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210일 당시 일리노이 주 출신 민주당 연방 상원의원이었던 한 사람은 일리노이 주 스프링필드에 있는 구 주의회 의사당 앞에서 2008년 미국 대통령 선거전에 뛰어든다는 출사표를 던졌다. 그는 이라크 전쟁의 신속한 종결, 에너지 자립 수준 확대, 국민건강 보험제 마련 등을 공약으로 내걸었고, 20088월 말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결정됨에 따라 대선에 도전하게 되었다. 그리고 미국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가 바로 미국 최초의 흑인 출신 대통령인 버락 오바마(Barack Obama). 사실 2000년대 초까지만 해도 미국에서 이렇게 빨리 흑인 대통령이 탄생하리라고 예상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랬기에 그의 당선은 전 세계적으로도 쟁점이 되었다. 미국 최초로 흑인 대통령이 된 버락 오바마는 어떤 삶을 살았던 것일까?

 

현재 미국의 제46대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가 2011NBC와의 인터뷰에서 케냐에 있는 오바마의 할머니가 오바마는 케냐에서 태어났고 자기가 직접 봤다고 한다.”라는 말을 했던 적이 있다. 이런 트럼프의 막말의 문제를 일으키기도 했지만, 오바마는 케냐 출신의 흑인 아버지와 미국 백인 어머니 사이에서 하와이 주 호놀룰루에서 196184일 출생하였다. 오바마가 2살이던 1964년 그의 부모는 이혼했고, 어머니 던햄은 하와이에서 대학에 다니는 인도네시아인 유학생 롤로 수토로와 재혼하여 아들 오바마를 데리고 인도네시아로 이사를 갔다. 버락 오바마는 6살 때부터 10살 때까지 자카르타의 기독교계열 학교에 다녔다. 그가 10살이 되던 1971년 다시 하와이 홀놀루루로 돌아왔고, 1979년에는 하와이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미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 오바마의 10대 시절은 순탄치 않았다. 오바마는 10대 시절 알콜, 마리화나, 코카인을 복용했던 적이 있었고, 그의 어머니는 1977년에 인류학 현지 조사차 다시 인도네시아로 떠났다. 물론 고등학생 시절 마약에 손댄 일에 대해 최대 도덕적 과오였다고 2008년 대통령 후보 공개 토론에서 말하긴 했지만 말이다. 하와이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오바마는 1979년 로스엔젤레스의 옥시덴탈대학교에 입학했고, 2년 뒤인 1981년에는 뉴욕시의 콜롬비아대학교에 편입하여 국제관계를 주 전공으로 정치과학을 전공하고 1983년에 학사학위를 수여받았다.

 

뉴욕에서 4년을 보낸 뒤 오바마는 시카고로 가서 지역사회 개발 프로젝트에 감독으로 고용되었고, 19856월부터 19885월까지 대략 3년간 지역사회 조직가로 일했다. 1988년 말 오바마는 하버드 법학대학원에 입학했다. 1991년 하버드에서 우수한 성적으로 법학박사 학위를 따고 졸업한 뒤 그는 시카고로 돌아갔다. 19924월부터 10월까지 오바마는 일리노이 주의 투표 프로젝트를 감독하여 크레인스 시카고 비즈니스에서는 오바마를 1993년 지도자가 될 “40세 이하 40가운데 한 사람으로 등재하였다. 12년 동안 오바마는 시카고 법학대학원에서 강사로 일했다. 또한 그는 1996년부터 2004년까지 대략 8년간 일리노이주 의원으로 활동했다. 1996년 일리노이 제13구에서 주 상원의원으로 선출된 그는 윤리 및 의료 입법에서 민주 공화 양당의 지지를 받기도 하였다. 1998년 총선과 2002년 총선에서 일리노이 상원의원으로 선출되었다.

 

20031월 오바마는 일리노이 주 상원의 의료 및 인간서비스 위원회 의장의 되었다. 200411월에 오바마는 일리노이 주 상원의원직에서 사임하고 미국 상원선거에 도전했으며 200514일 상원의원 취임선서를 하게되었다. 미국의 내셔널 저널지는 2007년의 선별된 득표를 평가한 자료를 근거로 그를 가장 자유주의적인상원의원으로 등재하였으며 2005년에 162006년에는 10위에 등재되었다. 아무튼 19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까지 명성을 쌓아가던 오바마는 2007210일 미국 대통령 선거출마를 발표하였고, 200811월 베트남 전쟁 참전용사 출신인 공화당의 존 매케인을 누르고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2009120일 버락 오바마는 미국의 제44대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하지만 그는 대통령으로 취임하자마자 전임 부시 대통령이 남겨놓은 문제들을 해결하는 일에 골몰해야 했다. 건강 보험 개혁안 통과와 이라크 전쟁에서의 철수 그리고 멕시코 만 원유 유출 사고 등이 그러했다. 미국이라는 나라가 워낙 보수적인 가치관을 고수한 나라다 보니 건강 보험 개혁안은 통과는 되었으나 실질적인 국민의료보험 같은 보편적인 의료보험제를 동원하지 못했다. 이것은 소위 자유주의 국가 미국이라는 나라가 가진 자유주의적 모순일 것이다. 즉 이런 보편적 복지 부분에서만큼은 미국은 그 자본주의의 야만성을 버리지 못했다. 2003년 미국의 일방적인 침략으로 시작된 이라크 전쟁은 2011년 말까지 철수하긴 했지만, 수렁에 빠진 상태에서의 철수였다. 결과적으로 그 이후 이라크에선 이라크 내전이 일어났다. 그리고 한반도 문제에 있어서 그는 공화당 보다 더 강경적인 대북강경정책으로 나갔고, 북조선을 국제적으로 고립시켰다.

 

그의 집권기 미국 사람들이 가장 잊지 못하는 사건이 있었는데, 파키스탄에서 전개되었던 넵튠 스피어 작전(Operation Netune Spear)일 것이다. 그 작전을 통하여 9.11 테러의 주범 오사마 빈라덴을 사살했다. 대통령 오바마는 빈라덴 사살 소식을 알리는 연설을 했고, 이는 미국사람들로 하여금 큰 결집력과 호소력을 가지게 했던 것 같다. 특히나 오사마 빈라덴이 죽었을 당시 미국 사람들은 아주 열정적으로 이를 환영했다. 아무튼 2012년 대선에도 출마를 하게된 오바마는 흑인과 히스패닉계 세력들의 지지를 기반으로 다시 한번 재선할 수 있었다. 재선에 성공한 오바마는 4년간 더 미국의 대통령 자리를 보냈다. 2차 집권 시기 그는 2016년 한 때 미국과 전쟁을 치렀던 베트남을 방문하여 쌀국수를 먹어서 인증하기도 했었다. 2017년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된 트럼프에게 넘겨주면서, 버락 오바마는 정치 인생을 마쳤다.

 

미국의 반트럼프 측 사람들에게 있어서 버락 오바마는 한국으로 치자면 대략 노무현 전 대통령이나 현재 문재인 대통령 스텐스일 것이다. 소위 미국사회에서 보수라고 여겨지는 공화당하고 대척점에 선 인물이라는 점에서 과거 노무현 전 대통령이나 현재 문재인 대통령이 가지고 있던 위치와 대략 비슷하다. 그리고 의료문제와 인종 문제를 공화당 측 인물들보다 더 신경을 썼다는 점에서 반공화당 성향을 지닌 미국인들에게는 그것이 매력 포인트로 다가온다. 하지만 그렇다 해서 그를 진보주의자로 묘사하는 건 올바른 평가라고 할 수 없다. 특히나 그의 외교정책을 보면 어떤 면에서는 미국 공화당 인사들보다 더 반북적인 스텐스를 취했고, 북조선을 더 고립시키는 제국주의적인 정책을 강화했다. 대북경제제를 더욱 강화하여 북을 경제적으로 고립시켰다는 것이다. 즉 오바마라는 인물은 한반도 문제에 있어서 남한의 친일지배계급과 뜻을 같이했다. 그리고 위에서 상술한 넵튠 스피어 작전도 사실 따지고 보면 파키스탄이라는 나라의 주권을 무참히 짓밟았던 제국주의적인 처사였다. 또한 그들이 일방적으로 무력침공하여 일으켰던 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오바마는 2014년까지 미군 철수를 하기로 했으면서 궁극적으로 철수하지도 않았다. 그 결과 아프가니스탄 전쟁은 지금도 진행 중이다.

