터 시작하여 로널드 레이건의 집권과 미국의 반공화, 그레나다 침공, 이란 콘트라 스캔들, 걸프전쟁 그리고 아프가니스탄 전쟁과 오바마 정부의 빈 라덴 암살까지를 다뤘다. 미국 건국 이래 최초로 패배한 전쟁인 베트남 전쟁은 미국이 일으킨 침략 전쟁이었다. 1964년 통킹만 사건을 조작한 미국은 1965383500명의 해병대를 다낭에 상륙시키는 것을 시작으로 대규모의 미군 병력을 남베트남을 돕기 위해 보냈고, 그 규모는 1968년이 되면 대략 549천 명이 되었다. 베트남 전쟁에 개입한 미국은 구정 공세를 시점으로 대규모의 반전 운동에 시달렸고, 그동안 실행해오던 징병제에 문제가 생겼으며, 결국 1973년 베트남에서 철수하게 된다. 1968년부터 1972년 까지 베트남 주둔 미군 사령관을 지낸 크레이튼 에이브람스(M1 에이브람스 탱크의 그 에이브람스다.)는 닉슨 정부의 베트남화 정책에 따라 대규모의 병력을 철수시켰는데, 불과 4년 만에 대규모의 병력을 베트남에서 철수시키는 데 성공했다. 어쨌든 베트남 전쟁은 미군의 잔혹성과 미국 민중의 반전 운동에 휩싸여 1975년 호치민의 후계자들의 승리로 끝이 났다.

 

1975년 베트남 전쟁에서 미국이 패배한 이후 미국은 자존심에 큰 타격을 입었고, 소위 패배주의가 만연했다. 그러던 중 1980년대 헐리우드 배우 출신인 로널드 레이건이 대통령으로 등장했는데, 그가 대통령으로 집권하면서부터 미국은 다시 철저한 반공주의와 군사주의의 길로 들어섰다. 1975년 베트남 전쟁 이후 미군은 주로 군의 복지와 혜택을 강조하며 홍보를 했던 것에 비해 레이건 정부에서의 군은 애국심과 남성성을 강조했다. 그리고 레이건 정부는 냉전이라는 진영적 대립을 이용하여 미국을 국가주의와 반공으로 무장시킬 수 있었다. 물론 베트남 전쟁에서 징병제의 폐해가 굉장히 심각했기에, 모병제를 통하여 군사력을 증강했다. 레이건 정부는 미국을 군사주의화 하기 위해 소련에 대한 악마화를 악의적으로 실행하고, 소련의 군사력을 필요 이상으로 과장하여 공산주의에 대한 공포심을 심어놓았는데, 이는 미국이 군사주의 국가로 탄생하고 현대화하는 데 있어 굉장히 효과적이었다. 마치 대한민국 정부가 북한과의 대립이 있을 때, 한국의 부르주아 지배계급과 친일 제국주의 세력들이 북에 대한 악마화와 군사적인 공포심을 심어놓음으로써 자신들의 이익을 챙기려는 수법과 매우 유사하다. 레이건 정부 시기 소련에 대한 악마화는 대중매체에서도 드러났다. 1983년에 개봉한 반소 반공 영화 레드 던(Red Dawn)이나 톰 크루즈가 주연으로 출연하여 미국 전투기를 몰며 소련의 미그기를 멋있게 격추하는 영화 탑건(Top Gun)이 대표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레이건 정부는 남미에 친미 괴뢰 정권을 세우고, 군사적인 개입을 하는 데 있어서 매우 적극적이었다. 특히나 1983년의 그레나다 침공이 그러했다. 그레나다 침공에 대한 미국의 표면적인 명분은 그레나다에 있는 자국민들을 보호 및 구출이라는 것이었다. 당시 로널드 레이건은 레닌주의를 왜곡하여 레닌주의가 전 세계의 평화와 민주주의를 위협한다.”라는 황당무계한 논리를 내세웠다. 반공주의자 로널드 레이건은 레닌주의를 왜곡함으로써 남미에 친미국가를 세우는 논리로 합리화시켰다. 198312월 미군이 그레나다 전역을 장악함으로써 승리로 끝이 나자 로널드 레이건 정부는 이에 매우 기뻐했고, 승리를 자축했다. 하지만 이들은 이란-콘트라 스캔들을 겪으며 지지율을 잃었다.

