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교양인에서 문제적 인간 시리즈 13번째 인물로 출간한 필립 쇼트의 마오쩌둥 평전 개정한 후기로 달린 글입니다. 필립 쇼트는 현재 마오쩌둥에 대한 서방학계의 평가를 분석했고, 주로 디쾨터를 비판이 주제로 삼은 듯 합니다. 디쾨터가 새로운 정보를 많이 참고한 건 사실이지만, 객관적인 학자라고 하기엔 무리가 있다고 보기에, 균형있는 독서와 지식추구를 위해선 이 글을 읽어볼 가치가 높습니다.)


프랭크 디쾨터는 지난 10년간 마오쩌둥과 중국 혁명에 관한 저술로 이 분야에 큰 영향을 끼친 연구자이다. 그는 수정주의 패러다임이 제시하는 두 논지, 즉 장제스는 괜찮은 지도자였으나 부당하게 비방을 당했다는 것, 그리고 마오와 그가 세운 전제정은 근본적으로 끔찍한 것이었다는 논지를 옹호한다. 디쾨터는 처음부터 자신의 색깔을 명확하게 드러냈다. 첫 번째 책은 《마오 이전의 중국: 개방의 시대》였고, 두 번째는 《해방의 비국: 중국 혁명의 역사》, 세 번째는 《마오의 대기근: 중국 참극의 역사》였다. 이 시리즈의 마지막 책, 《문화 대혁명: 중국 인민의 역사》는 2016년에 출판되었다. 디쾨터의 주장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장제스가 통치하던 시기의 중국은 ‘세계와 교류라는 측면에서 황금시대’였으며, 장제스가 마오의 군대에 패배한 것은 미국의 배신과 중국공산당에 대한 소련의 엄청난 원조가 주된 원인이었고 장제스 정부의 부정부패는 단지 미미한 원인이었다. 그리고 장제스 패배 이후 들어선 공산주의 체제 기반은 오직 “치밀하게 계산된 공포정치와 체계적인 폭력”뿐이었다. 마오가 집권한 후 첫 10년은 “20세기 역사에서 최악의 폭정의 하나였으며, 최소한 5백만 명 이상의 민간인들을 죽음으로 내몰고 그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을 불행하게 만들었다.” 두 번째 10년은 대약진운동과 문화혁명 시기였는데, 이 시기는 이전 시기보다 훨씬 더 비참했으며 결국 대학살로 정점을 찍었다. 디쾨터가 묘사했듯이, 마오는 “생의 끝자락에서 사적인 원한을 갚으려는 노인”처럼 중국을 지옥불로 밀어 넣었다.


디쾨터는 《마오》의 두 저자가 빠졌던 함정에 빠지지는 않았으나, 기본적인 생각은 그들과 같았다. 디쾨터의 책 《해방의 비극》은 1948년 린뱌오가 지휘하는 부대가 창춘을 5개월 동안 포위 공격했던 상황을 생생하게 묘사하면서 시작된다. 여기서 16만 명의 민간인이 아사한 것으로 디쾨터는 추정한다. 이 전투는 국공내전 중에 벌어진 가장 끔찍한 사건 가운데 하나였으며, 인민해방군 중령 장정룽이 쓴 《설백혈홍》에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설백혈홍》은 이 작전에 대한 공식 역사 기록에 의문을 제기하는 책 중 하나인데, 1980년대 후반 중국에서 짧게 나타났던 개방의 시기에 출판되었다. 그 당시 린뱌오는 포위 작전 중에 굶주림에 시달리던 창춘 주민들의 도시 탈출을 허락하지 않았다. 도시를 지키는 국민당 군대의 식량 공급에 추가로 압력을 가하려는 조치였다. 장제스는 국민당 수비대의 항복을 허락하지 않았으며, 그 부대에 어떤 일이 닥쳐도 상관없다는 태도를 보였다. 내전은 가장 끔찍한 전쟁이다. 정의상 거의 민간인과 군인의 구분을 지워버리기 때문이다. 창춘에서 벌어진 참상 덕분에 베이징을 비롯한 다른 도시들은 저항하지 않고 공산당 군대에 항복했다. 항복한 다른 도시의 주민들이 생존했다는 사실이 과연 창춘에서 희생된 주민들의 고통을 정당화할 수 있을까? 이와 비슷한 질문들이 제2차 세계대전 중 드레스덴이나 도쿄에 가해진 연합군의 소이탄 폭격, 그리고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된 원자폭탄과 관련해 종종 제기된다. 이런 공격 덕분에 전쟁이 일찍 종결된 것이 아닐까? 아니면, 이런 공격은 불필요했던가? 사람들의 의견은 분분하다. 마찬가지로, 창춘의 민간인 사망에 가장 책임이 큰 사람은 누구인가? 국민당 군대의 사병들을 먹이려고 민간인들을 굶긴 국민당 장군들인가? 항복을 금지한 장제스인가? 아니면, 민간인들이 도시를 떠나지 못하도록 한 공산당 군대인가? 양편 모두에게 어느 정도 책임이 있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디쾨터는 이런 문제도, 맥락도 언급하지 않는다. 1920년대부터 중국은 계속해서 전쟁을 치렀다. 1930년대에 장제스는 일본군의 진격을 막기 위해 황하의 거대한 제방을 일부러 파괴했다. 그때 죽은 사람 수가 50만 명이 넘었으며 또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굶주림에 시달렸다. 일본과 전쟁 기간 중에 사망한 중국인은 최대 2천만 명으로 추산된다. 일본군은 융단폭격을 퍼부었으며, 공산당 유격대가 시골에서 아무런 지원도 얻지 못하게 하려고 “모두 죽이고, 모두 불태우고, 모두 약탈한다”는 정책을 실시했다. 창춘에서 벌어진 잔학 행위는 단순히, 또는 주로, 인간 생명에 대한 마오의 무자비하고 무관심한 태도를 보여준 일이라고 할 수 없다. 이것은 한 세기 전 아편전쟁과 함께 시작된 일련의 유혈 사태 가운데 한 차례의 참사였다. 더 긴 관점에서 본다면, 이 사건은 중국 역사를 통틀어 자주 일어난 내전, 왕조 간 전쟁, 반란들 가운데 한 차례의 참사였다고 할 수 있다.


