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군 이야기 3 - 완결 시오노 나나미의 십자군 이야기 3
시오노 나나미 지음, 송태욱 옮김, 차용구 감수 / 문학동네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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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즘 신없는 사회가 유행이다. 과거에도 무신론에 대한 여러가지 서적들이 출간되었지만 요 몇년 새에 꽤 많은 책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만들어진 신을 비롯한 도킨스의 책들, 필 주커먼의 신없는 사회, 히친스의 신은 위대하지 않다, 밀스의 우주에는 신이 없다 등등. 여기에 칼 세이건 같은 과학자들의 책과 불가지론자들의 책을 더한다면 도저히 다 읽을 수 없을만큼 많은 책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한가지 특이한 사실은 무신론이 꽤 힘을 얻고 종교를 박멸하겠다(도킨스), 심지어는 신이 없는 사회가 더 도덕적(주커먼)이라는 말에 열광하는 사회는 미국 같은 매우 종교적인 나라라는 것이다. 아마 한국에서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생각한다. 종교성이 강한 기독교 국가에서 무신론의 전투력이 업그레이드 되는 이유가 무엇일까? 순전히 개인적인 생각이겠지만 종교에 대한 실망의 반사이익을 무신론이 얻고 있는 것이리라. 종교성이 강하다는 것은 대개 종교가 근본주의적인 포지션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고, 이런 근본주의적 성향의 종교는 세상을 타협의 대상이나 개혁의 대상이 아니라 정복의 대상으로 생각한다. 정복의 방식이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사랑이나 용서와 같은 성경의 가르침이 아니라 정치와 군사, 자본같은 세속적인 방식이라는 것이 문제다. 정복 행위가 신의 이름으로 행해지지만 그 어디에도 신의 자리는 없다. 있다면 오직 인간의 욕망을 적당하게 포장하는 포장지로서의 신의 이름만 있을 뿐이다.

 

  중세를 뒤흔든 십자군 전쟁은 참으로 묘한 전쟁이다.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서 일어난 백년 전쟁이 장장 백년을 끈 것만 해도 대단한데 십자군 전쟁은 1차부터 시작하여 7차까지 수세기를 끌어 온 전쟁이다. 거기에다 앙숙과도 같은 영국과 프랑스가 한 깃발 아래에서 전쟁을 했으며, 향후 유럽의 권력의 재편을 이끌어 왔으며, 수많은 영웅들의 이야기를 탄생시켰다. 동서양이 전쟁을 벌였지만 동시에 활발하게 접촉했던 계기가 되기도 했다. 동서양의 교류 면에서도, 향후 권력의 재편 과정에서도, 문학적인 면에서도 십자군 전쟁은 매우 중요한 전쟁이요, 새로운 창조를 이끌어 내기 위해 아픔을 겪는 혼돈의 시기였다.

 

  십자군 전쟁의 역사적 의의는 이정도 선에서 평가를 마무리하고, 재미있는 사실은 1차에서부터 7차까지 십자군 전쟁이라는 동일한 이름이 붙여졌지만 어느 순간인가부터 십자군의 의미가 전혀 달라진다는 것이다. 아마 그 분기점은 시오노 나나미가 지적했듯이 2차 십자군과 3차 십자군의 어느 지점쯤일 것으로 추정된다. 1차는 두말할 필요없이 성지회복이라는 기치를 내걸고 행하여진 종교적인 전쟁이다. 비록 신의 이름으로 전쟁이 벌어진 모순이 있기는 하지만 그 모순은 신에 대한 믿음으로 그렇게밖에 표현할 수 없는 중세 기사들의 한계에서 오는 것이지 그저 명분을 빌려 온 것이 아니다. 여러가지 요인이 있겠지만 그래서인지 몰라도 가장 순수하게, 그리고 가장 성공적으로 진행된 십자군을 뽑자면 나는 단연코 1차 십자군을 뽑을 것이다. 그렇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신의 이름은 어느덧 하나의 포장지로 전락해 버리고 만다. 3차 십자군에서부터는 그 어디에도 신에 대한 신앙심은 찾아볼 수 없고, 사자심오아 리처드와 살라딘 같은 양측의 걸출한 인물들만이 등장하고 있다. 신의 대리자를 자처하는 교황조차도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한다. 물론 예루살렘 회복에 대한 방법도 피를 흘려 회복해야 한다는 무력 일변도로 좁혀졌다.

 

  십자군 전쟁의 변질의 원인은 무엇인가? 미련하긴 했지만 순수했던, 그리고 다소 동서양의 문명의 접촉이라는 제한적이나마 순기능을 감당했던 십자군이 상대방을 박멸시키겠다는 극단주의로, 혹은 정적 제거를 위한 하나의 구실로 변질된 이유가 무엇인가? 간단하게 말하자면 신이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신이 사라져버린 십자군의 자리에 인간의 욕망만이 가득하다. 신의 이름으로 전쟁에 참여하기는 하지만 실상은 자기의 무용을 뽐내고 싶어하는 기사들, 왕권 강화를 위해 정적에게 십자군 참전을 요구하는 프랑스 왕, 자국의 이익을 위해서 같은 그리스도교를 공격하는 베네치아, 같은 이유로 십자군에 참여한 제노바, 피사! 십자군을 자기 권력 강화를 위한 명분으로 이용하는 살라딘 이하 술탄들! 이미 십자군 전쟁 속에는 기독교의 하나님도, 이스람의 알라도 없고 오직 신의 이름을 빌린 인간의 욕망만이 가득할 뿐이다.