 

정리하자면, 미국의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미국 민주당을 지지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비록 성공시키진 못했으나 미국의 의료제도를 개혁하고자 했던 진보적인 스텐스를 가진 인물이다. 반면 공화당 입장에선 사회주의적 가치를 좀 우호적으로 보는 인물이었다. 그랬기에 그가 의료보험 제도를 얘기했을 때, 복지라는 개념을 부정하는 공화당 극우파 세력들은 그 정책을 강력히 부정했던 것이다. 필자 입장에서 본 그는 비록 미국 내에서 의료 보험을 생각했던 사람일지는 몰라도 국제적인 문제에 있어서 굉장히 제국주의적이고 대북강경주의적인 사람이다. 그랬기에 북한을 이명박 정부와 같이 국제적으로 고립시키면서 그들의 붕괴를 꽤하기도 했었다. 따라서 필자는 그를 진보주의자가 아닌 아들 부시나 트럼프와 다를 게 없는 제국주의자로 간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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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dman 2020-11-07 22: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바마가 젠틀하게 나가서 그렇지, 지금 트럼프 행정부의 대중국 강경 노선의 시작도 오바마 때부터였죠. 부드러운 이미지 속에 가려졌지만, 말씀하신대로 미국 패권주의자임에는 틀림없는 것 같습니다

NamGiKim 2020-11-07 22:43   좋아요 0 | URL
올리버 스톤의 아무도 말하지 않는 미국 현대사 보면 어떤 네오콘 성향의 교수는 우익칼럼에 오바마시대에도 우리 미국의 정책은 변함이 없다 주장했다죠.
 

(이 글은 교양인에서 문제적 인간 시리즈 13번째 인물로 출간한 필립 쇼트의 마오쩌둥 평전 개정한 후기로 달린 글입니다. 필립 쇼트는 현재 마오쩌둥에 대한 서방학계의 평가를 분석했고, 주로 디쾨터를 비판이 주제로 삼은 듯 합니다. 디쾨터가 새로운 정보를 많이 참고한 건 사실이지만, 객관적인 학자라고 하기엔 무리가 있다고 보기에, 균형있는 독서와 지식추구를 위해선 이 글을 읽어볼 가치가 높습니다.)


프랭크 디쾨터는 지난 10년간 마오쩌둥과 중국 혁명에 관한 저술로 이 분야에 큰 영향을 끼친 연구자이다. 그는 수정주의 패러다임이 제시하는 두 논지, 즉 장제스는 괜찮은 지도자였으나 부당하게 비방을 당했다는 것, 그리고 마오와 그가 세운 전제정은 근본적으로 끔찍한 것이었다는 논지를 옹호한다. 디쾨터는 처음부터 자신의 색깔을 명확하게 드러냈다. 첫 번째 책은 《마오 이전의 중국: 개방의 시대》였고, 두 번째는 《해방의 비국: 중국 혁명의 역사》, 세 번째는 《마오의 대기근: 중국 참극의 역사》였다. 이 시리즈의 마지막 책, 《문화 대혁명: 중국 인민의 역사》는 2016년에 출판되었다. 디쾨터의 주장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장제스가 통치하던 시기의 중국은 ‘세계와 교류라는 측면에서 황금시대’였으며, 장제스가 마오의 군대에 패배한 것은 미국의 배신과 중국공산당에 대한 소련의 엄청난 원조가 주된 원인이었고 장제스 정부의 부정부패는 단지 미미한 원인이었다. 그리고 장제스 패배 이후 들어선 공산주의 체제 기반은 오직 “치밀하게 계산된 공포정치와 체계적인 폭력”뿐이었다. 마오가 집권한 후 첫 10년은 “20세기 역사에서 최악의 폭정의 하나였으며, 최소한 5백만 명 이상의 민간인들을 죽음으로 내몰고 그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을 불행하게 만들었다.” 두 번째 10년은 대약진운동과 문화혁명 시기였는데, 이 시기는 이전 시기보다 훨씬 더 비참했으며 결국 대학살로 정점을 찍었다. 디쾨터가 묘사했듯이, 마오는 “생의 끝자락에서 사적인 원한을 갚으려는 노인”처럼 중국을 지옥불로 밀어 넣었다.


디쾨터는 《마오》의 두 저자가 빠졌던 함정에 빠지지는 않았으나, 기본적인 생각은 그들과 같았다. 디쾨터의 책 《해방의 비극》은 1948년 린뱌오가 지휘하는 부대가 창춘을 5개월 동안 포위 공격했던 상황을 생생하게 묘사하면서 시작된다. 여기서 16만 명의 민간인이 아사한 것으로 디쾨터는 추정한다. 이 전투는 국공내전 중에 벌어진 가장 끔찍한 사건 가운데 하나였으며, 인민해방군 중령 장정룽이 쓴 《설백혈홍》에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설백혈홍》은 이 작전에 대한 공식 역사 기록에 의문을 제기하는 책 중 하나인데, 1980년대 후반 중국에서 짧게 나타났던 개방의 시기에 출판되었다. 그 당시 린뱌오는 포위 작전 중에 굶주림에 시달리던 창춘 주민들의 도시 탈출을 허락하지 않았다. 도시를 지키는 국민당 군대의 식량 공급에 추가로 압력을 가하려는 조치였다. 장제스는 국민당 수비대의 항복을 허락하지 않았으며, 그 부대에 어떤 일이 닥쳐도 상관없다는 태도를 보였다. 내전은 가장 끔찍한 전쟁이다. 정의상 거의 민간인과 군인의 구분을 지워버리기 때문이다. 창춘에서 벌어진 참상 덕분에 베이징을 비롯한 다른 도시들은 저항하지 않고 공산당 군대에 항복했다. 항복한 다른 도시의 주민들이 생존했다는 사실이 과연 창춘에서 희생된 주민들의 고통을 정당화할 수 있을까? 이와 비슷한 질문들이 제2차 세계대전 중 드레스덴이나 도쿄에 가해진 연합군의 소이탄 폭격, 그리고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된 원자폭탄과 관련해 종종 제기된다. 이런 공격 덕분에 전쟁이 일찍 종결된 것이 아닐까? 아니면, 이런 공격은 불필요했던가? 사람들의 의견은 분분하다. 마찬가지로, 창춘의 민간인 사망에 가장 책임이 큰 사람은 누구인가? 국민당 군대의 사병들을 먹이려고 민간인들을 굶긴 국민당 장군들인가? 항복을 금지한 장제스인가? 아니면, 민간인들이 도시를 떠나지 못하도록 한 공산당 군대인가? 양편 모두에게 어느 정도 책임이 있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디쾨터는 이런 문제도, 맥락도 언급하지 않는다. 1920년대부터 중국은 계속해서 전쟁을 치렀다. 1930년대에 장제스는 일본군의 진격을 막기 위해 황하의 거대한 제방을 일부러 파괴했다. 그때 죽은 사람 수가 50만 명이 넘었으며 또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굶주림에 시달렸다. 일본과 전쟁 기간 중에 사망한 중국인은 최대 2천만 명으로 추산된다. 일본군은 융단폭격을 퍼부었으며, 공산당 유격대가 시골에서 아무런 지원도 얻지 못하게 하려고 “모두 죽이고, 모두 불태우고, 모두 약탈한다”는 정책을 실시했다. 창춘에서 벌어진 잔학 행위는 단순히, 또는 주로, 인간 생명에 대한 마오의 무자비하고 무관심한 태도를 보여준 일이라고 할 수 없다. 이것은 한 세기 전 아편전쟁과 함께 시작된 일련의 유혈 사태 가운데 한 차례의 참사였다. 더 긴 관점에서 본다면, 이 사건은 중국 역사를 통틀어 자주 일어난 내전, 왕조 간 전쟁, 반란들 가운데 한 차례의 참사였다고 할 수 있다.