이전에 닫혀 있던 중구 각 지방의 문서보관소들을 활용했다는 점에서 디쾨터의 연구 작업은 특히 가치가 있다. 그런 문서보관소에는 지방 관리들이 중앙에서 내려보낸 지령에 어떻게 반응했는지를 보여주는 흥미로운 자료들이 보관되어 있다. 그리고 많은 경우에 중앙에서 내려온 지령문의 복사본도 보관되어 있는데, 해당 문건의 원본은 베이징 중앙 문서보관소에서 여전히 비공개 상태로 있다. 하지만 디쾨터가 발췌해 인용한 글은 대부분 길이가 매우 짧다. 따라서 《해방의 비극》과 《마오의 대기근》 내용 가운데 일부는 세심하게 읽어야 하며, 정확한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 문장 하나하나를 자세히 분석해야 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문건은 대부분 지방 관리들이 저지른 월권행위를 자세히 다루는데, 나중에 당이 조사하고 처벌한 것들이다. 하지만 이 점이 항상 불분명하게 서술되어 있다. 예를 들면, 《해방의 비극》에서 디쾨터는 안후이성 서부 지역에서 진행된 토지 개혁에 관해 덩샤오핑이 보고한 내용을 인용하는데, 지방의 당 지도부가 농민들이 고발한 지주와 그의 친척들을 사형시키는 경우가 끝도 없이 늘어나는 상황이 묘사되어 있다. 그러나 덩샤오핑이 이런 무차별적 사형 조치를 찬성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비난했다는 사실은 마지막 문장에 가서야 분명해진다.