 

  십자군 전쟁은 결국 교회에 대한 도전을 가져왔다.(이슬람에서도 동일한 일이 일어났겠지만 이족 역사는 잘 모르기에 생략한다.) 지금까지 중세를 지배했던 교회의 권력은 급속히 몰락해 버렸고, 이에 대한 대응책으로 교회는 마녀사냥과 이단재판같은 극단적인 방법을 사용하지만 그럴수록 교회의 권위는 더 급속하게 사라져 버렸다. 반대급부로 인간의 이성과 철학이 재발견되었고 르네상스의 시대로 점점 나아가게 된다. 십자군 전쟁까지 불사했던 교회의 근본주의 포지션이 인간의 욕망과 만났고, 나아가 교회의 본질에 대한 왜곡을 초래하게 되었다. 물론 이에 비례하여 무신론과 교회에 대한 조롱과 비난이 높아졌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몇 년전 시대착오적으로 십자군 운운하는 사람들을 보았다. 문제는 그 사람들이 일반인이 아니라 초강대국 미국의 대통령과 이를 지지하는 미국의 근본주의자들이었다는데 있다. 9.11테러 이후 이슬람에 대한 보복전을 십자군으로 묘사한 것이다. 미국 이슬람계의 비난으로 이틀만에 취소하기는 했지만 걱정이 사라지지 않는다. 아니나 다를까 이슬람에 대한 전쟁은 아프가니스탄에서부터 시작하여 이라크에 이르렀고, 종국에는 이란까지 불똥이 튈 것으로 보인다. 십자군 운운 취소 이후 부시 행정부는 정의로운 전쟁, 정당 전쟁으로 노선을 변경했지만 나나미가 책의 마지막에 지적한 대로 이 또한 신의 이름으로 빌린 인간의 욕망의 향연일 뿐이다. 신의 이름이 정의와 정당성이라는 부분으로 살짝 윤색만 되었을 뿐이지 인간의 욕망에 충실하다는 핵심은 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신 없는 사회를 꿈꾸는 세상 속에서 절대 악일수밖에 없는 전쟁에 정당성과 정의를 끌어다 붙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절대적으로 무의미한 일이라고 볼 수는 없다. 다만 인간의 욕망이 정의와 정당성이라는 명분을 뒤집어 쓰는 일은 매우 경계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는다면 십자군 전쟁과 같은 소모적이고 지극히 인간적인 전쟁이 다시 발발하게 될 것이며, 이는 인류에게 대재앙이 될것이 명백하다.

 

  마지막으로 나나미의 시각에 대한 태클을 걸자면 십자군의 어리석음을 조롱했던 그녀가 이상하리만치 베네치아에는 호의적이라는 점이다. 자기들의 욕망에 충실했다는 점에서 베네치아나 십자군이나 거기서 거기다. 오히려 십자군들의 어리석은 열정을 이용하여 자국에 반기를 든 도시국가를 정벌하고 콘스탄티노플을 공략하는 것은 비열하다 못해 저열한 짓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나미는 이런 베네치아의 행태에 대해 호의를 표하다 못해 칭송 직전까지 간다. 같은 이코노믹 애니멀이라고 명명되는 베네치아에 대한 일본인 나나미의 동질감 때문인지, 아니면 향후 일본이 나가야 할 방향이 베네치아처럼 거점을 중심으로 바다를 점령하는 해양대국, 곧 대일본 제국이라는 생각에서인지 모르겠다. 다만 만약 후자라면 나나미의 시각은 그녀가 그렇게도 조롱하던 십자군의 어리석음과 묘하게도 닮아 있다는 것은 본인은 알고 있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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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INY 2012-05-25 22: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면서도 우리나라 과학교과서에서는 진화론이 없어진다는 말이 있지 않나요? 저희 학교 생물 선생님 한분도 창조과학론자에요.

saint236 2012-05-25 23:51   좋아요 0 | URL
진화론도 하나의 론이기는 합니다. 물론 창조론보다는 합리적인 측면이 있지만 그 또한 상대적인 것이고요. 창조과학을 어떤 분은 사이비 과학으로 말하지만 저는 생각이 조금 다릅니다. 창조를 과학적인 측면에서 살펴보자는 것인데 아쉬운 점은 대부분의 주장이 진화론의 허점을 찌르는 데에서 멈추어 선다는 것이지요. 요즘 종교전쟁이라는 책을 보고 있는데 이 책의 결론이 창조든 과학이든 유일의 잣대가 되어버리는데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과학 교과서에서 진화론이 없어진다는 것은 개인적으로는 문제가 많다고 생각이 드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