이전에 닫혀 있던 중구 각 지방의 문서보관소들을 활용했다는 점에서 디쾨터의 연구 작업은 특히 가치가 있다. 그런 문서보관소에는 지방 관리들이 중앙에서 내려보낸 지령에 어떻게 반응했는지를 보여주는 흥미로운 자료들이 보관되어 있다. 그리고 많은 경우에 중앙에서 내려온 지령문의 복사본도 보관되어 있는데, 해당 문건의 원본은 베이징 중앙 문서보관소에서 여전히 비공개 상태로 있다. 하지만 디쾨터가 발췌해 인용한 글은 대부분 길이가 매우 짧다. 따라서 《해방의 비극》과 《마오의 대기근》 내용 가운데 일부는 세심하게 읽어야 하며, 정확한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 문장 하나하나를 자세히 분석해야 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문건은 대부분 지방 관리들이 저지른 월권행위를 자세히 다루는데, 나중에 당이 조사하고 처벌한 것들이다. 하지만 이 점이 항상 불분명하게 서술되어 있다. 예를 들면, 《해방의 비극》에서 디쾨터는 안후이성 서부 지역에서 진행된 토지 개혁에 관해 덩샤오핑이 보고한 내용을 인용하는데, 지방의 당 지도부가 농민들이 고발한 지주와 그의 친척들을 사형시키는 경우가 끝도 없이 늘어나는 상황이 묘사되어 있다. 그러나 덩샤오핑이 이런 무차별적 사형 조치를 찬성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비난했다는 사실은 마지막 문장에 가서야 분명해진다.


당혹스러운 실수들도 보인다. 디쾨터는 1950년대 초 ‘진압 반혁명’ 운동 중에 마오쩌둥이 할당량을 지정하는 상황을 그리면서 “사형에 따른 사망률이 1천 명당 두 명에 도달하면, 그 다음에는 사람들에게 종신형을 선고해야 한다.”라는 마오의 말을 인용한다. 한편 중국인 역사가 양쿠이쑹은 동일한 문건을 이렇게 번역해 인용했다. “1천 명당 한 명의 비율을 초과해도 되지만 너무 많이 초과해서는 안 된다. 일반적으로, 1천 명당 두 명이라는 비율이 새로운 목표로 채택되어서는 안 된다. 이 범죄자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은 종신형에 처할 수 있다.” 이런 것을 괜한 트집 잡기라고 주장할 수도 있다. 아무리 훌륭한 책이라도 사실 관계 서술에서 실수는 나오게 마련이다. 그러나 디쾨터가 저지른 실수들을 살펴보면 희한하게도 일관성이 있다. 그 실수들은 모두 마오와 동료 지도자들을 비난하는 디쾨터 자신의 논거를 강화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마오쩌둥과 그가 세운 체제에 대한 일반인들의 인식이 형성되는 데 《마오의 대기근》보다 큰 영향을 끼친 것은 장룽과 핼리데이의 《마오》뿐이다. 《마오의 대기근》은 대규모 기아 사태의 참상, 농민들을 두려움에 떨게 한 지방 관리들의 잔인함, 재난 소식이 외부로 나가지 못하게 막은 강력한 통제, 그리고 마오쩌둥과 류사오치, 저우언라이등 당 지도부가 이런 재난이 불러온 고통에 적절히 대처할 준비가 전혀 안 되어 있었던 상황을 생생하게 그려냈다. 대기근 시기의 일상화된 참담함을 디쾨터는 훌륭하게 그려냈다. 이전 저술들과 마찬가지로 이 책도 인용문의 길이가 보통 대단히 짧았다. 이 결점은 그의 주요한 협력자인 저우쉰이 2012년에 펴낸 《중국의 대기근 1958~1962:문헌을 통해 본 역사》에서 일부 보충되었다. 여기서 저우쉰은 디쾨터가 지칭한 문건 가운데 상당수를 선택하여 긴 발췌문을 제공했다.


《마오의 대기근》의 가장 큰 문제점은 마오와 그의 동료들이 왜 그렇게 행동했는지 제대로 된 설명을 전혀 제시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왜 그들은 대중 동원이 풍요의 시대를 이끌 것이라고 믿었을까? 그들은 실제로 그렇게 믿었다. 마오는 모든 사람이 배불리 먹을 정도로 많은 곡물이 생산될 것이라고 믿었으며 그러고 나서도 엄청난 양의 곡물이 남을 것이라고 믿었다. 기근이 발생했다는 소식이 처음 전해졌을 때, 그들은 왜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을까? 왜 저우언라이는 기근의 심각성이 확실해진 뒤에도 피해를 줄이려는 노력을 전혀 하지 않았을까? 공산당 지도자들의 정책을 그저 “말도 안 되는 헛소리 망상에서 비롯된 변덕”이라고 일축하는 것은 이런 의문에 대한 답을 찾는 데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디쾨터는 공산당 지도자들이 “폭력을 찬미”했으며 “인간 생명에 대해 냉혹한 무관심”을 보였고, “사상자 수에 개의치 않고” 전쟁의 논리를 택했다고 주장했다. 이런 주장은 어느 정도 의심할 필요도 없이 옳다. 그러나 그가 이 책에서 제시한 사례 하나는 조금 다른 그림을 보여준다. 공산당 정치국의 원로 지도자였던 리셴넨은 온갖 고초를 겪은 강인한 인물이었다. 그는 대장정의 마지막 시기에 회족 기병대의 공격을 받아 자신이 이끌던 부대가 궤멸당하는 고초도 겪었다. 하지만 백만 명 이상이 굶어 죽은 허난성의 어느 현을 방문했을 때, 그는 슬픔이 북받쳐 그만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내가 이끌던 서로군의 패배는 지극히 잔혹한 일이었지만 그때도 나는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그런 나도 광산현에서 일어난 참상을 보고는 도저히 견딜 수 없었다.”


디쾨터는 “이러한 죽음들이, 부실하게 집행된 어설픈 경제 계획의 의도치 않은 결과라는 견해가 널리 퍼져 있다.”라고 소개하면서 이 견해가 옳지 않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디쾨터 자신이 인용한 문서 보관소의 문건들 대부분이 바로 이 견해가 정확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또 그는 “사실상 농촌 지역은 마치 문둥병자들이 사는 곳처럼 외부와 격리되었다.” “마오 주석에게 전달되는 정보는 모든 단계에서 왜곡되었다.”라고 서술하였다. 이 두 가지 진술 모두 당시 기록으로 확인된다. 시간이 지나 결국 농촌의 실상이 밖으로 알려졌고, 당 중앙은 조사조를 파견했으며, 정책은 바뀌었다.


