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냐의 깃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소냉전이 시작되면서 또 다른 운동이 발발했다. 그 운동은 주로 19세기 식민지 지배를 받던 나라들에서 발생했는데, 이것을 통틀어 제3세계 운동이라고도 표현한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영국과 프랑스는 전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는 제3세계 운동에 직면했는데, 영국의 경우에는 말레이시아에서 가장 격렬하게 일어났고, 프랑스의 경우에는 베트남을 포함한 인도차이나와 알제리에서 강력한 저항이 발생했다. 특히나 인도차이나의 경우 1946년에 독립전쟁이 발발했으며,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를 통해 프랑스의 식민지 지배가 종결됐고, 알제리에서는 1954년부터 1962년까지 독립전쟁이 전개되어 프랑스의 식민지 지배가 종결됐다.


당시 영국도 곳곳에서 독립운동이 발생했다. 인도에서는 간디와 네루가 이끄는 민족운동이, 버마에서는 아웅산을 중심으로 한 독립운동이 벌어졌으며, 말레이시아에서는 좌파 게릴라들이 무장봉기를 일으켜 영국의 식민 지배에 저항했다. 이러한 반영투쟁은 아프리카에서도 일어났다. 대표적으로 이집트의 가말 압델 나세르 또한 영국에 맞서 반영투쟁을 전개했으며, 이집트 또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독립국가로 등극했다. 아프리카에서는 이른바 영국령 케냐에서 격렬한 저항이 일어났는데, 오늘은 케냐의 마우마우단 봉기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아프리카 동쪽 중앙 끝자락에 있는 나라인 케냐는 수십 개의 부족으로 이루어진 사회였다. 반투어를 사용하는 키쿠유족과 타베타족, 키쿠유족 그리고 마사이족 등 무수히 많은 아프리카의 부족들이 현재 케냐에 거주하고 있었으며, 이들은 부족 단위로 전쟁 및 분쟁을 겪었다. 19세기 후반에 들어서 케냐는 영국의 식민 지배를 받게 됐다. 1884년 독일 베를린에서 열린 회담으로 케냐는 영국의 보호령이 되었고, 1890년에는 영국의 동아프리카 회사가 내륙진출을 개시했다. 세계사를 들어본 사람이라면, 영국의 동인도 회사를 생각하면 이해가 빠를지도 모르겠다. 영국의 이러한 식민지 지배는 20세기 초중반까지도 지속되었으며, 이 기간에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당시 아프리카인들은 영국 및 프랑스의 식민지 지배로 인해 강제로 징집당했다. 징집당한 아프리카인들은 백인 지배자들에 의해 차별과 멸시에 시달렸었다. 물론 영국의 지배를 받는 케냐인들은 당연히 악랄한 착취와 폭압에 직면했었다. 케냐를 지배하던 영국의 입장은 아래의 인용문으로 요약이 된다. 아래의 인용문은 케냐에 파견된 청년장교 마이너차겐 대위가 델라메어 경을 만나서 직접 본 것을 글로 쓴 것이다.


“그는 동아프리카의 장래에 관해, “나는 당신들 모두에게 이 나라가 백인의 나라임을 입증해 보이겠소.”라고 말했다. 나는 공손하게 “이곳 흑인들의 나라입니다. 어떻게 흑인 위에 백인이 군림할 수 있단 말입니까?”라고 했다. 델라메어는 성미가 급한 사람이었다. 그는 성가신 듯 “흑인들은 협력을 통해 혜택을 볼 겁니다.”라고 내뱉었다.”


이 인용문에서 표현된 것과 같이 당시 흑인들은 백인들에게 사람이 아니었다. 1900년대 초 케냐를 지배하던 영국인들은 자기 것도 아닌 땅을 차지했을 뿐만 아니라, 이 땅에 사는 아프리카인들은 노예처럼 부려먹고 착취했다. 그리고 이러한 폭압적인 통치는 케냐인들의 경제적인 반란과 봉기를 불러왔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케냐인들은 정치적 발언을 얻고자 애썼지만, 아프리카인들의 지휘는 전혀 상승되지 않았다. 그리고 당시 영국인들은 케냐인들에게 기독교적 교리를 강조했지만, 이는 당시 케냐 사람들이 글을 읽고 쓸 줄 모른다는 점에서 민낯이 드러난다. 이에 따라 1921년 케냐에서는 청년 키구유회(Young Kikuyu Association)라는 조직에 의해 정치활동이 시작되었으며, 이 단체는 1920년대와 1930년대에 “도둑 맞은 땅”에 관한 불만을 토로했다. 청년 키구유회는 강제적 흑인 노동자 등록제도, 저임금 고착취, 흑인의 커피 재배 금지, 식민지 의회에서의 아프리카인 차별 등을 문제 삼았다.

