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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단어 인문학 산책 - EBS 이택광의 어휘로 본 영미문화
이택광 지음 / 난장이 / 2010년 6월
평점 :
품절
중학교 때 비싼 돈을 들여가면서 영어 학원을 다녔다. 아직도 주변에서 볼 수 있는 윤선생 영어 교실이다. 당시 농사지으시던 일을 그만두시고 신학을 공부하셔서 개척교회 담임을 시작하신 아버지의 한달 월급이 20만원이었다. 그런데 내가 다니던 학원의 한달 비용이 10만원이다. 특별히 학원비를 내는 것은 아니고 교재비에 학원비가 모두 포함된 시스템이었는데, 한달에 5만원짜리 교재를 대략 2권 뗐다. "큰 일을 하려면 앞으로는 영어를 잘 해야 한다."는 아버지의 생각 때문에 촌구석에 살면서도 영어 학원을 다니기 시작했다. 당시 내 초등학교 동창은 무도 13명이었고 그 어떤 종류라도 학원을 다니는 사람은 나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없었다. 더 놀고 싶었지만 매일 매일 주어진 분량을 위해서 1시간에서 2시간을 오디오 앞에 붙어서 영어 테잎을 듣고 따라했었다.
그러다 고등학교에 갔다. 내심 영어에 자신이 있었던 나였는데 이런 젠장이다.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아무 것도 모르겠더라. 성문 기본 영어로 보충수업을 나가는데 아무 것도 모르겠고, 시내에서 학교를 다니던 다른 친구들은 아는데 나는 모른다는 사실이 못내 분해서 성문을 한 10번은 본 것 같다. 3년 동안의 영어와의 사투 끝에 수능에서 꽤 좋은 점수를 받았다. 그런데 말이다. 외국인을 만나면 입이 굳어지는 버릇은 여전하더라. 도대체 왜 그렇게 긴 시간동안 영어에 목숨을 걸었는지 모르겠다. 그나마 기억에 남는 것, 도움이 되는 것은 영어 성경을 본 것과 노인과 바다를 본 것, 팝송 몇 곡 정도이다. 영어를 말이 아니라 시험과목으로 배운 결과가 이렇게 처참하다.
고등학교 시절에 영단어를 외우기 위해서 봤던 단어집이 있다. 그 단어집 이름이 Vocabulary이다. 아는 사람은 다 아는, 한번쯤은 봤을 법한 단어집이다. 영단어의 어원을 밝히고 파생된 단어들을 명시하고 사용법을 가르쳐 주는 꽤 획기적인 단어집이었다. 아직도 그때 외운 단어들이 기억에 남는 것을 보면 말이다. 그런데 이 단어집 Vocabulary를 나와 친구들을 "붜케 불노리(부엌에 불노리)"라고 불렀다. 언어유희인 샘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문득 그런 생각을 해본다. 미국 사람들이나 영국 사람들이 Vocabulary를 붜케 불노리로 부르는 우리들의 유머를 이해할까? 아마도 "그게 왜 웃기냐? 발음이 잘못 됐따."라고 지적하지 않겠는가?
Vocabulary가 영국과 미국 사람들에게는 어휘라는 단어이지만 우리에게는 어휘라는 의미를 가진 영단어일 뿐 아니라 붜케 불노리라고 부를 수 있는 유희의 대상이다. 이것은 아무리 설명해도 한국 사람이 아닌 이상은 느낌이 오지 않는다. 이해는 되어도 웃기지는 않는다. 이게 문화다. 이택광씨는 이러한 영어 단어를 통하여 이러한 문화의 차이를 보여준다. 어떤 철학과 역사적인 배경에서 이 단어가 나왔는지, 어원은 무엇인지, 그리고 그 단어가 어떻게 사용되고 있는지 차근차근 설명한다. 쉽게 풀어 썼지만 담고 있는 내용들은 하나같이 만만치가 않다. 영어를 시험 과목이 아니라 말로 공부하고 싶은 사람은 한번쯤은 읽어볼만한 책이다. 인문 좌파를 위한 이론 가이드에 비한다면 같은 사람이 썼나 싶을 정도로 술술 잘 읽힌다.
이 책에 대한 총평은 "재미있다"이다.