《마오의 대기근》에 따르면 이 비극의 책임은 모두 “공포와 폭력이 기반”인 공산주의 체제에 있다. 하지만 이 책에 기록된 것과 같은 참상과 관료들이 자행한 고문은, 19세기 중국에 왔던 서양 선교사들이 남긴 기록, 중국의 봉건 왕조 시대에 작성된 형벌에 관한 문헌들, 국민당이 통치하던 시기의 기록에서도 발견된다. 시어도어 화이트(Theodore White)는 1941년부터 1943년 사이에 발생한 허난성 기근에 관해 썼다. 이때 농민이 약 3백만 명 정도 사망한 것으로 추정 되는데, 이것은 대약진 운동 시기에 허난성에서 발생한 사망자 수와 어느 정도 비슷하다. 이곳을 마오가 방문했을 때, 지역 국민당 간부들이 연회를 열어 대접해주었는데, “닭고기, 소고기, 남방개, 설당을 입힌 세 종류의 떡”이 나왔다고 한다. 그러나 농촌 지역에 나가 보니 전혀 다른 광경이 눈앞에 펼쳐졌다고 한다.


“우리가 보는 앞에서 농민들이 죽어 가고 있었다. 길가에서, 산속에서, 기차역 옆에서, 자신의 진흙집에서 그리고 논밭에서 죽어 갔다. 그런 와중에 정부는 마지막까지 한 푼이라도 더 세금을 뜯어내려 했다. 어떤 항변도 통하지 않았다. 먹을 것이 없어 느릅나무 껍질을 벗겨 먹던 농민도 종자로 쓰려고 마지막까지 남겨놓았던 곡물을 세금징수원 사무실에 갖다 바치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허난성 기근 소식을 충칭의 어느 신문사가 보도했을 때, 장제스 정부가 생각해낸 유일한 대응책은 해당 신문사에 3일간 업무 정지 명령을 내리는 것이었다. 2년 뒤 일본이 일명 ‘일호 작전’을 개시할 즈음에는 허난성 주민들이 장제스 정권을 그야말로 맹렬히 증오하고 있었다. 주민들은 외국 침략군에 맞서 중국인을 보호한다는 국민당 군대를 공격해 병사들의 무기와 식량을 탈취하고 장교들을 살해했다. 이런 경험이 있었기에 수억 명에 이르는 중국인들이 디쾨터가 ‘해방의 비극’이라고 부르는 상황을 환영했던 것이다. 이전에 경험한 것에 비하면, 공산당 통치는 그리 나쁘게 보이지 않았다. 중국인 소설가 류전윈은 전쟁 중 허난성에서 발생한 기근을 다룬 소설을 썼는데, 그 작품을 원작으로 삼아 에이드리언 브로디와 팀 로빈스가 출연한 영화가 만들어졌다. 류전윈은 기근을 겪고 살아남은 자신의 할머니에게 그 시절과 관련해 무엇을 기억하는지 물었다. 할머니는 자세한 답을 주지 않았다. “그해에 뭐 특별한 게 있었나? 사람들은 언제나 굶어 죽었는걸.” 공산당이 집권하기 전, 장제스가 중국을 통치하던 시기를 ‘황금기’라 부르기도 하는데 ‘황금기’에 관해서는 이쯤에서 그만 살펴보기로 한다.


대약진 운동 기간 중 공산당 간부들은 주민들에게 야만적인 처벌을 가했다. 하지만 그들이 새롭게 무엇인가를 발명해낸 것은 아니다. 시체 먹기, 인육을 먹는 풍습, 여자와 어린아이를 내다 파는 행위, 이 모든 것이 다 예전부터 있었다. 물론 그런 일들이 1950년대와 1960년대까지 지속되었다는 사실은 마오 정권의 엄청난 수치다. 그러나 마치 공산당이 그런 행위들을 창조한 것처럼 주장하는 것은 더없이 어리석은 일이다.


디쾨터가 보기에 마오쩌둥은 겉으로 “국민의 복지를 걱정하는 자애로운 지도자”인 척하는 폭군이었으며 그러는 동안 “중국은 지옥으로 떨어졌다.” 디쾨터는 1959년 3월 25일 상하이에서 마오가 최고위급 지도자들과 회의하는 도중에 한 발언이 명백한 증거라고 보았다. 회의에서 마오는 먼저 곡물 생산량이 지난 1년 동안 “엄청나게 증가했음”을 확인한 다음. 동료들에게 이 풍성한 수확량의 1/3을 징발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이전까지 1/4을 징발하던 것보다 늘린 것이다. 그러고 나서 마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먹을 것이 충분하지 않으면 사람들은 굶어 죽는다. 인민 절반이 배를 채울 수 있도록 나머지 절반은 죽도록 놔두는 것이 낫다.” 디쾨터는 이 구절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여, 마오가 대약진운동이 확실히 완수될 수 있도록 중국 인구의 절반을 굶어 죽게 내버려둘 준비가 되어 있었다고 주장한다.


당시에 마오의 발언을 모두 정확히 기록한 문건을 보지 않더라도, 디쾨터의 주장을 의심할 만한 이유는 충분하다. 먼저, 만일 모든 지도자들이 풍성한 수확을 확신했다면 왜 마오나 다른 누군가가 광범위한 기근이 발생할지 모른다고 예상했던 것일까? 다음으로, 마오의 발언이 포함된 원래 문건의 일부를 저우쉰이 자신의 책에 실었는데, 그것을 보면 디쾨터의 주장과 달리 마오의 발언은 농업에 관한 연설이 아니라 공업 관련 토론 도중에 갑자기 나온 것이었다. 저우쉰이 인용한 바에 따르면, 마오는 공업 투자는 반드시 목표를 정해야 하고 정밀해야 한다면서 그 이유는 “자원을 고루 배분하면 대약진운동을 그르치게 될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런 다음에 마오는 비교 삼아 예를 들었는데, 그 예가 바로 기근 때 다른 사람들이 살아남으려면 “절반의 사람들이 죽는 것”을 허용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마오의 정신은 종종 옆길로 샜다. 불합리한 추론을 낳을 수도 있는 문제의 발언을 논리적으로 설명해보면, 마오는 공업 프로젝트 가운데 어떤 것들은 지원을 끊어야 다른 사업이 진행될 수 있다는 주장을 입증하기 위해 이전에 있었던 곡물 수확에 관한 토론에서 이런 비유적 표현을 끌어온 것이었다. 지금 우리는 바로 이것이 실제로 마오가 뜻한 바였음을 알고 있다.


디쾨터의 책이 나온 이후 당시의 토론이 어떠했는지를 보여주는 정확한 중국어 기록 전문이 입수되었고, 그 기록을 보면 마오는 위의 발언에 앞서 이런 말을 했다. “우리가 계획을 완수하기를 바란다면 프로젝트의 수를 크게 줄여야 한다. 주요 프로젝트가 1,078개가 있는데 이를 500개로 단호히 줄여야 한다.” 흥미롭게도 이 구절은 디쾨터와 저우쉰의 서술에서 누락되어 있다. 더 면밀히 살펴보면, 마오가 당시 곡물 징발량을 대폭 늘리라고 지시했다는 디쾨터의 주장 역시 근거가 없다. 당시 겨울에서 초봄까지 다른 모든 기록된 마오의 발언들을 살펴보면, 농민에게 가하는 압력을 ‘덜고’ 불필요한 고통을 ‘피하는’것이 중요하다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바로 전년도 11월에 마오는 대중 동원이 절제되지 않으면 “반드시 중국 인구의 절반이 죽을 것”이라면서 위의 발언과 놀랍도록 비슷한 표현을 써서 경고했다. 이 경고를 했던 연설에서 마오는 마지막으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사망자가 안 생기도록 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라”