당혹스러운 실수들도 보인다. 디쾨터는 1950년대 초 ‘진압 반혁명’ 운동 중에 마오쩌둥이 할당량을 지정하는 상황을 그리면서 “사형에 따른 사망률이 1천 명당 두 명에 도달하면, 그 다음에는 사람들에게 종신형을 선고해야 한다.”라는 마오의 말을 인용한다. 한편 중국인 역사가 양쿠이쑹은 동일한 문건을 이렇게 번역해 인용했다. “1천 명당 한 명의 비율을 초과해도 되지만 너무 많이 초과해서는 안 된다. 일반적으로, 1천 명당 두 명이라는 비율이 새로운 목표로 채택되어서는 안 된다. 이 범죄자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은 종신형에 처할 수 있다.” 이런 것을 괜한 트집 잡기라고 주장할 수도 있다. 아무리 훌륭한 책이라도 사실 관계 서술에서 실수는 나오게 마련이다. 그러나 디쾨터가 저지른 실수들을 살펴보면 희한하게도 일관성이 있다. 그 실수들은 모두 마오와 동료 지도자들을 비난하는 디쾨터 자신의 논거를 강화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마오쩌둥과 그가 세운 체제에 대한 일반인들의 인식이 형성되는 데 《마오의 대기근》보다 큰 영향을 끼친 것은 장룽과 핼리데이의 《마오》뿐이다. 《마오의 대기근》은 대규모 기아 사태의 참상, 농민들을 두려움에 떨게 한 지방 관리들의 잔인함, 재난 소식이 외부로 나가지 못하게 막은 강력한 통제, 그리고 마오쩌둥과 류사오치, 저우언라이등 당 지도부가 이런 재난이 불러온 고통에 적절히 대처할 준비가 전혀 안 되어 있었던 상황을 생생하게 그려냈다. 대기근 시기의 일상화된 참담함을 디쾨터는 훌륭하게 그려냈다. 이전 저술들과 마찬가지로 이 책도 인용문의 길이가 보통 대단히 짧았다. 이 결점은 그의 주요한 협력자인 저우쉰이 2012년에 펴낸 《중국의 대기근 1958~1962:문헌을 통해 본 역사》에서 일부 보충되었다. 여기서 저우쉰은 디쾨터가 지칭한 문건 가운데 상당수를 선택하여 긴 발췌문을 제공했다.


《마오의 대기근》의 가장 큰 문제점은 마오와 그의 동료들이 왜 그렇게 행동했는지 제대로 된 설명을 전혀 제시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왜 그들은 대중 동원이 풍요의 시대를 이끌 것이라고 믿었을까? 그들은 실제로 그렇게 믿었다. 마오는 모든 사람이 배불리 먹을 정도로 많은 곡물이 생산될 것이라고 믿었으며 그러고 나서도 엄청난 양의 곡물이 남을 것이라고 믿었다. 기근이 발생했다는 소식이 처음 전해졌을 때, 그들은 왜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을까? 왜 저우언라이는 기근의 심각성이 확실해진 뒤에도 피해를 줄이려는 노력을 전혀 하지 않았을까? 공산당 지도자들의 정책을 그저 “말도 안 되는 헛소리 망상에서 비롯된 변덕”이라고 일축하는 것은 이런 의문에 대한 답을 찾는 데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디쾨터는 공산당 지도자들이 “폭력을 찬미”했으며 “인간 생명에 대해 냉혹한 무관심”을 보였고, “사상자 수에 개의치 않고” 전쟁의 논리를 택했다고 주장했다. 이런 주장은 어느 정도 의심할 필요도 없이 옳다. 그러나 그가 이 책에서 제시한 사례 하나는 조금 다른 그림을 보여준다. 공산당 정치국의 원로 지도자였던 리셴넨은 온갖 고초를 겪은 강인한 인물이었다. 그는 대장정의 마지막 시기에 회족 기병대의 공격을 받아 자신이 이끌던 부대가 궤멸당하는 고초도 겪었다. 하지만 백만 명 이상이 굶어 죽은 허난성의 어느 현을 방문했을 때, 그는 슬픔이 북받쳐 그만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내가 이끌던 서로군의 패배는 지극히 잔혹한 일이었지만 그때도 나는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그런 나도 광산현에서 일어난 참상을 보고는 도저히 견딜 수 없었다.”


디쾨터는 “이러한 죽음들이, 부실하게 집행된 어설픈 경제 계획의 의도치 않은 결과라는 견해가 널리 퍼져 있다.”라고 소개하면서 이 견해가 옳지 않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디쾨터 자신이 인용한 문서 보관소의 문건들 대부분이 바로 이 견해가 정확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또 그는 “사실상 농촌 지역은 마치 문둥병자들이 사는 곳처럼 외부와 격리되었다.” “마오 주석에게 전달되는 정보는 모든 단계에서 왜곡되었다.”라고 서술하였다. 이 두 가지 진술 모두 당시 기록으로 확인된다. 시간이 지나 결국 농촌의 실상이 밖으로 알려졌고, 당 중앙은 조사조를 파견했으며, 정책은 바뀌었다.