 

미국이 다시 초강대국이라는 사실을 세계에 입증한 것은 1990년에 일어난 걸프 전쟁이었다. 걸프 전쟁에서 미국은 200명의 전사자로 대략 수만 명의 이라크군을 사살하고, 수십만의 이라크군대를 붕괴시켰다. 거기다 소련이 붕괴하면서 미국은 명실상부 세계 최강의 군사 강국이 되었다. 징병제가 사라진 지 20년이 지난 1990년대 중반에 이르러 모두 지원자로 이루어진 군대는 더 안정적이고, 더 전문적이고, 더 유능한 집단이 되었다. 미국 정부는 1990년대 대규모 민간 업체를 키웠는데, 이들은 유고슬라비아 내전에 투입되었다. 그리고 미국은 유고슬라비아 내전에서 평화를 유지하는 데 도움을 주고자 2만 명의 미군을 발칸 반도에 주둔시켰는데, 이와 대략 비슷한 숫자의 민간 기업 직원들도 동행했다. 발칸 반도에 미군이 주둔할 당시, 미군과 민간 업체는 마피아들과 결탁하여 인신매매로 납치된 여성들을 사고파는 행위를 일삼았는데, 여기에 희생된 성노예 여성들이 얘기를 듣다 보면 정말 토가 나올 지경이다.

 

20019.11 테러를 겪은 이후 미국은 빈 라덴을 숨겨주었다는 이유를 들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했고, 2003년 이라크를 침공했다.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에서 전쟁을 치르면서 미국은 최신무기들을 투입하기도 했다. 미국의 최신무기인 드론이 가장 큰 효과를 본 것은 2011년 미국 정부가 진행했던 오사마 빈 라덴 암살 작전인 넵튠 스피어 작전(Operation Neptune Spear)’이다. 이 작전을 승인한 미국의 오바마 정부는 전쟁지역이 아닌 파키스탄에서 오사마 빈 라덴을 암살하는데, 사전에 파키스탄 정부에 어떠한 얘기나 허가 없이 진행되었다. 이 때문에 파키스탄 정부의 체면을 망가뜨렸고, 파키스탄 국민들에게 치욕을 안겨주었다. 아무리 테러리스트를 사살하는 작전이었지만, 엄연히 비교전 국가에서 진행된 일이었고, 타국의 주권과 체면을 짓밟는 짓이었다.

 

이렇듯 미국은 전쟁 국가로 거듭났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냉전 시기 미국은 소련과의 군비경쟁에서 수많은 핵무기를 개발했는데, 대략 수천개의 핵무기를 소유하고 있다. 2차 세계대전 이후부터 2000년대까지 대략 60년간 미국은 핵무기를 개발하는데 대략 8조 달러를 지불했다. 현재 현역 상태인 핵무기 중엔 대략 50년째 현역인 핵무기들도 존재한다. 그리고 미국은 핵무기들을 옮기던 도중 수많은 사고를 일으켰는데, 대표적으로 스페인과 덴마크에서 일어났던 사건이 있다. 실제로 대규모의 폭발이 일어나진 않았지만, 약간의 폭발로 인하여 스페인의 팔로마네스 지역의 시골이 방사능에 피폭되는 사고도 있었다. 저자는 핵무기를 언급하는 파트에서 2006년 김정일의 핵 개발은 언급하는데, 당시 북의 핵 개발에 맞서 일본을 핵무장 시키자라고 워싱턴 포스트에서 주장했던 크라우트해머의 논리를 강력히 비판한다.

 

이렇듯 래이첼 매도의 전쟁 국가의 탄생은 미국이라는 제국주의 국가가 어떻게 군의 현대화를 거치며 제국주의 국가가 되는지를 잘 밝힌 책이다. 현학적이지 않은 단어를 사용하는 것은 물론, ‘우웩’, ‘?’, ‘아니!’, ‘이런’, ‘어이쿠!’ 등이 위트 섞인 구절을 사용해가며 재밌게 진행해 나간다. 다만 부제목에 나와 있는 아프가니스탄 전쟁에 대해 깊게 다루지 않은 것과 북한 문제를 심도 있게 다루지 않은 것은 약간의 아쉬움이 남는다. 어쨌든 미국이 어떻게 전쟁 국가로 변모하는지를 알게 해준 좋은 책이다. 많은 사람에게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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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자누스 2020-09-25 18: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발칸 전쟁에서 벌어진 인신 매매 이야기. 내막이 몹시 궁금합니다.
책을 읽어봐야겠어요. 그린란드에 떨어진 수소 폭탄 이야기는 여기 기고문과 비교해봐야겠네요 http://www.sisajournal.com/news/articleView.html?idxno=88225

NamGiKim 2020-09-25 18:52   좋아요 1 | URL
1년 전에 읽었는데, 정확히는 기억이 안나네요. 그쪽 마피아들하고 미국측 민간기업하고의 연결고리였던걸로 생각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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