상하이에서 마오가 한 말이 곧바로 유출되면서 그 내용을 알게 된 일부 성 지도자들과 기층 간부들이 어떤 투쟁에서든 사망자가 생기게 마련이며 이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했다는 것은 사실이다. 마오의 발언 내용은 원래 ‘극비’로 지정되어 30여 명의 회의 참석자에게 문건의 형태로 배포되었는데 해당 문건에는 “회의가 끝난 뒤 반환할 것”이라고 적혀 있었다. 한편 당시에 마오가 어처구니없는 자기기만에 빠져 있었으며, 마오 자신이 ‘우경 기회주의’를 통렬히 비판한 것이 뒤이어 발생한 도를 넘는 행위들과 무관하다고 착각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오가 대규모 기아 사태의 가능성을 용인하거나 환영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기아로 가장 큰 고통을 겪은 지역에서 나온 증거를 포함해 입수 가능한 모든 증거들은 이와 정반대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제까지 나는 장룽 핼리데이의 《마오》와 프랑크 디쾨터의 저술들, 특히 《마오의 대기근》에 대해 상당히 길게 서술했다. 그 이유는 이 책들이 이례적으로 큰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다. 어쩌면 두 저술을 하나로 묶어서 다루는 것은 부당할지 모르겠다. 디쾨터의 저술에는 새로운 정보가 많이 담겼으나, 《마오》는 근본적으로 반론이 목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두 책은 공통점이 있다. 두 책 모두 서술 대상으로 삼은 시대에 대한 균형 잡힌 해설을 제공하기보다, 그 시대를 기소하는 데 필요한 논지를 제공하기 위해 시작되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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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이 베트남 문제에 본격적으로 개입한 것은 1960년대 초였다. 미남형 대통령 존F.케네디(John F. Kennedy)는 쿠바의 피델 카스트로 정권을 전복시키려고 노력하는 한편, 베트남에서도 공산주의 세력의 확장을 막고자 노력했다. 이에 따라 케네디는 남베트남의 부패한 응오딘지엠(Ngo Dinh Diem) 정권에 대대적인 물적 인적 지원을 했고, 1961900명 안팎이었던 남베트남 주둔 미군사고문단의 숫자는 1963년 불과 2년 만에 16,000명으로 증가했다. 그러던 1963년 응오딘지엠 정권이 즈엉반민(Duong Van Minh)이 주도한 군부 쿠데타로 살해되고, 케네디 또한 리 하비 오스왈드(Lee Harvey Oswald)에 의해 암살당하면서, 미국의 대통령 자리는 당시 부통령이었던 린든B.존슨이 이어받게 됐다.

(통킹만 사건 당시 작전 지도)

 

대통령 존슨은 전 대통령이던 케네디보다 반공성향이 강한 인물이었다. 존슨 또한 미국 관료들이 전적으로 믿었던 도미노 이론(Domino Theory)를 강력히 신봉했고, 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 베트남의 승리로 끝났을 때, 도미노 이론에 따른 아시아의 공산화를 두려워했던 인물이었다. 1964년 남베트남의 상황은 심각했다. 응오딘지엠 통치부터 무너지기 시작한 남베트남은 군부 내부에서 일으키는 체제전복 시도가 끊임없이 일어났고, 민중은 남베트남 정권에 등을 돌렸으며, 1960년 응오딘지엠 정권 타도를 목적으로 창설된 베트콩은 농민들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 북베트남의 지도자 호치민(Ho Chi Minh)이 당시 예측했던 대로 사이공 정권은 분파 투쟁에 휘말려 있었으며, 농촌지역에서는 심각해지는 위기 상화에 대처할 능력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1964년이 되면서 미국은 베트남에 대한 전면적인 개입을 생각하게 됐다. 19642월 미국은 통킹만 사건을 단행하기에 앞서 이른반 북베트남에 대한 북폭을 정당화시킬 수 있는 모든 세밀한 상황조작을 추진했다. 미국의 합동참모본부는 34A라는 일반 암호 아래 북베트남에 맞서는 일련의 비밀활동 계획을 추진할 것을 승인했고, 폴 하킨스 장군(Paul Harkins)의 명령에 따라 진행된 이 작전의 궁극적인 목적은 하노이측으로 하여금 남베트남에 가한 압박의 대가를 치르게 하기 위함이었다. 민주화운동가 리영희가 쓴 전환시대의 논리에는 작전의 내용이 나오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U-2 정찰기에 의한 북베트남 공역 침입 및 정찰 강행

2. 북베트남 내부 정보수집을 위한 심리작전, 특수요원(스파이)의 투하

3. 정보수집을 윟나 북베트남인의 납치와 유괴

4. 북베트남 오지 중요시설 파괴를 위한 파괴반 투입

5. 철도·교량 파괴를 위한 해상으로부터의 남베트남 군부대의 기습공격

6. 소형 고속정에 의한 북베트남 연안시설 포격

 

출처 : 전환시대의 논리 p.426

 

전환시대의 논리에는 이렇게 대표적으로 6가지를 언급했다. 이중 6번째에 있는 소형 고속정에 의한 북베트남 연안시설 포격은 미국이 통킹만 사건을 일으키기 전 진행된다. 이 은밀한 작전은 미국 대통령 존슨이 명령하고 국방장관 로버트 맥나마라(Robert McNamara)의 책임하여, 연합참모부에 설치된 반란진압·특수활동 담당 특별보좌관실이 지휘했다. 이에 따라 북베트남에 대한 비밀작전을 실행함과 동시에 미국은 이 작전의 일환으로 라오스에 대한 공중작전을 실행했고, 미국 민간항공 에어 아메리카(Air America)를 가장한 미국 CIA 소속기와 조종사가 이 작전에 참가했다.

 

19647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유럽전선과 한국전쟁에 참전하여 활약했던 인물인 윌리엄 웨스트모얼랜드(William Westmoreland)가 남베트남 주둔 미군 부대 사령관이 되었다. 총사령관 웨스트모얼랜드의 지휘하에 미국은 통킹만 사건을 촉발하기 위한 작전을 7월 말에 실행하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북베트남령의 섬들에 상륙하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1964731일 남베트남 공격 보트들이 다낭을 떠나 북베트남 영해에 진입했다. 이들의 공격 목표는 북위 19도선에서 60마일 떨어진 북베트남 연근해의 섬들이었고, 해안에서 최소한 8마일은 떨어져 있어야 한다는 지시에 따라 구축함 매독스(USS Maddox)호는 해안에서 동남방 100마일 해역에서 통킹만을 향해 베치 되었다.

(USS 매독스호, 미국 구축함인 USS 매독스호는 북베트남 영해에 침투해서 북베트남측과 교전을 벌였다.)

 

그날 남베트남 무장 보트들은 북베트남의 섬 혼메(Hon Me)와 혼니우(Hon Nieu)에 상륙하여 공격을 개시했다, 이렇게 상륙했던 이들은 집중적인 포격이 몇 분 동안 이어지는 사이 상륙정PT를 타고 뭍에 오른 병사들은 후퇴하던 게릴라들을 송두리째 섬멸했다. 미국의 저명한 저널리스트인 데이비드 핼버스탬(David Halberstam)1972년에 출간한 베트남 전쟁을 다룬 저서 최고의 인재들에서 이 작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1964년 이른 여름에 34A 작전활동은 강렬해졌다. 남베트남에서의 전쟁은 잘 진행되지 않고 있었다. 북베트남을 후미에서 공격하는 방식을 취한 미국은 눈에 보이지 않는 공격이 전개되고 있으며 전쟁에 내재된 대가가 있다는 사실을 하노이에게 슬그머니 경고하고 있었다. 전복의 시도는 예상되로 헛된 것으로 판명되었다. 같은 시기에 비록 북베트남에 별다른 손해를 입히지는 않았지만 그들을 더욱 짜증나게 만들었던 것은 사전에 발표도 없이 라오스 국경지역에 가한 폭격과 해안에 위치한 북베트남의 해군 시설에 대해 남베트남이 초계어뢰정으로 치고 빠지는 습격이었다. 후자는 큰 피해를 일으키지 않았지만, 북베트남에서는 보복의 압박이 커져갔다. 초계어뢰정으로 기습하는 일은 하킨스와 맥 번디 장군이 이끄는 베트남 군사원조사령부의 명령에 따라 베트남의 선원들까지 참여시킨 가운데 계획되고 시작되었다. 맥나마라와 러스크는 이 사실을 모두 알고 있는 상태에서 이 작전을 조종했다. 그것은 사실상 미국의 작전이었다.”