《마오의 대기근》에 따르면 이 비극의 책임은 모두 “공포와 폭력이 기반”인 공산주의 체제에 있다. 하지만 이 책에 기록된 것과 같은 참상과 관료들이 자행한 고문은, 19세기 중국에 왔던 서양 선교사들이 남긴 기록, 중국의 봉건 왕조 시대에 작성된 형벌에 관한 문헌들, 국민당이 통치하던 시기의 기록에서도 발견된다. 시어도어 화이트(Theodore White)는 1941년부터 1943년 사이에 발생한 허난성 기근에 관해 썼다. 이때 농민이 약 3백만 명 정도 사망한 것으로 추정 되는데, 이것은 대약진 운동 시기에 허난성에서 발생한 사망자 수와 어느 정도 비슷하다. 이곳을 마오가 방문했을 때, 지역 국민당 간부들이 연회를 열어 대접해주었는데, “닭고기, 소고기, 남방개, 설당을 입힌 세 종류의 떡”이 나왔다고 한다. 그러나 농촌 지역에 나가 보니 전혀 다른 광경이 눈앞에 펼쳐졌다고 한다.


“우리가 보는 앞에서 농민들이 죽어 가고 있었다. 길가에서, 산속에서, 기차역 옆에서, 자신의 진흙집에서 그리고 논밭에서 죽어 갔다. 그런 와중에 정부는 마지막까지 한 푼이라도 더 세금을 뜯어내려 했다. 어떤 항변도 통하지 않았다. 먹을 것이 없어 느릅나무 껍질을 벗겨 먹던 농민도 종자로 쓰려고 마지막까지 남겨놓았던 곡물을 세금징수원 사무실에 갖다 바치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허난성 기근 소식을 충칭의 어느 신문사가 보도했을 때, 장제스 정부가 생각해낸 유일한 대응책은 해당 신문사에 3일간 업무 정지 명령을 내리는 것이었다. 2년 뒤 일본이 일명 ‘일호 작전’을 개시할 즈음에는 허난성 주민들이 장제스 정권을 그야말로 맹렬히 증오하고 있었다. 주민들은 외국 침략군에 맞서 중국인을 보호한다는 국민당 군대를 공격해 병사들의 무기와 식량을 탈취하고 장교들을 살해했다. 이런 경험이 있었기에 수억 명에 이르는 중국인들이 디쾨터가 ‘해방의 비극’이라고 부르는 상황을 환영했던 것이다. 이전에 경험한 것에 비하면, 공산당 통치는 그리 나쁘게 보이지 않았다. 중국인 소설가 류전윈은 전쟁 중 허난성에서 발생한 기근을 다룬 소설을 썼는데, 그 작품을 원작으로 삼아 에이드리언 브로디와 팀 로빈스가 출연한 영화가 만들어졌다. 류전윈은 기근을 겪고 살아남은 자신의 할머니에게 그 시절과 관련해 무엇을 기억하는지 물었다. 할머니는 자세한 답을 주지 않았다. “그해에 뭐 특별한 게 있었나? 사람들은 언제나 굶어 죽었는걸.” 공산당이 집권하기 전, 장제스가 중국을 통치하던 시기를 ‘황금기’라 부르기도 하는데 ‘황금기’에 관해서는 이쯤에서 그만 살펴보기로 한다.


대약진 운동 기간 중 공산당 간부들은 주민들에게 야만적인 처벌을 가했다. 하지만 그들이 새롭게 무엇인가를 발명해낸 것은 아니다. 시체 먹기, 인육을 먹는 풍습, 여자와 어린아이를 내다 파는 행위, 이 모든 것이 다 예전부터 있었다. 물론 그런 일들이 1950년대와 1960년대까지 지속되었다는 사실은 마오 정권의 엄청난 수치다. 그러나 마치 공산당이 그런 행위들을 창조한 것처럼 주장하는 것은 더없이 어리석은 일이다.


디쾨터가 보기에 마오쩌둥은 겉으로 “국민의 복지를 걱정하는 자애로운 지도자”인 척하는 폭군이었으며 그러는 동안 “중국은 지옥으로 떨어졌다.” 디쾨터는 1959년 3월 25일 상하이에서 마오가 최고위급 지도자들과 회의하는 도중에 한 발언이 명백한 증거라고 보았다. 회의에서 마오는 먼저 곡물 생산량이 지난 1년 동안 “엄청나게 증가했음”을 확인한 다음. 동료들에게 이 풍성한 수확량의 1/3을 징발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이전까지 1/4을 징발하던 것보다 늘린 것이다. 그러고 나서 마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먹을 것이 충분하지 않으면 사람들은 굶어 죽는다. 인민 절반이 배를 채울 수 있도록 나머지 절반은 죽도록 놔두는 것이 낫다.” 디쾨터는 이 구절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여, 마오가 대약진운동이 확실히 완수될 수 있도록 중국 인구의 절반을 굶어 죽게 내버려둘 준비가 되어 있었다고 주장한다.