(조모 케냐타, 케냐의 독립운동을 이끈 독립운동가이자 초대 대통령으로 현재 케냐에서 국부로 존경받고 있는 인물이다.)


영국령 케냐에서는 조모 케냐타라는 독립운동가가 존재했다. 그는 1893년 나이로비 외곽의 어떤 부족 보류지에서 태어났으며, 미션스쿨에서 교육받았다. 그는 나이로비에서 사무원, 신문 편집인 등의 경력을 쌓은 후 1925년에 청년 키구유회를 계승한 키구유 중앙회(KCA)에 가입했으며, 1928년에는 사무총장이 됐다. 1년 후 케냐타는 영국 공산당에 가입했으며, 스탈린 집권 하의 소련을 여행했다. 그는 영국으로 가서 런던 경제대학원에서 인류학을 전공한 뒤에 학위를 받았으며,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인 1946년 케냐로 귀국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후에도 영국의 케냐 식민지배는 지속됐다. 키구유 중앙회는 이미 영국 식민지 지배 하에서 불법화된 상태였으며, 케냐타는 독립운동 조직을 재건하기 위해 케냐 아프리카 동맹(Kenya African Union)이라는 정당을 창설하여 1947년에 당수가 됐다. 이에 따라 이 정당을 중심으로 하는 이른바 마우마우단 운동(Mau Mau Movement)도 이렇게 시작됐다.


당시 마우마우단은 영국의 지배하에서 여러 활동 및 무장 테러활동 및 봉기활동도 전개했는데, 당연히 영국 당국은 이에 대해 테러라고 비난하기 바빴다. 1950년 들어서 영국 정부는 마우마우단을 사악한 테러 단체로 규정하며 마우마우단 인사들을 기소하기도 했었다. 케냐의 마우마우단은 1950년에 이르러 지하 대중운동 조직으로 변모했으며, 마우마우단 본부는 각 지방에 조직요원을 파견하여 신규단원을 모집했고, 세포조직을 만들었다. 마우마우단이 케냐의 아프리카인들에게 지지를 받을 수 있었던 이유에는 당시 토지문제가 있었다. 아래는 나이로비의 입법회의 의원 마투가 1951년 어떤 회의에서 한 말이다.

(마우마우단의 게릴라 무장 병력)


“토지는 아프리카인에게는 모든 것을 의미한다. 아프리카인은 장사를 해서 살 수도 없고 임금을 받아 살 수도 없다. 우리는 땅으로 돌아가야 한다. 도둑맞은 땅을 되찾아야 한다. 신은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실 것이다. 왜냐하면 땅은 신이 우리에게 주신 것이기 때문이다.”


1952년에 들어서 마우마우단은 보다 무장력을 갖춘 조직이 됐다. 당시 기준으로 최소 400~800정의 근대식 총기를 보유하고 있었고, 그해 초부터는 아프리카인 공무원들의 주택과 일부 백인 농민들의 밭을 불태우는 행위도 착수했다. 백인 지배자들을 살해하기도 했다. 케냐에서 마우마우단의 활동이 활발히 전개되자 영국 정부는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영국군 병력을 이집트로부터 공수했으며, 순양함 1척까지 케냐 몸바사 항에 진입시켰다. 그리고 마우마우단의 지도자 케냐타와 그의 추종자 182명을 체포했다. 당시 영국의 베어링 총독은 비상사태를 선포하면서 다음과 같이 호소했는데, 이 비상사태 선포문에는 영국의 지배가 얼마나 무지했는지를 반증한다.