 

출처 : 최고의 인재들 p.659~660

 

남베트남 툭수부대가 북베트남의 섬에서 상륙작전을 감행하고 매독스 호가 통킹만으로 진입한지 36시간이 지난 82일 호놀룰루에 있는 미 태평양함대 사령부에 전문을 보냈고, 이에 따라 매독스 호가 3척의 북베트남 어뢰정과 교전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북베트남 어뢰정 3척이 파괴되고 10명의 사상자가 나왔다. 다만 미군 측 부상자는 한명도 없었다. 호치민 평전의 저자 윌리엄 J.듀이커에 따르면 1차 교전에서 북베트남측이 발포한 이유는 그 지역 베트남민주공화국 지휘관들이 두(통킹만 영해의 매독스호와 남베트남군의 북베트남측 섬의 상륙을 가리킨다.) 작전 사이에 관련이 있다고 확신하고, 현장에서 미군 전함을 공격하라고 명령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어쨌든 매독스 호가 북베트남의 어뢰정과 교전을 벌이자 국방부와 국무부의 긴급 조치 관련 지휘부 인사들은 본격적인 베트남전 비상근무체제에 돌입하게 됐다.

(교전 당시 사진)

 

전문을 받은 미국의 존슨 대통령은 또 다른 구축함 터너 조이(Turner Joy) 호에게 매독스 호와 합류할 것을 명령했다. 따라서 84일 이른 시각 2척의 미국 군함이 암호명 데 소토(DE SOTO)라는 정보 수집 임무를 띠고 급파되었다. 이와 비슷한 시기에 34-A 작전에 동원된 남베트남 전투함들도 북베트남 시설들을 공격했었다. 196484일 존슨 행정부는 존슨 행정부는 매덕스와 터너조이 구축함이 또 한 차례 공격을 받았다고 공식적으로 발표했다. 두 구축함은 북베트남 연안으로부터 22km 이내로 들어와서 활동하고 있었고, 그 날 주위에는 북베트남 함정이 하나도 없었다. 북베트남으로부터 실제적인 공격은 없었지만 미국의 구축함들은 자신들을 공격하기 위한 수중음파탐지기와 무선 신호를 발견했다. 매덕스호의 존 헤릭(John J. Herrick) 대령이 국방부에 전문을 보냈다. 이 전문은 박태균 저자의 책 베트남 전쟁 잊혀진 전쟁, 반쪽의 기억에 나오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매덕스호에 가까이 있는 북베트남 함정으로부터 어뢰가 발사된 것 같다. 그러나 소리만 있었지 보이지는 않는다. 계속되는 매덕스호의 어뢰 관련 보고서는 분명하지 않으며, 매덕스호 자체의 엔진 소리를 어뢰 공격으로 잘못 탐지한 것 같다.”

 

출처 : 베트남 전쟁 잊혀진 전쟁, 반쪽의 기억 p.164

 

이 마지막 전문은 대통령에게 보고되지 않았고, 두 번째 공격에 관한 전문을 받게 된 존슨 대통령은 당일 저녁 대국민 선언문을 발표했다. 존슨이 발표한 대국민 선언문이 있기가 무섭게 다음 날인 85일 미공군을 출격시켜 북베트남 어뢰정 기지, 석유 저장소 등 4개소를 공격하고 어뢰정 및 그 밖의 함정 25척을 격침 또는 격파했다. 이것은 존슨 대통령의 북폭 명령에 의한 것이었다. 통킹만에 대한 보복공격으로 북베트남 폭격을 개시한 미국은 당시 북베트남을 폭격한 미군 조종사 1명을 포로로 붙잡았고, 이 포로가 바로 베트남 전쟁 최초로 북베트남측에게 붙잡힌 미군포로였다. 베트남 10000일의 전쟁의 저자 마이클 매클리어는 자신의 책에서 통킹만 사건 이후 미국의 보복성 폭격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존슨이 대국민담화를 발표하는 시간은 이미 폭격기들이 발진한 다음이었다. “오늘 통킹 만의 공허상에서 미국 군함들을 공격하는 새로운 적대 행위가 있었습니다. 나는 미국 군대에게 이에 상응하는 군사적인 조치를 취하라고 명령했습니다.” 첫번째 북폭에서 64대의 해군 전폭기들이 17도선 위에 자리잡고 있는 빈(Vinh)의 항구 시설과 유류 저장 시설들을 폭파했다. 국방부는 북베트남 유류 공급 시설의 10%가 파괴되었다고 평가했다. 10분 동안 올린 전과였다. 미국은 1964년 8월 5일 오전 11시, 아무런 선전 포고도 없이 베트남전에 직접 참전하게 된 것이다.”

출처 : 베트남 10000일의 전쟁 p.203~206

(통킹만 사건을 보도한 미국의 언론)

 

통킹만 사건에 대한 보복 폭격이 있고나서 2일 뒤인 196487일 존슨 대통령은 이른바 통킹만 결의안(Gulf of Tonkin Resolution)을 의회에 내놓았고, 미국 하원은 414 0으로 지지하였으며, 상원은 이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이로써 미국이 북베트남에게 공식적으로 선전포고를 한 것이고, 베트남 전쟁에 전면적으로 개입하게 된 것이다.

 

통킹만 사건의 진실은 19716월 뉴욕타임즈가 실은 펜타곤 페이퍼로 본 미국의 군사개입 확대과정 30이라는 제목의 기사에 의해 폭로됐다. 펜타곤에서 일했던 대니얼 엘즈버그(Daniel Ellsberg)가 폭로한 펜타곤 페이퍼에는 1964년 미국이 개입한 통킹만 사건에 대한 진실이 담겨있었고, 그 내용은 통킹만 사건이 미국에 의해 조작되었다는 것이다. 특히나 존슨 대통령이 발표한 두 번째 공격은 없었다는 것이 내용의 핵심이었다. 즉 두 번째 공격은 미국의 조작이라는 사실이다. 1964년 통킹만 사건 당시 북베트남측도 통킹만 사건에 대한 발표를 했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작전을 지휘하는 로버트 맥나마라)

 

미제국주의와 사이공의 괴뢰들은 항공기와 함정으로 베트남공화국의 영공, 영해를 빈번히 침범하면서 스파이 활동과 파괴활동을 위한 많은 돌격대를 잠입시키고 있다. 730, 미제국주의와 사이공정권의 군함은 북베트남 영내의 두 개의 섬을 동시에 공격하였다. 81, 라오스 방면에서 침범한 T-28형기 4대가 게안 성의 남칸 국경감시소와 눈데 읍에 기총소사를 가했다. 남칸 감시소는 82일에도 라오스 방면에서 침입한 7대에 의해서 공격을 받았다. 731일부터 82일에 걸쳐, 미국 해군 구축함이 베트남공화국의 연안에 접근, 초계중인 베트남공화국 해군 초계정에 대해 공화국의 영해상에서 발포했다. 초계정은 이에 응전, 이를 공화국 영해에서 추방했다. 83일 오후 11, 타이콘테로가 기동함대의 엄호하에 군함 4척이 공화국 영해에 침입, 구앙빈 성의 론, 데오 강 양 지구에 포격을 가했다. 85일 오후 0시 반부터 5시까지, 통킹만에 정박한 콘스털레이션, 타이콘테로가 두 항공모함에 발진한 스카이레이더기는 공화국 영내 각지를 수차례에 걸쳐 공격하고 폭격을 가했다. 공화국 인민해방군과 인민은 이들을 반격, 그중 3대를 격추하고 3대에 손해를 입혔다. 조종사 장교 1명을 사로잡았다.”