당시에 마오의 발언을 모두 정확히 기록한 문건을 보지 않더라도, 디쾨터의 주장을 의심할 만한 이유는 충분하다. 먼저, 만일 모든 지도자들이 풍성한 수확을 확신했다면 왜 마오나 다른 누군가가 광범위한 기근이 발생할지 모른다고 예상했던 것일까? 다음으로, 마오의 발언이 포함된 원래 문건의 일부를 저우쉰이 자신의 책에 실었는데, 그것을 보면 디쾨터의 주장과 달리 마오의 발언은 농업에 관한 연설이 아니라 공업 관련 토론 도중에 갑자기 나온 것이었다. 저우쉰이 인용한 바에 따르면, 마오는 공업 투자는 반드시 목표를 정해야 하고 정밀해야 한다면서 그 이유는 “자원을 고루 배분하면 대약진운동을 그르치게 될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런 다음에 마오는 비교 삼아 예를 들었는데, 그 예가 바로 기근 때 다른 사람들이 살아남으려면 “절반의 사람들이 죽는 것”을 허용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마오의 정신은 종종 옆길로 샜다. 불합리한 추론을 낳을 수도 있는 문제의 발언을 논리적으로 설명해보면, 마오는 공업 프로젝트 가운데 어떤 것들은 지원을 끊어야 다른 사업이 진행될 수 있다는 주장을 입증하기 위해 이전에 있었던 곡물 수확에 관한 토론에서 이런 비유적 표현을 끌어온 것이었다. 지금 우리는 바로 이것이 실제로 마오가 뜻한 바였음을 알고 있다.


디쾨터의 책이 나온 이후 당시의 토론이 어떠했는지를 보여주는 정확한 중국어 기록 전문이 입수되었고, 그 기록을 보면 마오는 위의 발언에 앞서 이런 말을 했다. “우리가 계획을 완수하기를 바란다면 프로젝트의 수를 크게 줄여야 한다. 주요 프로젝트가 1,078개가 있는데 이를 500개로 단호히 줄여야 한다.” 흥미롭게도 이 구절은 디쾨터와 저우쉰의 서술에서 누락되어 있다. 더 면밀히 살펴보면, 마오가 당시 곡물 징발량을 대폭 늘리라고 지시했다는 디쾨터의 주장 역시 근거가 없다. 당시 겨울에서 초봄까지 다른 모든 기록된 마오의 발언들을 살펴보면, 농민에게 가하는 압력을 ‘덜고’ 불필요한 고통을 ‘피하는’것이 중요하다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바로 전년도 11월에 마오는 대중 동원이 절제되지 않으면 “반드시 중국 인구의 절반이 죽을 것”이라면서 위의 발언과 놀랍도록 비슷한 표현을 써서 경고했다. 이 경고를 했던 연설에서 마오는 마지막으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사망자가 안 생기도록 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라”


상하이에서 마오가 한 말이 곧바로 유출되면서 그 내용을 알게 된 일부 성 지도자들과 기층 간부들이 어떤 투쟁에서든 사망자가 생기게 마련이며 이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했다는 것은 사실이다. 마오의 발언 내용은 원래 ‘극비’로 지정되어 30여 명의 회의 참석자에게 문건의 형태로 배포되었는데 해당 문건에는 “회의가 끝난 뒤 반환할 것”이라고 적혀 있었다. 한편 당시에 마오가 어처구니없는 자기기만에 빠져 있었으며, 마오 자신이 ‘우경 기회주의’를 통렬히 비판한 것이 뒤이어 발생한 도를 넘는 행위들과 무관하다고 착각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오가 대규모 기아 사태의 가능성을 용인하거나 환영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기아로 가장 큰 고통을 겪은 지역에서 나온 증거를 포함해 입수 가능한 모든 증거들은 이와 정반대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제까지 나는 장룽 핼리데이의 《마오》와 프랑크 디쾨터의 저술들, 특히 《마오의 대기근》에 대해 상당히 길게 서술했다. 그 이유는 이 책들이 이례적으로 큰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다. 어쩌면 두 저술을 하나로 묶어서 다루는 것은 부당할지 모르겠다. 디쾨터의 저술에는 새로운 정보가 많이 담겼으나, 《마오》는 근본적으로 반론이 목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두 책은 공통점이 있다. 두 책 모두 서술 대상으로 삼은 시대에 대한 균형 잡힌 해설을 제공하기보다, 그 시대를 기소하는 데 필요한 논지를 제공하기 위해 시작되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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