“평화와 질서가 유지된다면, 케냐의 앞에는 모든 종족의 생활수준이 향상될 밝은 미래가 열릴 것이다. 지금껏 이 나라의 경제발전, 특히 가난한 주민들을 돕기 위한 계획이 작성되고 있었다. 예컨대 아프리카인들을 위한 주택건설 아프리카인의 교육 확대, 그리고 아프리카인 공무원의 처우개선 등이 촉진될 밝은 희망이 있었다. 만일 무질서한 상태가 계속된다면, 이 모든 것이 실현될 수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우마우단은 여전히 독립운동을 전개했고, 비상사태 선포 2주 후에 마우마우단은 백인농장주 1명과 아프리카인 하인 2명을 살해했다. 그리고 11월 말에는 백인 해군 퇴역장교 1명을 죽였으며, 그의 부인에게 중상을 입혔다. 결국 지도부의 체포에도 불구하고 영국 식민지 당국은 봉기를 분쇄하지 못했다. 이후에도 마우마우단은 세력을 확장하여 영국의 공군력까지 동원되기에 이르렀다. 마우마우단은 점차 게릴라조직으로 변모하여 1954년에는 키쿠유 지역에서 게릴라전을 전개했다. 1953년 말까지 영국이 지원하는 병력 규모가 1만 명을 넘어섰고, 경찰력도 7,000명에서 1만 5,000명으로 증가했으며, 자경단 수가 2만에 달했다. 1953년 말까지 영국 정부는 마우마우단 단원 3,000명 이상을 사살하고 1,000명 이상을 생포했다고 발표했지만, 마우마우단의 세력을 약화시키지는 못했다.

(마우마우단원으로 의심되는 케냐인을 체포 및 수색하는 영국군)


당시 영국은 자신들에게 충성하는 일부 부족들을 내세웠고, 이들을 토대로 경찰력을 구성하기도 했다. 1955년 1월 영국측은 대략 1개 사단을 동원하여 마우마우단을 소탕하기 위한 해머작전을 게시했다. 대략 2개월 동안 400명 이상의 마우마우단을 살해 및 생포했다. 1955년 말경부터는 이른바 특수부대를 보내 마우마우단 지역 게릴라 2,000명을 추적하였으며, 이 추적 작전은 당시 마우마우단 게릴라를 지휘한 키마티가 생포됨으로써 1956년 10월에 종결됐다. 키마티는 나중에 처형됐다. 키마티가 생포되며 마우마우단의 저항은 사실상 종결됐다. 전쟁 기간 영국과 친영 정부군 측은 마우마우단 1만 1,000명 이상을 살해하고, 2만 5,000을 생포했다. 당시 영국 측 피해는 대다수가 현지 케냐인들이었지만, 수백 명 정도였다고 한다.


영국의 학살은 극심했다. 당시 영국은 군대를 투입해 마우마우단 관련자는 물론 그 주축을 이루는 키쿠유족을 학살했다. 케냐 국가인권위원회의 자료를 보면, 영국이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무력 개입한 1952년 이후 10년 동안 9만여 명의 케냐인이 영국 군대에 의해 숨졌고, 16만여 명이 수용시설에 감금됐다고 한다. 이것만 보더라도 신사의 나라 영국이 얼마나 끔찍한 학살을 벌였는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반면에 전쟁 기간 동안 마우마우단에 의해 살해된 영국 협력자들은 1,800명이 죽고, 백인 정착민 32명이 사망했다. 당시 영국은 무시무시한 강제 수용소를 운영했다. 남색, 거세, 전기충격, 물고문, 심리적 고통 가하기, 개를 이용한 고문 등이 영국 식민지 지배 하의 수용소에서 행해졌다. 따라서 1950년대 영국의 케냐 지배는 여전히 폭력과 인권유린이 판을 쳤던 것이다.

(마우마우단 운동을 기념하는 기념물, 현재 케냐에 있다.)


비록 케냐타와 그의 참모들은 구금되었고, 이후 석방되어 가택연금 상태에 놓였지만, 1961년에 이르러 정부는 케냐타를 완전히 복권했다. 그로부터 2년 뒤인 1963년 케냐는 공화국이 됐고, 케냐타가 케냐의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대다수의 케냐인들은 케냐타가 주도한 마우마우단 운동에 대해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마우마우단 운동이 영국 제국주의의 식민지배로부터 해방시켰다고 진심으로 믿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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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dvs117 2023-06-29 21: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계사 교과서에는 이런 내용이 하나도 안 나오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