 

통킹만 사건은 1971년 대니얼 엘즈버그가 폭로한 문서 내용에서 얘기하는 것과 같이 미국에 의해 조작된 사건이다. 사실 통킹만 사건은 미국이 베트남에 대한 침략전쟁을 개시하기 위해 만들어낸 구실에 불과했다. 무엇보다 북베트남 영해에 들어가 그들의 공격을 유발시킨 거도 그렇고, 남베트남 특수부대를 북베트남의 섬들에 상륙시켜 교전을 벌인 것도 미국의 작전이었다. 이들은 베트남에 대한 공격을 감행하기 위해 치밀한 군사작전을 감행한 것이다. 일각에서는 베트남 전쟁에 대해 북베트남이 먼저 시작했다는 반공주의적 도그마에 사로잡혀 있다. 그러나 수많은 문건과 펜타곤 페이퍼가 증명하듯이 미국은 통킹만 사건을 빌미로 베트남에 대한 침략전쟁을 가속화했다. 다만 그 수법이 치밀한 작전과 계획에 의한 것이기에 더 교활했을 뿐이다. 통킹만 사건을 통해 베트남 전쟁에 전면적인 개입 및 침략을 개시한 미국은 결국 본인들이 일으킨 전쟁의 수렁에 빠지게 되며, 미국건국이래 최초의 패배를 맞보게 된다.

 

참고자료

 

베트남 10000일의 전쟁, 마이클 매클리어, 을유문화사, 2002

 

베트남 전쟁, 잊혀진 전쟁 반쪽의 기억, 박태균, 한겨례출판, 2015

 

전환시대의 논리, 리영희, 창비, 1999

 

최고의 인재들, 데이비드 핼버스탬, 글항아리, 2014

 

호치민 평전, 윌리엄J.듀이커, 푸른숲,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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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년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을 종결시켰던 디엔비엔푸 전투(Battle of Dien Bien Phu) 20세기 역사에 있어서 매우 큰 의미를 가지고 있다무엇보다 호치민(Ho Chi Minh)과 보 응우옌 잡(Vo Nguyen Giap) 장군이 이끌었던 농민군대 베트민(Viet Minh)이 강대국 프랑스의 최정예 부대를 섬멸하고 식민지해방전쟁을 영광스러운 승리로 이끌었기 때문이다그러나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당시 제국주의 국가 프랑스 편에 서서 그들의 독립투쟁을 노골적으로 방해했던 존재가 있었다이 나라는 소위 자유의 나라(Land of Freedom)’이라고 불리는 미국(United States)이었다.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지휘했던 그는 한국전쟁이 끝날 무렵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1946년 프랑스가 베트남의 항구도시 하이퐁을 군함으로 포격하며 민간인 6,000명을 학살하고 시작한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에서 미국은 프랑스를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1949년 마오쩌둥이 이끄는 홍군이 내전에서 승리하여 중국 대륙을 통일하고 스탈린이 이끄는 소련이 자체적으로 수소폭탄을 개발하면서 미국은 공산주의에 대한 반감이 극심해졌다특히나 1950년에 일어난 한국전쟁(Korean War)을 기점으로 미국은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을 이른바 자유주의 대 공산주의라는 반공이데올로기적인 관점으로 접근함으로써프랑스가 자신들의 식민지 지배를 합리화하기 위해 세운 바오다이(Bao Dai) 황제를 위해 1,000만 달러나 지원했었다심지어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사용하던 네이팜 폭탄과탱크항공기대포박격포자동소총, PT 보트 등의 군수물자들도 프랑스에게 지원해줬다이러한 미국의 지원은 1950년 한국전쟁을 시작으로 연단위로 증가했고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 마무리로 접어들던 1954년엔 프랑스의 전쟁비용 80% 가까이를 미국이 대신 부담했다.

 

그러나 미국의 이런 적극적인 지원에도 불구하고 프랑스는 전쟁에서 지고 있는 중이었고, 1954년 3월 13일 디엔비엔푸 전투가 시작되면서 패배는 사실상 기정사실이 되었다디엔비엔푸 요새가 포위되자 프랑스는 미국의 아이젠하워(Eisenhower)에게 도움을 요청했다프랑스의 도움 요청을 받은 아이젠하워는 프랑스군의 패배를 막기 위해 참모들과 다양한 방안을 검토했다이들은 이른바 독수리 작전(Operation Vulture)이라 하여 일본 오키나와와 필리핀에 있는 미국 공군기지의 전투기들을 출격시켜 디엔비엔푸 요새를 점진적으로 포위해 나가고 있는 보 응우옌 잡 장군의 군대를 대상으로 대대적인 대규모 공습을 실행하고자 했다.

(독수리 작전, 1954년 디엔비엔푸 요새가 베트민군으로부터 포위당했을 당시, 미국은 프랑스를 구하기 위해 공중폭격을 동반한 작전을 구상했었다.)

 

독수리 작전을 입안하는 것과 동시에 미국은 디엔비엔푸 요새를 포위하고 있는 베트민들을 대상으로 원자폭탄(Atomic Bomb) 2~3발 정도를 사용하는 방안을 논의했었다실제로 미국의 대통령 아이젠하워는 1954년 4월 30일 원자폭탄 사용 문제를 부통령 닉슨(이후에 대통령이 된 그 사람 맞다.)과 NSC 사무국장 로버트 커틀러와 함께 논의했었다비슷한 시기 조르주 비도 외무장관을 포함한 프랑스 관리들은 덜레스가 일주일 전에 원자폭탄 두 발을 주겠다는 제안을 했다고 보도하기도 했으며당시 미군 공군참모총장인 네이선 트와이닝 장군은 나중에 다음과 같은 얘기를 남기기도 했다.

(펜타곤 페이퍼, 1971년 대니얼 엘스버그가 폭로한 미국의 1급 기밀문서 펜타곤 페이퍼에는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당시 미국의 개입에 대해서 상세하게 다루고 있다.)

 

래드퍼드 합참의장과 나는 전술핵무기 3발 정도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나는 지금도 그것이 좋은 아이디어였다고 생각한다상당히 고립된 지역이었기 때문이다한 발만 떨어뜨려도 기선을 제압할 수 있다반대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그런 다음 남은 빨갱이들을 쓸어내면 프랑스군은 라마르세예즈(프랑스 국가)’를 연주하면서 말짱하게 디엔비엔푸에서 빠져나올 수 있을 것이다그럼 빨갱이들은 이럴 것이다. ‘저놈들 우리한테 또 그럴 거야조심해야겠어.’”

(디엔비엔푸 전투 당시 투입된 프랑스 공수부대, 디엔비엔푸 전투 당시 프랑스는 최정예 부대를 전투에 투입했었다.)

