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성룡 - 설득과 통합의 리더
이덕일 지음 / 역사의아침(위즈덤하우스) / 2007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작년인가? 공유사이트에서 "디스트릭트 9"이라는 영화를 다운받아서 봤다. 머리가 복잡해서 아무 생각없이 SF 영화를 보고 머리나 식히자는 생각에 영화를 검색했다. 그러다가 디스트릭트 9이라는 영화를 발견하게 되었는데 개봉한지 한참 지난 영화였고, 포스터도 그렇게 호기심을 자극하는 편이 아닌지라 그다지 기대를 하지 않고 스킵 신공으로 봐야겠다면서 다운을 받았다. 그런데 실수를 했다. 이 영화는 그렇게 볼 수 있는 영화가 아니었다. 영화의 내용이야 스포일러가 될 것 같아서 자세히 적지 않겠지만 이 영화는 SF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SF가 아닌 인간 사회를 고발하는 영화다. 외계인이라는 특별한 생명체를 디스트릭트 9에 몰아 넣고 접촉을 금하는 모습에서 가장 먼저 독일의 게토가 연상이 된다. 비단 독일의 게토뿐이겠는가? 인류 역사상 인종에 따라서, 국가에 따라서, 출신 지역에 따라서, 혹은 건강의 유무에 따라서 편가르고 상대방을 박멸해야할 해충 정도로 여기게 만들 것이 한두번인가? 그러면서도 입으로는 통합과 설득의 리더십을 자처하며 국민들을 기만하는 독재자들 또한 한둘이던가?

 

  남의 나라 이야기만이 아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21세기의 대한민국 또한 설득과 통합의 리더십을 내세우면서 실제로는 억압과 갈등, 분열을 통치 기술로 삼고 있지 않는가? 좌와 우를 나누고, 꼴통 보수와 종북 좌파를 나누고, 색깔 논쟁을 벌이며, 영호남을 나눈다. 영남은 절라디언을 외치고, 호남은 경상도 문딩이를 외친다. 어버이 연합은 어린 노무자식들이 싸가지 없다면서 까스통을 들고, 젊은이들은 "미친 노친네들"이라면서 까스통 할배를 비난한다. 언론은 이런 갈등을 부추기고 있으며, 정부는 소통하겠노라 고개를 숙이면서도 명박산성을 쌓는다. 그리고 촛불을 든 사람들을 자기 똘마니들을 시켜서(영(등)포라인, 불법 사찰을 피하려면 이정도쯤의 자기 검열은 필요합니다. ㅎㅎ) 사찰하고 고소한다. *찰과 *원은 충실하게 고소하는대로 다 받아 준다. 갈등은 키우고 설득은 포기하면서 나누어 지배하라는 원칙에 충실하다.

 

  이덕일의 책은 재미있다. 왜 재미있는가? 첫째는 그의 글솜씨가 대중이 읽기에 편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좋은 내용이라도 학자들처럼 딱딱하게 써버리면 읽기도 전에 질려 버릴텐데 이덕일의 글은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매력이 있다. 둘째 그의 사관은 참신하다. 모든 사람이 A라고 말할 때 과연 A일까 이렇게 보면 B일 수도 있지 않은가라면서 의문을 제기한다. 카더라는 의문이 아니라 사료에 근거해서 하나하나 논리를 쌓아가는 의문이기 때문에 쉽게 무시할 수 없는 힘이 있다. 셋째 그의 글은 과거를 통하여 현재를 말하기 때문이다. 거창하게 카의 이야기까지 거슬러 올라가지 말자. 상식선에서 생각해 보자. 과거를 통해서 현재를 진단하고 해답을 내리는 것이 과거를 공부하는 이유이다. 이덕일은 여기에 충실하다. 그렇다고 아마추어처럼, 혹은 시사 평론가처럼 오늘날의 상황을 잔득 늘어 놓고 과거가 어떻고 하지 않는다. 그냥 과거의 이야기들을 풀어 놓으면서 논평할 뿐이다. 그렇지만 그 안에 오늘의 현실이 숨겨있다. 조금만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무슨 말을 하는지 쉽게 알아낼 수 있다.

 

  "유성룡(설득과 통합의 리더)"라는 제목대로 유성룡의 리더십에 대해서 다루고 있다. 유성룡의 시대는 조선에게 매우 불운했던 시기이다. 오로지 자기 살길만 챙기는 선조(이덕일은 선조에게 매우 야박한 평가를 내린다.), 치열한 당쟁, 기득권을 놓치지 않으려는 양반층, 변방을 떠도는 인재들, 급변하는 국제 정세! 결국 명과 조선, 일본이라는 동아시아의 삼국을 전쟁의 소용돌이로 몰아넣는 임진년이 밝았다. 국난에 직면해서 국가는 사분오열 편가르기가 심해진다. 전쟁 발발의 책임을 상대당파에 떠넘기는 것이 문제의 해결책이라도 되는것처럼 말이다. 종북장사처럼 강화파, 친왜(일)파 장사가 성행한다. 그 와중에도 집권층은 자기 기득권을 위해서라면 이순신이나 김덕령 같은 장수들도 팔아먹는다. 국제 정세는 정신없이 바뀌는데 눈감고 귀막고 자기 잘난 맛에 산다. 설령 국제 정세를 판단하는 눈이 있다고 하더라도 자기 당파에 불리하다면 사뿐히 무시한다.

 

  오늘날의 모습과 너무 닮아 있지 않은가? 설득과 통합은 가치 없는 것으로 전락하고 편가르기와 억압만이 존재한다. 상대방을 분열하여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자국민을 분열하여 지배하니 그 폐해가 얼마나 대단할 것이며, 오래 갈 것인가? 이덕일의 이 책을 읽어야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유성룡의 리더십은 설득과 통합이다. 이는 원칙과 유연함을 의미한다. 원칙이 없는 유연함은 야합이나 짬짜미가 된다. 오늘날 얼마나 많은 정치인들이 정치적인 기득권을 위해서 야합하고 헤쳐 모여를 반복하는가? 유연함이 없는 원칙은 상대방을 포용하기 보다는 박멸해야할 대상으로 보게 만든다. 종북, 빨갱이, 문딩이, 절라디언 등등 온갖 증오 섞인 말 속에는 상대방에 대한 포용성이라든가 유연함은 눈을 씻고 찾아볼래야 찾아볼 수가 없다. 오직 상대방에 대한 증오만이 가득하다.

 

  총선을 치렀다. 이젠 대선을 앞두고 있다. 통합과 설득을 말하고, 오직 자신만이 여기에 적합한 사람이라 말하는 대선후보들이 한 트럭이다. 그런데 말이다. 정말로 이들이 원칙과 유연함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가? 유연함은 절대적으로 부족하고 국가를 수익모델로 삼는 가카식의 원칙을 제외하고 정치의 원칙, 민주주의의 원칙을 가지고 있는 후보들을 찾아보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표를 위하여 편을 가르고, 갈등을 조장하고, 지역 감정을 부추긴다. 내편 아니면 적이라는 전투 의지를 사람들의 마음 속 깊이 각인시킨다. 누가 이러한 불행을 막을 것인가? 이 시대의 유성룡과 같은 이는 누가 될 것인가?

 

  문득 두렵다. 유성룡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이몽학이라도 나타날텐데. 함께(together)가 아니라 분리와 분열(to getto)로 가는 오늘날이 답답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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