 

물론 디엔비엔푸 전투는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프랑스의 패배로 끝났고프랑스 군대에게 낙하산으로 보급품을 지원한 것을 제외한다면 미국의 군사적 개입은 없었다그러나 분명한건 미국이 침략자 프랑스를 돕기위해 핵공격까지 감안할 의사가 있었다는 것과 실제로 그것을 실행에 옮기고자 했었다는 사실이다올리버 스톤(Oliver Stone)과 피터 커즈닉(Peter Kuznick)의 공저인 아무도 말하지 않는 미국 현대사(The Untold History of the United States)’에 따르면 신무기 사용을 포기한 것은 디엔비엔푸 지역에서 베트민 군대가 프랑스군에 너무 가까이 있어서 자칫 프랑스군까지 피해를 볼 우려가 컸기 때문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함락된 디엔비엔푸 요새, 1954년 5월 7일 56일간의 포위끝에 보 응우옌 잡 장군의 군대는 디엔비엔푸 요새를 함락시켰다. 이것은 20세기 역사에 있어 식민지 국가가 지배자를 물리친 새로운 역사였다.)

 

이후 아이젠하워와 덜레스는 앞에서 언급한 프랑스측에게 제안했던 핵공격 얘기에 대해 극구 부인했다그러나 미국이 핵무기 사용을 제안했다는 얘기는 프랑스 장군 폴 엘리외무장관 비도외무차관 장 쇼벨이 남긴 일기와 회고록에 언급돼 있으며F.케네디(John F. Kennedy) 대통령 보좌관을 지낸 정치학자 맥조디 번디(McGeorge Bundy)도 비도의 주장대로 덜레스가 비도에게 원자탄 사용 문제를 제기했을 개연성이 높다고 보고 있다당시 덜레스가 나토는 핵무기를 재래식 무기화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그 방증이다따라서 당시 핵무기를 사용하지는 않았지만미국이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핵무기 사용까지 깊이 고려했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참고자료

 

아무도 말하지 않는 미국 현대사 I들녘,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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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 문제에 대한 무지

(좋은 글이라 퍼왔습니다.)

홍콩은 1842년 아편전쟁 이후 청나라와 영국이 맺은 난징조약의 결과로 영국에 조차되었다. 아편전쟁이란 영국이란 마약상이 인도에서 생산해낸 약을 팔다가 국민의 건강을 우려한 중국이 이를 막으면서 수가 틀리자 전쟁을 일으킨 것에 불과하다. 아편전쟁 자체가 잘못된 전쟁이었기 때문에, 이후 맺어진 난징조약은 중국이 언제라도 무시해도 사실 비난할 수 없는 이야기였다. 게다가 난징조약에서 영국은 분명히 홍콩 반환을 약속했기 때문에, 중국이 이를 넘겨 받은 것은 이상한 일도 아닐 뿐더러, 오히려 늦은 감이 있다. 인도 같은 경우는 포르투갈에 비슷하게 빌려준 고아를 무력으로 탈환했는데, 중국은 조약을 지키고 평화적으로 해결했으니 중국은 오히려 이 문제에 대해 인내력을 보였다고 봐도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공주의에 경도된 이런 혐중세력은 중국이 마치 자유로운 홍콩을 강제 점령한 것처럼 알고 있다.

이렇게 이들 혐중세력은 마치 홍콩이 독립국이었다가 (혹은 처음부터 영국령이었다가) 1997년 중국의 제국주의적 압박때문에 중국에 넘어간 것으로 잘못 알고 있는 자들이 다수다. 또한 영국령 홍콩은 그런 혐중세력이 생각하는대로 민주주의 체제도 아니었으며 영국 지배하에서 여러번 홍콩에서 폭동이 날 정도로 살기 좋지 않았다. 홍콩이 그나마 민주개혁을 하게 된 것은 영국인이 떠나갈 때쯤 자신들을 대신해 홍콩의 주권을 가진 중국에게 ˝엿먹으라˝는 심정으로 자기들은 실시하지도 않았던 민주제도를 홍콩에 대거 도입하고 바로 떠난 것이다. 즉 그들은 후반부에 홍콩을 중국에게 돌려주고 싶지 않았던 영국이 중국을 엿먹이기 위해 서구식 민주제도를 대거 도입하고 떠난 것을 가지고, 마치 영국이 통치했을 때는 민주주의가 보장되었던 나라인 것 처럼 잘못 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당연히 여기에는 서구식 민주주의 제도 즉 미국의 네오콘식 사고방식 우월하다는 반공주의적 환상이 작용하기도 한다.

그리고 홍콩이 경제 발달을 하게 된 계기는 영국지배가 아니라 1980년대 중국의 개혁개방 이후 홍콩을 통해 중국투자가 활성화되면서부터 이다. 그때부터 홍콩에 중국으로 가려는 자금이 들어오면서 홍콩이 번영을 누리게 되었다. 그러니까 홍콩이 부유하게 된 것은 영국지배 탓이 아니라 중국의 개혁개방 탓이며, 2000년대 들어 상대적으로 빛을 잃은 것도 중국의 경제 발전 탓이다. 중국 자체의 개혁개방도가 심화됨에 따라서 굳이 해외자금은 굳이 홍콩으로 들어올 필요 없고, 중국 본토로 직접 가면 되기 때문이다.

홍콩경찰의 폭력적이고 야만적인 시위대 진압, 중국의 비민주적인 국가보안법은 당연히 인권적인 차원에서 비판을 받아야하겠지만, 한국에서 이런 비판을 하는 자들은 박근혜 정부시절 경찰의 폭력으로 백남기 노인이 사망한 사건에서 물타기를 하거나 한국의 국가보안법은 강하게 존치를 주장하는 자들이다. 이들은 홍콩문제에서는 국가보안법을 격렬히 반대하는 모습을 보이지만, 정작 홍콩 보안법 보다 더 오랜시간(1948년 대한민국 정부수립부터) 동안 한국 사회를 지배해오고, 죄없는 사람을 좌파, 빨갱이, 용공 민주화 이후에는 종북 딱지를 붙혀 사상적 탄압을 해온 국가보안법에 대해선 ‘자유‘, ‘민주‘, ‘안보‘라는 수식어를 사용하며 합리화하는 이율배반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렇게 홍콩 보안법에는 반대하면서 국가보안법에는 찬성하는 이들은 당연하게도 홍콩 시위가 극우반공적으로 흘러가고 있는 점에 전혀 비판의식이 없다. 특히나 서방과의 커낵션이 너무나도 뚜렸한 조슈아 웡을 마치 홍콩 시위의 전부인냥 내세우고 있다. 또한 2019년 12월 우크라이나 아조프 부대 출신들로 추정되는 네오나치들이 홍콩에 가서 시위를 지원했지만, 이것이 홍콩 시위를 대표하지 않는 것이라 해도 최소한 이들이 반중을 내세우며 홍콩 시위를 지지한 것에 대한 얘기는 전혀 나오지 않고 있다. 물론 홍콩 시위 자체를 무조건적으로 잘못됐다고 보는 것은 삼가야 겠지만 최소한 이러한 현상에 대한 비판의식이 없는 것은 당연히 비판의 대상이 될 수 밖에 없다.

또한 이들은 홍콩 시위 과정에서 중국공안이 시위대에게 저지른 폭력에 대해선 분노를 감추지 않지만, 2020년 미국에서 일어난 조지플로이드 사건에 대해선 오히려 인종차별적인 언어를 사용해 가면서까지 비하하고 폄하하고 있다. 이들은 마치 억울하게 죽은 조지 플로이드가 미국 경찰에게 죽은 것은 ˝깜둥이가 잘못한 것이다˝라는 논리를 앞세우고 있는 중이다.

종합하면 혐중세력은 홍콩문제에 대해 쥐뿔도 아는 것이 없으면서 포털이나 커뮤니티에 달린 몇몇 선동글을 읽고 중국 혐오에 열을 올리고 있고 최소한 중국측 입장이 어떤것인지는 1%조차 생각하지 않는 편파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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